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연장선
차선우가 와 있는 곳은 도심에 위치한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그가 앉은 테이블 옆, 크게 난 통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단순히 비즈니스를 위한 자리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테리어와 분위기였다.
그가 이런 호텔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다이닝 룸에 앉아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출근하자마자 아버지인 차기현 회장으로부터 직접 일정을 지시받았기 때문이다. 하필 점심 약속이라는 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으나….
선우는 안으로 들어서는 이를 발견하곤 설핏 굳을 뻔한 표정을 가다듬었다.
“음, 이럴 줄 알았지.”
여자는 테이블로 다가서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상대 또한 아마도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나온 듯했다. 익숙하단 표정 한편에 언짢은 기색을 보면 원했던 상황은 아닌 것 같았지만.
호텔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에서 초면인 사람과의 점심 약속. 무슨 상황인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선우가 단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차선우입니다.”
“네, 알아요. 저는 정해린이에요.”
의자 앞에 선 그녀는 들고 온 클러치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냈다. 제 앞으로 내민 명함을 받아 든 선우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작은 직사각형을 채운 예술적인 문양의 한편에는 갤러리 대표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선 자리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명함을 건네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비즈니스를 명목으로 내세우려는 의도가 달가웠다. 자신의 명함도 꺼내어 건넨 선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름 대표예요. 집안에 그럴듯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렇군요.”
“운 좋게 스타 작가 하나 잘 잡았죠. 아, 곧 전시도 있는데 관심 있으시면 오세요. 좋은 컬렉션이 많으니까.”
그녀의 입에선 굳이 궁금하지 않았던 이야기까지 시원스럽게 흘러나왔다. 선우가 대답 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해린이 픽 가볍게 웃었다.
“이런 자리 한두 번 불려 온 게 아니거든요. 저번에는 무슨 병원장 아들이랬나….”
머릿속을 헤집는지 그녀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선우는 찻잔을 입에 가져간 채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어느 선에서 자리를 정리하는 게 예의일지 고민하던 것도 찰나였다.
“선우 씨도 많이 불려 다니실 거 같은데.”
들려온 말에 멈칫한 그가 찻잔을 내려 두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해린이 그렇지 않냐는 듯 생글 웃었다. 곤란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은 선우가 부드러운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애매한 대답이었으나, 해린은 그 말 속에서 그렇지 않다는 부정의 뜻을 읽은 듯했다.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선우를 주시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자리가 드문 것도 아니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약혼자를 물색하는 이들도 많았다. 만약 해영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신도 그랬을 것이다. 적당히 어른들이 정해 준 사람을 만나 정해진 순서를 밟고, 정해진 가정을 꾸렸을 게 뻔했다.
해영은 이미 결말을 알 것만 같던 자신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정해져 있던 삶의 궤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고, 언제 끝나도 아쉬울 것 같지 않던 지겨운 삶을 지속해 나가고 싶게끔 했다. 그의 곁에 있을 때만 유일하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오직 그만이.
‘형, 선우 형.’
‘응.’
문득,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말을 걸어오던 해영이 떠올랐다. 그는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며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형, 오늘 퇴근 언제 해? 나 저녁에 마트 다녀올 건데.’
‘마트….’
해영이는 이따금 마트에 들러 냉장고를 채워 넣곤 했다. 굳이 그가 직접 식자재가 떨어지기 전에 수고스럽게 다시 채울 필요도, 직접 요리할 필요도 없었으나 선우는 구태여 말리지 않았다. 해영이 이렇게 자신의 일상에 섞여 든 모습이 한결같이 좋았으니까.
‘같이 갈까? 퇴근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갈게.’
선우는 해영이 미처 채우지 못한 윗단추를 끝까지 채워 주며 물었다. 그에 해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늦을지도 모르는데….’
‘나도 일하면서 기다리면 되니까 괜찮아.’
‘어, 그럼 그럴까?’
그는 흔쾌히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고민하던 표정은 어디 갔는지, 금세 얼굴 위로 장난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차선우는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다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게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
선우는 찻잔을 들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 자리에 나왔던 걸 해영이가 알면 싫어하려나…. 아마 싫어하겠지. 해영이를 만나고는 한 번도 이런 자리에 나온 적이 없었다. 선 자리라면 전부 거절해 왔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자리인지도 말해 주지 않고 내보낸 모양이었다.
입가에 한숨이 고였다. 그가 싫어할 만한 짓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차선우는 말없이 손을 들어 눈썹 위를 매만졌다. 그것도 잠시였다. 곧 저도 모르게 해영의 버릇을 따라 하고 있었단 걸 눈치챈 선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부모님이 왜 이렇게 안달복달을 하는지 몰랐는데, 선우 씨라면… 그럴 만하네요.”
그런 선우를 보던 해린이 툭 말을 꺼냈다. 손을 내린 선우가 해린과 시선을 맞췄다.
“다른 걸 제쳐 두더라도, 차기현 회장님 아드님이시잖아요? 한제 경영권도 당연히 승계받으실 테고.”
해린이 그렇지 않냐는 듯 눈을 들었다. 선우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서도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살아오며 겪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으니까.
경영권 승계는 늘 대외비에 부쳤는데도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이 기업을 이어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릴 때는 차회현 회장의 손자였던 게, 이제는 차기현 회장의 아들로 바뀌었을 뿐.
남들이 보는 시선 속 자신은 오직 그뿐일 게 분명했다. 별다른 감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일이었다.
“글쎄요.”
선우가 나긋하게 뱉은 말에 해린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서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 보였다. 알면서도 차선우는 조용히 입꼬리를 당겼다.
정말로 한제의 경영권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따위가 궁금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갤러리에 대해 설명할 때 선우는 상대가 누군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태강 그룹 정환우 회장의 손자 중 하나가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정의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귓가에 종종 그의 이름이 들려오곤 했다. 아마 집안에서 스타 작가를 낚았다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태강이라면 아버지가 왜 이 자리에 자신을 밀어 넣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선우는 그가 태강 건설과의 공동 사업에 제법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해린의 관계에 진전이 없더라도, 이런 자리를 주선한 것만으로 한제와 태강과의 관계는 이전보다 원만해질 터였다.
그가 손목에 걸친 시계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정해린 씨.”
“네?”
“같이 식사하면 피차 곤란해질 것 같은데, 이만 일어나죠.”
손목에서 떨어진 시선은 이윽고 해린의 손으로 향했다. 약지에 걸린 반지는 다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들보다 유독 눈에 띄었다. 상대적으로 투박해서 조금쯤은 이질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디자인이었다.
해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굳이 어울리지 않는 반지를 착용하고 있는 이유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 제 약지에 끼워진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리라.
짐작이 맞았는지 해린이 다른 손을 들어 제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녀의 입가에 다시 시원시원한 미소가 번졌다.
“뭐… 그럼 저야 좋죠.”
선선한 승낙이 떨어졌다. 더 이상 자리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가 느릿한 동작으로 옷깃을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선우 씨는 화면 통해서 봤던 거랑 꽤 다르시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선우가 웃고 있는 해린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전에 TV에 나오셨던 거 본 적이 있거든요. 그땐 좀 더 다정한 느낌이었는데.”
“아.”
선우의 입에서 짤막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해영과 있을 때면 둘 다 암묵적으로 꺼내지 않는 주제였으나, 밖에선 아니었다. 이미 1년 전에 끝났던 하진의 프로그램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 수면 위로 올랐다. 아직도 언급되는 걸 보면 제법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좋은 모습만 비쳤다면 다행이네요.”
그가 단정한 미소를 건 채 대답했다.
“아무래도, 화면으로는 보여 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 주기 마련이니까….”
“…….”
“드러나지 않은 게 훨씬 많죠.”
사근사근 답한 차선우는 이윽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보자는 겉치레를 주고받은 뒤 먼저 자리를 빠져나간 것은 선우였다.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자세는 단정했으나, 점점 커지는 보폭은 그의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
호텔 로비를 나서며 차선우는 낮은 숨을 내쉬었다. 깊게 떨어지는 한숨에는 어쩐지 성가시단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와 달리 날이 서서 가라앉은 얼굴은 제법 차갑게도 보였다.
해린에게 말했듯 드러나지 않은 게 훨씬 많았다. 동시에 드러냈는데 알아주지 않는 상황도 있었다.
여태껏 어딜 가나 손에서 반지를 뺀 적이 없었다. 촬영할 때를 제외한다면. 고모인 차성희가 슬쩍 숨겨 둔 애인이 누구냐며 물어 올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러니 이미 다른 이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말도 없이 밀어 넣었다는 사실에 선우의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지긋지긋한 기분이었다.
조부부터 아버지까지, 평생 한제를 위해 살아온 그들은 자신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한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하나뿐이었으므로.
***
“해영 씨, 최 변호사님이 주신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 잘되어 가요?”
구내식당에서 함께 석식을 먹던 여은이 뒤늦게 물어 왔다. 제육볶음을 향해 젓가락질하다 말고 멈춘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그거 하다 왔어요.”
“서면 초안은 짰어요?”
“아직.”
그가 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거의 다 쓰긴 했어요.”
“피고 특정하려면 법정 상속 금액부터 따져야 하던데, 그거.”
사건을 떠올리는 모양인지 여은은 젓가락을 허공에 띄운 채 말했다. 물로 입을 적신 해영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부 시절 경영을 전공하면서 세금이나 관리 회계 고목들을 들었던 덕에, 숫자를 다루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진 않았다. 관건은 계산이 아니라 법을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맡게 된 재판이 형제 사이에 유산 가지고 다투는 사건이라, 그들 사이에서 감정을 받아 내는 것도 일이었고.
서면을 준비해 넘겨도 최종 검토를 받으니 일이 잘못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부담감이 없지도 않았다. 입사한 후 처음 받은 재판이라서인지 더 그랬다.
1월에 변호사 시험을 보고 난 뒤 해영은 로스쿨을 졸업했다. 채용이 확정됐던 다성에서 연락이 온 건 시험 결과가 발표도 나기 전이었다.
가채점 결과는 이미 합격선이었으므로 그는 3월부터 로펌에 출근하고 있었다. 물론 합격이란 결과가 나오고 나서야 일다운 일이 맡겨지긴 했지만 말이다. 재판을 맡은 것도 그로부터 시간이 좀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뭡니까…. 재산. 재산을 남겨 두고 가는 게 문제예요.”
이래서 다 쓰고 가야 한다니까요.
다소 강경하게 주장한 여은이 콩나물국에 든 콩나물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한 마디를 마칠 때마다 입 안에 음식을 밀어 넣는 그녀를 보며 해영이 피식 실없는 웃음을 삼켰다.
우물거리던 밥을 삼킨 그가 후룩 콩나물국을 한 입 떠 마셨다. 구내식당 밥은 가격에 비해 훌륭했다.
“해영 씨는 오늘도 야근?”
그 순간 들려온 물음에 해영이 슬쩍 고개를 틀었다.
로스쿨 졸업 전, 다성에서 함께 인턴 실습을 한 여은 또한 함께 합격했다. 입사 동기는 여은과 자신을 포함해 총 세 명이었다. 그중 나머지 한 명은 마지막 공통 과제를 함께 준비했던 채훈이었다. 그가 거의 다 비운 자신의 식판을 눈짓하며 물었다.
“오늘은 아닙니다.”
씩 웃은 해영이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피로가 묻은 채훈의 눈에 순간 부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여은에게 눈인사를 한 해영이 먼저 일어나 보겠다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건 평소처럼 야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퇴근하고 선우와 함께 마트에 들러 장을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 전에 배를 채워 두자는 생각이었다.
선우 형은 시간이 좀 늦으면 뭘 먹는 법이 없었다. 야근할 때마다 샌드위치나 김밥이라도 입에 물고 일하는 자신과는 전혀 달랐다.
‘아, 정신 차리고 관리해야 하나.’
식판을 정리하고 구내식당을 빠져나오던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도 나쁘다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동거인이 지나치게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데에 있었다.
차선우는 먹는 것만 조절하는 게 아니라 규칙적으로 꾸준히 운동도 했다. 그를 보면서 해영은 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유형의 무서운 부류가 존재함을 알게 됐다.
바로 출근하기 전 운동하는 부류와 퇴근하고 운동하는 부류. 차선우는 그 둘 다에 속했다.
변호사 시험이 끝나고 졸업을 기다리면서 시간이 남는 동안, 해영도 그를 따라 몇 번 운동하러 나가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로펌 출근을 시작하고 난 뒤부턴 발길을 뚝 끊은 지 오래였다.
‘매일이 야근인데 운동은 무슨….’
누군가 변호사가 되면 어떤가 물어 온다면 진지하게 말하고 싶다. 물론 변호사가 되는 건 어릴 때부터의 꿈이긴 했지만, 세상에는 그저 꿈으로 간직하는 게 아름다운 직업도 있는 법이라고. 변호사는, 특히 로펌은 워라밸이 쓰레기였다.
“윤 변호사님 퇴근하세요?”
“아, 대리님.”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온 해영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내식당이 아니라 회사 밖에서 식사하고 온 건지, 엘리베이터 쪽에서 걸어오는 지연이 보였다.
비서인 지연과는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비서과는 보통 야근을 별로 하지 않는데, 지연은 퇴근 시간 이후에도 남아 따로 하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야근하는 날이 종종 겹쳐 마주칠 일이 꽤나 있었다.
해영은 어깨에 가방을 메며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오늘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선선한 미소에 지연이 앞에 세워진 파티션을 잡으며 마주 웃었다.
“매일 야근하시더니, 오늘은 약속 있으신가 봐요.”
데이트? 장난스럽게 물어오는 지연에 해영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쓸면서 해영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티가 나나. 그녀를 향해 상체를 기울인 해영이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데이트.”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에 지연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해영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의 지연을 향해 꾸벅 인사하곤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해영이 사원증을 찍고 출입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불이 환히 켜진 로비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는 어슴푸레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어둑어둑한 하늘만 보면서 퇴근하다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퇴근하니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회전문을 돌아 나와 두리번거리던 해영의 시야에 곧 익숙한 차가 파고들었다. 차는 그의 바로 앞에서 미끄러지듯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해영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고개를 든 선우가 해영과 시선을 마주하곤 눈을 휘며 살가운 미소를 그렸다.
“안녕.”
다정한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가 간질간질하게 와 닿았다. 해영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선우를 마주 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 단 한마디에 불과한 이 짧은 인사가 대체 왜 이렇게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걸까.
누구나 평범하게 꺼내는 인사말인데도 특별하게 와닿았다. 하필이면 그 인사를 꺼내는 사람이 차선우라서 그럴 것이다. 언어로는 채 담을 수 없는 마음을 시선으로, 미소로, 목소리로 들려줘서. 그래서 몇 년째 그를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가슴 안쪽이 일렁이는 것이다.
“형!”
들떠서일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밝았다. 목소리에 드러난 상기된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차선우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숨죽여 웃었다.
그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고, 해영이 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선우가 해영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끝났네.”
“어, 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
선우의 말마따나 야근이 일상이었다. 아니면 집까지 일거리를 가지고 가든가. 뒷좌석에 가방을 던져 넣으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해영아, 사내 변호사는 싫어?”
