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7화 (10/13)

러브라인 4권

7

주말을 지내고 맞이한 월요일이었다. 딸랑, 가벼운 종소리와 함께 카페 안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마감 타임 아르바이트생과 교대할 준비를 하던 해영이 도어 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안으로 들어선 이를 확인한 해영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그를 보며, 세희가 생긋 미소 지었다. 차 키를 쥔 손이 인사하듯 가볍게 흔들리면서 잘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누나?”

불쑥 찾아온 예상하지 못한 손님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크게 뜨여져 있던 눈매가 이내 곡선을 그리며 접혔다. 해영은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으로 그녀를 반겼다.

“저 보러 왔어요? 온다고 말도 안 하고.”

“지나가다 들렀는데, 여기 직원이 잘생겼네요. 혹시 모델 해 볼 생각 없어요?”

카운터로 다가온 세희가 계산대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마냥 청순할 것 같은 얼굴 위로 떠오른 능글능글한 미소가 익숙했다. 그녀는 곧 아차, 하더니 모르는 사이인 척 실제로 명함을 꺼내 보이기까지 했다.

“저 이런 사람인데.”

능청스레 소개하는 세희의 모습에 해영이 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키득거리며 명함을 가져가자 세희가 자세를 바로 했다.

“장난이고, 잠깐 얼굴 보러 왔어.”

“저 이제 퇴근이에요. 저녁이라도 먹으러 가요, 누나.”

“나도 그러고 싶은데, 미팅 가는 길에 들른 거라. 재휘 오빠한테 너 만났다는 말 듣고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생글생글 웃던 그녀의 눈가에 아쉬움이 스쳤다.

“그 전시회 내가 갔어야 했는데…. 원래 내가 데이트 가려고 했던 건데…!”

아쉬움을 넘어 억울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해영이 세희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선우와 함께 전시회에 다녀온 주말, 해영은 민호와 재휘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던 나머지 네 사람은 전시를 보고 난 뒤 함께 저녁 식사까지 했다.

‘해영, 너 찾는 사람들 많았어. 나도 그렇고. 어떻게 촬영 끝나자마자 말도 없이 사라져? 다른 사람들은 다 연락처도 교환했는데, 너랑 선우 형님만 없어.’

밥을 먹으면서 민호는 쌓아 왔던 말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그러는 동안 해영은 슬쩍 사과를 건넸고, 실없이 웃었으며, 간간이 민호를 놀리기도 했다. 다른 이들에게 연락처를 대신 알려 주겠다는 말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희로부터 곧장 메시지가 도착한 건 그날 밤이었다.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으며 어디서 일하는지도 말하긴 했는데, 이렇게 곧장 찾아올 줄은 몰랐다.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갈까 봐.”

시간을 확인하던 세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앞으로 또 볼 기회가 있지 않겠냐며 아쉬움을 달랬다. 고개를 끄덕인 해영이 세희가 테이블로 다가가는 것을 보며 몸을 돌렸다.

컵을 꺼내기 직전, 내내 조용하던 유영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오빠, 뭐예요? 세희 언니가 왜 왔어요? 혹시 오빠 세희 언니랑 만나요? 두 사람 최종 커플이에요?”

“…….”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쏟아진 질문에 해영이 입을 벙긋거렸다. 유영이 교대 준비를 하는 대신 괜히 음료 제조대 앞에 서 있던 것도, 아닌 척 힐끔힐끔 세희와 자신을 구경하던 것도 알고 있었다. 세희를 보자마자 이렇게 좋아하는 기색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들뜬 유영을 바라보던 해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밀 유지 조항이 있어서, 말 못 해.”

곧이어 흘러나온 담백한 대답에도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세희 언니 팬이에요. 러브라인에 나온 여자분들 다 좋아하거든요.”

“그래?”

“네. 오빠, 먼저 퇴근 준비해요. 세희 언니 주문 제가 만들게요.”

교대 시간이 코앞이었다. 자기가 음료를 준비해서 세희에게 내가겠다는 말에 해영이 조금 곤란하다는 듯 목뒤를 쓸어내렸다. 괜히 일을 떠넘기는 듯한 기분이 들어 미안했던 것이다. 해영은 끝내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나서야 스태프 룸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유영은 다음 시간대의 알바생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눈짓으로 인사한 해영이 곧장 세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커피를 홀짝이던 그녀가 제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같이 알바하는 친구가, 누나 팬이래요.”

해영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응, 들었어. 다 들리던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세희가 그에게로 몸을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선우 씨가 들으면 세상 무너질 소리도 나오고.”

나직하게 떨어진 말에 해영은 그대로 굳었다. 웃던 낯이 어색하게 멈춘 것을 바라보는 세희의 표정이 짓궂었다.

그녀가 꺼낸 말은 분명 선우와 자신이 다시 만난다는 걸 전제로 두고 있었다. 입을 달싹이던 해영이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리며 뒤늦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전시회 선우 씨랑 같이 갔다며. 그거 듣고 바로 재결합한 거 눈치챘지. 두 사람 은근 티 많이 내는데 지금껏 안 들킨 게 신기하네.”

그녀는 당연하다는 양 대답했다. 작은 목소리기는 했으나, 해영은 머쓱한 마음에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희를 제외하고 카페 안에 남은 손님은 한 명뿐이었는데, 멀찍이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 듣지 못했을 것이다. 가볍게 시선을 뗀 해영이 다시금 세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호는 전혀 눈치 못 채던데요.”

“걔는 애는 착한데 눈치가 좀 많이 없잖아.”

알지? 코끝을 찡긋거리는 세희의 표정에 해영도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의 한결같은 면에는 말이 많다거나, 단체 행동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것 외에도 눈치가 없다는 점이 있었다. 사실상 그게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지난 주말에 함께 밥을 먹던 도중, 불현듯 말을 멈춘 민호가 미간을 모은 채 해영과 선우를 바라봤다. 한참을 주시하던 그는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근데 둘이….’

답지 않게 가라앉은 얼굴에 해영은 덩달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들켰나 싶어 긴장한 채 이어질 말을 기다리던 때였다. 민호는 이어지던 긴장감을 싹둑 자르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완전 친하네? 치사하게, 앞으로는 둘이 만날 때 나도 불러 줘.’

‘…어, 알았어.’

그는 못내 서운하다는 듯 툴툴거렸다. 잠시 말을 잃었던 해영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민호가 눈치가 전혀 없다는 게 처음으로 장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데이트를 하려던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그것마저 그런대로 유쾌했다. 해영이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들어가는 것 같았던 주말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던 때,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세희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해영아.”

“네.”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다행이야.”

가벼운 웃음과 함께 꺼내졌으나, 말이 담고 있는 무게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선뜻 건네진 호의에 기시감을 느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멈칫했던 해영은 곧 그것이 제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촬영 마지막 날이었던가. 고마운 마음을 눌러 담아 그녀에게 전했던 말이 추웠던 계절을 지나 해영에게 돌아왔다. 쉬이 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를 향해 세희가 생글 웃어 보였다.

“너 좋은 사람이야, 해영아. 보고 있으면 싫어할 수가 없다니까?”

이어진 말에 해영은 결국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눈썹을 늘어트린 채 찡그리듯 웃은 그가 한숨을 흘렸다. 그때 왜 세희가 제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속에서부터 따끈하게 올라오는 무언가가 자꾸만 목을 막았다.

“선우 씨도, 뭐,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묘하게 확신이 서린 음성이 짧은 정적을 깼다. 해영은 눈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린 채 장난스레 되물었다.

“그건 어떻게 알아요?”

“보통 얼굴이 그렇게 잘생기면 성격 꼬일 일이 별로 없어.”

근거 없는 일반화였다. 해영이 눈을 깜박이는 사이 세희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사실 선우 씨 외모면 어지간한 일은 용서하게 돼.”

“…….”

그렇지 않냐는 시선이 해영에게 날아들었다. 어느 정도 확신하는 듯한 눈빛에 해영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확실히 차선우는 본인의 외모를 제법 잘 이용해 먹는 편이었다. 지금껏 만나 온 동안 그와 싸울 일이 별로 없었던 건 그런 이유가 클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약했다. 문득 실감한 해영이 대답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알 만하다는 듯 코웃음을 친 세희가 시계를 확인하곤 몸을 일으켰다.

“아, 나 이제 진짜 일어나야겠다. 선우 씨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다음에 한번 같이 만나자.”

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같이 일어섰다. 카페를 나서서 세희가 차를 타는 것까지 배웅하고 나서야, 그 또한 몸을 돌릴 수 있었다.

일하는 곳에서 자취방은 멀지 않았다. 곧 방을 빼고 기숙사로 들어갈 테니, 이동하는 시간은 더더욱 단축될 것이다. 익숙한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던 해영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에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곧 기숙사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얼어붙던 선우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냥 같이 살면 안 되냐고 살살 꼬셔 오던 얼굴도. 주말 내내 틈만 나면 같이 살자고 회유해 오는 탓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걸음을 서두르다 보니 금방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마지막 골목을 돌던 해영이 멀지 않은 곳에 선 인영을 발견했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순간 심장이 철렁였다.

“…….”

해영은 곧 굳어 있던 발을 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집으로 들어가려면 가로등 앞을 지나야 했으니까.

가까이 갈수록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서서히 깎여 나갔다.

가로등 아래 선 남자가 입에서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든 순간, 주황빛으로 물든 얼굴을 발견한 순간. 하. 해영의 입에서 작은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것이 토해졌다.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담배가 툭 아래로 추락했다. 떨어진 발치에는 이미 거의 다 탄 꽁초가 몇 개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광경에 불현듯 속이 갑갑해졌다.

멈칫하고 있는 사이 손에 들린 핸드폰이 울렸다.

