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그때의 그날
아마 2학년 중간고사 기간이 막 끝났을 즈음일 것이다. 과방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해영은 최근 부쩍 바빠져서 학교에서 마주치는 일이 적어진 선우를 떠올렸다.
차선우는 졸업도 전에 인턴 실습을 나갔다. 한제 인턴십에 붙는 것은 아무래도 떠들썩한 사건이다 보니, 그가 직접 말한 적 없어도 이미 과내에서 제법 이야기가 돌았다.
해영은 그런 선우와 오늘 만나기로 한 참이었다. 엊그제도 만난 것을 생각하면 그다지 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만났을 당시 선우와 했던 대화를 떠올리곤 가벼운 한숨을 삼켰다.
저녁을 먹고 나서 기숙사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해영은 인턴 실습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없을 그를 배려해 만나는 날을 좀 줄여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바쁠 텐데, 지금처럼 거의 매일 만나는 건 그에게 무리한 일정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만나는 날이 줄어드는 건 해영 또한 섭섭했지만, 그게 당연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차선우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바라보기 전까진.
‘…….’
‘…왜 그런 얼굴 하는데?’
아래로 떨어진 시선은 보지 않아도 서운함으로 얼룩져 있을 것이 뻔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자 해영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선우의 뺨을 붙잡았다.
제 눈을 피하지 못하게 단단히 얼굴을 붙들었는데도 차선우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저를 향하지 않는 눈길에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니, 형.’
그가 다급하게 입을 열어 선우를 불렀다.
‘그…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어. 내가 쓰레기 같은 말을 했네.’
해영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면서 대뜸 고해 성사를 했다.
‘그니까 나 좀 봐 봐. 형이 그런 표정 지으면 내 심장 떨어져.’
그가 선우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차선우는 그런 해영의 손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 결국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만나지 말잔 말 하지 마, 해영아….’
선우가 해영을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 말했다.
그의 등을 마주 안고 토닥여 주던 해영은 귓가에 내려앉는 속삭임에 멈칫해야만 했다. 대체 뭐에 삐진 건가 했더니 만나자는 빈도를 줄이자는 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입가에 헛웃음이 맴돌았다. 매일 만나던 거 삼 일에 한 번 꼴로 만나자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 불안한 얼굴을 할 필요가 있나. 누가 보면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자고 한 줄 알겠네.
쉬이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차선우가 칭얼거리는 건 귀여웠다. 본인도 알고 있으려나…. 해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형, 좀 말랑이 같아.’
‘……말랑이?’
‘있어. 어릴 때 키웠던 포메라니안.’
‘포메라니안….’
어릴 적 키웠던 흰 강아지를 떠올리며 해영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말랑이는 원래 사촌 누나네서 키우던 강아지였는데,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면서 해영의 집에 떠맡겨졌다. 낯선 환경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인지 강아지는 구석에서 벌벌 떨기만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해영은 하루 종일 말랑이의 앞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말랑이는 새로운 집에 적응하고 나서는 늘 자신의 옆에만 붙어 있었다. 가는 곳마다 쫄쫄 쫓아오다 못해 제가 집에 없으면 낑낑거리며 침대 밑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저와 떨어지면 불안해하던 말랑이의 모습이 어쩐지 선우와 겹쳐 해영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그렇게 한참 그를 토닥이다가 보낸 게 바로 엊그제였다. 해영은 점심시간 즈음 선우로부터 오늘 일찍 끝날 것 같은데 데리러 가도 되냐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부터 선우와 만날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 일을 누가 이런 식으로 해.”
컴퓨터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해영이 들려온 목소리에 슬쩍 시선을 올렸다.
그렇게 넓지도 않은 과방에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방금 들려온 목소리는 그중에서도 고학번 무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는 1학년 무리를 확인한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배경수….’
조금 전 입을 열었던 이는 해영보다 두어 살이 많은 복학생이었다. 그가 신입생이던 시절 과 학생회의 간부였던지라, 친하진 않아도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혼잣말이라도 하는 양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들으라고 하는 말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울적해진 1학년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해영이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선우 형 만나러 가야 하는데 나갈 분위기가 아니네.’
하진까지 해서 셋이 만나기로 한 약속이었다. 약속 시간을 떠올리며 해영이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과방 분위기가 심각했으나 해영은 그 딱딱한 분위기에서 홀로 비껴 나가 있었다. 그 또한 이번 일로 골치가 아프긴 했지만, 그의 역할은 이미 정해 놓았던 과 행사 시간과 장소를 변경하고 전달하는 데서 끝났기 때문이다. 문제가 발생한 건 그 이후, 공지를 새로 내보내는 과정에서였다.
교수님들을 20분 넘게 기다리시게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식은땀이 나긴 했다. 그래도 뭐, 1학년이라면 할 수 있던 실수 아닌가. 여기저기서 욕을 좀 먹긴 했지만 학생회야 욕먹는 게 일상이고.
그는 그저 학생회를 주축으로 한 고학번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눈치 주는 걸 보며 속으로 ‘꼰대 새끼….’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경영 조혜인 누나
꼰대짓 미친 거 아냐?
그런 해영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속을 읽어 낸 것만 같은 혜인의 말에 그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경영 조혜인 누나
가지가지한다ㅋㅋㅋㅋㅋㅋㅋㅋ
성혁이한테는 내가 말한다고 해 괜히 애들 갈구지 말고
핸드폰 화면에는 지금껏 연락하고 있던 채팅 창이 떠올라 있었다. 방금 도착한 혜인의 메시지를 보며 해영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혜인 누나가 있었으면 이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학생회장이 성혁 형으로 바뀐 후부터는 위에서 져야 할 책임을 아래에 묻는 일이 빈번해졌다.