멈칫. 뜬금없이 들려온 제안에 해영이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빤히 들여다보는 시선에도 차선우는 나긋하게 눈을 접어 웃을 뿐이었다.
소년미가 느껴지는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그가 꺼낸 말은 그다지 순진하지 않았다. 갑자기 사내 변호사라니. 그건 한제 그룹 법무팀에 낙하산으로 꽂아 주겠다는 소리였다.
…이 형이 진짜.
“하.”
해영의 입에서 나직한 숨이 토해져 나왔다.
솔직히 순간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도움 같은 거 필요 없다고 말하기에 한제는 너무 거대했다. 워라밸이라곤 개나 준 로펌에 비하면 사내 변호사는 그보다 형편이 좀 낫다던데….
이런 부정 입사 제안에 잠깐이라도 흔들린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이래서 학연, 지연, 혈연이 이 사회에서 뿌리가 뽑히지 않는 것일 테다.
“형, 나도….”
해영은 불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능력 있어.”
시트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느릿느릿 말했다. 차선우는 이상한 곳에서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에 쥐고만 있던 안전벨트를 맨 해영이 비딱하게 선우를 주시했다.
턱도 없단 시선을 받은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핸들을 쥔 손에 툭, 이마를 기댄 그는 곧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말한 건데.”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깼다.
“능력 있는 변호사가 필요해서.”
“…….”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또 눈웃음을 짓는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해영이 헛웃음을 뱉었다.
“출발이나 해.”
그가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툴툴거렸다. 옆에서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해영은 듣지 못한 척 꿋꿋이 창밖을 주시했다. 물론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정말 생각 없어?”
처음 스카우트해 본 건데. 해영이한테 차였네….
선우가 꺼내는 실없는 소리에 결국 해영의 입가가 허물어졌다. 스카우트는 무슨. 사내 변호사는 명분이고, 실은 사내 연애가 하고 싶은 속셈을 누가 모를 줄 알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에서 시선을 뗀 해영이 힐긋 선우를 돌아보았다.
운전하느라 앞을 바라보고 있는 탓에 보이는 건 옆모습뿐이었다.
“형은 진짜….”
“응?”
“예쁘면 단 줄 알지.”
중얼거리듯 나온 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해영이 한숨처럼 흘린 말에 운전하던 선우가 끝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집 근처의 대형 마트였다. 주차장 한쪽에 놓인 카트를 꺼낸 해영이 선우를 돌아보았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마트는 평일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이 제법 많았다. 눈을 굴리던 해영이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누가 봐도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 둘은 약간 이질적인 조합처럼 느껴졌다.
옷이라도 편하게 갈아입고 왔어야 했나? 잠시 고민하던 해영이 곧 상념을 접었다. 그는 정장 재킷을 벗어 카트 안에 걸쳐 둔 뒤, 와이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끌어 올렸다. 고개를 돌린 해영의 시선이 뒤따라오던 선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채로 해영이 슬쩍 입꼬리를 당겼다. 볼 옆으로 보조개가 흐릿하게 파였다.
“가자, 차선우.”
해영이 카트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며 선우를 불렀다. 그러고선 정작 선우가 곁으로 오기 전, 장난스러운 낯으로 카트를 밀며 앞서 나갔다.
“음…?”
차선우는 혼자 앞질러 나가 버리는 해영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도 잠시였다. 황당하다는 듯 웃은 그가 곧 보폭을 크게 옮기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채울 목적으로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식품 코너로 향했다. 해영은 마트에 오기도 전부터 뭘 살지 이미 계획을 끝내 놓았다. 차선우는 그런 해영의 성격을 알았으므로 정해진 목적지로 걸어가는 그를 여유롭게 뒤쫓았다.
“계란… 형, 이거 하나면 되겠지?”
15개입과 30개입 표시를 번갈아 보던 해영이 끝내 15개입짜리 달걀 박스를 들어 올렸다. 선우는 저를 올려다보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은 그제야 카트에 들고 있던 달걀을 집어넣었다. 두부…. 다음으로 살 것을 중얼거린 그가 카트에 팔을 걸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차선우는 그와 보폭을 맞추며 꾹 웃음을 삼켰다. 담고 싶은 대로 담으면 되는데도, 굳이 하나하나 의견을 구하는 해영이 귀여웠던 것이다. 그 옆에서 따라 걸으며 선우 또한 말없이 카트에 물건을 담았다.
요구르트, 사탕, 초콜릿, 아이스크림, 청포도, 바나나…. 그의 손에 잡히는 것마다 해영의 계획에는 없던 것투성이였다.
“그건 왜 사? 형 이거 안 먹으면서.”
해영은 그가 집어 드는 과자를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차선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좋아하는 거 같길래.”
“…….”
“아니야?”
선우의 나긋한 물음에 해영이 입을 다물었다.
가끔 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달달한 걸 입에 문 채 서류를 보곤 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잠이 덜 쏟아지기 때문이다. 퇴근하면서 편의점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아무거나 쥐어 왔을 뿐인데.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걸까. 해영이 카트 안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선우가 담아 온 건 전부 의식하지도 못하고 자주 입으로 가져갔던 간식거리였다.
차선우는 한결같이 세심하고 다정해서,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하고 넘기려다가도 멈칫하게 된다. 가슴께가 간질거리고 손끝이 저릿해져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지곤 한다.
“…어.”
번번이 목이 메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던 심장은 이런 자극에 속수무책이었다.
괜스레 입가를 쓸어내린 해영이 힐긋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좋아해.”
설핏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시에 카트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에 꾹, 힘이 실렸다.
“…좋아 죽겠어.”
작게 덧붙인 말에 선우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에 해영이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물었다.
머릿속에 적어 뒀던 리스트를 잠시 내려 둔 건 그때부터였다. 해영은 선우가 좋아하는 것들을 카트에 담았고, 선우 또한 묵묵히 카트를 채웠다. 카트가 점차 무거워질 때 즈음 해영의 걸음이 냉동식품 코너에서 멈췄다.
“이거 한번 맛보고 가요.”
시식 코너 앞에 서 있던 직원이 그를 불러 온 것이다.
“새로 나온 제품인데, 기존의 다른 제품들보다 칼로리는 낮은데 속도 꽉 차 있고 맛있어서 인기가 많아요. 오늘만 해도 엄청 많이들 사 갔어요.”
“진짜요?”
“보세요, 이거밖에 안 남았잖아.”
그녀의 말마따나 판매대에 남은 상품이 몇 개 없었다. 그 잠깐 사이 한 개가 더 팔려 나갔다.
하진 누나도 이거 좋아하는데….
몇 개 남지 않은 상품을 내려다보던 해영의 눈이 가느다랗게 늘어졌다. 원래는 살 계획이 없었지만, 맛있다고 하니 만두를 좋아하는 하진이 떠올랐다. 그가 고민하는 걸 알아차린 직원이 막 구운 시식용 만두를 내밀었다.
“이거로 먹어요, 방금 구웠어요.”
해영이 작은 꼬치에 꽂힌 군만두를 덥석 받아먹었다. 뜨거운지 잠시 후, 후 입바람을 불다, 곧 우물거리던 걸 삼킨 해영이 맛있다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해영은 또 건네받은 꼬치를 이번에는 선우에게로 가져갔다. 선우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가 내민 만두를 얌전히 받아먹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장면에 그 누구도 이상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해영이 선우를 향해 씩 웃으며 물었다.
“맛있지.”
선우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몸짓이 마음에 들었는지, 해영은 만족스러운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우의 눈길은 정해진 것처럼 살갑게 웃는 해영의 얼굴에 꽂혔다. 언제 봤다고 그는 직원과도 금세 살갑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해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직원이 감탄 어린 물음을 꺼냈다.
“어쩜 그렇게 잘생겼어요?”
뜻밖에 들려온 칭찬에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기분 좋은 얼굴로 되물었다.
“저 잘생겼어요?”
“그럼요. 오늘 여기서 뭐 드라마 찍나? 연예인이에요?”
“그건 아닌데…. 안 되겠다, 형. 우리 이거 오늘 다 사 가야겠는데.”
해영이 선우를 돌아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피식피식 실없이 흘리는 웃음에 선우도 눈을 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쳤다.
“그럴까?”
“어, 잘생겼단 말까지 들었는데 그냥은 못 가지.”
원 플러스 원 스티커가 붙은 만두 묶음이 해영의 양팔에 가득 찼다. 제법 늦은 시간에 온 게 다행이었다. 몇 개 남아 있지 않던 만두를 쓸어 담은 해영이 카트에 그대로 쏟아 넣었다.
“하진 누나 주면 되겠다.”
가득 찬 카트를 발견한 그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멋쩍어하는 걸 눈치챈 선우가 장난칠까, 말까 고민하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향하면서, 해영은 선우와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그러던 와중 눈에 들어온 건 제법 난해한 디자인의 파자마였다.
어두운 남색의 배경에는 주황색 여우 캐릭터가 눈에 띄게 프린팅되어 있었다. 여우치곤 순진한 표정이 입을 다물고 있는 선우와 겹쳐 보였다.
사이즈를 보면 성인용인 듯했다. …이런 걸 입는 성인이 진짜 있나?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해영이 옷이 걸린 옷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선 옆에 서 있던 선우에게 가져가며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형, 이거 사 줄까.”
장난스레 대봤으나, 옷 위로 보이는 얼굴이 차선우여서인지 이런 요란스러운 옷조차 퍽 귀엽게 느껴졌다. 어울리지 않아서 웃긴 그림이 만들어질 걸 생각했던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재미없네.”
쩝. 다시 옷을 걸어 두는 해영을 내려다보며 선우가 재밌다는 듯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해영이 취향 이상해.”
“무슨…, 뭐가 내 취향이야.”
미간을 구긴 그가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물건이 가득 들어찬 카트를 느릿하게 옮기던 때였다. 해영은 문득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느꼈다.
마트를 돌아다니는 내내 몇 번이나 마주쳤던 사람과 다시금 눈이 맞닥쳤다.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으나,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 해영이 선우를 향해 가자는 듯 턱짓했다.
촬영이 끝나고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해영은 해야 할 것들에 성실하게 임해 목표를 이루었고, 다시 선우와 함께 살게 되었으며, 아버지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쉬운 건 단 하나도 없었으나, 그래도 괜찮았다. 그 모든 순간 곁에는 차선우가 있었으니까. 그건 위안이었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지지대였다.
그가 있었으므로 윤해영은 늘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삶에게, 그리고 차선우에게.
***
“…이와 관련해 태강은 입장문을 통해, 회사 차원의 불법 비자금 조성 의혹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개인 차원의 비리 등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 면밀하게 자체 조사 중이며 외부 조사에도 성실히 협조할 것이라 일축했습니다.”
식당 한쪽에 걸린 벽걸이형 TV에서 뉴스 소리가 들려왔다.
아나운서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태강 그룹의 비자금 문제를 논했다. 요즈음 내내 들려오는 것이 저 뉴스였다. 힐끔 뉴스를 보던 해영이 다시 시선을 내리며 식판에 놓인 돈가스를 집었다.
그래봤자, 그 태강인데 감찰 조사 좀 받는다고 문제가 생기겠어…. 애초에 감찰이 들어갈지조차 미지수였다. 입 안에 욱여넣은 돈가스를 씹어 삼킨 그가 옆을 돌아보며 툭 말했다.
“밥 다 식겠다.”
옆에 앉은 채훈은 제 말에도 쉬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숟가락을 쥔 채로 고사를 지내듯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든 해영이 맞은편의 여은을 향해 눈으로 물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아냐는 눈빛이었다. 후루룩 우동을 삼킨 그녀가 작게 혀를 차며 채훈을 턱짓했다.
“정환웅이 스위스 비밀 계좌로 세탁한 비자금만 1,500억 이상이란 말이 돌잖아요. 태강 주가가 며칠 내내 뚝뚝 떨어지고 있던데 그것 때문에 저러죠, 뭐.”
제법 날카로운 말에 채훈이 발끈하며 고개를 들었다.
“반도체 불황기라 그래요. 지금 시장이 전체적으로 저평가돼서 그렇지… 아무튼 기다리기만 하면 올라요. 무조건.”
열변을 토하고 있었으나, 주식에는 원체 관심이 없었다. 해영은 채훈이 옆에서 수익률이 어떻고, 경기가 어떻고 하는 말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빠르게 그릇을 비웠다.
드디어 숟가락으로 밥을 좀 떠먹기 시작한 채훈이 식사를 마친 해영을 힐긋 바라봤다.
“먼저 가면 배신.”
“…이게 무슨 말이지.”
먼저 일어나면 말 그대로 원망할 것 같은 표정에 해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혼자 두고 갈 생각이야 없었지만, 이러는 걸 보니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건 여은도 마찬가지였는지, 젓가락을 내려 둔 그녀가 장난스럽게 눈짓해 왔다.
“채훈 씨 두고 가요. 곧 점심시간 끝나 가는데 지금 가면 카페에 사람 많단 말이에요.”
그녀는 식사하는 내내 꼭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프라푸치노를 먹어 주겠노라 이를 갈았다. 가지 말라고 애처로운 표정을 짓던 채훈은 금방 태도를 바꿔 제 커피도 사다 달라며 부탁해 왔다.
점심을 먹은 뒤 커피 한잔 사고 올 여유는 있었다. 몸을 일으킨 해영은 기꺼이 그녀와 함께 카페로 향했다.
그는 커피를 받자마자 곧바로 빨대를 물었다. 다른 손에는 채훈에게 줄 커피를 든 채였다. 평소 먹던 것보다 샷을 배로 추가한 커피는 더럽게 쓰기만 할 뿐, 피로를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여은을 기다리면서 해영은 카페 한쪽의 유리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날씨 좋네….’
처음 출근하던 날엔 꽤나 추웠는데, 어느덧 날이 제법 후덥지근해져 있었다.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해영은 멍하니 창밖을 구경했다. 날이 이렇게 좋은데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현실감 없이 다가왔다.
여은이 제법 독보적인 모양새의 음료를 들고 다가온 건 그때였다. 벽에 기댄 채 빨대를 질겅거리던 해영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여은을 발견하고 몸을 바로 했다.
“여은 씨, 이거 다 먹을 수 있어요?”
“그럼요.”
해영이 제 손보다도 훨씬 커 보이는 테이크아웃 잔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여은은 당연히 먹을 수 있다며 싱글싱글 웃었다. 보기만 해도 단 음료를 마시면서 그녀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환해졌다.
밥을 먹으면서 죽을상을 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해영도 피식 웃음을 흘리며 빨대를 물었다. 에어컨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던 두 사람은 곧 카페의 출입구로 향했다. 슬슬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 해영 씨, 그분 있잖아요.”
“네?”
카페을 나서려던 찰나, 핸드폰을 확인하던 여은이 불현듯 해영을 불러 왔다.
“그… 선우 씨요. 해영 씨랑 전에 같이 촬영하셨던 분인데.”
선우?
예상하지 못한 순간 들려온 이름에 어깨가 움찔 굳었다. 문을 열다 말고 멈칫한 그를 여은이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해영은 뒤늦게 그녀의 눈길을 눈치채곤 마저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선우 형이 왜요?”
