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9/13)

6

강 실장을 만나기로 한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해가 슬슬 지던 무렵이었을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해영은 전화를 건 사람이 강 실장일 것이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유영아,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와도 돼?’

‘당연하죠. 손님도 없는데 빨리 다녀와요.’

일하다 말고 해영은 결국 유영에게 양해를 구한 뒤 카페 밖으로 나섰다.

‘여보세요.’

- 윤해영 씨 되시죠. 하진 씨에게서 연락받았습니다.

부드럽지만 고저 없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인사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멈칫하는 사이,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제가 누군지 밝혀 왔다.

- 강주혁입니다.

예상대로였다. 해영은 설핏 혀를 내밀어 긴장한 탓에 바짝 마른 입술을 적셨다. 곧 본론을 꺼내는 목소리에는 긴장 묻어 있지 않았다.

‘드릴 게 있어서 연락 부탁드렸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덤덤한 목소리에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해영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진해져 갔다.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흐르는 동안 일정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은 생각보다 호의적이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시간을 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일 괜찮으십니까?

그 후로 일정을 조정해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서로의 용건만 확실히 한 채 끊어진 전화는 군더더기 없었다. 해영은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떨리지….”

미리 시켜 둔 음료로 마른 입술을 축인 해영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십여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강주혁. 강 실장.

굳이 따지자면, 해영으로서는 강 실장이라는 호칭보다는 강 비서라는 호칭이 더 익숙했다. 처음 봤을 때 그가 제게 그렇게 알려 줬던 탓이다.

그게 아마 대학교 4학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해영은 성인이 되고 난 이후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전까진 은근하던 선우가 아예 대놓고 같이 살자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꼬시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집으로 가려고 하면 붙잡는 탓에 언제부터인가 그의 집에서 잤다가, 아침에 나가 밤이 되면 그의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날은 나갈 준비를 끝내고 선우의 집을 나서기 직전, 과외 일정이 취소된 날이었다. 다시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돌아온 줄 알고 현관으로 나섰던 해영은 낯선 사람을 맞닥뜨렸다.

‘…누구세요?’

‘강주혁이고, 한제 물산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반사적으로 던진 물음에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자신을 소개했다.

한제 물산 기획팀? 선우 형이 한제 물산에서 일하기는 하는데…. 동료인가? 왜 오셨지?

단정하지만 무뚝뚝한 남자의 얼굴을 해영은 어정쩡하게 서서 바라보았다. 강주혁은 해영의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 듯 가만히 서 있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그날이 두 사람의 첫 대면이었고, 동시에 윤해영이 차선우의 정체를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공주 같아서 공주라고 부른 거였는데. 진짜 공주였네.’

해영이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사실대로 털어놓은 선우를 향해 처음 꺼낸 말은 그거였다. 잠시의 침묵 끝에 새어 나온 말에 차선우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해영의 허리를 붙잡은 채 매달렸다.

‘응…. 계속 예뻐해 줘.’

불현듯 그때를 떠올리자 헛웃음이 흘러나와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창밖을 주시하던 해영은 들어서는 이를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안으로 들어선 강 실장은 자리로 다가와 자신을 맞이하듯 서 있는 해영에게 목인사를 건넸다. 찰나 날카로운 시선이 짧게 해영을 훑어 내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해영은 그가 내미는 명함을 받아 들었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명함에는 한제 물산 기획팀 대신, 한제그룹 전략기획본부라는 명칭이 적혀 있었다. 명함을 눈으로 훑은 해영이 제가 앉아 있던 맞은편을 정중히 권했다. 상대는 작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해영은 상대가 착석하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에 앉아 있는 강 실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회사에서 바로 온 모양인지 주름이 잡히지 않은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채였다.

“저를 먼저 만나고 싶다 하실 줄은 몰랐는데.”

먼저 입을 뗀 건 강 실장이었다. 그의 말에 해영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주저하는 입가에 애매한 미소가 걸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볼 낯이 없다는 쪽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해영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선우뿐만이 아니었다.

‘지지난 주… 크리스마스 전날인가, 얼굴을 본 건 아니고, 회사에 없다고 해서 비서만 만나고 왔어. 근데 그 사람이 계약에 대해서 뭘 알 리가 없지.’

아버지를 만난 날 그가 꺼낸 말에서 언급된 비서. 해영은 그 당시 상황을 보지 않고도 그가 말한 비서가 눈앞의 남자일 거라고 확신했다.

선우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동시에 아버지가 진 부채의 존재 또한 알고 있는 사람. 게다가 회사까지 찾아간 아버지가 허황된 제안을 부탁하는 것을 고스란히 들은 사람이었다. 마주하는 데에 껄끄러움이 없을 리 없었다.

불편하더라도 선우에게 직접 건네주지 않고 돈을 갚을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가방에서 직사각형 모양의 봉투를 꺼낸 해영이 테이블 위에 올린 채 맞은편으로 밀었다.

“형이… 준 돈에 비하면 한참 적겠지만,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서요.”

“…….”

“앞으로도 계속해서 갚아 나갈 생각이에요.”

내내 깔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처음으로 무거워졌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느릿하게 향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윤해영 씨. 저는.”

말하다 말고 그는 입을 닫았다. 표정의 변화는 크지 않았으나, 가라앉은 얼굴에서 언뜻 낭패감이 스쳐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해영은 숨죽인 채 묵묵히 그가 꺼낼 말을 기다렸다.

길어지던 침묵의 끝에서, 강 실장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선택을 이해합니다.”

…이해?

예상하지 못한 말이 해영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에 뚜렷하게 의아함이 서렸으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저 또한 한제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고, 그 빚을 여전히 갚아 나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윤해영 씨도 안면 몰수하고 부채감을 어딘가로 밀어 넣어 외면해 버릴 사람이 아니죠. 제가 한제에 진 빚을 상환하기 위해 헌신하길 택했듯이 말입니다.”

“…….”

“저는 윤해영 씨의 선택을 이해해요. 이전에도 말입니다.”

해영의 입에서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했던 선택마저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이해는 단지 지금 내미는 돈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순간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처럼 속이 홧홧해졌다.

그를 만나기 전 들을지도 모른다고 대비했던 건 이런 종류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냉정한 말로 타이르거나 혹은 턱도 없는 빚을 갚겠다고 나서는 자신을 비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저를 이해한다는 말이 아니라.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오히려 다른 쪽이죠.”

그런 해영을 말없이 응시하던 강 실장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냉소가 해영을 향했다.

“저는 선우에게 많은 것을 걸고 있습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

“가진 게 많다는 건, 잃을 것도 더 많다는 소리예요. 해영 씨보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도 해영 씨를 선택했어요.”

그의 어조는 단조로웠으나, 말끝에 어린 조소에서 선우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을 흘리고 있었다. 해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충성은 이해에서 벗어난 영역에 존재하는 법이다. 얼굴에 잠시 떠올랐던 못마땅함은 금세 사라졌다. 감정을 빠르게 갈무리한 그는 이전처럼 얼굴에 깔끔한 미소를 덧그렸다. 말이 길어졌네요, 하는 담담한 인사와 함께.

“이건 제가 전달하도록 하죠.”

“…….”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몸을 일으켜 배웅해야 한다는 걸 알았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공간을 완전히 빠져나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굳어 있던 윤해영은 뒤늦게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내 꿈꿔 왔던 순간이었다. 가진 부채를 소소하게 갚아 나가는 긴 여정의 첫발. 좋아해야 했지만, 상상 속에서처럼 강렬한 후련함이나 보람 같은 것은 없었다.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 낸 자리에 쌓인 공허가 속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강주혁 실장에게서 들은 말 때문일까. 원하던 대로 돈을 갚았는데도, 어쩐지 해영은 완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

도서관에 온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시침이 원을 몇 바퀴나 그리는 동안, 해영은 책을 펼치고 앉아서도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한 문단을 꾸역꾸역 읽어 내리고선 머릿속에 하나도 집어넣지 못해 결국 처음으로 되돌아간 게 수차례였다. 아무런 소득 없이 혹사당하기만 한 눈이 시려 왔다.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하네.’

결국 책에서 시선을 뗀 그가 허리를 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뻣뻣한 목을 가볍게 스트레칭한 해영은 그대로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힌 채 손으로 눈 위를 꾹꾹 눌렀다.

차선우를 마지막으로 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이번 주에 온다고 했으니, 곧 돌아올 것이다. 마음이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복잡해진 상태였다. 대체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하지.

답답한 기분에 얼굴을 쓸어내리던 해영은 끝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방 안에 대충 짐을 쓸어 넣은 그가 망설임 없이 도서관을 나섰다. 계속 이런 상태라면, 어차피 몇 시간이고 앉아 있어 봤자 소용없을 게 뻔했으니까.

“아….”

문제는 도서관을 나서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온 후 발생했다. 법학관의 입구로 나온 해영의 입에서 얼빠진 탄식이 새어 나왔다. 툭, 툭 머리 위의 가림막을 맞고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얼굴에 황망함이 어렸다.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줄기는 그다지 세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부주의함을 짧게 탓하고 그냥 빗속을 헤치고 뛰어갈 정도였다.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발길을 뗄 수 있는 딱 그 정도. 그런데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해영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한 채 한숨을 삼켰다.

“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아침부터 엉망인 기분에 해영이 손을 들어 머리칼을 흩뜨렸다. 사실 정확히 따지면, 엊그제 강 실장을 만났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를 만나고 온 뒤부터 그에게 들었던 말이 내내 머리를 맴돌아 해영은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해영은 평소와 다를 거 없이 웃는 낯으로 손님을 받았고, 주문받은 음료를 제조하고, 잠깐 들른 사장님과 아무런 문제 없이 대화도 나눴다.

그는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퇴근하기 직전 유영이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오기 전까지는.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왜?’

‘얼굴이 굳었길래, 고민 있는 거 같아서 물어봤어요.’

그 말을 들은 해영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제 입가를 쓸었다. 온종일 웃었던 입매가 어느새 경직되어 있었다. 잠시 멈칫하던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유영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그녀에게는 그렇게 말했으나 꼬박 하루를 날린 것을 보면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빠르게 뛰어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영이 입술을 물어 실소를 삼켰다.

괜찮을 리가 없지.

강 실장과 나눴던 대화가 아무렇지 않게 남았을 리가 없다. 자신의 선택을 이해한다던 그의 말은 역설적으로 제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조건적으로 따라 주던 차선우를 떠올리게 했다.

아무런 반박도, 의문도 꺼내지 못했던 건 그래서였다. 선우의 이름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지워졌기 때문에.

“…기요.”

눅눅한 생각에 잠겨 허우적대던 해영이 건져 올려진 것은 그때였다.

“저기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고개를 돌린 해영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을 발견했다. 어렴풋이 어떤 목소리를 듣긴 했지만, 자신을 부른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갈팡질팡하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 어깨쯤 오는 키, 살짝 상기된 얼굴. 그녀의 모습을 살피던 해영의 눈에 설핏 난처함이 어렸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네?”

“제가 그,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아까부터 여기 서 계신 거 봤는데요.”

조곤조곤 꺼내던 말은 금세 횡설수설해졌다. 낯선 얼굴이 점차 붉게 익어 가는 것을 보며 해영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우산 없으신 거 같아서요.”

그녀의 눈길이 해영의 빈손에 꽂혔다. 아래로 향한 시선을 따라 제 손을 내려다보았던 해영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먹먹할 정도로 복잡했던 머리는 상대의 말이 품은 뜻을 곧장 해석해내지 못했다.

“괜찮으시면, 이거.”

“…….”

“쓰고 가세요!”

여자는 그를 향해 새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우산을 내밀었다. 괜찮다고 사양할 틈도 없었다. 해영은 불쑥 가슴팍까지 떠밀듯 올라온 우산을 얼떨결에 건네받았다.

내내 쥐고 있었는지, 미지근해진 플라스틱 손잡이가 손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탓에 잠시 멈칫하는 사이 여자는 우산만을 쥐여 준 채 등을 보였다. 뒤늦게 뻗은 손이 허공만 휘젓고는 허탈하게 떨어졌다.

“번호….”

번호라도 알아야 후에 돌려줄 수 있을 거 아닌가.

우산을 내려다보던 해영이 손을 들어 목덜미를 쥐었다. 당황해서인지 빳빳해진 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짧게 헛웃음을 토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고개를 든 해영이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교정을 눈에 담았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도, 먹구름이 낀 탓에 날이 흐렸다. 잠깐 왔다가 지나가는 소나기는 아닌 듯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과 손에 들린 장우산을 번갈아 보던 해영은 결국 우산을 들었다.

