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유영아, 나 먼저 가 볼게.”
“네! 내일 봐요!”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해영이 카운터 앞에 선 유영에게 인사했다. 그녀가 잘 가라며 밝게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개강 전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싶었던 게 아마 몇 주 전이었을 것이다. 학교 근처 카페의 모집 공고에 지원했던 해영은 면접을 보러 가자마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곳에서 만난 게 유영이었다.
‘어? 선배?’
앞치마를 두르며 나오던 그녀는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윽고 붉게 상기되는 얼굴에는 반가워하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해영 또한 그녀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들었다.
같은 학과인 데다가 희망하는 진로가 같아 몇 번 얼굴을 보거나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이후 로스쿨 진학 준비로 머리를 싸매는 것 같더니 한 번에 붙은 듯했다. 유영은 해영의 바로 다음 기수였다. 아직 개강하기 전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간 함께 일하며 부쩍 가까워진 참이었다.
카페를 나서며 패딩 주머니를 뒤적인 해영이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조금 늦겠는데.”
오늘은 하진을 만나기로 했다. 그녀에게 막 아르바이트가 끝났다고 연락하자, 바로 식당으로 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익숙한 상호를 눈으로 읽은 그가 다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촬영이 막 끝났을 무렵에는 그녀 또한 바빠서 얼굴을 보지 못했었는데, 그래도 간간이 전화가 걸려 오긴 했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으면 늘 가장 먼저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열두 시에 가까워질 때였을 것이다. 집에서 공부하던 중 약한 진동 소리와 함께 핸드폰에 하진의 이름이 떴다.
“여보세요?”
- 윤해영, 나 고소장 하나 쓰려고 하는데 의리로 자문 좀 해 줄 수 있어?
전화를 받자마자 난데없이 고소장을 쓴다는 말에 해영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미간을 찌푸린 그가 손을 들어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법률 자문은 실무 실습이나 과제로밖에 안 해 봤지만, 하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했다. 초조하게 눈썹 위를 매만지던 해영이 선뜻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도울 수 있는 건 전부 도와줄게. 근데 누나 무슨 일 있어? 웬 고소장?”
걱정스러운 물음에 하진은 한결 정돈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어, 별일은 아니고. 차선우한테 정신적 피해 보상 청구하려고.
“…….”
- 그럼 민사로 가야 하냐 형사로 가야 하냐?
“그건 민사로 가기는 하는데….”
습관적으로 민법 교과서를 꺼내던 해영의 손이 멈췄다. 지금이 로스쿨 수업 시간도 아닌데, 질문에 반사적으로 책을 찾았다. 하진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진지하게 대꾸하던 그가 얼핏 실소를 삼켰다.
선우 형한테 내용 증명을 보내면 아마 대형 로펌에 인계될 것이다. 민사 소송에서 정신적 피해 보상에 대한 건은 증명하기가 어려우니, 정말 법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면….
“현실적으로 승소 가능성이 없지.”
- 너 지금 내 앞에서 차선우 편들어?
머리를 굴리던 해영이 되돌아온 날카로운 물음에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고질병이었다. 하루 종일 공부하다 보면 모든 것이 판례와 엮여 생각되곤 했다.
“말이 헛나왔어, 편든 거 아니야.”
- 됐어, 너도 똑같아. 그나마 넌… 분량을 뽑아 먹을 수 있으니까 참는 거야. 알아?
하진이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영은 그녀를 달래듯 웃으며 대꾸했다.
“알지, 잘 알지. 누나가 고생하네.”
조곤조곤하게 편을 들자 그녀가 나직한 울분을 토했다.
- 헤어졌다며. 헤어졌다며, 이 자식들아.
그 말에 해영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어설픈 웃음만 흘렸다.
촬영이 끝난 후부터였다. 편집하는 과정 중에 보내는 건지, 문득 핸드폰을 확인할 때면 ‘장난치냐’, ‘헤어진 게 맞냐’, ‘내 프로에서 왜 둘이 연애하냐’ 등등의 메시지가 와 있곤 했다. 덕분에 하진의 타박에는 조금은 익숙해진 차였다.
그녀는 오래 성질을 내진 않았다. 대화의 화제는 타박에서 시작해, 곧 몸은 괜찮냐,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냐는 것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조만간 시간을 내서 같이 밥을 먹자는 약속을 잡았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던 해영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손을 빼냈다.
하진누나
핸드폰 화면에는 당연하다는 듯 하진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여보세요.”
- 어디쯤이야?
“지금 버스 기다리고 있어. 어, 왔다. 한 15분 정도 걸릴 거 같은데….”
해영이 앞에 멈춰 선 버스에 올라타며 대답했다. 카드를 찍은 그가 버스의 뒷문 앞쪽에 나 있는 빈자리를 향해 몸을 옮겼다.
- 그럼 10분쯤 뒤에 미리 시켜 놔야겠다. 너 많이 먹을 수 있지?
“응, 혼자 3인분도 먹을 수 있어.”
흔쾌히 흘러나온 음성에 하진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녀는 오랜만에 고기를 잔뜩 먹여 주겠다며 들뜬 목소리를 뱉었다. 해영의 입에서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았다며 전화를 끊은 그가 버스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느새 겨울 사이 졸가리만 남았던 나무에 푸릇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작년이었나, 이번 겨울의 초입에서 독감이 유행한다는 뉴스를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었다. 해영은 촬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독한 감기에 앓았다. 가장 추웠던 시기에는 멀쩡하다가 뒤늦게 철 지난 병을 앓다니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없다.
진짜 바보 같아….
아파서인지 몸을 움직여 뭔가를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뜨겁고 까칠한 목으로 가까스로 물을 넘기며 이불 더미에 몸을 파묻었다. 오래된 빌라는 겨울이 되면 바닥에서 찬기가 피어올랐다. 추위가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해 해영은 어깨를 움츠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때 걸려 온 전화가 있었다. 며칠 내내 걸려 온 연락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지겹도록 이어진 전화에 결국은 손을 뻗었다.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받은 전화에선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윤해영? 해영아, 너 괜찮아?
‘…어, 괜찮아.’
- 안 괜찮은데? 목소리가 다 죽어 가는데? 야, 아프면 아프다고 전화라도 하지 왜 혼자 앓고 있어?
그러지 않아도 아픈데 혼자면 더 서러운 법이라며 하진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다가 어느새 또 정신없이 잠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하진이 있었다. 방이라고 해 봤자 침실이 가벽으로 공간 분리가 된 것이 고작이라, 부엌의 조명이 고스란히 새어 들어왔다. 그녀는 작은 식탁 앞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나…? 뭐 해?’
한참을 자서인지 목이 잠겨 있었다. 끝이 갈라진 목소리를 들은 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어, 깼네? 기다려, 이거 죽만 다시 덥히면 돼. 너 먹이라고 받았는데 자는 걸 깨울 수가 없어서.’
‘이모가 챙겨 주셨어?’
‘뭐, 비슷해.’
비슷한 건 또 뭔지. 의문은 남아 있었으나 무거운 몸이 더 깊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식사다운 식사를 한 게 이틀만이었다. 그전에는 대충 밥에 물이라도 말아 먹었는데, 그다음부턴 고통을 잊기 위해 하루 종일 잠만 잤다. 해영은 오랜만에 따뜻한 죽을 먹고 하진이 챙겨 준 약까지 먹은 뒤 다시 잠들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난 뒤에 몸은 다 나은 듯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알바를 구하러 나선 것도 그 직후였다.
그는 열병에 허덕이면서도 머릿속을 들쑤시는 얼굴에 끙끙 앓아야 했다. 아픈 것보다 혼자인 것이 더 서러운 밤이 이어졌다. 한참을 뒤척이던 해영은 몸이 낫자마자 집을 나섰다. 마냥 집에 처박혀서 제가 한 선택을 곱씹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오늘이 입춘이라고 했던가.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익숙한 거리를 보며 손을 뻗었다. 삑, 하차 벨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멈춰 섰다. 해영이 들고 있던 가방을 고쳐 메며 몸을 일으켰다.
독한 감기를 이겨 낸 것처럼 뒤숭숭한 마음도 곧 잔잔해질 것이다. 프로그램을 촬영하던 한 달이 도리어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했다. 이제는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프다고 찾아와 주는 사람도 있고, 연락하면 금방 달려와 줄 친구들도 있었으며, 개강하고 나면 다른 일엔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지낼 테니까.
겨울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윤해영은 가벼운 걸음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왔어?”
이따금 그녀와 갔던 고깃집에 도착한 해영이 겉옷을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진은 그가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집게를 들고 불판에 고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집게 나 줘.”
“됐어, 넌 먹기나 해.”
손을 뻗은 그에게 하진이 코웃음을 쳤다. 집게를 든 그녀는 곧 몸은 이제 괜찮냐, 밥은 잘 챙겨 먹냐 등등 걱정 어린 물음을 건넸다.
“잘 먹고 다녀야 아프질 않는 거야. 이거 벌써 다 익었다. 이거 먹어.”
“누나, 이거 피 떨어지는데.”
“소고기잖아. 괜찮아.”
해영이 웃는 낯으로 그녀가 밀어 준 고기를 들고 다시 불판 위에 올렸다.
고기가 익는 것을 지켜보다, 완전히 핏기가 가시고 나서야 다시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소금에 찍은 고기를 입에 넣는 그를 보며 하진이 까탈스럽다며 짓궂게 미소 지었다. 입 안에 든 걸 조용히 우물거리던 해영 또한 뒤늦게 고개를 들며 웃었다.
“맞다, 전에 가져다준 죽이랑 반찬들도 맛있었어. 누나가 사 온 거야? 용기 보니까 이모가 가져다주신 건 아닌 거 같던데.”
“아니, 그거 차선우가.”
물음에 답하면서 하진은 잘 익은 고기를 집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접시 위로 올라온 고기에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해영이 당황한 얼굴로 하진을 응시했다. 한참을 얼어 있던 입이 다급하게 열렸다.
“…죽, 가져다준 게 선우 형이라고?”
그의 물음에 하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끄덕였다.
“응. 약이랑 죽이랑.”
“…….”
“아마 내가 가져간 거 전부 다?”
그녀의 고개가 기우뚱 기울어졌다. 대수롭지 않게 흘러나온 대답에 해영이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왜 말 안 했어?”
“안 물어봤잖아.”
하진이 딱 잘라 말했다. 간단히 내뱉어진 대답에 해영도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안 물어봐서 말하지 않았다니, 할 말 없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그새 비워진 불판 위로 새로운 고기가 올라갔다. 집게를 들고 입맛을 다시던 그녀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아픈 와중에 걔가 줬다고 말해 봐. 괜히 네 마음만 싱숭생숭해질 텐데, 뭐 하러 내가 먼저 말해?”
싱숭생숭. 해영이 그녀가 뱉은 단어를 곱씹으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제법 합당한 사유였다. 게다가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하진이라면 더더욱.
그녀는 자신이 선우와 헤어졌을 때를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집이 망했을 때도 네가 망한 거 아니니 정신 차리라던 그녀는 선우와 헤어졌을 때는 차라리 울라고 말했다. 그때는 이미 울 만큼 다 울었던 차였다. 그래서 이젠 괜찮아졌다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으나, 그녀는 함께 웃어 주지 않았다.
5년이란 시간은 절대 가볍지 않다고.
그 진지하던 얼굴이 떠오르자 입 안에서 쓴맛이 감도는 것 같았다. 설핏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린 해영이 하진을 보며 능청스레 말했다.
“나 이제 괜찮아.”
“알아. 그리고 안 괜찮아도 괜찮아. 타기 전에 고기나 더 많이 먹어.”
별로 제가 괜찮다는 말을 믿어 주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는 얌전히 하진이 밀어 주는 고기를 입 안에 욱여넣었다. 머릿속은 순식간에 떠오른 상념들로 이미 발 디딜 곳 없이 복잡했다.
아픈 건 어떻게 알고 죽을 가져다줬지? 하진 누나가 연락했나? 아무리 그래도 바쁠 텐데 죽은 왜 사다 줘, 자기 밥이나 잘 챙겨 먹지. 그 이후로 연락한 적 없는데 형은….
형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근데 어떻게 된 거야? 내 차 빌려 간 날.”
해영이 문득 들려온 물음에 움찔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차선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떠올리던 순간 귓가에 박힌 목소리에 괜히 못 할 짓을 하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 뭐라고?”
“공항에서 차 빌려 갔었잖아. 그날 어떻게 된 거냐고.”
해영이 그녀의 질문에 애매하게 입꼬리를 늘어트렸다. 아마 선우를 마지막으로 봤던 날을 말하는 것일 테다. 하진이 말한, 공항에서 차를 빌려 갔던 날.
“차는 네가 빌려 갔는데 왜 반납은 차선우가 해? 둘이 같이 갔어? 차선우 울린 건 너고?”
낯빛이 거의 시체였다며 하진이 옆에 놓인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 이것보다 더 하얀 것 같았다는 우스갯소리에도 해영은 따라 웃지 못했다.
“너 아니면 걔가 그럴 일이 없잖아. 워낙 귀한 몸이셔서.”
장난인 것처럼 말하면서도 은근히 뼈가 있었다. 그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하진이니 그냥 생각 없이 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자 했으나, 계속 생각은 다른 곳으로 쏠렸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의식은 계속해서 해영을 그날로 데려다 놓았다. 차를 운전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힐끔거리던 시선, 가끔 그의 입에서 나직하게 새어 나오던 한숨, 얼굴을 쓸어내리던 메마른 손길 같은 것들. 가장 또렷한 것은 마지막으로 제게 알겠다고 답하며 웃던 얼굴이었다.
어떤 순간에서도 저를 보며 다정하게 웃어 주는 선우의 얼굴이 가슴 언저리에 맺혔다. 늦게까지 집 앞을 떠나지 않던 차도.
다시 혼자가 되었던 겨울밤을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렸다. 해영이 입술을 짓씹다 말고 하진을 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누나. 술 시킬까?”
“야, 빨리 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
“무슨 일 없어, 잘 끝냈어.”
말하던 중 그가 잠시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잘 끝냈다는 말은 이상했다. 선우와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잘’ 마무리 지었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답하기 애매했다.
그저 고를 수 있는 최선을 선택했을 뿐이다. 해영이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하진은 뜸 들이는 자신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끝낸 건 아니고, 그냥 친한 형 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했어. 친구처럼.”
“친한 형 동생 사이? 친구?”
치인구?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멍하니 해영을 쳐다보던 하진이 들고 있던 집게를 놓쳤다. 집게가 테이블 위로 떨어지며 요란하게 쩔그렁거렸다.
헛웃음과 함께 친구라는 단어를 곱씹는 모습이 어쩐지 선우를 연상시켰다. 혼란한 눈으로 고개를 든 그녀가 이내 걱정스레 물어왔다.