“한제 차기현 회장 아들이었나 봐요.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다. 차선우가 누군지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오늘도 그와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떴으니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어 해영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먼저 나가라는 듯 문을 연 채 여은을 바라보았다.
“이거요.”
먼저 카페를 나선 여은은 저를 따라 나온 해영을 향해 방금까지 보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 해영이 멈칫 굳었다.
화면에 보이는 얼굴은 선우의 것이었다. 이전에 촬영했던 장면을 캡처해 가져온 것인지, 1년 전 선우의 모습이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기사의 취지는 한제와 태강 사이의 만남이 성사되었다는 것이었다. 만남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재벌들은 재벌끼리 결혼한다는 게 사실인가 봐요. 태강 요즘 주가 급락하고 난리던데, 역시 태강 정도 되면 쉽게 망하진 않겠죠.”
결혼?
…차선우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머릿속에 들어찬 정보가 하나도 연결되지 않았다. 진공 상태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아득하고 불확실해지는 찰나였다.
“해영 씨!”
들려오는 놀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여은의 얼굴이 아닌,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진 오토바이였다.
쾅! 둔탁한 마찰음이 귓가를 울렸다.
***
“해영아!”
병원 입구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느껴져서, 해영은 제게 다가오는 하진을 바라보며 부러 더 웃어 보였다.
“누나 왔어?”
“괜찮아? 더 다친 곳은?”
“팔만. 다른 데는 다 괜찮아. 누나, 핸드폰은?”
“넌 지금 이 와중에…. 가져왔어.”
하진이 걱정스럽게 찡그린 얼굴로 가방을 뒤적였다. 곧 그녀의 손에서 딸려 나온 것은 출시된 지 좀 된 구식의 핸드폰이었다. 여기저기 사용했던 흔적이 남은 핸드폰은 해영이 몇 년 전까지 직접 쓰던 것이었다.
지금 사용하던 핸드폰은 오토바이와 부딪힐 때 떨어트리면서 고장이 났다. 액정이 완전히 깨진 탓에 화면이 보이질 않았다. 고치거나 새로 사긴 해야겠지만, 당장 사용할 핸드폰이 필요했으므로 해영은 별수 없이 하진을 통해 가져와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선우에게 먼저 말했을 테지만….
‘형이 알면 난리 나겠지.’
지금 말했다간 일하는 와중 달려올 게 뻔했다.
정장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클립 하나를 빼낸 해영이 능숙하게 유심칩을 교체했다. 그러고 꺼져 있던 핸드폰을 켜자 오랜만에 보는 잠금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고마워, 누나.”
해영이 켜진 핸드폰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그가 더 다친 곳이 없나 꼼꼼하게 훑던 하진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얼굴이 너무 창백해.”
많이 놀란 거 아니냐 묻는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해영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제 뺨을 쓸어내렸다. 티를 안 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고, 얼굴에서 티가 난 모양이다.
사고가 나면서 좀 놀라긴 했지만, 여태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건 그게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오토바이와 부딪히기 전 봤던 기사의 잔상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오토바이 사고래서 깜짝 놀랐잖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사고까진 아니고… 그냥 좀 부딪혔어.”
“그게 접촉 사고지, 아니면 뭔데.”
혹시 다친 게 머리냐는 투덜거림에 픽 웃음이 샜다. 그것도 잠시, 하진은 해영이 깁스한 팔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보행로에서 오토바이 타는 새끼들 싹 다 감방에 처넣어야 돼.”
과격한 언사에 놀란 것은 해영이 아닌 그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움찔하는 기척에 해영이 한숨을 삼켰다.
“인도 주행만으로는 교도소 못 보내.”
그가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남 일처럼 가볍게 대답하는 모습에 하진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근데 사고가 났잖아. 하필이면 오토바이랑 부딪힌 게 또 변호사네. 미친 새끼, 이제 실전이다.”
“무슨 실전이야, 괜찮다니까. 뼈가 살짝 금 간 거라 2주만 깁스하면 된대.”
팔과 부딪혔던 오토바이 백미러가 날아간 것치곤 양호한 상처였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이라며 해영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이,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변호사셨어요?”
조심스레 말을 걸어온 것은 옆에서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던 오토바이 주인이었다. 하진은 그제야 해영의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이를 발견했다.
그녀가 다시 해영을 보며 누구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말없이 눈썹을 들어 올린 해영이 하진과 시선을 교환했다.
“어.”
해영은 하진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대답해 주었다. 순순히 흘러나오는 긍정에 남자, 성현이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기색을 읽은 해영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너 미러 깨 먹어서 어떡해? 알바하는 곳에서 혼나는 거 아냐?”
그 말을 듣자마자 하진은 상대가 오토바이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 금세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너 그새 오토바이 사고 낸 인간이랑 말 텄어?”
하진이 기가 찬다는 어조로 물었다. 언뜻 적대심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해영이 어색한 얼굴로 눈썹 위를 긁적였다.
그는 이 상황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친 것도 심하지 않지 않나. 무엇보다 하진이 오기 전 성현과 했던 대화가 결정타였다.
‘죄송해요. 제가 어떻게든 변상할게요.’
‘이 경우는 변상이 아니라, 배상….’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던 해영이 뒷말을 삼켰다. 깁스한 팔을 들었다가, 다시 내린 그가 반대쪽 손을 들어 긴장한 탓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목을 주물렀다. 그때였다.
‘형, 엄마한테만은 연락 안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아직 미성년자인데 엄마랑 둘만 살거든요. 식당 일 바빠서 우리 엄마는 저 배달하는 것도 몰라요. 알면 기절해요.’
겁먹었는지, 불안해 보이는 얼굴은 곧 울 것 같았다. 그 얼굴에 멈칫했던 해영을 더 당황하게 만든 건 그가 뱉은 말이었다.
학생이라고?
해영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머리가 워낙 덥수룩해 얼굴을 뜯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 듣고 보니 헬멧을 벗은 얼굴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해영이 짧은 침음을 삼켰다.
‘혹시 경찰서 가야 돼요? 합의, 그런 거 하면 된다고 그랬는데. 병원비 드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경찰서 안 가. 일하다 다친 거라 병원비는 회사에서 처리해 줘, 걱정 마.’
입에서는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러나 해영이 담백하게 꺼낸 거짓말에 울먹이던 남자애의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그렇게 상황이 뒤바뀌어, 한참 동안 어린 애를 달래 주던 와중이었다.
해영은 들이닥치자마자 경계심을 보이는 하진을 간단히 진정시켰다.
“고등학생이래. 자퇴하고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대.”
아무렇지 않은 투로 흘러나온 말에 하진이 입을 딱 다물었다. 잠시 해영과 성현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에게서 이윽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 바로 회사 다시 들어가 봐야 해?”
“아니, 바로 들어가진 않아도 돼.”
하진이 마침 잘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나 편집실 갇혀 있다가 뛰쳐나왔더니 배고파. 고기 먹자, 고기.”
“병원 앞에 갈빗집 있던데, 거기 갈까?”
“갈비 좋지.”
하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곤 설렁설렁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녀를 따라, 해영 또한 몸을 일으켰다.
“야, 고딩. 너도 따라와.”
앞서 걷던 하진이 불현듯 고개를 돌리더니,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성현을 향해 손짓했다. 그는 하진이 왜 저를 부르는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얼굴로 해영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해영이 실없이 입가를 허물었다.
“너 밥 먹었어?”
“그건 아닌데….”
“그럼 같이 밥이나 먹자.”
해영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까딱였다. 따라오라는 것처럼 보폭을 늦추는 해영의 뒤를, 앳된 얼굴의 남자애가 얼떨떨한 낯으로 따라나섰다.
아직 저녁 시간대가 되지 않아서인지, 병원 앞의 돼지갈빗집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진은 앉자마자 손을 들고 주문을 외쳤다.
“여기 돼지갈비 5인분 주세요. 해영 너 냉면 먹을 거지?”
“어, 물냉면.”
“너도?”
하진이 맞은편에 앉은 남자애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오토바이 헬멧을 품에 안은 채 어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성현은 제게로 날아든 물음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물냉 두 개, 비냉 하나, 된장찌개에 밥 세 공기 추가요!”
하진은 우물쭈물하는 그의 말을 자르고 메뉴 주문을 마쳤다. 순식간에 끝나 버린 상황에 눈을 껌벅이던 성현은 곧 물을 따르려고 물병을 드는 해영을 발견하고 급하게 팔을 뻗었다.
“제가 따를게요!”
“아, 고마워.”
한 손으로 물을 따르던 해영이 기꺼이 물병을 넘겼다. 성현은 냉수가 가득 찬 물병을 건네받아, 그가 이미 꺼내 둔 컵에 물을 따랐다. 그러곤 채워진 물 잔을 각각 해영과 하진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성현은 그러고 나서도 쉬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눈을 굴리거나, 다리를 떨거나, 물 잔을 만지작거리거나, 머리를 털어 내는 등 부산스러운 몸짓을 보였다. 아마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진과 해영은 그런 성현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분위기를 풀어 주는 대신 물 잔을 비우며 조용히 시간을 죽였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묘한 정적이 깨진 것은 주문한 고기가 나오고 나서였다.
“고기는 거의 다 익었으니까, 조금 이따 바로 드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해영은 고기를 구워 주던 직원으로부터 집게를 건네받으며 인사했다. 가지런하게 잘린 고기가 불판 위에서 먹기 좋게 익어 가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집게를 쥔 그가 완전히 익은 고기를 골라 하진의 접시 위로 올렸다.
해영은 이어 성현의 접시 위에도 고기를 한 움큼 집어 올려 준 다음에야 집게를 내렸다.
그 또한 젓가락을 쥐고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던 참이다. 그런데 고기를 앞에 두니 어쩐지 허기진 것도 같았다. 하진이 잘라 준 냉면을 집어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여태 얼어 있던 성현이 그를 불러 왔다.
“근데요, 변호사님.”
딱딱한 호칭에 해영은 입을 벌리다 말고 다문 채 눈을 들었다. 변호사님은 무슨…. 비스듬히 눈썹을 들어 올린 그가 툭 하니 말했다.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아니 그래도….”
성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해영은 가타부타 말을 얹는 대신 쥐고 있던 젓가락을 움직였다. 말없이 냉면을 먹는 그를 바라보는 성현의 표정이 묘해졌다.
“형.”
“왜?”
졌다는 듯 조심스럽게 꺼낸 호칭에 해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여기 데려오셨어요?”
“누나가 고기 먹자고 해서.”
“아니, 장난치지 말고요…. 왜 저까지 데려왔냐고요.”
성현이 울컥한 얼굴로 물었다. 시종일관 아무렇지 않아 하는 해영의 태도가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아니면… 고등학생 주제에 자퇴하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을 듣고 동정심이라도 생긴 건지.
어느 쪽인지 몰라도 둘 다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비록 일을 키우지 않기 위해 먼저 제 처지를 들먹인 건 자신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저 동정해요?”
제법 날카로운 물음이 떨어졌다. 목소리에선 어딘가 삐딱한 구석까지 느껴져서, 전투적으로 입 안에 고기를 욱여넣던 하진조차 멈칫할 정도였다.
“동정?”
해영이 허공에 들려 있던 젓가락을 내려 두며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성현의 얼굴에는 다소 반항적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편으로는 언뜻 수치심까지 보였다.
“…허.”
그 얼굴을 보자 단숨에 맥이 빠졌다.
해영은 성현이 쥐고 있는 감정이 뭔지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잘 알았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모나고, 추레하고, 부끄럽게 만드는지도. 그렇다고 해서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면, 버거운 삶을 버텨 낼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내려 두었던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들며, 해영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동정은 무슨.”
“…….”
“내가 진 빚이… 됐다.”
그는 말을 내뱉다 말고 말해 뭐 하겠냐며 한숨을 삼켰다. 지금 제가 남 동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말은 해 봤자 소용없을 게 뻔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고기나 먹어. 그냥 나 고등학생 때 같아서 그런 거니까.”
그가 타지 않게 성현이 앉은 쪽의 불판 끄트머리로 고기를 옮겨 놓으며 말했다.
해영은 고등학생 시절 저를 보기만 하면 밥은 먹었냐고 묻던 하진을 기억했다. 굳이 배고프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얼굴을 볼 때마다 자신이 배고프다며 음식점으로 끌고 가곤 했다. 성현은 제가 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입을 다문 해영이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는 동안, 하진이 이상한 얼굴이 된 성현의 앞에 고기를 밀어 주었다.
“고딩, 식기 전에 먹어.”
팔을 뻗은 하진이 아직도 닫혀 있는 공깃밥의 뚜껑을 열어 주며 말했다. 어서 수저를 들라는 듯 까딱하는 하진을 보며 망설이던 성현이 천천히 식탁 위로 손을 꺼냈다.
다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음이 세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워 주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작은 대답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으나,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여기 갈비 1인분 더 주세요!”
손을 번쩍 든 하진이 집게를 흔들며 외쳤다. 테이블 주위를 감도는 온기는 어느새 어색한 공기를 몰아내고 있었다.
“잘 먹었어.”
가게를 나서며 하진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본 해영도 바람 빠지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다시 방송국 들어가?”
“응, 그래야지. 지금 뭐 거지 같은 프로그램 하나 떠맡아서….”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썩은 감자 같은 표정을 짓던 하진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너도 다시 회사 들어가나? 아니면 이대로 퇴근해?”
“들어가 봐야 돼. 못 끝내고 온 일이 남아 있어서.”
“그러면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하진이 목을 긁적이다, 핸드폰을 들어 택시를 불렀다. 앱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향해 해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누나 일요일에 올 거지?”
“…일요일? 아.”
하진이 탄성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누구 결혼식인데, 당연히 가야지.”
그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해영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였다. 따지고 보면 저 덕분에 만난 건데, 축의금은 제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하진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해영이 부정하지 않고 키득거렸다.
앱으로 잡은 택시는 머지않아 그들이 서 있는 곳 앞으로 다가왔다. 하진은 앞에 멈춰 선 택시의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누나.”
하진이 완전히 문을 닫기 직전, 해영이 잊을 뻔했다는 듯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상체를 숙인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친 거 선우 형한테 말하지 마. 형 난리 나. 알지?”
“…무척, 매우, 잘 알지. 근데 언제 말하려고? 설마 말 안 하게? 그랬다가 더 난리 나.”
“하기는 해야지.”
딱히 숨기려는 건 아니었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끝까지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차선우는 눈치가 귀신이었으니까.
“그래도 말하지 마. 내가 곧 말할게.”
“알았어.”
“아, 맞다. 며칠 전에 만두 엄청 많이 샀는데 가져다줄까?”
“만두?”
하진이 금세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은 그럼 일요일에 보자며 인사한 뒤 몸을 일으켰다. 탁, 문이 닫힌 택시는 이윽고 엔진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뒤돌았을 때는 여전히 멀뚱히 서 있는 성현이 보였다. 왜 아직 안 가고 있지? 해영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성현을 향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안 가?”
성현은 빨리 가라는 듯 손을 휘젓는 해영을 보면서도 쉬이 몸을 돌리지 않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거리는 모습에 해영은 들고 있던 팔을 내렸다.