타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일에 머뭇거리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러한 생각이 치켜들어 의식적으로 우산을 펼쳤다. 같은 학교 학생인 것 같으니 우산을 돌려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며 가며 마주치게 된다면 사례를 할 수도 있을 테고.

우산을 쥔 해영이 건물을 벗어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산을 두드리던 빗소리에도 상념은 지워지지 않았다. 졸리진 않았지만, 돌아가면 일찍 잠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집으로 향했다.

***

해영아, 나 공항에 도착했어. 너는 뭐 하고 있어?

선우는 화면에 떠오른 대화창을 내려다보며 설핏 미간을 모았다. 보낸 지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답이 없었다.

…보고 싶은데.

슬쩍 테이블 아래로 확인하던 핸드폰을 집어넣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샹들리에의 빛이 머리 위로 기다랗게 드리우고 있었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클래식 선율이 공간의 분위기를 한층 더 묵직하게 만들었다. 그래 봤자, 전부 껍데기만 그럴싸할 뿐이지만.

선우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공간을 둘러보다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대단한 이야기를 할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넓은 홀을 모조리 빌려 버리는 것은 집안 내력이었다. 아버지인지 작은아버지인지 모르겠으나 누가 예약한 거라고 해도 선우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오랜만에 보니까 얼굴이 더 훤해졌는데?”

“삼촌도 좋아 보이세요.”

물로 입을 축이던 선우가 들려온 말에 고개를 들었다. 작은아버지를 보며 예의 바르게 화답하는 입가에 나른한 호선이 걸려 있었다.

“슬슬 본가로 돌아와야지. 언제까지 그런 소꿉장난을 해? 아버지도 참. 안 그래, 형?”

그가 옆에 앉은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소리 없이 조용한 몸짓으로 식사하던 선우의 손이 느려졌다.

식기끼리 부딪치며 생긴 마찰음이 기이하게 새어 나갔다. 신경 쓰지 않으면 듣지 못할 작은 소리였으나 미간을 굳힌 선우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길쭉한 손끝에 걸린 식기가 다시 완벽한 모양새로 그의 손에 쥐어졌다.

업무차 해외 지사에 들렀다가 막 귀국한 길이었다. 선우는 작은아버지에게서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자는 연락을 받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끌려와야 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아직 멀었죠. 배울 게 많이 남았어요.”

조부를 들먹이며 대답하자 상대는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차경이는 벌써 호텔 경영 승계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지켜야 할 선을 모르는 녀석도 아니니.”

내내 말없이 식사하시던 아버지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툭 던져진 말에 테이블은 금세 조용해졌다.

덕분에 조용히 식사를 마친 선우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먼저 일어섰다. 홀에서 빠져나와 위층의 호텔 룸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늦은 시간 걸려 온 전화에 해영인가 싶어 곧장 확인한 선우가 실망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네, 강 실장님. 해영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 …….

전화를 걸어 온 상대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돌아올 말을 기다리는 동안 겉옷을 벗고 짐을 풀었다.

얼마 전 강 실장으로부터 해영이와 만나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저를 놔두고 왜 둘이 만나는 건지 이해도, 짐작도 가지 않았으나, 후에 물으면 되는 일이니 굳이 제재하진 않았다. 이후로 계속 비행기를 타느라 그가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조차 듣지 못한 차였다.

“해영이가 무슨 일로 만나자고 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는 예의를 차리곤 있었으나, 강주혁은 그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 있음을 알았다. 나긋한 어조를 뒤집어쓴 껍데기뿐인 말에 수화기 너머로 다시 한번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대가 한숨을 내쉬거나 말거나 손목에 찬 시계를 풀던 선우가 옷깃에 미약하게 남은 향기를 맡으며 설핏 미소 지었다. 해영이 준 향수는 당연하게도 선물한 이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상쾌하게 시작해 달짝지근함이 남는 향. 자연스레 해영이 생각나 언젠가부터 그것만을 사용해 왔으므로, 선우는 해영이 향수를 선물했을 때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모르고 준 거겠지만…. 아무런 의도 없이 저를 떠올리게 하는 향을 선물하는 것조차 윤해영다웠다.

‘다음 주에 봐, 형.’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해영의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찡그리듯 접히는 눈매와 시원시원하게 올라가는 입매를 떠올리면 목을 조르는 것 같던 답답함도 한결 가시는 듯했다.

차선우는 그날 해영에게 그를 만나기 전 자신이 쓰던 것과 같은 향수를 선물했다.

사용해 봤을까. 곁에 없을 때도 해영이 자신을 떠올려 준다면 기쁠 것 같았다. 아마 내일이면 확인할 수 있겠지. 그런 기대감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던 순간.

- 돈을 주셨습니다. 빚을 갚으시겠다고….

예상하지 못한 말이 부풀어 오르던 기대를 짓밟으며 들이닥쳤다.

***

쾅쾅쾅!

천둥처럼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해영이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대충 저녁을 때우고 일찍 잠들었던 차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으나, 사방이 어두운 걸 보면 못해도 한밤중일 듯했다.

처음에는 천둥이 치는 건 줄 알았는데, 간간이 섞여 드는 초인종 소리에 해영은 그 소리의 근원지가 문가라는 걸 깨달았다.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킨 그가 책상에 올려진 법전을 들고 현관으로 다가섰다. 원룸인 탓에 침실이랄 것도 없어 침대에서 몇 발자국만 떼면 금방 현관이었다.

“누구세요?”

문 앞에 선 해영이 밖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낡은 빌라에는 인터폰도 달리지 않아 밖에 누가 서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금세 잠기운이 가신 목소리는 까칠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어떤 미친놈이 한밤중에 문을 두드려.

문을 노려보던 해영이 법전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법전은 둔기로 쓰기에 문제없을 정도로 두꺼웠다. 특수상해죄와 정당방위 사이의 합법적인 선을 떠올리던 해영이 남은 손으로 문고리를 틀어잡았을 때였다.

“…나야, 선우.”

방음이라곤 되지 않는 철문을 뚫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가라앉기는 했으나, 나지막이 들려온 음성은 분명 선우의 것이 맞았다. 손에서 놓친 법전이 탁,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선우 형?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해영의 낯에 날카로운 기색은 가셨지만, 대신 의아함이 빈자리를 메웠다. 그는 아래로 떨어진 책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오래된 철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 틈으로 비에 젖은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형….”

이 시간에 왜 온 거냐고 물으려던 생각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증발했다. 누가 문을 두드리는 건지 모를 때도 유지하던 이성이 뚝뚝 물기를 떨어트리며 서 있는 선우를 발견하자마자 날아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해영이 그에게 다가서며 현관 밖의 복도를 곁눈질로 살폈다.

찬기가 올라오는 복도 너머로 빗소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초조해진 해영이 다급하게 팔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왜 왔는지, 왜 연락도 하지 않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단지 비를 맞아 젖은 선우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일단…, 일단 들어와. 젖었으니까.”

“…….”

“형?”

안으로 들어오라고 팔을 잡아끌었으나,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그는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의문을 담은 시선이 뒤늦게 선우의 얼굴로 향했다. 흰 뺨은 평소보다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결국 참지 못한 해영이 손에 힘을 줘 선우를 안으로 들였다.

순순히 발을 떼지 않아 제법 힘을 써야만 했다. 평소라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으로 달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선우가 비를 맞은 채 찬기가 올라오는 복도에 서 있는데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쾅! 힘 조절을 못 한 탓에 문이 닫히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해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집 안이라고 해 봤자 그다지 따뜻하진 않았기 때문에, 곧장 보일러를 켠 해영이 뒤를 돌아보곤 멈칫했다.

“…….”

닫힌 문을 등진 선우는 아직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해영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선 그를 보며 설핏 미간을 모으고 있다가, 이내 마른 수건을 꺼내 다가갔다.

“형 지금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일단 씻고 나와. 응?”

“…….”

“다 젖었잖아. 왜 비를 맞고 왔어. 아, 진짜….”

속상하게….

결국, 왈칵 얼굴을 찡그린 해영이 그의 머리 위로 수건을 가져갔다. 당장에라도 젖은 얼굴을 닦아 줄 것만 같던 손길은 허공에서 멈췄다. 잠시 멈칫한 해영은 직접 닦아 주는 대신 선우의 손에 수건을 쥐여 주는 것을 택했다.

“…하.”

말없이 서 있던 선우가 제 손에 들린 수건을 보며 허탈하게 숨을 뱉었다. 헛웃음이라기에는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한숨이었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툭 꺼졌다.

차선우는 아까부터 기이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한 번도 선우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침묵이 길어질수록 가중되는 의아함은 해영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형,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해영아….”

“응.”

사람이 비에 맞으면 목소리도 젖을 수 있는 걸까. 평소의 다정함이나 부드러움 같은 것은 이미 눅눅해진 채, 아주 깊게 가라앉은 음성이 해영을 불러 왔다. 빠르게 답한 해영이 초조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굳어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분명 얼굴을 닦았는데도 선우의 표정은 여전히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물속에 잠긴 사람처럼 희게 질린 낯에 어쩐지 덩달아 숨이 막혔다.

정작 불러 놓고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타닥, 탁,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떠돌았다. 기묘한 침묵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떤 위화감이었다.

해영이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채기도 전에, 굳어 있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차선우는 참아 왔던 숨을 몰아 내쉬듯 말을 꺼냈다.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말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

“…….”

뒤늦게 내뱉어진 사과에 해영의 눈썹이 설핏 치켜 올라갔다.

선우가 뱉은 말은 상황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예의를 차린 사과에 도리어 손이 굳었다. 평소라면 살살 웃는 낯으로 은근슬쩍 들어오거나, 또 친구라는 관계를 내세워 찾아온 명분을 채웠을 것이다. 선이 분명한 관계를 핑계 삼아 여태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나들지 않았나.

불현듯 온몸을 조여 오던 위화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당황한 낯으로 선우를 올려다보던 해영의 입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위화감의 정체는 시선이었다. 선우의 시선. 한 번도 제게서 떨어져 본 적 없던 다정한 시선이 없었다. 윤해영은 그제야 선우가 이곳에 온 후로 한 번도 자신을 마주 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선.

아주 희미했으나 그건 분명 선이었다. 처음으로 그어진 선 앞에서 해영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강 실장 만났다고, 듣고… 정신이 없었어. 전화도 안 받으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말끝이 흐려졌다. 두서없이 횡설수설 새어 나오는 말에 불규칙한 호흡이 섞여 들어갔다.

“내가 강 실장님 만난 것 때문에 온 거야?”

속이 울렁거렸으나 한차례 숨을 고른 후 침착하게 물었다. 선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작은 한숨을 토해 냈다. 비스듬히 자신을 스쳐 지나간 시선은 곧 바닥을 향했다.

저를 피하는 듯한 시선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해영이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선우의 팔을 단단하게 붙잡은 그가 앞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성큼 가까워진 거리에도 차선우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형. 나 좀 봐 봐.”

입술을 짓씹던 해영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자신을 향하지 않은 시선, 굳게 다문 입술. 저를 피하는 선우가 지나치게 낯설었고 동시에 기묘했다. 처음 맞이하는 상황에 덜컥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선우 형…!”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이었다. 건드리면 안 된다는 예감에도 불구하고 해영은 무언가에 쫓기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랬어?”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서러움으로 얼룩진 음울한 목소리에 해영의 몸이 굳었다.

“나는… 친구니 뭐니, 고작 그런 관계로 남자고 했을 때도… 네가 날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나직하게 떨어진 젖은 목소리는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있었다.

“너도 내 곁에 있고 싶었던 거, 아니야?”

“…….”

“이러려고 내 옆에 있겠다고 했어? 그 돈 갚으려고?”

몰아치는 물음은 그가 침착하지 못한 상태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으나, 해영은 지금 선우가 화가 난 상태임을 눈치챘다. 아니, 분노보다는 원망에 가까운 질척한 감정이 발목을 잡아 왔다.

“다 갚으면. 그때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감정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해영에게로 다시금 물음이 날아왔다.

“떠나려고?”

“그런 게 아니라, 형.”

“아니면 왜…. 왜 그 돈을 줬어. 그러고 연락도 안 되면, 내가 뭐라고 받아들여야 해.”

힘없는 목소리가 난도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형편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말끝에 담긴 실소에서 그가 얼마나 몰렸는지 느껴졌다. 해영은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 제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오해를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신이 강 실장을 통해 돈을 준 건, 단순히 빚을 갚기 위해서임을 말해야 했다. 나아가 빚을 청산하고자 하는 이유가 선우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앞에서 떳떳하기 위함임을 말해야 했다.