“해영아, 5년을 만났는데 헤어지고 어떻게 친구를 해. 너 어디 아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그녀가 집게를 놓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열을 재 보게 가까이 오라며 손을 까딱였다.
아. 입 밖으로 작은 탄식이 샜다. 이번엔 정말 익숙한 느낌이었다. 제 이마 위를 덮던 손길을 떠올린 해영이 설핏 웃음을 흘렸다.
“…왜 안 돼.”
“왜 안 되냐니, 너 갑자기 왜 이렇게 할리우드 마인드를 장착했어?”
퍽 신랄한 어투였다. 와중에 영어 발음만 두드러지게 좋아서,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없이 웃는 그를 보며 하진이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사귀었던 게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잖아. 어떻게 헤어지고 아무렇지 않게 지내. 소민이 요즘도 가끔 너 뭐 하고 사냐고 물어봐.”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해영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헛웃음과 함께 삐딱한 시선으로 하진을 올려다본 그가 간단히 반박했다.
“소민 누나는 전부터 친했으니까.”
잊을 만하면 꺼내지는 이름은 이제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불현듯 그녀에 대한 화제가 꺼내지는 것 자체에 움찔하게 될 뿐이었다. 소민이 알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소민은 하진과 같은 학원에 다니면서 먼저 친해진 사이였고, 해영이 고등학생 때 교제한 사람이었다. 그때도 헤어지고 난 후 며칠 간은 마주칠 때마다 서먹하게 굴었던 것 같다. 또 시간이 조금 흐르고부턴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완전히 끊긴 게 언제였더라. 고3 때까지는 그래도 소민에게서 간간이 응원이 담긴 메시지가 오곤 했지만, 아무래도 선우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녀의 연락에 답을 하지 못했다.
“이게 그렇게 말도 안 돼? 나 소민 누나랑도 그냥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 거 같은데.”
“미친. 너만 그래.”
해영의 덤덤한 중얼거림에 하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물론 소민과 선우가 같을 수는 없었다. 학창 시절 반년 남짓 만났던 풋사랑과 성인이 되어 5년을 만난 게 같을 리가. 무엇보다, 차선우는 해영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유일한 사람이었다. 쉽게 놓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차선우도 알겠대? 그러재?”
하진은 물으면서도 어느 정도 답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미쳤구만…. 둘 다 미쳤어, 특히 차선우.”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고기를 굽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해영의 그릇 위로 고기 몇 점이 가지런하게 올라왔다.
“사랑에 미쳤다…. 지독하다, 진짜. 사랑이 뭐라고.”
그녀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해영은 묵묵히 입으로 고기를 운반했다.
“그래도 넌 멀쩡해 보이네. 난 그럼 됐어.”
단정한 낯을 힐끔거리며 하진이 한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긴 했으나, 그녀의 말에 담긴 걱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멀쩡해 보인다고…. 입 안에 든 걸 삼킨 해영이 젓가락 끝을 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개강을 앞둔 채 짬짬이 공부를 하느라 바빴고, 곧 수강 신청도 있었으며, 요즘엔 새로운 알바도 하고 있었다. 조금 지나면 차선우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연락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멀쩡하지 않을 게 뭐 있어.”
윤해영은 씩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
하진이 자신의 평가가 틀렸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고기를 먹은 뒤 오랜만에 한잔하기 위해 2차로 넘어갔을 때였다.
해영은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었으나, 술 그 자체를 즐기는 유형도 아니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던 하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입 안에 술을 털어 넣는 그를 보며 흠칫했다. 안주가 나오기도 전인데, 이 자식이….
“천천히 마셔.”
빠르게 마셔서인지 벌써 상기된 얼굴을 보며 하진이 혀를 찼다.
“누나, 나 잘못한 걸까.”
“너한테 멀쩡해 보인다고 한 거 취소할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을 게 뭐 있냐고 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뻔뻔스레 괜찮다고 웃을 땐 언제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 아, 그래. 솔직히 내가 보기엔 말도 안 돼. 둘 다 좋아 죽으면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봐?”
“나도 차라리 안 보고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
“근데… 형을 안 보고 살 수가 없을 거 같아서.”
그럼 그냥 다시 만나면 되는 거 아닌가? 왜 헤어졌냐고 물을 때도 말해 주지 않더니,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건지 하진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답답하긴 해도 자신에게마저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원래 인간관계라는 게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이어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해영이 서러워하는 것을 보니 별수 없이 속상해졌다.
“이 멍청아. 네가 힘들 게 뻔해서 그래, 걱정돼서.”
“…안 힘들어.”
“또.”
또 시작이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면 될 걸 윤해영은 꿋꿋하게 괜찮다며 버티는 버릇이 있었다. 얼굴에 한가득 씁쓸한 미소를 건 주제에 계속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차선우를 화제로 꺼내지 말 걸 그랬나. 하진이 속으로 후회를 곱씹으며 팔을 뻗었다. 해영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린 그녀가 어두운색의 머리칼을 잔뜩 헤집었다. 힘있게 쓰다듬는 손길에 해영은 눈을 찡그리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형 다시 만나고 나니까 앞으로 못 보는 게 더 무서워졌어.”
“…….”
“계속 보고 싶어서 용기 낸 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는 테이블 위에 올린 팔로 고개를 숙였다.
“취했나. 와, 엄청 보고 싶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얼굴을 팔에 묻은 그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하진은 해영이 이러는 것을 이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차선우와 사귀다 헤어졌을 때.
입을 달싹이던 그녀는 뱉지 못할 울음을 참는 해영의 등을 끌어안으며 토닥이듯 쓸어내려 주었다. 그에게서 끝끝내 엉엉 서러움을 토해 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진은 그가 갈 곳이 없어 한겨울을 서성이던 때도 결코 울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개를 묻은 채 입술을 짓씹는 것이 지금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하진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여간 자존심 세, 윤해영.”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소리 내 울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혼자 숨어 울 것을 알았고, 하진은 그가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이 제 곁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았다. 해영이가 혼자 울지 않으려면 차선우가 필요했다.
이하진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으로 남은 손을 뻗었다.
***
“그럼 우리 선우가 곧 티비에 나온다는 거지? 고모가 꼭 챙겨 볼게.”
빈 포크를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던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가지던 다과 시간이었다. 테이블에는 향긋한 차와 싱그러운 과일이 가지런히 올라와 있었으나, 화제의 중심은 온전히 오랜만에 조부 댁에 들린 선우에게로 꽂혀 있었다.
회사에서 맡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사내 분위기 등등으로 시작되던 대화는 이윽고 그가 출연한 연애 프로그램으로 넘어왔다. 달갑지 않은 화제였으나, 선우는 사근사근하게 대꾸했다.
“아마 저는 별로 안 나올 거예요.”
“1초만 나와도 눈에 띌걸? 누구 조칸데.”
그녀의 수다스러움에 조부인 차회도가 찻잔을 내려 두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성희야.”
“그렇잖아요, 아버지.”
차성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를 향해 싱글싱글 웃고 있는 성희를 보며 선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차성희는 그의 아버지인 차기현 회장의 여동생이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이 싫어 어릴 적부터 유학 생활을 했던 선우와 달리 그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재벌 2세의 전형이었다.
제게 쏟아지는 관심을 거리끼지 않았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일을 숨기지 않는다. 밖에서는 냉철하다는 평을 듣곤 하는 그녀는 제 조카만큼은 아끼는 편이었다.
“흠….”
헛기침 몇 번으로 그런 성희의 입을 틀어막은 차회도가 선우를 향해 물었다.
“그게 이철준 상무 딸이 하는 거라고?”
이미 강 비서에게 보고를 받으셨을 텐데 이렇게 모르는 척 물어보시는 이유는 뻔했다. 제 입으로 해 주는 얘기를 듣고 싶으셨던 거겠지.
지금은 기업의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지만, 여전히 한제의 실세는 조부 차회도였다. 성미가 불같다고들 하는 세간의 이미지와 다르게 손자에게는 유독 마음을 많이 쓰시는 분이었다.
고개를 기울인 선우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네, 얼굴 비추는 건 최대한 줄이고 빈축 살 일 없게끔 잘 조정해 주기로 했어요.”
“강 실장 붙어 있으니 어련히 잘하겠다만은….”
성실한 대답에도 여전히 신경이 쓰인다는 듯 차회도가 미간을 모았다. 이마에 진 주름이 선명해지는 것을 보며 옆에 있던 성희가 포크로 과일을 찍어 그에게 가져갔다.
“선우가 하는 건데 무슨 걱정이세요.”
그녀가 괜한 걱정이라는 양 살가운 투로 말했으나, 조부의 미간에 들어간 힘은 풀릴 기색이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던 선우는 그 순간 걸려 온 전화에 시선을 돌렸다.
이하진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익숙했다. 방금까지 언급되었던 장본인이었으니까. 제 얘기를 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이런 찰나에 전화를 걸어 온 게 퍽 신기했다.
어쨌거나 슬슬 몸을 일으키고 싶었던 차에 좋은 구실이었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선우가 조부를 향해 예의 바르게 웃어 보였다.
“저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급한 연락이 와서.”
말을 하면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선우의 모습에 상체를 들썩인 차성희가 조부보다 한발 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벌써? 오늘도 오랜만에 봤는데 좀 더 있다 가지.”
“어머니 돌아오시면 또 얼굴 비추러 올게요.”
선우가 여행 중인 어머니를 입에 담자,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 어린 인사와 함께 저택을 빠져나온 차선우는 핸드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미 전화가 끊긴 화면에는 하진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얼마 가지 않아 끊겼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마자 선우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해영이 무슨 일 있어?”
- 전화한 사람은 해영이가 아니라 난데?
“그래…. 알았어, 하진아. 전화했던데.”
친절한 목소리였으나 진심이라곤 한 톨도 실려 있지 않았다. 허울뿐인 다정함을 눈치챈 하진이 허탈하게 코웃음을 쳤다.
물론 차선우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번드르르하고 상냥한 겉모습에 누구나 쉽게 넘어가지만, 정작 속내를 들여다보면 메마르고 차가웠다.
몇 년간 해영과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탓일까. 타인에게 쉬이 마음을 내주지 않는 걸 어릴 적부터 봐 왔으니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새삼스레 어이가 없어졌다. 물론 이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잠시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 하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선우야, 너 말도 안 되는 걸 오케이 했더라. 근데 그래서 전화했어.
맥락 모를 말을 묵묵히 듣던 선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 전 애인도 아니고 친한 형이면, 취한 애 수습해 갈 수 있지?
전 애인도 아니고 친한 형…. 멈칫했던 그는 이어진 말에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사람이라곤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다른 불필요한 말 대신 그는 걸음을 떼며 물었다.
“어디야? 지금 갈게.”
- 톡으로 위치 보냈어.
당연하다는 듯 물어 오는 선우에게 하진이 간결하게 답했다.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 확인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그녀가 있는 위치를 보내 놓았다.
장소를 눈으로 훑은 선우가 전화를 끊고 차에 올라탔다.
하진이 찍어 준 위치는 선우도 이미 알고 있는 곳이었다. 대학 시절 셋이서 종종 가곤 하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시끄럽고, 음식 냄새가 가득하고, 사람으로 북적이는 좁은 곳은 선호하지 않았으나 그곳에 해영이 있다면 말이 달라졌다.
덜컹거리는 미닫이문을 열며 들어선 그가 눈으로 가게 안을 훑었다.
“차선우, 여기!”
그런 선우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부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떠들썩하고 번잡한 테이블 사이에서 하진이 팔을 번쩍 치켜들고 있는 게 보였다.
선우의 표정이 설핏 가라앉았다. 하진에게로 다가서면서 그의 시선은 한 군데에 꽂혀 있었다. 그녀가 앉은 테이블 위로 웅크린 검은 인영. 누군지는 엎드린 등과 검은 옷 위로 보이는 동그란 머리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둘이서 마셨어?”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눈짓하며 물었다.
“어, 음. 근데 나는 한 병 정도만.”
“…….”
“말렸어. 나 말렸다?”
선우의 눈치를 살피던 하진이 겉옷을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잘 부탁한다며 황급히 빠져나가는 그녀를 구태여 잡지 않았다. 가만히 선 채 해영을 내려다보던 선우는 이내 그의 옆자리 의자를 조용히 빼 앉았다.
춥지도 않은지 넉넉한 품의 검은 후드 집업 하나만 입고 나온 모습이 눈에 걸렸다. 자신이 옷을 얇게 입으면 삐딱한 얼굴로 겉옷이며 목도리며 이것저것 챙겨 주지 못해 안달인 주제에 정작 본인은 곧잘 추위를 잊곤 한다.
선우는 검은 후드 집업 위로 드러난 깨끗한 피부 위로 손을 가져갔다. 언뜻 보이는 눈가를 쓸어내리자 축축한 물기가 손끝에 묻어 왔다. 귀찮다는 듯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도 쉬이 손을 물릴 수 없었다.
“해영아.”
자는 건 아니었는지 윤해영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팔에 가려져 있던 옆얼굴이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반쪽만 나왔는데도 얼굴이고 눈이고 전부 붉었다.
“…많이 마셨네.”
선우의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해영은 익숙하고 나긋한 음성에 눈살을 찌푸렸다. 반쯤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리면서 젖은 시선이 선우에게로 향했다.
“어.”
해영의 입술 새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제가 보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내 엎드려 있던 그가 벌떡 상체를 들었다. 눈을 비비적거리더니 자신을 뚫어질 듯 주시하는 눈빛에 선우의 입에서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린 선우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위로 곡선을 그린 눈매가 유독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런 선우를 바라보던 해영의 눈에서 차츰 힘이 풀렸다.
“나 진짜 완전 취했다. 왜 차선우 같은 사람이 보이지.”
차선우 같은 거. 해영이 뱉은 말을 조용히 곱씹은 선우가 눈을 휘며 웃었다. 답지 않게 정말 취하긴 한 모양이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침이 없었다.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선우야.”
“…왜? 왜, 진짜지?”
하하. 선우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진이가 연락했어. 취했으니까 데려가라고.”
해영은 여전히 정신이 없는 얼굴로 눈을 껌벅였다. 친한 형으로서 온 거라는 말은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차선우는 입가를 가리던 손을 내려 그대로 턱을 괴었다.
우리가 그렇게 지내기에는 함께한 밤이 길잖아, 해영아.
내뱉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하필이면 윤해영은 매달리지도 못하게 친한 친구처럼 지내자는 말로 못을 박았다.
자신을 택해 주지 않는 그가 서글픈 동시에, 언제까지 이럴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해영이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충분히 맞춰 줄 용의가 있었다. 눈속임밖에 안 된다는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구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건 그 또한 제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증거였으니까.