“…전화번호.”
망설이던 그가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전화번호 주시면 안 돼요?”
“왜?”
“갚을게요, 어떻게든. 저 때문에 핸드폰도 고장 났잖아요.”
성현은 고집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해영을 주시했다. 쉽게 꺾기는 어려울 듯한 표정이었다. 부러 꺾고 싶지 않기도 했고.
이러려고 고기 먹인 게 아닌데. 그냥 이렇게 된 거 밥이나 한 끼 같이 먹고 헤어지려고 했던 게 전부였다. 그러나 빚진 것처럼 기죽은 낯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해영은 그가 내민 핸드폰을 받아 들며 제 번호를 찍었다.
“그래, 갚아. 너 착실하게 잘 지내는지 내가 검사한다?”
“그럼 가끔 연락해도 돼요?”
“안 돼, 나 바빠.”
번호를 찍은 해영이 성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연락하지 말란 말에도 성현은 한결 부채감이 덜어진 얼굴로 웃었다. 그제야 제 또래처럼 보여, 해영 또한 피식 입가를 허물었다.
어린애한테서 바득바득 돈을 받아 낼 만큼 궁하진 않았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해진다면 협조해 줄 수 있었다. 그래야만 덜어지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완전히 떨쳐 냈을까?
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영이 문득 생각했다. 물론 아직도 선우에게 돈을 갚을 계획인 건 아니었다. 그랬다가 차선우가 또 무슨 난리를 칠 줄 알고….
하지만 마음에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빚이 남아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윤해영은 도망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은 채로 선우의 곁에서 차츰 그 무게를 덜어 나가는 중이었다.
“오토바이 빠르게 몰지 말고. 인도에서 타지 말고.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멀어지던 성현이 그 말을 들었는지, 몸을 돌려 꾸벅 다시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해영은 그제야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겨지자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는 조금 굳은 얼굴로 주머니에 넣어 뒀던 핸드폰을 꺼내 이미 외우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형 나 오늘도 야근이라 늦을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꾹꾹 한 손으로 메시지를 보낸 해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건물들의 외벽이 노을에 물들어 가는 게 보였다. 퇴근 시간이었지만 그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병원에 들르느라 못다 한 일들이 수두룩하게 있었으니까. 쌓여 있는 일을 생각하면 왼팔을 다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늘 늦게까지 일을 처리하면 내일은 선우와 대화를 해 볼 수 있겠지. 낮에 봤던 기사가 다시금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는 선우가 자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들어 봐야 하지 않나. 중요한 건 결국 대화에 있었고, 직접 정확한 사정을 듣기 전까지 해영은 오직 자신이 봐 온 차선우만을 믿기로 했다.
***
본가에 도착한 차선우는 시동을 끌 생각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어차피 들어가서 얼마 있지 않고 바로 나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이 태강과 얽힌 기사를 확인한 것은 그게 올라온 바로 직후였다.
제게 먼저 전달되지 않은 내용인 것을 보면 태강 쪽에서 흘린 것이 분명했다. 태강과 어떤 거래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아버지도 모르는 일이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언급된 기사가 샜다는 것만으로 본가에 들를 이유는 충분했다.
“도련님 오셨어요?”
오랜만에 본가에 들어서는 그를 현관까지 나온 고용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고용인은 선우가 아주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이였다. 어머니보다 더 자주 봤을 이를 향해 그가 사근사근한 미소를 보였다.
“네, 식사는 하셨어요?”
“저는 회장님 식사하신 다음 먹어야죠. 아, 다들 안쪽에 계세요.”
저를 보며 생글생글 웃는 그녀를 향해 선우도 부드러운 낯을 했다. 고개를 숙여 보인 그가 실내화로 갈아 신곤 안으로 향했다.
저택의 안쪽에는 조부 차회도의 응접실이 있었다. 차회도를 비롯해 다른 이들도 아마 그곳에 전부 모여 있을 것이다. 오랜 전통처럼 저녁 식사 전 늘 그곳에서 가벼운 대담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앞을 향하는 발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나무 바닥을 가로지르는 보폭에선 다소 서늘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향하던 걸음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중간 정원과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에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어라? 웬일로 왔어?”
들어오던 이 또한 그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아는 척을 해 왔다.
“물산 먹고 난 이후로 식사 자리에 들르는 법이 없더니. 태강 때문에 온 거지?”
“차경.”
작은아버지인 차강현의 첫째 아들 차경은 사촌 중 유일하게 선우와 동년배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려서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도 당연하다는 듯 선우의 뒤를 따라붙었다.
유년 시절을 함께한 차경은 선우에게 있어 질릴 만큼 익숙한 존재였다. 몇 달 전 한제 물산 지분을 승계받은 걸 들먹이다 곧바로 태강으로 화제를 이어 가는 모습마저도 익숙했다. 곧 차경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일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너 태강 그룹 정해린이랑 선봤다며.”
선우가 대꾸 없이 경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꺼낸 말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정해린 걔도 그렇게 콧대 세우더니 요즘엔 이리저리 불려 다니나 봐? 하긴, 정환웅 회장이 자기 손주들은 그렇게 아낀다는 말이 돌잖아. 미술관 사업도 물려받는가 보던데.”
“…….”
“누구 씨인지도 상관이 없나. 정환웅 회장이 정해린한테 줬다는 인사동 부지만 해도….”
어쩐지 신난 듯 나불거리기 시작한 모습에 선우가 한숨을 삼켰다.
모임 나가기를 좋아하는 차경이 해린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서 어떤 식으로 접했을지는 뻔했다. 그러나 제게 타인의 가정사 따위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알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던 길을 막고 선 차경의 말을 들어 주기에 선우의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경아.”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입을 열어 경의 말을 잘랐다. 의아한 시선이 선우를 향했다.
“내가 그걸 알아야 돼?”
“…….”
나긋한 목소리였으나 마주한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무표정한 선우와 시선을 마주한 경이 다소 어쩔 줄 몰라 하며 목을 쓸어내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지….”
“아… 내가 너무 떠들었나? 너 요즘 M&A 준비한다고 피곤할 텐데.”
대외적으로 알리진 않았으나 대규모 인수 합병을 계획하고 있는 단계였다. 언제 그것까지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중에 흘리는 걸 보면 적잖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다시 단정한 미소를 걸친 선우가 화제를 돌렸다.
“너도 이번에 호텔 경영 물려받았다면서.”
“물려받긴.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도 너처럼 강남에만 눌러앉아 있고 싶은데.”
쉽게 입을 다물지 않는 차경답게 다시금 투덜거리듯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길어질 듯한 대화에 차선우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경은 그런 선우의 곁을 따라붙었다.
중앙 정원이 보이는 복도를 가로지르고 나면 안채에 달린 조부의 응접실이 나왔다. 양옆으로 환히 열려 있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춘 차선우는 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게 누구야.”
상석에 앉아 있던 차회도가 눈을 치켜뜨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들르는 건데도 달라진 것 없는 조부의 모습이 도리어 선우를 긴장시켰다.
“온다는 말도 없이.”
“요새 발길이 뜸했던 것 같아 퇴근하는 길에 들렀어요.”
안으로 들어선 그가 웃는 낯으로 답했다. 방금까지 좋지 못했던 기분은 조부의 앞에서 어렵지 않게 숨겨졌다. 선우는 곧 조부의 옆에 둘러앉은 어른들에게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곳에는 선우의 아버지인 차기현도 앉아 있었다. 그가 선우를 타이르듯 말했다.
“더 자주 얼굴도 비추고 그래라. 할아버지 심심하실라.”
얼굴을 자주 비추라는 건 말만 그럴 뿐, 정말로 더 자주 들르라는 뜻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얼굴 보면 됐지 굳이 시간 내서 본가까지 올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선우가 아버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조부의 앞에서만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선우는 사근사근 장단을 맞췄다.
“선우야, 저녁 먹고 갈 거지?”
“저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뒤에 또 일이 있어서요.”
살갑게 물어 오는 고모를 향해 그가 열없이 웃었다. 아쉬워하는 얼굴에 웃는 낯으로 대응하며 비어 있는 자리에 착석했다.
“오늘 태강 쪽에서 기사를 냈는데 알고 계셨어요?”
선우가 부친을 바라보며 물었다. 앉자마자 꺼낸 물음에 대한 반응은 아버지가 아닌 그의 옆에서 들려왔다.
“태강? 요즘 내부 감찰로 정신없는 것 같더니 무슨 기사?”
작은아버지이자 차경의 부친인 차강현이었다. 그는 제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오가는 게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고모가 그런 작은아버지를 비웃듯 고개를 내저었다.
“오빠 한제랑 태강이 사돈 맺는다는 기사 못 봤어? 비자금 덮으려고 태강에서 흘린 것 같던데. 어차피 유야무야 덮일 거 왜 선우 이름까지 가져다 쓰는지 몰라.”
“주가가 10퍼센트가 넘게 떨어졌단다. 그 정도로 무너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태강도 이사회 눈치가 보이는 거지.”
아버지가 그녀의 말에 부언을 달았다. 선우는 그 말에서 부친이 이미 기사가 나온 걸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 김에 태강에 빚이라도 지워 둔다면 한제에는 득이리라 생각하실 터였다.
“대한민국에 비자금 없는 회사가 어딨어. 털어서 먼지 안 날 곳 없다. 이번에는 태강이 걸린 거지.”
작은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선우는 찻잔을 쥐었다. 가만히 듣는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단정했다.
“자금 세탁하다가 운 나쁘게 걸린 거야.”
“비자금 녹인 영수증으로 방 하나를 채웠다는데, 운이 나빴던 건 아니죠.”
나긋한 대답과 함께 선우가 내리깔고 있던 눈꺼풀을 들었다. 서글서글하게 웃고는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다지 고분고분하지 못했다. 매사 부드러운 성격의 조카가 뱉은 반박에 차성희가 신기하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자식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던 조부가 짧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방 안에 자리한 모두의 시선이 상석에 앉은 조부에게로 향했다.
“할애비 얼굴 보러 들렀다더니, 태강 때문에 온 거냐?”
“…반박 보도 내기 전에 어떤 상황인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허락이 떨어지지 않더라도 제 의사대로 진행할 거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차기현이 드물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선우를 돌아보았다. 대거리라도 했다간 쉬이 매를 들기라도 할 것 같은 눈길이었다.
아버지의 시선을 알면서도 선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조부를 응시했다. 자라는 내내 한 번도 집안의 뜻에 반한 적 없는 선우에게 조부는 한결 너그러운 면이 있었다. 차회도의 눈에 띄는 총애는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해라.”
허락은 순순히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선우의 얼굴에 감돌던 경직된 미소가 풀어졌다.
“성희 말대로 선우를 장기 말로 쓴 거 아니냐. 아무리 태강이라고 해도 순순히 덮어 줄 수는 없지.”
“네, 아버지.”
아버지가 별다른 첨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본가까지 찾아온 이유는 이래서였다. 조부가 나서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풀린 상황에 선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선우는 아버지에게 자신보다 더 중요한 우선순위가 있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도, 자신도 한제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먼저 일어나 볼게요.”
몸을 일으킨 차선우가 어른들에게 가 보겠다며 인사했다. 아쉬운 듯 그를 붙잡는 말들이 있었으나 문밖으로 향하는 걸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선우야.”
문을 나서기 직전 그를 불러 온 조부를 제외한다면. 고개를 돌린 선우가 앉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부와 시선을 맞췄다. 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순하지도 않은 눈동자가 선우를 담았다.
“누굴 만나든지 관여하지 않을 거다.”
자라면서 숱하게 들어 왔던 말이 귓가에 박혀 들었다. 차선우는 이어질 말 또한 예상할 수 있었다.
“네 위치를 잊지 마라.”
“……네.”
그건 선을 넘지 말란 당부였다. 이제껏 해 왔던 대로, 그가 제시하는 길을 따르라는 지시. 막힌 목구멍으로 느릿하게 대답을 꺼낸 선우가 인사하며 안채를 나섰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걸이는 들어왔을 때보다 나갈 때 더 사나웠다. 나고 자란 집이었으나 고풍스러운 저택은 늘 목을 죄는 올가미였다. 어쩐지 갑갑한 기분에 차선우는 손을 들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식사 안 하고 가시게요?”
집을 나서려는 그의 모습에 부엌에 있던 고용인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앉아 있던 시간은 몇 분이 채 되지 않지만, 차선우는 지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택을 나오자마자 차에 올라탄 그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순간 그에게 필요한 건 단 한 사람이었다. 갈급한 몸짓으로 핸드폰을 들자,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해영에게서 연락이 도착해 있었다.
선우는 주저 없이 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해영
형 나 오늘도 야근이라 늦을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그가 보낸 연락을 확인한 선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흐려졌다. 반사적으로 올라갔다가 이내 어정쩡하게 멈춘 입꼬리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듯한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지 마. 나한테 이러지 마, 해영아.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이 넘쳐서 선우는 입을 다문 채 핸드폰을 내렸다.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기사를 봤느냐고. 그런 동시에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해영이 몰랐으면 했다. 문득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던 해영의 말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아슬아슬한 낯으로 운전대를 잡은 그가 이내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쉼 없이 달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는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시동을 끄고, 답답하게 몸을 죄어 오는 안전벨트도 풀었건만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 정적이 오늘따라 살갗을 짓누르는 것처럼 외로웠다. 차선우는 핸드폰을 들어 당연하다는 듯 전화를 걸었다.
받아 줘, 윤해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애원이 속에 질척하게 고였다. 다행스럽게도 전화 연결음은 머지않아 뚝 끊겼다. 이윽고 들려온 건 ‘여보세요’ 같은 흔한 인사말이 아니었다.
- 뭐야, 왜 안 자.
전화를 받고 지었을 해영의 표정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서두였다. 목소리는 담백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장난스럽게도 느껴지는 음성에 차선우는 참아 왔던 숨을 조용히 몰아쉬었다.
통화로나마 듣게 된 해영의 목소리가 위태롭던 선우를 단숨에 진정시켰다. 불길할 정도로 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이 안정제라도 먹은 것처럼 차츰 고요해졌다. 숨을 몰아쉬느라 셔츠 위로 흉곽이 도드라질 정도로 부풀었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자기 전에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는 부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속삭였다. 투정 아닌 투정에 수화기 너머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선우의 입가도 슬그머니 허물어졌다.
“해영아.”
- 왜, 선우야.
“언제 올 거야?”
보고 싶었다. 함께 살면서도 매일같이 보고 싶었다.
참으려고 해도 해영의 목소리를 들으니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다 보면 별수 없이 어리광을 부리는 모양새가 됐다. 어릴 적부터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응석을 부려 본 적 없던 차선우는 자신보다 세 살이 어린 연인에게는 곧잘 투정을 부렸다.
- 무슨 일 있어?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해영은 아주 미묘한 위화감조차 곧바로 알아차렸다. 걱정 어린 목소리가 달가워 선우가 웃음을 삼켰다.
“아니, 없어.”
- 형 목소리가 안 좋은데.
“해영이가 없어서 그런가 봐.”
- …….
“너 없으면 잘 못 자잖아.”
