* * *
하늘은 유난히 쾌청하고 공기는 서늘하다. 폴로를 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하얀 파라솔들이 만들어 낸 그늘에 모인 사람들은 수려하게 차려입고 있었으나 그다지 흥미를 끌 만한 요소는 없었다. 이런 행사에는 으레 비슷한 사람들이 모였기에 어차피 다들 고만고만한 얼굴들이었다.
요한이 폴로 경기를 구경하며 즐거웠던 적은 어머니 레일라 바네스와 함께 참석한 첫해뿐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레일라와 함께 폴로 경기를 본다고 들뜰 12살도 아니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억지로 웃고 떠드는 자리가 그리 즐겁지도 않았다.
“얘, 표정 좀 봐. 그렇게 싫은 티를 내면 어쩌니. 예쁘게 웃어야지.”
레일라가 뾰족한 팔꿈치로 요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마른 팔꿈치가 갈비뼈를 정확하게 찌르는 것이 꼭 날카로운 칼에라도 찔리는 것처럼 아파 요한은 요란하게 몸을 숙이며 끙끙 앓았다.
“변태도 아니고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웃어. 레일라, 살 빠졌어? 팔꿈치가 전보다 더 날카로워졌네.”
덩치도 작지 않은 남자가 자신보다 한참 작은 레일라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앓는 소리를 하는 게 썩 보기 좋지는 않을 터였으나, 레일라는 그저 웃고 말았다. 요한이 레일라의 등허리를 퍽 정중한 투로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데이트 코스가 좀 별로라고 생각하지 않아? 열두 살 때나 좋아하던 곳을 이 나이에 또 오는 건 좀 아니지.”
“요한, 폴로는 남녀노소 누구나 다 좋아하는 스포츠야.”
“레일라도 폴로 별로 안 좋아하잖아.”
얄미운 말을 하면서도 요한은 레일라가 또 뾰족한 팔꿈치를 들이밀까 걱정되었는지 그녀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탄산수 뚜껑을 따서 내밀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눈을 휘며 화사하게 웃는 낯으로.
누가 낳았는지 겉은 참 번드르르한데 하는 짓이 정말 얄미웠다. 레일라는 탄산수를 받아 들며 눈을 가늘게 뜨고 요한을 쏘아보았다.
“조용히 해, 요한. 여기서 난 폴로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아, 내가 무슨 말을 했었나? 나는 레일라만 있으면 돼. 폴로든 뭐든 레일라와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하지.”
요한은 얼핏 진심처럼 들리는 목소리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때마침 경기장에 선수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하여간 입만 살아서…….”
“쉿. 이제 시작하려나 봐.”
레일라가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요한이 그녀의 어깨를 은근히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운명의 장난 같은 게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이리라. 요한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열이 올라 뜨거운 눈을 세차게 문질렀다. 당연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눈앞의 장면이 바뀌지는 않는다.
초록이 선명한 잔디 위에 그림처럼 근사한 승마복을 입은 남자가 윤기가 흐르는 갈색 말을 타고 있었다. 그는 햇빛 아래에서 제 곁에 나란히 선 다른 남자들과 함께 웃으며 얘기를 나눈다.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남자, 셰어는 요한에게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일라, 저기 저 사람, 누군지 알아?”
늘 잘만 돌아가던 혀가 굳어 평소처럼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레일라는 요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 놀란 눈으로 그의 뺨을 매만졌다.
“얘, 너 어디 아프니?”
“아냐. 나 괜찮아. 근데 저 선수는 누구야? 못 보던 선수인데.”
이번에는 폴로 선수에 꽂힌 모양이다. 지레짐작한 레일라는 알 만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는 요한의 복잡하고 다난한 연애사를 판단하지 않았다. 어쩌면 요한의 그런 부분은 자신을 닮은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레일라는 퍽 관대한 얼굴로 요한이 바라보는 선수의 얼굴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못 보던 선수라면 찰스 베일리네.”
“찰스?”
낯선 이름이었다. 이름이 셰어가 아니었던가? 요한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베일리는 알지? 그 집안사람이야. 원래 폴로를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닌데 어쩐 일이래.”
