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
페이드인, 끈적한 템포의 음악이 깔리며 카메라 렌즈가 광택이 도는 검은 케인을 담는다. 빳빳한 새것이나 다름없는 케인 끝이 하얗고 동그란 엉덩이를 훑어 내려갔다.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엉덩이가 파르르 떨리며 소름 끼치도록 낮은 여성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Call me your master.
낮고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는 묘한 울림을 품고 있다. 단어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완고한 느낌이 물씬 드는 발음은 금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야릇했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검은 가죽 구두를 낯을 붉힌 남자가 핥는다. 완벽한 차림인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알몸이었다. 그는 팔이 등 뒤로 묶인 채 느릿하게 여자의 구두를 핥았다. 남자의 혀는 붉고, 눈은 약에라도 취한 것처럼 흐리멍덩했으나 집요하게 뭔가를 바라듯 그녀의 구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Yes, master.
페이드아웃, 날카로운 필체로 쓰인 영화의 제목이 떠오른다. Master.
예고편이 공개됨과 동시에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장악한 영화였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손익 분기점을 돌파하며 몇 주째 박스 오피스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원작 소설의 저자는 바이올렛, 작가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가 쓴 소설은 자전적 성격이 강한 에세이와 마찬가지라 했다. 성별도, 나이도, 얼굴도, 심지어 이름도 공개되지 않은 저자의 서면 인터뷰는 소설을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대체 왜 못 찾는다는 건데?”
길쭉한 6인용 테이블 위에는 빈 병이 마구잡이로 뒹굴고 있었다. 테이블 끝에 홀로 앉은 남자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짙은 갈색 머리칼을 휘저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마를 문지르는 남자에게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요한 바네스는 특별한 직업 없이도 툭하면 Page 6에 오르내리는 남자였다. 그와 함께 사진 찍히는 상대는 자주 바뀌었다. 때로는 갓 성년이 된 남자 배우, 때로는 어머니뻘쯤 되는 가수, 행위 예술가, 영화감독 등등. 그는 성별도, 연령도, 직업도 가리지 않았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들면 무조건 만난다. 그만큼 요한의 악명은 이름 높았으나 그의 상대는 화수분처럼 끝이 없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요한 바네스 그 자체였다.
레일라 바네스가 창업한 이후 가장 큰 영화 제작사가 된 V Pictures는 최근 여러 크고 작은 기업들을 합병하며 공룡 기업이 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나날이 승승장구하는 V Pictures를 이끄는 수장 레일라 바네스의 비극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것은 그녀의 아들이 요한 바네스라는 것이다.
요한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고,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는 뭐든 내키는 대로 해 주려 들었다. 그는 상대를 위해 보석을 사고, 배역을 따냈으며, 연줄 없이는 갈 수 없는 곳들로 이끌어 주었다. 그의 정성은 그 박애적인 성향만큼이나 대단했다. 한창일 때의 요한은 상대를 위해서라면 별이라도 따 줄 것처럼 굴었다. 물론 그렇게 마음을 퍼부은 만큼 마음이 식은 다음의 요한은 가차 없었다.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 요한이 어느 날 숨을 거둔다면 그렇게 버려진 상대에게 당한 것이라 확신할 것이다.
겨우 고개를 든 요한의 얼굴은 숙취로 초췌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추레한 꼴마저 연출된 장면인 양 잘생겼다. 삐죽삐죽 흐트러진 짙은 갈색 머리칼 아래 짙은 눈썹은 찌푸려져 있고, 깊고 우묵한 눈매 아래 홀로 새파란 빛을 발하는 눈동자는 몽롱한 것마저 요염하고 근사했다. 반듯한 콧대 아래 슬며시 벌어진 도톰하고 모양 좋은 입술에서는 끔찍하게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그에게서 한 걸음 더 멀어진 비서 로마노프는 말끝이 어눌한 러시아어로 뭐라 지껄여 댔다.
“넌 꼭 아쉬울 때만 너네 나라 말을 하더라. 벳시는 어디 가고 하필 네가 와서…… 돌아 버리겠네.”
그의 또 다른 비서 벳시는 이미 요한의 무리한 요구에 질색하며 이번 사태가 끝날 때까지는 로마노프에게 요한의 일을 일임하기로 했다. 로마노프는 그저 알아듣지 못한 척 멍청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 모든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머저리가 되는 게 나았다.
요한이 테이블에 머리를 쾅쾅 처박았다. 식겁한 로마노프가 황급히 다가와 요한의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테이블과 요한의 머리 사이에 손이 낀 로마노프가 한숨을 쉰다.
“찾을 수 없습니다. 프라이버시 이슈.”
“그걸 누가 몰라? 프라이버시, 중요하지! 그러니까 내가 제안을 했잖아. 우리랑 속편 만들자니까?”
물론 그것은 요한 혼자만의 생각일 뿐 V Pictures의 입장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로마노프는 묵묵히 요한의 머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그 보기 좋은 머리통은 몹시 단단하기까지 하여, 로마노프는 혹시 이 안에 든 게 진짜 돌은 아닌가 의심하고 말았다.
한참 발광을 하던 요한이 두 팔을 의자 뒤로 걸친 채 늘어졌다. 까딱거리는 발이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꼭 찾아내. 난 꼭 그 바이올렛을 만나야겠으니까.”
모든 문제는 그 영화, Master였다.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된 관능 영화. 우연히 그 영화를 본 요한 바네스가 어이없게도 영화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그는 영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인물과 자려 들었다.
특히 요한이 집착하고 있는 상대는 베일에 가려진 영화의 원작 소설 저자, 필명 바이올렛이었다. 처음 그를 찾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요한은 그 일이 이렇게 힘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겨우 일개 소설가의 연락처였다. 당연히 출판사에 문의하면 간단히 알 수 있으리라 짐작했으나, 뜻밖에 바이올렛에게는 신경질적인 면모가 있었다.
