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얼판타지아-168화 (168/169)

제 목  리얼판타지아 [232 회]

날 짜  2003-09-05

조회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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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와 현재의 만남

“하하! 우리로 말 할 것 같으면 너의 저승사자라고나 할까?”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터인지 감색 양복 사네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지금 시간은 새벽 4시... 경찰의 순찰이 지나치려면 한참이 남았다. 설령 형민이 살려달라 소리치더라도 그를 돕기 위해 나서줄 이가  없는 도심의 새벽이다.

감색 양복의 사네가 뒤춤에 감추었던 강침을 앞으로 꺼내들자 형민은 온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감색 양복의 사네가 꺼내 든 것은 살인 무기였다. 뒤통수라던가 목 뒤쪽 아니면 심장에 푹 꽂아 넣어 상대를 별다른 상처 없이 죽이는 물건, 구하기도 쉽고 만들기도 쉬워 쉬이 꼬리가 잡히지 않는 그런 흔한 살인무기였다.

“당하더라도 이유나 알고 당하자.”

형민의 물음에 감색양복의 사네는 낮게 웃음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에게도 그정도의 아량은 있다.

“우리도 일면식도 없는 네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지만 상부의 지시라서 말이야. 행여 네 녀석이 게임 안에서 본 것을 다른 이에게 발설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무..무슨 말이야!”

문득 오카리나가 가이아에게 한 짓이 떠올랐다. 당시에 아무것도 몰랐던 형민이었기에 가슴속에 의구심만 가득 가지고 있었던 그였다. 가이아가 왜 오카리나에게 그렇게 당했는지, 또 자신이 왜 그녀에게 당해야 했는지... 감색 양복 사네의 말이 그 일을 뜻하는 것임을 감지한 형민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이를 갈았다.

“겨우 그 따위 일로 사람을 죽이나...”

“그 따위 일이라니... 그 일은 우리 조직에 매우 중요한 일이라서... 또한 우리는 항상 매사에 철저한 것을 추구한다. 걸림돌은 애초에 치우는 것이 좋지. 자! 이제 이야기는 끝이다.”

두 사네가 형민을 둘러싸고 천천히 조여오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담까지의 거리를 눈어림하는 형민... 그는 그들보다 이 곳의 지리를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앗!”

형민이  기합을 지르자 세 명의 남자는 형민이 공격하는 줄로만 알고 무의식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응?”

되려 그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골목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 뛰어가는 형민...

“골목의 담으로 도망치려 한다. 잡아!”

골목의 코너를 돌아선 세 남자는 전방의 2미터 정도로 보이는 담을 뛰어 넘는 형민을 발견했다.

“제기랄! 빨리 쫓아!”

감색 양복의 지시에 따라 검은 양복의 사네들이 차례대로 담을 뛰어 넘었다. 황급히 그들을 뒤따라 담을 뛰어넘는 감색양복... 그러나 잠시 후 그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으아악!”

밑으로는 거의 1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가파른 방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그의 옆으로 보이는 건 담벼락 바로 옆 틈에 매달려 있는 형민과 바닥과 예쁘게 충돌하여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부하들의 몸이었다.

“커억!”

바닥과 충돌한 감색 양복은 온 몸에 느껴지는 처절한 고통에 신음을 삼켰다. 미리 대비하고 떨어졌다면 지금과 같은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을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씌운 콘크리트... 게다가 떨어질 때 재대로 자세도 잡지 못했다.

“아..아아..으...”

뜨끈한 피가 머리를 타고 눈으로 스며 들어왔다. 엉겁결에 피를 닦으려다 또 한번 비명을 지르는 감색양복, 팔과 다리까지 부러진 듯 하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그의 옆으로 가벼운 운동화의 착지 소리가 들렸다. 옆으로 설치 된 안전한 파이프를 잡고 내려온 형민이었다. 이 곳은 예전에 교양으로 듣던 도시 계획 실기에서 조사한 곳이었다. 위쪽은 평범한 담으로 보이지만 그 곳 바로 뒤에는 지금과 같은 높은 절벽으로 되어 있다. 당시 배운 것이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던 형민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딜!”

감색 양복의 사내가 품에서 검은 광택이 나는 물체를 꺼내려 한다.

재빨리 다가선 형민, 사내의 팔을 걷어참과 동시에 공격당한 팔을 부여잡고 있는 감색 양복의 경동맥을 수도로 연거푸 내려 쳤다.

“컥..컥!”

한 팔로 목을 부여잡고 연신 기침을 해대는 감색 양복, 그의 부하들은 기절을 했는지 아니면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지 미동도 없다.

“흠... 권총까지...너희 정체가 뭐냐?”

“큭큭... 쿨럭, 말해 줄 리가 없잖아.”

군용으로 쓰이는 제식 권총인 베레타이다. 남북이 통일 되고 나서 각국에서 불법적으로 무기들이 조금씩 들어오고는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예나 지금이나 무기 소지는 불법이었고 아직까지 웬만한 범죄에서라도 무기는 사용되지 않는 안전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엿하게 총을 품에 넣고 다니다니 게다가 구식이기는 하지만 명품으로 통해 구하기 힘든 베레타를 지니고 있는 이다. 뭔가 대단한 조직의 일원 같아 보인다.

“그래?”

형민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감색 양복 사내의 상의를 손가락으로 찢었다. 지금 그가 하려는 것은 고도의 손가락 수련이 없으면 불가능한 기술이다. 이 기술에 능숙한 이는 적의 급소를 손가락으로 찔러 마비 혹은 즉사시킬 수도 있다. 또한 지금 그가 하려는 것도 가능하게 해 준다.

“다시 묻는다. 너희는 뭐지?”

“...”

망설이는 검은 양복의 사내... 그는 지금 고민하고 있었다. 목표물이라던 사내가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자신의 갈비뼈를 훑듯 뭔가를 찾듯 위아래로 쓰다듬는다.

“미친... 쿨럭...새끼...”

경동맥을 수도로 가격당한 여파인지 연신 기침을 하는 그다.  말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한 형민은 가차 없이 누워 있는 그의 배에 무릎을 깊게 쑤셔 넣었다.

“커억.... 끄아. 끄륵,, 커억”

남자는 흰자위를 하얗게 드러내며 차마 목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비명을 가래 끓는 소리로 대변했다. 생살이 쑤시며 파고든 손가락이 그의 왼쪽 마지막 갈비뼈를 매섭게 거머쥐었다. 아무리 인적이 뜸한 골목이라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는 법... 비명이 새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배 공격이었다.

“커억.. 콜록.. 끄륵..켁켁..”

검은 양복의 사내는 정신이 없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신물과 토사물은 그의 비명소리를 막았다. 이미 목 부위를 세차게 공격당해 비명조차 지를 수 없거늘, 가해자인 형민은 잔인하게도 배를 공격한 것이다.  거기에 차가운 공기를 타고 그의 뱃속으로 들어온 형민의 손가락이 잡고 있는 것이 무언지 아는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제발...끄아아.. 컥”

꽈득...

형민의 집개와 중지에 시뻘건 피가 묻어 나왔다. 그 밑으로 보이는 건 외부로 빠져 나온 부러진 갈비뼈 하나...

“누구냐!”

“끄어...”

튀어나온 한쪽을 다시 거머쥔 형민은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또 다시 대답이 나오지 않는 다면 이번에는 뽑아버릴 기세이다.

“사람들이 모여들기를 기다리는 거냐? 핫... 한 밤중에 사람을  쳐 죽이려 한 녀석들 치고는 너무 준법적인 것 아냐?!”

“우웁..웁...”

“뽑는다!”

손에  힘을 주었다. 눈물이 쏟아지는  감색 양복의 사내... 부러진 왼팔이 애처롭게까지 보인다.

....................................................................................

과거 와 현재의 만남“자..잠깐...”

“뭐지?”

사내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형민을 제지했다.

“말 할 수 없어! 말 하면 안돼.”

두려움에 떨며 주변을 살피는 감색 양복의 사내, 의아해 하던 형민은 곧 그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한차례 격렬한 떨림...