성혁이 대놓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고학번들은 일이 꼬이면 후배들을 불러 그 앞에서 한숨을 푹푹 쉬는 게 일이었던 것이다. 그 꼴을 보고 있으면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학생회에 누나가 필요해...
임기도 끝났으니 혜인은 학생회와 더 엮일 일이 없었다. 알면서도 해영은 괜스레 그녀를 붙잡았다.
작년 학생회장이었던 혜인은 최근 취업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간혹 학교 근처에서 만나 함께 밥을 먹기도 하지만, 이전보다 얼굴 볼 일이 줄어든 건 사실이었다. 그 탓에 오랜만에 너스레를 떨자 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경영 조혜인 누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인간이야?
인간이라면 학생회 하자는 말 같은 건 하면 안 된다는 게 요지였다. 메시지를 읽으며 해영은 웃음을 삼켰다. 1학년 때 저를 꼬셔서 학생회에 가입시킨 이가 하는 말치고는 제법 뻔뻔했다.
해영이 그렇게 반박하기도 전에 혜인으로부터 자신의 빈자리가 이제야 느껴지냐는 타박이 몇 개 더 이어졌다. 피식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채 답을 보내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선우 형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해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자마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들을 마주해야 했다. 내내 적막하던 공간에 벨 소리가 울려서인지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었다.
“…저, 잠깐.”
쏟아지는 시선에 어색하게 입가를 매만지던 해영이 이내 서글서글한 미소를 걸쳤다.
“전화 좀 받을게요.”
끊겠다는 말 대신 해영은 눈을 찡그리듯 웃으며 양해를 구했다. 급한 기색이 느껴지는 어조에 여태 무거운 분위기를 잡고 있던 선배들이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끼리 눈치를 살피던 1학년들 또한 아닌 척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모두가 제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해영아.
“응, 공주님.”
- …….
다정한 부름 이후 수화기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에 보지 않아도 멈칫했을 차선우가 눈에 선했다. 입을 꾹 다물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자 해영의 입꼬리가 간질간질하게 올라갔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던 그에게 뒤늦은 대답이 들려왔다.
- …무슨 일 있어?
전보다 조심스러워진 물음에 해영은 순간 흘릴 뻔한 웃음을 꾹 참았다. 그가 얕게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없어. 벌써 기다리고 있어? 지금 바로 갈게.”
속닥이는 듯한 물음에는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해영의 옆에서 그가 전화하는 모습을 보던 동기가 괜스레 시선을 내렸다. 나직한 목소리에 묻은 선명한 애정 탓일까, 남이 전화하는 걸 듣고 있을 뿐인데 왜인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애인이 있다는 건 이미 암암리에 퍼진 이야기였으나 직접 연락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랬다.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든 해영은 여전히 제게 꽂혀 있는 시선들을 보며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평소에는 선배, 선배 하며 따르는 신입생들조차 자신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소 멋쩍긴 했지만, 그는 곧 시선을 돌려 평소 친하게 지냈던 태빈을 바라보았다.
눈썹을 늘어트린 해영이 태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충 급한 티를 내며 자리에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형, 나 약속 있어서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래, 가야지…. 근데…….”
얼굴에 장난기를 가득 실은 그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공주? 미친 새끼… 여친이야? 예쁘냐?”
태빈은 마치 희귀 생물이라도 마주한 것 같은 시선이었다.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물어 오는 그에게 해영이 웃으며 대꾸했다.
“제 애인한테 신경 끄세요.”
“…너 원래 이렇게 사랑꾼이었어?”
기가 찬 듯 입을 벙긋거리는 태빈 옆에서 다른 이들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더러 소름 돋는다느니, 유치하다느니 장난스러운 야유까지 섞여 있었으나 해영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웃어 보였다. 차선우가 예쁜 건 사실이었으므로 그는 당당했다.
그는 곧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컴퓨터 책상 위에 올려 둔 가방을 챙겨 들었다.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해영이 봐 달라는 양 웃었다.
“먼저 가 볼게. 선약인데 기다리게 할 수 없잖아.”
“그래, 공주님 기다리시면 가 봐야지.”
문가로 다가서는 그를 향해 태빈이 장난을 걸었다.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던 해영은 들려온 말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태빈이 어쩔 거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는 게 보였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해영이 이내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그리고 이번 일은 혜인 누나가 따로 성혁이 형한테 연락한대.”
덤덤하게 던져진 말에 이번에는 그를 장난스럽게 쳐다보던 태빈이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주춤한 것은 해영이 꺼낸 이름 때문이었다. 혜인의 이름.
혜인과 태빈이 제법 요란한 CC였다는 것은 과내에서도 유명한 일화였다.
그 이야기가 언급될 때마다 혜인은 경기를 일으키기라도 할 듯한 반응을 보여 줬다면, 태빈은 달랐다. 그 온도 차에서 해영은 아직 그가 혜인에게 마음이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귀찮게 엮일까 봐 굳이 아는 척을 하진 않았지만.
대신 천연덕스럽게 태빈을 보며 웃은 해영이 말을 이었다.
“총학에는 내가 말할게. 욕 좀 먹지 뭐.”
“…어.”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태빈에게서 해영은 몸을 돌렸다. 과실의 뻑뻑한 문고리를 돌리는 손길이 퍽 급해 보였다. 서둘러 빠져나가려는 모습이 빤히 보여 태빈의 옆에 있던 이 하나가 피식거렸다.
“빨리 가, 윤해영. 공주님 기다리시겠다.”