바이올렛은 사생활 보호에 목숨을 걸었다. 그 때문에 출판사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요한은 한 달 가까이 바이올렛의 뒤를 추적하였으나 그가 알아낸 것이라고는 바이올렛의 메일 주소와 본인의 것이 아닌 계좌 정보가 전부였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캐낼 수 있는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모든 일을 대리인을 통해 처리했는데, 심지어 그 대리인의 정체마저도 알아내기 어려웠다. 바이올렛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어떤 수단을 써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로마노프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만 대답했다. 요한 바네스는 그가 설득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요한은 좀비처럼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씻지도 않고 침실에 처박혔다. 그가 최근 하는 일이라곤 뻔했다. Master에 대한 모든 것을 보거나, 술을 마시거나, 수음을 한다. 때로는 그중 두세 가지를 동시에 할 때도 있었으나 어쨌든 그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그것이었다.
이미 외워 버린 영화의 초반부가 시작되자 요한은 베개를 끌어안은 채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요한은 원작 소설을 닳도록 읽은 탓에 영화와 소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순식간에 떠올릴 수 있었다.
소설은 어떤 여자가 그녀의 상사인 남자를 노예로 길들여 복종시키는 과정을 담았다. 여자에게 저항하려던 남자는 쾌락에 굴복해 여자의 노예가 된다. 결국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남자는 거기서 여러 다른 노예들을 만나게 된다. 자신만이 그녀의 유일한 노예일 것이라 생각했던 남자는 큰 충격을 받는다. 남자는 여자를 가지려 한다. 로맨틱한 행동과 말로 여자에게 구애하며 자신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절절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노예일 뿐, 끝내 그녀를 가지지 못하고 노예로서 굴복한 채 사는 것에 만족하며 소설은 끝난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여자의 다른 노예에 대한 내용은 등장하지 않았다. 단지 남자가 여자의 노예로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에서 영화는 끝난다. 관능적이고 스릴 넘치는 초반부와 달리 흔한 로맨스 영화처럼 달고 사랑스러운 결말이었다.
일부는 그렇기에 영화가 더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요한은 그 때문에 소설이 더 마음에 들었다.
“대체 어떤 여자가 이런 소설을 쓴 거야. 아니면, 남자든가.”
어느 쪽이든 요한은 바이올렛을 만나고 싶었다. 아니, 바이올렛과 자고 싶었다.
* * *
파티는 매일 있는 일이지만 연말의 파티란 특별하다. 흔히 잘 모이지 않는 곳에서도 연말을 맞이하여 성대한 연회를 열고, 때로는 특별한 손님을 모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Night of Books’ 속칭 NOB 역시 그러한 행사 중 하나였다. 활자로 된 인쇄물을 읽는 사람들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지만 책의 가치는 여전히 중하다. 그 때문에 시에서는 연말의 NOB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시 의원과 출판사 관계자들, 작가들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이 줄줄이 참석하기에 NOB는 퍽 고상한 행사였다.
그렇기에 요한은 NOB에 참석하기로 한 과거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요한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하는 말 중 절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술맛이 지나치게 강한 펀치를 마시며 그는 곁에 선 로마노프를 툭 쳤다.
“넌 밀란 쿤데라가 누군지 알아?”
“압니다.”
“누군데?”
로마노프는 진중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가 러시아어로 지껄여 대는 바람에 요한은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펀치를 모두 비운 요한은 더는 대거리할 생각도 들지 않아, 힘없이 더 센 술을 찾아 바로 향했다. 비척거리는 그를 로마노프가 뒤따랐다.
NOB에 바이올렛의 소설을 출판한 벡스터 관계자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단지 그것만이라면 크게 구미가 당기는 정보는 아니었으나, 그 관계자 중에 바이올렛의 소설을 담당했던 레베카가 끼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몇 번이나 같은 영화를 돌려 보던 요한은 급히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혹시나 바이올렛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크게 부풀었다.
“테킬라 샷…… 아니, 병으로 줄 수는 없어요?”
요한이 묻자 바텐더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그 얼굴에서 대답을 찾은 요한은 한숨을 푹 쉬었다.
“됐어요. 그냥 샷으로 줘요. 끊기지 않게, 계속.”
바텐더가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스트레이트 잔을 줄지어 나란히 늘어놓은 채 투명한 술을 부었다. 열 개의 잔이 모두 채워지기도 전에 요한은 첫 잔을 비웠다. 그리고 숨 쉬듯 거푸 술을 들이켰다.
기대고 뭐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만나려고 한 벡스터 측 관계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내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이들에게 붙잡혀 온갖 현학적인 얘기로 고문을 당했다. 과부하가 걸린 뇌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 고통을 잊으려 요한은 고래처럼 끊임없이 술을 마셔 댔다.
“그만 드십시오.”
로마노프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말렸으나 요한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나 안 취했어.”
여느 주정뱅이가 그러하듯 요한의 혀는 풀려 있었고 눈은 몽롱했으나, 그는 끝내 취하지 않았다고 우겨 댔다. 로마노프는 그를 말리는 걸 포기했다. 요한은 취하면 취할수록 술을 더 많이 마셔 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나마 쓰러질 때까지 마셔 댄 후에는 곧장 널브러져 곯아떨어져 버리니 얌전한 편이라 할 수 있다.
한참이나 술을 부어 주던 바텐더는 끝내 병이 비자 새 술을 꺼내 요한에게 병째로 건넸다. 고상한 파티에 와서 혼자 바를 거덜 낼 기세로 술을 마셔 대는 것에 아주 넌덜머리가 난 게 분명했다.
요한은 흐무러지도록 익은 과실처럼 달큼하게 웃어 대며 병을 옆구리에 낀 채 발코니로 향했다. 그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용케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목적지로 가는 방향을 잡았다. 로마노프가 그 뒤를 따르려 하자 불쑥 걸음을 멈춘 요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넌 바이올렛 찾기 전에는 오지 마.”
“하지만…….”
“바이올렛!”