차근차근 말하면 그 또한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줘. 나는 그냥 형한테 빚을 갚으려는 것뿐이었어.”

침착하게 꺼낸 말에 차선우는 도리어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집으로 찾아온 후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했다. 서늘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짙은 눈동자는 열기가 어려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열기를 이기지 못한 채 흔들리는 눈동자는 언뜻 금이 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빚?”

말끝이 떨리고 있었다. 사형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차선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단어를 곱씹었다.

“빚이라고, 해영아.”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은 채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왜 화를 내는지 몰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달래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해영이 설핏 굳은 얼굴로 할 말을 고르는 사이, 고개를 든 그가 메마른 낯으로 힘없이 웃었다.

“내가 너한테 갚으라고 한 적 있어?”

“…뭐?”

선우의 팔을 쥐고 있던 해영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어두운 집 안, 여전히 차가운 공기, 창을 두들기는 빗소리와 불규칙한 호흡을 내쉬는 차선우. 시야에 가득 찬 모든 것이 단숨에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툭,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올랐다.

갚으라고 한 적 있냐고? 물론 없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아빠에게 돈을 줬듯이, 차선우는 준 돈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없었다. 애초에 제가 갚길 바라고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호의로, 그저 제가 힘들지 않았으면 해서.

근데… 그래서?

선우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꽉 주먹을 쥐었다. 희게 질릴 정도로 말아 쥔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뒤틀린 입술 사이로 실소 같은 한숨을 내뱉은 해영이 제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트렸다. 신경질적인 손길을 닮은 시선이 선우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럼? 형이 우리 아빠한테 돈 준 걸, 끝까지 모르는 척하고 있을까? 아니면 염치도 없이 고맙다고 하고 말까?”

순간 열이 올라 눈앞이 흔들렸다. 당장 풀어야 할 오해가 있다는 걸 알지만, 선우의 말을 듣자마자 이성이 날아간 것 같았다.

“나야말로…!”

마구잡이로 말을 짓씹던 찰나 그는 급하게 이를 악물어 참았다. 나야말로, 뭐? 생각에 앞서 꺼내려던 말을 뒤늦게 떠올린 해영의 얼굴이 차츰 질려 갔다.

‘나야말로, 형한테 돈 달라고 한 적 없어.’

하려던 말은 그거였다. 주먹을 쥐느라 과한 힘이 실려 있던 어깨가 한순간에 맥없이 늘어졌다. 하면 안 되는 말까지 감정에 앞서 꺼낼 뻔했다. 해영은 자신이 감정에 휩쓸렸다는 걸 자각했음에도 어떻게 이 불씨를 꺼트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마워할 필요도,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어.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해.”

“…….”

“제발, 해영아.”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가 그런 해영을 불러왔다.

“내 옆에만 있어 줘. 내가 원하는 건 그거밖에 없어. 너… 하나밖에 없다고.”

간절함을 넘어 맹목적이기까지 한 말에 열기가 어려 있었다. 해영은 피로한 듯 여전히 창백한 낯을 하고 있는 선우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짓씹다가, 떨리는 숨을 뱉었다. 손을 들어 눈 위를 가린 그가 빠르게 뛰는 호흡을 가다듬고자 노력했다.

비참했다.

그간 한 번도 싸운 적 없던 선우와 이렇게 부딪치고 있는 것도, 서로의 상처를 긁어내다 못해 손을 집어넣어 진창으로 헤집고 있는 상황도. 이런 순간에서조차 그에게 거리감을 느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부 해영을 지치게 만들었다.

“형한테 짐만 되는데 내가 어떻게 형 옆에 서. 내가, 무슨 자존심도 없는 사람 같아?”

무겁게 열린 입술 사이로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스듬히 고개를 든 해영의 눈에 선우의 일그러진 표정이 담겼다. 차선우는 한참을 입을 달싹이며 주저하다 끝내 되물었다.

“…그게 중요해?”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어린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자꾸만 무언가가 어긋나고 맞부딪쳐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휙 선우에게서 등을 돌린 해영이 성마른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움직임을 집요하게 좇는 시선 때문일까. 머리를 식히고자 좁은 집을 서성거려도, 조금도 침착할 수 없었다. 다만 해영은 지금의 상황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도, 자신도 너무 지쳐 있던 탓이다. 끝나 버린 관계를 어떻게든 다시 엮어 보겠다고 나섰던 모든 시도가 쌓여 누적된 피로감으로 되돌아왔다. 여태 서로 모르는 척하며 문제를 덮어 왔지만, 이제는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이 불었다. 지금의 대화는 그저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었다.

초조한 걸음으로 집 안을 배회하던 해영이 결국 선우의 앞으로 다가섰다.

“여기까지만 하자…. 지금은 우리 둘 다 진정할 필요가 있는 거 같아.”

대화가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쳐져 있었다.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토해 내는 감정은 결국 서로를 상처입힐 뿐이다. 홧김에 말을 내뱉었다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까 두려웠다.

차갑게 굳은 손끝을 꾹 쥔 해영은 시선을 들어 선우를 주시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젖은 몸은 여전히 서늘했고, 희게 질린 낯은 갈수록 창백해지기만 했다. 이런 선우에게 나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나가 있을 테니까, 형은 씻고 가.”

말을 마친 해영이 입을 다문 채 대충 슬리퍼에 발을 욱여넣었다. 현관 옆에 있는 우산을 집어 들고 선우를 지나쳐 문을 열었을 때였다.

“잠시만, 해영아.”

숨을 들이켠 선우가 다급하게 해영의 팔을 쥐었다. 반동으로 몸이 뒤로 쏠릴 정도로 거센 악력에 해영이 순간 잡히지 않은 팔을 뒤로 뻗었다. 제가 쥐고도 놀란 듯 선우의 손에서 금세 힘이 풀렸으나, 해영의 팔은 이미 휘둘러진 후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내동댕이쳐진 우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

거친 숨소리조차 아득히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해영은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었고, 선우 또한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간 채로 굳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차선우는 느릿느릿하게 손등으로 맞은 뺨을 가볍게 쓸었다.

“미안…, 형, 미안해.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알아. 나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거잖아. 네가 미안해할 거 없어.”

이전보다 담담한 목소리에 왜인지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가 나갈게. 지금 밖에 비 와서 추워.”

선우는 놀란 적 없다는 듯 금세 차분해진 어조로 도리어 해영을 달랬다. 본인은 비를 쫄딱 맞고 온 주제에, 이 와중에 제가 추울 걸 걱정하는 차선우 때문에 몸에서 힘이 풀렸다.

그걸 아는 사람이 우산도 없이 빗속을 가로질러 와? 울컥하는 마음이 앞서 눈앞이 흐려졌다. 대충 눈가를 문지르는 사이 문이 열렸다. 문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 해영의 시야에 집을 나서는 등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곧게만 보였던 등이 오늘따라 쓰라리게 박혀 들었다. 차분하게 돌아섰지만, 그가 멀쩡하지 않다는 건 해영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

선우에게 상처를 주려던 게 결코 아니었다. 자신에게 늘 귀한 마음만 내어 주었던 선우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해영은 그에게 제가 받았던 따뜻함을 돌려주고 싶었다.

문제는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어도 가진 게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게 자꾸만 발목을 잡아 왔다. 언젠가는 제 발목만이 아닌 선우의 발목까지 붙잡게 될까, 그게 두려웠다.

거칠게 머리를 헤집던 해영이 급하게 문고리를 잡았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보다, 당장 차선우가 우산도 없이 젖은 채 다시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그는 재고 따질 것도 없이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을 나선 해영은 빌라의 가파른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아직 빌라에서 멀어지지 않은 선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형. 선우 형!”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빗속을 가로지르며 다가간 해영이 선우의 팔을 잡은 채 안으로 끌었다.

꾸역꾸역 그를 끌고 들어와 빌라 지붕 아래에 선 윤해영은 선우의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 냈다. 물론 소용은 없었다. 지붕에 맞으면서 부서진 빗방울들이 연신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튀어 올랐다. 해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젖었잖아. 우산도 없이 어딜 가려고….”

“…….”

“일단 들어와서 씻고, 그러고 다시 얘기하자.”

“나랑… 얘기하고 싶긴 해?”

낮은 음성이 빗소리를 뚫고 해영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선우를 달래며 연신 옷을 털어 내던 손길이 멈췄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해영에게서 차선우는 뒷걸음질 치듯 한 발짝 물러섰다.

손을 들어 그는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멀찍이 선 가로등 불빛에 비친 얼굴이 물기로 얼룩져 있었다. 차선우는 꺼낸 말을 후회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미안해, 해영아. 지금 말이 자꾸… 모질게 나와서.”

무력하게 나온 사과에 해영의 입이 벌어졌다.

“왜… 형이 사과해.”

지친 듯한 얼굴이 너무나도 추워 보였다. 정작 비가 내리는 쌀쌀한 밤에 겉옷 하나 입지 않고 허겁지겁 뛰어나온 건 해영인데도,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는 쪽이 더 추워 보이는 건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힘없이 떨어진 입술 사이로 젖은 말들이 토해졌다.

“너한테 좋은 것만 주고 싶어. 좋아하는 것만 하게 해 주고 싶고, 내 옆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랬어.”

“…….”

“근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날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 봐….”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차선우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무서워.”

속삭이듯 작게 짓씹어진 말과 함께 긴 속눈썹에 잔뜩 엉켜 있던 물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멈춰 있던 해영의 팔도 아래로 무겁게 추락했다.

가장 약한 부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선우의 모습에서, 자신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하던 얼굴이 순간 겹쳐 보였다. 불씨라도 삼킨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형한테 짐만 되는데 내가 어떻게 형 옆에 서. 내가, 무슨 자존심도 없는 사람 같아?’

‘…그게 중요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해영은 그의 곁에 남기로 하면서 접었다고 생각했던 자존심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고, 차선우는 단 한 번도 자존심이 중요했던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자존심 정도야 내려놓으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끝까지 하지 못한 건, 가진 게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고작이라고 할 자존심은 집이 망했을 때도, 하진의 집에 얹혀살 때도, 무너질 뻔한 순간순간 해영을 번번이 일으키고 앞을 바라보게 하던 동력이었다.

가진 게 그것밖에 없어 끝까지 놓을 수가 없었다. 선우의 곁에 남겠다고 결심한 순간 접었다고 생각했으나 여태 버리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나 좀 봐주면 안 돼? 해영아… 제발 한 번만 봐줘.”

중얼거림에 가까운 속삭임이었으나 어지러운 빗속에서도 해영의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뚝뚝 떨어지며 그의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바라보던 해영이 왈칵 얼굴을 찌푸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삽시에 눈앞이 흐려졌다. 뿌연 시야 속에서 윤해영은 주저 없이 팔을 뻗어 선우를 끌어안았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으나 놓을 수는 없었다. 선우를 혼자 울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차선우는 순순히 안겼다. 해영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는 목이 멘 듯 한없이 눅눅한 목소리를 흘렸다.

“네가 날 버린다고 생각하면, 죽을 거 같아….”

서러움이 가득한 말은 여기저기 지친 기색이 묻어 너덜너덜했다. 결국 해영의 입에서도 울음이 터졌다.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입술을 잔뜩 짓씹으며 선우를 안은 팔에 꽉 힘을 주었다.

서로에게 상처 주던 지난했던 겨울. 그동안 쌓여 왔던 것들이 기어코 한계선을 넘으며 쏟아졌다. 멈추지 않고 내리는 빗줄기에 쓸려 내려가길 바라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

화장실 문은 작게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끓인 물을 컵에 따르던 해영이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씻고 나온 선우와 정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

아까까지만 해도 목소리를 높여 가며 싸웠던 탓에 분위기가 아무렇지만은 않았다. 해영은 말없이 선우를 눈으로 훑었다. 씻고 나와서일까. 여전히 누가 봐도 운 것 같은 얼굴이긴 했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멀쩡해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보다 한 치수 크게 입는 걸 고려해 가진 옷 중에서 넉넉하게 큰 것들을 줬는데, 묘할 정도로 선우에게 딱 들어맞는다. 물기 하나 없이 마른 옷들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해영은 유일하게 젖어 있는 머리를 올려다보며 멋쩍음을 감춘 채 말했다.

“머리도 말려야지….”

일단 말을 뱉고 나서야 뒤늦게 욕실 안에 드라이어가 없다는 게 기억났다. 아차 싶은 얼굴을 한 그가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선우를 향해 눈짓했다.

“형, 일단 앉아서 이거 마시고 있어.”