낯간지러운 호칭이 다시금 튀어나오자 주변에서 숨기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는 전보다 한결 풀린 듯했다. 문을 열고 나서면서, 해영은 신입생들이 있는 쪽을 향해 안심하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과방을 빠져나온 해영이 경영대 건물의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동시에 선우에게 전화를 건 그가 황급히 걸음을 옮기며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전화 연결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잔잔하게 들려오던 노랫소리가 끊기자마자 해영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어디야, 형?”
수화기 너머로 선우가 나지막한 웃음과 함께 카페 위치를 말해 주었다. 그가 있는 카페는 학교 중문에서 좀 더 내려가야 있는 곳이었다. 늘 사람이 많이 없는 덕분에 그곳에서 자주 만나곤 했다. 가는 길이라면 익숙했다.
곧바로 걸음의 방향을 바꾼 해영이 뛰다시피 보폭을 넓히며 물었다.
“형 밥은 먹었어?”
- 아직.
“배고프겠는데. 나 지금 바로 갈게.”
- 괜찮으니까 천천히 와, 해영아. 보고 싶어.
사근사근하게 들려온 말에 해영은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걸음을 서두르다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짧게 휘청거려야 했다. 해영이 단숨에 몸에 중심을 잡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천천히 오란 거야 말란 거야.”
잠시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던 그가 괜히 투덜거리듯 말했다. 옅은 웃음기가 섞인 선우의 목소리는 속을 소란스럽게 했다.
차선우는 또 제 말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를 잠깐 멍하니 듣고 있던 해영이 곧 전화를 끊었다. 긴 다리가 성큼성큼 앞으로 향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선우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딸랑.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해영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이내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있는 선우를 발견하곤 가쁜 호흡을 고르며 다가갔다.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
“응, 오래 안 기다렸어.”
선우가 저를 향한 물음에 선선히 답했다.
“달려왔어?”
“어. 형이 보고 싶다며. 날아오란 거 아니었어?”
장난기가 묻은 되물음에 선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 맞은편에 앉아 숨을 고르는 해영의 얼굴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털듯 빗어 내던 해영은 웃음기 서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선우를 발견했다.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건지,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은 제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고개를 기울인 해영이 제 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지금껏 물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선우가 슬쩍 눈을 접어 웃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영아, 내가 공주님이야?”
그 말에 주춤하게 되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해영은 기분 좋은 얼굴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선우와 잠시간 말없이 눈을 맞췄다. 자신을 바라보며 생글거리는 모습에 해영의 눈매가 짐짓 가늘어졌다.
‘아. 차선우 건수 잡았네.’
웃는 얼굴을 보니 한참은 더 놀려 먹을 작정인 듯했다. 못마땅한 듯 침음을 흘리며 해영이 콧등을 찡그렸다. 과실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환기하고자 내뱉었던 말이었다. 평소에도 그를 보며 공주 같단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괜스레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뗀 해영은 팔걸이에 걸치고 있던 팔을 들어 턱을 괬다. 그렇게 모르는 척하듯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도 힐끔 선우를 살폈다.
눈이 마주칠 때면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의 웃음기가 더더욱 짙어졌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미소를 보며 해영은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던 탓이다.
하여간에 차선우는 사람 꼬시는 게 습관이었다. 거기에 번번이 넘어가는 것도 습관이라면 습관이겠지만.
“왜 그렇게 웃어.”
투덜거리듯 내뱉은 말에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좋아서.”
“…….”
“해영이가 날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
“…형 요즘 좀 자신감 넘치네?”
해영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헛웃음을 흘렸다. 선우 또한 참지 못하고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숨죽여 웃었다. 그의 발언이 어이없다는 듯 굴긴 했지만, 그렇다고 부정하는 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듯했다.
황당한 것도 잠시였다. 윤해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을 지우지 못하는 선우를 보며 입가를 허물었다.
저런 모습조차 귀여워 보인다니, 이거 심각한 거 아닌가? 연애를 하면서 한 번도 상대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 없었는데. 해영이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켰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도 몰랐다. …진짜 망했다.
“그래서 싫어?”
선우가 해영의 말간 얼굴을 살피며 느릿하게 물어 왔다.
제가 싫다고 말하면 바로 고치기라도 할 것처럼 눈치를 보는 척하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당겨진 낯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절대 제 입에서 싫다는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선우가 속내를 숨기지 않을 때마다 해영은 종종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아직 그런 적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장난으로라도 싫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는 건 차선우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약았다, 진짜.’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억울할 지경이었다. 해영은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뜸을 들이며 테이블 위로 팔을 뻗었다.
테이블에는 선우가 시켜 놓고 손대지 않아 방치된 채 식어 가고 있는 커피 잔이 있었다. 해영은 잔을 들고 그대로 입가로 가져갔다. 무슨 맛인지 모를 음료를 홀짝이면서도, 슬쩍 시선으로는 선우를 훑었다. 그의 눈에도 여지없이 해영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용한 미소를 건 채 그는 해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눈에 들어와 박혔다.
아, 씨. 윤해영은 결국 들고 있던 커피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아니.”
단호한 대답에 선우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미소가 한층 화사해졌다. 야트막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죽인 웃음소리까지 새어 나왔다. 그 소년 같은 미소를 보며 해영은 잠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어떻게 싫어해.
“싫을 리가.”
어떻게 싫어하냐고….
항복 선언이 마냥 달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선우를 만나고 난 후였다. 해영이 입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듯 쓸어내렸다. 자신이 그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는 차선우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슬쩍 내려 선우를 힐끔거리자 어느새 커피 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식어서 미지근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애매한 미소를 짓는다. …귀여워 죽겠네.
선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해영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진누나
나 이제 나가거든?