영영 따르지 말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마노프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가 괜한 트집을 잡을 때 흔히 그러하듯 잠깐 꺼졌다가 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라 여겼다. 로마노프는 멀어져 가는 요한의 등을 잠시 흘끔거렸으나 곧 잊었다. 고작 10분 눈을 뗀다고 무슨 사고를 칠까 싶었다.
겨울바람이 차게 부는 발코니에는 사람이 없었다. 요한은 금세 싸늘하게 식은 몸을 웅크리며 비실대다 곧 바닥에 드러누웠다.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었다. 바닥은 딱딱하고 차가웠으나 누우니 편안해졌다. 술을 지나치게 빨리 많이 마신 탓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지러워 눈을 감자 그렇게 추운데도 이상하게 잠기운이 솔솔 몰려왔다. 요한은 유언처럼 중얼거렸다.
“로마노프…….”
그래도 로마노프가 있는데 설마 여기서 얼어 죽기야 하겠어. 그런 생각이었다.
짝!
뺨을 후려치는 따가운 손길에 놀라 요한은 눈을 떴다. 손을 치켜든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살짝 벌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벌어진 입술이 이내 다시 닫혔다. 단정하게 다듬은 검은 머리칼을 포마드로 넘긴, 퍽 진지하게 생긴 남자였다. 이런 행사와 참 잘 어울리게도 책을 정말 좋아하게 생겼다. 밀란 쿤데라가 누구인지쯤은 술술 읊을 수 있을 듯한 이지적인 눈이 희미하게 찌푸려진다.
“괜찮으십니까?”
끈적하게 녹아내리는 초콜릿 같은 음성이었다. 귀가 녹을 것 같다. 요한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짙은 눈썹을 찌푸린 채 몸을 일으켰다. 요한은 그제야 자신이 여태 발코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가 발견해 주지 않았더라면 로마노프가 오기 전까지 계속 추운 발코니에서 곯아떨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한은 끙끙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남자는 얼어 죽을 뻔한 사람을 구해 준 것치고는 좀 쌀쌀맞은 사람 같았다. 그는 자신이 어기적거리며 몸을 추스르는 것을 보고도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문득 시간을 확인하듯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거리기까지 하니, 요한은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감히 요한 바네스를 앞에 두고도 이렇게 무시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는 짓이 어쨌든 요한은 꽤 미남이었기에 그는 제 얼굴에 제법 자신이 있었다.
“손 좀 줘 봐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말하자 시계를 보던 눈이 느릿하게 요한의 얼굴로 굴러온다. 창 너머 실내의 불빛에 비친 눈동자는 연한 노란빛이 섞인 녹색이었다.
잘생겼네. 요한은 내심 그의 얼굴을 품평했다. 남자는 키도 요한과 비슷했다. 다만 체격이 좀 더 마른 것인지, 혹은 짙은 색의 슈트를 입어서인지 좀 더 호리호리한 몸이었다.
“주세요, 겠죠.”
남자가 입술을 비죽 올리며 웃었다. 정중한 말투였으나 비웃음이 분명했다. 웃는 얼굴을 보니 처음의 진지하고 얌전한 인상과 달리 성격이 좀 더러워 보인다. 왠지 그 얼굴에 꽂혔다. 요한은 헛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러워 휘청거리면서도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자 이 쌀쌀한 날에도 땀이 날 지경이었다. 남자는 그 모든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도와준 건 고마운데…… 손 한번 빌리기 참 힘드네. 그쪽은 이름이?”
요한은 은근슬쩍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 냉한 인상이 뜻밖에 마음에 들었다. 저런 타입이 의외로 잘만 녹여 놓으면 되레 예쁘게 울곤 했다. 그 얼굴을 상상하자 쌀쌀맞은 얼굴을 보는 것도 썩 흥이 올라 요한은 헤프게 웃었다.
“입 돌아간 것 같은데 얼른 들어가시죠. 말도 자꾸 잘라먹네.”
반면에 그는 짜증이 났는지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며 시계만 봤다. 아주 시계에 금칠이라도 한 듯 눈을 떼지 않는 게 어지간히 바쁜 티를 낸다 싶었다. 요한은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찌푸린 눈이 서늘하게 요한을 노려본다. 요한은 차라리 그것이 달가웠다. 무관심한 상대를 공략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나마 눈이라도 맞출 수 있는 상대라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
“네.”
여지조차 주지 않는 단답형이었다. 요한이 무슨 말을 더 붙여 보려는 찰나, 발코니 문이 열리며 다른 남자가 들어섰다. 키가 훌쩍 크고 모델처럼 마른 남자였다. 어깨까지 오는 새까만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그는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어 얼핏 파티가 아니라 장례식에라도 참석한 사람 같았다. 그의 뺨이 술기운 때문인지 희미하게 붉어져 있어 어딘가 나른해 보였다.
“셰어…… 님.”
빌려주지 않는 손만큼이나 비싼 남자의 이름을 알았다. 셰어는 그것이 못마땅한 듯 한숨을 쉬었다. 괜히 찔끔 놀란 남자가 저보다 한 뼘은 작은 남자의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요한은 그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저 둘은 대체 무슨 관계길래?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셰어가 요한을 노려본다.
“추운데 들어가시죠. 저희는 할 얘기가 남아서.”
싸늘한 눈과 달리 그의 말투는 퍽 친절했다. 꼭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에 요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섭도록 까만 눈을 한 까마귀 같은 남자가 요한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눈 밑이 조금 어둡고 어쩐지 좀 음침한 인상의 남자가 그렇게 노려보기까지 하자 내심 조금 무서웠지만, 요한은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턱을 치켜들었다.
“아, 나도 할 말 있는데.”
두 쌍의 눈이 요한을 향한다. 나란히 선 두 남자의 시선이 어찌나 열렬하던지 요한은 자신이 연인들의 밀회를 방해하는 악당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진짜 연인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요한은 잠시 망설였다. 그는 무엇도 꺼리지 않았지만 임자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법은 없었다. 그때 셰어의 앞을 가로막듯 걸어 나온 남자가 무서운 얼굴로 뇌까렸다.