“아...아”

동공이 회백색으로 변해갔다. 아직 사태 파악이 되지 않은 형민은 그의 맥을 짚어 본 다음에야 현실을 실감했다.

“주..죽었어.”

시체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과 같이 시체와 오붓하게 앉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겁에 질린 형민은 시체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내... 내가 죽인 게 아냐!”

그러나 그 시체가 형민에게 공격당한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다른 사네들의 맥도 짚어 봤지만, 역시나 그들의 맥도 잠잠했다.

“아.. 아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진 형민은 이것저것 볼 것 없이 집 쪽으로 무조건 뛰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 마냥 꿈틀거린다. 입 밖으로 비명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간신히 입을 막고 미친 듯이 집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다음 날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형민은 잠시 멍하니 그의 두 손을 쳐다보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대변하는 듯 그의 손은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들에게 공격당한 팔이며 옆구리도 쓰라리다. 그러나 몸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죽었다. 그의 앞에서... 힘이 쭉 빠지며 노곤해짐을 느낀다.

“어쩌지. 어쩌지...”

쉼 없이 그 자신에게 되묻는다. 물론 그의 생각으로는 하등 걸릴 것이 없었다. 그러나 경찰이 그를 믿어 줄지가 의문이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가족들이며 친구들 학교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 하아...살인 사건이니 이곳저곳 떠들썩하겠지?”

간신히 몸을 일으킨 형민은 컴퓨터의자에 앉아 스위치를 눌렀다.

잠시 후...

“뭐...뭐야!”

지역 사건 사고 사이트에는 어제의 그 살인사건에 대한 어떠한 기사도 올려져 있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뉴스 전문 사이트에서도 검색해 봤지만, 그곳도 깨끗했다.

“경찰에서 감추는 것인가?”

경찰 쪽을 생각해 봤지만, 그것도 신빙성이 없다. 굳이 숨길만한 이유도 없을뿐더러, 경찰이 숨긴다 해도 언론은 피할 수 없다.

도저히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형민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사건 현장에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

꼭 다시 한번 나타난다는 법칙을 이행하는 듯하지만, 그냥 그렇게 쉬쉬하기엔 살인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일이 있었던 장소로 발을 옮기는 형민의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정말 미친 듯이 뛰었다. 아마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모습만으로도 그를 경찰에 신고했으리라. 어제의 그곳에 도착한 형민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곳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지?”

흔적조차 없었다. 어제 그 사네들의 피가 흘렀던 콘크리트 바닥에는 피는커녕 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경찰의 사건 현장 보존 흔적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서성이던 형민은 길을 걸어가던 부부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을 느끼곤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형민은 생각에 잠겼다. 결론은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첫째는 그들 중 한명이 살아남아 나머지를 데려 갔을 확률, 당시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실수 했을 수도 있다. 둘째로는 그들의 동료들, 즉 경찰에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그들의 동료들이 데려 갔을 수도 있다.

“후우...하나 하나 종합해 보자.”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는지 형민은 이미 동네 어귀에 들어서고 있었다. 자신이 그곳을 지나쳤는지도 모른 체 깊은 생각에 빠진 형민...

어제 그 감색 양복의 말에 따르면 오카리나라는 그 가이아와 쌍둥이 같은 여자는 그들의 조직과 연계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오카리나는 가이아를 흡수하고 증거 인멸을 한다며 자신을 죽이려 했다.

“젠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한 차례 목숨을 노렸다면 다시 한번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자신의 바보 같고 안이한 행동으로 지금껏 아무 일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형민은 원룸으로 가던 걸음을 바꿔 경찰서로 향했다. 지금으로선 경찰 밖에 믿을 이들이 없다. 큰 길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던 형민은 멀리서 오는 택시를 잡으려 손을 드는 순간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과거 와 현재의 만남“흡... 흐흡..”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주위 사물이 일그러지며 땅바닥이 갑자기 키스하자며 형민에게 달려든다. 비틀거리며 주위로 잡을 것을 찾아 허우적대는 형민... 비틀거리는 형민에게로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김형민씨, 맞습니까?”

“그... 그런 사람 몰라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 와중에도 형민은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하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다가온 이들과 싸우기에는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형민은 점점 시야가 좁아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아... 안돼!”

형민이 바닥으로 쓰러지려고 하자 두 사내는 황급히 그의 양 팔을 붙잡았다. 뿌리치려 팔을 흔드는 형민이지만, 붙잡힌 두 팔에는 힘이 없다.

“음, 등록돼 있는 사진과 일치합니다.”

형민의 오른팔을 잡은 약간 앳돼 보이는 남자가 형민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며 말했다.

“얼른 옮기자구.”

반대편에서 형민을 부축한 이가 핸드메신저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데려가도 됩니까?”

“그럼 여기서 이 사람이 깨어날 때 까지 기다릴 꺼냐?”

“아... 아뇨.”

잠시 후 형민의 앞으로 중형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서자 남자들은 형민을 뒷좌석에 태운 채 그 곳을 출발했다.

“진우...그는 깨어났나?”

리얼 판타지아사 단지내에 있는 허름한 2층 구조 건물의 작고 낡은 회의실, 리얼판타지아사에서는 이 곳을 비밀회의실이라고 불린다. 게임 초창기 김미경과 그녀의 추종자 에인션트 올드 폐인들이 사용했다는 회의실, 이 곳은 워낙 지하에 만들어 진데다 그들 특유의 음습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취향으로 인하여 이 곳에 처음 들어오는 이는 무슨 어둠의 조직의 고문실로 착각하기도 한다.

예전 게임 투자자들을 데리고 사업 설명회를 했을 때 그들 중 절반은 분위기에 얼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는 헛소문이 횡횡하는 그런 곳이었다. 주훈은 게임 제작자용 임시 숙소에 잠들어 있을 형민에 대해형민을 업고 온 그의 직속 부하에게 물었다. 공식명함으로는 주훈의 직속 비서라 하지만, 주훈은 커피를 가장 잘 타는 이유로 아직까지 데리고 있는 착한 하급자이다.

“아직입니다. 그렇지만 실려 올 당시 실신을 해서 걱정 했는데 지금을 잠들어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래. 좀 더 지켜 봐 줘. 젠장... 누가 보면 납치 했다고 알겠어. 하하”

처음 잠에서 깨어난 형민은 온몸이 진땀에 젖어 있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끌려온 건가?”

다행히 묶인 곳은 없다. 몸도 땀을 좀 흘린 것을 빼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어떤 수로 자신을 기절시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나오던 날 습격 받은 이들의 한패거리들에게 잡혀 온 것이라 판단한 형민은 일단 방안을 살폈다. 물론 형민이 정신을 잃은 이유는 오카리나의 정신공격에 대한 후유증이었다.

“젠장, 어둠의 자식들인가...”

그가 누워있던 이층 침대를 제외하고는 방안은 완전한 창고였다. 단 하나 뿐인 전등으로는 조명조차 너무 어둡고, 그 불빛에 따라 흔들리는 탁자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다 낡은 포스터들이 덕지덕지 붙었지만, 무언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 있고, 바닥에는 빈 술병들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잡혀온 이상, 정당방위겠지.”

밤에 그를 습격한 그들의 행태로 보아 이들은 죽이는 것도 불사할 수 있는 이들이다. 한잠 푹 자고 일어나 마음이 진정되고 보니 어제 죽은 이들에 대해서도정리가 된다. 그건 그가 죽인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가 원격으로 그들을 죽인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자신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면, 그 현장을 치울 이유가 없다. 결론은 이들은 밝혀지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

“정당방위다. 정당방위...”

손목과 허리, 발목을 적당히 풀어준 형민은 주위에서 무기가 될 것을 찾기 위해 둘러보았다.

“그래, 이게 적당하군.”

바닥에 차곡차곡 쌓인 술병 중 하나를 찾아 조심스럽게 깬 형민은 병의 주둥이를 거꾸로 잡고 반대쪽으로 선 유리날을 바라보았다.

“젠장, 으스스 하구만.”