당장 날아와
ㅎㅎ
방금 온 연락을 확인하자 하진이 보내온 문자가 보였다. 웃고는 있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해영의 입에 슬쩍 어설픈 미소가 걸렸다.
“형, 하진 누나 나왔대.”
“그럼 이제 나갈까?”
그가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건지 아는 선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해영은 나갈 준비를 하는 선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진과 만나기로 한 곳은 학교 기숙사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가면 있는 골목의 음식점이었다. 대학로와는 다소 떨어진 거리에 있는데도, 학생들이 많이 드나드는 탓에 가게에는 벌써 몇 테이블이 차 있었다.
그중 구석진 곳에 앉아서 하진을 기다리던 해영은 가게의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리고 들어오는 이가 하진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나면 얼굴에는 안도감과 동시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때, 다시 한번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게의 문이 열렸다. 해영은 안으로 들어오는 이를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허리를 바로 세웠다.
“대박 배고파. 시켰어?”
“어, 누나가 매일 시키던 대로.”
해영이 의자에 올려져 있던 가방을 치우며 그녀가 앉을 자리를 내주었다. 그에 하진이 씩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고, 해영 또한 입가에 헤실헤실 미소를 걸었다.
마주 보며 뜻 모를 눈짓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선우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하진의 눈치를 보는 해영과는 달리 꽤 여유로운 낯이었다.
“왔어?”
내내 조용하던 선우가 인사를 건넸다. 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응. 술도 시키자.”
들려온 말에 해영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하진은 웬만하면 먼저 술을 마시자는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술보다는 안주를 먹는 것을 더 즐기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술을 시키자고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의 만남도 전적으로 하진이 주도한 것이었다.
해영은 눈을 굴리며 괜스레 물 잔을 비웠다.
“술 먼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아르바이트생에게서 술병을 받은 해영은 그걸 그대로 하진에게 넘겼다. 하진은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술병을 건네받았다.
“그래서… 둘이 만난 지 1년이나 됐다고.”
소주병의 뚜껑을 까는 동시에 튀어나온 말이 해영에게 날아들었다.
다행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던 해영은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걱정을 접었다.
게다가 이미 한물간 발라드가 가게 안을 울리며 대화의 차단막이 되어 주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는 건 알아도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당최 알 수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해영은 하진의 눈치를 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입가 옆으로 쏙 파이는 보조개를 보며 하진이 미간을 모았다.
“웃어?”
해영이 꾹 입술을 물었다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말하려고 했어.”
“늦게 말할 수 있어. 그럴 수 있지. 근데 차선우보다 네가 먼저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 자식아.”
전혀 ‘그럴 수 없는’ 목소리로 하진이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서운하다 서운해.”
“…….”
“전에는 여자 친구 사귀면 나한테 가장 먼저 말해 줬었는데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아니… 누나, 왜 지나간 일을 꺼내고 그래.”
그녀를 주시하던 해영의 시선이 빠르게 선우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그가 왜 그러냐는 듯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동시에 옆에서 하진의 조그마한 혼잣말이 들려왔다. 미친….
연애하는 상대가 선우라고 말하는 것에는 제법 용기가 필요했다. 선뜻 하진에게 먼저 말하지 못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처음에는 하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지 못해서 쉬이 말하지 못했다. 이후에는 번번이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공교롭게 하진이 취업을 위해 공부하겠다며 바쁘게 살기 시작한 때와도 타이밍이 겹쳤던 것이다.
그때부터는 그녀가 자신들의 연애 사실보다 늦게 말했다는 사실에 더 서운해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다 보니 순식간에 1년이 지나갔다. 며칠 전 차선우가 뜬금없이 물어 오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하진에게 고백하는 순간은 더욱 늦어졌을 것이다.
‘해영아, 하진이한테는 말 안 할 거야?’
‘해야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나한테는….’
‘내가 말해도 괜찮아?’
그 말에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 문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하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협박에 가까운 만나자는 연락이.
“윤해영, 너… 소민이, 요즘 인스타에서 완전 유명한 거 알아?”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던 순간을 떠올리던 해영은 하진이 툭 뱉은 말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잊고 산 지 오래인 이름의 등장이었다. 순간 누구인지조차 기억이 안 나 멈칫했던 해영이 당황한 얼굴로 하진을 주시했다.
“소민이?”
옆에서 중얼거림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해영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손끝이 안으로 굽었다.
그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옆에 앉은 선우의 손을 꽉 잡았다. 자신의 손을 단단하게 잡아 오는 해영의 손길에 선우의 눈매에는 한층 더 흥미가 어렸다. 그걸 알 리 없는 해영으로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하진을 주시할 뿐이었다.
“기억 안 나? 그 있잖아, 전에…….”
“누나!”
그가 다급하게 하진의 말을 끊었다.
고개를 기울여 선우가 보이지 않을 만한 각도에서 하진을 마주한 해영이 한 번만 봐 달라는 듯 검지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하진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입이 다물렸다. 슬슬 넘어가 주려는 눈치에 해영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누나 또 뭐 먹고 싶어? 더 시켜.”
“그래….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하자.”
넵. 해영은 짧은 대답과 함께 상황을 일단락시켰다. 하진이 빠르게 몸을 돌려 가게의 사장님이 있는 쪽을 향해 추가 메뉴를 외쳤다.
굳이 꺼내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였다. 과거를 덮어 두는 데에 성공한 해영이 하진이 따라 준 소주잔을 잡았다. 술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는데도 소주잔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보니 목이 탔다. 잔을 집어 든 해영이 그대로 입가에 가져갈 때였다.
내내 나긋한 태도로 있던 선우가 덤덤하게 탄성을 흘렸다.
“아, 전 여자 친구?”