“용건이 뭡니까?”
말라서 그저 패션모델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남자는 골격이 제법 컸다. 남자의 너른 등이 그리 작지도 않은 셰어를 거의 다 가렸다. 요한이 은근슬쩍 그 뒤를 보려 몸을 기울이자 남자가 그를 따라 몸을 기울인다. 셰어의 머리카락 하나 보여 주지 않으려는 듯 앞을 막아서는 기세가 제법 살벌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자는 용감한 법이었다. 요한은 그가 보는 앞에서 비틀거리며 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찾아 쥐고는 번드르르한 직함이 찍힌 제 명함을 꺼냈다.
V Pictures 이사 요한 바네스. 실질적으로는 하는 일이 거의 없어 이름뿐인 명함이었으나 이사라는 직함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했다. 요한은 그 직함이 이번에도 부디 긍정적인 작용을 하기를 기원했다.
“요한 바네스, 라고요. 내 이름.”
바네스, 스를 질질 끄는 발음이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풀어진다. 그제야 요한이 풍기는 독한 술 냄새를 맡은 것인지 셰어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제 앞에 들이 밀어진 명함을 가만히 바라보는 셰어의 표정은 묘했다. 뭔가를 재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사이 셰어의 옆에 바짝 붙은 남자가 그 명함을 빼앗아 구기려 했다. 흉흉한 기세로 손을 뻗는 그의 팔을 붙잡은 것은 뜻밖에 셰어였다. 그 손이 닿자 남자는 거짓말처럼 순한 얼굴이 되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셰어는 그 명함을 받았다. 그의 두 눈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채 명함에 인쇄된 글자들을 훑더니 그것을 느긋하게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요한 바네스.”
요한은 셰어의 입술로 발음된 제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살짝 가늘어진 셰어의 눈이 요한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제 꺼져요.”
정중한 발음과 달리 그 내용은 친절하지 않았다. 요한은 간도 쓸개도 없는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이름 가르쳐 주면.”
“셰어.”
“풀 네임은?”
“셰어.”
같이 자자고 한 것도 아니고 이름 한번 알기가 더럽게 까다롭다. 솔직히 기분이 좀 상했다. 하지만 항상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 하는 법이었다. 요한은 끝까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애인 없으면 연락해요.”
절대 연락 같은 건 안 줄 것 같다. 요한은 그 말을 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셰어는 그저 담백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실내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유독 무겁게 느껴져 요한은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나 둘만의 세상에 빠진 그들은 요한이 지나치게 느리게 걷는 것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따뜻한 실내의 온도가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것이 달가웠으나 요한은 등 뒤에 있을 남자가 계속 신경 쓰였다. 최근에는 바이올렛을 찾느라 한참 시들하긴 했으나 요한은 본래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잠들곤 했다. 의도치 않게 팔자에도 없는 수절을 해 왔으니 슬슬 몸이 달았다.
오랜만에 함께 밤을 보내고 싶은 남자가 생겼는데 상대는 아마도 임자가 있는 몸인 것 같다. 요한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발코니의 문을 닫고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유리문 너머의 두 사람을 바라본 순간, 나란히 선 두 남자가 겹쳐진다. 셰어가 남자의 허리를 팔로 감아 당기며 반듯하게 잘생긴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자, 셰어의 어깨를 붙잡은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셰어의 귀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댄다. 그것이 꼭 무슨 밀어라도 속삭이는 듯해 요한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남자의 너른 등에 가려졌던 셰어의 얼굴이 요한을 향했다. 볼 만큼 봤으면 당장 꺼지라고 겁박하듯 날을 세운 두 눈이 요한을 노려본다. 한쪽으로 삐뚜름하게 치켜 올라간 입술이 움직였다. 변태.
“이사님?”
로마노프가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 누가 그들을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요한은 급히 커튼을 쳐 창을 가렸다. 술이 전부 깬 몸이 갑작스러운 각성 상태를 맞이한 것처럼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심장이 터질 듯이 맥동한다. 요한은 펄떡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그 꼴이 영 신통치 않아 보였는지 로마노프가 물었다. 요한은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같은 것을 본 로마노프가 입술을 살짝 벌리며 희미한 소리를 냈다. 아.
선명하게 발기한 성기가 누가 봐도 섰다는 것을 알 수 있게끔 바지 위로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요한은 조용히 벽 쪽을 향해 돌아섰고, 로마노프는 묵묵히 그를 제 몸으로 가렸다.
“로마노프, 나 좆 된 것 같아.”
“예?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비속어를 모르는 로마노프가 되물었다. 요한은 넋이 반쯤 빠진 얼굴로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좆 됐다, 좆 됐어.
아무래도 이번에는 임자 있는 남자에게 반한 것 같다.
* * *
셰어는 탄탄하다 못해 딱딱하기까지 한 남자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힘이 바짝 들어간 엉덩이가 손 아래에서 뭉개질 듯 잡히는 바람에 그에게 기댄 남자가 달뜬 숨을 쉬었다.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울음기를 머금은 채 축축하게 귓전에 쏟아진다.
“아, 셰어 님. 제발…….”
“제발?”
뒷말을 묻자 남자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애원하듯 셰어의 볼과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설픈 어리광이 퍽 귀여웠다. 그가 품고 있는 장난감이 남자를 이렇게 녹아내리게 했을 것이다.
주먹만 한 에그는 스테인리스로 매끄럽게 코팅된 제품으로, 처음에는 차갑지만 진동하면 할수록 체온만큼 따뜻해진다. 그것은 그 크기만큼 제법 묵직하기까지 해 웬만한 것은 그럭저럭 잘 버티는 남자마저도 흐물흐물하게 녹여 버렸다. 셰어는 옷 위로도 느껴지는 진동의 근원지를 더듬었다. 묵직한 에그는 제대로 조이지 않으면 금세 도로 삐져나올 듯 꽤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먹여 준 것도 버릇없이 도로 뱉으려고 하면서, 제발?”