선우형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발견한 해영이 설핏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필이면 이 순간 전화가 걸려 올 건 뭔지, 타이밍 좋게 온 연락에 긴장이 풀렸다. 그는 당장 받을 수 없는 전화를 잠시 내려다보다 주머니 속으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어쩐지 요즘 모든 게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 꼭 그런 순간 예고도 없이 불청객이 들이닥친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빠.”

가로등 아래로 한 발짝 다가서며, 해영은 한숨처럼 그를 불렀다. 나직한 부름을 들은 상대가 해영을 발견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어색하게 그려졌다. 어정쩡한 웃음마저 걸렸으나, 해영은 따라 웃어 보이는 대신 그의 행색을 느릿하게 살폈다. 주황빛 가로등 아래 비치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닌가… 조금 수척해지셨나. 어쩐지 피곤해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발아래 담배꽁초가 몇 개나 나뒹구는 것을 보면 저를 기다린 시간이 짧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별수 없이 고개를 드는 죄책감을 뒤로한 채, 해영은 그의 앞에 섰다.

“어쩐 일이세요?”

덤덤하게 내뱉어진 물음은 지나치게 담백해서, 해영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어디 사는지 어떻게 알았냐는 무의미한 질문은 건네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류 몇 장만 떼면 쉬이 알 수 있었을 테니까.

언젠가 해영은 아버지가 물어봐 주길 바랐었다.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힘들지는 않은지. 여태 한 번도 물어 준 적 없던 그는 이번에도 묻지 않은 채 집 앞을 찾아왔다.

“전화를 통 안 받길래….”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연 아버지는 곧 심기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날 좋게 헤어지지 못한 탓에, 두 사람을 감도는 분위기는 서먹한 데가 있었다.

아…. 해영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번호를 수신 차단해 놨던 기억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홧김에 저질러 놓고는 여태 잊고 있었다.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어, 해영은 어색하게 입가를 쓸어내렸다.

“할 말도 있고 해서 왔는데. 많이 바쁘냐?”

“할 말이요?”

해영의 입가를 가리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잠시 미묘한 낯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던 그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이 비스듬히 자취방이 있는 빌라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들어가서 얘기해요. 아직 쌀쌀한데.”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면 하려던 말이 있었다. 해야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해영은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길 바랐다. 물론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 주지 않았다.

늘 그렇듯 불행이 입을 벌린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건 예정된 일이었으므로 해영은 말없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을 연 해영이 뒤에 선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먼저 들어가세요. 담담한 목소리에 어정쩡하게 기다리던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신발 두 켤레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찰 만큼 비좁은 현관에 섰다. 해영은 그가 안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리다, 몸을 숙여 아무렇게나 벗겨진 구두를 다시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저 또한 신발을 벗은 해영이 곧바로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좁긴 한데, 앉아 계세요.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던 해영이 물이면 된다는 말을 듣고 몸을 바로 세웠다. 싱크대 앞으로 다가간 그가 곧 컵 하나를 꺼내 들고 돌아왔다. 해영은 컵에 물을 따라 건네고 나서야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버지는 볼 것도 없이 비좁은 원룸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잊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으로 발을 디딘 아들의 자취방이 정말 궁금해서인지는 모르겠다. 방을 둘러보던 그와 시선이 마주친 해영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입가에 걸린 씁쓸한 미소에 아버지는 눈을 피하듯 제 앞의 물컵을 들었다. 기다리는 사이 갈증이 심했던 모양인지, 그는 쉬지도 않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컵에 든 물은 금세 비워졌다.

“왜 찾아오셨어요?”

컵이 비워지기를 기다리던 해영이 툭 물음을 던졌다. 곧바로 꺼내진 용건에 주춤하던 그는 곧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당연히 걱정되니까 왔지. 아들이 뭐 하고 사는지도 모르는데 전화도 안 받고.”

“…….”

“또, 얼굴 보고 할 말도 있고.”

해영은 대답 대신 시선을 맞췄다.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결 침착하고, 한층 거리를 두는 시선에 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머지않아 표정을 갈무리하기는 했으나 눈가에 진 주름은 여전했다.

그가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상체를 기울였다. 해영은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던 제 손을 감싸듯 쥐어 오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전에 말했던 거 있지 않냐. 아빠가 하는 사업, 그거 요즘….”

…하. 끝내 입에서 다시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들이 걱정스러워 찾아왔다던 아버지는 본인이 하는 사업이 뭔지, 요즘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업 얘기에 툭툭 선우의 이름이 섞여 나올 때마다 해영은 주먹에 꽉 힘을 주었다.

“아빠.”

아버지의 사업 설명이 막 해외 진출에 대한 건으로 확장되던 순간이었다. 해영은 그의 손 아래서 제 손을 빼내며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결국 또 한제에게 손 벌릴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오신 거죠.”

짧은 요약에 아버지가 입을 다물었다. 손으로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린 해영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는 책장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손에 든 채 되돌아왔다.

해영의 손에 들린 것은 로펌의 로고가 찍힌 서류 봉투였다. 윤해영은 그 안에 든 것을 꺼내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접근금지가처분신청’

최상단에 적힌 굵은 글씨 위로 아버지의 시선이 꽂혔다. 신청인 윤해영, 피신청인 윤건웅. 그 아래 적힌 신청 취지까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 위로 한참을 머무르던 눈이 다시 위로 들렸다. 해영은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눈빛에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해하는 기색을 발견했다. 이게 뭐냐는 무언의 물음에 남은 것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이었다. 해영이 자신을 실제로 내칠 리 없다는 확신.

자꾸만 목이 잠겨 와, 괜스레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두어 번 일렁인 후였다. 의혹과 확신이 뒤섞인 눈빛을 받으며 해영은 묵묵히 입을 열었다.

“이건 사본이고, 곧 서류 접수할 예정이에요.”

“…….”

“접근 금지 신청할 거예요. 앞으로 저한테 찾아오지도, 연락도 하지 마세요. 저뿐만 아니라 선우 형한테도요.”

“뭐?”

되묻는 목소리에 묻은 것은 분노였다. 점점 일그러지다 못해 붉어지는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워 해영은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윤해영!”

결국 내질러진 윽박에 해영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화를 내실 거라고는 예상했으나, 별수 없이 긴장된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화난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건 아니다. 어릴 때 사고를 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고, 그 순간 늘 좋게만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혼난 적도 더러 있었지만, 훈육을 넘어 이렇게 노기에 가득 찬 음성이 떨어진 적은 처음이었다. 보지 않아도 노려보고 있을 시선이 따끔했다.

“아빠한테 그게 할 소리냐? 서류 한 장 던져 놓고, 뭐?”

“…아빠라서, 참은 거예요.”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는 언뜻 냉정하게도 들렸다. 해영이 아래를 내려다보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영은 어지간하면 갈등이 생기지 않는 걸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호구 잡히는 성격은 또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에게 이제껏 매몰차게 굴지 못했던 것은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해영 또한 아버지가 연락해 오는 목적이 돈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선에서 전부 해 드리고 싶었다.

가족이니까.

모자람 없이 자란 해영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늘 가족이었다. 집이 어려워졌으니 고생하는 건 어쩔 수 없었고, 어려서 받은 걸 성인이 되어 갚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건 줄 알았다.

“근데 이제 그만하려고요.”

“…….”

“저, 아빠 때문에 숨이 막혀요.”

자꾸 기대하는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해영은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표정 속에서도, 아버지를 주시하는 눈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정면으로 마주한 시선. 숨 막히는 침묵 가운데 해영은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었다. 제가 아무리 부탁해도 그는 사업을 그만두지 않을 테고, 필요하다면 전처럼 자신을 내세워 선우에게 접근할 것이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때였다.

뻑,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곧바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이명이 해영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날려 버렸다.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맞았다는 인식만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해영의 고개가 낮은 궤적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을 향한 시야가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희뿌옜다. 충격으로 굳어 있던 해영이 뒤늦게 손을 들어 맞은 뺨을 감쌌다.

날카롭게 머릿속을 메우는 이명이 잦아들어 갈 때쯤,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날아든 물체가 흐린 시야를 가로질렀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동시에 허공에 튀어 오른 파편이 발치 이곳저곳에 흩어졌다. 해영이 서 있는 자리 앞으로 날아든 물건은 컵이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내준 물컵이 싱크대 아래의 서랍장과 부딪히며 산산조각 났다.

“이 자식이, 아버지한테!”

거친 숨이 섞여 든 고함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파편보다 날카로웠다. 부모님끼리 다툴지언정 제게는 가해진 적 없던 폭력 앞에서 해영은 올바른 대처법을 찾을 수 없었다.

“연을 끊겠다고? 지 어미한테 배운 게 그거밖에 없어!”

그는 그저 얼어붙은 채, 집 안을 돌아다니는 거친 발소리와 무언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사위가 아득해졌다. 쾅!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닫히고 나서야 해영은 움찔 정신을 차렸다.

“아….”

쥐 죽은 듯 고요해진 공간 속 해영의 나직한 탄식만이 짧게 맴돌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시야에 들어온 광경이 퍽 처참했던 것이다. 흡사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같았다.

그도, 자신도.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잠시 멀거니 서 있던 그가 뒤늦게 헛숨을 들이켰다. 맞은 뺨이 화끈했다. 손등으로 볼을 쓸어내리던 해영이 쓰라린 감각에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서 있다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걸음을 뗐다.

윤해영은 너저분한 꼴을 뒤로한 채 다급하게 집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집 앞의 버스 정류장이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싣고, 지나치는 익숙한 풍경을 흘려보내다 적당한 목적지를 정해 내렸다. 수도 없이 왔던 동네는 아무렇게나 걸음을 옮겨도 길을 잃을 걱정은 들지 않았다.

해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오직 하나였다.

차선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그의 집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정신을 차린 해영이 익숙한 길 위에서 우뚝 멈춰 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선우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으나, 언제 이렇게나 걸어왔나 싶어 황당한 눈을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지이잉, 주머니에 넣어 놨던 핸드폰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주머니 속이 울리는데도 그게 전화임을 알아차리는 게 한 박자 늦었다.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든 해영은 화면에 떠오른 수신인을 발견하곤 웃음을 터트렸다.