해영이 들고 있던 소주잔의 술이 철렁이며 손을 적셨다.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자, 조용히 손을 뻗는 선우가 보였다.
차선우는 자연스럽게 해영이 들고 있던 소주잔을 가져갔다. 그는 해영의 잔에 담긴 술을 비어 있던 자신의 잔에 따랐다. 술이 꽉 차 넘칠 듯 넘실대던 술잔은 곧 빈 잔이 되어 해영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 물 흐르듯 이어지는 동작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던 나머지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사이 나온 음식을 입에 욱여넣던 하진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그녀는 술 한 잔을 단번에 비워 입가심한 뒤 선우를 향해 툭, 던지듯 물었다.
“궁금해?”
“글쎄.”
차선우는 궁금하지 않다는 얼굴로 턱을 괼 뿐이었다. 비스듬히 향한 시선 끝에는 퍽 곤란한 낯을 한 해영이 있었다.
이런 얼굴을 하는 걸 보면, 캐묻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자신 때문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가도, 끝내는 그런 식으로 굴고 싶지 않아졌다. 어차피 지금 저 머릿속은 자신만으로 꽉 차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해영을 눈에 담던 선우는 이내 그를 달래듯 웃어 보였다. 사실, 그가 전에 만났던 사람 같은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 사람을 만나던 당시의 윤해영이라면 궁금할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일인데….”
차선우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해영의 손끝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가, 이내 손 틈 사이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손가락은 마침내 빈틈없이 얽혀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나 만나고 있잖아. 앞으로도 나일 거고. 그렇지?”
선우의 물음은 사근사근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부정할 여지를 차단하는 것 같았다. 해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 대답에 웃음은 한층 진해졌고, 하진은 심기가 불편하단 얼굴로 젓가락질을 했다. 딱, 딱, 그릇과 젓가락이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에 해영이 그녀를 살폈다.
“요즘 학교는 어때? 너 이번 학기까지만 하고 휴학한다고 했나?”
해영과 눈이 마주친 하진이 우물거리던 걸 삼키고 물었다. 갑작스레 또 테이블 위로 오른 주제에 해영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화제 돌리면 안 돼?”
이번 학기가 끝나자마자 거의 바로 입대하게 된 참이었다. 웃음을 삼킨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화제를 바꿨다.
“시험은 잘 봤어?”
“그럭저럭. 이번에는 전공만 들어서 죽을 뻔했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수강 신청을 했는데 개소리였다. 시험 기간 내내 돌아갈 수만 있다면 수강 신청을 하던 때로, 아니 하다못해 수강 정정을 할 수 있던 때로 돌아가서 어떻게든 시간표를 돌이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빴던 탓에 거의 학교에서 사는 동안, 선우는 그런 자신을 보러 꼬박꼬박 학교까지 찾아와 주었다.
데이트는 보통 그런 식이었다. 그가 학교로 자신을 보러 오거나, 과외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 잠시 시간을 내서 만나거나. 인턴 실습 중인 선우 또한 정신없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자주 만나는 건 역시 무리가 아닌가 싶어졌다.
해영이 선우를 향해 툭 물었다.
“형도 요즘 인턴 때문에 힘들지.”
“나는 괜찮아.”
그의 물음에 선우는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극적인 반응은 도리어 하진에게서 튀어나왔다.
“쟤가 뭐가 힘들어?”
황당하단 하진의 물음에 해영이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선우는 웃는 낯으로 말없이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차선우는 앞에 놓인 요리만 이따금 입으로 가져갔다. 지나치게 적은 양에, 아닌 척 선우를 지켜보던 해영은 그가 잘 먹을 법한 것들을 골라 그의 앞에 조금씩 덜어다 놓았다. 앞에 가져다주는 건 또 곧잘 입에 넣어서, 해영은 머지않아 선우의 앞에 음식을 가져다 두는 데 재미가 들렸다.
“이건 또 뭔….”
그런 둘을 보는 하진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같이 마셔.”
해영이 술잔을 드는 것을 본 그녀가 따라 술잔을 들었다. 짠, 유리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반쯤 차 있던 술을 목 뒤로 탈탈 털어 넘긴 그녀가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 두며 물었다.
“너는 안 마셔도 돼?”
누구를 향한 물음인지는 뻔했다. 잔을 깨끗이 비운 해영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우의 앞에 놓인 술잔은 그가 제 잔을 가져가 술을 옮겨 놓았던 처음과 달라진 게 없었다.
차선우는 술잔 대신 물 잔을 손에 쥐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해영이 데려다줘야 해서.”
“…하.”
그래라, 그래. 하진은 마음대로 하시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황당하다는 듯 말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슬쩍 실없는 웃음까지 뱉는 것을 보면 이 상황이 제법 웃긴 모양이었다.
하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아닌 척 긴장하고 있던 해영이 안도한 것도 그때였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어. 차선우가 다른 사람한테 관심 갖는 걸 본 적이 없었거든? 근데 갑자기 널 소개해 달라고 하고.”
그녀의 말에 해영은 처음 선우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학교 근처의 양식집이었다. 하진만 있을 줄 알고 나갔던 곳에서 그를 대면하게 됐다.
‘안녕, 해영아.’
그렇게 인사하며 웃는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원체 쉽게 잊기 어려운 인상이긴 하지만.
“보자마자 너한테 귀엽다고 하지 않았어? 얘가 사람한테 그런 말 하는 것도 처음 봤잖아.”
그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 해영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태연한 얼굴로 웃고 있는 선우를 발견했다. 고개를 기울인 그가 시끄러운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꺼냈다.
“응,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
“시발…. 됐다.”