“하, 으윽…… 잘못, 했어요.”
“잘못인 거 알면서 왜 그랬어요. 죄질이 더 나빠.”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로 힐난하며 셰어는 주머니에 든 리모컨을 조작해 진동을 끝까지 높였다. 끝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남자가 몸을 배배 꼬며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퍽 간절한 손길로 먼지 하나 앉지 않은 셰어의 구두를 더듬으며 무언가 말하려 애쓰는 것이 제법 심금을 울렸다.
이러려고 NOB에 왔다. 파트너와 숨바꼭질을 즐기기 위해.
댄 화이트는 셰어의 파트너였다. 그는 추리 소설을 쓰는 아주 유명한 소설가라고 했으나, 셰어는 추리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댄 화이트는 잘나가는 소설가였고, 그는 매년 NOB에 초청을 받았다. 셰어는 처음으로 NOB에 초청을 받은 후에야 댄이 꽤 유명한 소설가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와 붙어 다니는 내내 사람들이 여간 귀찮게 구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댄을 세기의 천재라도 되는 양 추종했다. 겸양을 떠는 흉내를 냈지만 칭찬이 한마디 떨어질 때마다 댄은 셰어의 눈치를 살폈다. 어쩌면 댄은 공작새가 뽐을 내듯 자신의 근사한 면을 주인에게 어필하고 싶어서 파티의 파트너가 되어 주기를 부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셰어에게 파티에 함께 가 달라고 부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엉큼하기도 하지.”
속내가 아주 시커멓다. 게다가 이런 걸 뒤에 넣고도 댄 화이트는 어찌나 뻔뻔하던지. 혀에 기름이라도 칠한 듯 매끄럽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을 보며 셰어는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았다.
물론 그렇다고 한 번도 누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댄은 공공장소에서의 플레이를 즐겨 포커페이스에 능숙한 편이었지만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잔을 꽉 움켜쥐던 손이 야릇했다. 쾌락이 견딜 수 있는 지점을 지나칠 때마다 댄의 포커페이스는 조금씩 허물어졌다. 특히 누군가가 어디서 진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했을 때는 그의 귓등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스릴은 거기까지였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질질 싸고 싶었는지 댄은 내심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재미도 좋지만 정도를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 셰어는 그의 사회적인 입지나 평판을 모두 망쳐 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나마 소소한 즐거움 덕분에 지루한 파티를 견딜 수 있었다. 셰어는 발등을 더듬는 손을 지그시 짓밟았다. 새것처럼 빳빳한 구두 밑창에 밟힌 손이 파르르 떨며 바닥을 더듬는다. 흐느끼는 듯한 울음에 탁한 목소리가 섞였다. 제발, 제발. 아직 빌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기에 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는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을 구두 위에 비볐다. 그리고 구두를 더럽힌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 젖은 가죽을 혀로 싹싹 핥았다. 그것이야말로 구두를 더 망치는 짓이라는 점은 생각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셰어는 사납게 웃었다. 역시 우아하게 고상 떠는 파티는 딱 질색이다. 이런 꼴을 보고도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니. 파트너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셰어가 이곳에 올 일은 없었다.
“난 숨바꼭질은 별로네요. 당신은 좋았어요?”
셰어는 묻고 나서야 자각했다. 댄은 대답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 데서나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요도를 막아 둔 덕분에 댄은 옷을 적시지는 않았으나, 뒤로 끊임없이 느낀 탓에 계속 절정에 도달하고 있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는 경련하듯 몸을 떨며 셰어의 구두를 계속 핥아 댔다.
제발, 그 말을 주문처럼 웅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댄은 퍽 간절하게 애원했다. 구두 끝으로 그 얼굴을 툭 건드려 고개를 들게 하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셰어를 올려다본다. 두 눈에 깃든 갈망이 물기 너머로도 또렷했다.
“그만두고 싶어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희열에 젖어 고개를 끄덕인다. 별로 그만두고 싶어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댄 화이트는 저항하는 것을 무시하고 강제로 범하거나 굴욕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토록 애타는 얼굴을 하고도 그는 매번 싫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러다가도 봐주지 않고 끝까지 몰아붙이면 결국 울며 좋다고 본심을 털어놓는 것이다.
셰어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며 진동의 세기를 낮추었다. 겨우 숨을 고르는 얼굴이 얼핏 아쉬움에 젖어 든다.
“일어서요.”
“……네.”
댄은 차마 더 조르지는 못하고 아쉬움에 몸을 떨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휘청거리며 제 꼴을 수습하려는 모습이 볼만했다. 댄은 상기된 얼굴로 발코니 난간을 짚은 채 서서 젖은 눈으로 셰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애타는 입술이 달싹인다. 셰어는 그의 열렬한 눈빛을 무시하며 다시 진동의 세기를 끝까지 올렸다.
“아! 아, 으응…… 응, 으흑! 셰어, 셰어 님.”
댄은 난간을 쥔 채 몸을 웅크리다 결국 다시 네발로 바닥을 기며 끙끙 앓았다. 셰어의 숨이 그와 함께 가빠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과 빈틈없이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파수견처럼 남을 위협하던 남자가 발아래에서 울며 몸을 비튼다. 그의 너저분한 꼴이 위험한 욕망을 부추겼다.
멀쩡한 척하는 남자를 망가뜨리고 싶다. 그가 이성이나 규범 따위는 찾지도 못할 만큼 흐트러진 모습을 드러낸 채 울며불며 애원하는 것을 보고 싶다. 자아마저 잃고 완전히 복종하는 남자를 가지고 싶다. 허기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부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이제 제대로 부탁해 봐요.”
관대한 마음이 들어 셰어는 부탁을 허락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댄이 애원했다.
“제발…… 으읏. 여기서, 때려 주세요.”
셰어는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댄은 벨트를 쥔 그의 손을 겁에 질린 것처럼, 혹은 기대에 찬 것처럼 절박하게 바라보았다. 아마도 댄 화이트는 오늘 이곳에서 절룩거리며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분명 셰어는 댄이 펀치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 대신 변명하게 될 것이다.