선우였다.

어떻게 그는 제가 비참해하는 순간마다 손을 뻗어 오는 걸까. 기다렸다는 듯 걸려 온 전화가 반갑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해영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형?”

- 해영아.

여느 때처럼 다정한 부름이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피식 입꼬리를 올리던 해영이 돌연 미간을 모았다. 왜인지 불규칙한 호흡이 섞여 들어 묘하게 거칠어진 음성이 귀에 걸렸다.

기분에 따라 가라앉은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끌어 올린 탓이다. 다정함을 가장하곤 있었으나, 그 얇은 껍질 하나를 벗기면 곧장 불안이 뭉친 속살이 드러날 것 같았다. 대체 그가 왜 이렇게 초조해하는 건가 의아해하던 찰나였다.

- 어디야? 집으로… 찾아왔더니, 네가 없어서….

“어, 나 지금 잠깐 나왔는데.”

- 어디?

조심스럽게 말을 흐리던 선우가 재차 물어 왔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해영이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보채?

이제 그는 초조함을 숨기지도 못하는 목소리로 저를 닦달하고 있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지나치게 강박적인 구석에 오히려 의심이 들었다.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듯했다. 저와 관련된 일이겠지. 이를테면… 제가 오늘 아버지를 만난 것을 알고 있다든가. 퍼즐처럼 맞춰진 합리적 의심에 해영은 웃지도 못한 채 헛숨을 내쉬었다.

“형, 혹시 나 감시해?”

- …아니.

짧은 주저함 뒤에 흘러나온 대답은 단호했다. 저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해영은 곧장 두 번째 가정을 꺼냈다.

“그럼 우리 아빠 쪽인가.”

- …….

답은 전처럼 곧바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침묵에서 긍정을 읽어 낸 해영이 끝내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제가 알아서 해결한다고 했는데도, 차선우는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전전긍긍하는 사람처럼 자신을 지켜본 모양이다.

입매를 쓸어내린 해영이 괜스레 발로 바닥을 툭툭 찼다.

“언제부터?”

- …해영아.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고 궁금해서. 오래된 거 같은데, 프로그램 촬영하고 있을 때도 그랬어?”

아마 인턴 실습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였을 것이다. 선우가 자신을 데리러 왔던 날. 해영은 그가 누군가와 전화하다 말고 저를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끊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물음을 삼켜야만 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해영이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 가는 동안 선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슬슬 숨은 쉬고 있는 건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형 전화할 때 한 번 되게 의심스러웠던 적 있어.”

모를 줄 알았냐며 되묻는 목소리에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 억지로 따라 웃듯, 힘없는 웃음소리가 되돌아왔다. 그 작은 웃음에서조차 긴장한 기색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그를 긴장시킨 것은 학습된 불안일 것이다. 거절당했던 경험, 선택받지 못한 경험이 이 순간 선우에게서 확신을 빼앗아 갔다.

‘알게 돼도 네가 날 선택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이전에 들었던 말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모든 걸 알게 되어도 저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하던 자신감은 선우에게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윤해영은 그게 누구의 탓인지 알았다.

자신 때문이다. 그의 앞에서 더는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선우를 밀어 냈던 자신 때문에.

해영은 타인과 자신의 슬픔을 공유하는 일에 소질이 없었다. 원체 혼자 감정을 삭이는 편이기도 했고, 구태여 안 좋은 감정을 좋아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픔은 정말 나누면 반이 되는 걸까? 그럼 상대는 내 슬픔의 절반을 떠안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슬픈 사람이 둘이 되는 것뿐이지 않을까. 늘 알고 싶었다. 구태여 자신의 서러움을 타인과 나누는 까닭이 뭘지 해영은 내내 궁금했다.

이제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슬픔이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되는 순간, 서로가 짊어지고 있는 필연적인 외로움도 덜어지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외로움. 그건 서로가 서로의 슬픔을 나누어 가지는 순간 무게를 달리하게 된다.

“형.”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던 해영이 천천히 입을 뗐다. 가족이 치부가 된다는 사실이 아팠다.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은 해야 할 일이었다. 선우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나 오늘 아빠 만났어. 집에 찾아오셨더라고.”

- …….

“몇 년 동안 나 어디 사는지 관심도 없으셨는데.”

그는 이전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자조적인 고백을 덤덤히 꺼냈다. 내내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로 무겁게 내려앉는 숨소리가 들렸다.

저보다 더 복잡해졌을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마 제 일처럼 속상해하고 있을 것이다. 선우가 짓고 있을 표정을 상상하자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아빠한테 앞으로 보지 말자고 했어. 엄청 힘들 줄 알았거든? 근데 막상 말하니까 생각보다 괜찮다?”

해영이 가볍게 말끝을 올렸다. 선우와 전화를 하면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다 보니 참담했던 마음도 조금씩 무뎌지는 것 같았다. 그저 심란하기만 한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홀가분한 것도 아닌 애매한 기분이 마음 한구석을 짓눌렀다.

앞으로 나아가기에는 거슬리지 않는 무게였다. 중압감을 덮어 둔 채 해영은 짐짓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아빠 가시고 나서 나도 집에서 나왔는데….”

- 해영아, 어디야.

“나 지금 형 집 앞.”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 앞이었다. 설명을 덧붙이던 해영이 조용해진 핸드폰을 들고 헛웃음을 삼켰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스스로도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조소가 묻어 있었다. 차선우는 침묵을 오래 끌지 안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삭이듯 나직하게 들려왔다.

- 지금 바로 갈게. 조금만 기다려 줘.

***

차에서 내린 선우가 한걸음에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사위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야에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먼 거리였으나, 선우는 벤치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가 해영이라는 걸 확신했다. 그가 해영을 알아보는 건 거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잠시간 멈춰 있던 걸음이 곧 서두르듯 앞으로 향했다.

제게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위를 향하고 있던 해영이 고개를 내렸다.

“형, 여기.”

그 또한 자신을 발견했는지 번쩍 팔을 들어 올렸다. 본인에게 향한 선명한 시선을 알고 있을 텐데도, 해영은 선선히 손을 흔들었다. 그 몸짓이 저를 반겨 주는 것만 같아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는 내내 수도 없이 떠오르던 불안한 가정들을 애써 덮어 두었다. 중요한 건, 해영이 자신을 찾았다는 것이다. 도망치지도, 제게서 거리를 두지도 않은 채로.

선우는 아버지에게서 연락을 받고 나면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밖을 떠도는 해영을 알았다. 그걸 알게 된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기다리고 있다 보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애가 달아 먼저 그를 찾아 나섰던 전적이 수차례 있었다.

“집에서 기다리지, 왜 밖에 있어. 춥지는 않아?”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킨 해영이 제 앞에 선 선우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안 추워. 바람 시원하고 좋은데, 왜.”

“그래도….”

말을 잇던 선우의 입이 불현듯 닫혔다. 그의 눈에 들어찬 것은 경악이었다. 단숨에 눈살을 찌푸린 선우가 해영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볼 위로 스치는 손길에 해영이 아아, 하며 반사적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나직한 신음에 멈칫했던 것도 잠시였다. 선우는 가라앉은 눈으로 해영의 뺨을 노려보듯 주시했다.

“…때렸어? 너를?”

감히? 이를 악물어 말을 삼킨 선우가 입을 다물었다. 이성적인 사고가 날아간 자리에 흉흉한 분노가 들어찼다.

“아.”

화가 난 듯한 선우를 올려다보면서 해영은 태평한 탄식을 흘렸다. 제가 맞았다는 사실도 잊고 있던 모양인지 그는 뒤늦게 난처한 얼굴로 찡그리듯 웃었다.

“아니야, 그런 거. 그냥 길 가다가 벽에 부딪혔어.”

들킬 게 뻔한 거짓말을 윤해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뱉었다. 제가 순순히 넘어가 줄 거라고 믿는 듯한 시선에 속이 들끓었다. 웬만하면 모르는 척 그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렸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눈에 띄게 부은 뺨을 본 순간 정신이 날아간 것 같았다.

선우는 꾸역꾸역 부드러운 미소를 흉내 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벽이… 사람을 쳐.”

“건축법을 준수하지 않은 벽이?”

“…….”

“나 지금 쪽팔리니까 그런 거로 해 줘.”

속 편한 소리에 선우가 입술을 짓씹었다. 뭐가 좋은 건지 윤해영은 왼뺨이 발갛게 부어오른 꼴을 하고서도 헤실거리고 있었다. 화를 내도 모자랄 마당에 도리어 웃는 모습을 보니 속이 뒤집어졌다.

그가 맞았다는 사실이 속상해 눈가에 화끈하게 열이 몰렸다. 눈을 내리깐 선우가 성마르게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한 채 숨을 몰아 내쉬었다.

“선우 형.”

“…….”

“차선우?”

해영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 왔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 않은 척 따라 웃으며 왜, 윤해영, 하고 답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선우는 해영의 부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해영이 알게 되면 싫어할 것 같아 또다시 접촉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해영에게 접근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일은 늘 부지불식간에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해영의 일상을 침범하는 변수에 예민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제가 해결해 줄 수 있는 한, 손은 삐죽 튀어나온 가지를 쳐 내기 위해 뻗어졌다. 그건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지금껏 삶을 살아온 방식과 맞닿아 있을 거라고 차선우는 생각했다.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몇 시간 전 선우는 일이 끝나자마자 강 실장으로부터 그가 해영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는 보고를 받았다. 소식을 들은 즉시 달려갔으나 자취방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해영의 부재를 깨달음과 동시에 몸이 차갑게 식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든 두려움에 휩쓸려 숨이 막혔다. 불현듯 그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금 손끝이 떨려 왔으나, 선우는 얕은 불안을 뒤로한 채 애써 입꼬리를 당겼다.