“누나, 짠 해. 짠.”
일부러 간지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깍지를 끼느라 맞닿은 손바닥이 괜스레 간질간질했다. 해영은 애써 웃음을 삼키며 소주잔을 들었다.
그렇게 술을 주고받다 보니 딱 한 병만 시켰던 술병은 곧 동이 났다. 어차피 식사도 곧 끝날 무렵이었다. 하진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일어섰다.
“조금 더 얘기하고 나올래?”
“어?”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해영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차선우는 속삭였던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조용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선우가 곧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한 뒤 그대로 가게를 나섰다.
곧 돌아온 하진은 해영만 앉아 있는 테이블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차선우는?”
“형은 먼저 나갔어.”
“그럼 우리도 일어날까?”
하진은 해영의 가방을 챙기며 그에게 건네주었다. 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어차피 다 먹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잡을 구실이 없었다. 대화 좀 하자며 붙들기에는 그렇게 대단한 화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타이밍을 놓쳤다느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느니…. 그래서 망설였다는 것은 전부 어설픈 변명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영은 그저 자신도 모르게 겁이 났다.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연애 상대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다른 이들이 어떻게 볼지 짐작할 수 없어서, 아니 사실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서 더 주저하게 됐다.
그러나 해영에게 중요한 건 생판 모르는 남들의 시선 같은 게 아니었다.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하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다. 그녀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별수 없이 상처받을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이 그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앞서 걷는 하진을 붙잡았다.
“누나, 잠시만.”
뒤를 돌아본 하진이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해영은 그런 하진의 옆에 다가와 서며 망설이듯 입술을 물었다. 그것도 잠시, 곧 입술 틈으로 피식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때부터 봐 왔던 하진은 그게 어떻게든 웃음으로 무마해 보려고 할 때 곧잘 나오는 표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뭐지? 웃는 게 의심스러운데.”
하진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를 주시했다. 윤해영은 가게의 문가와 하진을 번갈아 보다가, 슬쩍 그녀에게로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늦게 말해서 미안.”
“야… 됐어. 잠시 서운한 척해 본 거야. 말해 줘서 고마워.”
잠시 멈칫했던 그녀가 실소와 함께 얼굴을 풀었다.
“으이구, 우리 윤해영이.”
하진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해영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렇게 된 거 오래오래 예쁘게 만나.”
“어, 그러려고.”
해영이 장난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술기운이 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인지 모르겠으나, 뒤통수를 쓰다듬는 하진의 손길에 힘이 실려 있었다. 고개를 숙인 해영은 낮게 웃으며 하진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 앞에 선 그는 하진보다 한발 먼저 카드를 내밀었다. 옆에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진에게는 매일 얻어먹기만 했다. 고등학생일 때는 어떻게 고등학생한테 돈을 내라고 하겠냐고 얻어먹고, 대학생이 돼서는 대학생이 돈이 어디 있냐며 얻어먹었다. 번번이 얻어먹기만 했던 걸 해영은 잊지 않고 있었다. 며칠 전 과외비도 받은 김에, 이번에는 꼭 자신이 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저쪽 테이블이면 이미 계산하셨는데요.”
곧이어 그런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굴리던 해영의 시선이 휙 문가를 향했다. 옆에 서 있던 하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킥킥거리며 해영의 등을 두드렸다. 그녀가 얼떨떨한 얼굴을 한 해영을 문가로 이끌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볍게 들어 봐? 내가 볼 때는 차선우 좀 집착적인 면이 있어.”
“…그런가?”
해영은 문 앞에 멈춰 선 채 고개를 기울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한 모습에 하진은 당연하다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차선우와 집착이라니. 그녀가 내뱉은 말을 곱씹어 보던 해영이 목뒤를 쓸어내렸다.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다 싶었던 것이다. 그는 제가 뭘 하든 말리거나 싫어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하고 싶은 건 다 했으면 좋겠다며 응원을 해 주면 해 줬지.
입학한 후로 학과 사람들과 가지는 자리는 한 번도 나간 적도 없다던 형이 자신을 따라 회식 장소에 갔을 때, 다른 이들이 얼마나 놀랐던가. 그는 도리어 본인이 싫어하는 일이라도 자신이 하겠다고 하면 기꺼이 같이 나서 줬다.
집착이라니…. 자신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걸 그렇게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귀엽잖아.”
“아….”
해영이 피식피식 웃으며 뱉은 말에 하진이 탄식을 흘렸다.
“얘도 골 때리네….”
“귀엽지 않아?”
“몰라, 인마. 둘이 잘 만났네.”
하진은 모르겠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키득거린 해영이 밖으로 나서는 문을 열었다. 가게의 바로 앞에 놓인 차에 기대어 있던 선우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세웠다.
“하진아, 데려다줄게.”
그는 선뜻 하진에게 태워다 주겠다며 제안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그녀는 곧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술 좀 깰 겸, 운동할 겸 걸어가면 되니까… 얘나 데려다줘.”
“혼자 갈 수 있겠어?”
저녁을 먹고 나온 사이 하늘은 제법 어둑해져 있었다. 집까지 얼마 안 걸린다고 해도 혼자 보내는 것이 괜스레 신경 쓰였다. 그러나 해영의 물음에 하진은 별걱정을 다 한다는 얼굴로 몸을 돌릴 뿐이었다.
그녀가 손을 휘적거리며 가는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해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선우가 보였다. 타라는 듯 문을 열어 주는 모습에 그는 망설임을 내려 둔 채 차에 올랐다.
“시험은 이제 끝난 거지?”
“응, 내일 과제 하나만 더 내면 완전 끝.”