왜 이렇게 돌아가려고 하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너도 날 좋아하고, 나도 널 좋아하는데 뭐가 이렇게 어려워. 무의식중에 해영을 바라보던 선우의 눈매가 가늘게 늘어졌다.
그때, 내내 술기운에 취해 멍하던 눈이 스륵 접혔다. 해영의 얼굴에 걸린 힘 풀린 미소를 본 선우가 설핏 눈을 크게 떴다.
“선우 형….”
중얼거리듯 저를 부르는 모습에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입가에 옅게 들어간 보조개 위로 입술을 누르고 싶은 충동이 치켜들었다. 차선우는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꽉 쥐어야 했다.
해영은 저를 부르더니 다시 꾹 입을 다물었다. 아팠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조금 수척해진 얼굴선을 보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윤해영은 웃다가, 입술을 짓씹었다가, 천천히 무너지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힘없이 열린 입에서 서러움으로 얼룩진 목소리가 툭 흘러나왔다.
“형, 나 거지 아니야.”
뭐? 잠시 아득해진 눈앞에 번쩍 불꽃이 튀었다. 선우가 그에게로 기울어 있던 상체를 곧장 바로 했다. 그는 끊어질 듯 뻣뻣해진 목을 세우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럼 왜 우리 아빠한테 돈 줬어?”
“…….”
“형이 왜? 왜 자꾸, 왜….”
주저하던 말은 결국 끝을 잇지 못하고 잘렸다. 해영이 아랫입술을 짓씹듯 물었다. 얼굴을 보이기 싫다는 듯 고개가 힘없이 앞으로 툭 떨궈졌다.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던 선우는 손끝에서 묻어 나오는 물기를 발견했다. 심장이 바닥으로 툭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응?”
해영의 뺨을 쥔 선우가 조심스럽게 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술기운 탓인지 얼굴은 붉었고, 손바닥에 닿는 체온은 뜨거웠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친한 사이로 남자는 말을 하던 순간에도 웃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덩달아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차선우는 그의 손을 잡았다.
“네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어. 미안해. 안 그럴게. 이제 안 할게, 해영아.”
끈질기게 제 시선을 피하는 해영을 쫓으며 선우가 달래듯 말했다. 초조함에 젖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눈물이 그칠 때까지, 계속해서.
***
눈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깨질 듯한 머리에 그가 흰 침구 위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으윽.”
앓는 신음을 흘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어도 두통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베개를 붙잡고 꿈지럭거릴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감싸는 침구의 감촉에 위화감을 느낀 것도 그때였다.
자취방에 있는 침구는 이것보단 좀 더 가벼운 재질이었다. 어제 집으로 안 돌아왔나? 해영이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침대 옆 익숙한 모양새의 검은 협탁이 눈에 들어왔다. 돈도 없는데 어디 숙박 시설이라도 들어간 건 줄 알고 지레 겁먹었던 해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아.”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니, 잠깐만.
몽롱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명료해졌다. 익숙한 침대맡에 안심할 새가 아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순간 찌르르 머리를 울리는 고통에 질끈 눈을 감았다.
손을 들어 머리를 짚은 채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두통이 가신 뒤 천천히 눈을 뜨자,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흰 이불보가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해영은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왜….”
하필 선우 형 집이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른세수를 하는 동안 머리로는 열심히 어젯밤을 떠올렸다.
저녁을 먹고 나서 2차로 술을 마시러 갔고 거기서 하진 누나에게 주정을 부렸다. 아, 미친. 괜찮다고 센 척할 땐 언제고, 선우 형을 마지막으로 봤던 날이 생각나 비죽 눈물이 났다. 아마 아플 때 제게 죽이며 약이며 챙겨 줬던 것이 차선우라는 말을 들은 게 도화선이었으리라.
울고 싶지 않았으므로 테이블에 기대 감정을 삼켰다. 어물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누군가 자신을 불러 왔고, 그게 차선우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럼 왜 우리 아빠한테 돈 줬어?’
‘네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어. 미안해. 안 그럴게. 이제 안 할게, 해영아.’
“……하.”
시발.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장면에 해영이 머리를 싸맨 채 눈앞을 가렸다. 깜깜해진 시야 속에서 그는 소리 없이 거친 욕설을 씹어 삼켰다. 이미 잠기운이 가신 머릿속에서는 제가 내지른 말만이 또렷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해영은 그 말만큼은 선우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쪽팔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를 탓하는 게 옳은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그는 순전히 선의에서 베푼 일이 아닌가. 그가 베푼 만큼 돌려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해 봤자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문제였다. 맨정신으로는 꺼내지 못했을 말을 곱씹던 해영은 문득 하진이 종종 제게 자존심이 세다고 말하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존심도 접은 채 그의 곁에 남기로 했는데. 한숨을 내쉬는 해영의 귓가에 나긋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깼어?”
흠칫, 어깨를 떨었던 해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선우는 반쯤 열린 문 앞에 비스듬히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유하게 휘어져 있던 눈이 완전히 곡선을 그렸다.
“…형.”
“응?”
뒤늦게 그를 부른 해영은 얼굴을 쓸던 손을 내리며 물었다.
“나 왜 여기 있어?”
“기억 안 나?”
선우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 안 나냐고?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거라면, 당연히 기억났다. 해영이 여태 술을 진탕 먹고도 한 번도 필름이 끊겨 본 적 없다는 건 차선우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는 게 나았을 텐데. 선우의 손에 붙잡힌 채 애처럼 징징거렸던 것까진 분명히 기억이 났다. 정작 지우고 싶은 장면 대신, 그 이후로의 기억이 흐릿했다.
“기억나지. 드문드문하긴 하지만.”
해영은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제 대답에 웃는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툭, 선우의 머리가 문가에 닿았다.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듯한 시선에 해영이 괜스레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냥 택시에 집어넣지. 나 취해도 알아서 집 찾아가는데.”
“알아. 알고는 있는데….”
올라간 입매가 점차 흐려졌다. 그는 다소 메마른 표정으로 해영을 주시했다.
“친한 형이라며, 해영아.”
쿵, 묵직한 물체가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해영은 본능적으로 눈을 굴렸으나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어쩐지 숨이 턱 막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는 동안, 선우는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취해서 혼자 보내기 걱정되는데 우리 집으로 데려온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설득력 있는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친한 동생이 취해서 걱정하는 마음에 집으로 데려왔다, 그게 선우가 한 말의 요지였다. 말만 두고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대학생 때 술에 잔뜩 취한 이를 자취하는 친구들이 수거해 가는 모습을 종종 봤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었는데….
제가 먼저 편하게 지내자고 한 입장에서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윤해영은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옷도 형이… 갈아입혔어?”
그가 제 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분명 흰 티 위로 검은 후드 집업을 입고 있었는데,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하의도 마찬가지였다.
“응. 왜?”
차선우는 무슨 문제가 있냐는 양 되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해영은 조금 혼란스러운 기분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 이건 아니지 않나? 그냥 친구 사이에 옷을 직접 갈아입혀 줄 수가 있나?
해영은 자신의 상황에 차선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입해 보다가, 속이 불쾌해져서 상상을 그만뒀다.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옷을 갈아입혀 줄 만큼 술 취해 잠든 친구가 예뻐 보이진 않았다. 설핏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를 보며 선우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옷 정도는 갈아입혀 줄 수 있는 것 같은데.”
“…….”
“그러니까…. 친한 사이?”
“아, 알았어.”
해영의 입에서 떨떠름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친한 사이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묘하게 말끝이 올라가 있었다. 영 입에 붙지 않는 단어를 가까스로 기억해 낸 듯한 어조였다. 해영으로서는 선우가 꺼낸 카드에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제가 뱉은 말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한숨을 삼킨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으로 발을 딛자, 부드러운 러그의 감촉이 느껴졌다.
“형, 나 일단 씻고 나올게.”
해영이 여전히 문가에 서 있는 선우를 향해 말했다. 그가 스륵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간 해영은 자연스럽게 칫솔 거치대를 바라보았다.
“맞다, 칫솔 없지.”
헤어진 사이에 당연하게 그의 욕실에서 제 칫솔을 찾고 있었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들 하는 모양이다.
멋쩍은 낯으로 눈썹 위를 긁적이던 해영이 거울이 붙은 욕실 수납장을 열었다. 그 안에 새 칫솔 몇 개가 늘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을 확인한 해영의 입에서 놀란 듯 야트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
그 안쪽에 보이는 익숙한 칫솔에 그가 미간을 모았다.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보아도 제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확인했지만, 밖에 꺼내어져 있는 칫솔은 선우의 것 하나뿐이었다.
어렴풋하게 사용감이 남아 있는 칫솔이 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와는 칫솔을 색으로 구분해 사용했는데, 안쪽에 놓인 칫솔의 색이 제가 사용하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다 그것을 손에 쥔 해영이 치약을 짠 다음 입으로 가져갔다.
거울을 통해 비친 얼굴은 좀 부스스하긴 했으나 다행히 그렇게까지 초췌하진 않았다. 해영이 조금씩 뜬 앞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그 상태로 멍하니 양치질을 하고 있을 때, 잊을 뻔했다는 듯 욕실 안으로 선우가 들어섰다.
“아, 해영아. 칫솔은….”
“엉?”
입에 칫솔을 문 채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누르고 있는 탓에 앞머리가 시야를 가렸다. 뒤늦게 손을 떼자,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우가 보였다.
웃음을 참으려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난처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애매하게 찌푸려진 얼굴을 보며 해영은 갑자기 덜컥 불안해졌다. 입 안에 있던 칫솔을 빼고 세면대에 물고 있던 거품을 뱉은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 것인 줄 알았는데, 혹시 이 칫솔의 주인이 따로 있나? …선우 형은 집에 다른 사람 데려오는 일 없는데. 아니, 여태 없었을 뿐이지 헤어졌던 동안에는 모를 일이다.
‘아, 미치겠네.’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선우를 바라보던 해영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이거 내 거 아니야?”
“네 거 맞아.”
선우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긍정에도 해영은 쉬이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 해영과 시선을 마주하던 차선우는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해영아. 씻고 나오면…, 우리 같이 아침 먹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해영이 다시 칫솔을 물었다. 그가 양치하는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던 선우는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그냥 아침 같이 먹게 씻고 나오라는 말을 저렇게 살살 웃으면서 할 일인가. 차선우는 걸핏하면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화법을 구사하곤 했다. 거기에는 나직한 웃음기가 스며든 특유의 사근사근한 음성이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거울에 비친 저를 주시하던 해영이 다시 고개를 숙여 세면대에 거품을 뱉었다. 그대로 잠시 쏟아지는 물을 바라보다가, 컵에 든 물로 입을 헹궈 냈다.
제가 하는 일련의 동작이 괜히 하나하나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좋지 않은 징조였다. 해영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토해졌다.
정신 차리자. 윤해영, 형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흔들리지 말자. 주제 파악 좀 하자, 어?
세면대를 붙잡고 한참이나 다짐하던 해영이 이내 부엌으로 향했다. 침실을 나설 때부터 코끝을 간질이는 냄새가 익숙했다.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그릇을 확인해 보니 예상대로 아침 메뉴는 수프였다.
그건 술을 마시고 난 아침이면 늘 먹던 음식이었고, 촬영할 때도 선우가 해 줬던 해장 요리이기도 했다. 테이블 앞에 선 채 수프 그릇을 내려다보는 해영에게로 선우가 다가왔다.
“해영아.”
다정한 부름에 해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앉으라는 듯 의자를 고갯짓하는 선우가 보였다. 그는 의자를 꺼내 앉으며 그릇 옆에 가지런히 놓인 숟가락을 쥐었다.
수프로 해장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차선우 때문이었다. 스물 초반부터 그가 해장으로 수프를 챙겨 준 탓에 자연스레 익숙해진 것이다. 메뉴도 항상 같은 것은 아니었고, 주기적으로 다른 수프가 나오곤 했다.
이번에는 양배추가 잔뜩 들어간 수프였다. 윤해영은 후추통을 들어 수프에 잔뜩 뿌린 뒤 그릇 안을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어제는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어제?”
“응, 원래 그렇게 많이 안 마시잖아.”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말에 수프를 휘젓는 손이 느려졌다. 해영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자 차선우는 금방 고개를 기울이며 눈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가 꺼내는 말은 대부분 연인이던 시절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5년을 만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 혹은 맞지 않는 지점을 서로 양보하며 배워 간 것들. 멈칫하게 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쌓인 것들은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당연하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그럼 도무지 매몰차게 굴 수 없어지는 것이다. 헤어진 후 촬영을 하면서 다시 만났을 때도, 지금도.
“오랜만에 누나 만나서 그랬나. 하진 누나 보니까 기분이 좋았어.”
태연하게 대답하며 해영은 수프를 한 입 삼켰다.
말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서 그랬던 건 아니지만, 거짓을 뱉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지 않나. 아팠을 때 그가 자신을 챙겨 줬다는 말을 하진에게 들었을 때부터, 생각이 오직 그곳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잠시 방황하던 해영은 끝내 숟가락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면서 난 잘그락 소리가 작게 울렸다.
“어제는 미안.”
한숨을 삼킨 그가 주저함 없이 말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사과에 선우가 수프를 휘젓던 손을 멈춘 채 고개를 들었다.
“뭐가?”
“그, 취해서 형한테 괜히… 뭐라고 한 거.”
변명이라곤 없는 깔끔한 사과였다. 해영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선우의 입이 천천히 닫혔다.
대답이 돌아온 건 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한참이나 말없이 해영을 바라보던 그가 작게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해영아, 네가 이런 사람이라 좋아하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
“…….”
“속상해.”
나지막하게 떨어진 목소리에 이번에는 해영의 입이 닫혔다. 굳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해영을 보며 선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한테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미안해하지 말라고?
…어떻게? 수저를 쥔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해영은 제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던 순간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던 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받기만 한 주제에 그에게 준 것은 결국 상처뿐이지 않나. 차선우를 볼 때면 당연한 부채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해영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도는 것을 눈에 담으며, 선우는 들고 있던 식기를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미안해하지 마. 차라리 화를 내고 원망해. 그런데, 나한테서 멀어지려고는 하지 마.”
목소리는 나긋했으나, 평소답지 않게 단호했다. 유독 가라앉은 목소리가 집요하게 해영의 가슴께로 파고들었다.
“그러려고 이런 사이로 남자고 말했던 거 아니야? 나랑 멀어지기 싫어서.”
“…….”