“…응.”

입술 사이로 무력한 대답이 꺼내졌다. 그대로 선우는 해영의 턱을 가볍게 들어 부은 뺨을 꼼꼼히 살폈다. 사실상 살피는 거라기보다는 추궁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물론 그 추궁의 대상은 그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해영이 떠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으니 다른 걱정은 전부 무의미했다. 지금 선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생각은 끊임없이 후회를 곱씹는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초조함을 드러내듯 입술이 잇새로 형편없이 짓이겨졌다.

어디서부터 놓쳤지?

들킨 후 돌아올 책망을 감수하더라도 아예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나?

“형!”

“…….”

“진정하고 나 좀 봐 봐.”

진정?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복잡한 머릿속을 숨기기 위해 가지런히 내리깔았던 선우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해영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웃는 낯으로 눈가를 슬쩍 찡그렸다. 곤란한 듯 웃으면서도, 곡선을 그린 눈매 사이로 드러난 시선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시선에 순간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듯, 힘이 빠졌다. 꽉 다물려 있던 선우의 입매에서 힘이 풀린 것도 그때였다. 해영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시원한 손끝이 이에 걸려 있던 입술에 닿았다. 아랫입술을 살살 만지작대는 손길에 선우의 입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형, 나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에 비죽 웃고 있는 해영이 담겼다. 선우는 그런 해영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매를 비틀었다. 보는 제가 더 속이 쓰릴 지경인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제가 속상한 것보다 더 복잡한 마음일 게 뻔했다.

“오히려 속 시원해. 진작 이랬어야 했나.”

이것도 거짓말.

알면서도 선우는 어떤 반박도 꺼낼 수 없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해영의 머리칼이 낮게 흔들렸다. 언뜻 드러난 흰 이마 아래 뻔뻔할 정도로 태연한 얼굴이 드러났다.

“근데 갑자기 형이 생각나는 거야.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전화까지 오고, 또 이렇게 바로 달려오네?”

“…….”

“착하다, 차선우.”

“…하.”

선우의 입에서 결국 바람 빠지는 듯한 실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를 달래려는 목적으로 짓궂게 휘어지는 눈매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달랐다. 평소와 다르게 구는 해영을 보며 오기로라도 거짓이라고 할 수 없었다. 슬픔도, 서러움도, 억울함도, 외로움마저도 모두 덮어 둔 채 오직 자신만을 위해 미소 짓는 연인의 앞에서 차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차라리 그가 웃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로 속상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저를 붙잡고 울음을 터트렸다면, 기꺼이 지지대가 되어 줬을 것이다. 윤해영은 그러는 대신 피식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선우는 이런 상황에서도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그에게 뭘 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든 음울한 시선 속에서 다정한 빛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울 것 같아. 나직하게 떨어진 속삭임의 끝이 떨리고 있었다.

“겨우 어리광 부리게 만들어 놨더니….”

“…….”

“왜 네가 나를 위로해, 해영아.”

입꼬리에 걸려 있던 미소가 식는 것은 금방이었다. 해영은 입을 다문 채 속상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선우를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달래려고 했는데 역효과가 난 모양이다. 화가 사그라든 자리에 울 듯한 표정이 걸렸다.

해영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어두웠고, 도심 속 공원을 거니는 사람은 적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을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밖이었으므로 해영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는 제 얼굴 위로 올라와 있는 선우의 손을 꾹 잡은 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러다 툭 불거진 손등 뼈가 입술과 스치는 순간, 촉, 가벼운 마찰음이 생겨났다.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선우의 어깨가 굳었다.

자연스레 가늘어진 눈매 속, 눈이 마주친 해영이 씩 미소 지었다. 방금 제가 한 행동이 의도적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미소였다. 선우의 신경이 온전히 제게로 향하자, 해영은 맞잡은 손을 내리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형, 나 많이 고민했거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가 웃는 낯 그대로 눈가를 찡그렸다. 곤란할 때마다 나오곤 하는 미소였다.

“사실 내가 잘한 건지는 모르겠어. 맞는 답을 고른 건지, 뭐가 맞는 답인지도. 후련하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해영의 말간 얼굴 위로 후회가 스쳤다. 그걸 눈치채자마자 선우의 몸에 바짝 긴장이 어렸다. 멈칫한 것을 느낀 해영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고, 마치 옭아매듯 단단히 힘주어 잡았다.

“그래도 형.”

윤해영은 곧 조금의 틈도 없이 얽힌 손을 가볍게 흔들며 그를 불렀다. 깍지 낀 손을 힐긋 내려다보던 선우가 다시 느릿하게 시선을 들었다.

“또 문제가 생기면, 같이 답을 찾아 나가자. 그러니까….”

해영의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내 곁에 있어 줘.”

그에게서 들려온 다정한 말이 선우의 발밑을 뒤흔들었다.

차선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해영을 주시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이 열리며 무거운 숨이 토해졌다. 허공에서 엉켜 든 시선은 맞잡은 손보다 단단했다. 그 눈빛에 실린 믿음에 숨이 막혀 왔다.

늘 옳은 답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이 정답을 포기한 채 자신의 손을 잡았다. 그 선택이 가진 무게가 마음을 짓눌렀다. 늑골 깊숙한 곳부터 퍼지는 욱신거리는 감각에, 선우가 잡힌 손을 말아쥐었다.

‘날 포기하지 마.’

손안에 잡힌 온기가 선명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알게 돼도 네가 날 선택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모든 것을 알고도 해영은 자신을 선택했다. 어떠한 여지도 없이 분명한 결론에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해영아.”

“응.”

“…해영아.”

“왜, 선우야.”

손을 양옆으로 흔들며 대꾸하는 해영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샜다.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마음을 해영이는 단 한 번도 쉽게 여긴 적이 없었다. 늘 제게 과분하다고 하는 주제에, 정작 본인은 자신에게 얼마나 과분한 사람인지 모른다.

차선우는 결국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잠겨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목이 막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벅찬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그는 사랑하는 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곁에 있어도 좋다고 해 줘서 고마워. 사랑해 줘서 고마워. 나를….”

해영아,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낮게 떨어지는 고백과 함께 선우가 입술을 물었다. 길게 늘어지는 속눈썹 사이로 물방울이 얽혀 드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해영이 짐짓 당황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또 울어? 형, 수도꼭지 고장 난 거 아니야?”

파고들듯 고개를 기울여, 아래로 떨군 선우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입에서 기가 찬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 어떡해.”

해영이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선우를 놀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어떡하긴,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 울보 차선우.”

이어진 목소리에 진득한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이건 그동안 수도 없이 했던 대화였다. 보통 여기서 차선우는 발개진 눈으로 웃곤 했다. 이번에도 해영이 노린 건 그렇게 선우가 웃어 버리는 거였다.

도리어 더 울 듯한 얼굴을 하는 게 아니라.

“아, 이게 아닌데.”

이러면 보통 그쳤는데…. 작은 중얼거림이 어색하게 떨어졌다.

눈을 찡그리며 어설프게 웃던 해영이 결국 손을 뻗었다. 그는 고개를 떨군 선우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이마는 해영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럴 리 없는데도 옷 위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차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고, 그러느라 연신 머리칼이 목덜미를 스쳤다. 맨살에 닿는 간질간질한 감촉에 해영의 입에서는 끝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간지러워.”

“…….”

“…잠시만, 숨! 숨 막혀!”

고개를 숙인 채 무너지듯 해영에게 기댄 선우가 그의 허리를 꽉 감쌌다. 터트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기어코 해영이 언성을 높였다. 그는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어 선우의 등을 토닥이듯 두드렸다.

“숨 막힌다니까, 형! 아, 차선우! 야!”

두드리는 소리가 팡, 팡 갈수록 거세졌으나 차선우는 해영을 붙잡은 팔을 풀지 않았다. 기어코 해영이 부은 뺨을 치켜올리며 앓는 소리를 꺼내고 나서야, 그가 다급하게 손에서 힘을 풀었다.

차가웠던 바람은 어느새 그들을 뒤로한 채 지나가고 있었다. 길었던 계절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나의 결승선은 결국, 또다시 하나의 출발선이 된다.

봄의 시작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

해영이 방송 출연의 여파를 체감하게 된 건 개강하고 난 후부터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카페와 도서관만 다니는 단조로운 동선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개강한 뒤 학교에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학교 안을 돌아다니거나 도서관에 있을 때마다 종종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면, 아닌 척 자신을 주시하는 눈과 마주치곤 했다.

…이번처럼.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해영은 고개를 들다 말고 제 얼굴을 뜯어보는 시선과 마주했다. 뻐근한 몸을 풀기 위해 상체를 바로 하던 그가 흠칫 굳었다. 갑자기 고개를 들 줄은 몰랐는지 상대도 당황한 듯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깜박이는 게 보였다.

저보다도 당황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해영이 한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잠깐 쉴까 하던 참이었다. 도서관 건물을 나서 학교 안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해 주세요. 따뜻한 거로….”

메뉴판을 보며 주문하던 해영은 포스기 앞에 선 알바생을 발견하곤 말끝을 흐렸다. 서서히 눈이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그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

해영의 주문을 포스기에 옮기던 알바생도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어깨쯤 올 듯한 키와 아래로 묶은 머리, 약간 상기된 얼굴과 낯익은 이목구비. 쉽사리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조심스레 눈을 굴리는 모습이 정면에서 보였다.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던 해영의 얼굴에 차츰 놀라움이 번졌다.

‘제가 그,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아까부터 여기 서 계신 거 봤는데요.’

비 오던 날, 제게 우산을 건네며 횡설수설하던 모습이 알바생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겹쳤다. 해영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손으로 가리켰다가 급하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때, 우산.”