베일리라면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요한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동부에서 의석을 제법 차지하고 있는 정치가 집안이었다. 서부에서야 정치보다는 경제 분야에서 베일리의 이름이 더 알려져 있지만 동부에서는 정재계 쪽으로 폭넓게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과연, 그런 배경이니 남자를 그렇게 갈아 치우며 놀아난 모양이다. 요한은 말 위에서 맬릿을 고쳐 쥐는 셰어를 노려보았다. 그의 옆에 나란히 말을 타고 선 선수가 장난처럼 맬릿을 휘둘러 셰어의 맬릿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셰어는 짙은 눈썹을 살풋 찌푸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놈들과도 뒹굴었을까? 셰어는 볼 때마다 남자가 바뀌었으니 그럴 법했다. 그가 그토록 환하게 웃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저 몸뿐인 관계가 아니라 더 깊은 사이일지도 모른다.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떻게 해도 태연한 표정을 가장할 수가 없었다.
“레일라, 나는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이제 곧 경기가 시작될 텐데 대체 어딜 간다는 거야?”
“잠깐이면 돼. 하프 타임 전에는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
레일라는 요한의 우중충한 낯빛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내 주었다. 요한은 자주 흐렸다 개었다 하긴 해도 단순한 편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금방 털고 웃는 얼굴로 돌아올 것이라 그녀는 믿었다.
한편 요한은 무작정 경기장이 보이지 않을 만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찰스 베일리인지, 셰어인지. 그 남자가 또 그렇게 화사한 얼굴로 남에게 방긋방긋 웃어 주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맬릿으로 상대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울컥 짜증이 치밀어 요한은 로마노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이사님.
“바이올렛은 어떻게 됐어?”
- 찾는 중입니다.
이전과 한 음절도 다르지 않은 답이 돌아왔다. 요한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헝클이며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꾹꾹 씹어뱉듯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마노프, 내가 바이올렛을 찾으라고 한 지가 언제지? 그런데 매번 똑같은 답만 하면 내 기분이 어떨까?”
- 하지만 이사님,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 이슈, 나도 안다니까? 근데 세상에는 여러 가지 루트가 있잖아. 우리가 꼭 올바른 길만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로마노프가 되물었다. 요한은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까지 해서 바이올렛을 만나야 하나?
어떻게든 바이올렛을 만나야 한다. 셰어에게 끌린 것도 다 바이올렛 때문이었으니, 바이올렛을 만나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바이올렛만 만나게 된다면 그토록 매정하고 헤픈 남자는 쉽게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얼기설기 엮어 낸 논리의 비약을 간단히 무시했다.
“그래, 반드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요한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요한과 눈이 마주치자 의미 있는 눈짓을 던지며 미소 지었다. 요한은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로마노프.”
- 예?
“나 그래도 이만하면 봐 줄 만하지?”
로마노프가 잠시 침묵했다. 요한은 나풀거리며 멀어져 가는 하얀 원피스 자락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마에 드리우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그림자마저 연출한 것처럼 완벽한 얼굴이 드러난다. 고뇌의 흔적이 묻어나는 찌푸린 미간과 꾹 다물린 입술은 얼핏 심술 난 아이 같기도 했고, 우울한 예술가 같기도 했다.
- 네…… 뭐…… 그렇습니다.
깊은 고심의 흔적이 엿보이는 답이 돌아왔다. 요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그렇지? 수고해.”
요한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셰어의 취향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대체 왜, 어디가 취향이 아니라는 거야.
요한은 그간 거쳐 간 연인들로부터 입만 열면 깬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기는 했으나, 속 편하게도 그 앞에 붙은 ‘얼굴은 참 마음에 드는데’라는 부분만을 기억했다. 본래 사람이 뭐든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느님도 안티가 까마득하게 많은 세상에서 굳이 듣기 싫은 말을 일일이 기억하는 것은 가학적인 취미였다. 물론 요한은 그런 취미가 없었다.
그가 편안해진 얼굴로 돌아왔을 때쯤에는 아직 경기가 한창이었다. 요한은 사람들 틈에서 얘기하느라 바쁜 레일라를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저 틈에 끌려갔다가는 아는 얼굴들과 인사를 하느라 경기가 끝난 후에도 붙잡혀 있어야 할 터였다.