이런 사이. 그가 뱉은 말에 우습게도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움직이지 않는 목으로 해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멀어지기 싫어서 이런 사이로라도 남자고 한 건 자신이었다. 차선우를 아예 안 보고 살 수는 없었으니까. 관계의 이름을 바꾸면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조금이나마 덜 염치없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렇게, 그의 곁에 있으면서 조금씩이나마 빚을 갚아 나가고 싶었다. 언젠가는 선우 형을 바라보는 것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숟가락을 쥔 채 고민하던 해영이 시선을 들었을 때였다. 처음부터 그를 보고 있던 선우가 슬쩍 눈을 접어 웃었다. 저를 보며 빙글빙글 웃는 낯에 윤해영은 도리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또 저렇게 웃고 있지?’
뜻 모를 웃음이었으나, 저런 웃음을 지을 때 그는 곧잘 엉뚱한 상상을 하거나 상대를 곤란하게 하는 말을 뱉었다. 윤해영은 그런 차선우에게 제가 쉽게 넘어간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아주 조금 불만스러운 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내가 어떻게 웃었는데?”
곡선을 그리며 접힌 눈매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차선우는 이제 턱까지 괸 채 무슨 말이 이어질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웃긴….”
저런 미소를 지으면서 살랑거리는 것에 깜박 넘어간 전적이 이미 숱하게 많았다. 해영이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선우가 능청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문득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먼저 아무렇지 않게 지내자고 한 주제에 계속해서 의식하는 자신도 웃긴 건 마찬가지였지만…. 따지고 보면 원인 제공을 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꼬시는 사람처럼. 응, 지금 그렇게, 눈웃음치는 거.”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숟가락이 선우 쪽으로 향했다. 턱을 괸 채 웃는 낯이던 그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기분 좋아서 웃은 건데….”
뭐래. 눈을 깜박이며 순진무구한 척 구는 선우를 보며 해영은 헛웃음을 삼켰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해영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정신 차리자, 윤해영. 차선우한테 흔들리면 너는 미친 새끼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수프를 한 숟갈 떠 올렸을 때였다. 식탁에 앉아 놓고 식사를 할 생각은 없는지, 선우가 낮게 웃으며 물었다.
“흔들려, 해영아?”
귓가에서 다정하게 부서지는 음성이었다. 제 마음속을 읽은 것 같은 물음에 해영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나야 좋은데.”
“아, 형!”
그는 선우를 노려보면서 허공에 들렸던 수저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만해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응…. 정말 아니야?”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아니긴. 너무 맞아서 문제였다. 돌겠네, 진짜.
눈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내젓자, 선우의 눈이 의심스러운 빛으로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얼마간 눈빛을 주고받다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선우였다. 단호한 표정의 해영을 보며 그가 한숨을 내쉬듯 웃었다.
“알겠어. 그러니까 혼자 참고만 있지 말고 속상한 건 나한테 다 말해 줘. 미안해하지 말고.”
“…….”
“나는 네 말 다 들어줬어. 너도 들어줄 수 있잖아.”
그건 타당한 등가교환이었다. 차선우는 자신의 일방적인 제안을 수락해 줬고, 그렇다면 자신도 돌려주는 게 있어야 했다.
“알았어.”
해영의 입에서 느릿하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선우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어진 정적 속에서 해영이 다시 수저를 들었을 때였다. 어느 정도 미지근해진 수프를 열심히 떠먹던 그가 불현듯 스쳐 지나간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파자마에 핸드폰이 든 주머니 같은 것은 없었다.
“형, 나 핸드폰은?”
분주함이 어린 목소리에 선우가 아, 하고 나직한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겉옷 주머니에 넣어 뒀어. 옷은 전부 옷장에.”
그가 말하는 옷장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은 탓에 해영은 일어나는 대신 침실의 문가를 힐금거렸다. 그러다 곧 거실의 벽면에 걸린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시계는 벌써 열 시에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시…. 나 이제 일어나야 할 거 같은데.”
“토요일인데 어디 가?”
“아르바이트.”
선우의 말에 짧게 대답한 해영이 수프 그릇을 빠르게 비웠다. 입을 꾹 닫은 채 우물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선우는, 그가 입가심으로 물을 마시고 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어디서 하는데?”
나긋한 음성이 귓가에 떨어졌다. 그 짧은 물음에 멈칫한 해영이 눈을 굴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물음이었지만, 상대가 선우여서인지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알려 주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되는데, 그래도….”
말꼬리를 늘리는 목소리가 불안했다. 해영은 그에게서 또 그놈의 우리 사이 타령이 나오기 전에,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아니, 제가 했던 말대로 정말 거리낄 것이 없는 사이라면 아르바이트하는 곳을 알려 주는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학교 중문 쪽에 있는 거. 형이랑 예전에 몇 번 간 적 있는데….”
차선우는 제 말에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가 식사를 마치는 것을 기다리던 해영은 찾아온 고요함에 한결 마음을 놓았다.
먹은 걸 정리하고 난 해영이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문고리를 쥔 그가 현관 앞까지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온 선우를 머쓱하게 돌아보았다.
“형, 나 이제 갈게. 챙겨 줘서 고마워.”
“응. 조심히 가, 해영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대화,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인사말. 문고리를 쥔 채 해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이 정도 거리에서라면 제 마음을 숨긴 채 충분히 그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드럽게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해영은 익숙한 향이 감도는 선우의 집을 빠져나왔다.
***
그렇게 그의 집에서 나오고 난 뒤에는 다시 마주할 일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일하는 카페에서 차선우를 발견하기 전까진.
“주문 도와드리겠….”
시발… 습니다….
얼어붙은 해영의 눈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차선우는 눈을 내리깐 채 힐끗 카운터 앞에 놓인 메뉴판을 훑었다. 느릿하게 둘러보던 시선이 오늘의 추천 커피가 적힌 글라스 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결정한 듯, 그가 아래를 보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해영은 굳은 채로 선우의 몸짓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래를 향하던 속눈썹이 느린 속도로 나풀거리듯 올라가는 것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찼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설핏 눈꼬리를 휘며 웃어 보였다.
…또였다.
정말 저렇게 웃으면서 꼬시는 게 아니라고.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으나 해영은 꾹 입을 다물어 삼켰다. 선우는 길게 뻗은 검지로 카운터 앞의 글라스 보드를 가리켰다.
“음, 이거 주세요. 오렌지연유라테.”
주문하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나긋하고 부드러웠다. 해영은 순간 멈칫하긴 했으나, 이내 손을 들어 포스기를 눌렀다.
“따뜻한 거로 드릴까요?”
“네.”
“따로 추가할 건 없으시고요.”
“네에.”
그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지금의 상황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짧은 대답이었으나 묘하게 늘어지는 말꼬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묵묵히 포스기를 누르며 그가 말한 메뉴를 추가한 해영이 선우가 내미는 카드를 건네받았다.
이윽고 자연스럽게 계산을 마친 그가 영수증과 함께 카드를 건넸다. 선우는 그걸 돌려받으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 일해?”
“아니….”
그의 물음에 답하던 해영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카운터 안쪽에 있는 스태프 룸에서 유영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손님이 온 것을 확인하곤 눈을 크게 뜨며 해영의 옆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다시 시선을 돌리자,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서 있는 선우가 보였다. 윤해영은 입을 열어 유영에게 향한 시선을 손쉽게 제게로 다시 돌려놓았다.
“둘이 같이 일해.”
짤막하게 대답한 해영이 잠시 고민하듯 입을 닫았다.
누구인지까지 소개해야 하나? 구구절절 제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도 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의 물음에 스스럼없이 대답한 탓에 옆에 선 유영이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서로를 소개해 줘도 그다지 당황스러워하지 않을 듯했다. 짧은 고민을 마친 그가 제 옆에 선 유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김유영이고, 아, 유영이도 우리 학과였어. 나보다 한 학번 아래였나?”
“아뇨! 두 학번 아래예요. …선배님이세요?”
“응, 여긴 선우 형. 차선우.”
나이만 따지면 자신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그는 1년 이르게 학교에 입학했었다. 학번을 떠올려 보던 해영이 유영과 그의 학번 차이를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쯤 되면 둘이 서로를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해영의 시선이 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선우에게로 향했다. 자신만을 곧게 주시하고 있는 눈길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이윽고 그가 유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선우의 입가에 그린 듯한 단정한 미소가 걸렸다. 타인을 대하는 적당한 온도의 미소는 확연히 제게 짓는 미소와는 달랐다.
꼬시는 거 아니라더니…. 선우를 바라보던 해영의 입가에도 씁쓸한 미소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형. 앉아 있으면 나왔을 때 가져다줄게.”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걸 지켜보던 그는 카운터로 다가오는 손님을 발견하고 말했다.
“응, 알겠어.”
선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가 창가 쪽의 자리로 향하는 것을 본 해영이 다음 사람의 주문을 받았다.
학교 근처기는 해도, 아직 학기가 시작하지 않은 데다가 주말이어서인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응대를 마친 해영이 힐긋 선우가 앉아 있는 쪽을 확인했다.
선우가 앉은 창가 자리에는 한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자신을 구경하고 있었던 듯한 눈과 마주친 해영이 얼떨결에 손을 들었다.
‘…미쳤나, 손은 왜 들어.’
실없는 행동이었음을 깨닫고 금방 손을 내리자, 선우의 입꼬리가 장난스레 올라가는 게 보였다.
멀리서도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해영이 한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선우가 갑작스레 나타난 탓에 속절없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금방 정신을 가다듬고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그냥 선배, 그냥 형, 그냥 차선우.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을 잔뜩 곱씹으면서.
주문지를 들고 커피 머신 앞에 선 유영의 옆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우와, 저 선배님 얘기 듣기만 했지 뵙는 건 처음이에요.”
샷을 내리던 그녀가 제 옆에 선 해영을 향해 속닥였다. 어딘가 들뜬 듯한 목소리에 해영이 우유를 꺼내다 말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선우 형?”
“네, 얘기는 많이 들었거든요. 근데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약간 도시 전설 같은 느낌이었어요.”
“형은 뭐, 어딜 가나 눈에 띄니까.”
해영이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손으로는 음료 제조 컵에 우유를 부었다. 원래 들어가는 양보다 시럽을 적게 넣은 그가 유영의 앞으로 컵을 넘겨주었다.
“오빠도 그렇잖아요. 대학 다닐 때 오빠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이어진 주문의 음료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꺼내는 도중 들려온 말에 해영이 어설프게 웃으며 유영을 돌아보았다.
“나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돌아?”
“으음… 잘생겼다?”
불안해한 것이 무색하게 칭찬이 되돌아왔다. 슬그머니 얼어 있던 해영의 얼굴에 다시금 여유가 찾아왔다.
경영학과는 사람이 많은 대형과 특성상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되지 못했다. 사고를 쳤거나, 사고를 칠 만한 사람인 경우에 대체로 소문이 돌고는 했기 때문이다. 지레 제 대학 시절을 되돌아보던 해영이 유영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아아.”
그의 입에서 알 만하다는 듯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방금까지 내보이던 조심스러운 태도는 어디 갔는지, 말해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짓궂은 표정에 유영이 치, 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완성된 연유라테를 컵으로 옮겨 담으며 은근히 해영을 눈짓했다.
“오빠 여친분 애칭이 공주님이라는 것도요.”
“…….”
“그거 진짜예요?”
해영이 슥 시선을 돌리며 건조된 오렌지칩이 든 밀폐 용기를 열었다.
그런 해영의 옆에 선 유영은 끈질기게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왔다. 제법 궁금한 모양이었다. 모르는 척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쉽게 놔주지 않을 듯했다. 라테 위에 오렌지슬라이스를 올리며 해영은 한숨처럼 웃었다.
“어, 진짜야.”
“헐.”
“근데 헤어졌어. 그리고….”
따지자면 여자 친구는 아니었다. 뒷말을 삼킨 해영이 카운터 너머로 보이는 공주님께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주 같은 건 여전하다. 평생 귀하게, 예쁘게만 대해 주고 싶었다.
“헉,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괜찮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물에 녹인 해영이 유영을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그놈의 공주님 소리. 대학에서 딱 한 번 했는데, 그 한 번으로 졸업할 때까지 놀림을 당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끝인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들으니 어깨가 절로 움찔거렸다.
빠르게 완성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연유라테를 쟁반에 든 해영이 선우가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연유라테가 든 잔을 테이블에 올려 두며 퍽 예의를 차린 목소리를 흘렸다.
“오렌지연유라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선우는 장단에 맞춰 웃으며 컵을 들었다. 위에 떠 있는 말린 오렌지를 잠시 구경하나 싶더니, 이내 입가로 가져가 천천히 한 모금을 홀짝인다. 목울대가 움직이기도 전에 하얀 미간에 설핏 주름이 잡히는 게 보였다.
아. 점점 미묘해지는 낯을 주시하던 해영이 혹여나 웃음소리를 흘릴까 이를 꽉 물었다. 이럴 줄 알았다. 단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데다가 라테는 입에 대지 않으면서 아무거나 시킨 것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기본보다 덜 달게 제조하기는 했지만, 그의 취향에서 벗어난 맛일 것이 분명했다. 곤란한 기색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던 시선이 느릿하게 해영에게로 기울었다.
“…왜 웃어.”
선우가 웃음을 참고 있는 그를 향해 툭 물었다. 고작 한 모금 마셔 놓고는 얌전히 잔을 내려 두는 모습을 보며 해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 웃었어.”
“입 옆에 보조개 보여.”
눈꼬리를 가늘게 늘어트린 채, 선우가 손을 들어 자신의 볼 위를 툭툭 가볍게 쳤다. 그에 더듬더듬 제 입 주변을 매만지던 해영이 결국 어깨를 으쓱거리며 씩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태 들고 있던 나머지 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어차피 차선우가 고른 메뉴는 더 먹지도 못하고 그대로 관상용이 될 터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그를 모른 척할 수 없어 윤해영은 그를 보며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혹시 다른 테이블에서 들을까 속삭이듯 말한 그는 숙였던 상체를 다시 들었다. 해영은 곧바로 몸을 돌리려다가, 자신을 붙잡아 오는 목소리에 멈춰 섰다.
“저기.”
저기?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슬쩍 눈썹을 치켜드는 찰나, 선우가 빙긋 웃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전화번호 좀 알려 주세요.”
…뭐라고?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귀를 의심하던 해영이 반쯤 돌아간 몸을 바로 했다. 정면에서 마주한 선우는 여전히 눈을 접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해영은 그의 손끝에 걸린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장난치지 마, 형.”
“장난 아닌데….”
흐려지는 말끝에 힘없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선우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흐릿하게 비틀렸다. 그는 제 말을 그저 장난이라 치부하는 게 조금 서운하다는 듯, 동시에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듯 체념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보며 해영은 도리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느릿하게 열리는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짐작할 수 없었다. 선우는 해영의 긴장한 입매를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
“전화번호, 바꿨지?”