그는 불안으로 창백하게 얼룩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애써 장난스레 말꼬리를 늘렸다.
해영아, 네가 있어야만 삶이 내 것 같아.
내뱉지 못한 말들이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 대체 나이가 몇이야, 차선우.
해영이 애를 키우는 것 같다며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였다.
- 형.
문득 이전과는 높낮이가 다른 음성이 선우를 불러 왔다. 핸들을 쥐고 있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말을 고르듯 한참을 뜸 들이던 해영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 …나 형 기사 봤어.
눈앞이 순간 아득해졌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 발을 헛디뎌 어둠 속으로 추락한 사람처럼, 선우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얼어붙었다.
-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솔직히 놀랐어.
“해영아.”
투덜거리듯 가볍게 말하고는 있지만,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게 느껴졌다. 본가에 있을 때보다도 더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나 자신의 꼴이 어떨지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그가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태강 쪽에서 멋대로 낸 기사야. 허위 사실이라고 곧 반박 보도도 나갈 거야.”
- …….
“앞으로는 이런 일 없어.”
짓씹듯 꺼낸 다짐은 지나치게 굳어 있어서 도리어 절박하게 들렸다. 그제야 수화기 너머로 피식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금 서류를 보고 있는지, 간간이 종이가 팔락거리며 넘어가는 소리와 작은 하품 소리 같은 것들이 이어서 들려왔다.
해영은 그에 대해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선우를 불안하게 했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매듭에 목이 묶여 있는 것만 같았다.
***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자?”
위에서 떨어진 목소리에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 문에 기댄 채 서 있는 채훈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한 탓인지 그가 문을 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스탠드 조명 하나에 의지한 채로 서류를 살펴보던 해영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오늘 무슨 요일이지?”
“금요일, 아니 이제 토요일 됐네.”
벌써? 입 밖으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갈 뻔한 것을 억눌러 참았다. 그래도 이제 주말이니 집에 들어갈 수는 있게 되었다.
“나도 집 가야지….”
피로한 눈 위를 꾹꾹 누른 해영이 이내 깁스한 팔을 내려다보았다. 일하는 데에 거치적거려 보호대도 빼 둔 팔은 여전히 흰 붕대에 둘러싸인 채였다. 그걸 보자마자 또 한숨이 푹 내쉬어졌다.
오토바이 사고가 난 뒤로 집에 못 들어간 지 벌써 3일째였다. 아니지… 이제 토요일이 되었으니 막 4일째가 된 참이다. 들어가지 않으려고 그런 건 아니었고, 그 뒤로 급하게 들어온 대기업 법무 사건을 떠맡게 된 바람에 강제 야근행이 결정되었다.
재판에 나서는 건 시니어 변호사나 파트너 변호사의 업무였지만, 준비 서면을 작성하고 재판을 준비하는 건 자신과 같은 말단 변호사들의 역할이었다. 매일같이 야근하면서 해영은 깨달았다.
입사하기 전, 대형 로펌임을 증명하듯 흠잡을 데 없이 전문적이라 생각했던 다성은 그저 인력을 갈아 낸 결과였다는 걸.
“그럼 나 먼저 퇴근한다?”
아직도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해영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손을 들어 휘저어 보였다. 대충 얼른 가라는 인사였다. 머지않아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채훈이 퇴근하기 전 해영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며칠 내내 야근이 이어지는 동안, 해영이 그의 집에서 신세를 졌던 탓이다. 그러면서 해영은 자신보다 딱 한 살 많은 그와 말을 놓고 퍽 친해지게 되었다.
채훈의 집은 로펌까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데다, 무엇보다 혼자 살았다. 대중교통이 다 끊긴 새벽에 집까지 기어 들어가는 대신 해영은 그의 집에서 눈을 붙이고 씻은 뒤 다시 출근했다. 혹시 몰라 회사에 두고 다니던 옷으로 버티다 오늘은 채훈의 옷까지 빌려 입은 지경이었다.
‘워라밸 망했다.’
이렇게까지 집에 못 들어갈 줄은 몰랐던 해영이 착잡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선우에게도 일이 바빠서 야근할 것 같다 꼬박꼬박 연락하긴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3일이나 집에 안 돌아가는 건 제가 생각해도 무리수였다.
오늘도 야근 ㅜㅜ
형 진짜 미안
오늘도 늦을 거 같은데...
형
내일도 야근이면 나 그냥 사직서 내려고
미안한 마음에 해영은 밤마다 연신 메시지를 보냈고, 차선우는 한결같이 다정한 답변을 보내왔다. 나는 괜찮아, 피곤하진 않아? 데리러 갈까, 보고 싶어.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메시지를 내려다보며 해영이 속으로 욕설을 씹어 삼켰다.
“돌겠네.”
말 그대로 미칠 지경이었다. 다성에 있는 변호사만 200명에 달하는데 이렇게 업무량이 많은 게 말이 되나? 머리를 거칠게 털어 낸 해영이 결국 보던 서류에서 시선을 뗀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루 이틀이야 일이 많아서 못 들어오는 거구나 이해해도, 3일을 내내 안 들어가면 진짜 일이 바쁜 게 맞나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였다. 이 이상 들어가지 않으면 선우가 불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퇴근해야겠다 결심한 그가 팔뚝 위로 끌어 올렸던 와이셔츠를 힘주어 당겼다. 붕대에 묶인 팔이 여유 있던 셔츠 소매 안에 빠듯하게 들어찼다.
똑똑. 짐을 챙기던 해영은 그 순간 들려온 가벼운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들어…….”
그는 채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퇴근 안 한 사람이 저 말고 또 있나 의아해하던 낯에 들어선 것은 당황이었다.
“형?”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이는 선우였다.
벌떡 몸을 일으킨 해영이 반사적으로 몸 뒤로 팔을 숨겼다. 꿀꺽, 저도 모르게 목 뒤로 침이 넘어갔다.
그가 이곳에 나타날 줄 몰랐던 이의 등장에 허둥지둥하는 사이, 차선우는 당연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다가온 선우의 시선이 사무실 안을 천천히 훑었다.
테이블 위 너저분하게 펼쳐진 서류로 향한 시선에 해영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조금 어수선하지. 원래는 깨끗하거든? 요즘에만 바빠서 이랬던 거고, 잠시만.”
“안 치워도 돼, 해영아.”
나긋하지만 어딘가 가라앉은 목소리에 해영이 멈칫했다.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여전히 서 있는 선우가 들어왔다. 해영은 곧 눈만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문자가 오면 보통 안내 데스크를 통해 비서실로 먼저 연락이 가는 게 순서였다. 늦은 시간이라 다들 퇴근했다고 해도, 외부인이 안쪽까지 출입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닌가?’
외부인 출입이 쉬울 만큼 보안이 허술한 건지 아니면 차선우라 예외인 건지 해영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 사무실 안에 서 있는 선우의 모습이 어색하게 다가왔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문가로 다가섰다.
창 너머로 보이는 사무실은 어두웠다. 아직도 남아 있는 건 몇 명 되지 않겠지만, 혹시나 싶어 해영은 블라인드를 내렸다.
탁. 손짓 한 번에 바깥이 들여다보이던 창이 완전히 닫혔다. 그대로 등을 돌린 해영이 벽에 기대고 선 채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짧게 까딱였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는 의미였다.
이곳에 와 보는 건 처음일 텐데도, 차선우는 능숙하게 의자에 앉았다. 느릿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태도에 해영은 순간 사무실에 온 손님이 그가 아닌 자신인 것처럼 느껴졌다.
“…….”
이윽고 고개를 든 선우의 시선이 해영을 향했다. 방 안은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어 어두운 편이었다. 그러나 마주한 눈동자는 묘한 이채를 띠어 유달리 선명했다.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서로를 주시했다.
이어지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해영이었다. 가벼운 한숨을 흘린 그가 고개를 기울인 채로 물었다.
“밥은?”
늦은 시간에 던지기에는 어색한 질문이었으나, 해영이 궁금한 건 그게 다였다. 그가 이곳에 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왜 왔는지는 이미 알 것 같기도 했고.
그저 그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게 현실감이 없었다.
“먹었어.”
여태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리고, 느릿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차선우는 팔짱을 풀면서 비스듬하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의 팔은 곧 의자 팔걸이 위로 단단하게 자리했다.
“진짜로?”
“응, 정말로.”
“거짓말이면 혼나.”
해영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선우가 숨죽여 웃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낯은 밝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해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해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그의 시선이 차츰 아래로 내려갔다. 진득한 시선은 이윽고 해영이 입고 있는 와이셔츠로 향했다. 원래 빳빳하게 다려져 있었을 셔츠는 온종일 입고 있어서인지 간간이 주름이 잡혀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천천히 몸을 훑어내리던 시선이 이내 다시 해영의 눈으로 꽂혀 들었다. 짙은 눈동자가 평소보다 어둡게 일렁였다.
“해영아.”
문득 들려온 부름에 왜인지 모르게 움찔 어깨가 굳었다. 해영 또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순간 놀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멈칫한 그를 발견한 선우가 굳어 있던 표정을 느슨하게 풀었다.
“이리 와, 해영아.”
“…….”
“가까이 와 줘.”
차선우는 이전보다 한결 다정한 낯으로 그를 불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근사근한 음성이었다.
뒤늦게 발을 뗀 해영이 선우의 앞으로 다가섰다. 선우는 제게로 다가온 그의 팔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앞으로 쏠리는 무게 중심에 해영은 급하게 잡히지 않은 팔을 선우의 머리 옆으로 뻗었다.
“아.”
턱, 깁스한 팔로 의자의 등받이를 잡으면서 작은 통증이 흘렀다. 입술을 물고 고통을 삼킨 해영이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선우와 눈이 마주친 그가 찌푸릴 뻔한 미간에서 힘을 뺐다.
차선우는 제게로 쏠린 해영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몸을 쉽게 들어 올리는 팔 힘에 해영은 한숨을 쉬며 선우가 앉은 의자 위로 한쪽 무릎을 올렸다.
“…여기 회사야.”
그의 위에 반쯤 올라탄 자세로 해영이 중얼거렸다. 이 시간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나 이러다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찡그리듯 웃는 그를 올려다보며 선우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감싼 팔을 놔주지 않는 걸 보면 그다지 신뢰가 가진 않았다. 선우는 자신을 붙잡은 채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한참이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대체 뭘 확인하고 싶은 건지 해영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형, 왜 그래?”
걱정스러운 물음에 한동안 말이 없던 선우가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흰 손끝이 셔츠 위로 올라왔다. 그는 칼라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누구 거야?”
“뭐?”
“처음 보는 옷인데.”
나직한 목소리에 해영은 뒤늦게 선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깜박했단 듯 입술 틈으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표정이 좋지 못하더니, 모르는 옷을 입고 있는 게 거슬린 모양이다.
“아, 이거. 동기 중에 김채훈이라고, 그 형한테서 빌렸어.”
“김채훈….”
조용히 듣고 있던 그가 해영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작게 곱씹었다. 그건 차선우의 오랜 버릇이었다. 한 번 들은 이름을 잊어 먹지 않으려는 건지, 그는 구태여 입으로 한 번 더 읊조리듯 중얼거리며 기억 한편에 박아 넣곤 했다.
옷깃을 쥐고 있던 손끝이 아래로 내려가 셔츠의 가장 윗단추를 풀었다. 툭, 손끝에 걸린 단추가 단숨에 풀렸다. 그 손짓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영이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 고개를 들었다.
“잠은?”
“그 형네서 잤는데….”
그동안 잠은 어디서 잤냐는 물음이었다. 짧게 토막 난 물음에 목울대가 위로 일렁이다 가라앉았다. 야근한다고만 했지 아예 못 들어간다고는 말하지 않았던 터라, 해영은 괜히 찔리는 기분에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3일 내내?”
웃음기 섞이지 않은 숨결이 귓가에 떨어졌다. 그 순간 툭, 단추 하나가 더 풀렸다.
아래로 향해 있던 시선이 천천히 들렸다.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면서 긴 속눈썹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시선과 마주한 해영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단정한 얼굴을 하고는 있었으나, 어떻게 봐도 화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마 그럴 것이다. 평소에는 성질을 낼 줄 모르나 싶을 정도로 얌전한 차선우라도, 애인이 3일 만에 얼굴을 보이는 주제에 남의 옷을 입고 있는 꼴을 보면 열받을 만도 했다.
“형.”
“응.”
“많이 화났어?”
해영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그를 주시했다. 시선을 마주한 채로 차선우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긴. 입 안에 헛웃음이 고였다. 여전히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신뢰가 갈 리가 없었다. 손끝에 조금만 힘을 줘도 단추는 힘없이 풀릴 듯했다. 아슬아슬한 상황에 해영이 저도 모르게 문가를 곁눈질했다. 다행히 문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굳게 닫힌 채였다.
“정말 화 안 났어.”
문가를 힐끔거리던 해영은 들려온 말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스탠드 조명에 비쳐 드러난 낯이 창백했다. 차선우는 그런 연약한 꼴을 하곤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안했어.”
“…….”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밴 힘없는 웃음기에 해영의 어깨가 굳었다.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건 아마 속상함일 것이다.
결핍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을 것 같은 사람이 왜 이렇게 위태로운 얼굴을 하는 걸까. 해영은 가끔 그의 깊은 불안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 앞에 서서, 그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 마음을 쏟아 주고 싶었다.
“미안.”
진심 어린 목소리가 선우의 귓가에 떨어졌다. 해영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다, 다시금 입을 열어 재차 사과했다.
“미안해, 형.”
차선우는 결국 눈을 감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해영이 잠들기 전까지 잠들지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차선우는 해영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끝내 들어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출근했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피곤한 것보다 더 크게 찾아오는 것은 불안감이었다.
“못 보던 옷을 입고 있어서 놀랐어….”
“나는 형이 내 옷을 다 알고 있단 거에 놀랐어.”
해영의 중얼거림에 선우가 숨죽여 웃었다. 그렇게 쌓여 오던 모든 불안정한 감정들이 해영의 한마디에 한순간 녹아내렸다.
그는 참아 왔던 숨을 토해 내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등을 꽉 끌어안는 힘에 해영이 반사적으로 입술을 물었다. 그것도 잠시, 와이셔츠 위로 비비적거리는 몸짓이 느껴지자마자 바짝 굳어 허리를 곧추세워야 했다.
“형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 회사야. 나 지금 심장 두근거리는 거 들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차선우 말고 또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장소가 주는 죄책감이 있었다. 해영이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그가 어깻죽지에 이마를 깊숙이 묻어 왔다. 해영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얼굴로 선우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문 너머로 선명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휙, 돌아간 고개가 굳게 닫힌 문으로 향했다.
“…….”
잘못 들은 건가 했으나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해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의자에서 내려가는 그를 선우는 쉬이 놔주었다.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바닥을 긁었는지, 끼익거리는 기이한 마찰음이 울렸다.
잔뜩 긴장한 채로 문가로 다가간 그가 손가락으로 블라인드를 살짝 벌렸다. 흐릿한 실루엣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머지않아 멀찍이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영이 참아 왔던 숨을 토해 낸 것도 그때였다.
“하….”
어떤 노예가 이 시간에 다시 출근한 건지 모르겠지만,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우선 회사를 빠져나가는 거였다.