레일라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적당히 술을 마시고 있자니 잔디 위의 셰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셰어는 제법 호전적인 포워드였다.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공에서 눈을 떼지 않는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요한은 정신없이 그가 달리는 것을 감상했다. 셰어는 승마에도 능숙한지, 말을 한 몸처럼 다루는 것이 꼭 기예를 부리는 것 같았다. 유독 그만이 톤이 다른 색으로 칠해진 것처럼 튀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한 츄커가 끝났다. 휴식 시간을 맞아 속도를 줄이는 선수들 속에 섞이는 셰어를 끈질기게 바라보며 요한은 잔에 담긴 술을 비웠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바라볼 때의 마음이 이토록 씁쓸한 적은 처음이었다. 사랑이란 원래 달콤하고 마냥 설레기만 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문득 셰어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요한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분 탓인가. 분명 셰어가 자신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린 것 같았는데, 확신하기도 전에 그는 등을 돌린 채 달려가고 있었다.
* * *
더럽게 악질적인 스토커가 달라붙었다.
셰어는 머릿속이 선뜩하도록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찬물을 마실수록 냉정하게 가라앉은 머릿속에 그 얼빠진 얼굴이 떠올랐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그, 요한 바네스가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경기는 잘 뛰어 놓고.”
3번 선수, 제이콥이 손가락을 튕겨 물을 뿌리며 킬킬 웃었다. 그는 오랜만에 셰어와 잔디 위를 달린 것이 유쾌한지 연신 웃고 있었다. 어린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표정이 그 웃음 속에 녹아 있었다. 셰어는 조금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맬릿을 가볍게 휘둘렀다. 익숙한 얼굴과 잔디 위를 달릴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터전을 옮겨 온 후로는 더욱이 그러했다.
가업이라 할 수 있는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서부로 넘어온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본래 동부에서 자란 셰어에게 이 땅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곳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단편적인 감상만이 전부다. 날씨가 좋다. 젊은 지식인이 많아서인지 한결 유연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단, 남자를 구하는 방법은 어딜 가나 별로 다르지 않다.
“오랜만에 경기를 뛰니 몸이 안 풀려서.”
“찰스, 그거 진짜 재수 없는 말인 거 알지? 골은 네가 다 넣어 놓고 몸이 안 풀렸다니.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라. 재수 없다.”
제이콥이 맬릿을 건들거리며 투덜거렸다. 그가 휘두른 맬릿에 부딪힌 셰어의 맬릿에 각인된 글귀가 선명하다.
CHARLES BAILEY
각인은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낸 듯 하얀 금이 그어져 있다.
셰어가 눈살을 찌푸리며 제이콥의 맬릿을 세게 후려쳤다. 손이 찌르르하게 저리도록 세게 맬릿이 부딪힌 탓에 제이콥이 엄살을 떨며 맬릿을 쥔 손을 바꾸었다.
“아프잖아, 셰어.”
“잘했어.”
셰어가 개를 칭찬하듯 이죽거리자, 제이콥이 야유했다.
“예민하다, 예민해. 볼드모트도 아니고 그 이름을 왜 그렇게 못 부르게 하는 건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냥 마음에 안 드는데.”
‘찰스 베일리’에서 셰어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베일리’뿐이었다. 누군가가 애칭 삼아 ‘셰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자연스럽게 퍼지지 않았더라면, 셰어는 항상 자신을 ‘베일리’라고 불러 주기를 요구했을 터였다. 제이콥은 그 내막을 뻔히 알면서도 심사가 뒤틀리면 내키는 대로 찰스라고 불러 댔다. 그는 아직도 얼얼한 손바닥을 후후 불며 엄살을 떨었다.
“너는 정말 그 성질머리 좀 고쳐라. 나 아니면 누가 너랑 놀아 주냐?”
셰어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말았다. 츄커 사이의 휴식 시간 3분은 짧았다. 잠시 메일을 확인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그는 폰으로 메일함에 쌓인 메일들의 제목을 대충 눈으로 훑었다. 회사 메일로 급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다른 메일을 확인할 차례다.
시크릿 탭을 열어 메일 주소를 입력하자 새로운 메일 화면이 뜬다.
[Welcome Violet!
새로운 메일 (21)통이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휘슬이 울렸다.
“뭐 해, 얼른 가자!”
“알았어. 지금 가.”
셰어는 화면에 떠오른 메일 창을 모두 닫았다.
Master의 성공은 셰어에게는 예상치 못한 불운이었다.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는 사람들끼리는 알던 취미가 이제는 깊은 곳에 묻어 버려야 할 비밀이 되었다.