에둘러 말하는 것 없이 던져진 직구였다. 해영은 예상치 못한 물음에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쟁반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실렸다.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전화번호를 바꾼 건 그와 헤어진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 이후로 만난 적도, 연락한 적도 없으니 선우로서는 제 연락처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윤해영은 그렇게 선우에게서 자신을 지워 내고자 했다.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그의 앞에서 보다 떳떳해졌을 때뿐이라고….
“뭐라고 하려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없고.”
선우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닥이듯 그를 붙들었다.
“그래도 해영아.”
나직한 부름이 과거의 기억에 잠겨 굳어 있던 해영을 단숨에 꺼냈다. 차선우는 제가 내민 핸드폰을 눈짓하며 말했다. 아래로 눈꺼풀을 내리깐 탓에 가지런한 속눈썹이 길게 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해영의 시선이 핸드폰이 아닌 제게만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가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제 우리 사이에 번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잖아.”
“…….”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긴 싫은데. 너랑 연락하려면 그렇게 돌아가야 해, 나?”
입가에 걸린 장난스러운 미소와는 달리 한숨 어린 목소리가 해영의 퇴로를 차단했다. 사근사근하게 웃고는 있지만, 그가 받았을 상처가 상상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사이에. 이제. 번호 정도는.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들이 뒤죽박죽 머릿속에서 섞여 들었다. 이윽고 천천히 조립되는 문장에 해영은 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쟁반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괜스레 머리를 털듯 얼굴을 가린 해영이 입술을 짓씹었다. 입을 떼면 뜨거운 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줘.”
선우는 제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가는 해영을 보며 소리 없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의 곁에 남고 싶어 허물없는 사이로 지내자며 꺼냈던 말의 책임이 날카롭게 되돌아왔다. 선우의 곁에 있으면서 느끼게 될 모든 고통을 감수하기로 한 건 자신이었다. 해영은 태연하게 다가오는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다시 만난 그를 거절할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학교는 한적했으나, 도서관의 열람실만큼은 늘 예외였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 선점이 어려운 건 학기 중이나 방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법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해영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였다.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으로 나와 공부하던 해영은 주변에서 하나둘 식사를 위해 자리를 뜨는 것을 발견했다. 책에서 눈을 떼고 시간을 확인한 해영 또한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법학관을 빠져나오자 2월인데도 여전히 서늘한 공기가 폐부 가득 들어찼다.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며 해영은 손을 들어 목덜미를 주물렀다.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몸이 찌뿌둥했던 탓이다.
“오빠!”
때마침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다가온 유영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기다린 건 어제 일하면서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유영이 어차피 가는 길이 겹치니, 도서관에서 만나서 같이 점심을 먹고 함께 카페로 가자 말해 왔던 것이다. 해영으로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왔어?”
“네. 이제 밥 먹으러 가요.”
씩씩하게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유영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어?”
“왜?”
“저 도서관 자리에 핸드폰 두고 왔나 봐요.”
유영이 빈손을 들어 보이며 비시시 웃어 보였다. 멋쩍은 미소를 짓는 그녀를 따라 해영도 픽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빨리 올라갔다 올게요. 5분만!”
“유영아, 뛰지 말고 조심히 빠르게 다녀와.”
해영이 몸을 돌리는 유영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슬쩍 미소를 머금은 채 법학관 안으로 달리듯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유영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윤해영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었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핸드폰의 알림을 전부 꺼 두는 탓에, 확인하지 못한 연락들이 제법 쌓여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 것은 당연히 선우의 메시지였다. 해영은 화면에 떠올라 있는 그의 이름을 보며 애매하게 눈썹을 모았다.
‘이제 우리 사이에 번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잖아.’
불현듯 다시 떠오른 목소리에 기분이 심란해졌다.
주말에 카페로 찾아왔던 선우가 내미는 핸드폰을 해영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제 헤어져 남이 된 사이가 아닌 앞으로도 볼 사이라면 번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번호를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우는 주말 내내 카페에 와서 해영이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고, 그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자리를 떴다. 걸핏하면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선우형
해영아, 뭐 해?
이제 알바 가려고 나왔어
선우에게 간단한 답을 보낸 해영이 잠시 고민하다 짤막한 메시지를 연이어 보냈다.
형은?
선우형
점심 식사 하고 있어. 밥은 먹었어?
아직ㅋㅋ 근데 가는 길에 먹을거야
핸드폰을 손에 계속 붙들고 있는 채인지, 답하자마자 거의 바로 선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미 본 것을 모르는 척할 수 없어 반사적으로 연락을 이어 가던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평범한 사이 같나?’
친구 사이에 서로가 뭐 하고 있는지가 그렇게 궁금한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아는 형 동생 사이에는 서로가 그렇게 궁금하고 보고 싶고 그러지 않았다. 이를테면….
“윤해영.”
저 사람처럼.
“아, 경수 형.”
마땅한 예시를 떠올리던 해영의 눈앞에 로스쿨 동기인 경수가 나타났다. 같은 학과를 나온 데다가 작년에 수업을 같이 들어 몇 번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와 했던 건 대화라기보다는 그저 말을 섞은 것에 가까웠다.
“너 박유영이랑 친해? 둘이 썸 타는 사이?”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그와 가깝게 지내지 않은 건 이래서였다. 입만 열면 밤낮으로 여자 얘기를 해 대서. 해영이 헛웃음을 흘리며 경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해영은 제 생각이 틀렸음을 빠르게 인정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배경수는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없었다. 선우와 얽힌 사이에 불편한 게 있다고 해도, 그와 개경수를 동일 선상에 둘 수야 없었으니까.
“근데 왜 둘이 도서관에서 같이 나와? 너랑 대화하는 거 같던데?”
배경수는 은근한 어조로 대놓고 유영에 대해 물어 왔다. 눈을 굴리던 해영이 손을 들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담배 냄새가 훅 풍겨 오는 것을 보니, 아마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저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따로 공부하다가 점심 먹으려고 이제 만났어요. 그냥 시간 맞아서.”
“와, 씨발. 나한테는 맨날 시간 없댔는데. 유영이가 먼저 먹자고 했어? 쟤 눈 존나 높다던데 너한테 마음 있나?”
“…뭐.”
말하는 거 개 같아서 못 들어 주겠네. 해영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흘렸다.
타인을 싫어하고 싶지 않아도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 주는 인간들이 있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그의 별명이 괜히 개경수인 게 아니었다.
‘이런 인간이랑 선우 형을 어떻게 비교해.’
해영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유영이 언제쯤 나올지 생각하던 그가 이윽고 경수를 쳐다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유영이 시간 없는 거 맞고. 그래도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 시간 맞는 사람이랑 같이 먹는 거죠.”
툭 꺼내진 말에 경수의 표정이 스멀스멀 굳었다. 해영은 그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한발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맞다, 형. 형사법 이번에도 김인호 교수님 수업 들어요? 저 작년에 냈던 과제 보여 드릴까요.”
“뭐? 진짜?”
“네. 근데 판례는 새로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니까, 참고만요. 형 이번에는 유급하지 말라고.”
“야이 씨.”
유급하지 말라는 말에 경수의 입에서 기어코 된소리가 튀어나왔다. 짜증스러워하는 얼굴에도 해영은 능청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경수는 쉬이 화를 낼 수 없었다. 게다가 해영이 과제물을 공유해 주겠다는 형사법 강의는 그가 유급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신경질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는 경수를 보며 해영 또한 반듯한 이목구비 위에 시원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이 진상, 언제 꺼지지. 웃는 낯으로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좀 늦었죠. 핸드폰 두고 갔더니 누가 분실물인 줄 알았나 봐요. 분실물 보관함에 있던 거….”
유영이 가쁜 숨을 고르며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유영이도 있네? 안녕.”
“어어? 안녕하세요, 선배….”
배경수는 그녀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유영이도 있네? 그가 뱉은 말을 곱씹던 해영이 실소를 삼켰다. 처음부터 목적은 그녀였으면서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제법 번지르르했다.
“밥 먹으러 가는 거면 나도 껴도 되지? 안 그래도 유영이랑 밥 한번 먹어야 하는데.”
얼씨구.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던 해영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렸다. 최근에는 다른 사람과 부딪칠 일도 없었을뿐더러, 선우에 관한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 있던 터라 세상에는 진상들도 많다는 것을 잠시 잊고 살았다.
유영이 돌아오기 전에 보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경수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해영이 문득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위로 그사이 선우가 보내 놓은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선우형
뭐 먹을 거야?
혼자 먹어?
일하는 곳 근처에서?
해영아?
ㅠㅠ
무슨. 물음표가 이렇게 많아. 해영은 선우가 보낸 메시지를 읽다 말고 숨을 들이켰다. 와중에 문자 끄트머리에 달린 모음 두 개가 눈에 걸렸다.
귀엽게….
차선우는 맞춤법 하나 틀리지 않고 문자를 보내는 편이었다. 이모티콘도 ^^이나 ㅠㅠ만 쓰고 그 흔한 캐릭터 이모티콘도 쓰지 않았다. 언뜻 딱딱하게도 보일 법도 하건만, 메시지를 읽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그가 짓는 미소나 다정한 목소리 같은 것들이 떠오르곤 했다.
이제 제 것이 아닌 다정함을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한층 더 심란해진 해영이 목 뒤를 주무르며 한 손으로 키패드를 눌렀다.
유영이랑 카페 근처에서 먹으려고
잠깐 메시지에 정신이 팔린 사이 배경수는 밑도 끝도 없이 유영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답을 보낸 해영은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집어넣고 고개를 들었다.
“괜찮지?”
“으음. 저는 상관은 없는데….”
마침 그녀의 시선이 제게 힐끔 향했다. 마주친 시선 속에서 유영이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전혀 상관없지 않은 눈빛이었다.
해영은 뒷덜미를 쥐고 있던 손을 내리며 씩 웃었다.
“안 괜찮아요. 우리 오늘 밥 먹으면서 할 얘기가 있어서. 다음에 먹어요, 형.”
“뭐?”
“제가 맛있는 거 살게요. 다음에 같이 식사해요.”
“야, 내가 너랑 왜….”
“아아. 형.”
혀엉, 하고 말꼬리를 늘리는 해영을 보며 경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를 향해 생글생글 웃고 있는 걸 보니 말문이 막히기까지 했다.
해영은 입을 달싹이는 경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를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유영에게 말했다.
“갈까? 늦으면 안 되니까.”
“네!”
제법 발랄한 대답이 돌아왔다. 해영은 반쯤 몸을 돌린 채 꾸벅 목 인사를 한 뒤 걸음을 뗐다. 유영 또한 부랴부랴 경수에게 인사를 건네며 해영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법학관에서 벗어나자 천천히 걸음을 늦춘 그가 유영의 속도에 맞췄다. 중문 쪽으로 나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해영에게 물어 왔다.
“오빠, 저 선배랑 싸웠어요?”
“응? 아니?”
“근데 철벽 뭐예요? 말로만 듣던 윤해영 철벽을 눈앞에서 봤는데?”
“그게 뭐야.”
웃음을 터트리던 해영이 이내 멋쩍은 낯으로 눈썹 위를 매만졌다. 자신이 그랬던가. 다른 사람한테 벽을 치는 타입은 아닌데.
아닌가. 떠올려 보니 선우와 연애하는 동안에는 타인에게 정도 이상의 호의를 베풀지 않으려 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예의에서 벗어나는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대학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당연히 선우 형이었다. 오래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해영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불편한 상태에서는 뭘 먹어 봤자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먹고 체하더라도 함께 있겠으나, 배경수는 좋아하긴커녕 오히려 거슬리는 구석이 있는 상대가 아닌가. 해영이 제 옆에서 걷고 있는 유영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저 형이 너한테 관심 보이는데 같이 먹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오빠도 눈치챘어요?”
“어떻게 못 채.”
유영이 없을 때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면 더더욱.
미묘하게 실소가 섞인 해영의 덤덤한 대답에 유영이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할까 말까 하는 얼굴로 눈을 굴리던 그녀가 결심했는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짜증 나 죽겠어요.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톡 보내서 영화 보자고 하고,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같이 밥 먹자고 그러고.”
해영이 듣고 있다는 듯 설핏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제게 관심이 없다면, 무작정 들이대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불쾌하게 만들거나 불편하게 할 수 있으니까. 미간을 찌푸린 채 유영의 말을 듣던 그가 문득 찾아온 깨달음에 야트막하게 입을 벌렸다.
차선우는 해영이 알고 있는 눈치 빠른 사람 중의 하나였다. 배려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선우가 촬영하는 동안 끊임없이 다가왔다는 건 제가 마음을 하나도 숨기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하. 해영은 저도 모르게 내뱉을 뻔한 한숨을 겨우 삼켜 냈다.
대체 그곳에서 얼마나 무르게 지냈던 건지…. 그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문제는 알아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매몰차게 대하지 못할 것이다. 선우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개강하고 같은 수업 들으면 마주칠 일 더 많아질 텐데 생각만 해도 빡쳐요.”
“또 따라붙으면… 그냥 내 핑계 대, 유영아.”
“헉, 그래도 돼요?”
“응. 그래 봤자 경수 형이 날 때리겠어, 뭐 하겠어.”
이름이 닳는 것도 아닌데 빌려주겠다며 해영은 흔쾌히 웃었다.
유영의 얼굴에 안도와 함께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던 때였다.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해영이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하진누나
“어.”
핸드폰을 확인한 해영의 눈이 짐짓 커졌다. 하진이 이 시간에 연락한다면 용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리며 웃었다.
“유영아, 미안한데 전화 잠깐만 받아도 돼?”
“아, 네!”
해영의 물음에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전화를 귓가로 가져다 대며 유영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진짜 미안.
“여보세요.”
- 해영. 지금 뭐 해?
“나 지금…. 같이 알바하는 동생이랑 밥 먹으러 가는 중인데. 왜?”
- 그래? 급한 건 아니고. 방영 이후에 출연료 준다고 했잖아. 출연료 지급 건 회계팀에 넘겼으니까 곧 출연료 들어온다고 말해 주려고. 입금되면 또 연락이 가긴 할 거야.
뭐? 천천히 걸으며 유영의 낯을 확인하던 해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진짜?”
- 아하하하. 목소리가 완전 신났네. 세금 떼고 천오백 정도?
“…아, 이거 할 만한데.”
액수를 듣자 갑자기 모든 기억이 미화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해영이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쥔 손을 바꿔 들며 실소를 흘렸다.
평생 발 들일 일 없을 고급 주택 단지에서 한 달을 지낸 값이라기에는 후한 금액이었다. 출연으로 얻은 건 돈뿐만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맺은 관계는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함께 촬영한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이번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나서 또 한 번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해영이 올라간 입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 그치? 다섯 번도 나갈 수 있겠지?