천천히 뒤를 돈 해영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꿰뚫듯 응시하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른스럽고 다정하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선우의 시선이 어디에 꽂혔는지 알아차린 해영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너….”
초조하게 벌어졌던 입술이 이내 다시 다물렸다. 그는 자신이 본 걸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다가, 곧바로 몸을 일으켜 해영에게로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팔을 잡아 올리는 힘에 해영은 고분고분 손을 들어 줬다. 어차피 들킨 마당에 더 숨길 수도 없었다. 붕대로 감싼 팔을 내려다보던 선우가 숨을 들이켰다.
“다쳤어?”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여유 없는 물음이 튀어나왔다.
“언제? 어디서.”
다급해 보이는 얼굴을 보자 어쩐지 덩달아 초조해졌다.
그러고 보니 선우와 만나면서 이렇게까지 다친 적은 처음이었던가. 놀랄 걸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더 창백하게 질린 낯을 보니 속이 탔다. 해영이 그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
“진짜 크게 다친 건 아니라 붕대도 곧 풀어.”
“…….”
“선우 형?”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해영은 제 팔을 붙잡은 채 얼어붙은 선우를 바라보다,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집에서 얘기해.”
그는 선우를 향해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나가자는 몸짓에 차선우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앞장서 문을 열고 나가는 해영을 말없이 뒤쫓았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목숨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차장으로 내려간 해영은 주차된 선우의 차 앞에 멈춰 서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얼른 내놓으라는 듯 까딱이는 손바닥을 바라보던 선우가 주머니를 뒤졌다.
이내 그의 손끝에서 차 키가 걸려 나왔다. 그건 해영의 손 위로 떨어지려다 말고, 잘그락 소리를 내며 다시 선우의 손바닥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의아하단 듯한 시선이 선우에게로 향했다.
“뭐야? 왜 안 줘.”
“…다친 손으로 운전을 어떻게 해.”
차선우는 마른 얼굴로 웃더니 보폭을 넓혀 성큼 다가왔다.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해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마 앞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해영의 말간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왜 못해. 손가락은 있는데.”
해영이 다친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쥐었다 펴는 걸 보여 주었다.
선우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차 키는 넘겨줄 수 없단 얼굴이긴 했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린 채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애정 어린 시선에 슬슬 긴장이 풀렸다.
그는 늘 이런 지점에서 양보하지 않았다. 그게 자신을 생각해서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해영은 장난스레 한쪽 눈썹을 세웠다.
“형은 사람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어.”
“내가 너를 걱정하는 게 과해?”
차선우는 자신의 삐딱한 자세를 따라 하듯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로 시선을 맞춰 오는 눈을 발견한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해영아, 이건 정당한 걱정이야.”
“…….”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다쳤다는 걸 안 순간, 난….”
중얼거리듯 말하던 그가 말끝을 흐렸다. 선우는 하려던 말을 잇는 대신 눈을 접어 웃으며 해영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니까 걱정할 수 있게 해 줘.”
아래를 향한 시선, 애매하게 늘어진 입꼬리, 천천히 깜박이는 눈꺼풀. 그가 의도했을 표정이 고스란히 시야에 박혀 들었다. 응? 해영아, 하고 채근하는 목소리가 더해지자 이게 수작이라는 걸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는 없었다.
졌다는 듯 허탈하게 웃은 해영이 결국 조수석으로 향했다.
집 앞에 선 해영은 익숙한 비밀번호를 눌러 도어락을 해제했다. 활짝 문을 열고 뒤에 서 있는 선우를 향해 눈짓하자 안으로 따라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며칠 만에 들어온 집은 어두웠다. 집으로 들어온 해영이 조명을 켜면서 그대로 부엌으로 직진했다. 식탁 위로 재킷을 내려 둔 해영이 물컵이 놓인 곳으로 팔을 뻗었다. 피곤해서인지 유독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유리잔이 보인 건 그때였다.
“…….”
잔에 남아 있는 액체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손을 뻗은 해영이 컵을 들어 코로 가져갔다.
“윽….”
은은한 연갈색을 띠고 있는 것만 봐도 물 같진 않다 싶더니 역시나 짙은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얼마나 독한 건지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기분이었다. 혀를 대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만만하지 않은 도수에 순간 얼이 빠졌다.
선우 형 술 못 마시는데…?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던 해영이 설마,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안으로 들어서던 선우가 해영이 쥐고 있는 유리잔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그의 얼굴 위로 곤란함이 스쳤다. 실수했단 듯한 표정에 해영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지워 냈다.
“형 술 마셨어? 이거 언제 마신 거야?”
물어보면서도 이미 답을 알 것만 같았다. 눈을 깜박이던 선우가 이내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눈꺼풀을 따라 내려간 속눈썹이 살짝 떨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제… 잠이 안 와서.”
그는 시선을 피한 채 처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직이 뱉어진 짧은 변명은 해영을 멈칫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건 알코올 중독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집에 며칠만 더 안 들어왔으면 멀쩡한 사람 하나를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 뻔한 해영이 한숨을 삼켰다. 앞으로는 일거리를 가져오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집에는 들어와야겠단 다짐을 하면서.
선우는 잔에 남은 술을 쏟아 버리는 해영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물로 헹군 컵을 옆에 내려 두고 고개를 든 해영은 제 뒤에 서 있는 그를 발견했다. 선우의 흐트러진 표정은 평소보다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게 어쩐지 심장을 철렁이게 했다.
해영이 다급하게 팔을 뻗어 선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그를 끌어안았다가 천천히 팔에서 힘을 풀었다. 곧이어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에 선우가 무너지듯 안겨 왔다.
“그랬어? 내가 잘못했네. 돌아와서 차선우 재웠어야 하는데.”
언뜻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다정하게 선우를 달랬다.
저를 애 취급하는 듯한 말투에 잠시 황당하다는 듯 웃던 차선우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을 따라 목 아래로 부드러운 머리칼이 스치면서, 해영이 간지럽단 듯 숨죽여 웃었다.
“다른 사람 집에서 자면서도 말 안 하고. 다친 것도…….”
어깻죽지 위로 얼굴을 파묻은 차선우는 등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에 한숨을 흘렸다.
“왜 말 안 했어?”
“형 걱정할까 봐. 야근하느라 얼굴도 잘 못 보고 있는데 다쳤단 말 들으면 놀랄 거 아니야.”
“…해영아.”
“형도 일해야지. 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할 거야?”
그 말에 어깨에서 느껴지던 무게가 사라졌다. 고개를 든 선우의 눈이 가라앉아 있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내린 차선우는 설핏 입매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너는 나를 과대평가해.”
뜬금없이 들려온 말에 해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선우는 이전보다 한결 풀어진 낯으로 웃고 있었지만, 그가 내뱉는 투정은 결코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해영아, 네가 돌아오지 않는 동안 내가 뭘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
“다 나을 때까지 숨기려고 했어?”
그건 순수한 질문이라기보단 끝까지 숨길 수 있겠냐는 듯한 물음에 가까웠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으나 해영은 그 안에서 슬쩍 추궁하는 듯한 기색을 읽어 냈다.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일부러 말하지 않으려던 게 아니라 말할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빴다는 변명은 명분으로 세우기에 지나치게 얄팍했다.
“어쩌다 다쳤어?”
“…….”
“언제.”
자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해영이 침음을 삼키며 입매를 늘어트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차선우라면 수요일에 다쳤다는 말을 듣고 쉽게 퍼즐을 짜 맞출 것 같았다. 거기에 오토바이랑 부딪혔다는 말까지 꺼냈다간…….
거짓말을 하기도,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곤란한 상황 앞에서 해영은 눈을 굴렸다. 선우는 어색하게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눈썹 위를 만지작거리는 손끝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길어지던 정적을 깬 것은 차선우였다.
“해영아, 내가 싫어졌어?”
“…뭐?”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방황하던 눈길이 단번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차선우는 짧은 호흡과 함께 눈을 내리깔았다. 착잡한 듯한 얼굴에는 짙은 불안이 서려 있었다.
“기사가 나갔던 날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잖아. 내가 보기 싫어진 걸까 봐 며칠째 한숨도 못 잤어.”
힘없는 목소리가 파도에 부서져 내리는 포말처럼 발끝을 적셔 왔다. 해영은 그가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하다가, 속으로 한 번 더 곱씹었다. 그러고 보니 창백할 정도로 질린 선우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선우의 눈가를 매만졌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시야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형.”
차선우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고민했던 이유는 그의 약혼 기사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계기가 된 건 맞지만, 그로 인해 선우가 싫어진다니. 결론이 단단히 틀려먹은 일이었다.
그저 새삼스럽게 선우의 배경이 훅 현실로 다가왔을 뿐이다. 집안에서 그에게 결혼을 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20대를 전부 그와 보냈음에도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단이 없다는 사실이 따끔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건 며칠이나 해영의 속을 쓰리게 했던 주제였다.
“그런 게 아니야. 기사 하나 보고 형을 의심하거나 고민했던 게 아니라고. 내가 바보 같아? 나는 몇 년이나 내가 직접 봐 온 형만 믿어. 널 믿는다고, 차선우.”
선우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밑바닥까지 내보였을 때도 해영은 자신이 싫으면 싫었지, 그를 싫어할 수 없었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목구멍이 울컥 뜨거워졌다. 잠시 멈칫한 해영이 꽉 주먹을 그러쥐었다.
“나는 그냥 형이 걱정됐어.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형을 압박하면 어떡하지, 근데 착해 빠진 차선우 혼자 입 다물고 참고 있으면 어떡하지.”
“…….”
“나는 너 절대 못 놔주는데, 내가 대체 뭘 해 줄 수 있을까. 기사 보고 오로지 그 생각만 했어.”
내일은 어제와는 달라야 했으므로, 해영은 어떤 순간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가진 게 없어 선우의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던 때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초라해지면 차선우는 불안해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해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했다. 그와 자신을 둘러싼 문제를 직시해야 했고, 막막함을 느끼면서도 답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뭐?
“내가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꼭 이렇게 사람 놀라게 하지. 형이 싫어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차선우는 제가 본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도 꼭 이런 말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곤 한다. 문득 억울한 마음이 치켜들었다.
따지고 보면 손해 보는 건 차선우가 아니다. 자신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싫어졌냐니.
‘열받아.’
자신은 이미 그의 앞에서 몇 번이나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저라고 그런 모습을 내보이고 싶었을 리가. 제 밑바닥은 마음대로 봐 놓고, 정작 본인은 근사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단 태도가 기가 찼다.
입을 꾹 다문 해영이 툭툭 선우의 정강이를 발끝으로 가볍게 찼다. 아프진 않아도 무시할 만한 힘은 아니었을 텐데, 그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해영아….”
말끝을 늘이는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번쩍 고개를 든 해영이 저를 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는 선우를 발견했다. 순식간에 황당해졌다. 사람 초조하게 만들 땐 언제고….
“좋아? 뭐가 그렇게 좋아.”
노려보며 묻는 말에도 차선우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꾹 입술을 짓씹으며 참는 모양새에 해영의 낯에 억울함이 스몄다. 그를 내려다보는 선우의 눈동자가 더없이 다정한 빛을 띠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어.”
장난스레 말꼬리를 올리는 그를 향해 해영은 물러서지 않고 답했다. 차선우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손을 들었다. 차가운 손끝이 살짝 상기된 해영의 얼굴을 쓸었다. 집요할 정도로 애정 스민 손길이 여실히 부드러웠다.
“경영 승계를 포기할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헛소리에 해영이 짓씹던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뭐라는 거야?
승계권을 포기한다는 말이 불안하게 들리는 건 단순한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선우의 입가에 걸쳐진 미소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소처럼 예쁘장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굴고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해영이랑 야반도주해서 결혼할까.”
“…돌겠네.”
“형이 내조할게.”
웃음기 어린 숨결이 뺨에 닿았다. 와이셔츠 위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손길이 허리 위를 만지작거렸다.
“나랑 결혼할 거지?”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해영을 가볍게 채근했다.
그건 허락을 구하는 목소리가 아닌 확인하는 듯한 어조였다. 더 견고한 관계로 묶이고 싶단 욕심이 제게도 있다는 걸 알면서 굳이 묻는 게 분명했다. 알면서도 굳이 직접 듣고 싶어 물어 오는 건 차선우의 버릇이었다.
“나 책임지기로 했잖아.”
“…….”
“나는 너 아니면 안 되는데….”
누군 너 아니어도 되는 줄 아나. 반박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근질거렸다. 듣고 있다 보니 덩달아 이상해지는 것만 같았다. 해영이 가늘어진 눈을 하고 선우를 훑어 내렸다.
“진짜 싫어졌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다시 좋아하게 만들어야지.”
“뭐?”
선우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내를 꺼냈다. 웃음기를 머금은 나긋한 목소리에는 설령 마음이 변했다고 해도 다시 돌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담겨 있었다.
어쭈. 손을 뻗은 해영은 선우의 볼을 잡고 옆으로 늘렸다. 힘을 주지 않고 뺨을 잡아당기는 손짓에 차선우는 눈가를 휘며 웃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화를 풀어 버린 역사가 빈번했으니까.
…예뻐서 봐준다, 진짜.
문득 자신이 그에게 너무 약한 거 아닐까 싶어졌지만, 별수 없었다. 해영은 볼을 잡아당기던 손을 풀어 그대로 선우의 목뒤를 쥐었다. 차선우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안다는 듯 고분고분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부딪치듯 맞닿으면서 시작된 키스에 해영이 숨을 삼켰다.
맞닿은 배 아래로 다리가 엉켜들었다. 몸이 밀착하면서 해영은 바지 너머로 닿아 오는 뚜렷한 형태를 느꼈다. 다리에 쓸리는 그 윤곽의 정체는 분명했다.
‘키스만, 했는데.’
도대체 선우가 뭐에 흥분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흥분한 모습을 보니 덩달아 아래에 피가 쏠릴 것 같았다. 해영이 입 안을 파고든 혀를 빨듯이 물었다. 제가 먼저 신호탄을 터트린 키스였으나, 어느새 테이블에 팔을 걸친 채 반쯤 넘어가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해영이 정신을 차린 건 차가운 손끝이 바지 지퍼를 잡고 내렸을 때였다. 지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내려가려는 바지를 간신히 붙잡은 채로 그는 입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 형. 나….”
의아하다는 듯 떨어진 시선이 열기에 젖어 있었다. 차선우는 젖어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아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선우와 눈을 맞춘 채 해영은 가빠진 호흡을 천천히 고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씻을래.”
작게 내뱉은 말에 선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이 해영의 얼굴에서 타고 내려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몸까지 훑어 내렸다.
확인하듯 집요하게 뜯어보던 눈길이 멈춘 곳은 회색 속옷 위였다. 아슬하게 끌어 내려진 바지 위로 언뜻 드러난 밴드에는 아무런 상표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처음 보는 속옷이었다.
“형?”
한참을 내려다보던 선우가 자신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한숨이 고였으나, 그는 차분한 얼굴로 입꼬리를 당겼다. 선우의 고갯짓에 해영이 그의 품 안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씻는 거 도와줄게.”