주훈에게 형민의 상세에 대해 보고한 진우는 형민의 상세를 살피고자 게임개발자용 임시 숙소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2층의 허름한 건물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유수한 게임 회사로 탈바꿈 했다 한다. 그런 이유로 신입사원들 이라면 한번씩 모두 거치는 그런 박물관 같은 용도의 건물이지만 이곳은 신입사원들에게 담력훈련의 일환밖에 되지 못하는 그런 곳이다. 지금이라도 저 멀리 보이는 허름한 문이 삐그덕 열리고 피에 젖은 손 하나가 꿈틀거리며 기어 나올 것 같은 기분... 당시 이 방법은 에인션트 올드 폐인들이 신입사원 놀릴 때 자주 애용하던 방법이다.

“어라, 내가 문을 열어두었던가?”

형민을 재워 두었던 임시숙소의 문이 열려 있다. 의아해 하는 진우...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순간 그의 후두부를 강타하는 강렬한 충격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재대로 맞았는지 온 몸의 힘이 쭉 빠져 나간다. 흡사 실 끊어진 인형과 같은 느낌... 그의 등 위로 하나의 발이 떡 하니 올라왔다.

과거 와 현재의 만남“하핫,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여기 분위기를 보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도 있죠. 게다가 그런 일까지 당하셨다니...”

주훈이 아직까지 겁에 질려 훌쩍거리는 진우를 달래며 형민에게 말했다.

“그런데 형민군이 아까 말한 게 정말 사실입니까?”

주훈에게 있어서 형민의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형민의 말은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몇 가지 사건들을 이어주는 실마리이다. 무급 운영자 인에게서 도망친 성기사들과 그들이 찾고 있었던 검은 상자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비정상적인 죽음에 대한 법칙들까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역시 가이아가 오카리나라는 정체불명의 여인에게 잠식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형민이라는 유저를 현실상에서까지 죽이려 했다.

“어쩌나...”

현실상의 유저까지 죽이려 하는 조직이라면 의당 경찰에 의뢰를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 일이 경찰에 알려지면 언론이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게임 이미지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게다가 기자라던가 경찰에서 그 일을 더욱 파고들다가 행여 게임 시스템의 거의 대부분을 관장하는 메인 컴퓨터가 잠식당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것은 정말최악이었다.

“그럼 형민군은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음, 아무래도 일단 경찰에 신고 한 다음 병원으로 가 볼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그 정신을 잃을

정도의 두통이 걱정되서요.”

“후... 그렇군요.”

형민의 말에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는 주훈, 한숨을 푹 쉬었다. 일이 최악으로 향하는 듯 하다. 그렇다고 형민을 감금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러나 경찰에 알려지게 할 수는 없다. 지금 그의 머리는 쉴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주훈은 잠시 후 눈을 반짝 뜨고는 형민에게 말했다.

“그런데...그... 형민군이 당했다던 그 데이터 주입은 사실 저희들이 예전에 진행하다가 치명적 결함으로 중단한 프로젝트입니다. 일반 병원에서는 치료하기 힘들죠.”

“그렇...습니까?”

당황스런 형민, 이미 한번 당해봐서 알지만, 그런 식의 기절은 정말 싫다.

“예, 그리고 설령 외국에서 그런 것을 낫게 하는 기술이 있다 해도, 아마 치료비용이 수 억 원은 넘을 겁니다.”

“하아...”

당혹스러운 형민, 수 억 원 이라면 지금의 화폐가치로 볼 때, 웬만한 고급 자동차 두 세대는 너끈히 뽑을 돈이다. 고민에 빠지는 형민, 게임 계좌에 있는 사이버 머니를 모두 현금으로 바꾸면 얼추 해결 되겠지만, 그런 것은 탐탁지 않다. 물론 게임사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기에 게임사 쪽으로 소송을 걸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일이 재대로 밝혀진 다음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아실지 모르겠지만, 형민군의 게임 캐릭터인 사이토는 라이프 오버 당했습니다.”

일상을 말하듯 평의한 톤의 주훈, 그러나 치료비용으로 고민하던 형민에게는 그 보다 더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에?!”

머릿속이 노랗게 변한다. 현기증까지 날 지경... 계좌가 살아 있기에 사이버 머니라던가 저택은 그대로 있겠지만, 문제는 캐릭터였다.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캐릭터의 죽음... 물론 부활퀘스트를 통해서 살릴 수는 있지만, 고급 계급인 만큼 그 카르마 하락은 엄청날 것이다. 형민이 충격 받은 듯 보이자 주훈은 볼을 긁적이며 재차 형민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계정 자체도 삭제되어 있었습니다.저희 쪽에서 재 검색 해보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뻔 했지요. 물론 저희 쪽에 잘못도 있기에 다시금 복구해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복구 되었다는 말에 일단 한숨 돌린 형민이었다.문득 문이 열리고 아까의 진우가 슬그머니 머리를 디밀었다. 형민의 오해로 이곳저곳 두들겨 맞은 곳이 꽤 많았기에 진우는 형민을 보는 눈이 그리 곱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은 일...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따질 정도의 위인은 아니다.

“강진씨가 와 있습니다.”

“아... 알았어요.”

어떤 말을 꺼내려던 주훈은 진우의 말에 낮은 한숨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를 옮기죠.”

“예”

형민은 주훈을 따라 긴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복도를걸어 나왔다. 앞서 걷던 주훈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형민에게 말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이번 일이 경찰 쪽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민군에게 바라는 건 가이아를 되살리고 그들을 리얼판타지아에서 몰아내는 것을 도와 달라는 겁니다.”

주훈의 요청에 형민은 별로 놀랍다는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입장은 이미 충분히 생각해 봤다. 그러나 이대로 묵과하고 그들에게 맡기기엔 생명의 위협이란 것은 그 무게가 틀리다. 말없는 형민을 뒤돌아보며 주훈은 말을 이었다.

“이것은 극비입니다만 형민군에게만 가르쳐 드리지요. 사실 이 문제는 저희들도 예전부터 추적하던 문제였습니다. 형민군을 습격했다던 이들...저희들이 모은 지금까지의 자료를 보면 분명 국제적인 큰 조직과 연계된 이들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움직임에는 전혀 단서 같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경찰 쪽에 의뢰한다고 해도 경찰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손놓을 겁니다. 그렇게 된 바에야 저희들과 믿어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다. 물론 저희도 비밀리에 인터폴과 연계해 그들에 대해 조사할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형민은 멈춰 서서 팔짱을 끼었다. 여러 가지 사실들이 앞 다투어 거의 판단의 가치 속으로 들어왔다. 혜미 그리고 가이아, 할아버지, 목숨의 위협 등... 결심이 섰다.

“알겠습니다.”

주훈이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보면 얼굴에 표정이 참 다양한 이로도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 표정들까지 완벽한 포장으로 보인다.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과거 와 현재의 만남몇 칠 동안 형민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예전 오카리나의 정신공격에 대한 부작용의 대한 치료가 있었다. 그러나 치료는 끝났지만 그 이후 형민은 계속해서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장면으로 인해 고생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나오는 꿈, 남자는 전혀 생소한 얼굴이지만 여자는 매우 눈에 익다. 그녀는 바로 가이아, 그와 그녀의 대한 단편적인 장면들이 매일 밤 그의 꿈속에 나타났다.

“무엇일까?”

몇 칠 째 잠을 설치는 형민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이아와 의문의 남자...한숨이 나온다. 이제 형민은 애써 부인하고 싶지 않다. 가끔씩 아렷하게 느껴지는 심장의 아픔,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이번 사건에 대한 회사 내부의 조사팀을 소개 받은 형민은 바로 그 다음날 집으로 가 몇 몇 옷가지를 부리나케 챙기고 집안의 모든 전원을 꺼버린 뒤 문을 잠갔다. 자신을 습격한 이들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섣불리 행동하면 위험에 노출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형민의 마음속에 자꾸만 걸려오는 것은 바로 혜미였다.

“하아...”

혜미에게 찾아가고는 싶지만,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은 형민이다.비록 핸드 메신저도 받지 않는 상황이지만,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게임 안에서 만나면 되겠지.”

예전에 이미 혜인에게 대충 혜미에 대한 소식을 접했던 형민은 한숨을 내쉬며 메신저를 껐다. 혜미는 학교실습으로 인해 타 지역으로 갔다고 한다.