“그건 아니고, 누나.”
또 나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 이번 주 금요일이 첫 방영인 건 알아?
“어. 당연히 알지.”
몰랐으나 해영은 기꺼이 거짓말을 했다. 그걸 알고 있다는 듯 수화기 너머에서도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건은 그게 다였던 모양인지, 그럼 이만 끊겠다는 통보와 함께 전화는 뚝 끊겼다. 익숙한 결말이었다.
“친한 누난데, 받아야 할 것 같아서. 미안.”
그는 유영에게 사과하며 다시 주머니 속으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유영이 빙긋 웃으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려주었다. 민법은 어떤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 좋은지부터 시작해 일하면서 겪은 손님들, 끝에는 선우 또한 대화의 화제로 떠올랐다.
유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선우의 이름에도 해영은 이전처럼 굳지 않았다.
“주말 내내 오셨잖아요. 일요일에 여자 손님들 엄청 많았던 거 알죠.”
“아, 일요일 그래서 바빴나. 다음에 오면 내쫓을까?”
장난스러운 대꾸에 유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진의 전화로 여유를 갖춘 해영도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걸었다.
이전 같았다면 얼굴을 비칠 생각을 하지 않았을 프로그램에 선뜻 나갔던 건 급히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영이 무언가에 쫓기듯 돈을 벌려고 했던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차선우.
출연료까지 들어오면, 그동안 일하면서 벌어 둔 것도 있으니 모인 게 적지 않았다. 원치 않은 부채는 해영을 무너트렸으나,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갚아 나가겠다는 다짐은 해영이 다시 미래를 계획해 갈 수 있는 동력이었다. 조금이나마 빚을 갚고 나면, 곧.
그러고 나면 선우의 곁에 있는 것이 덜 비참해질 것이다. 그를 볼 때마다 느끼는 초라함을 뒤로한 채 이전처럼 웃어 줄 수 있겠지.
“로스쿨도 수강 신청 빡세요?”
“인기 있는 강의는. 민법 강의 어떤 교수님으로 들을 거야?”
“아, 잠시만요! 저 임의로 시간표 짜 본 게 있는데….”
유영이 한번 봐 달라며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의 잠금을 풀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것을 보며 해영은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기다리는 사이 잠시 확인한 핸드폰에는 그사이 메시지가 몇 개 더 도착해 있었다.
선우형
ㅠㅠ
왜 울어
선우형
나도 해영이랑 같이 밥 먹고 싶어.
빠르게 도착하는 메시지를 확인한 해영의 손이 멈칫 굳었다. 유영이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는 내용이 걸린 모양이었다. 혹은 순전히 함께 밥을 먹고 싶었다든가.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같이 밥 먹는 게 무슨 대수라고. 막 헤어졌던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함께 식사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애초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가. 며칠 전이었다면 수없이 고민했을 문자가 곧 출연료가 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뒤에는 한결 여유롭게 다가왔다.
고민하던 해영의 입에서 픽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영이 고개를 드는 것을 본 그가 마지막 메시지를 전송한 뒤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먹으면 되지, 형 시간 될 때.
***
“어, 너 전화 오는 거 같은데?”
“형 이제 그거 안 속아요.”
“구라 아니고 계속 와. 여자 친구 아니냐?”
뭐래, 내가 여자 친구가 어딨다고.
해영은 경수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쥐고 있던 당구봉의 각도를 조정했다. 꼭 제 차례만 되면 저런 딴지를 걸어 가며 방해하려고 든다. 몇 번 당했던 탓에 이제 익숙해진 해영이 쉬이 무시했다.
한쪽 눈을 비스듬히 감으며 채를 쥔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선우형이라는데?”
“줘요.”
단숨에 몸을 일으킨 그가 당구대에 채를 대충 기대 세우고 경수에게로 다가가 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화면에는 경수의 말대로 선우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인 해영이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뗐다. 등을 보이며 멀찍이 걸어가는 그를 보며 당구대 근처에 서 있던 이들이 숙덕였다.
“뭐야, 안 해?”
“윤해영 여자 친구야?”
“아닐 듯. 이름이 우형? 이던데.”
전부 실없는 소리뿐이었다. 해영이 한층 조용한 곳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끊길 듯 말 듯 하다 급하게 받아서인지,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는 수화기에 해영은 먼저 물음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며칠 문자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전화를 걸어 온 건 처음이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물음에 어쩐지 곤란하다는 듯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 카페로 왔는데 네가 없길래.
카페에 왔다고? 번쩍 고개를 든 해영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제 와 두리번거려 봤자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여전히 당구장의 내부였다. 멀찍이 당구를 치는 사람들을 눈에 담던 그가 눈썹 위를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나 오늘은 안 가는 날이야. 형 퇴근했어? 퇴근하자마자 온 거야?”
- 응, 같이 먹어 준다며. 밥.
해영은 들려온 대답에 실소를 삼키며 입술을 물었다. 그랬지. 곧 그에게 돈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나 밥 정도는 먹을 수 있다며 흔쾌히 문자를 보냈었다. 그게 아마 이틀 전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평일이라 바빠서인지 카페에 얼굴을 비추지 못하더니, 또 이렇게 불쑥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제가 나가지 않는 날에…. 해영이 눈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리며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을 바꿔 들었다.
함께 밥을 먹자는 건 기분이 좋아 뱉었던 말이긴 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 딱히 물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에게 꼭 밥을 사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쩐지 마음이 급해진 해영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형 아직 카페인 거지. 나 지금 그 근처거든? 내가 거기로 갈게.”
말하는 동시에 눈을 굴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던 때였다.
- 근처면 내가 데리러 갈게, 해영아.
“어?”
- 어디야?
“어….”
여기?
당구장인데…. 괜스레 다시 주변을 둘러보던 해영이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왜인지 눈치가 보였다. 그가 곤란한 낯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 배경수 진짜. 인생에 도움이라고는 안 되는 인간.
간만에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었다. 귀중한 휴일에 해영이 당구장에 와 있는 까닭은 전적으로 경수에게 있었다. 두 시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윤해영! 우리 당구장 갈 건데 너도 가자.’
가볍게 목을 젖히며 스트레칭하던 해영에게 다가온 경수가 히죽히죽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라고 하는 말에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자 흡연 구역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로스쿨 동기들은 아니지만, 같은 과였던 탓에 눈에 익은 이들이었다.
목을 잡고 옆으로 기울이며 뻐근함을 풀던 해영이 검지를 들어 자기를 가리켰다.
‘저요? 제가 왜요? 저 바빠요, 형.’
‘바쁘긴 뭐가 바빠. 너 전에 나한테 밥 사겠다고 했잖아. 당구장에서 짜장이나 사.’
‘저 짜장 싫어해요.’
‘그럼 짬뽕 먹든가.’
제 입맛을 고려해 주는 경수의 말에 해영이 감동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형… 공부 안 해요?’
‘야, 사람이 어떻게 하루 종일 공부만 하냐? 바람도 좀 쐬고 그래야지.’
‘뭔 소리야.’
작게 튀어나온 중얼거림에 경수가 눈을 치켜떴다. 매서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해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경수의 손에 끌려갔고, 벌써 한 시간 가까이 당구장에 붙잡혀 있게 된 것이다.
한 게임이 끝나고 나가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환기 겸 포켓볼을 치자고 하지 않나…. 중간에 대충 눈치를 봐서 나오면 될 거, 쓸데없는 승부욕이 발동되는 바람에 붙잡는 대로 붙들리고 말았다.
해영이 짧은 한숨과 함께 마지못해 대답을 꺼냈다.
“…당구장.”
- 응?
“그린 당구장이야. 후문 쪽에 있는 건데….”
- …….
“후문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부대찌개 집 바로 위거든? …근데 그냥 내가 나갈게, 형.”
위치를 설명하던 그가 창가로 다가가며 말을 바꿨다.
당구장은 창에 스티커가 붙은 탓에 바깥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손을 뻗어 스티커가 붙은 창을 밀듯 연 해영이 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울 정도는 아니었으나, 슬슬 해가 지려는 듯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후문에서 중문까지 쉬지 않고 뛰어가면 20분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해영이 창문을 닫으며 결연히 말했다.
“20분, 아니 10분만 기다려 줘.”
- 후문에서부터?
수화기 너머로 놀란 듯한 되물음이 비집고 들려왔다. 후문에서 중문까지 10분 만에 주파해 보이겠다는 선언에 선우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뛰지 마. 내가 갈게.
거절할 여지를 남겨 주지 않은 단호한 말이었으나, 목소리만큼은 여지없이 다정했다. 눈을 굴리던 해영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 추우니까 나와 있지 말고, 전화하면 내려와. 알았지?
“무슨…. 아, 알겠어.”
그 잠깐 밖에 있는 게 뭐가 대수라고. 반사적으로 반박하려던 해영은 결국 순순히 대답했다.
그나저나 지금 선우 형이랑 엄청 자연스럽게 대화하지 않았나?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입가에 슬쩍 걸리는 미소를 의식한 그가 손을 들어 입매를 쓸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방금까지 있던 당구대 근처로 다가간 해영이 겉옷을 집어 들었다. 그가 옷을 몸에 걸치며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툭 인사를 뱉었다.
“저 이제 갈게요.”
“잠시만, 이것만 하고 가. 지금 네 차례거든?”
제 차례라는 말에 해영이 겉옷에 팔을 꿰어 넣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형 오기 전에 나가서 기다리고 싶은데…. 그는 핸드폰을 들어 괜스레 아직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은 잠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고민은 짧았다. 겉옷을 마저 입은 해영이 경수가 내밀고 있는 당구봉을 받아 들었다.
“진짜 이것까지만 하고 저 가요.”
“그래. 가라 가.”
안 붙잡겠다며 제 등을 두들기는 손길에 해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보며 당구대 주변에 서 있던 다른 이들이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흘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데? 여친 만나냐?”
“해영이 여친 있어?”
“없겠냐? 너같이 생긴 애들이나 없는 거고.”
“이 새끼는 지도 없으면서.”
당구대 앞에 선 해영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공을 살폈다. 아. 어쩐지 제 차례라고 기어코 붙들더니. 해영이 쳐야 하는 공 앞에 8번 공이 가로막듯 놓여 있었다.
8번 공은 가장 마지막에 넣어야 하는 공이었다. 잘못 스쳤다간 꼼짝없이 8번 공을 구멍에 넣고 질 태세였다. 검은 구체를 잠시 눈에 담던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형들 진짜 존나 약았다.”
“승부의 세계가 원래 냉정해, 인마.”
뭐래. 해영이 입을 다문 채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찌 됐든 한 번은 치고 나가야 했다. 어디를 노려야 하나 각을 살피던 해영이 당구대 위로 상체를 숙였다.
제가 8번 공을 집어넣고 게임을 끝내 주길 바라는 시선들이 쏟아졌다. 코앞에 장애물이 놓인 진퇴양난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자연스레 해영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겉옷 주머니 넣어 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보지 않아도 선우의 전화일 것이 뻔했다. 윤해영은 지금까지 고민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머뭇거림 없이 채를 쥔 손을 뻗었고, 공끼리 마주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은 공은 구멍으로 깔끔하게 들어갔다.
“저 갑니다. 큐 좀 넣어 줘요, 형.”
당구대 위로 대충 당구봉을 내려 둔 해영이 급하게 몸을 돌렸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른 그가 전화를 받으며 당구장을 나섰다.
“여보세요?”
- 지금 거의 다 도착했어.
“바로 나갈게.”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퀴퀴한 대리석 계단을 밟으며 뛰듯 내려간 해영이 1층에 도착했다. 유리문이 활짝 열려 있는 탓에 내려가자마자 건물 가까이 다가오는 익숙한 차가 보였다.
하아. 해영은 긴장한 탓에 무의식중에 머금고 있던 숨을 토해 냈다.
그 또한 자신을 발견했는지, 차가 해영의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해영은 전화를 끊으며 차에 올라탔다. 그가 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선우가 인사 대신 해영의 이름을 불러왔다.
“해영아.”
휘어진 눈꼬리,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 입매. 그의 얼굴에 걸린 화사한 미소가 어두운 차를 밝히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정한 목소리에 섞인 기분 좋은 기색에 어쩐지 손가락이 안으로 움찔 굽어 들었다.
“밥 먹으러 가자고 온 거야?”
해영은 괜스레 이미 채워진 안전벨트를 꼼꼼히 확인하며 물었다.
“응. 나랑 밥 먹자, 해영아.”
“그게 뭐가 어렵다고…. 가자. 내가 살게.”
제가 사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해영을 보며 선우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촬영이 끝난 이후 다시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더니, 투정 부리듯 보낸 문자를 해영은 선선히 받아 주었다. 뚜렷하게 그어졌던 선이 조금 옅어진 걸까. 그가 붙인 관계의 이름을 넘어설 기회만 보던 선우가 슬쩍 말을 흘렸다.
“나랑도 놀아 줘.”
“뭐 어떻게 놀아 줄까. 영화 보러 갈까?”
이번에도 윤해영은 평소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핸들을 쥐고 있던 선우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응…. 영화 보러 가자.”
웃는 건지, 앓는 건지 묘하게 억눌린 기색이 낮은 목소리에 묻어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해영의 의아한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제게 꽂힌 시선을 느낀 듯, 운전하느라 앞을 주시하던 선우가 사근사근한 어조로 물었다.
“영화 보고 난 뒤에는….”
“응.”
“우리 집에 갈래?”
여태 그의 말에 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해영이 멈칫했다. 휙 고개를 돌린 해영은 선우의 입가에 걸려 있는 간질간질한 미소를 발견했다.
…이 형이 진짜.
“갑자기 무슨 소리야.”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짧은 물음에 대꾸하다 말고 해영이 입을 다물었다. 싫은 건 아니었다. 싫다기보다는, 그와 함께 있자면 별수 없이 의식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진과 술을 먹은 다음 날 선우의 집에서 눈을 떴을 때도 그러지 않았나.
차선우랑 같이 있으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사귀던 초반에도 이렇게까지 긴장하진 않았는데…. 해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무릎에 올려 두었던 손을 말아 쥐었다.
“형 내일 출근도 해야 되잖아. 나도 아침부터 도서관 가야 돼. 다음에 놀러 갈게.”
“알았어.”
그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섰다. 다음에…. 해영이 뱉은 말을 돌림 노래처럼 곱씹는 음성에서 미묘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툭툭, 핸들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가락에서도 기분 좋은 기색이 여실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해영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집에 오라는 제안을 거절했는데 왜 기분이 좋아진 건지 모를 일이었다.
“뭐 먹고 싶어?”
그의 손을 주시하던 해영은 들려온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형은? 형이 먹고 싶은 거로 먹자. 내가 살게.”