해영은 책상 겸 식탁으로 사용하는 작은 테이블 앞에 선우를 앉힌 뒤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드라이어는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아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씻었는데,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머리를 말리다 그대로 드라이어를 들고나왔던 것이다.

드라이어를 들고 다시 선우에게로 몸을 돌렸던 해영이 잠시 멈칫했다. 차선우는 컵을 쥔 채 마실 생각은 안 하고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간 그와 눈을 맞추고 있던 해영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섰다. 많이 안정된 상태였지만, 짙은 눈동자에 서린 불안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마시라니까 왜 쥐고만 있어.”

“뜨거워서….”

그의 입에서 나직하게 나온 변명에 헛웃음이 샜다. 드라이어를 쥔 해영이 선우의 앞에 섰다. 저를 마주 보고 선 해영을 올려다보며 선우가 들고 있던 컵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버튼을 누르자 따뜻한 바람이 손바닥 위로 쏟아졌다. 너무 뜨겁지 않은 바람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해영이 선우의 머리 위로 드라이어를 가져갔다.

약하지 않은 바람에 젖은 머리칼이 위로 붕 떠 올랐다. 해영이 당연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손으로 헤집으며 말려 주는 동안,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침묵 속에서 유일한 소음이던 드라이어 소리가 멈췄을 때였다.

“…해영아.”

조심스럽게 입을 연 선우가 손을 뻗었다. 자연스레 해영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자신이 어디 도망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허리춤의 옷자락을 꾹 쥐어 오는 손길에 잇새로 침음이 흘렀다.

팔도 아니고 고작 옷자락을 잡아 오는 몸짓에서 그가 느끼고 있을 거리감이 보였다. 괜스레 또 눈가로 확 열이 오르려는 찰나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래도 우리가 친구야?”

끝까지 모르는 척할 수 없는 질문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조곤조곤한 물음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물음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었으나 그건 애매해진 관계를 확실히 하려는 확인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차선우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한밤중에 빗속에서 한참을 서 있던 동안, 자신도 그도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해영이 허공에 애매하게 멈춘 손을 쥐락펴락하며 할 말을 골랐다. 선우의 앞에서 자존심을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남은 자존심을 붙잡고 있었음을 깨달은 차였다. 알게 된 후에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그가 선우의 발개진 눈가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차선우는 차가운 손끝이 부은 살결 위와 닿을 때마다 움칠 눈을 떨면서도 해영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집요할 정도로 올곧은 시선이 다시 한 사람에게 단단히 고정됐다.

“무슨 소리야.”

“…….”

“내가 친구 머리를 왜 말려 줘.”

삐딱한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이어졌다.

“차선우니까 해 주는 거지.”

평범한 형, 동생 사이에 이러고 있을 리가. 그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좁은 테이블 위로 드라이어를 내려놓았다. 덤덤한 얼굴을 가장하던 것이 깨지고, 안 그래도 붉은 선우의 눈시울이 다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설핏 미간을 찌푸린 해영이 끝내 손으로 그의 눈 위를 덮었다.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선우의 눈이 일렁이는 것만 봐도 늑골 안쪽에 찌르르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가 우는 걸 보면 또 같이 울게 될 것이다.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 어떡해.”

“안 울게….”

“우는 거 같은데?”

손바닥에 점차 묻어나오는 물기를 느끼며 해영이 작게 웃었다. 손으로 눈을 가린 탓에 드러난 것은 입가뿐이었다. 자신의 손 아래로 보이는 입꼬리가 미세하게 설핏 올라갔다.

안 그래도 좁은 집은 고작 한 사람이 더 있을 뿐인데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집에 온기가 돌아서인지도 모른다. 좁아도 늘 한적하다 느꼈던 공간이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져, 해영은 허탈한 눈으로 선우의 입매를 주시했다.

잠깐의 침묵은 순식간에 깨졌다.

“안아 줘.”

억누르던 마음을 참지 못한 듯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선우의 눈 위를 덮고 있던 해영의 손이 떨어졌다.

가리던 손이 내려가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늘 다정한 빛을 띠던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우울했고, 처연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또렷하게 자신만을 주시하는 시선을 마주한 해영이 훅 일렁이는 속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안아 줘, 해영아.”

이전보다 한층 더 열감이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그를 마주한 상태에서 윤해영은 뭐가 맞는지를 따진 채 행동할 수 없었다. 차선우는 그가 이성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줄곧.

선우를 향해 뻗은 팔이 그의 목과 어깨를 끌어안았다. 앉아 있던 선우는 그대로 해영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씻었다고 해도 한참 비를 맞느라 몸이 식었을 텐데, 얼굴이고 목이고 할 것 없이 살갗이 닿은 곳마다 후끈거렸다.

목덜미를 감싼 손을 올려 선우의 머리를 쓸었다. 해영은 그의 호흡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

“응.”

“선우 형.”

“…응.”

“미안해.”

허리를 죄고 있던 팔에 그 순간 꽉 힘이 들어갔다. 복부에 가해진 압박에 해영이 윽, 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그가 해영을 잡은 팔에 힘을 풀며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에 원망스러운 기색이 스쳐 갔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라니까.”

“그래도 미안해. 나 진짜 형 울리기 싫었거든. 근데….”

해영은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돼서 미안해.”

“윤해영.”

방금까지 나른했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어떤 상황에서든 해영아, 라고 부르지 한 번도 먼저 성까지 붙인 이름을 불러 온 적 없던 차선우였다. 화났나? 굳은 얼굴을 바라보던 해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가를 허물며 웃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건 전데, 눈이 마주친 그는 도리어 자신이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 옆에 있기에 내가 초라하게 느껴져서 도망쳤어. 내가 너무 못나서.”

“그런 말 하지 마.”

“형한테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그래도 괜찮아?”

선우가 어떤 말을 꺼낼지 알고 있었다. 해영은 그래도 확인받고 싶었다. 그의 앞에서 무너진 자존감을 수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왜 없어, 해영아.”

차선우는 그런 해영의 망설임을 부술 만큼 단단한 목소리를 꺼냈다. 한없이 다정하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애정이 서린 목소리를.

“너를 줘.”

“…….”

“나도 내 모든 걸 줄게.”

어쩔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해영이 입술을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기껏 멈춘 설움이 다시 터질 것만 같았다. 선우를 끌어안고 그에게 무너지듯 기댄 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듯, 선우가 가만히 그의 등을 토닥였다.

곧 밤을 덮고 누운 두 사람은 투둑, 툭 창을 두드리는 비를 피해 서로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매달릴 구석이 서로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해영은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선우의 머리를 감쌌고, 선우는 부쩍 마른 해영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밀착했다. 그렇게 견고하게 껴안고 나서야 두 사람은 조금, 아주 조금 안도한 채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어둠 속 가득 들어찬 정적을 메우는 건 얕은 숨소리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그 고요를 비집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꾹 다문 채로도 숨기지 못한 웃음이 공기의 무게를 덜어 냈다. 한층 무뎌진 분위기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열어 마음에 쌓아 뒀던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근데 내가 하진 누나 프로그램 나가는 건 어떻게 알았어, 하고 물으면 차선우는 주저하다 느릿하게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을 리 없잖아, 하고 답했다. 그 말에 해영이 실소가 밴 목소리를 씹듯이 흘렸다.

형… 나 감시해? 기가 찬 목소리였으나 선우는 그저 웃음을 삼키며 해영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이제는 그래도 도망칠 수 없다는 듯이. 그러면 해영은 치미는 의문을 뒤로한 채 그를 토닥여 줄 수밖에 없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직 남은 불완전한 평온이었다. 알고 있는데도 이전처럼 춥지만은 않았다. 겨울이 너무 추웠으므로 당장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당장은.

***

부스스 눈을 뜨자 엷은 햇볕이 시야에 가득 찼다. 순간 눈이 시려 온 탓에 해영은 다시 질끈 눈을 감아야만 했다.

‘…몇 시지.’

그는 눈도 다 뜨지 못한 채 침대맡에 있는 핸드폰을 집었다. 잠금 화면에 표시된 시계는 이미 해가 뜨고도 남았을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SNS 알림들이 쌓여 있었다.

그중 단연코 가장 눈에 띄는 알림은 선우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였다. 어젯밤 자느라 전화를 받지 못하자 계속 걸었던 모양이다. 해영은 미친놈같이 쌓인 부재중 전화를 잠시 바라보다 핸드폰을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깊게 생각해 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어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둘 다 피차일반이었으니까. 간단히 생각을 정리한 해영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다.

“…….”

상체를 반쯤 일으킨 탓에 몸 위에 올라가 있던 팔이 스륵 아래로 떨어졌다. 그 옆으로 누워 있는 선우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하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니 문득 어젯밤 그와 다퉜던 게 꿈처럼 느껴졌다.

‘어제 그렇게 울었는데도 예쁜 게 말이 되나.’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해영이 한숨을 삼켰다.

나란히 자면 될 걸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잔 탓에 차선우는 어중간한 위치에 누워 있었다. 일어나면 머리가 부스스해지는 저와 달리 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가마조차 가지런한 머리를 바라보던 해영이 손을 뻗어 베개를 잡았다. 그러곤 선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그 아래로 베개를 살살 밀어 넣었다.

곤히 눈 감고 있는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던 해영은 혹여나 선우가 깰까 숨을 죽인 채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좁은 집은 어디든 몇 발짝 떼지 않고도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곧장 작은 냉장고를 열며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먹을 게 하나도 없네.”

냉장고 안으로 고개를 박고 샅샅이 살펴봐도 먹을 건 없었다. 생수 몇 통, 편의점에서 산 김치, 소분한 밥과 맥주 두 캔이 고작이었다. 황량한 냉장고 안을 바라보던 해영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 대체 뭘 먹고 살았던 거지?

최근에는 그다지 식욕도 안 돌아서 대충 컵라면이나 김밥 같은 거로 끼니를 때운 게 문제였을 것이다. 해 먹질 않는데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게 있을 리가.

“하….”

짧게 한숨을 내뱉은 해영이 몸을 일으키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나가서 뭐라도 먹을 걸 사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차선우한테 컵라면 같은 거나 먹일 순 없었으니까.

의자 등받이에 걸린 검은색 후드 집업을 걸친 그가 책상 위에 있던 포스트잇과 검은 플러스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펜 뚜껑이 열렸다.

해영은 펜 뚜껑을 이 사이에 문 채 짧게 쪽지를 휘갈겼다.

아침만 사서 금방 올게

아침잠이 많은 편이 아니니 곧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일어나서 제가 없는 걸 보면 차선우 성격에 놀라지 않을 리가 없다. 해영은 적은 포스트잇을 잠든 선우의 머리맡에 내려 둔 채 현관으로 향했다.

철컥, 잠금장치를 푼 그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최대한 살살 밀었는데도 낡은 철문이 미세하게 끼익거리는 소리를 냈다. 집을 나선 해영은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서며 하품했다.

밤새 차선우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걸핏하면 해영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줘 옷을 잔뜩 구기거나, 고개를 들어 해영의 얼굴을 직접 확인한 후에야 다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기어코 확인해야만 안도한 듯 잠잠해지는 숨소리가 애틋해 해영 또한 덩달아 쉽게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

‘이제 좀 자. 내일 출근 안 해?’

걱정스러운 물음에 차선우는 피로가 묻은 목소리로 나긋하게 대답했다.

‘응, 안 해….’

‘…형. 그렇게 멋대로 굴어도….’

안 잘리겠지. 달싹이던 입이 일자를 그리며 닫혔다. 확실히 안 잘릴 것이다. 선우의 출근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은 해영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듯 헤집었다. 그렇더라도 어서 자라는 뜻이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창밖이 어슴푸레하게 변해 갈 때까지 뒤척였다. 그나마 자신은 좀 자다 일어났다지만, 선우는 피곤할 게 분명한데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속이 편한 게 좋을 텐데. 한식… 따뜻한 거….’

낡은 빌라를 나선 해영이 상가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며 눈을 굴렸다. 물웅덩이가 고인 곳이 많아 발을 디딜 때마다 연신 철퍼덕 소리가 났다.

두리번거리며 걷던 해영의 눈에 프랜차이즈 설렁탕집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봤던 것 중에선 가장 간편하고 무난한 메뉴였다. 순식간에 고민을 끝낸 그가 발길을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마친 해영이 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이름이 프린팅된 봉투에 포장된 음식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생글 웃는 얼굴로 포장된 설렁탕을 받아 든 그가 가게를 나섰다.

무의식중에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하던 와중이었다. 해영이 골목 모퉁이를 돌며 멈춰 섰다. 자취방이 있는 빌라가 시야에 들어왔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선우도 그 위로 덧그려졌다.