“…….”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목소리가 툭 꺼내졌다. 알은체를 했으나, 여자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짐짓 당황한 얼굴로 얼어 있을 뿐이었다. 저를 못 알아보는 건가 싶어 해영이 급하게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 모자를 벗었다.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넘기고 여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은 쑥스러워하는 것도 같고, 동시에 어딘가 신기해하는 것도 같은 시선이 해영의 얼굴에 꽂혔다.

“아, 알아요. 전에… 법학관 건물 앞에서….”

“저한테 우산 빌려주셨잖아요.”

“네, 네.”

여자가 이전처럼 발갛게 익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긴장한 듯한 얼굴을 바라보던 해영이 뒤늦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행동이었다. 그때 빌렸던 우산이 들려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어쩌지…. 낭패라는 얼굴로 찡그리듯 웃던 해영이 한숨을 삼켰다.

“제가 지금은 우산을 안 가지고 있는데.”

“괜찮아요! 그거 어차피 편의점에서 산 거예요. 그냥 싼 거….”

그녀가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괜찮아요?”

여자는 당연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포스기를 잡은 채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던 그녀는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 사실 러브라인에서 봐서 알고 있었거든요. 해… 영 씨라는 거. 그냥 팬심에 드렸던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이번에 멈칫한 건 해영이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니. 방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해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금세 어색해졌다.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알게 되는 게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덕분에 비 오는 날 선뜻 우산을 건네는 사람을 알게 되지 않았나. 잠시 고민하던 해영의 시야에 계산대 옆에 놓인 냉장 쇼케이스가 들어왔다. 그가 쇼케이스 안을 눈짓하며 물었다.

“여기서 뭐가 제일 맛있어요?”

“음. 제일 잘 팔리는 건 딸기요거트케이크인데, 많이 안 달고 상큼한 맛이에요.”

“그것도 따로 포장해 주세요.”

해영이 들고 있던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여자는 익숙한 손길로 주문을 마쳤다. 그는 진동 벨과 함께 돌려주는 카드를 받았다.

머지않아 주문한 커피와 함께 손바닥만 한 케이크 상자가 나왔다. 멀뚱히 서 있던 해영은 진동 벨이 울리는 것을 눈치채곤 발을 뗐다. 계산대 앞으로 다가선 그가 제게로 내밀린 것 중 커피만을 받아들었다.

“이건 드세요.”

해영이 설핏 고개를 기울이며 케이크 상자를 눈짓했다.

“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여자의 눈이 커졌다.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 앞에서 그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가볍게 씩 입꼬리를 올렸다. 해영은 꾸벅 목인사를 건넨 뒤 다시 후드 모자를 뒤집어쓰며 카페를 나섰다.

커피를 든 해영은 바로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대신, 건물 앞 계단식 화단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3월의 초입인데도 바람은 조금 서늘했다. 밤인 탓도 있고, 후드 집업 하나만 달랑 입고 나온 탓도 있을 것이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어깨를 한 번 움츠린 해영이 후드 집업의 지퍼를 채워 올렸다. 옆에 내려놓았던 커피를 다시 들어 홀짝이는 입꼬리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우연한 만남이었으나 이전에 받았던 호의에 사소하게나마 답례를 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이미 해가 져 사방은 어두웠으나, 학기가 시작된 캠퍼스는 조용하지 않았다. 떠들썩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듣던 해영이 주머니에 넣어 뒀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나서부터 오는 연락도 확연히 늘었다. 문제는 거의 끊겼다시피 할 정도로 드문드문하던 이들에게서도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그새 쌓인 메시지들을 훑어내리던 해영은 졸업하고 나서는 별로 접점이 없던 동기로부터 온 연락을 발견했다.

경영 권설아

한국대 경영 최고의 아웃풋 윤해영... 다음 프로그램 출연은 쇼미라던데 맞습니까?

무슨 말이야, 이게.

난데없이 온 연락에는 전혀 맥락이 없었다. 다음 프로그램 출연은 무슨 말인지, 제가 왜 랩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닫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러브라인 김민호

해영

해영해영해영ㅇ

민호민호야 왜

러브라인 김민호

너 왜 이렇게 핫해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왜 이래? 다급하게 저를 부르기에 답을 보냈던 해영은 민호의 메시지를 보며 의아한 낯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트루먼 쇼도 아니고, 단체로 뜬금없는 말을 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민호는 해영이 이렇게 나올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신이 나서 답을 보내왔다.

러브라인 김민호

https://www.youtube.com/watch?v=EYZdfZQAsQ&ab_channel=%EC%86

해영은 그가 달랑 보내온 링크를 눌렀다. 화면은 곧 메신저 창에서 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로 넘어갔다. 동영상의 로딩이 끝나기도 전, 그 아래 뜬 제목을 확인한 해영의 손이 움찔하며 굳었다.

‘러브라인 윤해영 대한고 졸업식 랩’

영상을 재생해서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영상일지 제목만 보고도 짐작이 갔다. 일주일 전에 올라온 영상의 조회 수가 벌써 30만 회를 넘어서 있었다. 굳어 있던 손을 움직여 못 본 척 사이트 창을 끈 해영의 시야에 민호와의 대화창이 들어왔다.

러브라인 김민호

랩 쫌 하네 해영

사람들이 너 데뷔하라는뎈ㅋㅋㅋㅋㅋ

김민호는 저를 놀려 먹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연달아 메시지를 보내왔다. 해영은 한숨을 삼키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영상을 올린 이의 이름은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김수영…. 완전히 모르고 지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전히 연락처를 가지고 있을 만큼 친하게 지낸 사이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을 통해 연락하는 대신 그는 다시 스트리밍 사이트에 들어가 짤막하게 댓글을 남겼다. 댓글을 확인하고 나면 아마 지워 줄 것이다.

민호의 대화 창을 나온 화면에는 기다리던 이의 연락이 떠 있었다. 해영의 입가에 별도리 없이 미소가 걸렸다.

우리 선우

그럼 데리러 가도 돼?

우리 선우. 밋밋하게 선우 형이라고만 저장해 둔 것을 본 그가 충격받은 표정을 하길래 어르고 달래며 바꾼 이름이었다. 본인은 저를 ‘해영’이라고만 저장해 놓은 주제에. 푹 한숨을 내쉬던 얼굴이 떠올라 해영은 키득거리며 곧장 답을 보냈다.

괜찮아 버스 타면 금방인데

형 피곤하게 데리러 올거 뭐 있어

(이모티콘)

우리 선우

왜 버스를 타?

답은 빠르게 도착했다. 마치 버스 대신 저를 운전기사로 쓰라는 듯한 선우의 메시지에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를 만난 날 선우를 만나러 갔던 해영은 그대로 선우의 집으로 거취를 옮기게 되었다. 원래는 며칠 뒤 기숙사로 입소할 예정이었으나, 차선우가 무슨 분리 불안이라도 걸린 강아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탓이다.

‘해영아, 나 혼자 자기 싫어….’

‘형 대체 나이가 몇이야?’

황당해하면서도 해영은 그를 밀어 낼 수 없었다. 그가 느끼는 불안에는 자신을 향한 걱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뺨까지 부은 꼴로 나타났으니 평소보다 끈질기게 안겨 드는 선우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분리 불안이 있다면 분리를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윤해영은 그에게 우스울 정도로 약했고, 당연한 수순으로 자취방에 있던 짐은 그대로 선우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해영이 아침에 출근하던 선우의 얼굴을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그에게서 재차 메시지가 도착했다. 멈춰 있던 화면에 마지막으로 와 있던 연락을 밀어 낸 메시지는 짧았다.

우리 선우

“뭐야….”

화면을 내려다보던 해영이 순간적으로 얼빠진 얼굴을 했다. 얼마간 답이 없더라니, 뒤늦게 보내온 게 핸드폰 키패드에 기본적으로 달린 하트 이모티콘이었다. 윤해영은 이게 이모티콘을 일절 쓰지 않는 차선우치고는 꽤나 노력한 결과라는 걸 알았다.

“아, 진짜.”

해영의 입에서 앓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처럼 이모티콘을 보냈을 뿐이다. 사자가 하트를 날리는 이모티콘이었는데, 그걸 보고 저도 답할 걸 골라 왔을 모습을 생각하니 저절로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진짜, 귀여운 짓만 골라 하네….”

실소와 함께 얼굴을 찡그린 해영이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가슴께가 묘하게 간질거렸다. 입술을 깨물며 화면을 노려보듯 주시하던 그가 참지 못하고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게 이어지던 전화 연결음이 곧 끊기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응, 해영아.

옅은 웃음기가 묻은 부드러운 목소리. 저를 부르는 다정한 음성에 해영은 다시금 입술을 물어야만 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선우는 ‘여보세요’ 같은 흔한 인사말로 전화를 받는 대신, 늘 이름을 불러 왔다. 이전에는 마냥 간질거린다고만 생각했던 그 부름을 윤해영은 사실 무척 좋아했다. ‘해영아’ 하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전화를 걸기 전부터 그가 자신을 기다려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므로.

해영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목소리를 낮춰 그를 불렀다.

“형, 어떡하지.”

- 무슨 일 있어?

“나 네가 좋아서 죽겠어.”

- …….

다급하게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 온 선우가 다시금 입을 닫았다. 숨을 쉬기는 하는 건지, 작은 소음조차 넘어오지 않는 탓에 수화기는 금방 잠잠해졌다. 해영은 고요해진 수화기 너머, 선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웃고 있을까. 아마 웃고 있겠지. 그의 웃는 얼굴 정도는 노력하지 않아도 쉬이 떠올릴 수 있었으나, 상상이 아닌 실제로 보고 싶어 손끝이 연신 움찔거렸다. 해영이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선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 나도….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연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 나도, 해영아.

차선우는 그 짤막한 대답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한 번 더 입을 열어 못을 박았다. 해영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해영은 스스로도 제가 선우에게 약해진다는 걸 알았다. 물론 인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에게 무르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웃던 순간, 이어진 말에 입꼬리에 걸려 있던 웃음기가 가셨다.