“그럼 고기 먹을까?”
“…형 먹고 싶은 거로 먹자니까.”
고기는 내가 좋아하는 거고.
해영의 눈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어렸으나, 차선우는 모르는 척 ‘나도 먹고 싶어.’ 하고 대답했다. 그가 그렇게 나온다면 대꾸할 말은 없었다. 해영이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식당은 지나치게 익숙한 곳이었다.
차에서 내릴 때부터 불안한 낯을 하고 있던 해영은 안으로 들어선 후 테이블을 안내받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맞은편에 있는 선우를 노려보듯 주시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이미 외우고도 남았을 메뉴판을 읽고 있는 여유로운 얼굴에 기가 막혔다.
“이거 시킬까?”
“…마음대로 시켜.”
정신이 다른 곳으로 쏠린 탓에 성의 없어 보이는 대답이 튀어 나갔다. 입 밖으로 말을 뱉자마자 아차, 한 해영이 다시금 말을 정정했다.
“전에 먹었던 대로 시키자.”
“굽기도 평소대로?”
되돌아온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으면서 재차 물어 오는 모습에 어쩐지 속이 답답해졌다.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해영은 손을 들어 느릿하게 입가를 쓸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조차 거슬렸다.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선우에게서 시선을 뗀 해영이 힐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심의 야경이 보이는 자리는 유리창에 비치는 풍경만으로도 비싼 값을 하고 있었다. 아마 가난한 대학원생을 뜯어먹으려고 이곳까지 데리고 온 건 아닐 것이다. 어두운 창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던 해영이 한숨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앞을 바라보자 저와는 달리 멀끔하게 입고 있는 선우가 보였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걸. 불쑥 아쉬운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형은….”
“응?”
“가끔 보다 보면 좀 못된 구석이 있어.”
“내가?”
선우는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진해 보이는 표정에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해영은 웨이터가 따라 주고 간 물잔을 들었다. 간단히 입술을 축인 그가 그대로 눈꺼풀만 들어 올려 선우의 표정을 눈에 담았다.
익숙한 식당, 익숙한 자리, 익숙한 메뉴. 선우와 자주 왔던 장소의 모든 것들이 익숙했다. 처음 이곳에 왔던 건 그에게서 고백을 받았던 날이었고, 마지막으로 왔던 건 그와 한창 연애를 하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회사는 오늘 왜 이렇게 일찍 끝났어?”
해영은 밀려오는 감정들을 억누른 채 태연하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선우가 눈을 접어 웃으며 선선히 대답했다.
“이제 다른 업무를 맡게 돼서.”
“그럼 더 바빠지는 거야?”
“아마 당분간은.”
말하고 있는 사이 조용하게 다가온 웨이터가 테이블 위로 그릇을 올려 두었다. 메인 요리가 나오자마자 포크와 나이프를 쥔 해영이 고기로 손을 뻗었다.
제 앞에 있는 고기를 자르기 시작한 그를 보며 숨죽여 웃던 선우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해영이 두고 어떻게 가지?”
조용하게 떨어진 목소리에 해영의 손이 멈췄다.
가? 어디를?
짙은 고동색 동공이 또렷하게 선우를 향했다. 시선은 올곧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으나, 해영의 머릿속은 선우가 꺼낸 말을 해석하기 위해 분주한 상태였다. 들고 있던 나이프를 괜스레 고쳐 쥔 해영이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며 물었다.
“형 어디 가?”
“외국에 나갔다 올 일이 좀 생겨서. 오래는 아니고, 며칠 정도.”
아. 돌아온 대답에 해영이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일하러 가는 걸 말한 모양이다.
‘그걸 왜 이렇게 어딘가 훌쩍 떠나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해?’
불현듯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왜인지 모를 억울함에 그는 고기를 썰던 손에 꾹꾹 힘을 주었다. 차선우는 쓸데없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디 가는 줄 알았잖아. 하여튼 화법 특이해.”
참지 못하고 투덜거리자 맞은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기를 가지런히 자른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올리자마자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선우의 얼굴이 보였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있지만, 그 위로 보이는 눈매가 샐쭉 곡선을 그리며 휘어 있었다. 그래, 웃어라, 웃어. 속으로 한숨을 삼킨 그가 방금까지 칼질을 하던 접시를 들었다. 해영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선우의 앞에 있던 것과 바꾼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되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해영의 앞에는 다시 잘리지 않은 멀쩡한 고기가 놓였다. 나이프를 들고 자를 준비를 하던 해영이 집요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설핏 시선을 들었다.
짙은 눈동자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윤해영은 급히 포크를 들어 그의 앞에 놓인 그릇을 가리켰다.
“…기가 막히게 잘랐지. 잘 봐 봐, 완전 일정해.”
기가 막히기는, 제가 한 짓이 더 기가 막혔다. 해영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사이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조곤조곤 흘러나온 대답에는 옅은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럼 보고만 있지 말고 이제 먹어.”
“먹기 아까워….”
차선우는 그릇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를 보니 괜스레 머쓱해졌다. 해영이 헛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뭐, 고기 정도는 잘라 줄 수 있는 거잖아. 왜 그렇게 봐. 우리… 우리 사이에 형한테 이것도 못 해 줘?”
“응, 알아. 해 줄 수 있지.”
근데 왜 그렇게 보냐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 뻔뻔스레 말을 꺼냈으나 이어지는 대답에 금방 불안해졌다.
접시에서 시선을 뗀 선우가 해영을 향해 눈을 접어 웃었다. 다시금 휘어지는 미소는 여느 때처럼 화사했다.
“우리 사이에.”
아, 씨. 해영의 입에서 결국은 나직한 된소리가 새어 나왔다.
걸핏하면 ‘우리 사이에’라는 말로 할 말을 잃게 하던 선우처럼, 우리 사이 타령을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생각이었다. 작정하고 말을 뱉었으나 해영은 자신의 의도와는 지나치게 다른 역공을 맞았다. 두 마디에 불과한 다정하고 가벼운 목소리였으나, 묵직한 카운터펀치였다.
“진짜야. 원래 친구들한테 다 잘라 줘.”
태연하게 꺼낸 말에 선우가 잠시 멈칫했다. 포크를 쥐던 손이 허공에 멈추는가 싶더니 그의 고개가 빠르게 들렸다.
“누구?”
짧은 물음이 여유 없이 내뱉어졌다. 본인도 느낀 모양인지, 설핏 미간을 찌푸린 선우가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다시 열리는 입에서는 천천히 정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누구한테 잘라 줬는데?”
누구한테 잘라 줬냐고? 예상하지 못한 물음이었다. 누구한테 고기 좀 썰어 준 걸 일일이 기억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대충 머릿속을 헤집던 해영은 끝내 선우가 알 만한 아무 이름이나 끄집어 냈다.
“…정민재?”
“정민재?”
해영이 꺼낸 이름을 곱씹는 목소리에 옅은 실소가 배어 있었다. 선우는 슬쩍 찌푸렸던 미간을 피며 시선을 들었다. 해영과 마주친 눈이 한순간에 호선을 그렸다.
“우리가 그것보단 가깝지 않나.”
작은 중얼거림은 의문보단 확신에 가까웠다. 한층 가라앉은 듯한 음성에 해영은 반사적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선우는 눈을 맞춘 채 여전히 다정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해영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정민재보다는….
“어… 그렇지.”
그냥 입을 닫는 게 낫겠다고 뒤늦게 판단한 그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내렸다. 나이프를 꽉 쥔 채 고기를 썰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식기가 맞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당구는. 재밌었어?”
해영은 여전히 고기를 썰어 대는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어. 같이 한 형들이 좀 짜증 나기는 하는데… 당구는 재밌었어.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이겼지? 윤해영 어디 가서 지고 올 실력은 아닌데.”
“당연하지. 가르쳐 준 선생님이 누군데.”
선우가 꺼낸 웃음기 어린 물음에 해영이 고개를 들고 씩 웃으며 답했다.
3년 전이었나, 2년 전이었나. 선우와 함께 여행 갔을 때 호텔 룸 안에 있던 당구대에서 하루 종일 당구만 쳤던 기억이 있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당구만 친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기껏 여행을 가 놓고 며칠을 호텔에만 처박혀 있던 적이 있었다.
“또 치러 가야겠네….”
“이번엔 내가 이겨. 형, 청출어람 알지?”
“알았어. 기대할게.”
선우가 꺼낸 대답에는 짙은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물 흐르듯 주고받은 대화의 위화감을 뒤늦게 알아차린 해영이 어설프게 눈을 굴렸다.
제가 먼저 이런 관계를 제안하긴 했지만, 허물없는 대화가 평범한 친구 사이처럼 느껴졌다. 연인이던 시절을 아무렇지 않게 들먹이며 대화를 했다는 사실에 순간 황당해질 정도였다.
정말 친구같이 구는 차선우도 차선우였지만….
‘취했나. 이거 와인 아냐?’
해영이 괜히 옆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코에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 물이 담긴 잔에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소득도 없이 다시 물잔을 내려 둔 그는 불쑥 고개를 들려는 자괴감을 애써 덮었다.
‘이게 서운해? 이게? …미친 새끼.’
해영은 애써 한숨을 삼키며 입에 고기 한 점을 넣었다. 우물거리면서도 동시에 다른 쪽으로 신경을 돌리기 위해 말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에서 벗어난 어떤 화제든 괜찮았다. 이를테면, 출연료라든가.
곧 출연료가 들어오면 선우에게 조금이나마 돈을 갚을 수 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니 답답하던 속이 한층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건 제가 처한 상황에 비참해질 때면 습관처럼 그리던 장면이었다. 선우에게 돈을 갚고, 조금이나마 떳떳하게 그의 앞에 서는 것.
비죽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해영이 우물우물 고기를 씹었다. 설핏 시선이 마주친 선우 또한 달가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영화관이었다.
선우와 함께 동네 당구장이나 가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스치듯 영화를 보러 가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문제가 있다면 내일도 주말이 아닌 평일이라는 것뿐이었다.
늦지 않게 저녁을 먹었는데도, 가게를 빠져나온 뒤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영화를 보면 너무 늦어지는 게 아니냐 걱정하는 해영에게 선우는 괜찮다며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 가도 되나 했지만….
‘정신 차리자, 윤해영.’
가끔 잊을 때가 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재벌 3세였다. 그의 출근을 걱정해 주는 일은 쥐가 고양이를 걱정하는 격에 지나지 않았다.
“형, 저거 볼래? 우리 전에 저거 1편 봤잖아. 이번에 2편 나왔나 봐.”
상영 중인 영화 포스터를 둘러보던 해영이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옆에 서 있던 선우가 그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매표소로 걸음을 옮겼다.
해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며 선우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가 당기는 대로 순순히 끌려온 선우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 형은 여기 있어.”
해영이 손가락으로 제 옆을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듯 눈에 힘을 준 채 말하는 얼굴이 제법 단호해 보였다. 실제로 해영은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분명 제가 사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나가는 길에 계산하려고 보니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다. 그렇게 저녁도 이미 선우가 산 참이었다. 영화만큼은 꼭 제가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 의지가 서린 시선에 차선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가를 허물었다.
“알았어.”
“어디 가지 말고.”
“어디 안 가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됐지?”
“응. 빨리 다녀올게.”
신신당부하는 해영을 보며 그의 입에서 피식피식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해영이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겨 매표소로 다가간 그가 번호표를 뽑았다. 평일 저녁이어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아 순서는 금방 다가왔다. 직원 앞에 선 해영은 습관처럼 ‘안녕하세요,’ 하고 입을 열었다가 머쓱하게 눈을 굴렸다.
“〈본 크리처〉 가장 가까운 시간으로 성인 둘이요.”
“좌석은 어디로 배정해 드릴까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좌석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영 시간이 머지않은 탓에 상영관 안에 일찍 착석한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해영이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자리를 손으로 짚었다.
“G열 가운데 자리로 주세요.”
“15번, 16번으로 드릴게요.”
계산을 마친 해영이 직원에게서 티켓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몸을 돌렸을 때였다. 선우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아.
한 곳을 바라보는 해영의 입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토해 내지 못한 숨이 늑골 안쪽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대로 선우는 기둥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의 옆에 못 보던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긴 머리에 가느다란 체구, 얼핏 드러난 옆모습에는 살짝 긴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거는 여자를 잠시 바라보던 해영이 선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는 단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옅게 올라간 입꼬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윤해영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짧게 헤집었다.
차선우는 여자가 제게 내민 핸드폰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떨궜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선우는 사근사근하게 웃는 낯으로 제 왼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애인이 있어서.”
나직한 목소리가 미소보다도 더 선명하게 귓가에 박혀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멈칫한 사이, 여자는 다소 당황한 얼굴로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부드러운 대답에 여자의 얼굴에 서려 있던 난처한 기색이 옅어졌다.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선우는 당연하다는 듯 매표소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곧바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해영을 발견했다.
약지에 낀 반지를 보여 주듯 손등을 내보이던 그가 순식간에 손을 뒤집었다. 길쭉하게 뻗은 흰 손가락이 해영을 향해 가볍게 흔들렸다.
선우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여자와 해영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본 해영이 반사적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눈인사를 건넸다. 일행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짧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뒤늦게 걸음을 뗀 해영이 선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예매하고 왔어?”
“응.”
방금까지만 해도 의례적으로 떠올라 있던 미소에 다정한 빛이 어렸다. 한낮의 햇살 같은 시선 아래서 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선우는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그를 보며 해영 또한 태연한 척 웃으며 말했다.
“형, 이제 들어가자. 곧 영화 시작해.”
시계를 보던 선우가 시선을 들었다. 상영관은 위층에 있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여 가자는 몸짓과 함께 발을 옮겼다.
몇 걸음 떼지 못했을 때였다. 해영은 문득 느껴지는 손길에 다급하게 걸음을 늦췄다. 우뚝 멈춘 그를 따라 선우 또한 느릿하게 걸음을 멈췄다. 선우의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을 받은 해영이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온 손을 눈짓했다.
“손.”
“응? …아.”
아? 그의 입에서 나온 덤덤한 탄성에 해영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얼굴 위로 떠오른 까칠한 표정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차선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친구들끼리는 이런 거 하지 않아? 우리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하나…?”
“…….”
“아니면 손잡을까?”
슬쩍 선을 넘는 발언에 해영의 입에서 하하,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 그래. 형 하고 싶은 거 다 해.”
“정말? 그래도 돼?”
“해 봐, 한번.”
해영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예매표를 쥐고 있던 손이 꽉 주먹을 쥐면서 얇은 종이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법조인을 희망하고는 있으나, 그는 때때로 법보다 주먹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선우는 그런 해영의 시선에 웃는 낯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어깨에 올린 손은 여전히 내리지 않은 채였다. 곧 영화가 시작되는 탓에 그대로 두 사람은 상영관으로 향했다.