‘이래도 우리가 친구야?’

해영은 비스듬히 선 채로 어젯밤 선우가 건넸던 물음을 천천히 곱씹었다. 친구…. 공허한 단어를 되짚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뱄다.

이제는 더 중요한 것이 뭔지 알고 있다. 어설픈 친구 흉내로 그의 곁에 남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그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보인 두려움 앞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후.”

참아 왔던 숨을 가볍게 토해 낸 해영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저하듯 멈춰 있던 발이 다시 성큼성큼 앞으로 뻗어 나갔다.

***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한 달 동안 해영은 선우와의 관계를 숱하게 곱씹었다. 곱씹던 의문들의 종착지는 늘 과거에 머물렀다. 모든 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끈질기게 그를 벼랑으로 내몰았던 고민은 어젯밤 해영이 자존심을 내버린 순간 사그라들었다.

지금 해영이 원하는 것은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선우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으니 과거보다 더 나아져야 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해영은 집에서 나오기 직전까지 봤던 선우의 모습을 머릿속 한편으로 밀어 두었다.

“오빠, 오늘 도서관 안 나왔죠.”

닦은 컵을 내려 두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유영이 살짝 찡그린 얼굴로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어, 아침에 일이 있어서. 무슨 일 있었어?”

“배경수 때문에요.”

“배경수….”

그 이름을 짓씹는 목소리에선 경수를 향한 지긋지긋함까지 느껴졌다. 해영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샜다.

그는 이전에 여러 번 유영에게 말 편히 해 주면 안 되겠냐 물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선배한테는 존댓말이 더 편하다며 극구 거부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선배라는 호칭까지 떼 버린 채 냅다 튀어나온 이름이 웃겼다.

“그 형이 왜?”

“오늘도 점심 같이 먹자고 해서 선약 있다고 했거든요. 근데 누구랑 먹냐고 꼬치꼬치 캐물어서… 아, 진짜 싫어요.”

팍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긴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 나랑 먹는다고 하지 그랬어.”

“…진짜 그래도 돼요? 오빠 안 곤란해요? 아까는 알바 핑계 대고 겨우 도망쳤어요.”

속닥이던 유영의 얼굴에 울적한 기색이 어리는 것을 보며 해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라앉은 얼굴을 보니 함께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눈썹 위를 매만지던 그가 이내 담백하게 대답했다.

“상관없어.”

그때, 열린 문틈으로 훅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선 것을 확인한 해영이 카운터로 다가갔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안녕, 해영아.”

절대 헷갈릴 수 없는 목소리가 귀에 박혀 들었다. 번쩍 고개를 든 해영이 자신을 보며 웃는 선우를 마주하고 침음을 삼켰다.

“…형.”

해영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그새 씻었는지 선우는 아침보다 한결 더 멀끔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기 그지없는 꼴로 웃고 있는 걸 보니 어쩐지 속이 들끓었다.

…분명 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형 어차피 이제 집에도 가 봐야 하잖아. 카페로 오지 말고, 일 끝나고 만나.’

‘…….’

‘오지 마, 형. 착하지?’

집에서 나오기 전, 그는 선우에게 다가가 머리를 쓸어 주며 말했다. 차선우는 그런 해영을 말없이 들여다보다, 이내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데리러 가는 건. 그 정도는 돼?’

지나치게 다정해서 도리어 거절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애 어르는 듯한 태도에도 아무런 반발 없이 웃더니….

“이게 데리러 오신 건가 봐요. 퇴근까지 2시간 남았는데.”

“네,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웃으며 예의 바른 어조로 비꼬는 해영을 향해 선우가 사근사근 대꾸했다. 그의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주변이 단숨에 화사해지는 듯한 미소에 해영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하여간 말 안 듣지.”

“얌전히 있을게.”

“형, 우리 너무 종일 보는 거 같단 생각 안 들어?”

“전혀…. 나 어제 귀국했어, 해영아.”

선우가 낮게 웃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별수 없이 주문을 받은 해영이 커피 한 잔을 빠르게 내려 선우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고 바로 몸을 돌리던 그는 불현듯 제 손끝을 잡아 오는 손길에 멈춰 섰다. 밖에 있다 와서인지 서늘한 손이 누구의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고개를 돌린 해영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단정한 시선과 맞닥뜨렸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하면 나가 있을게.”

“형.”

제 표정을 살피는 시선이 간지러웠다. 곤란한 듯한 얼굴로 눈썹 위를 만지작거리던 해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무릎을 굽혔다. 단숨에 눈높이가 낮아졌다. 쪼그리듯 앉은 그가 선우가 앉은 테이블 위로 팔을 걸친 채 고개를 들었다.

해영은 그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생각을 정리하기 어려웠고, 또….

할 말을 고르던 해영이 한숨을 흘리듯 웃었다.

“안 불편해. 그러니까 여기 있어.”

“…….”

“이따 봐.”

속삭이는 듯한 인사와 함께 그가 몸을 일으켜 다시 계산대로 향했다. 혼자 일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었다.

일하다가도 문득 선우가 있는 쪽으로 시선이 향할 때가 있었다. 차선우는 눈이 마주칠 때면 기다렸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의 눈매가 접히면서 입가에 사르륵 미소가 걸릴 때마다, 카페 안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그를 힐끔거리는 것을 눈에 담으며 해영이 작게 혀를 찼다.

‘오지 말라니까 진짜.’

웃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시선이 가는데, 웃을 때면 눈 녹듯 따스해지는 분위기가 속을 수런수런하게 했다.

답답한 마음에 입가를 쓸어내리던 해영은 누군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포스기 앞에 서 있는 유영이 보였다.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만들 생각으로 그가 기대어 서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멀쩡히 주문을 받는 줄 알았던 유영이 억눌린 목소리를 흘린 것은 그때였다. 다시 휙 고개를 돌린 해영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그만 좀 하세요, 선배님. 저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요.”

“박유영, 너는 내가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왜 그런 거짓말까지 하냐?”

주문대 앞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배경수였다. 입가에 뒤틀린 미소를 건 경수를 바라보는 해영의 눈에 순간 경멸이 스쳤다.

“거짓말 아니에요.”

“그럼 누군데? 너 만나는 사람 없는 거 다 아는데.”

끈질긴 새끼. 짧은 한숨을 토해 낸 해영이 유영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대충 경수를 상대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유영은 제게로 다가오는 해영을 발견하곤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해영 오빠요.”

“윤해영?”

…나? 두 사람 사이에 낀 해영이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경수의 주름 잡힌 미간이 시야에 들어와 박혔다. 미심쩍어하는 얼굴을 보니 그가 얼핏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게 티가 났다. 진짜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받은 해영의 입이 저도 모르게 슬쩍 벌어졌다.

유영의 상황이 곤란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평소 같았다면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맞춰 줬을 것이다. 여기서 맞춰 준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해영이 순간적으로 선우가 앉아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쩍 눈길을 돌리자마자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이 마주치자 차선우는 생긋 눈을 접으며 웃었다.

짙게 여운을 남기는 부드러운 미소에 해영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눈웃음을 짓는 걸 보자 짧았던 고민이 일단락됐다. 차선우는 눈치가 빠른 편이니 이미 상황을 이해했으리라.

“형, 저 보러 왔어요?”

그는 부쩍 가까이 다가와 씩 웃으며 말을 붙였다. 그런 해영을 보며 경수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여기서 일해?”

“네, 좀 됐어요. 나 보러 온 거 아니면 그냥 지나가다가 들른 건가? 뭐 마시려고요?”

“나는….”

해영의 말에 설핏 눈살을 구겼던 경수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그냥 지나가다 들른 게 아니라 유영이를 보러 온 거라거나, 뭐 그런 말이겠지. 제 입으로 말하기에도 걸리는 게 있었는지 입을 다문 경수를 보며 해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메리카노 한 잔 줘.”

“따뜻한 거, 아님 아이스?”

꾸역꾸역 꺼내진 말에 해영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빙글 웃으며 되물었다. 아이스로 달라는 경수의 대답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건네받았다.

“근데 지금 빈자리가 없어서요. 테이크아웃 잔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손님.”

포스기를 몇 번 누르는 것으로 빠르게 주문을 마친 그는 경수에게 영수증과 함께 카드를 돌려주었다. 아메리카노가 적힌 주문서는 유영의 손으로 넘어갔다. 커피를 내리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경수의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굳었다.

“너희 둘이 만나냐?”

“유영이랑요?”

포스기 앞을 지키던 해영이 경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피하고 싶었던 화제가 되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공공연하게 물어볼 줄은…. 골 때리는 상황에 말없이 웃던 해영이 힐끔 샷을 내리는 유영을 곁눈질로 살폈다.

“요즘 거의 매일 만나고 있죠.”

그가 진열장을 짚은 팔에 턱을 걸치며 대답했다. 프로그램 촬영이 끝난 후 주 6일을 아르바이트에 쏟고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인데, 혼자 알아서 상상을 끝냈는지 배경수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야, 씨….”

짜증 난 기색을 잇새로 곧이곧대로 흘린 경수가 해영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카운터에 상체를 기대 제게 붙어 오는 경수를 내려다보며 해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진작 말 안 했냐?”

“뭐를요.”

“나한테는 둘이 안 사귄다면서. 저번에 만나러 간다는 사람도 박유영이었어?”

저번에 만나러 간다던 사람? 경수가 짓씹듯 뱉은 속삭임에 해영이 눈가를 찡그리며 머릿속을 뒤졌다.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금세 손끝에 걸렸다. 아마 그와 같이 당구장에 갔던 날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만난 건, 선우 형이었는데.’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해영이 눈썹 위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언제요? 거의 매일 봐서 언제인지 기억 안 나는데….”

그가 평이한 어조로 뱉은 말에 경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묘한 낯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경수를 향해 해영이 왜 그러냐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아메리카노는 제조가 간편한 덕에 빠르게 준비됐다. 그는 유영이 가져온 커피 잔을 건네받아 진열대 위로 올려 두었다. 컵 홀더와 빨대까지 꺼내 가지런히 내민 그가 경수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형, 여기요. 학교에서 봐요.”

“…야.”

“다음에 또 오면 서비스 드릴게요. 저 유영이랑 같은 타임이거든요.”

턱을 설핏 든 채 실실거리는 해영을 경수가 눈에 힘을 준 채 바라보았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그의 눈빛에 해영이 무슨 일이 있냐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제야 경수는 한숨을 토하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딸랑, 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흔들린 도어 벨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유리창 너머로 멀어지는 경수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해영이 휙 고개를 돌렸다.

“유영아, 사장님한테 전화해 볼까?”

“왜요?”

“문 앞에 소금 쳐도 되냐고 물어보게.”

제가 곤란하게 한 건 아닌지 해영의 눈치를 살피던 유영은 뜬금없는 말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도 곧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금 환해진 얼굴을 보며 해영도 가벼운 얼굴로 피식피식 웃었다.

***

“유영아, 나 먼저 나갈게.”

스태프 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해영은 힐끔 선우가 앉아 있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자리는 이미 비워진 뒤였다.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는 해영을 보며 그가 무엇을 찾는지 눈치챘는지, 유영이 문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선배님 밖에서 기다리시던데요?”

“어…, 고마워.”

제 행동을 들킨 것만 같아 멋쩍게 웃은 해영이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인사했다.

“뭘요, 월요일에 봐요.”

들려오는 화답을 뒤로한 채 그가 곧바로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가게 앞에 서 있는 선우가 보였다.

나오는 사람이 해영이리라는 걸 예상한 사람처럼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불어서인지 검은 머리칼이 선우의 하얀 미간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헤집고 싶단 생각을 덮어 둔 채 해영이 그를 불렀다.

“형.”

제게로 다가오는 해영을 보며 선우가 입가에 옅은 호선을 그렸다. 소리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차갑던 얼굴에 순식간에 다정한 빛이 어렸다.

“기다리는 거 안 지루했어?”

“응, 안 지루했어.”

대답은 선선히 흘러나왔다. 해영이 옷을 갈아입고 퇴근 준비를 하는 사이 주차된 차를 꺼내 왔는지, 차선우는 앞에 선 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보고 있으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던데….”

“…….”

하여간 사람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데에 재주가 있다.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문 사이 선우가 차 안쪽을 눈짓했다. 어서 타. 조곤조곤 흘러나온 목소리에 해영은 얼떨결에 차에 탔다.

선우는 차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나서야 차체를 돌아 운전석으로 향했다. 작게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해영이 안전벨트를 막 찼을 무렵 선우가 차에 올라탔다. 그가 시동을 거는 모습을 보며, 윤해영은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툭 말을 던졌다.