“…뭐?”
“다쳤잖아, 팔.”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상황에 맞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해영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드는 팔에 기겁했다. 번쩍 들리는 몸에 발끝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성인 남성을 안아 올리고서도 차선우는 느긋한 몸짓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유로워 보이긴 했지만, 제가 그다지 가볍지도 않은 터라 발버둥이라도 쳤다간 떨어질 것만 같았다. 숨까지 멈춘 걸 눈치챘는지 선우는 욕실 안으로 들어서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해영은 그가 내려 주는 대로 욕조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말려 올라간 셔츠를 내려다보니 문득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 손으로 단추를 투둑 풀어 낸 해영이 와이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됐어. 나 혼자서도 씻을 수 있어.”
애도 아니고. 채훈의 집에 있는 동안 한 손으로 잘만 씻었다. 해영은 이제 한 손으로 머리를 감는 것에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그리고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다는 걸 그 또한 이미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차선우는 입을 여는 대신 슬쩍 눈을 접어 웃었다. 실없는 반응에 의심스러운 눈을 하던 해영 또한 말없이 바지를 벗었다. 양말까지 끌어 내린 그는 이내 팬티의 밴드 부분을 쥐었다가, 한숨과 함께 선우를 불렀다.
“형.”
“응.”
“뭐가 또 신경을 건드렸어?”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이던 그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해영의 뺨을 쥐었다.
만지작거리듯 볼을 쓰다듬는 차가운 손끝에 해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와 동시에 선우의 흰 이마에 설핏 주름이 졌다. 눈을 내리깔아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잦게 떨렸다.
왜 울 것 같은 표정이지? 그가 꺼낼 말을 기다리던 해영이 순간 당황해 움찔했다.
“해영아, 너….”
차선우가 끝내 주저하던 입을 뗐다.
“다른 사람 냄새 나.”
불만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서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음성이었다. 그 말에 멈칫했던 해영이 곤란한 얼굴로 실소했다. 다른 사람 냄새라니. 오해의 여지가 다소 많은 발언이었다.
“…말을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채훈의 집에서 씻고 나온 탓에 원래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향이 묻어 나오는 것일 테다. 그걸 부러 다른 냄새라고 표현하는 걸 듣고 있자니 몸에서 힘이 빠졌다.
이걸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차선우는 뺨을 만지던 손을 내렸다. 해영의 어깨로 내려온 흰 손이 이내 부드럽게 어깨를 그러쥐었다.
“씻는 거 도와주고 싶은데, 안 돼?”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먼저 도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겠다는 것도 아니리라. 알면서도 말문이 막힌 해영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겠다….’
새삼스럽게 씻겨 준단 말에 부끄러워하는 것도 웃겼다. 아니, 사실 웃기진 않았다. 멋쩍은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해영은 부러 태연한 낯으로 속옷을 벗었다.
샤워 부스로 향하는 그를 따라 선우도 안으로 들어섰다. 괜히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면서 해영은 쏟아지는 물을 맞았다. 마음의 평화, 마음의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애써 평온을 유지하던 것도 잠시였다.
차선우는 입고 있던 셔츠를 팔뚝까지 걷어붙였다. 해영의 가슴팍 앞을 스쳐 지나간 팔이 샤워기의 수전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쏟아지던 물줄기가 단숨에 멎었다.
바디 워시가 묻은 샤워 볼을 든 그가 몸 위로 손을 뻗었다. 말릴 새도 없었다.
“손.”
짧게 떨어진 목소리에 해영은 반사적으로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몸 위를 미끄럽게 유영하던 손끝이 이내 아래를 향했다. 성기 위를 짧게 머무른 손끝은 꼼꼼하게 허벅지 안쪽도 쓸어내렸다. 움찔하던 해영은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씻겨 주는 거야?”
헛웃음과 함께 던진 물음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샤워기를 든 그는 손으로 비누 묻은 몸 위를 쓸었다. 맨살 위를 건드는 손길은 억세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냥 부드럽지만도 않았다. 단단한 손길 아래서 덩달아 단단해져 가는 성기에 해영이 결국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존나 부끄러워….’
차선우는 옷을 갖춰 입은 사람 앞에서 혼자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수치심을 자극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마 알고 이러는 거겠지. 모를 리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은 걸 꾹 참는 사이 거품을 다 닦아 냈는지, 선우가 다시 샤워기를 껐다.
“여기만 남았네, 해영아.”
그가 무릎을 꿇듯 굽혀 앉으며 말했다. 비싼 정장 바지가 망가지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금세 낮아진 눈높이에 그를 따라 시선을 내렸던 해영이 다시금 욕설을 삼켰다.
선우의 얼굴 옆으로 빳빳하게 서 있는 기둥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아… 형, 제발. 내가 알아서 할게.”
“도와준다고 했잖아.”
뭘, 자위를? 윤해영은 붉어진 눈시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것까지 도와준다는 말은 아니지 않았냐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발기한 성기를 그러쥐는 서늘한 손길에 해영이 입을 다물었다.
“풀어 줄게. 힘들 거 아니야.”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입술을 짓씹으며 노려보자, 선우가 글쎄…, 하고 말꼬리를 흐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기둥을 쥔 채 천천히 쓸어 올린 그는 곧 귀두를 손바닥으로 둥글게 굴렸다. 안 그래도 한껏 예민해진 부분을 어떻게 하면 더 자극할 수 있을지 터득한 사람 같았다. 살갗이 표피와 비벼질 때마다 성기가 간지럽다 못해 근질거렸다.
제 손으로 직접 쥐고 흔들고 싶었다. 빠르게 자극해 빠르게 사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선우는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투명한 액체가 새는 구멍에 혀가 닿았다.
“…잠시만, 차선우.”
선단만 머금고 있던 차선우가 이내 입을 벌려 기둥을 삼켰다. 쭙, 아래에서 들리는 민망한 소리에 해영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정감이 몰려오던 순간이었다. 쥐고 있던 성기를 놔주기는커녕 입으로 무는 선우의 행동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하윽, 씨….”
목구멍에 닿을 정도로 삼킨 차선우가 성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반사적으로 욕설을 짓씹을 뻔한 해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 안은 뜨겁고, 축축했고. 슬쩍 빼던 게 언제였냐는 듯 얇은 내벽에 선단이 비벼질 때마다 찌릿할 정도로 좋아서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단정하고 가지런한 얼굴로 하는 짓은 선정적이기 그지없다. 선우는 고개를 뒤로 뺐다가, 흡입하듯 다시 성기를 목 안까지 가득 머금었다. 입 안에서 이뤄지는 추삽질에 사정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해영이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다친 손이 선우의 머리를 붙잡았을 때였다. 잠시 멈칫한 그를 해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입 안에 자꾸만 침이 고였고, 그저 열기에 취해 반사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거칠어지는 추삽질을 선우는 고스란히 받아 냈다.
“읏, 아!”
해영이 선우의 머리칼을 쥔 채 그를 떼어 냈다. 동시에 쏟아져 나온 정액이 흰 얼굴 위로 튀었다. 오랜만에 사정한 탓인지 탁한 정액은 희뿌연 우유 같았다.
헉, 헉, 숨을 몰아 내쉬는 해영을 올려다보던 선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방금까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얼굴로 집요하게 좆을 쥐고 빨아 올 땐 언제고, 차선우는 금방 다시 차분한 얼굴을 했다. 혀를 내밀어 입가에 튄 정액을 살짝 핥아 내리더니 몸을 돌려 샤워 부스를 빠져나갔다. 그는 욕실의 세면대 위에 올려진 티슈 몇 장을 꺼내 얼굴과 손에 묻은 희뿌연 정액을 닦아 냈다.
해영은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없는 얼굴로 그런 선우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낯을 한 선우가 눈이 마주치자 슬쩍 웃어 보였다. 다가오면서 그는 와이셔츠를 벗어 내렸다. 단추를 푸는 손은 빠르지 않았으나,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젖은 몸을 망설이지 않고 끌어안았다.
“해영아, 어깨에 팔 올려.”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걸치기 쉽게 상체를 숙여 주는 몸짓에 해영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 차선우는 다시 바디 워시가 든 통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샤워 볼이 아닌 손 위로 익숙한 향의 바디 워시가 주륵 흘러내렸다.
미끌미끌한 손바닥이 둔부를 쥐었다. 가볍게 엉덩이를 그러쥐는 손짓에 해영이 신음을 삼키며 발끝을 들었다. 손끝은 이내 엉덩이 골 사이를 문지르다가, 닫혀 있는 구멍까지 내려왔다.
입구를 부드럽게 지분거리던 손가락은 곧이어 끝을 세워 살살 긁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이 입구를 긁어내리는 게 묘한 자극을 줬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움찔하던 찰나, 기다란 손가락이 바디 워시가 잔뜩 묻어 미끄러워진 구멍을 가르고 들어왔다.
“으, 형…!”
해영이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 위로 올렸던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에게 매달리듯 등 뒤를 꽉 잡아 오는 손길에 선우가 그에게로 한층 더 고개를 숙여 주었다.
안쪽을 쑤시고 들어온 손가락이 뜨거운 내벽을 들쑤셨다. 선우는 손을 움직이면서 해영의 얼굴을 주시했다. 중지의 손가락 마디가 입구에 걸릴 때까지 쭉 뺐다가, 안으로 쑥 파고들 때마다 그는 눈을 찡그렸다. 입에서 열에 들뜬 숨이 내뱉어졌다.
“여기… 미끈거려.”
짓씹어지는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선우가 안을 쑤시며 말했다.
“그건 형이…….”
“응, 알아. 나 때문이야.”
그는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기꺼이 긍정했다. 평소라면 이게 무슨 말장난이냐고 노려봤을 법도 하건만, 지금의 해영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바디 워시로 미끌미끌하게 젖은 손은 안을 질척할 정도로 헤집어 놓았다. 빠져나갈 듯하던 손가락이 구멍에 박힐 때마다 엉덩이와 부딪히면서 철썩이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하나가 더 파고들었다. 두 개의 손가락이 안을 벌리고 들어와, 전립선을 꾹 눌렀다가 다시 빠져나갈 때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주저앉지 못하도록 허리를 붙잡은 팔에 꽉 힘이 들어갔다. 도망칠 수도 없이 쾌감에 몸을 떨던 해영은 결국 그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쩐지 울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울면서 매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우 형.”
“응, 해영아.”
“이거 말고, 다른 거 하고 싶어….”
“…….”
안이 자극될수록, 몸이 달아오를수록 허전함은 더해졌다. 좀 더 사정없이 안을 박아 올리는 성기가 필요했다. 단숨에 정신을 놓고 절정에 이르게 해 줄.
선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해영을 그대로 안아 올려 침대로 향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어둠 속이었다. 꾸벅꾸벅 졸던 해영은 침대 위로 올라와 자신을 끌어안는 이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씻고 왔는지, 익숙한 품에서 느껴지는 물기 어린 향에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해영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던 선우가 잊을 뻔했다는 듯 물었다.
“해영아.”
“응….”
“속옷은 누구 거야?”
…무슨 말이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해영이 느릿하게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몽롱한 정신으로 그가 뱉은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굳이 왜 욕실까지 들어와 집요하게 구나 했더니, 이게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잠에 취한 얼굴로 툭 꺼내듯 말했다.
“…내 거. 회사 앞 편의점에서 샀어.”
“…….”
“그거 때문이었어? 남의 팬티 입은 줄 알고 욕실까지 따라 들어와서…….”
이거… 완전 변태 아니야? 황당하다는 듯 웅얼거리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차선우가 팔에 힘을 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긴 탓이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해영은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이미 피로가 쌓여 있던 몸은 익숙한 품 안에서 쉽게 노곤해졌다.
다시금 눈이 감긴 것과 동시에, 다정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
한쪽 벽면이 전부 통창으로 된 침실은 아침만 되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커튼을 치고 자는 걸 잊은 탓에 해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떠야만 했다.
간만에 침대에서 잔 덕분일까, 며칠째 자고 일어나도 가시지 않던 피로가 한결 덜했다. 침대가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역시 고가의 것들은 전부 제값을 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늘 같이 자던 사람의 유무가 중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해영은 옆에 누워 있는 선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지런히 감긴 눈이었다. 감긴 눈 아래 길게 늘어진 속눈썹을 바라보던 해영은 문득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미동도 없이 자는 선우를 한참이나 구경하다 침대를 빠져나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몸을 틀었다.
“…….”
그 순간 맞닿은 배 아래로 겹치는 다리에 해영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꾹 눈을 감고 있는 차선우의 정갈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는 줄 알았더니….
“선우 형.”
해영이 중얼거리듯 그를 불렀다. 선우는 여전히 자는 척을 하려는 건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더더욱 품에 파고들 뿐이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반신이 선우의 허벅다리에 비벼지면서 입에 뜨거운 숨이 고였다.
“…야.”
해영이 결국 아예 말을 놓은 채 그를 불렀다. 그제야 차선우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떴다.
“잘 잤어, 해영아?”
잠기운에 잠긴 목소리가 나른하게 늘어졌다. 요란스러운 아침 인사를 하는 당사자치곤 뻔뻔할 정도로 능청스러웠다.
“이럴래?”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사뭇 붉어진 얼굴의 해영이 끝내 벗어나길 포기한 것처럼 힘을 풀었다. 선우는 그제야 맞대고 있던 하반신을 느슨하게 물렸다.
그 틈을 타 몸을 일으킨 해영이 빠르게 침대를 빠져나갔다. 옷은 대충 꺼내 입었다. 자신을 구경하는 시선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해영은 손을 들어 부스스하게 뜬 머리를 꾹 누르며 침실을 나섰다.
큰 머그컵을 꺼낸 해영이 가득 찰 만큼 물을 따랐다. 그러고는 앉지도 않고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있을 때 다가오는 선우가 보였다. 자고 일어난 게 맞는지, 꾸민 듯 단정한 모습이 새삼스레 신기했다.
방금까지 발장난을 치던 건 자신이 아니라는 듯 평온한 얼굴은 조금 얄밉기도 했지만.
물 잔을 비운 해영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얼마 전 장을 봐 왔던 것들이 고스란히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그동안 차선우는 대체 뭘 먹고 산 걸까 고민하는 사이, 등 뒤로 메신저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해영아, 핸드폰 바꿨어?”
뒤에서 들려온 물음에 냉장고를 들여다보던 고개가 들렸다. 휙 몸을 돌린 해영이 제 핸드폰을 들고 있는 선우를 발견했다.
“…김성현?”
중얼거리듯 이름을 읽은 그가 누구냐는 듯한 눈길을 던졌다. 탁, 냉장고 문을 다시 닫은 해영이 선우를 마주 보고 섰다. 왜인지 모르게 목이 긴장감으로 뻣뻣해졌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들킬 게 뻔했으니까. 해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붕대로 돌돌 묶인 팔을 들어 보였다.
“팔 다친 거. 성현이랑 부딪쳐서 다친 거거든. 병원비 준다고 해서 연락처 교환했어.”
“그동안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어?”
“아니? 그럴 게 뭐 있어.”
“그런 것치고 다정한데….”
선우가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대체 뭐가 다정하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에게로 다가선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린 채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해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김성현
형 안녕히 주무셨어요?