- 내 상속인을 너로 지정해 뒀어.

“뭐?”

번쩍 고개를 든 해영이 방금 들은 말을 곱씹듯 잠시 입을 달싹였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속인 지정이라면, 그러니까 유언장….

“유서에 내 이름을 썼다고?”

해영은 입가를 매만지던 손을 들어 그대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열이 오른 자신과 다르게, 선우가 꺼낸 대답은 힘 빠질 정도로 평온했다.

- 응.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 어차피 상속받을 사람도 해영이 너밖에 없잖아.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데.

“아, 돌겠네. 그럴 재산이 있으면 사회에 환원해.”

듣자 듣자 하니까, 애인한테 못 하는 말이 없었다. 황당해하던 해영에게로 낮은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라고 하면 바로 사회에 전 재산을 기부하기라도 할 것 같은 나긋한 목소리였다. 해영이 허탈한 숨을 뱉었다. 정말 사랑하지만, 가끔은 선우 형의 정신 상태가 의심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 데리러 갈까?

해영이 할 말을 잃은 사이,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물은 주제에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차선우는 다시금 입을 열어 정정했다.

- 해영아, 데리러 가도 돼?

한층 더 사근사근해진 물음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목소리가 달짝지근하게 느껴진다는 건 묘한 일이다. 설탕 같은 물음을 입 안에서 굴리던 윤해영은 졌다는 듯 가벼운 웃음과 함께 대답을 흘렸다.

“당연히…, 되지.”

대화는 맥락이 없었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정신도 없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 출발하겠다며 나긋하게 말하는 선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해영은 머리를 털어 내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대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선우가 출발한다고 했으니, 저도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준비해야 했다.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해영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겨우내 마른 줄기만 남아 쓸쓸해 보이던 벚나무에는 어느새 파릇한 새순이 솟아나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직은 망울져 있는 초록 봉우리에서 소담스러운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겨울을 이겨 낸 나무에게 약속된 선물처럼.

불어오는 바람에 여전히 머리칼이 들썩거렸으나 이제는 춥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봄, 해영은 잃어버렸던 것들을 조금씩 되찾아 가는 중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으므로.

***

개강한 이후로 바빠진 건 학교생활만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제가 일한다는 소문이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쩍 카페 손님들이 늘었던 것이다. 일이 바빠지는 정도야 힘들고 말 일이었으나 저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영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해영은 일을 그만두고 당분간 학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 그가 오늘도 카페로 나온 이유는,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구해질 때까지 유영이 혼자 일하게 둘 수는 없었던 탓이다.

“유영아, 나 그만두면 심심해서 어떡해?”

“알바하는 곳이 심심하면 천국이죠. 오빠 때문에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

포스기 앞에 선 채 대답하는 유영의 말은 냉정한 동시에 합리적이었다. 맞는 말이다. 해영은 금세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영도 유영이지만, 자신의 선택을 가장 반기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차선우였다. 해영은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기뻐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잘 생각했어, 해영아. 공부에만 집중하는 게 좋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만 해.’

‘형이 뭔데… 형이 우리 엄마야?’

‘그보단 배우자에 가깝지 않아? 나는 널 내조하고 싶은 건데.’

내조…. 그의 한결같은 희망 사항에 해영은 더 반박하지 못하고,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는 없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를 먹여 살리고 싶어 하는 욕구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그는 요즘 들어 차선우가 장난처럼 꺼내는 결혼하자는 말이 혹시 법적으로 자신을 부양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인지 고민하게 됐다.

예전에는 그가 제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걸 보며 어쩔 수 없이 씁쓸해지곤 했다. 그게 애정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여유로운 태도에서 그와 자신이 가진 환경이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닫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어, 알았어. 내가 형 먹여 살릴 테니까 형은 집에만 있어.’

전에는 애써 모르는 척하고자 했던 마음을 해영은 이제 능숙하게 넘길 수 있었다.

‘어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살살 웃고만 있어 봐.’

‘…해영아.’

삐딱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해영을 향해, 차선우가 침음을 흘리듯 힘없이 그를 불렀다. 이어진 순서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윤해영은 매번 그렇듯 자신에게 무너져 내리듯 안겨 오는 선우를 받아 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잊고 넘어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 웃고 잊어버리는 게 최선인 순간들이 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방향은 다르지 않아도,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두 사람은 인정해야만 했다.

그건 체념도, 타협도 아닌 이해였다.

“헉… 이다인, 아니, 다인 언니….”

카페 안이 조용해진 틈을 타 생각에 잠겨 있던 해영의 귓가에 낯익은 이름이 걸렸다. 고개를 돌리자 포스기 앞에 선 유영이 당황한 듯 저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서랍장에 기대어 서 있던 몸을 바로 한 해영이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그 앞에 선 이를 발견한 그의 입가에 실없는 웃음이 걸렸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다인아, 다들 돌아가면서 찾아오기로 한 거 아니지?”

“맞는데? 오늘은 내 차례야.”

말도 없이 찾아온 다인을 보며 해영이 웃는 낯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장난스러운 물음에 그녀는 똑같이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인은 해영을 향해 툭, 물었다.

“이상하다. 민호가 보낸 사진에는 모자도 쓰고 있었는데, 그건 어딨어?”

“아….”

해영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세희가 카페에 들렀던 후로 민호가 찾아온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날은 사장님이 이벤트성으로 동그란 모자를 쓰라며 내어 준 날이었다. 피고용주인 해영은 군말 없이 받아 썼고, 그 모습을 민호에게 딱 내보였다.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사진 찍던 김민호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걸 다인에게 보낸 모양이다.

“써 줘?”

그는 한숨을 삼키며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창고에서 모자 하나 찾아 써 주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저를 바라보는 해영과 시선을 마주한 다인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짤막한 대답에 해영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들이 여기 디저트 맛있대.”

쉬이 돌려진 화제에 다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곧바로 계산대 옆의 쇼케이스를 들여다보던 다인이 눈을 굴렸다. 고민하는 듯한 진지한 얼굴로 입을 달싹이던 그녀의 입에서 이내 아쉬움이 묻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먹고 싶은데, 조금 이따 친구 만나기로 했어.”

“친구…. 남자?”

“…어떻게 알았어?”

모를 수가 있나. 촬영할 때보다도 더 공들여 준비하고 나온 듯한 모습을 보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해영의 시선이 느릿하게 다인의 얼굴로 떨어졌다. 의아해하던 다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잠시만, 너 지금 무슨 생각해. 그런 사이 아니거든?”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다인아.”

“얼굴에 다 보여!”

다인이 손으로 해영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해영은 곧바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낸 채 어깨를 으쓱였다.

뭐라도 먹을까 고민하던 다인은 결국 음료 한 잔만 포장했다. 그녀는 테이크아웃잔을 받아 들고도 할 말이 있는 듯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해영은 그런 다인을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 머뭇거리던 입은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 아래서 끝내 열렸다.

“해영아, 우리 밴드 다음 달에도 공연할 거 같거든. 와 줄 수 있어?”

“공연?”

그의 되물음에 다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을 꺼내고도 연신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하도 주저하기에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해영이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도 가도 돼?”

“당연히…! 와 주면 좋지.”

“너무 유명해져서 이제 내 자리 없는 거 아니야?”

다인은 그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기어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입가에 비시시 걸린 미소가 그녀의 들뜬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꼭 오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에야 몸을 돌렸다.

카페를 나서는 다인의 뒷모습을 보며, 내내 조용히 있던 유영이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예상한 일이었다. 러브라인 출연진을 보고 그녀가 신나지 않았던 건 김민호가 찾아왔을 때뿐이었으니까.

“오빠… 그냥 계속 일하면 안 돼요?”

“왜?”

“그럼 언니들 자주 올 거 아니에요.”

“…….”

말을 꺼낸 목적과 의도가 분명했다. 방금까지는 제가 그만두면 오히려 한가해져서 좋을 것 같다더니, 금세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유영을 보며 해영이 작은 실소를 흘렸다.

포스기 앞을 지키고 있는 유영에게서 고개를 돌린 그가 컵을 씻었다. 곧 다음 시간대의 아르바이트생과 교대할 시간이었다. 교대할 준비를 마친 해영이 먼저 스태프 룸으로 향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의 앞으로 유영이 기다렸다는 듯 불쑥 핸드폰을 건넸다.

“핸드폰에 전화 와요.”

컵을 씻으면서 건조대 위에 올려놨던 걸 깜박했던 모양이다. 고맙다고 말하며 그녀가 건넨 핸드폰을 받은 해영이 순간 멈칫했다.

우리 선우

그가 설핏 굳은 얼굴로 화면에 떠오른 이름과 유영의 담담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봤을까? 입가에 걸린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가 기울어졌다. 당황스러웠으나, 직접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고 있는 사이 유영이 괜찮으니 받으라며 눈짓해 왔다.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해영이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형?”

- 해영아, 창밖 봐 봐.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카페의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해가 지면서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동시에 아까부터 조금씩 오기 시작한 부슬비가 창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비가 올지도 모른다기에 집을 나서며 우산을 챙겼는데, 문득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가….”

해영이 말하다 말고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빗방울이 튄 유리창 너머였다. 어두워진 하늘조차 배경으로 삼은 차선우가 핸드폰을 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해영의 시선에 제가 담긴 걸 확인한 차선우가 천천히 눈을 접어 웃었다.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나긋하게 들려왔다.

- 안녕, 데리러 왔어.

부드러운 낯, 짙은 눈 위로 선명한 이채가 떠올랐다. 애정이 묻은 눈매가 그린 듯이 휘었다.

- 비가 오길래.

그는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던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허공에 들린 반대쪽 손에는 검은색의 길쭉한 우산이 쥐어져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그럴싸한 명분이 있다고 보여 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핸드폰을 든 채로 굳어 있던 해영의 입가가 곧 실없이 무너졌다.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찾아왔다는 차선우가 좋았다. 웃길 정도로 빈약한 핑계마저 좋았다. 그럴듯한 이유가 없이도 찾아올 수 있는 관계임을 반증하는 것만 같아서.