빌어먹을 쇼 비즈니스의 세계가 손을 댄 탓이다. 서면 인터뷰를 넘길 때만 하더라도 셰어는 자신이 쓴 소설이 그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
문제는 그 인터뷰였다. ‘저자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문구. 단지 화제성을 위해 지어낸 그 문구가 세일즈 포인트를 이토록 정확하게 적중시킬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소설은 종이책의 무덤이 된 시대에 연일 재판을 찍어 내고, 영화는 박스 오피스 순위에서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저자인 바이올렛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바이올렛의 메일 계정으로 팬레터를 빙자한 부티 콜이 쇄도하고 있었다. 소설의 어떤 부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감상은 대부분 직접 만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더러운 섹스 판타지로 점철되었다.
대부분은 어설프게 미디어로 SM을 접한 바닐라들이 불쾌하게 껄떡대는 것이었고, 일부는 성향자들 중에서도 이상한 부류였다. 그 메일을 진지하게 읽은 적도 없었으나 셰어는 그들 중 과반수가 이상한 사람일 것이라 확신했다. 얼굴도 모르는 작가에게 자신의 섹스 판타지를 줄줄이 고백하는 메일을 줄기차게 보내는 이들이 멀쩡할 리가 없다.
“셰어!”
제이콥이 사인을 보냈다. 셰어는 선수들의 주의를 끌며 우측으로 공을 쳤다. 빠르게 질주하는 셰어의 뒤로 선수들이 꼬리처럼 따라붙는다.
그사이 골문 쪽을 향해 달려간 제이콥이 맬릿을 들어 올렸다. 그의 옆에 바짝 따라붙은 상대 팀 선수가 흥분한 말의 고삐를 당겨 조절하며 궤도를 바꾼다. 제이콥에게 공을 넘긴다면 즉시 맬릿을 걸 기세였다. 셰어는 공을 힘으로 후려치듯 세게 맬릿을 휘둘렀다.
2츄커 때의 정확한 컨트롤과 달리 통제를 잃은 공이 골문 앞에 선 수비에 의해 쉽게 튕겨 나갔다.
“젠장.”
되는 일이 없다. 셰어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무심코 하얀 파라솔이 늘어선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요한 바네스는 조금 전과 같은 곳에 서 있었다. 거리가 멀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이 있는 쪽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셰어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가장 악질은 바이올렛의 흔적을 찾아 온몸을 던지는 요한 바네스 같은 경우였다. 실재하지도 않는 바이올렛의 이미지에 홀려 끈질기게 구는 바닐라는 한두 명이 아니었으나, 요한은 유독 신경을 긁었다.
“뭐야, 너? 갑자기 왜 그래.”
근처로 말을 몰아온 제이콥이 당혹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셰어는 말없이 고개만 젓고는 그를 앞질러 달려 나갔다.
다른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 자리는 단순한 폴로 경기가 아니라 시 의원들이 와 있는 자리였다. 서부에는 베일리의 이름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았으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마초적인 스포츠를 추종하는 동부의 관습이 개방적인 편인 서부에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치하는 이들이란 어느 곳이든 비슷하리라.
셰어는 의식적으로 공에 집중했다.
* * *
“요한! 대체 어디 있었니? 한참 찾았잖아.”
레일라는 요한의 팔뚝을 찰싹 두드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여느 때 같으면 생글거리며 능청을 떨어 댔을 이는 말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얼굴은 빨갛고 눈은 흐리멍덩했다. 레일라는 그 증세가 무엇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또 짝사랑이다. 뻔한 일이었다. 요한은 늘 사랑이 샘솟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꼭 누군가에게 퍼붓고 싶어 했다. 아무래도 이번 짝사랑 상대는 예의 그 폴로 선수, 베일리가의 장남인 모양이다.
운이 나빴다. 찰스 베일리는 누구와도 스캔들이 난 적이 없었다. 흔치 않게 사생활이 결벽적으로 깨끗한 탓에 혹시 불능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 아무리 봐도 요한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레일라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번만은 한마디 말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
“요한, 그러고 보니 생각났는데 찰스 베일리 말이야.”
환상이라도 보듯 몽롱하던 요한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레일라는 일말의 가책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찰스 베일리는 요한의 상대로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곧 약혼을 한다고 했던 것 같아.”