혜미와 처음으로 소원해진 기분... 어찌 되었건 그가 실수한 부분도 있었기에 기왕이면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가이아에 대한 감정과 혜미에 대한 감정,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 형민씨... 왔습니까?”

주훈이 소개시켜 주고 간 강진이라는 인물이었다. 몇 차례 통성명이 지난 뒤 그가 지난 번 게임 안에서 가이아에 대한 충고를 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 내 비공개특별수사팀의 리더가 되었다는 강진이 형민에게 다가왔다.

“이곳은 공기가 지독하군요.”

스며 들어오는 빛줄기에 비치는 먼지들을 보며 형민이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총 2층으로 구성된 이 건물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총 3층으로 되어 있는이 건물은 1층이 없는 2층부터 해서 3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지하 1층이다. 그에 대해 강진이 형민에게 해준 설명으로는 환기를 위해 그런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오카리나라는 여자의 정체는 밝혀졌습니까?”

넓은 방으로 안내되던 형민이 앞서 걷던 강진에게 물었다.

“우습게도 정체 불명입니다. 모든 흔적이 지워져 있더군요. 그나마 형민씨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저희는 그녀가 일반 유저가 아닌 특수한 사이버 생명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도 리얼판타지아사와 아주 깊은 관계가 있는...”

“후우... 복잡해지는 군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형민이다. 그런 형민을 바라보는 강진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가이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총괄하는 것은 실상 그 자신이었다. 그런 그녀가 신변상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도 몰랐다. 약간의 어색함과 딱딱함... 그것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냥 무시했다.

“이제 사냥의 시작입니다.”

형민에게 들릴 듯 안 들릴 듯 조용히 읊조린 강진은 서둘러 3층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부 조사 결과 리얼판타지아사 내에 외부세력들의 끄나풀이 있다는 조사 결과에 특수팀의 본부로 삼은 곳은 리얼판타지아사의 초창기 건물이었다. 그 건물의 가장위윗층에서는 지금 여러명의 남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간단한 셔츠 차림의 강진은 몇 몇의 연구원들을 형민에게 소개하며 방 안쪽에 마련 된 여러 기기들 앞으로 다가갔다. 방안은 이 전에 모니터실이었는 듯 여러 개의 의자들과 기기들이 즐비하다. 조금 전 자기소개에서 일명 ‘포획조’라고 소개한 연구원들이 각각 장비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그 오카리나라는 여자는 가이아... 즉 메인 시스템 AI의 감정 통제 장치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연구원들과 함께 몇 몇 컴퓨터 기기를 점검하며 강진이 말했다.

“형민군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1급 AI의 경우 인간과 99프로 같은 감정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임 시스템 자체가 워낙 수많은 카오스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1급 AI가 아닌 경우에는 그것들을 모두 처리하기 힘들죠. 그렇지만 그 1급 AI에도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격렬한 감정의 변화입니다.”

위이이잉...

방 전면의 거대한 모니터가 열리는 동시에 좌우로 몇 개의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며 몇 명의 남자들이 약 3미터 크기의 여러 개의 전선이 연결되어 있는 게임용 기기를 끌고 들어왔다. 몇 개의 전선을 컴퓨터에 연결한 강진은 형민에게 계속해서 설명했다.

“아직 1급 AI의 격렬한 감정적 변화에 의한 부작용을 해결하지는 못하였기에 저희도 다른업체와 같은 편법을 사용하지요.”

한 남자가 형민에게 옷 곳곳에점들이 찍힌 민망스런 푸른색 타이츠를 주었다. 강진이 입으라는 시늉을 하자 형민은 그 타이츠를 불만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며 강진에게 물었다.

“그 편법이란게 뭡니까?”

“예, 1급 AI가 격렬한 감정적 변화를 일으키기 전, 1급 AI를2급 AI로 제한시키면서 AI의 본체

심층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거지요.

오카리나라는 그 여자는 그 부분을 노려 가이아의 심층에 침투한 듯 합니다. 후우, 정말 그 부분을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잡아내다니. 보통 그 순간은 1초의 몇 만분의 1인데 말입니다.“

형민은 연구원들의 안내를 받아 그 게임기기 위에 누웠다. 형민의 위로 거대한 반원통형의 뚜껑이 공중 1미터 정도에 설치되었다. 그 원통의 안쪽에는 수많은 붉은 판들이 붙어 있었다. 형민의 머리 위로 가상현실 게임을 할 때 쓰던 헬멧이 살며시 끼워졌다. 시야가 컴컴해지자 형민은 손가락 하나하나에 덮인 타이츠의 답답함에 주먹을 쥐었다 펴며 강진에게 물었다. 정말 마음에 안드는 옷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뭐, 어쩔 수 없이 저희도 같은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행히 상대 쪽에서는 아직 우리를 감지하지 못하기에 다행입니다만, 가이아의 심층에 접근하는 방법은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으로는 가이아를 정지 시키지 않고 시스템의 권한을 저희 쪽으로 돌리는 방법은 최선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서버 점검 같은 것으로 외부와 차단한 뒤 가이아를 치료하면 되지 않습니까...”

헬멧 안쪽에 붙은 세 개의 금속판이 그의 머리에 와 닿는 것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그의 옷 곳곳에 찍힌 점들이 차가워 졌다가 뜨거워 졌다가 한다. 형민의 말에 강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스크린 앞에 마련 된 의자에 앉았다. 자신이라도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서버점검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해결책에는 상당히 큰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서버 점검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서버 점검은 곧 초기화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때문에 서버 점검의 상황을   방지하지 위해 그 수많은 운영자들이 존재하는 거지요. 뭐,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판단할 것이고...

말을 잠시 쉰 강진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아무튼 형민씨가 지금까지 가르쳐 주신 정보를토대로 저희가 세운 계획은 그 오카리나라는 여자가 한 것과 아주 똑같습니다.”

어두운 시야 위로 작은 스크린이 떴다.

“형민씨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뒤에는 저희가 있으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시고 천천히 진행시켜 주십시오. 형민씨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우리는 형민씨를 미끼로 오카리나를 잡아야 하는 형편입니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들을 모두 읽은 형민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엿같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형민씨의 캐릭터...일단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괴물을 만들어 봤습니다. 그리고 현재 사이토씨는 이 방 전체를 게임기기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능력치에 따른 부작용은 극소일 것입니다. 자!카운트 시작!”

강진의 카운트 소리가 천천히 형민의 귓가에서 사라져 갔다.

과거 와 현재의 만남“엿같군. 엿같아...”

사이토는 하얀 벽돌로 이루어진 작은방에서 장비를 점검하며 중얼거렸다.

현재 사이토는 강진 외 연구원들에게 그의 모습이 모니터 되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꺼내 주겠다는 뜻, 물론 사이토도 오카리나의 그 정신공격을 다시금 경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호! 오호!.”

캐릭터창을 열어 보던 사이토는 짧은 경탄을 지르며 창을 닫았다. 일시적이기는 하겠지만, 사이토의 숙련도는 모두 99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나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스텟도 각각 5씩 더 올라가 있는데도 이전과 같은 부작용이 없다는 것이다.강진은 사이토를 일반 캐릭터의 능력 안에서 최대의 능력치 상승을 준 것이다. 게다가 아이템면에 있어서배낭 안에 잠들어 있던 디스코어도 크기 조정을 해주었다. 물론 길이는 변하지 않았지만 전처럼 무식하게 두껍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강진이 제공한 아이템으로는 황당하게도 “무급 운영자용 로브” 가 들어 있었다. 리얼판타지아사의 로고만을 지운 듯한 검은색의 로브 ... 그러나 그런 기분 좋은 소식들은 지금의 사이토에게는 그리 위로가 되지 못했다. 강진의 브리핑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오카리나의 찾아내고 그녀의 공격을 최소 4시간 동안 막아낼 것.]

게임 상으로는 4시간이라고 하지만 현실로는 거의 20분이다.

“하아...”

헬레나와 헬리오스 그리고 디스코어를 허리춤에 장비한 사이토는로브를 이용해 익숙한 몸짓으로온 몸을 가렸다. 특이하게도 능력치 상승에 의한 부작용은 전혀 없다.