“와, 나 마침 우산 없었는데.”

해영은 기꺼이 그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씩 입꼬리를 올리며 어떻게 알았지? 하며 장난스럽게 묻자, 선우의 얼굴에 걸린 미소도 한층 진해졌다.

전화를 끊은 해영의 뒤로 유영이 다가왔다. 그녀 또한 유리창을 간간이 두드리고 있는 빗방울을 확인했는지, 헛숨을 들이켰다.

“마감 알바 아니라서 다행이다….”

들려온 중얼거림이 뜬금없어 해영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 오는 날의 마감 청소부터 걱정하는 게 퍽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차례 안도한 뒤에야 한숨을 흘리듯 투덜거렸다. 아, 우산 없는데.

“우산 안 가져왔어?”

해영이 등 뒤를 흘긋 돌아보며 물었다. 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낮까지는 화창해서….”

“그럼 내 거 써.”

그가 손을 들어 스태프 룸 안쪽을 가리켰다. 우산꽂이에 제 것 하나만 꽂혀 있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오빠는요? 없다면서요.”

“나 사실 하나 더 있어. 괜찮으니까 써.”

조용히 말한다고 했는데, 전화하는 걸 들은 모양이었다. 해영은 저를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유영에게 태연한 낯으로 웃어 보였다. 이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한 그가 걸음을 옮겨 문가로 향했다. 마침 마감 타임 알바생이 들어서고 있었다.

탈탈, 우산에 묻은 물기를 털며 카페 안으로 들어오던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고갯짓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해영은 주저하지 않고 유리문을 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선우가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우산을 펼쳤다.

“길이 막혀서, 학교 주차장 안에 차 세워 뒀어.”

차선우는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며 고개를 기울인 채 웃었다.

얼른 우산 아래로 들어오라는 듯 눈짓하는 선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해영이 돌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까이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 하나를 뺀 그가 선우의 팔을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저기요.”

해영의 입에서 나온 낯선 호칭에 선우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거리감 느껴지는 부름에 당황한 듯했다. 묘하게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애인 있어요?”

은근한 어조로 물어 오는 해영의 눈이 반짝였다. 그를 내려다보던 선우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먹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는 모습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린 해영이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네, 있어요.”

웃음기 묻은 속삭임이 해영의 귀를 간지럽혔다.

차선우는 입가를 가리던 오른손을 펼쳐 해영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오른손 약지에 걸린 반지가 또렷하게 시야에 박혀 들었다. 끼고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정작 눈으로 다시금 확인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입이 마르는 기분에 살짝 내민 혀로 입술을 축였다. 목울대가 한 차례 울렁인 것도 잠시, 해영은 느릿하게 주머니에 찔러 두었던 오른손을 꺼냈다.

“그거, 내 거랑 똑같은데.”

들어 올린 약지에는 그의 것과 똑같은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해영의 손짓을 좇던 선우의 시선이 흔들렸다.

해영의 손가락은 헤어진 후로 내내 비어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반지를 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낄 수 없어서였다. 잃어버린 건지 도통 찾을 수 없던 반지의 행방을 해영은 오늘 아침,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았다.

선우의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도중 우연히 서랍을 열었다가 반지를 발견한 것이다.

“이거 내 거 맞지, 형.”

해영의 물음에 선우는 입을 열지 못하고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손을 내린 해영이 조심스럽게 웃었다.

오랜만에 다시 껴 본 반지는 어색했다. 하나의 단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이닥쳤다. 선우 형은 무슨 심정으로 계속 보관하고 있었을까…. 오전 내내 해영은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으로 한참이나 반지를 내려다보아야 했다.

“오늘 한 번도 안 빼고 계속 끼고 있었거든.”

“…….”

“나 보러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애인 있단 소문이라도 나면 하진 누나가 화낼지도 몰라.”

싫은 소리 안 들으려면 당분간은 차선우 오른손 열심히 숨기고 다녀야겠네. 누가 들을세라 해영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췄다. 속닥거리면서도 입가에 걸린 짓궂은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보통은 이쯤에서 ‘들킨 김에 결혼할까?’ 같은 실없는 대답이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우산을 잡지 않은 손을 뻗어 해영의 약지를, 정확히는 그 약지에 낀 반지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그런 선우를 바라보던 해영이 입을 열어 길어지는 침묵을 잘라 냈다.

“형.”

짧은 부름과 함께 해영은 그대로 선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빈틈없이 엉켜 든 두 손이 끝내 깍지를 꼈다. 맞잡은 손가락에 끼워진 두 개의 반지가 시야에 박혀 들었다.

군데군데 희미한 흠집이 간 반지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자 상징이었다. 소중하고, 그렇기에 버릴 수는 없지만, 반드시 그것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진짜 더 좋은 거 해 줄게.”

조곤조곤 꺼낸 말에 선우가 결국 푹 고개를 숙였다. 덩달아 내려온 우산이 선우의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이 꼭 우산 속으로 숨어드는 것만 같아 속절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형, 선우 형. 연신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우산은 쉬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손을 뻗어 우산의 가장자리를 쥔 해영이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선우가 든 검은 우산 아래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섰다.

“겨우 이거로 감동한 거 아니지? 다음에는 더 좋은 거 해 준다니까.”

“해영아, 다음은 내 차례여야지….”

“눈물이나 닦고 말해.”

빗줄기는 잦아들고 있었으나, 이쪽은 영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해영은 묵묵히 그를 기다려 주었다. 늘 그렇듯 장난스러운 놀림과 함께.

***

다해 목격담 올라왔어

오늘 러브라인 해영 봤음

작성자: 왕교자

방금 한국대 앞에서 봤는데 존잘이더라

다인이도... 사귀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있었음

둘이 키 차이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잘 어울리던데?ㅎ

댓글 13〉

아까 올라온 다해 목격썰에서도 한국대 앞이랬는데 다해 찐인가?

암튼 개부럽다 나도 해영이 실물 궁금해

(댓글 24개)

한국대 앞이면 카페? 요즘 해영이 카페 목격담 자주 올라오던데

└해영이 카페 차렸어? 프로그램 끝나고 시작함??

└출연 목적 투명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

└또시작이다; 뭔 출연목적이야 개업한게 아니라 알바임

└엥?

└??

저기 댓글에서 누가 사귀는지 분위기 보라던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존웃

└보다가 친구같으면 번따하라는 것도 ㅈㄴ웃겨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해영이 번호가 아니고 다인이 번호 따라는게 개웃김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도 윤해영 실물 보고 싶다

└222다해 실제로 보고싶어

한국대 앞이면 해영이 알바하는 카페에서 본거 같은데 거기 주말에 가면 선우 볼 수 있대

└여기 목격담 빈도 보면 다인이보다 선우가 더 가능성 높음..ㅇㅇ

└뭔 가능성? 선우해영?

└미쳤나 선우해영ㅇㅈㄹ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영이 카페에 다른 출연자들도 감 다인이만 간 거 아님 뇌절 그만~~

└이게 맞지 그냥 친목일수도 있는데ㅋㅋㅋㅋㅋㅋ

모르겠고 다인이 브이로그 존버

何 @ojima_bojima ·202X.3.6.

됐다.. 나 이제 최종선택까지 마음 놓고 볼 수 있다...

시럽 @hagi_syrup ·202X.3.6

나 학교 가는 길에 섢해 본 거 같애... 비 와서 우산까지 썼는데 뒷모습 정도는 괜찮지...? 문제시 삭제함

검은옷이 연하 회색옷이 연상

.avi

???? 0 ↺ 6 ♡ 21

LOSS???? @Lossluvline ·202X.3.6.

개웃겨 리트윗이 오백이 넘었는데 그중

비계 인알이 오백개야

시럽 @hagi_syrup ·202X.3.6

나 학교 가는 길에 섢해 본 거 같애... 비 와서 우산까지 썼는데 뒷모습 정도는 괜찮지...? 문제시 삭제함

검은옷이 연하 회색옷이 연상

.avi

???? 3 ↺ ♡ 31

LOSS???? @Lossluvline ·202X.3.6

아 이 남자들 뭐냐 진짜??ㅠ 영상에서 개치이는 포인트.. 연하쪽으로 우산 기울이고 자기는 어깨 다 젖고 있는 연상...

(2220306152.jpg)

???? 2 ↺ ♡ 19

선해???? @sunssun014

나도 이거 보고 기절함

LOSS???? @Lossluvline ·202X.3.6

뇌절 그만해야지 근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할게 지금 웃음이 멈추지 않고 해영이 최종선택은 선우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음

ㄴ저기 아직 최종선택 나오지도 않았는데요

???? 2 ↺ ♡ 13

오늘뭐먹지???? @todays_menu

내말이.. 지금 실실 쪼개는 중임 뭐지? 내가 사귀나?

하레???? @ssunnysideup

우산 같이 쓰고 가는 모습만 봤는데도 에바야 영화잖아 완전.. 둘이 너무 행복해보이는데 우리 신경 꺼주자.. 근데 저기 위치가 어디라고?

에필로그

해영이 공부하다 말고 상체를 바로 세워 그사이 건조해진 눈을 껌벅였다. 곧 시험이 다가오는 탓에 제본한 교재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이곳저곳 포스트잇이 붙은 페이지를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바라보던 그가 붉게 물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전에 곧잘 오곤 했던 카페의 지정석에 앉아 있었다. 카페가 대로변에 자리 잡은 탓에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도시의 것이었다. 그 사이사이 싱그럽게 우거진 녹음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흐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는 바빠서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체감하지 못했다. 쉬어 본 적 없던 아르바이트를 할 짬도 내지 못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비록 아르바이트를 다시 구하지 않은 것에는 바쁘다는 이유만 있진 않았지만.