(사진)
저 오토바이 수리했어요ㅎ
“…….”
무슨 문안 인사라도 건네는 것 같은 인사에 아침부터 황당해졌다. …오토바이 수리를 한 건 다행이긴 하지만. 한숨을 삼킨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고개를 들자,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선우가 보였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가 뚫어질 듯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속내가 읽히는 표정에 해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얘 고등학생이야. 형은 애한테도 질투해?”
“내가 어디까지 질투할 수 있는지 알면 놀랄걸….”
잠시 멈칫했던 차선우는 바람 빠지듯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이 삐진 어린애 같아서 해영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차선우는 분명 의지할 수 있는 상대였으나, 가끔 이렇게 어른스럽지 못하게 굴 때가 있었다.
“차선우.”
“…….”
“형, 이라고 해 봐.”
“응?”
엉뚱한 말에 그가 비스듬히 아래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해영을 마주한 채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해영은 그런 선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씨름은 길지 않았다. 차선우는 고민 없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곡선을 그린 입술이 열리면서 다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형.”
움찔, 해영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이렇게까지 곧바로 형이라고 불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조금쯤 그를 놀려 보고 싶었을 뿐인데….
“해영이 형?”
“…형, 이제 그만해.”
“시켜 놓고, 왜. 이런 호칭이 좋아? 응? 해영아.”
차선우는 어느새 잠기운이 가신 듯 샐쭉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해영이 형.”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게 해영을 불렀다. 그에게서 처음 듣는 호칭이어서인가. 어쩐지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어색하기도 하고, 왜인지 모르게 좀 부끄럽기도 했다.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배 속이 저릿해질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얼굴은 왜 붉어지지…?”
“뭔 소리야, 아니야.”
“맞는데…. 사실 연하가 취향이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해영은 반박하려다 말고 입술을 내미는 선우를 보며 실소했다. 이거 딱 삐졌다는 표시 같은데. 사실 삐지지 않았을 거면서 굳이 이러는 의도가 뻔히 읽혔다. 이건 차선우 나름의 투정이었다.
“연기하지 마, 차선우.”
“연기 아니에요, 형.”
“그, 그만하라고.”
해영이 결국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선우는 입을 가로막은 손바닥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생글 웃으며 그 위로 쪽, 쪽 입을 맞췄다. 손바닥에 간지러울 정도로 와 닿는 입술에 윤해영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해영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며 한숨을 삼켰다. 차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불러왔다.
“해영아.”
“왜?”
“오토바이 수리는 무슨 이야기야?”
손끝이 움칠 떨렸다. 해영의 느릿한 시선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선우의 얼굴을 훑었다. 끈질긴 차선우. 잘 넘긴 줄 알았는데, 메시지 내용을 잊지 않고 확인하다니 치밀했다.
잠시 고민하던 해영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나랑 부딪쳐서 미러가 깨졌거든.”
“…누구랑 부딪쳐?”
단숨에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해영은 먼저 선수를 쳐 그를 끌어안았다. 등에 손바닥을 붙인 채 진정시키듯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자 머리맡에서 무거운 한숨이 꺼질 듯 새어 나왔다. 슬쩍 눈을 드니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는 차선우가 보였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데리고 집을 뛰쳐나가고 싶단 얼굴이었다.
그런 선우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사람과 부딪혀 다쳤다는 말과 오토바이에 부딪혀 다쳤다는 말은 제 귀에도 사뭇 다르게 들려왔으니까.
“아침 먹고 같이 병원 가자.”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타협의 여지가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어제부터 팔에 내내 신경이 쏠려 있더니 오토바이와 부딪혔단 말이 다시금 그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팔에 꽂힌 시선이 어젯밤의 연장전을 알렸다.
“괜찮다니까….”
어물쩍 대꾸하면서도 해영은 자신이 끝내 선우에게 이기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사실은 그가 건네는 걱정이 좋았다.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듯한 눈을 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해영아, 너는.”
나는? 해영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턱을 들었다. 차선우는 고개를 숙여 해영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춘 채 말했다.
“너는 가끔 통증에 너무 둔감해.”
“…….”
“몸은 이렇게 민감하면서….”
“…읏, 형!”
더 깊이 고개를 숙인 그가 목덜미를 잘근 물었다. 살갗을 고스란히 파고드는 숨결에 해영은 움칫할 수밖에 없었다.
차선우는 그런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유달리 예민하게 반응하는 곳이 어딘지 안다는 듯 목에 입술을 찍어 누르는 몸짓이 익숙했다. 끝내 달뜬 호흡이 터져 나온 순간, 선우가 입술을 떼곤 고개를 들었다.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위치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갈 거지?”
마주친 눈매가 달짝지근하게 휘었다. 입가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해영은 별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래.”
졌다는 듯 말했으나 사실 그건 패배가 아니었다. 사랑이었고, 상한선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감정의 표현이었다.
그 어떤 시간도 영원히 손에 쥐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다행인 동시에 불행이었다. 모든 게 끝나 버린 것만 같던 최악의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이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행복한 순간도 언젠가는 흐릿해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결국 연장선에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자신을 붙든 이는 여전히 눈앞에 있었으며 그렇게 포기하지 않은 순간순간들이 쌓인 발밑은 견고했다. 해영이 선우를 마주 본 채로 픽 입꼬리를 올렸다.
***
일요일 날씨는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차에서 내린 해영이 성큼 다가오는 여름을 알리듯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서 고개를 들어 보였다.
“해영아.”
운전석에서 내린 선우가 차 문을 닫으며 그를 불렀다. 선우와 시선을 마주한 해영이 들어가자는 듯 고개를 까딱거려 보였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심에 있는 컨벤션 웨딩홀이었다. 이미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꽤 되는지, 입구가 제법 북적거리고 있었다. 해영은 제 옆으로 다가온 선우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예식장은 바로 1층에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축의금 접수대 앞에 서 있는 남자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해영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해영은 금세 그의 앞으로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재휘 형.”
“왔어?”
멀쑥한 턱시도를 입은 채 서 있던 재휘가 다가온 해영을 향해 긴장한 얼굴로 웃었다. 그는 곧 해영의 옆에 서 있는 선우와도 눈짓으로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앞으로 모은 재휘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게 시야에 잡혔다. 안 그래도 일상에서는 스위치를 내리고 사는 사람인지라 걱정스러웠다. 결혼식 날이라 그런지 유독 더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거 괜찮은 건가?’
식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보니 문득 걱정이 치켜들었다.
“어, 해영!”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러 왔다. 고개를 돌리기 전부터 누군지 알 것 같아 해영이 입가에 실없는 미소를 걸었다.
“너도 왔어?”
“당연하지, 이게 어떤 결혼인데. 팔은 왜 그래?”
“좀 다쳤어. 별거 아니야.”
카메라를 든 민호가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다가왔다. 러브라인 최고 아웃풋이라는 민호의 평에 해영은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러브라인’의 촬영이 끝난 지 벌써 1년째였고, 오늘은 재휘와 세희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최종 선택에서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될 거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가령, 최종 커플 중 하나인 소윤과 민호는 촬영이 끝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헤어지지 않았나. 좋은 친구 사이로 남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것도 이젠 예전 일이었다.
“세희 누나 봤어?”
“아직.”
“같이 가자 그럼!”
앞장선 민호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메라를 들고 신부 대기실로 향하는 내내 그는 대체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입을 쉬질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여전히 말이 많다고 생각하는 찰나, 앞서 걷던 민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신부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환한 조명 아래 앉아 있던 세희가 고개를 들었다.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로 꾸민 그녀는 어쩐지 알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해영아. 선우 씨도 왔어요?”
소파에 앉은 채로 그녀가 두 사람을 반겼다. 선우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간 해영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누나, 오늘 진짜….”
말하려다 말고 멈칫한 그의 시선이 곧 옆에 선 선우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선우가 설핏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해영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평범한 칭찬 한마디를 꺼내는 데에도 머뭇거리게 만드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옆에 선 차선우부터 시작해, 러브라인을 끝까지 다 보고 나서부터 이상한 경계를 하는 재휘까지. 카메라를 든 민호가 이쪽을 찍고 있는 것도 신경 쓰였다.
“응, 오늘 좀 예쁘지?”
세희는 그런 해영을 안다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 또한 재휘와 마찬가지로 다소 긴장한 얼굴이었다. 해영은 씩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은 왜 그래?”
곧 깁스한 팔을 발견한 세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옆에서 옅은 한숨을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영은 못 들은 척 애써 화제를 돌렸다.
“좀 다쳤어요. 근데 누나, 쟤는 왜 저러는지 알아요?”
그가 조금 상체를 낮춘 채 민호를 눈짓하며 물었다. 세희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답했다.
“결혼 브이로그 올려야 해서. 오늘 하루 종일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영상 좀 찍으라고 시켰어. 맞다, 너 영상에 나와도 되지?”
…브이로그?
예상하지 못한 단어의 등장에 해영의 눈썹이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왜 계속 카메라를 들고 다니나 했더니, 얼마 전부터 세희의 쇼핑몰에서 모델로 일하기 시작한 그가 고용주로부터 임무를 받은 모양이었다. 결혼 당일에도 브이로그를 찍게 시킨 세희한테 놀라야 할지, 신나게 대표님의 결혼식 브이로그를 찍고 있는 민호에게 놀라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오늘은 러브라인 특집이란 말이야. 너랑 선우 씨는 영상에 많이 안 내보낼게. 허락해 줘.”
“오늘이 왜 러브라인 특집이에요? 누나 결혼하는 날이지….”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해.”
자신의 결혼식조차 콘텐츠로 사용하는 걸 보면 그녀가 어떻게 일찍이 성공한 건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러브라인의 본전을 뿌리째 뽑다 못해 골수까지 쪽쪽 뽑아 먹는 사업력에 해영은 할 말을 잃었다.
신부 대기실 안을 조금 더 찍던 민호는 곧 다른 이들을 촬영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대기실 안에 남은 건 세희와 해영, 그리고 선우였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해영을 위아래로 훑더니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왜 결혼은 내가 하는데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거 같지?”
“…….”
쇼핑몰 CEO다운 눈썰미였다.
예리하게 꽂힌 말에 해영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 이내 착잡해진 얼굴로 손을 들어 눈썹 위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후, 낮은 한숨이 그의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결혼식에 오기 전 아침, 씻고 나온 해영은 선우가 건네주는 그대로 옷을 입었다. 평소에도 그가 옷을 곧잘 골라 주었으므로 의심도 하지 않고 갈아입고 나온 해영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차선우를 보며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형, 옷이….’
비슷한 걸 넘어 똑같은 디자인의 옷이었다. 재킷까지 걸치면, 영락없이 차선우와 옷을 맞춰 입은 걸 자랑하는 꼴이 됐다. 그나마 해영이 재킷을 벗어 한쪽 팔에 걸고 있는 탓에 한눈에 알아보긴 어려웠다.
…세희가 보자마자 눈치챈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두 사람도 결혼할 때 됐지. 언제 해?”
그녀가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해영을 올려다보았다. 결혼이라니. 차선우가 아닌 남에게서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물음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해영을 보던 세희가 선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목소리를 한층 낮춘 채, 은밀한 접선을 시도하듯 물었다.
“부케 드릴까요?”
“아, 누나 무슨 소리예요.”
이게 뭐라고 진지한 얼굴을 하는 세희를 보며 해영이 실소를 흘릴 때였다. 옆에서 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 주세요.”
“형은 또 뭔 소리야?”
해영이 황당하단 얼굴로 선우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나 정작 눈이 마주친 차선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입꼬리를 당길 뿐이었다. 동시에 세희로부터 곧 청첩장을 받겠다는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와중 해영을 구한 것은 곧 식이 시작한다고 알리러 온 민호였다.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곤 예식장으로 돌아가자는 그에게 해영이 드물게도 반가운 얼굴을 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김민호도 도움 되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 자리는 저기야. 두 사람 빼고 이미 다 와서 앉아 있어.”
민호가 예식장 안쪽으로 들어가며 손짓했다.
웨딩홀 안은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 통로의 좌우로 널찍한 원형의 테이블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꽃과 오브제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테이블 사이사이를 지나쳐 세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도착했다.
“와, 해영 오빠. 오랜만이네? 선우 오빠도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
해영이 소윤의 옆자리 의자를 꺼내 앉으며 화답했다. 그는 곧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과도 눈짓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 예식장은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곧 식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소란스러움이 잦아드는 도중 해영이 소윤을 향해 살짝 몸을 기울여 말했다.
“대학 졸업했던데, 축하해.”
그녀가 곧 졸업한다는 건 알았지만, 시험을 준비하고 곧바로 로펌에 출근하게 되면서 바빠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 뒤늦게 건넨 졸업 축하 인사에 소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했지만, 그 순간 들려온 사회자의 목소리에 소윤이 입을 다물었다.
“신랑 입장이 있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웅장한 피아노 반주가 울려 퍼졌다. 예식장의 문이 열리면서 재휘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아까보다도 훨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목각 인형이라도 된 듯 뚝딱거리면서 들어오는 신랑의 모습에 예식장 여기저기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해영도 입술을 물어 웃음을 삼켰다.
“이어서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주례자 앞에 선 재휘를 바라보던 이들의 시선이 단번에 문가로 날아들었다. 방금보다는 한결 느려진 행진곡이 들려왔다. 예식장 안으로 들어선 세희가 차분한 낯으로 웨딩 주단을 밟았다.
신부 대기실에서 이미 봤던 모습인데도, 예식장 조명 때문인지 낯선 느낌이었다. 묘한 기분으로 세희를 바라보던 해영은 문득 제 얼굴로 꽂히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한 번도 다른 곳을 향한 적 없다는 듯 올곧은 눈길과 마주했다.
마주친 눈이 이내 느릿하게 휘어졌다. 눈웃음을 짓고 있는데도 어쩐지 웃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들킨 기분이었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인 해영이 선우에게로 몸을 기울며 입을 열었다.
“…형도 예뻐서 잘 어울릴 거 같아.”
작게 속닥거리자 차선우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뭐가 잘 어울릴 것 같은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차린 듯했다. 해영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꼬리가 가늘게 늘어졌다.
“그런 취향이야?”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해영이 입을 다물었다. 괜히 제 무덤만 판 기분이었다.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해영은 꿋꿋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재단 위에는 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주례자를 바라보고 있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달짝지근하게 떨어졌다.
“결혼해 주면 입어 줄게.”
…뭐? 움찔한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앞을 바라보고 있는 차선우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낯을 보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고였다. 아, 진짜.
조금의 고민도 없이 결혼하면 입어 주겠다고 말하는 얼굴이 상상을 부채질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차선우…. 잠시 상상해 보던 해영은 어쩐지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입술을 물었다. 남의 결혼식장에서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걸까 싶지만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차선우랑 꼭 결혼해야지.
짓씹듯 다짐한 해영이 테이블 아래로 팔을 뻗어 선우의 손을 잡았다. 손끝을 잡아 오는 온기를 느꼈는지, 선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보였다.
맞잡은 손은 예식이 끝나갈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손끝을 넘어 전해지는 온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나갈 예정이었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