“나가 볼까?”

밖으로 나서니 아침이 오려는 듯 먼 곳에서부터 동이 터오고 있었다.

“아리유인가?”

주위를 둘러본 사이토는 잠시 멈칫거리다가아리유의 거성이 있는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오카리나를 어떻게 찾지?”

강진과 함께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일단 게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오카리나가 저절로 접근할 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막상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건 너무 막연하다.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뭐, 일상처럼 움직이면 되겠지.”

거리는 한산했다. 새벽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곳은 게임 안이다. 단순히 새벽이라는 생각에 잠이나 자려 여관방에 처박히지는 않는다.

몇 몇 거리를 지났건만 예전에 장사를 하던 유저들도 통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북쪽 성문에서 한 파티가 막 어딘가로 출발하려 한다는 것이다.

“저 말씀 좀 묻겠는데요. ”

“음, 물으시오.”

허리춤에 등에 두 자루의 블레이드를 찬 드워프가 리더인 듯 사이토에게 대답했다. 꽤 멀리 떠나는 여행인 듯 짐이 상당하다.

“아리유에 사람이 별로 없군요.”

형민의 물음에 드워프는 형민의 위 아래를 쭈욱 훑어본 뒤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접속하시는 모양이구만. 곧 전쟁 이벤트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로 웬만한 길드라던가 유저들은 모두 데이모스로 집합했지요.”

“아, 그래요.”

드워프의 말에 형민은 자신이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던 시간을 생각해 보다가 곧 머리를 뒤흔들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전쟁 이벤트가 아니다.

“일행이 없으시다면 함께 가시겠수? 보아하니, 일행이 없는 듯   한데...”

“괜찮습니다.”

드워프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한 형민은 그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도시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카리나, 어서 나와라.”

필드도 아니건만, 사이토는 나침판을 꺼내 들었다. 너무나 조용하다. 사이토는 최대한 건물들이 많이 밀집한 거리만을 골라 방향을 잡았다. 오카리나와의 싸움에서 다른 유저들이 휩쓸릴 수도 있지만, 원채 도둑클래스는 복잡하게 얽힌 골목이나 건물의 미로에서 제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것저것 따진다 해도 도둑은 기습적으로 벌어지는 전투에는 밀리는 클래스이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강진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았다지만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이토이다. 문득 식스센스에 뭔가 걸리는 듯한 느낌에 멈춰선 사이토, 그러나 그 느낌은 곧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는 형민 좁은 골목들 사이로는 휭하니 바람만 싸늘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변에 꽤 높아 보이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주변을 살펴봤지만, 그 이후로는 잠잠하다.

“아무것도 아닐까?”

가만히 몸을 수그린 채 사이토는 주위를 세심하게 둘러보았다.

“헉!”

순간 주변의 모든 공기가 모든 물체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사이토는 모두가 적으로 보였다. 무형의 공기마저도 그를 적대하는 양 숨 막히게 다가온다. 당황하여 몸을 더욱 낮추는 사이토... 그것은 천행이었다.

피이이잉!

귓가를 찢어버릴 양 한 대의 화살이 그의 머리위로 지나갔다. 황급히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몸을 돌리는 사이토... 그곳에는 2명의 경비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중 궁수로 보이는 경비가 그를 향해 활을 겨눈다.

“제기랄!”

오카리나를 너무 얕본 것일까? 이미 식스센스는 마비상태였다. 사이토는 재빠르게 건물에서 뛰어 내렸다. 각 도시를 맡고 있는 경비들은 모두 9계급들이다. 비록 스킬은 사용하지 않지만, 9계급 이라는 것은 이미 위협의 수준을 넘어선다.

파아아앙!

연이어 두 대의 화살이 형민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 맞은 편 벽에 작렬했다. 화살은 거의 절반 이상 들어박혀 있고 화살이 박힌 곳은 날카로운 폭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살인자를 잡아라!”

NPC인 경비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 알아챘는지 골목 요소요소로 뛰어 들어오는 창 든 경비들은 정말 저주하고 싶은 심정의 사이토이다.

주춤하는 사이토, 골목들을 이용해 경비들을 따돌려 보려 하던 형민은 어느새 그가 포위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비들은 일반 유저들이 아니다. 게다가 경비들의 뒤에는 오카리나가 있을 것, 흡사 미로에 갇힌 쥐새끼의 꼴이다. 따돌린다는 것은 무리이다.

“저항을 포기하라.”

“웃기네.”

경비의 말을 비웃으며 사이토는 허리춤에서 헬레나와 헬리오스를 쥐었다. 저항을 포기하면 어떻게 될지 뻔하다. 빤히 그를 죽이려 활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다.

찔러오는 두 개의 창을 피해낸 사이토는 순식간에 둘의 뒤로 돌아가 백스텝을 스킬을 넣었다.

과거 와 현재의 만남채챙!

“칫!”

믿을 수 없게도 두 개의 단도는 경비의 체인메일을 뚫지 못했다.

주춤하며 물러서는 사이토, 보지도 않은 채 뒤로 휘둘러지는 두 개의 창은 매섭기만 하다. 경비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이제는 앞 뒤로 완전히 포위된 상황... 셀 수 없는 화살이 그에게 날아왔다.

“팬텀 피규어!”

팬텀 피규어로 화살을 피함과 동시에 에테르 스킬이 전개된다. 벽을 뚫고 옆 건물로 스며드는 사이토, 위기일발이었다.

“흐아앗!”

잠시 숨을 고르던 사이토는 거의 머리위로 들려오는 기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NPC주방장이 거대한 부엌칼로 그의 머리를 쪼개려 한다.옆으로 굴러 피한 사이토... 그를 노려보는 주방장의 눈이 자못 살기가 넘친다.

“어딜 도망가! 도미야!”

“난 요리재료가 아니란 말야!”

사이토를 향해 부엌칼 난도질을 퍼붓던 주방장은 잠시 후 그 목에 사이토의 헬리오스가 꽂힘으로써 하얀 빛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 정말 살인자인가?”

온몸에 울긋불긋한 문양이 나타난다. 살인자를 뜻하는 저주의 문양 ... 형민이 뚫고 들어온 곳은 음식점이었다. 탁자에 앉아 있던 몇 몇 유저들이 무기를 뽑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살인자다!”

“살인자 주제에 겁도 없이 아리유로 들어오다니!”

음식점 안은 금 새 살기가 가득 찼다. 초보자들인 듯 두 남자가 음식점 한 구석에서 현 상황을 흥미 있게 구경하고 있고, 단박에 유저들의 표적이 된 사이토는 난감하기만 하다. 식스센스는 이미 완전히 마비되었다. 꼭 수염 잘린 고양이가 된 기분...

“끝내 나타나지 않을 건가?”

오카리나가 옆에 있는 듯 사이토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와이어를 뽑아 들었다. 주춤하는 유저들... 그러나 접근하는 발걸음을 계속된다.

“뭐, 살인자한테 죽었다고 하면 너희도 불만 없겠지.”

생각해보니 굳이 살인을 피할 필요가 없다.

음식점 문을 박차고 굴러 나오는 사이토... 상처를 입히기는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날아드는 화살... 경비들이 악착같이 달려든다. 활을 든 경비들에게 접근한 사이토는 주먹을 뒤로 돌리고 숨을 골랐다.

“그레이브 스피릿!”

발동시간 없이 순식간에 형성되는 그레이브 스피릿! 근 4미터에 달하는 그레이브 스피릿으로 활 경비 둘을 갈라버렸다. 세 개의 창이 찔러 들어온다. 공중으로 솟구치는 사이토, 와이어를 날렸다.

“뭐야!”

날아가던 와이어가 공중에서 기이하게 꺾이며 땅으로 힘없이 떨어진다. 무릎에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에 사이토는 무릎을 꿇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수명의 경비들이 창을 치켜들었다.

“젠장!”

사이토는 눈을 감았다. 가슴과 다리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

목과 머리로 이물질이 뚫고 들어온다.