근거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보수적인 동부 출신의, 정치인 집안의 장남이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비록 셰어는 서른이 넘도록 약혼자가 없었으나 아마 나이 앞자리가 바뀌기 전에 결혼하게 될 것이다.
생기가 돌던 요한의 낯빛은 금세 파리하게 질렸다. 그는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우울해 보이던지, 레일라는 요한이 금세 털고 일어나 또 다른 사랑을 찾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으러 갈래?”
“레일라, 나는 열두 살이 아니라니까.”
요한은 웃으려 했으나 그의 입술은 그저 일그러지기만 했다.
어쩌면 좋을까. 레일라는 속으로 탄식했다. 자신의 아들은 다 자랐으나 여전히 열두 살,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차이고는 홀로 서럽게 울던 어린 소년과 다름없어 보였다.
“먼저 갈게.”
차마 붙잡기도 미안할 만큼 축 처진 어깨로 요한이 돌아섰다.
사랑에 빠지는 상대의 성별도 나이도 중요하지 않았지만 상대의 결혼 여부는 중요하다. 셰어에게 애인이 있는 것도 요한에게는 큰 장벽이었으나 약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요한은 가정파괴범이 될 뻔한 자신을 비관하며 차를 기다렸다.
더러운 세상. 하여간 지구가 아픈 것은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차를 끌고 나오는 인간들이 더럽게 많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가 오죽 많은지 조금 전에 기사에게 연락을 했으나 차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요한은 고작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소한 사실은 쉽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보다 뒤에 나온 다정한 노부부가 때마침 나온 리무진에 탄다. 부인을 먼저 차에 태우며 정석대로 에스코트를 하던 노신사가 요한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요한은 실없이 웃고 말았다.
“좋은 오후네요.”
신사는 보기 좋게 마주 웃어 주고는 차를 타고 떠났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분명 저렇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리라. 책임과 신뢰,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처럼 관계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요한 역시 그러한 미래를 꿈꿨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사랑에 빠진다면 그를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뭔가가 울컥 치밀었다. 이성은 이대로 차를 타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으나 요한의 발은 제멋대로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경기가 종료된 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는지 말끔한 차림을 한 선수들이 파라솔 아래에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요한은 군중들 속에서 셰어를 한눈에 찾아냈다. 그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를 그렇게 매번 바꿔 가면서 놀더니 곧 약혼을 한다고.
요한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애인이 많은 것이라면 다자연애도 개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이니 남의 일이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의미가 달랐다. 모 가수가 심심해서 한 결혼을 7분 만에 쫑내는 시대가 되었으나 요한은 그 부분에서는 가치관이 확고했다.
바람은 나쁘다. 특히 결혼한 사이에서의 바람은 최악이다.
그 많은 남자들을 끼고 살다가 갑자기 결혼이라니. 셰어의 약혼은 사기나 마찬가지다. 상대는 무슨 죄란 말인가?
요한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닿기라도 했는지 셰어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확실히 착각이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셰어는 이내 요한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다시 가면 같은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선거 포스터에서나 볼 법한 미소였다.
차가운 분노로 바뀐 감정이 완전히 식은 것은 아니었는지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요한은 들어올 때만큼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을 떠났다.
“망할 새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요한은 그것이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라 믿고 싶었다.
그제야 겨우 차가 도착했다.
요한은 차에 타자마자 차 안에 처박아 두었던 비상용 위스키를 꺼냈다. 이런 응급 상황에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이 꼴을 본 이들은 알코올 중독을 의심했으나 요한은 동의하지 않았다. 자고로 사랑의 아픔을 씻기 위한 약으로 술을 마시는 것은 병증이 아니었다.
병째로 입을 대고 몇 모금을 마시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요한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하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무심코 인터넷 화면을 켠 손가락이 제멋대로 검색어를 입력했다.
찰스 베일리.
이거 좀, 스토커 같나?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훤칠한 기사 사진들이 뜬 화면을 보자 요한의 손가락이 나는 듯이 움직였다.
BNB 산업 상무. BNB 그룹은 문어발처럼 안 건드린 사업이 없는, 수십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100년이 넘은 대기업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인 전자 산업 계열사가 BNB 산업이었다. 과연 셰어는 고상한 외모만큼이나 곱게 자란 동부의 왕자님이었다.