* * *
“아니, 글쎄 이렇게 매번 오셔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니까요?”
레베카는 끝내 짜증 섞인 일갈을 내질렀다. 벡스터 미디어의 편집자로 잔뼈가 굵은 그녀였으나 최근에는 여러 가지 일이 너무 많았다. 신인 작가를 발굴하여 대작을 터트리고, 그것을 영화화한 것까지는 좋았다. 좋았는데…….
세상에 별의별 변태가 다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BDSM을 소재로 한 영화에, 저자의 인터뷰가 공개된 직후 레베카에게는 전화와 메일이 쏟아졌다. 그 소설을 쓴 작가를 꼭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시답지 않은 인물도 있었으나 나름대로 사회적인 영향력이 강한 이들도 있어 레베카를 기함하게 했다.
요한 바네스는 그중에서도 특히 악질이었다. 애매하게 영향력이 큰 것도 같은데, 하는 짓을 보면 그저 저급한 스토커가 따로 없다. 요한이 며칠을 내리 출판사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갖은 수단으로 레베카를 을러대니 그녀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레베카, 자기야, 그렇게 빡빡하게 굴 필요 없잖아.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응? 누가 선생님을 해치기라도 한대? 그냥 저녁 한 끼 대접하고 싶다니까.”
요한은 매일 선물을 들고 레베카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처음에는 보석이나 가방, 스카프 따위였으나 나중에는 레베카의 취향을 조사하기라도 한 듯 보고 싶어 하던 뮤지컬의 티켓이나 좋아하는 작가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신간 따위를 들고 왔다. 요한에게 질린 레베카마저도 혹하는 선물을 받을 때만은 왜 요한 바네스에게 데이트 상대가 끊이지 않는지 알 것도 같았다. 외모만은 근사한 남자가 매일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을 들고 찾아와 매달리니, 어지간하면 데이트 신청 한 번쯤은 받아 줄 마음이 들 법도 했다. 레베카도 내심 그가 아주 싫지는 않았으나 요한은 입만 열면 사람을 질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제가 왜 바네스 이사님 자기인가요?”
“네에, 그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런 거 싫어하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왜 저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세요?”
바이올렛은 완고하게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칠 것을 요구했다. 계약서에도 해당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가끔 그런 것을 요구하는 괴짜 같은 작가도 있었기에 벡스터 측에서는 크게 꺼리지 않았다. 다만 계약서가 영화화를 앞두고 수정되며 작금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저자 바이올렛은 벡스터 미디어에 원작에 대해 자유롭게 가공하여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넘긴다. 벡스터는 작가의 신상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선의의 노력을 해야 하며, 이를 위반할 시 벡스터는 바이올렛에게 위약금을 지불한다.
그 위약금 액수가 과장을 좀 보태면 거의 출판사를 도산하게 만들 정도였다. 레베카는 그 조건을 아는 이상 바이올렛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랑 속편 만들자니까?”
“선생님은 속편 쓸 생각도 없으시거든요.”
요한이 풀이 죽어 파티션을 붙잡고 축 늘어진다. 6.2피트에 육박하는 그 덩치가 아까웠으나, 불쌍한 척 눈을 치켜뜬 얼굴이 그 와중에도 참 잘생겼다.
“아니면 다른 행사라도……. 바이올렛은 행사 같은 것도 참석 안 해? 그냥 멀리서라도 보고 싶어서 그래.”
레베카는 잠시 망설였다. 바이올렛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넘길 수는 없으나 요한에게 그가 참석할 만한 행사를 알려 주는 것은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바이올렛 앞으로 오는 초대장은 수없이 많았다. Master와 관련된 행사라면 패키지 상품처럼 출판사와 바이올렛이 나란히 초대되었으니, 레베카의 책상 위에도 초대장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중 하나를 요한에게 찔러주는 것쯤은 그다지 큰일도 아닐 것이다. 바이올렛이 실제로 초대에 응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초대를 받았으니 참석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것 하나로 이 진드기 같은 인간을 떼어 낼 수 있다면 이득인지도 모른다. 짧은 계산이 끝났다.
레베카는 짐짓 단호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이후로는 절대, 그 어떤 것도 알려 드리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요한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활짝 미소 지었다.
“레베카,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사랑, 그 말이 참 가볍게도 튀어나온다. 레베카는 헛웃음을 흘렸으나 그가 아주 밉지는 않았다. 비록 그가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스토커이기는 했지만 요한은 잘생겼고, 돈을 참 잘 썼다. 그러니까 정말 제대로, 잘 썼다. 레베카는 그가 책상 밑으로 은근슬쩍 내미는 검은 카드를 받으며 주위를 살폈다.
“이거 진짜 제가 생각하는 그거예요?”
“그럼. 레베카는 이걸 받을 자격이 있어.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편집자니까.”
요한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레베카는 요한에게 초대장 한 장을 건넸다.
“오늘 밤, 7시.”
그녀가 퍽 비장한 얼굴로 속삭이는 바람에 요한은 덩달아 긴장했다. 초대장을 슬쩍 품에 넣은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7시.”
요한이 그녀를 따라 중얼거렸다. 그의 두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얀 초대장에는 검은 가면과 채찍이 음각되어 있다. 그 가면과 채찍에는 에나멜의 질감을 흉내 낸 것처럼 독특한 광택이 흘렀다. 사소한 것에도 정성을 들인 티가 났다. 손바닥만 한 초대장의 뒷면에는 시간, 장소와 함께 한 단어가 마치 뾰족한 것에 긁힌 상처처럼 날카로운 필체로 새겨져 있다.
Whipping, 건전할 것 같지 않은 이름이다. 바이올렛과 잘 어울렸다.
요한은 그 글자의 폰트가 영화 Master의 제목에 사용된 것과 같다는 것을 쉽게 알아보았다. 어쩌면 영화를 오마주 하는 테마의 파티인지도 모른다.