“하….”

목뒤를 쥐고 뻐근해진 어깨를 풀던 해영이 나직하게 한숨을 흘렸다.

프로그램이 잘된 건 하진이 말해 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이전보다 더 시선을 받기도 했고, 친구들한테도 여전히 프로그램과 관련한 연락이 끊임없이 왔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선우와 함께 살게 되면서 생활비를 걱정할 일은 없어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해영아, 앞으로는 이거 써.’

‘…이게 뭔데?’

어느 날 차선우가 불쑥 내민 카드 앞에서, 해영은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전처럼 돈 문제로 예민해지거나, 자존심 상해 하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우로부터 카드를 받아 제 것처럼 쓸 생각도 없었다. 제게 내밀린 카드 앞에서 해영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졌다.

선우는 그런 해영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만으로 읽혔던 것이다.

‘내 게 아니라 네 거니까 오해하지 마. 전에 나한테 줬던 돈 다시 넣어 놨어.’

‘…….’

‘그리고….’

막힘없이 이어지던 말이 잠시간 멎었다. 고민하듯 아래로 시선을 떨궜던 선우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지런히 뻗은 속눈썹이 슬로 모션처럼 말려 올라갔다. 그 아래 드러난 검은 눈동자에 해영의 모습이 담겼다.

‘강 실장 연락처는 지웠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앞으로 또 볼 사이 아니잖아.’

‘앞으로 또 볼 일이 있을 수도….’

‘없어.’

차선우는 보기 드물게 단호한 태도로 말을 잘랐다. 해영은 그의 지나치게 단정적인 태도 앞에서 도리어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확언한다면, 아마 정말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강 실장이 선우의 측근이라는 데에 있었다. 선우가 자신과 얽힌 일 때문에 그를 내치기라도 했다면 곤란했다. 불안한 듯 미간을 찌푸린 해영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형 혹시 내가 강 실장님 만났던 거 때문에 그래? 그건 내가 부탁해서 먼저 만났던 거고, 강 실장님 잘못이 아니잖아.’

‘알아, 해영아.’

아닌데. 모르는 거 같은데…. 대답은 선뜻 흘러나왔으나 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 해영은 삐딱한 시선으로 다정스레 웃고 있는 선우의 얼굴을 살폈다.

저라고 강 실장이 전혀 껄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얼굴 보기 불편한 사이에 직접 만나 들은 말도 있었으니까. 그런 사감과는 별개로 그가 했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손을 들어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해영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 일로 불이익을 받으셨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뭐?’

하하. 눈을 동그랗게 떴던 차선우는 이내 재밌는 말이라도 들었다는 양 웃음을 흘렸다.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눈매에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다지 장난스럽지 않았지만.

‘그럴 리가. 강 실장은 여전히 한제에 필요한 사람인데.’

해영이 그의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미묘해진 눈빛이 선우를 향했다. 다른 사람의 필요성을 논하는 그가 사뭇 냉정해 보였다.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냥 나한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그래.’

‘…….’

‘그런데도 신경이 쓰여?’

차선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온전히 제가 서 있는 곳에만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아니.’

윤해영은 끝내 백기를 들며 한 발짝 물러섰다. 이렇게 다정한 시선을 받으면 어쩔 수 없지 않나.

미심쩍었던 부분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으나, 선우가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 부분은 있을지 몰라도. 거기까지는 제가 신경 쓸 영역이 아니었다.

가볍게 머리를 내젓는 것으로 생각을 털어 낸 해영이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해가 지는 걸 보니 선우도 곧 퇴근할 것이다. 그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느슨하게 걸려 있던 펜을 다시금 고쳐 쥔 때였다. 그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에서 지이잉, 진동이 울렸다. 해영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옮겨 갔다.

러브라인 김세희

세희 누나? 무슨 일이지? 해영이 의아한 기색으로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전화를 받으면서 동시에 시선은 다시 책으로 떨궜다.

“응, 누나.”

해영은 인사 대신 가벼운 부름으로 입을 뗐다.

- 해영아, 나 지금 재휘 오빠랑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는데, 혹시 잠깐 전화 돼? 사람들이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아래를 향하던 고개가 비스듬히 들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린 듯싶더니,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전해 온 난데없는 제안에 헛웃음이 고였다.

- 해영아?

“…하.”

- 아이, 해 줄 거지?

짧은 한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 웃는 소리를 낸 세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어 왔다. 침음을 삼킨 해영이 손끝에 걸린 펜을 빙그르르 돌렸다.

‘러브라인’이 마지막 화까지 전부 방영된 모양이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더니 끝난 줄도 몰랐는데, 세희 누나가 재휘 형과 같이 방송을 하고 있다면 끝난 게 분명했다.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까지는 최종 선택과 관련해 비밀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해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알았어.”

선선히 튀어나온 대답에 수화기 너머로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기되어 올라간 음성을 들으니 덩달아 비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 우선… 너 유튜브 할 생각 없냐는데.

“없어요.”

- 칼 같네. 그럼 만약, 사귀는 사람이 같이하자고 해도?

“…….”

해영의 입이 반사적으로 다물렸다. 그녀의 물음이 황당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약’이라는 전제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차선우가 먼저 남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매체에 출연하자고 말해 오는 모습이 전혀 상상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데도 만약 선우 형이 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럼… 해야지….”

해영이 찡그린 낯으로 답했다. 힘겹게 꺼내진 대답에 세희가 흥미로운 탄성을 흘렸다.

- 오호, 애인이 하자고 하면 한답니다. 해영 씨 애인 되실 분은 참고하시고요.

“…누나.”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꺼내는 말이 짓궂었다. 해영이 앓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수화기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사과처럼 들려왔다.

- 그래도 하면 좋을 텐데. 해영이 너는 브이로그 같은 거 찍어도 재밌을 거 같아.

“딱히 보여 드릴 만큼 일상에 재밌는 일이 없어요. 공부하는 게 거의 전부라서. 연인을 공개할 생각은… 더 없고.”

조심스럽게 말을 잇던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펜을 들고 있던 손이 올라가며 눈썹 위를 매만지듯 눌렀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물론 차선우를 영상으로 남기는 일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해영은 가끔 장난처럼 선우에게 그를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단 말을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옮기거나 그의 영상을 다른 이들에게 공개하는 건 완전히 별개의 일이 아닌가.

이미 그는 선우가 저를 따라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스크린에 비친 것을 신경 쓰던 차였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가 카메라에 찍힌다고 묻힐 리 없었으니까. 이전 같으면 절대 안 할 일을 저 때문에 하게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한숨을 삼킨 해영이 복잡한 속을 뒤로한 채 말을 이었다.

“애초에 유튜브도 잘 안 봐요.”

- 해영아 너 그럼 내 것도 안 봐?

멈칫, 해영이 어색하게 굳었다. 짧은 침묵이었으나 거기서 답을 들은 모양인지, 세희가 과장스러운 목소리를 뱉었다.

- 와, 서운해.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린 해영이 눈 위를 짚고 있던 펜을 내렸다. 서운하다고는 하지만, 정말 서운해하고 있지 않으리라는 건 알았다. 세희라면 제가 영상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까.

이것도 그저 장난의 연장선일 것이다. 알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짓궂게 던져 오는 말들을 들으니 절로 삐딱한 기분이 들었다. 해영은 펜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반대 손으로 고쳐 잡았다.

“…누나는 나 차 놓고 서운하다고 할 입장인가?”

- 엇….

장난스러운 되물음에 세희가 어정쩡하게 입을 닫았다. 잠시 수화기 너머가 분주해진다 싶더니 이윽고 재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해영, 경고야.

“재휘 형.”

해영이 반갑게 그를 불렀다. 재휘가 있다는 걸 알고 건넨 장난이었으나, 세희는 다소 곤란한 모양인지 급히 말을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을 멀찍이 떼어 낸 해영이 숨죽여 웃었다. 아무래도 화제를 바꾸는 데에는 성공한 듯했다.

- 마지막, 마지막! 프로그램 끝난 후에도 꾸준히 연락하고 있는 출연자가 있는지.

그녀의 대답에 눈을 굴리던 때였다. 유리창 너머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가 보였다. 해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있어요.”

- 뭐? 누구? 뭐야, 윤해영. 나한테만 연락 없던 거였어? 바쁘다며!

“누나, 이제 질문 끝. 저 나가 봐야 돼요. 다음에 봐요.”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인사를 금방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은 해영이 손을 뻗어 유리창을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친 선우의 시선이 제게로 향했다. 픽 입꼬리를 올린 해영은 제 옆자리를 고갯짓하는 대신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가방을 들고 카페를 나선 그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선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형.”

“응, 오래 기다렸어?”

누구랑 전화한 거냐고 물을 법도 하건만 차선우는 그저 오래 기다렸냐며 눈을 접어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에서 드러난 확신이 달가워 해영도 입가를 허물었다.

“어, 나 형 출근할 때부터 형 기다리잖아.”

웃음기 묻은 대답에 선우가 움찔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설핏 굳어지는 얼굴을 보니 별수 없이 웃음이 샐 거 같아, 해영은 꾹 입술을 물어야만 했다. 예상대로 차선우는 또 약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해영아, 나 퇴사할래.”

“그래. 내가 열심히 일해서 먹여 살릴게, 해.”

“네가 나가면 의미가 없잖아….”

자그맣게 들려온 불평이 귀여워 결국 웃음이 터졌다. 한바탕 터진 웃음이 잦아들어 갈 때쯤, 해영은 큭큭거리며 선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집에 가자. 배고파.”

그는 해가 져 어두워진 하늘 아래서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곡선을 그리고 있는 해영의 눈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선우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함께 걷는 법을 완전히 터득한 차였다. 아직도 맞춰 나가야 할 것은 많았지만, 눈이 마주치고 손끝이 스칠 때마다 배어 나오는 미소에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었다. 두 사람은 보폭을 맞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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