생일은 8월 20일. 사자자리네. 요한이 중얼거렸다. 자신은 물고기자리이므로 그와 잘 맞는다.
아니, 맞긴 뭐가.
“이래서 미신이 문제야. 맞는 게 하나도 없어.”
요한은 그새 14개로 증식한 인터넷 창을 하나씩 껐다. 빠르게 사라지던 창은 부드럽게 미소 짓는 셰어의 인터뷰 기사 사진에서 멈추었다.
작년 초, 셰어가 상무 발령을 받은 직후에 실린 경제지의 인터뷰였다. 내용은 홍보팀에서 손질한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그의 웃는 얼굴은 제법 진실해 보였다. 정치하는 집안은 다 이런 사진 찍는 법이라도 전수하는 모양이다. ‘신뢰’, ‘진실함’이라는 말을 의인화한 듯한 미소를 짓는 법 같은 것을.
요한은 혀를 찼다. 손이 미끄러져 사진이 갤러리에 저장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빠서 갤러리를 정리할 시간이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의 사진 한 장쯤 갤러리에 있다 한들, 그게 뭐 어떻다고.
그때 하필 로마노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요한은 소스라치게 놀라 폰을 차창 밖으로 내던질 뻔했다. 그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전화를 받았다.
“깜짝 놀랐잖아!”
- 예, 이사님. 예?
로마노프가 속 터지게 느린 말투로 되물었다. 요한은 마시다 만 위스키를 찾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 됐고…… 왜 전화했어?”
- 아, 네. 내일 출장 일정 때문에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요한은 술병을 내려놓았다.
“내가 내일 출장을 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요한만큼이나 당황한 로마노프가 잠시 침묵하다 이어 말했다.
- 대표님께서 직접 얘기하신다고 해서 관련 내용을 메일로 송부해 드렸는데요. 혹시…… 전달 못 받으셨습니까?
그런 얘기는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레일라가 일을 하지 않은 셈이 되니 전달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V Pictures의 전설적인 창업자 레일라 바네스의 신화는 지켜져야 한다.
“아, 들은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 나네. 그게 뭐였지?”
확실히 레일라는 이런 일을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 국제기술박람회요.
듣기만 해도 흥미가 뚝 떨어지는 명칭을 듣자 요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레일라의 숨은 의도가 있기는 했다. 분명 자신은 듣자마자 싫다고 할 것이 뻔하니 일단 티켓부터 끊어 놓은 것이 틀림없다.
“나랑 또 누구랑 가?”
- 아, 그게 말입니다. 사실은 다른 분들도 함께 가시기로 했는데 급한 일정이…….
“설마 나 혼자 가는 건 아닐 거 아냐.”
- 아, 그게 말입니다…….
“아니, 됐어.”
혼자 가는구나. 사람이 미어터지는 박람회장에서 홀로 뿌리 없는 물풀처럼 떠돌아다닐 제 처지를 상상하자 요한은 좀 더 울적해졌다.
몇 번 가 본 적이 있는 국제기술박람회는 신기술을 중점적으로 전시하는 대규모 행사로, 보통은 각 사의 경영진들이 대거로 방문하는 행사였다. 흔히 의전을 위해 긴 꼬리를 달고 박람회장을 누비는 이들이 머릿수로 자리를 선점하는 탓에 인원이 적으면 은근히 불편할 때가 있었다. 그 시장 바닥 같은 틈바구니에서 부대낄 생각을 하니 술을 마시고 있는데도 술이 당겼다.
- ……네, 그럼 메일 확인해 보시고 필요하신 거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그래…….”
요한은 대충 대꾸하고는 시트 위에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늘어졌다.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그야말로 지옥의 문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정은 정말 빡빡했다. 방문해야 할 부스 위치까지 포함된 자료를 대강 훑어본 요한은 신경질적으로 창을 마구 닫았다.
“하여간 되는 일이 없어.”
요한은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을 괜히 한번 눌러 봤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셰어의 사진을 보니 정체 모를 욕구에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요한은 그의 코 밑에 멋들어진 콧수염을 그렸다. 놀랍게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갔다.
이러려고 사진을 저장했구나. 사실은 그랬던 것이다. 요한은 그의 사진을 더 찾기 위해 인터넷 창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