기대감 어린 손끝이 초대장 위의 글자들을 손톱으로 긁었다.
Dress Code : Black × Formal
도착적인 취향과 단정한 드레스 코드는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았다. 이지적인 얼굴로 고상한 파티에서 남자 엉덩이를 주무르던 셰어처럼.
요한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바이올렛이 필요했다. 그날 이후 셰어의 잔상이 요한의 머릿속에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를 품 안의 인형처럼 다루는 단정한 손과 섬뜩하도록 선명한 눈동자가 잊히지 않는다. 몸속을 기어 다니는 열기가 배 아래에 뭉칠 때마다 요한은 욕설을 뱉었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를 풀고 슈트 아래에 있는 몸을 보고 싶다. 얼핏 말라 보여도 탄탄하게 다져져 있을 것이 분명한 몸을 녹아내리도록 핥아 주면 그 딱딱한 얼굴이 한결 부드럽게 풀어질지도 모른다.
셰어, 그 남자가 웃으며 이름을 불러 준다면.
‘요한 바네스.’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뇌리에 달라붙은 그 끈적한 목소리만은 떨칠 수가 없었다. 완벽한 발음으로 무심하게 읊조리던 눅진한 음성.
“젠장, 그건 반칙이지.”
그렇게 생겨 먹은 주제에, 그런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으면서, 그렇게 까칠한 건 너무했다. 고작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을 꼴리게 만들 수 있는 거라면 그 남자는 요한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됐다.
자극은 더 큰 자극이 있어야만 역치를 넘는다. 연인이 있는 남자를 마음에 담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었기에 요한은 전보다 더 간절하게 바이올렛을 만나고 싶었다. 본래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하는 법이라는 것이 요한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풀리는 일은 없었다. 포토 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모델들을 보며 요한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이게 아닌데…….”
모델들이 전부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Whipping은 그렇고 그런 파티가 아니라 패션쇼를 겸한 란제리 브랜드의 론칭 파티였다. 그것도 참석자들 모두 얼굴을 가리는 파티.
바이올렛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서서히 꺼졌다. 얼굴도 모르는 이를 파티에서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사실을 요한은 그제야 자각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렇고 그런 섹스 파티였다면 바이올렛을 찾기가 더 수월했을지도 몰랐겠지만,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가드들이 버티고 선 입구에 다가간 요한은 우울한 얼굴로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초대장을 수거한 어셔가 두 개의 가면을 보여 주었다.
“둘 중 하나 고르시면 됩니다.”
가면은 모두 하얀색이었다. 하나는 오페라의 유령에서 영감을 얻은 듯 얼굴을 반만 가리는 가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얼굴을 모두 가릴 수 있는 디자인의 가면이었다. 하나같이 괴이했다.
요한은 잘생긴 얼굴을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으므로 당연히 반쪽 가면을 골랐다.
입구를 통과하자 안으로 통하는 짧은 복도가 나타났다. 천장에는 머리 위를 스치는 반투명한 보랏빛 휘장이 나풀거린다. 푸르스름한 조명에 휘장은 딥블루에서 마젠타까지 다채로운 빛깔에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다.
복도 끝의 긴 휘장을 걷자 갑자기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안은 어스름한 조명 아래 보라색을 테마로 모던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둔탁한 비트가 강조된 음악이 크게 울리고 무거운 머스크 계열의 향이 퍼진다.
정면에는 패션쇼를 위해 준비된 높고 길쭉한 런웨이가 있다. 하얀 런웨이 위에는 란제리를 입은 남자 모델들이 파티를 장식하는 조형물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요한은 흥미롭게 그들을 관찰했다. 파티의 콘셉트에 맞게 모델들은 하네스나 가터벨트를 입었고, 서버들도 모두 목에 검은 가죽 초크를 맸다. 예상보다 더 본격적인 파티였다.
요한은 괜히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유독 오늘 고른 넥타이가 신경 쓰였다. 폭이 조금 얇은 넥타이를 생각 없이 플레인 노트로 맸는데, 그게 좀 별로인 것 같았다. 차라리 윈저 노트로 고쳐 매는 것이 낫겠다. 요한은 잔을 든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듯 빠르게 걸어갔다.
커다란 파우더 룸에 가까운 화장실은 행사를 위해 단장되어 있었다. 커다란 수국이 장식된 파우더 룸을 지나 안으로 쭉 들어가자 칸으로 나뉜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칸막이로 구분 지어 두었으나 칸마다 개별 세면대가 달린지라 그곳은 여러 욕실을 하나로 모아 놓은 것과 같았다.
요한은 가장 안쪽 칸으로 들어갔다. 느긋하게 넥타이를 고쳐 매며 거울을 들여다보자 가면으로 절반이 가려져도 잘생긴 것이 티가 나는 얼굴이 조명을 받아 유독 화사하게 빛났다.
바이올렛이 이곳에 있다면 좋을 텐데. 요한은 생각했다. 이곳에서 그 혹은 그녀와 만나게 된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멀리서 요란한 구두 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비틀거리는 걸음은 요한의 옆 칸으로 들이닥쳤다. 벽이 흔들리도록 세게 문을 닫은 옆 칸의 남자는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어렵사리 문을 잠갔다.
비어 있는 칸도 많은데 굳이 사람이 있는 칸 옆을 택한 것이 묘했다. 요한은 곧 손을 씻고 나갈 생각이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 숨죽여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욱…….”
흐릿하지만 그것은 분명 남자의 신음이었다. 억눌린 앓는 소리에 가늘게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섞인다.
어떤 변태 새끼가 자위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요한은 불쾌해져 옆 칸과 맞닿은 벽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나 옆 칸의 숨소리는 오히려 더 거칠어지기만 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끓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요한은 어쩌면 옆 칸의 남자가 어디가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요한이 조심스럽게 묻자 대답 대신 가느다란 숨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문을 열고 나와 옆 칸 문 앞에 섰다. 긴 그림자가 칸 안까지 드리우자 숨에 쇳소리 같은 씩씩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정말로 어디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요한은 심각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괜찮으냐고요.”