시동을 걸면서 건네 온 물음에 해영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시험 기간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분주했던 게 보였던 모양이다. 힘든 걸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단 것까지 알아차린 듯했다. 차선우는 말하지 않아도 그런 걸 눈치채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가 알게 모르게 자신을 챙겨 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해영이 말없이 헤실거리는 모습을 본 선우도 입꼬리를 올린 채 앞을 보고 운전을 시작했다.
회사를 다녀와서인지, 평소보다 격식을 차린 모습은 그와 제법 잘 어울렸다. 채도가 낮은 셔츠는 그렇지 않아도 하얀 피부를 유독 도드라지게 했다. …진짜 공주 같네.
해영이 무심코 넋을 놓은 채 선우의 운전하는 옆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이러면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되는데.”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 선우는 힐끔, 해영을 눈짓하며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사실 조금 질투 나….”
말꼬리를 늘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몸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해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아까는 지난 일이니 상관없다는 듯 굴더니, 아무리 차선우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다급해져서 그를 부르려는 찰나, 선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맞춰 왔다.
“그니까 날 제일 예뻐해 줘, 윤해영.”
또 슬쩍 눈웃음을 친다. 해영은 하려던 말을 순식간에 잊어버린 채 얼빠진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뭐라는 거야.
“이미 눈에 보이는 사람이 형밖에 없어.”
해영이 삐딱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선우의 입가에 감추지 못한 미소가 떠올랐다. 핸들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에서도 기분이 고스란히 묻어나와, 해영이 실소를 흘릴 뻔하다 간신히 삼켰다.
곧 신호등은 다시 파란불로 바뀌었다. 앞으로 고개를 돌린 차선우는 언제 투정 부렸냐는 듯 담백한 어조로 물었다.
“학교 다닐 때는 어땠어? 교복도 입고 다녔어?”
해영은 뜬금없이 들려온 물음에 눈썹을 들었다. 갑자기 바뀐 화제였다. 멈칫한 것도 잠시, 선우가 어떤 생각으로 물었는지 곧 짐작이 갔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 만났던 사람이 언급되니, 학생일 적의 자신이 궁금해진 거겠지.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났다고 벌써 고등학생일 때가 흐릿했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집이 어려워지고 난 이후로는 이전보다 더 성적을 올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있고….
고등학생 때를 떠올려 보던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집이 망한 뒤 죽어라 공부했던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어쩐지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다른 생각 하자, 다른 생각.’
그러고 보니까 형은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미국에서 살았다고 했지.
미국에서 보냈으면 교복은 안 입었으려나? 차선우가 교복 입은 모습… 아, 이건 좀 궁금한데.
멀거니 선우를 눈에 담으며 그의 교복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해영은 넌지시 눈짓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할 일도 아닌데 괜스레 들킨 것만 같은 기분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 평범했어. 한국대 오려고 공부 열심히 했지. 교복도… 입었고.”
교복을 제대로 입고 다닌 날이 손에 꼽긴 하지만, 아무튼 입고 다니긴 했다. 다급하게 꺼낸 해영의 대답에 선우의 입에서 진심 어린 한숨이 터져 나왔다.
“더 일찍 만났어야 했는데.”
뭐가 그리 아쉬운지, 설핏 입술까지 무는 모양새에 해영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태어나자마자 만났어야 했네.”
그는 선우를 보며 장난스레 맞장구를 쳤다. 농담 섞인 말에 차선우는 그런 생각까진 못 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들어찼다.
“그럼 어렸을 때 모습도 보고.”
큰 의미 없이 꺼낸 대답을 차선우는 가볍게 넘기지 않은 듯했다.
톡톡. 손가락이 핸들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박혀 들었다. 저 조그만 머리통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해영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생각에 잠긴 선우를 눈에 담았다.
생각을 마친 건지, 그는 가볍게 핸들을 돌리며 툭 말을 뱉었다.
“해영이가 내 동생이었어도 좋았겠다.”
“형 동생?”
잠시 눈을 깜박이던 해영이 픽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 지켜봤더니, 그사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모양이다. 아주 별말을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연애는 어떻게 해. 그냥 지금이라도 만난 거에 만족하세요, 선우 형.”
해영은 제법 칼같이 선우의 상상을 잘라 냈다. 차선우는 여지를 두지 않는 그 대답에 말을 얹는 대신, 그저 숨죽여 웃을 뿐이었다.
***
곧바로 갈 수 있음에도 굳이 빙 돌아 한강 근처까지 갔던 차는 이내 느릿느릿하게 학교로 돌아왔다. 기숙사가 보이는 언덕 아래에 차를 세운 선우는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해영을 눈에 담다가, 조심스럽게 깨웠다.
“해영아.”
나직한 부름에도 해영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졸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 안타깝다는 듯 선우가 손을 뻗었다. 이마를 간지럽히듯 쓸어내리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해영이 이내 헤실거리며 벨트를 풀었다.
탁. 차 문을 닫고 내린 그는 자신을 따라서 차에서 내린 선우를 바라보았다. 해영은 곧바로 언덕을 오르는 대신, 차 앞으로 돌아가 선우를 마주 보고 다가섰다.
기숙사가 코앞인데 이상할 정도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차선우는 제 앞으로 다가온 해영의 손을 슬쩍 건드렸다.
“헤어지기 싫다. 보내 주기 아쉬워….”
사근사근 떨어지는 목소리가 갈수록 아쉬움을 담고 늘어졌다.
그는 동시에 장난치듯 손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했다. 간지럽게 느껴지는 손장난을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문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친 시선이 여지없이 다정했다.
“아쉬운 사람치곤 웃고 있는데.”