“죽는 건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라이프 오버 글씨는 뜨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는 사이토, 경비들은 제 할일이 다 끝났다는 듯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고 있고, 사방에서 느껴지던 살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문득 머리 한 부분이 슬슬 가려워진다.

“큭!”

머리에 박힌 화살이 손에 만져진다. 가슴과 다리의 창상도 그대로지만, 의외로 움직이는데 불편함은 없다. 비틀비틀 일어선 사이토에게 메시지가 들려왔다.

[형민씨 괜찮으십니까?]

강진이었다. 머리에 박힌 화살을 뽑아들으며 사이토가 대답했다.

[글쎄요. 머리에 화살 맞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지만, 그걸 내 손으로 뽑아내는 것도 특이하군요.]

[지금 제가 사용하는 것은 운영자용 라인입니다. 현실과는 몇 초의 차이가 있지만, 생각해 주시고요. 현재 저희들이 경비들과 필드에서 이루어지는 이상 현상을 고쳐놨습니다.]

몸에 새겨졌던 살인자 문양도 서서히 사라져 간다. 음식점에서 뛰쳐나와 사이토에게 달려들던 유저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자리를 떠나갔다. 몸에 새겨졌던 상처들이 하나하나 아물어가자 형민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비이냥 거렸다.

[참 빨리도 고치시는 구려.]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카리나는 지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더 이상 접근하지 않는다.

[로그 아웃 하시겠습니까?]

강진에 물음에 사이토는 한숨을 쉬었다. 4시간 이상 잡아놓기는커녕 단 30분도 버티지 못했다. 게다가 낌새를 눈치 챈 오카리나는 더욱 조심하게 될 것이다. 사이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구경하던 몇 몇 유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창에 찔려도 안 죽어.”

“머리에서 화살을 뽑았어.”

“칫...”

그들을 한번씩 째려 준 사이토는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카리나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 전투의 순간, 발에 밟히는 모든 것이 그의 적이었고, 피부에 와 닿는 모든 것은 모두 그를 적대시한다. 무급 운영자용 망토로 인해 거의 좀비와 같은 생명력을 얻기는 했지만, 이것은 밟아도 죽지 않는 지렁이만도 못한 꼴인 것이다.

“후우...”

헬맷을 벗어들은 형민은 연구원들의 도움을 받아 기기에서 내려섰다.

“뭐하는 것입니까?”

형민이 묻자 강진은 써 내려가던 종이를 한 편에 내려놓고 한숨을 내 쉬었다. 심각하게 고심하는 듯 인상이 온통 찌푸려져 있다.

“상부에 올릴 보고서입니다.”

종이를 구겨 방 한구석으로 던져버린 강진은 팔짱을 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서버점검 하는 것에 찬성입니다. 그렇지만 상부에서는 그 오카리나라는 것을 잡아서 요즘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추적하고 싶어 하죠. 이대로 가다가는 가이아가 망가져 버릴 것 같아서 걱정이군요. 뭐... 물론 상부에서도 과거처럼 초기화 사태를 바라지만은 안겠지만...”

드러난진실,조용히 아파하는 연인들..강진의 말에 형민은 순간 머릿속이 반짝 하는 것을 느꼈다. 잊혀 졌던 기억들이 망각의 바다에서 하나하나 솟아오른다. 아니 그 당시에는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그 온몸을 산산이 부수던 그 기억들... 그 기억의 단편이 강진의 말에 의해서 떠올랐다.

‘나는 당신이 있기 전의 자아... 가이아, 그 이름은 그 옛날 나를 가리켰어. 나는 리얼 판타지아에서 소멸... 즉 삭제 당했지요. 오랜 시간이지난 후데이터가 그들에게 재생되었을 때... 계승자...’

고통에 몸부림치던 와중에 그의 귓가에 들려오던 오카리나의 목소리이다.

“혹시, 그 초기화 때 메인 컴퓨터의 AI도 삭제 당했습니까?”

컴퓨터 앞에 앉아 형민이 잠시나마 오카리나와 조우했던 당시의 데이터를 검색하려던 강진은 형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 이지만, 당시 문제는 AI 였다고 하죠. 초기화됨과 동시에 그 AI는 삭제 당하고 당시 그 AI를 맡았던 관리자들도 모두 해고 되었습니다.”

형민의 머릿속으로 묘한 추측 하나가 조합된다.

“혹시, 그 관리자가 AI를 삭제하지 않았거나 누군가가 다른 경로를 통해 되살려 냈다면?”

“무슨 소리입니까!”

형민은 뒤늦게 생각난 사실들을 강진에게 빠짐없이 말해 주었다.

형민의 말이 계속 될수록 강진의 눈이 더욱 커져 간다.

“왜 그 사실을 이제 말하십니까!”

“저도 이제야 생각났습니다.”

강진이 방을 서둘러 뛰쳐나간 뒤 형민은 몇 칠 간 그를 볼 수 없었다.

원래 목숨에 대한 위험과 의문의 조직 그리고 가이아에 대한 일로 머물고 있던 형민이었다.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형민은 리얼 판타지아 구 건물을 돌아다니며 Rogas 시험을 대비해여러 가지를 공부했다.

“일종의 현장실습이죠.”

“하하...그런가요?”

잠시나마 함께 일하게 된 연구원들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친구들은 게임 회사 같은 곳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가 서류정리 같은 일이나 하며 배운다지만 형민은 지금 생생한 실무 경험을 현장에서 쌓는 중이었다. 게다가 리얼판타지아는 지금의 Rogas 시험을 있게 한 게임이었다. 시험 내용이 상당부분 리얼판타지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에 공부가 따로 필요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몇 칠... 강진에게서 소식을 기다리는 형민은일의 진척에 대해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강진과 헤어진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그 동안 연락도 없고 연구원들도 그에 대해 일언반구 말이 없다.

“답답하군.”

리얼 판타지아는 현재 전쟁이 한창 이었다. 리얼 판타지아의 전쟁은 현실로 대략 한 달간 치러진다. 리얼 판타지아의 전쟁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 행사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 수많은 전쟁사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들러붙어 이번 전쟁에 대해서 연구한다. 판타지를 기본 근간으로 하여 만든 게임이라고 하지만, 일단 그 사실성의 극단적 추구로 인해 전쟁터는 정말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처절하다고 한다. 게다가 게임의 역사가 길고 유서 깊은 세력들이 많았기에 전쟁 중에는 수많은 전략과 전술이 난무한다.

그러나 역시 이런 대규모 전쟁이 가능 한 것은 전쟁 이벤트에 대한 리얼판타지아사의 전략이 숨어 있다. 개전과 동시에 죽음의 법칙은 변경된다. 물론 죽었다가 바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전쟁 중 죽었던 이들은 모두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상품도 대단했다. 리얼판타지아의 업데이트는 일년에 단 한번이다. 수많은 아이템과 새로운 몬스터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을 진정으로 그렇게 전쟁에 열광시키는 이유는 전쟁에 승리한 왕국으로 새로운 지역의 업데이트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지역이니 만큼 새로운 아이템과 퀘스트가 무궁무진하다.

"카마 프라하왕국이 밀리는군.“

커피를 마시며 게임매거진을 읽던 형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쟁 이벤트의 절반이 지나간 지금 연신 패퇴하고 있는 것은 카마프라하왕국이었다. 전쟁 이벤트의 승리 조건은 아주 단순하다. 한 달간의 전쟁이 끝난 후 누가 가장 많이 상대 영토로 진격을 했느냐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된다. 현재 카마프라하 왕국은 이미 데이모스를 잠식당하고 아리유의 코앞 까지 카모프왕국에 점령당한 상태이다. 기사란 밑 전문가란에 쓰여진 말에 따르면 카마프라하 왕국이 연일 패퇴하는 이유는 왕국 내 중추길드의 부제라고 쓰여 있었다.

“기존 카마프라하왕국의 중추 길드이던 아이아스 총길드가 무너지고 새로이 급부상 하고 있는 중소 길드들은 아직 기반이 부족하다. 또한 각 도시에 상주하고 있는 대표길드들의 전쟁 불참으로 전쟁이 중반을 지난 지금 이미 전세는 카모프로 기울고 있다.”