“으응…… 흐.”
괜찮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에서는 곧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꺽꺽거리며 숨을 삼키는 소리까지 섞인 울음이 요한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사람 죽는 거 아냐?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요한은 반색하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낯선 이는 요한만큼이나 키가 컸고, 잘 다져진 몸에 어울리는 완벽한 스리피스 슈트를 입고 있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가면을 쓴 남자의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요한은 왠지 그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그가 버릇처럼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는 것이 슬로모션을 건 장면처럼 느리고 선명하게 보였다.
요한의 옆에 한 걸음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남자가 말했다.
“실례지만 그 안에 제 일행이 있는 것 같네요.”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인, 귀를 핥는 것처럼 달고 눅진한 음성. 완고하게 느껴질 만큼 완벽한 발음과 느릿한 말투가 기억 속의 그것과 같았다.
이건 운명인가? 요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상상 속의 남자가 눈앞에 있다. 줄곧 그를 지우려 애쓰며 바이올렛을 찾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셰어를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한은 자신이 별것 아닌 우연을 비약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이끌리는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셰어는 요한이 한 걸음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한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 말은 해야겠어.”
“저를 아십니까?”
제법 힘이 들어간 요한의 손을 가볍게 뿌리친 셰어가 태연하게 물었다.
시치미를 떼겠다 이거지.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요한은 가면을 벗었다. 흥분한 요한의 뺨이 열에 들떠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빛을 담고 일렁거리는 눈동자가 가면 너머의 얼굴을 투시하듯 집요하게 바라본다.
그를 마주 보는 셰어의 눈은 가면 너머 깊은 아이홀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그의 눈이 기억 그대로 선명한 녹색일 것이라 확신했다.
“셰어, 이름을 가르쳐 줘.”
떨림을 품은 목소리 역시 요한의 낯빛처럼 들떠 있었다. 셰어가 슬며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지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서늘한 눈매가 인공적인 조명 아래 드러난다. 금빛이 뿌려진 녹색 눈동자가 황홀하게 빛났다. 그가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 같아 요한은 더욱 초조해졌다.
어느새 사방이 고요해져 있었다. 요한은 마른침을 삼키며 셰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처음 그가 다가왔을 때처럼 정확히 한 발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서자, 그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대치하듯 마주 본 채 요한이 말했다.
“애인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당신을 알고 싶어.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줘.”
“성가시게 구네.”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셰어의 반응은 매우 차가웠다.
그는 차갑게 요한을 밀치고 잠겨 있는 문 앞에 섰다. 그야말로 귀찮은 물건을 치우는 듯한 태도에 밀려난 요한은 일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얼어붙었다. 셰어가 손 하나 까딱 않고 명령했다.
“열어.”
여태 잠겨 있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곳에는 키가 훌쩍 크고 가슴이 운동선수처럼 떡 벌어진 남자가 서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만큼 근육이 팽팽하게 부푼 몸이 흐트러진 슈트 속에 갇혀 있었다.
그 또한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요한은 그 남자가 NOB에서 봤던 남자와 다른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이 남자도 애인인 건 아니겠지. 의심에 물든 요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셰어는 반쯤 풀어진 남자의 넥타이를 개 목줄 끌듯 잡아당겼다. 질질 끌려 나온 남자가 휘청거리며 셰어의 뒤를 따랐다. 그는 허리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절룩거리며 걷다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셰어는 요한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눈치가 없지.”
넥타이가 바짝 당겨지는 바람에 목이 졸린 남자는 캑캑거리며 가면에 습기가 찰 만큼 가쁘게 젖은 숨을 뱉었다. 그의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요한은 셰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아직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요한은 가면 너머 셰어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분명 NOB에서 남자의 엉덩이를 주무를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달뜬 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처럼 예쁘게 웃어 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셰어에게 다른 남자가 몇이나 더 있든 다 버리고 와 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요한은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다. 셰어가 자신에게 올지도 모른다고.
“연락이 없으면 적당히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셰어가 혀를 차며 세게 쥐고 있던 넥타이를 스르륵 놓아주었다. 남자는 셰어가 넥타이를 놓아주었음에도 여전히 숨을 고르지 못한 채 헐떡거렸다. 자신을 푹 감싸 안을 법한 덩치 큰 남자의 턱을 흡사 애완견이라도 예뻐하듯 긁어 준 셰어가 말했다.
“따라와요.”
건조하지만 요한에게 말할 때에 비하면 퍽 자상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요한은 초조하게 그들 뒤를 쫓았다. 다급한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기다려.”
좌우로 거울이 늘어선 파우더 룸에서 셰어가 걸음을 멈추었다. 바깥의 홀에서 풍기던 향기가 머리가 무거울 만큼 짙게 퍼지고 있었다. 커다란 수국 옆에 선 셰어가 요한을 돌아보았다. 하얀 가면을 쓴 그는 수국과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유감이지만 역시 그쪽은 내 취향이 아니에요.”
구애를 하며 거절쯤이야 숱하게 당해 본 요한마저도 낯이 차게 식을 만큼 건조한 통보였다. 셰어는 거리에 뿌려지는 광고지를 거절할 때보다 더 인색하게 절제된 친절만을 허용했다. 요한은 그의 정제된 태도에서 서늘한 일면을 보았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
조금도 웃지 않는 눈이 요한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떨어져 나갔다. 요한은 그가 남자와 함께 자리를 뜨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냉랭한 기류가 흐르는 공간에 셰어의 뒤를 개처럼 따르는 남자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울렸다.
그 와중에도 눈치 없는 아랫도리는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 차가운 눈이 와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독한 술을 들이켠 것처럼 속이 확 뜨거워졌다. 요한은 어느새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대충 문질러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도 예쁘고 난리야.”
인간적으로 저렇게 까칠할 거면 좀 덜 예뻐야 하는 거 아닌가. 셰어는 수국이 참 잘 어울렸다. 보는 사람 마음 참 심란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