“형, 아까 들었어?”

“뭐를?”

선우가 앞을 주시한 채 되물었다. 가볍게 돌아온 물음에 해영이 잠시 그를 쳐다보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아니야. 고개를 내저은 해영이 금방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나 전에 다른 알바 대타 뛰어 줘서 주말은 일 안 나가.”

“유영이도?”

유영이가 여기서 왜 나와. 뜬금없는 이름의 등장에 멈칫했던 해영이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유영이는 아니고.”

“부럽다, 해영이랑 매일매일 보고.”

주어는 빠져 있었으나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는 분명했다. 부러워하는 것치곤 그의 입에서 산뜻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해영이 하하, 하고 딱딱한 웃음을 흘렸다.

다 들었잖아…. 태연하게 운전하는 선우를 바라보며 윤해영은 헛웃음을 삼켰다.

“형도 아까 봤으니까 알지?”

봤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쉬워진다. 선우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으니, 이미 어떤 상황인지 이해를 마쳤을 것이다. 목뒤로 손을 뻗어 쥐듯 감싼 해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배경수가… 아. 아까 찾아온 형이 배경수인데, 그 형 때문에 유영이가 불편해하더라고. 난 도와주느라 그렇게 말한 거고….”

“응.”

“유영이랑은 그냥 편한 사이야, 친구처럼.”

“친구….”

핸들을 쥐고 있던 손에 찰나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가볍게 풀리는 것이 보였다. 짙은 색의 가죽 위를 천천히 두드리던 손가락이 이내 부드럽게 핸들을 그러쥐었다. 하얗고 길쭉한 손이 어두운 핸들을 쥐는 모양새가 유독 눈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그럼, 우리는?”

휙, 핸들을 쥔 손을 바라보느라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던 해영의 고개가 단숨에 들렸다. 선우는 여전히 단정한 낯으로 운전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해영은 목덜미를 쥔 손에 꽉 힘을 줬다가 풀며 입술을 물었다.

어젯밤 그들은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거리를 재던 선을 부지불식간에 놓아 버렸고, 답답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던 관계는 마침내 허물을 탈피했다. 이제는 그걸 언어로 도식화해야 할 순간이었다.

‘헤어져도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 많잖아.’

그에게 선을 그었던 그때처럼.

제가 줬던 상처가 떠올라 멈칫하던 사이, 조금 더 열기 어린 채근이 떨어졌다.

“말해 줘, 우리가 무슨 사인지.”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해영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힐긋, 눈길은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 찰나의 시선에서 완전히 떨치지 못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확인하고 싶어 하는 얼굴에 목이 막혀 왔다.

“…무슨 사이긴.”

해영이 목 안쪽에서 느껴지는 홧홧한 통증을 뒤로한 채 입을 열었다. 입을 뗄 때마다 선우의 어깨가 천천히 굳는 게 느껴졌다. 차 안을 무겁게 채우는 긴장감을 주시하며, 윤해영은 부러 가볍게 말을 뱉었다.

“어제 한 침대에서 자 놓고 모르는 척하는 것도 아니고.”

“…해영아.”

차선우의 입술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가, 이내 다시 닫혔다. 날렵한 턱선에 딱딱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미간에 설핏 옅은 주름이 잡혔다. 무언가를 참아야 할 때 그가 습관처럼 보이는 표정이었다.

말없이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얼굴을 보니 어쩐지 애가 달았다. 해영이 손을 들어 눈썹 뼈를 문질렀다. 신호를 받고 차가 멈춘 사이, 고개를 돌린 선우가 그런 해영을 발견하곤 단숨에 표정을 풀었다.

눈썹 위를 매만지는 건 난처할 때나 생각에 잠겼을 때 무의식중에 나오는 버릇이었다. 차선우는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말없이 저를 올려다보는 눈을 주시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리고, 웃음기 어린 물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형이 안 참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

매끄럽게 올라가던 입꼬리가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해영은 말을 고르듯 입을 다문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허공에서 마주한 시선이 실타래처럼 엉켜 들었다.

“만지고 싶어, 차선우.”

“너….”

“그래도 돼?”

단단한 목소리에 묻은 열기가 차선우를 쥐고 흔들다 완전히 무너트렸다. 좀 됐는데, 하고 중얼거리던 해영이 입술에 비스듬히 희미한 미소를 걸쳤다.

직설적인 물음만큼이나 직선적인 시선이었다. 흰 포말을 그리며 부서진 물보라가 파도에 녹아들듯, 선우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잠시간 이어지던 정적 끝에 그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집으로, 갈게.”

해영은 고민의 여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찬기 서린 유리창 너머 적신호의 불이 꺼졌다. 목적지가 정해진 차가 멈추지 않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도어 록 잠금이 풀리는 속도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차선우는 문을 열어 준 채 먼저 들어가라는 듯 까딱 고개를 기울였고, 해영은 안으로 들어섰다.

철컥,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으로 들어서다 말고 멈춰 선 해영이 몸을 돌렸다. 바로 뒤에서 들어오던 선우가 저를 향해 돌아서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입매가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기 무섭게, 해영이 팔을 뻗었다. 목뒤를 잡고 끌어당긴 그는 선우와 코가 닿을 거리에서 턱을 들어 촉, 하고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갈증을 급히 해소하고자 한 짧은 입맞춤에 오히려 조급해졌다.

“형, 입 벌려.”

성마르게 꺼낸 말은 명령보다는 채근에 가까웠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차선우는 대답 대신 느릿하게 입을 열었고, 해영은 그 위로 다시 입술을 찍어 눌렀다.

선우를 끌어당기고 있던 해영은 점점 제게로 몸을 숙여 오는 몸집에 양팔로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야 했다. 1년 가까이 참아 왔던 게 터지듯, 입술을 빨다가 혀가 스치는 것만으로도 몸이 달았다.

숨결이 새 나가는 것조차 아쉽다는 듯 입을 맞추던 해영은 허리를 감싸 오는 손길을 느꼈다. 그대로 힘을 줘 끌어당기자 하체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겹치는 다리에 해영이 입술을 떼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아….”

비록 옷 위였으나 등허리를 누르는 손에 여지없이 몸이 반응했다. 해영은 터져 나올 뻔한 소리를 삼키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탓에 가지런히 늘어진 속눈썹 아래 혼탁해진 검은 눈동자가 언뜻 보였다.

아, 씨. 예뻐. 속으로 욕설을 짓씹던 해영이 움찔 떨리는 손끝을 말아쥐었다. 비벼지는 몸보다 욕구를 참지 못하는 노골적인 시선에 더 자극됐다. 결국, 해영은 제게로 고개를 숙이는 선우를 피하듯 몸을 뺐다.

“…….”

차선우는 상체를 뒤로 빼는 그를 따라 쫓듯이 고개를 숙였다. 집요하게 그를 몰아세우던 몸짓은 해영이 다시 한번 몸을 빼자 쪽,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멈췄다. 저를 내려다보는 의아한 시선에 해영이 한숨처럼 선우를 불렀다.

“…차선우.”

대답이 필요한 부름은 아니었다. 해영은 그가 되묻기도 전에 선우의 목을 감싸던 팔 하나를 들어 올렸다. 손가락은 그대로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어 머리를 잔뜩 헤집어 놨다. 쓰다듬는 것이라기엔 거친 손길에 놀랐는지, 멈칫하던 선우가 흐트러진 머리로 입을 열었다.

“왜?”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부드러움을 가장한 채 흘러나왔다. 젖은 입술에 꽂혀 있던 선우의 시선이 천천히 들렸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속눈썹은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짙었고 고요했다.

“예뻐서 갑자기 짜증 나.”

중얼거리듯 새어 나온 말을 들은 선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낮게 웃었다. 주어는 없었으나 그가 예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키스하다 말고 딴생각하지 말라는 타박 대신, 차선우는 틈을 노려 묻어 놨던 설움을 흘렸다.

“해영아, 가끔 보면 넌 내 얼굴만 좋아하는 거 같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렇지 않고 어떻게 나한테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해….”

“…….”

빈틈을 노린 날카로운 한방이었다. 또 부메랑처럼 돌아온 과거의 발언으로 한 대 얻어맞은 해영이 말을 잃었다.

…지금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순간적으로 아주 조금 억울한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결국 제가 주워 담아야 할 말이었다. 과거의 저를 패고 싶어 눈을 질끈 감았던 윤해영은 이윽고 선우와 시선을 맞췄다.

“미안한데, 나 그 말 취소해도 돼? 다른 사람한테 차선우 못 주겠는데.”

해영이 말꼬리를 늘리며 찡그리듯 웃었다. 어딘가 후련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에 선우가 나지막하게 숨을 들이켰다.

차선우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얼굴로 설핏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다 곧 후회의 빛이 스민 눈으로 앓는 소리를 흘렸다.

“…녹취했어야 하는 건데.”

“뭐?”

뜬금없는 말에 반사적으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대체 어떤 법적 효력을 위해 녹취한다는 건지, 의아함에 눈을 가늘게 늘리던 해영이 이내 흔쾌히 턱짓했다.

“해. 또 말해 줄까? 애인, 연인, 자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금 입술이 부딪혔다. 윤해영은 제게로 무너져 내리듯 깊숙이 몸을 숙이는 그에게 밀려 뒷걸음질을 쳤다.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등보다도 먼저 뒤통수가 먼저 벽에 닿았다.

쿵, 작게 울리는 소리에 선우의 몸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해영이 고개를 틀어 아랫입술을 물었다.

“음….”

선우의 입에서 탄성에 가까운 낮은 음성이 목을 긁으며 흘러나왔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차선우는 손을 들어 올려 해영의 머리 뒤를 감싸듯 쥐었다. 벽과 머리가 부딪치지 않게 감싸자마자 그는 주저함 없이 고개를 숙였다.

차선우는 다급했고 해영은 턱을 들어 쏟아지는 입맞춤을 받아 냈다. 성마르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혀가 얽혀 들었다. 말이 먹힌 자리를 춥, 쭙, 하고 혀를 삼킬 듯 빨아들이는 소리가 메웠다.

뒤가 벽으로 가로막힌 탓에 그가 가까이 붙을 때마다 몸이 비벼졌다. 정신이 날아갈 거 같았다. 여린 살덩이를 빨아 당기다 돌연 깨물고, 순간 몸에 힘이 풀릴 때면 차선우는 놔주지 않은 채 겹친 하체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읏…, 하.”

해영이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을 타 숨을 몰아쉬었다. 키스를 처음 하는 풋내기처럼 그저 받기에 급급해 호흡이 가빠졌다. 급하게 숨을 들이켜느라 흉곽이 들썩이는 모양새가 두툼한 옷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 상태는 살필 겨를도 없이 윤해영은 저를 내려다보는 선우를 눈에 담았다. 긴 속눈썹 아래 열기로 일렁이는 짙은 눈동자, 힘이 들어간 미간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그런 것들이 흐려진 시야에 가득 차 정신없이 흔들렸다.

“선우 형….”

불규칙한 호흡이 섞여 들어 탁한 음성이 젖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내내 옷 위를 맴돌던 길쭉한 손이 검은색 상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던 차가운 손길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군살 없는 복부를 쓸듯이 파고들던 손길이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손은 위로 더 올라가지 않은 채 허리를 쥐었다. 선우가 천천히 해영을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풀었다.

“해영아.”

또 뭐가 문제인지, 한숨 섞인 목소리가 해영을 불러 왔다. 차선우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쥐고 있던 허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맨살갗 위로 닿는 차가운 손끝에 자꾸만 몸이 움찔 떨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헤집듯 파고들다가 흐트러진 상의를 정돈해 준 선우가 완전히 해영에게서 떨어졌다. 방금까지 밀착해 있던 것은 거짓말이었다는 듯 거리를 두는 그를 보며 해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밥 먹자.”

“뭐?”

갑자기 뭔 소리야?

뜬금없이 밥을 먹잔 소리에 윤해영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으나, 그는 정말로 팔을 걷어붙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눈이 멀거니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차선우는 깔끔한 동선으로 저녁을 차렸다. 식탁 위로 반찬이 담긴 그릇을 옮기고, 그릇에 밥을 담고, 그 옆으로 수저를 가지런히 놓았다. 해영은 그가 식사 준비를 마칠 때까지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해영아.”

“…….”

“배고프다. 저녁 먹자, 응?”