매거진을 읽어 나가던 형민은 문득 커피가 다 식어버린 것을 느끼고는 책을 덮었다.

“내 책임일까?”

양심에 가책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게임을 하는 이들은 아마 미스틱핸즈를 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그로 인해 지금의 참패가 있는 것이니까...

“다른 이들은 뭐하고 있으려나...”

노인정길드를 포함해 발키리아 길드, 레드 플러그 길드, 데스 스타 길드등 형민이 알고 있는 길드들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생각해 보면 모두 카마프라하 왕국에서 한 수 접어준다는 길드들이다. 매거진에 나온 소식으로는 그가 알고 있는 길드 중 발키리아 길드만이 전쟁에 참여 했다고 한다. 어차피 레드 플러그 길드는 전투 길드가 아니기에 논외로 친다고 하지만 노인정 길드라던가 데스 스타 길드는 모두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길드이다. 그런 그들이 빠졌다는 것에서부터 카마프라하왕국의 패배는 결정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드러난진실,조용히 아파하는 연인들..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전쟁 이벤트라고 모두가 참여하라는 법은 없다. 물론 그들의 구역으로 카모프왕국이 침범한다면 싸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노인정 길드는 알다시피 카마프라하왕국 남쪽 빌로아에 위치한다. 그리고 데스스타 길드는 그 입구의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공격당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혜인이... 스티브씨... 미카엔... 스틱스의 검... 그리고 혜미...”

천천히 그의 지인들의 이름을 나열하던 형민은 잠시 후 낮은 한숨을 내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아무래도 혜미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위험하다는 것 때문에 만나지는 못했지만, 지금 만나지 않으면 영원히 골을 쌓을 듯싶다.

“어디 가십니까?”

진우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민보다 3살이 많기는 하지만, 저번에 당한 일이 있어서인지 형민에게 만큼은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잠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밖은 위험하다고...”

간단한 세수를 하고 옷을 챙기는 형민의 뒤로 진우가 계속 따라 붙었다. 아마 강진이나 주훈에게 그의 신변에 대한 단속을 명령 받은 듯 보이지만 그의 사정을 봐줄 정도로 형민은 착하지 않다.

“이봐요!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입니다!”

진우가 계속해서 귀찮게 달라붙자 형민은 그에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형민의 박력에 밀린 듯 주춤한 진우... 잠시 꾸물거리더니 잠시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자동차 키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면허 있으십니까?”

“예”

“그럼 회사차를 사용하십시오.”

“예, 그러죠.”

형민은 리얼판타지아사를 벗어나 전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올랐다.

“후우...”

형민은 고속도로로 올라서면서 차량 내의 자동항법 장치를 사용했다.국도에서는 워낙 도로가 복잡했기에 자동항법장치를 쓸 수 없었지만, 고속도로에서는 그 흐름이 단조롭기에 거의 대부분이 자동 항법 장치를 사용한다. 좌석을 뒤로 민 형민은 등받이를 완전히 내린 의자에 몸을 뉘였다. 핸들 옆에 붙은 스크린에는 목적지까지의 도착시간이 깜빡이고 있다.

차 안에 멍하니 누운 형민은 잠시 핸드메신저를 들어 혜인과 몇 마디 나눈 뒤 눈을 감았다.그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가슴이 아픈 듯 손으로 몇 번 쓸어 내렸다.

“젠장...”

혜인의 집 근처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형민은 근처 꽃집에서 장미 한 다발을 산 뒤 혜인의 집으로 향했다. 사실 혜미는 학교 실습을 가지도 않았다. 그 사실은 출발하기 전 혜인에게서 알아낸 것, 단순히 그를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뿐이다. 거짓말까지 하며 자신을 피하고 싶어하는 혜미의 행동에 가슴이 아픈 형민이다.

띵동...

혜미의 집 초인종을 누른 형민은 잠시 후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혜미의 어머니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구세요.”

“혜인이 친구 형민이입니다.”

“...”

의당 친구 어머니라면 알고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솔직히 혜인의 집에 와보는 것은 두 번째 초인종 눌러보기는 처음이다. 게다가 혜미의 어머니...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진다.

20분이 지났건만, 감감 무소식이다. 슬슬 조바심이 나는 형민은 조심스레 담장 매달려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보기도 했지만, 대문을 열리지 않았다.

삐리링...

핸드메신저가 울렸다.

“여보세요.”

“야! 쳐들어와!”

전화기를 붙잡고 소곤대는 듯하지만 급박한 혜인의 목소리!

“무...무슨 소리야!”

“아,새끼! 얼른 쳐 들어 오라니까! 너 지금 아니면 혜미 얼굴 못 본다!”

어리둥절한 형민, 뭔지 모를 급박감이 머릿속을 엄습한다. 일단 문이 잠겨 있었기에 형민은 근 2미터 정도 되는 담을 훌쩍 뛰어 넘었다.

삐요 삐요 삐요!

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담을 뛰어 넘은 형민은 곧장 정문으로 향하였다. 마당이 그리 넓지 않는 단독주택이었기에 금새 문에 다다른 형민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현관문의 개폐 여부를 살피고는 곧장 문을 열었다.

“오... 오빠?”

드러난진실,조용히 아파하는 연인들..산발한 머리에 하얀색 체육복 바지를 입은 혜미가 어머니로 보이는 분의 손에 질질 끌려나오고 있다. 형민을 멍하니 쳐다보는 혜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반대쪽 멀리 보이는 문이 빼꼼히 열려 있고 그 방안에서 은폐 엄폐한혜인이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있다.

“혜미, 머리 정리 하고 나오렴.”

어머니가 현재 혜미의 상태를 일깨워주는 한마디를 던져주자 혜미는 그제야 그녀의 상태를 깨달았다.

“으...으응”

목소리 와는 다르게 방으로 뛰어들어가는 속도는 전광석화이다. 그런 혜미를 멍하니 쳐다보는 형민의 옆으로 혜미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요. 얼른 들어와요.”

형민이 거실 소파에 앉자 준비하고 있었던 듯 혜인이 은근슬쩍 방에서 나와 소파에 앉는다.

“아까... 뭐냐?”

형민의 물음에 혜인은 주방으로 걸어가고 있는 어머니를 힐끔 쳐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너, 혜미와 사귀는 거 우리집에 이미 소문 다 났다.”

“알고 있어.”혜미가 예전에 해 줬던 말이었다. 발렌타인 데이 때 큰오빠에게 운전을 부탁했다는 것, 그 오빠라는 사람이 집으로 가서 모두 떠벌리는 바람에 추궁에 못 이겨 다 말했다는 것 등...

“그럼 쉽겠네. 요즘 우리집에서, 네 이미지가 어떨 것 같냐?”

“흠...”

처음 생각해본 문제였다.

“죽인다. 살린다.로 투표 중이었다.”

“으..으응, 그러냐? 결과는?”

재치로 답한 듯 하지만, 혜인의 눈에는 한심하게만 보인다.

“뭐, 방금 쳐들어 온 걸로 일단은 살리는 거 같다. 사실, 요즘 혜미가 꽤 고민이 많은 듯, 수척해 졌거든. 그래서 어찌 어찌 부모님들도 알게 되신 거 같고, 그 나마 어머니께서는 용기 있는 남자를 좋아하시니까 네가 뛰쳐 들어온 걸로 일단 어머니는 좀 점수를 땄다고나 할까”

혜인과 이야기를 끝낸 후 형민은 어머니 되는 분과 꽤 오래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미래의 장모님이 될 지도 모르는 분과의 대화이기에 형민은 대화 내내 잔뜩 굳은 얼굴로 묻는 말에 대답해야 했고, 그 시간은 혜미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

“하하, 엄청 떨리네.”

“...”

장미꽃이라도 안겨 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변화를 모색하고 싶건만 장미꽃은 이미 어머니의 손아귀로 떨어진지 오래이다. 조용히 앞서 걷는 혜미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형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기실 그를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혜미였다. 물론 2시간이라는 시간차가 있기에 좀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구해 주었다는데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집 밖을 나와 근 30분을 함께 걷기만 하자 형민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은근 슬쩍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랍도록 무표정하다. 문득 그녀와의 거리가 당금의 단 1미터가 아닌 수천 수억 킬로미터로 보이는 건 왜일까... 단지 무표정하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형민은 가슴이 아파왔다.