해영이 손을 들어 그의 입가를 가리켰다. 시무룩하게 흐려지던 말꼬리와는 달리 입꼬리는 부드럽게 휜 채였다.
“네 앞이라서 그런가? 너만 보면 웃음이 나와.”
“…….”
이 형이 진짜.
순식간에 졸음이 확 가셨다. 방금까지 눈꺼풀이 무겁던 게 거짓이었다는 양 가벼워졌다. 해영은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를 걸친 채, 저를 꼬시는 차선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읽히는 시선 속에서 선우는 한층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하나 봐, 해영아.”
…얼씨구. 해영이 웃는 낯 그대로 눈가를 찡그렸다.
이 형이 아까부터 자꾸 실없는 소리 꺼내고 있었다. 술은 제가 다 마셨는데 난데없이 결혼 얘기라니.
헤어지는 것조차 아쉽다는 표현인 걸 알지만, 앞으로도 함께할 미래를 당연하다는 듯 들먹이는 모습에 덜컥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저렇게 말하는 차선우의 표정이 그저 장난 같지만은 않았다.
‘해영이가 날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
문득 아까 그가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제게 향하는 뚜렷한 애정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숨김없이 기뻐하기도 했다. 해영은 그 모습에서 쉬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건네는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그를 보고 있자면 가슴께가 뻐근해질 정도로 벅찼던 탓이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또는 그저 술기운 때문인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간에 윤해영은 그 순간 말하고 싶었다. 숨김없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선우 형.”
“응?”
나 또한 같은 마음이라고.
“졸업하면….”
해영이 나지막하게 꺼낸 말에 선우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지런하게 올라가는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멋쩍은 얼굴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해영을 담았다.
“졸업하면, 뭐… 같이 살 수도 있겠지.”
“…….”
“형도 괜찮으면.”
쑥스러운 듯 다른 곳을 보고 있던 해영이 슬쩍 시선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위를 향했다. 그 궤적이 향하는 종착지에 선 차선우는 조금 놀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연애할 때면 누구나 쉽게 미래를 들먹이곤 한다. 함께인 미래를 꿈꾸는 그런 대수롭지 않은 대화들. 그런 면에서는 늘 입이 무겁던 해영이 처음으로 입에 올린 미래였다. 놀라움은 잠깐이었다. 못 참겠다는 듯 팔을 뻗은 선우가 해영을 꽉 끌어안았다.
“키스하고 싶어.”
훅 다가온 숨결에 귓가가 간지러웠다. 중얼거리듯 낮게 내뱉어진 말을 들은 해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밖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참아 봐, 나도 참고 있으니까.”
“알았어….”
차선우는 웃음을 머금은 채 해영에게로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턱 아래 와 닿는 머리칼의 감촉에 해영이 앓는 듯한 침음을 삼켰다. 목덜미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에 비비적거리는 몸짓은 마냥 귀여웠지만, 살갗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는 진득한 구석이 있었다.
아. 이렇게 많이 좋아해서 어쩌지.
꽉 주먹을 쥔 해영이 고개를 기울여 선우의 머리에 가볍게 볼을 댔다.
그저 좋다가도, 지나치게 좋은 나머지 덜컥 발밑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해영은 불안감을 덮어 두고 답을 찾기 위해 또 다른 미래를 떠올리곤 했다. 이를테면, 졸업한 뒤… 차선우와 함께 사는 미래.
취업은 졸업하자마자 할 계획이니 기왕이면 형이 다닐 회사와 가까운 곳이면 좋을 것이다. 같은 곳이면 더 좋겠지만, 형이 이대로 한제에 입사하게 된다면… 따라서 취업하는 건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선우를 마주 안은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지잉,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품 안에서 들려오는 진동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선우였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서 해영을 안고 있던 몸을 떼어 냈다. 그 몸짓에 해영은 뒤늦게 진동이 느껴지는 곳이 자신의 주머니 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한 해영이 멈칫하며 굳었다.
“형… 나 이제 가야겠다. 형도 피곤하지?”
해영이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채 고개를 들었다. 전화를 받지 않은 그를 잠시 내려다보던 선우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먼저 들어가, 해영아.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옅은 웃음기가 스민 목소리는 다정했다. 시선을 맞춘 채 차선우는 정말 괜찮다는 듯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그런 선우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해영이 손끝으로 그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이 인사 대신이라는 건 두 사람 모두 알았다. 씩 웃은 해영이 몸을 돌려 언덕 위를 올랐다. 그는 몇 걸음을 뗄 때마다 계속해서 뒤를 돌았다. 급기야는 아예 뒤로 돈 채 선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언덕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뒤로 걷는 해영이 혹시 넘어질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던 선우는 곧 그를 따라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다 넘어….”
지겠다…. 하려던 말을 끝맺지 못한 선우가 놀란 얼굴로 한 발짝 걸음을 뗐다. 뒤로 걷다가 잠시 휘청였던 해영이 금세 씩씩한 몸짓으로 괜찮다며 팔을 높이 들어 보였다.
아쉽다는 듯 언덕 위에서 빙빙 돌던 해영이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손을 내린 채 차에 몸을 기댔다.
“……하.”
입가에 고였던 한숨이 끝끝내 터져 나왔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차선우는 때때로 해영의 얼굴 한편에 무척이나 지친다는 듯한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곤 했다. 물론 그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해영은 곧 고개를 짧게 흔들곤 똑바로 앞을 주시하는 것으로 삶에의 싫증을 떨쳐 냈다.
그러나 그런 표정을 볼 때면, 속이 울렁거려 손끝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당장에라도 그를 지긋지긋하게 만드는 것들을 전부 치워 주고 싶었다.
길어지던 고민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해영이 사라진 길을 바라보는 선우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