선우가 눈썹을 늘어트리듯 웃었다. 다른 말에는 설핏 미간을 찡그리며 그를 노려보던 해영이 배고프단 말에 별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해영은 그가 서 있는 자리의 맞은편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따라 앉은 선우가 숟가락을 드는 것을 확인한 후, 밥을 한 숟갈 떠 올려 입에 가져가던 때였다. 해영이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안 먹어? 배고프다며.”

“먹을 거야, 너 먹는 거 보고.”

“…형. 배고프단 건 핑계였지? 그냥 나 먹는 거 보고 싶었던 거지?”

까칠한 물음에 선우는 대답 대신 눈을 접어 웃었다. 또 살살 눈웃음을 치며 자연스럽게 넘어가려는 것이 빤히 보여 잇새에 실소가 걸렸다.

“차선우….”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황당했다. 잡아먹을 것처럼 키스할 땐 언제고…. 이 와중에 밥이 중요하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해영은 애써 말을 삼켰다.

“약았다, 진짜.”

“너무 말라서… 걱정돼서 그래.”

다정한 음성에 해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마르긴 뭐가? 누가 봐도 건강하게만 볼 저를 차선우는 무슨 아사 직전 영양실조 환자로 보고 있었다. 현역으로 입대해 문제없이 병장 만기 전역한 과거까지 들먹이며 반박하려던 찰나, 선우가 팔을 뻗었다.

기다란 손끝에 가지런하게 걸린 젓가락이 해영의 숟가락 위로 올라왔다. 고기반찬 하나를 밥 위에 올려 준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입을 벙긋거리던 해영이 한숨을 삼키며 고분고분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한입 크게 문 밥을 우물거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선우도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해영아, 우리 각서 쓸까.”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뭘 쓰고 싶어하는지는 뻔했다. 우물거리던 걸 삼킨 해영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각서에는 법적 효력 없는데.”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윤해영은 슬쩍 눈을 들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선우의 표정을 확인하곤 헛웃음을 흘렸다.

“예에, 그러세요. 해. 다 해. 나 어차피 전 재산 형한테 줘서 남은 게 몸밖에 없어.”

“그럼… 결혼할까?”

“제발 좀.”

들고 있던 숟가락도 내려놓은 채 해영이 앞서 나가지 말라며 미간을 구겼다. 그렇게 서로 하나씩 주고받다 보면 화제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기 일쑤였다.

밥을 먹으면서 중간중간 건네는 대화는 일상적이었고, 사소했으며, 지극히 평범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늘 그리워했던 순간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앞으로를 떠올리는 대신 드디어 손에 쥔 현재를 조용히 만끽했다.

***

정해진 일정 없이 느지막하게 일어난 주말 아침은 평온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먹고 난 두 사람은 각자 할 일을 찾았다. 한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 테이블 위에서 뭔가를 끄적이던 해영이 선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 이거 좀 적어 줘.”

해영에게 기대듯 앉아 있던 선우가 제게로 내밀린 종이를 선뜻 받아 들었다. 흰 종이의 상단 중앙에는 ‘진술서’라는 글자가 반듯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눈에 띄게 멈칫하던 선우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흔들리는 시선에서 당황한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해영이 피식 실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협조 좀 해 줘.

“참고인 진술이 필요해서.”

“…응.”

해영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선우가 작은 한숨을 흘렸다. 그가 주저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차선우라면 진술서를 써 달라고 하자마자 무엇을 위해 이러는 건지 눈치챘을 테니까.

그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알면서도 해영은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았다면 이런 방법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앞으로는 달라져야 했고, 선우의 곁에 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정리해야만 했다.

정리…. 묘한 어감의 단어를 곱씹던 해영의 입꼬리가 어설프게 내려갔다.

“해영아.”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그런 해영을 조심스레 불러왔다.

“내가 해결해 준다고 하면… 싫어할 거지.”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시선에서 숨기지 못한 걱정이 드러났다. 제가 꺼낸 말을 얼핏 후회하는 기색도 보여서, 해영은 실없는 웃음을 국 참아야만 했다.

차선우는 자신의 문제를 본인이 직접 전부 해결해 주고 싶어 했다. 도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애정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해영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애정을 기반으로 한 호의라는 걸 알면서도, 이전이었다면 그의 말에 조금쯤은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숨긴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고, 그럼 차선우는 또 뒤에서 그걸 해결해 주려고 하고…. 그런 악순환이 결국 관계의 신뢰를 어그러뜨린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싫어하진 않겠지, 형인데.”

해영이 선우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선우는 자신의 대답에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 이윽고 기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채 해영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근데 조금 우울하겠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싶어서 내 능력에 대한 회의감도 들고, 자신감도 잃고….”

“…진술 내용에는 뭘 쓰면 돼?”

끝이 점점 흐려지는 말을 자른 선우가 펜을 쥐었다. 진지한 눈으로 종이를 내려다보는 모습에 입술을 비집고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해영은 어떤 형식으로 무슨 내용을 써야 하는지 알려 주고는 몸을 뺐다. 거실에 놓인 테이블은 작은 편은 아니었으나, 남자 둘이 나란히 앉을 만큼 넓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선우가 한숨을 삼킨 채 펜을 쥔 손을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핸드폰에서 울린 진동에 해영의 시선도, 선우의 시선도 단번에 그곳으로 향했다.

하진누나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누나 전화야.”

하진이 해영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짧은 설명에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뭐 해? 오늘도 알바 가?

전화를 받자마자 튀어나온 익숙한 목소리에 해영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 오늘은 안 가. 왜?”

- 그럼 이번 주까지 하는 전시회 다녀올래? 티켓은 예전에 끊어 놨는데….

전시회?

뜬금없는 제안에 해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라 자주 가진 않지만, 누군가 함께 가자고 하면 딱히 거절하지도 않았다. 딱 그 정도인 자신과 달리 하진은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걸 꽤나 좋아했다.

“누나는 못 가?”

- 나? 나 지금 편집실에 갇혀 있어. 이 개….

수화기 너머로 나직한 된소리가 짓씹어졌다. 이어지는 한숨 간간이 섞인 격한 비속어에 해영이 입을 다물었다.

지랄하지 말고 그냥 다시 만나라는 말에는 움찔 어깨가 떨릴 지경이었다.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말해도 욕을 먹을 거 같았고, 말하지 않으면 후에 더 큰 욕을 먹을 거 같았다.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조금 진정한 듯한 하진이 물어 왔다.

- 어제 방송 봤어, 안 봤어.

“…….”

- 안 봤네, 이 자식 이거 안 봤어. 지금 내가 분노 조절 못 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양심이 있으면 시청률로 보답하자.

“아, 알았어.”

해영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방영하는 날이었던가. 저녁 먹고 선우랑 잠시 산책을 다녀와서 바로 자느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 톡으로 예매 내역 보내 줄게. 가서 티켓 받으면 돼.

“응, 고마워.”

- 뭘… 까먹고 있다가 버릴 뻔한 건데. 두 개니까 차선우랑 가든지. 아, 해외 출장 간다고 했었나?

“…….”

- 아무튼, 끊는다.

하진은 또 제 용건이 끝나자 뚝,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해영이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귀신인가? 선우와 가라는 말에 순간 그녀가 알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몸이 굳었다. 별 덧붙임 없이 끊는 걸 보면 그냥 던져 본 말 같긴 하지만.

“형, 이거 다 쓰면 나가자.”

해영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진은 아직 해외 출장을 간 줄 알고 있는 선우가 진술을 써 내려가던 손을 멈춘 채 시선을 들었다.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박히는 얼굴을 바라보며, 해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목을 가다듬은 그가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찡그리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 데이트하자.”

***

나가기 직전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옷이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선우의 집으로 왔던 탓에 따로 챙겨 온 외출복이 없었던 것이다. 잘 때는 선우의 옷을 빌려 입었지만, 나가려면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또 입어야 했다.

혹시 너무 후줄근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차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선우가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던 해영을 불렀다.

“해영아, 이거 입어.”

해영은 드라이어를 끄며 그가 내민 옷으로 시선을 내렸다. 처음 보는 후드티가 눈에 담겼다. 제가 알던 차선우라면 입지 않을 만한 캐주얼한 옷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어쩐지 반갑기도 했다.

비죽 입꼬리를 올린 해영이 옷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형 이제 이런 옷도 입어?”

“내 거 아니고 네 옷이야. 전에 사 둔 거.”

“뭐?”

해영은 후드에서 머리를 빼며 황당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옷을 입다가 뭔가가 걸렸던 것도 같았다.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차선우는 제 뒤로 다가와 옷 안쪽에 달린 제품 태그를 직접 떼 주었다.

“왜 형 옷도 아니고 내 옷을 사 놔?”

“그냥… 취미로.”

뭐 저런 취미를 가졌지? 슬쩍 눈을 접으며 웃는 선우를 올려다보며 해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 또한 아버지 사업이 망하기 전까진 부족할 것 없이 자랐지만, 취미로 제가 입을 옷도 아니고 남이 입을 옷을 사 모은다는 건 당최 이해하기 어려웠다. 선우는 어떤 변명도 없이 해영을 향해 또다시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 옷을 건넸다.

‘이건 또 언제 산 거야.’

떠오르는 의문이 적지 않았으나 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해영은 순순히 그가 준 검은색 코트를 걸쳤다.

차선우가 보유한 자산이 어느 정도인진 몰라도, 한제 그룹의 시가 총액은 알고 있었다. 재벌 3세가 돈을 좀 흥청망청 쓴다고 재산이 거덜 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끝내 신발까지 전부 선우가 주는 대로 걸친 해영이 많은 것을 내려놓은 얼굴로 집을 나섰다.

어차피 서울 안에서 이동하는 거라, 전시회장까지 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착한 건물 안은 주말이기도 했고, 전시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막 입구로 향하던 순간 불현듯 울리는 진동 소리에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형, 전화 온 거 같은데.”

해영의 말에도 확인하기 싫다는 듯 한숨을 내쉬던 선우가 느릿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잠깐 받고 올게. 오래 안 걸려.”

해영은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선우는 전화를 받으며 멀어졌다. 그를 기다리며 전시회장 입구 앞에서 멀뚱히 서 있던 때였다.

“어? 윤해영?”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그가 저를 불러 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게로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한 해영의 눈이 설핏 커졌다.

이곳에서 볼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이가 저를 보며 높이 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해영 또한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해맑은 얼굴로 제 앞에 다가온 민호를 보며, 해영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인사했다.

“어, 김민호잖아.”

얼핏 시큰둥하게까지 느껴지는 인사에 민호의 눈꼬리가 늘어졌다. 더 반가워해 달라는 투덜거림에 입에서 어쩔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랜만이네.”

“프로그램 끝나고 처음이야. 어떻게 이렇게 만났지? 해영, 혼자 왔어?”

선우와 같이 왔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나는 재휘 형이랑 왔는데… 아, 티켓을 세희 누나가 줘서 같이 왔거든? 너한테도 연락하고 싶었는데 너 번호도 모르고, 인스타로 메시지 보냈는데 계정도 사라졌더라고.”

맞다, 이 새끼는 말이 많았지.

고작 한 달 못 봤을 뿐인데 대체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나 싶었다. 해영은 입도 다문 채 저를 보며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는 민호를 구경했다.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모습이 익숙했다. 그러는 사이 전화를 마쳤는지, 서두른 기색으로 다가온 선우가 해영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해영아.”

“와, 선우 형? 어떻게 형님도 여기에서….”

민호는 해영의 옆에 선 그를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반가워하다가, 이내 어정쩡하게 말을 흐렸다. 해영과 선우를 번갈아 바라보는 민호의 얼굴이 갈수록 굳었다.

혹시 선우와 자신의 관계를 눈치챘나? 눈썹 뼈를 만지작거리며 민호의 표정을 살피는 해영의 눈에 난처함이 어렸다. 급격하게 말수가 줄어든 모습에 긴장하던 때였다.

“나한테는 연락도 안 해 놓고 둘만 온 거야…?”

나 빼고? 황당함을 넘어 억울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탁, 맥이 풀렸다.

“연락처를 몰랐잖아.”

해영이 그를 달래듯 변명을 꺼냈지만, 상대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민호는 축 늘어진 입꼬리를 한 채 여전히 선우와 해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일부러 둘만 놀려던 게 아니라고 거짓말할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외출한 목적이 데이트였기도 했고,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는 딱히 출연진들과 연락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가벼운 웃음이 섞인 한숨을 흘린 해영이 손을 들어 민호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서운했어, 김민호? 미안해.”

“됐고. 지금 당장 번호 알려 줘.”

“내 번호 아무한테나 안 알려 주는데….”