“하아...”

한숨이 터져 나온다. 혜미에 대해서 생각하기만 하면 무심결에 쏟아지는 한숨...

“나... 예전에는 항상 편안했어요.”

혜미가 입을 열었다.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형민...

“그런데, 요즘 들어 계속 해서 불안하고, 안정하지 못해요.”

‘당신 때문이야!’ 형민의 가슴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혜미가 입을 열진 않았지만, 그 자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또 다시 한참의 침묵이 오갔다. 기실 형민은 뭐라 말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그 소리는 목안에서만 감돌아 사라지고 만다.

“미안...해.”

한 참이 지난 뒤에야 형민은 그 말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너무나 무책임한 한마디, 책임감 따위는 찾아 볼 수도 없고, 안정감 따위도 줄 수 없는 그런 한마디이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그 수많은 단어들을 재대로 조합하여 말하기엔 그의 입은 현재 얼어 있었다. 지금의 단 한마디를 제외하곤...

“오빠는 해삼, 멍게, 말미잘, 바보야.”

“사랑해.”

형민의 말에 잠시 움찔하는 혜미, 볼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저지른 많은 실수들이 머리를 스친다. 앞서 빠르게 걷는 혜미,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이아의 일이 걸려오기는 했지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붙잡지 않으면 영영 놓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혜미야!”

형민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끌자, 혜미는 돌아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놀랍도록 차가운 얼굴, 머릿속까지 냉랭해지는 형민이다.

“바보...”

한숨을 내쉬는 형민... 돌아서려는 형민...문득 그의 손이 따스해진다. 형민의 손을 붙잡은 혜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러난진실,조용히 아파하는 연인들..리얼판타지아 본사 구건물로 돌아온 형민은 마침 진우와 함께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강진을 만날 수 있었다.

“조금 늦으셨군요.”

“예...”

혜미와 헤어져 그대로 서울로 올라왔지만, 시간은 컴컴한 저녁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자는 강진의 말에 마침 저녁식사를 하지 못한 형민은 흔쾌히 승낙하며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강진을 봤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지금 그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기도 한 그 일... 형민의 물음에 강진은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얼굴 표정을 굳혔다. 그리 잘 진행된 것은 아니리라는 예감, 형민은 침묵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일단 당시 해고된 프로그래머에 대해 추적했습니다. 용의 선상으로는 단 한명이 나오더군요. 바로 저의 위로 2번째 전임인 정현문씨 였습니다. 2016년부터 저희 게임사에 근무하다가 첫 초기화 사태 때 책임을 물어 해고된 사람이지요.”

“그래서요.”

“조사팀이 그 자 주위를 탐문해 본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전혀 깨끗합니다. 현재 제약회사의 시스템 부에서 일하는 정현문은 아주 평범했습니다.”

“후우...그렇습니까...”

어느새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간 듯 하다. 실망하는 형민, 형민의 표정을 살피던 강진은 후식으로 나온 음료로 입을 축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희는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

“그는 과거에 세계 굴지의 해커이자, 국내 일 이 위를 달리던 남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평범한 제약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이 이상했지요. 그래서 더욱 심도 있게 조사해 본 결과, 그가 해외에 근간을 둔 어떤 조직과 연계해 불법적인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후로는 인터폴과 연계해 그를 직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

기뻐할 일이건만, 강진의 얼굴을 어둡기 그지없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강진은 글라스 안에 맴도는 액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쁜 소식이었다. 아주 나쁜 소식이었다. 게다가 가이아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던 또 그녀에게 정을 주던 강진이기에 너무도 안 좋은 소식이었다. 물론 형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은 일급 비밀입니다만 그 일에는 미국의NOSS( Neo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일명 노스라는 국가 방위 조직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리얼판타지아의 북미지부마저도 그들과 연계해 일을 꾸몄더군요. 또한 국내 쪽으로는 일본인으로 구성된 반 사회단체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죠? 리얼판타지아 본사마저 그들의 손이 뻗치고 있었습니다.”

마침 진우가 늦은 식사를 하려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를 손짓으로 부른 강진이 그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잠시 불평어린 표정을 짓던 진우는 불만어린 발걸음으로 식당 문을 다시 나섰다.

“그들이 비밀리에 연구하던 것은 일종의 인간에게 적용되는 사이버 바이러스라고 하더군요. 더 자세한 내용은 저도 알지 못하지만, 일단 그 노스라는 조직은 정말 웃기게도 임상실험장소로 우리 아시아 쪽 서버를 선택한 듯 합니다.”

강진은 그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 비상식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형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강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노스라는 미국의 국가 단체는 그도 알고 있을 정도로 알려진 미국의 국가기관이었다. 아니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임상실험용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

“글쎄요. 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 사이버 바이러스라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임상실험을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이 필요 할 거라는 거죠. 인간의 정신에 사용할 것이니 실험을 위해 필요한 것도 인간의 정신, 간단한 논리일 겁니다. 그들의 가치관으로는...”

“뭐요?!”

형민은 강진과의 사이를 가로지른 나무 테이블을 수도로 내리 쳤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두 동강 나버리는 나무테이블이다. 식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던 연구원들을 모두 그 둘을 휘둥그레 해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강진은 미동 없이 의자에 앉아 있다. 물론 나무 테이블이 박살나자마자 그의 머리로 날아온 형민의 주먹에는 찔끔했지만, 일부러 내색하지는 않았다. 잠시간의 눈싸움, 강진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사실이 밝혀진 후 그 미국 측에서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조사해보니, 그들과 관련된 모든 측면에서의 증거들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더군요.”

“우리는 항의도 할 수 없는 겁니까?!”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는 형민, 그런 형민을 바라보는 강진으로써도 안타까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카모프 왕국에 있는 그들의 근거지를 급습한 이들은 무급 운영자 천,지,인과 100명의 2급 운영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발견된 서류로는 모든 게 명백하지만, 게임상의 증거 자료는 모두 삭제된 것이다. 물론 그 일에는 오카리나라는 그 빌어먹을 사이버 생명체가 끼어 있으리라는 게 그들의 추측이다. 지금의 자료로는 거대 미국의 국가조직을 걸고넘어지기에는 힘들다. 그것이 아직도 그들이 가진 현실이었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뭡니까?”

강진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까지 말한 것들은 모두 과거 진행형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형이다.

“인터폴에 알린 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경찰 쪽에도 알려진 모양입니다.”

그의 눈에 작은 분노가 일었다.

“수뇌부에서 경찰 측과 합의를 본 모양입니다. 이 사건을 언론에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리얼판타지아의 모든 것을 초기화시키기로 했습니다. 가이아 까지도.. 모든 것을...”

의자에서 일어선 형민이 소리쳤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것은 제가 배운 법의 사이버상의 재화의 보장에 대한 법에는정면으로 대치됩니다. 게다가 가이아는거기에 왜 끼는 겁니까!”

“하나를 잊으셨군요. 약관에 보면 시스템상의 에러라던가 천재지변에 관해서는 예외인 것을...”

강진의 말에 형민은 실 끊어진 연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대목을 잊고 있었다. 현재까지 여론에 논란이 되고 있는 그 부분,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이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부분이면서도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는 게임사들이 내건 약관이다. 구시대의 유물과 같은 조항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 때 그렇게 유용하게 사용될 줄이야... 형민은 생각지 못했다.

“오카리나라는 그 사이버생명체는 잡지 못했습니다. 그, 현문이라는 인물은 절대 입을 열지 않더군요. 경찰 측에서는 혹시나 게임 안에 남아 있을 위험요소를 아예 삭제하기를 원합니다. 물론 미국 측이 비공식적으로 그들이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대해 포기를 선언했고, 더 이상 한국 측에서도 방관하지는 않을 거기에 걱정은 없겠죠. 그러나 경찰 측은 그 오카리나라는 사이버 생명체가 혹시나 가지고 있을 그 바이러스의 자료가 모두 사라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라던가초기화 후에 올 게임사의 엄청난 손해 배상 따위는 상관하지도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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