해영은 민호가 내민 핸드폰을 받아 들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손으로는 번호를 누르면서도 장난스레 웃는 해영을 보며 그의 얼굴에 또 힘이 들어갔다. 펄펄 뛰기 시작하기 바로 직전, 민호의 뒤로 재휘가 다가왔다.

“여기서 다 만나네.”

“와, 재휘 형.”

제 번호를 찍고 짧게 전화까지 건 해영이 민호에게로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며 고개를 들었다. 다가온 재휘의 얼굴에는 살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는데, 그런데도 멍한 기색은 여전했다. 해영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촬영이 끝난 다음에는 선우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는 동안에도 해영은 종종 다른 이들을 떠올렸다. 혼자 남겨진 시간이 추우면 추울수록, 함께 겨울을 보냈던 이들의 따뜻함이 생각났던 것이다.

저를 바라보는 해영의 시선을 눈치챈 재휘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지냈어?”

“저야, 뭐. 알바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그럭저럭 보냈죠. 형은요?”

담담히 대꾸하던 해영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재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스며든 장난기가 이채를 띠었다.

“세희 누나랑 아직도 잘 지내요?”

“…당연하지.”

한 박자 느리게 대답이 꺼내지는 동안 그의 얼굴은 따끈하게 구워졌다. 아닌 척 쑥스러워하는 재휘의 모습에 윤해영은 숨죽여 키득거렸다. 그때, 선우의 번호까지 얻어 내는 데에 성공한 민호가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 해영. 전시 보고 나와서.”

“그럴까?”

해영이 선뜻 웃으며 대답했다.

민호는 한결같이 같이 노는 것을 좋아했다.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다 같이 놀자며 자리를 만들지 않았나. 그때는 입 좀 다물라며 멱살을 쥐고 싶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서인지 괜찮았다. 오히려 한결같은 모습에 웃음이 났다.

‘잠시만. 이거 진짜 괜찮나…?’

그저 반가움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였다. 불현듯 찾아온 불안감에 휙 고개를 든 해영은 선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불안한 건 이쪽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는 그를 보며 해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형, 저희랑 같이 다녀요. 네?”

선우는 저를 주시하는 시선을 알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의 화답에 신난 민호가 입가에 활짝 미소를 걸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며 앞장서는 민호를 따라, 세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촬영하면서 재휘와 부쩍 친근하게 지냈던 탓인지, 오랜만에 만나서도 그는 익숙하게 해영의 어깨 위로 팔을 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올리려고 했다. 어깨동무를 하려던 순간 올라온 다른 손이 해영의 어깨를 가볍게 쥐지만 않았더라면.

갈 곳을 잃은 재휘의 손이 잠시 허공을 떠돌다 이내 다시 주머니 안으로 안착했다.

“…….”

재휘는 당황했는지 눈을 깜박이긴 했지만, 곧 별생각 없는 얼굴로 돌아갔다. 그를 당황시킨 선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그 둘의 사이에 낀 해영만이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온 손을 눈짓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미묘하게 흘러가던 분위기를 깬 것은 민호였다. 언제 훌쩍 저기까지 갔는지, 포토 존 앞에 선 그가 사진을 찍어 달라며 재휘를 불러 왔다. 해영의 옆에서 걷던 재휘는 금방 보폭을 넓혀 민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해영은 앞서 나가는 두 사람을 뒤따르면서 힐끔 시선을 들었다.

“손.”

툭 내뱉어진 말에 앞을 바라보던 선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왜?”

“친한 사이에 어깨에 손 좀 올릴 수 있다며. 형이 그러지 않았어?”

우리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하냐며 능청스레 눈을 동그랗게 뜨던 모습이 선명했다. 몇 주 전 같이 영화관에 갔을 때를 들먹이던 해영이 짐짓 장난스러운 얼굴로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그 짓궂은 얼굴을 발견한 선우가 눈을 접어 가느스름한 곡선을 그렸다. 말없이 제 얼굴만 한참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해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던 와중이었다. 선우가 옅게 웃는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해영아….”

해영이 저를 불러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때는 너한테 애인이 없었잖아.”

“…….”

나긋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위로 올라가던 입꼬리가 어색하게 멈췄다. 해영은 선선히 돌아온 역공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차선우가 이렇게 나온다면 할 말이 없었으니까.

어지간하면 말싸움에서 지는 편이 아니었으나, 불행히도 상대가 차선우였다. 해영은 결국 반박하기를 포기하고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선우는 천천히 걷기 시작한 그를 따라 발길을 옮기며 숨죽여 웃었다. 나직한 웃음기가 묻은 시선이 해영의 볼 언저리를 맴돌았다.

‘아 씨…, 귀여워.’

괜스레 간지러운 기분에 해영이 손을 들어 볼을 긁적였다. 선우의 손은 여전히 어깨 위에 느슨하게 올라온 채였으나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해영은 민호가 갔던 길을 따라 전시회장 안쪽으로 향하다가, 문득 커다란 액자 앞에서 멈춰 섰다.

거대한 액자 속, 흑백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는 흰 선들이 한 남자의 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끊겨 있었다. 남자는 뒤를 의식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발치를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한 어정쩡한 자세였으나 동시에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액자 밖을 향한 눈에 비친 안광이 흑백 사진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해영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생각도, 선 너머를 디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멈춰 있는 남자의 모습을 잠시간 눈에 담았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박제된 세상. 그 속에 있는 남자가 어디로 향할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흘긋, 해영의 시선이 액자 옆에 붙은 캡션으로 향했다.

〈미래〉

앞으로 걸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두려움을 감내하기 마련이다.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손을 뺀 해영이 제 어깨 위에 올라온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러자 찰나 어깨에 올라와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영은 힐끔 선우를 올려다보며 입 모양으로 작게 쉿, 하는 소리를 냈다.

“해영, 안 와?”

“가.”

어느새 거리를 벌린 건지, 훌쩍 앞서간 민호가 다음 전시장으로 향하기 직전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해영은 팸플릿을 든 손을 휘적이며 대답하곤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가자는 눈짓에도 그는 쉽사리 발을 떼지 않았다.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흘리던 선우가 대답 대신 해영의 어깨 위로 고개를 숙였다. 훅 가까워진 거리감을 체감하게 한 것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익숙한 향기였다.

“해영아.”

귀에 내려앉는 숨결에는 지우지 못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깊게 고개를 숙인 탓에 선우의 입술이 귓가를 스쳤다.

움찔, 어깨가 떨렸다. 이쪽을 주시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멀지 않은 거리에 민호가 있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별수 없이 긴장돼 목이 바짝 굳었다.

“지금, 비밀 연애 하는 거 같아.”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속삭임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굳어 있던 목뒤에 차가운 손길이 닿은 것도 동시였다. 어깨를 쥐고 있던 손가락을 펴, 목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손끝에 기어코 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올려 시선을 맞추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삐딱하게 올려다보던 해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는 거 같은 게 아니라, 진짜 하고 있어.”

연애. 뒷말은 입으로만 벙긋거리며 해영이 짓궂게 웃었다.

얄미운 건 얄미운 거고, 정정할 건 정정해야 했다. 담백하게 꺼내진 대답에 슬쩍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손끝이 멈췄다. 느릿하게 떨어져 나간 흰 손은 곧 선우의 입가로 향했다.

“…그러네.”

손에 가려진 입술 틈으로 느릿하게 긍정의 말이 꺼내졌다. 그거로는 부족한지 차선우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아쉽다는 얼굴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꺼풀 사이로, 이채를 띤 짙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냥 둘이서만 갈 걸 그랬나, 하고 작은 혼잣말이 이어졌으나, 해영은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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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m_m1nho 전시회 보러 왔다가 만난 배신자들

포토그래퍼는 인스타 없는 @윤해영

#서울 #강남 #전시회 #케이트루핀사진전 #겨울끝봄시작

댓글 138개 모두 보기

studio.sehee 포토그래퍼분 사진은?

1화부터 다시 보면서 든 생각

럽라 제작진들 편집하면서 울고싶었을 듯

초반에 남출들끼리 기싸움하는 각 잡고 싶어하던데 실패했죠? 남출들 역대급 평화로워서 ㅋㅋㅋㅋㅋㅋㅋㅋ

선우: 모든 출연진한테 친절함

해영: 과외선생

민호: 과외생

재휘: 아무 생각 X

각자 캐릭터 뚜렷해서 개인적으로 난 남출들 케미도 좋았음ㅋㅋㅋㅋㅋㅋ 특히 윤해영 ㅋㅋㅋㅋㅋㅋㅋ

거의 첫방 시작하자마자 인스타 터트려서 뒤구린거 아니냐던 억까들 다 먹금시킨 클린함,, 남출여출 가리지 않고 인스타에 올라오는 거보면 잘 지내는 거같고.. 털린 과거도 전부 급식 시절 전교회장이었던거, 졸업식 때 랩한거, 한국대 과대였던거, 과수석이었던거 같은 건전한 것들밖에 없었잖아ㅠㅠㅋㅋㅋㅋㅋㅋ 초반부터 꾸준히 다른 사람들 챙기는거 보면 왜 출연진들이 전부 해영이 찾았는지 알거 같음 딱봐도 호감 가는 스타일 ㅠ

하 미방분이나 더 풀어줬음 좋겠다

(댓글 31)

해영이 건전하게 노는데 찐따같지는 않음.. 뭔지 알지

└ㅇㅇ잘 놀고 성격 좋아서 과에서 인기 많은 선배 이미지

└저 얼굴이면 성격 찐따같아도? 오히려 좋아ㅎㅎ

과거썰 중 유일한 일탈이 랩으로 졸업식 무대를 뒤집어놓은 거라는게 킬포

└ㅅㅂ나 이거 웃음지뢰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심지어 잘해

그 썰이 ㅈㄴ 웃겼어 뚝딱민호 과외해서 소윤이랑 이어지게 하는 윤해영 보면 모고 5등급이던 자기동생 과외해서 인서울 보내던 바이브 나온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윤해영 자기 연애는 못해도 과외는 존나 잘한다는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원글에 과외선생 뭔말인가 했는데 이거였어?ㅠㅋㅋㅋㅋㅋㅋㅋ

└연애도 잘했을듯 해영이 같은 애들이 여친한테도 잘해

└이게맞다

인스타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김민호 엔프피 윤해영 엣프제일 거 같음

└엠비티아이 과몰입 극혐인데 이건 인정ㅋㅋ

└ㄹㅇ그럴 거 같아서 열받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출연료 천 받고 전애인이랑 연애 리얼리티 찍기 vs 그냥 살기

골라봐

러브라인이랑 똑같은 프로그램인데

누가 출연하는지 모르고 가보니까 전애인이 있는 거임

한달동안 같은 집에서 살아야함

출연하고 과거 털릴 수 있음

다 찍고나면 무조건 천만원 줌

한다? 만다?

(댓글 47)

닥전이지 너 어디 아프냐

쌉가능

천... 가보자고

천만원이면 ㅆㄱㄴ

└문제는 전애인이 없는데 방송사에서 제공해주는거지?

존나 가능 끝나고 유튜버 해야지 ㅇㅇ

여자분들께 죄송해서 불가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게맞지 걔 데리고 가기 죄송스러워

└ㄹㅇ 다른 여자분들은 뭔죄냐고 ㅋㅋㅋㅋㅋㅋ

내 얼굴 박제되는데 천? 안하지

근데 이글 방탈 아님?

개꿀이지 당장 할게 함만 시켜줘라

ㅅ.ㅂ사귄 사람이 없어요

천만원....? 너무 적은데

└아니다 방송 끝나면 돈 많이벌겟지?? 닥고

그냥살기

안 그래도 꼴보기 싫은데 데이트까지 해야하잖아 어우 돈 더 줘

ㄱㅆ 전애인이랑 데이트할 확률은 없음 동성이라

└뭐?

└?

└갑자기 분위기 더큰대한민국

내가 볼 때 ㅊㅅㅇ ㅇㅎㅇ 말하는 건듯

└ㅎㅎ 정답

└방탈 아닌가했는데 열심히 게이 퍼먹고 있었군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기출변형이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ㅅㅂㅋㅋㅋㅋㅋㅋㅋ호모렌즈 지독하다.. 근데 촬영 끝나고 두사람 목격담 계속 올라오는거보면 재결합 성공한듯?^^

딴소린데 ㅊㅅㅇ는 대기업 회장 손자라는 썰 있지 않아? 천 받고 나오면 개손해인데 왜 나왔지

└엥 카더라 아냐?ㅋㅋㅋㅋ 찐이면 굳이 출연할 이유가?

└블라에 올라왔었어 ㅎㅏㄴㅈㅔ 원글은 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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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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