‘아, 차선우 진짜….’
어깨에 올라와 있는 그의 손에 괜스레 신경이 쏠렸다. 뭐? 친구들끼리는 이런 거 하지 않냐고? 밥 먹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친구처럼 구는 것에 신경이 쓰였는데, 이제는 반대였다. 그걸 생각하니 갑자기 억울해졌다.
친구는 무슨. 반지는 왜 아직도 끼고 다니는 건데? 그걸 보여 주면서 왜 애인이 있다고 하고?
선우의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소란스러웠으나, 그렇다고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가 도리어 그가 되물어 온다면 할 말이 없었으니까. 해영은 자신이 선우의 앞에서 제 마음을 하나도 숨기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주먹 안에서 꾸겨지는 티켓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
“진짜 감독이 바뀐 거였어.”
핸드폰 화면에 뜬 영화 정보를 바라보던 해영이 허탈하다는 듯 실소했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으나, 운전하느라 앞을 보는 채로도 차선우는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정말?”
“어. 1편 감독은 캐서린 스콧인데 2편 감독은 존 레이래.”
1편과 2편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처럼 간극이 컸다. 의아해 찾아보니 실제로 다른 감독이 제작한 것이 아닌가. 해영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무릎 위로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영화가 끝난 뒤 상영관을 나오며 마주쳤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노골적으로 떠올라 있었다. 해영은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하품을 몇 번이고 삼켜야만 했다.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나름 재밌던데.”
“…어. 형이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근데 영화를 본 건 맞지?”
삐딱한 물음에 선우가 앞을 바라보는 채로 작게 키득거렸다.
영화를 보는 동안 차선우와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의자의 팔걸이에 턱을 괸 채, 슬쩍 하품을 삼키다 눈을 굴릴 때면 여지없이 시선이 스쳤던 것이다. 웃음기를 머금은 눈동자는 어두운 상영관에서도 이채를 띠고 있었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제 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은 더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영화를 본 건지 뭐를 본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라도 재밌었다니 다행이었다.
“형, 여기서 내려 줘.”
“알겠어.”
익숙한 길에 진입한 차가 매끄럽게 좁은 골목을 돌았다. 차체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닌데 선우는 어디서든 곧잘 운전했다. 빌라 앞에 차가 정차하자, 해영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서려는 것을 붙잡은 건 나직한 목소리였다.
“해영아, 잠시만.”
다정한 부름에 해영이 차 밖으로 몸을 빼내다 말고 멈춰 섰다. 무슨 일이냐는 듯 돌아보는 그에게로 선우가 상체를 기울였다. 순식간에 훅 가까워지는 거리감에 해영이 움찔하며 굳었다.
순간 청량하면서도 부드럽게 퍼지는 잔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여태 맡지 못했던 은은한 비누 향기가 의식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단정하게 다물린 입 아래로 날카로운 턱선이 시야에 가득 찼다.
조수석의 등받이를 짚은 채 팔을 뻗은 차선우는 해영의 앞에 있는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이윽고 그가 꺼낸 것은 손바닥만 한 작은 쇼핑백이었다.
얼떨결에 선우가 내민 것을 건네받은 해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게 뭔데?”
“선물.”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선물에 윤해영은 말문이 막힌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향수, 나도 선물해 주고 싶었어.”
해영이 뜬금없이 선물을 받고 당황하는 찰나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 안 보인다고 잊으면 안 돼, 해영아.”
“무슨 소리야? 잊긴 왜 잊어.”
“연락하면 받아 줄 거지?”
“…어, 당연하지. 근데 왜 그래, 형? 며칠 나가 있는 거라며.”
“응. 다음 주에 올 거야.”
들려온 대답에 해영의 얼굴 위로 피어오르던 불안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도 울적해하길래 어디 멀리 나가는 줄 알았네…. 다음 주에 돌아온다는 말에 단숨에 맥이 풀렸다.
“장난해? 일주일도 안 나가 있으면서 무슨 이민 가는 사람처럼 굴어. 깜짝 놀랐네.”
기가 찬 듯 투덜거리며 해영은 차에서 내렸다.
단호하게 일어선 그를 선우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얼굴에 서운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드리운 탓에 그의 낯은 한층 처연해 보였다.
저런 얼굴을 하면 제가 마음이 약해진다는 걸 차선우도 알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와의 적절한 거리를 재던 해영이 이내 복잡한 계산을 미뤄 둔 채 픽 웃음을 흘렸다.
“잘 다녀오고.”
“…….”
“다음 주에 봐, 형.”
몸을 바로 세운 채 건넨 인사에 그제야 선우가 작게 웃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를 들으며 해영은 주저하지 않고 차 문을 닫았다.
***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검은 후드 집업에 팔을 꿰어 넣던 해영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책상 위로 향했다.
책상에는 며칠 전 선우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그에게 받았던 향수가 놓여 있었다. 꺼내 두기는 했지만, 원체 향수를 뿌리고 다니지 않는 데다가 최근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 탓에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오늘은 드물게 도서관에 출석하지 않는 날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해영이 손을 뻗어 어두운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고 손목 위로 향수를 뿌렸다. 한 번 뿌렸을 뿐인데 손목을 코 근처로 가져가지 않아도 짙은 향이 맡아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향기에 해영이 설핏 미간을 모았다.
‘나보다는 오히려 선우 형한테 어울리는데….’
평상시에 사용하기에는 어쩐지 머쓱한 느낌이라, 해영은 향을 맡으며 선우를 떠올렸다. 가만히 있어도 타인의 이목을 끄는 묵직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런 향도 곧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는 웃지 않을 때는 제법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는 편이었으니까.
물론 선우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향은 제가 선물했던 향수였다. 그가 꾸준히 사용해 온 탓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선우의 얼굴을 그리던 해영이 손목으로 가볍게 목덜미를 문지르곤 팔을 내렸다.
‘빨리 출연료 들어왔으면 좋겠다.’
거대한 부채감은 갚을 계획을 구체적으로 떠올릴수록 조금씩 잊을 수 있었다.
현관으로 나가 운동화를 신은 해영이 숙였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문 옆에 붙은 거울 속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애써 끌어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무덤덤한 얼굴로 문을 연 윤해영은 성큼 밖으로 나섰다.
집을 나선 그가 도착한 곳은 일하는 카페 근처의 피시방이었다. 학교와 멀지 않은 피시방은 오전부터 자리가 군데군데 차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들 저와 비슷한 목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선 해영이 좌석 사이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오빠! 여기요!”
찾던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부른 방향으로 그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안쪽에 앉아 있던 유영이 팔을 번쩍 든 채 해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제 왔어?”
“한 30분? 전쯤에요.”
“일찍부터 나왔네.”
유영은 벌떡 일어나 해영에게 앉아 있던 자리를 내주었다. 퍽 깍듯한 모습에 해영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해영이 의자에 앉자마자 그의 옆자리를 빼 앉았다.
그가 오전부터 피시방에 온 이유는 다름 아닌 수강 신청 때문이었다. 유영이 로스쿨 수강 신청은 처음이라 도와 달라 요청해 왔던 것이다. 켜져 있는 모니터 화면 속 수강 신청 페이지를 바라보며 해영은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그는 이미 저번 주에 있었던 재학생 대상의 수강 신청을 마친 후였다. 자신의 수강 신청은 집에서 핸드폰으로 했지만, 유영이 도와 달라는데 그렇게 대충 해치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빠…. 저 이대로 들을 수 있어요?”
“어, 들을 수 있어. 걱정 마.”
대학을 다닐 때부터 수강 신청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은 없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작은 하품을 삼키던 해영이 들려온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 내내 마감 파트 알바생의 대타를 뛰어 줬더니 피로가 쌓인 모양이다. 적게 잔 것도 아닌데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을 비비적거리는 그의 앞으로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 들이 밀어졌다. 갈색 음료 속 가득 찬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드세요.”
“와, 나 주는 거야? 고마워.”
“뭘요. 도와주러 오셨는데.”
해영은 유영이 내민 아이스커피를 받아 들며 씩 웃었다. 잘 마실게.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네는 입가 옆으로 옅은 보조개가 피어 있었다.
수강 신청이 시작되는 10시까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해영이 미리 켜 놓은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플라스틱 컵의 뚜껑을 열었다.
“오빠, 저 그거 봤어요. 러브라인.”
난데없이 들려온 말에 커피를 마시던 해영이 작게 콜록거렸다.
“…유영아. 이제 10분밖에 안 남았어.”
“10분 넘게 남았는데요? 어, 이거 지금 말 돌리는 거죠.”
예리한 지적이었다. 어떻게든 화제를 바꾸고 싶었으나 유영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프로그램은 지난주 금요일 밤에 1화가 방영되었다. 지난번에 듣고도 잊고 있었는데, 전날 하진이 떨린다며 연락해 온 탓에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보진 않았지만.
알고는 있어도, 굳이 제가 나온 걸 찾아볼 만큼 해영은 뻔뻔하지 못했다. 집에 TV가 없기도 했고.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영은 시청 완료 표시가 떠 있는 핸드폰 화면을 당당히 해영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봤는데 재밌더라고요. 이거 지금 순위에도 있는 거 알아요?”
“…….”
“오빠 왜 귀 빨개져요?”
“…나 지금 좀 쪽팔려.”
사실 좀이 아니고 많이. 해영이 후드를 뒤집어쓰며 빨개졌을 귀를 숨겼다.
돈에 눈이 멀어 덥석 참가하긴 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보게 되는 건 다른 영역이었다. 물론 감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모른 척하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토요일 아침 눈을 뜬 해영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메신저로 도착한 연락들이었다. 대부분 ‘ㅋㅋㅋㅋㅋㅋㅋㅋ’로 시작하는 탓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보다 더 곤란한 쪽은 SNS에 쌓인 알림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요즘은 들여다본 적도 없는 인스타에 알림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가장 최근에 올렸던 게시글은 졸업 가운을 입고 있는 사진 한 장이었는데….
w__bi_0010님 외 3602명이 좋아합니다.
y.haeyoung_ 졸업은 내가 하는데 왜 형이 울어?
괜찮게 찍힌 사진도 아니었다. 카메라를 보며 바보같이 헤실대고 있는 꼴을 하룻밤 사이 삼천여 명이 보고 갔다고?
게시글도 몇 개 없는 인스타 계정의 불어난 팔로잉 수에, 해영은 그대로 계정을 탈퇴했다. 계정을 비공개로 돌려 봤자 이미 손을 쓸 수 있는 시점은 지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되도록 더 빠르게, 이를테면 방영 전에 미리 판단했다면 좋았겠지만, 하루하루가 바빠 방치한 채 잊고 있던 죄가 컸다.
“왜요? 카메라 잘 받던데요? 애들도 다 실물이랑 똑같이 나왔다고 그랬어요.”
“다른 주제 없어?”
“오빠 인스타 터트렸죠?”
“…유영아, 56분.”
주제를 돌려도 제자리였다. 해영이 컵을 들어 입 안에 얼음을 털어 넣었다. 수강 신청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유영도 금방 입을 다물었다.
9시 57분, 58분, 마침내 59분이 되면서 그녀의 표정도 덩달아 긴장으로 굳어 갔다. 미리 켜 둔 시계가 9시 59분 58초를 가리키는 순간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인 해영이 마우스를 눌렀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수강 신청 버튼을 누른 그가 마지막 과목까지 신청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돌렸다.
“된, 된 거예요?”
“응. 다 제대로 신청됐….”
꺄악!
선선히 유영의 말에 대답하던 해영은 말을 끊고 들려온 비명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모니터로 가까이 가져갔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완료된 수강 신청 페이지를 찍는 모양이었다.
기뻐하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해영이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감동한 얼굴로 저를 돌아보는 유영을 향해 그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유영 또한 손을 들어 경쾌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럼 나 이제 갈게, 이따 봐.”
“어디로 가요?”
“좀 더 자러…. 정우 씨 대타해 준다고 주말 내내 풀타임 뛰었더니 피곤해.”
“헉, 제가 점심 사려고 했는데.”
해영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저를 올려다보는 유영의 얼굴을 보니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됐어, 괜찮아.”
점심은 무슨. 밥을 먹을 시간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유영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그가 걸음을 옮겼다. 지하에 있는 피시방에서 빠져나온 그가 어느새 환한 오후의 햇살 아래서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쌀쌀하더니 금세 날이 풀렸다. 해영은 손을 들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내렸다. 그대로 왔던 길을 따라 터덜터덜 자취방으로 걸어가던 중, 주머니에서 긴 진동이 울렸다.
하진누나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해영이 머뭇거림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해영아. 출연료 들어온 거 확인했어?
하진은 늘 그랬듯 별다른 인사말 없이 용건부터 꺼내고 봤다. 눈가를 비비적거리던 해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입금됐어?”
- 응, 지급됐을 거야.
가벼운 대답에 해영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가장 기다려 왔던 말이 떨어지자, 눈꺼풀이 언제 무거웠냐는 듯 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이제 돈을 갚을 수 있다. 해영의 머릿속에 가득 찬 건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동안 모아 뒀던 돈을 빚을 갚는 데 쓰더라도, 곧 자취방을 빼고 기숙사로 들어갈 계획이니 보증금으로 이번 학기는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이미 수도 없이 생각했던 계획을 곱씹고 있을 때였다.
윤해영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돈을… 어떻게 주지?’
그는 불현듯 자신이 선우의 계좌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5년을 알고 지냈는데 그럴 수가 있나? 당황한 나머지 걸음도 멈춘 채 머리를 헤집던 해영이 입을 열었다.
“누나 선우 형한테도 출연료 줬어? 그럼 혹시 형 계좌 알아?”
- 모르는데? 그쪽은 계약서를 다르게 써서. 나도 한제 비서실 통해서 계약했어. 왜?
“…….”
그럼 돈을 어떻게 갚지.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볼을 긁적였다. 선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무작정 현금을 건네는 건 다소 그림이 이상했다. 애초에 직접 건넨다면 그가 받아 줄지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선우에게 돈을 갚아 나가는 것만 상상하며 1년을 버텨 왔다. 그가 받아 주지 않는다면 오랜 계획은 모두 무의미해졌다. 복잡한 얼굴이 된 해영의 귓가에 하진의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 차선우한테 물어보지 왜? 계좌번호는 무슨,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 줄 텐데. 근데 해영아, 너는 5년을 만난 애인… 아니, 이제 전 애인이었지. 아무튼, 계좌도 몰라?
헛웃음이 실린 물음에도 반박할 말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곤란해지긴 했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한숨을 삼킨 해영이 그녀의 말에 덤덤히 대답했다.
“형이 지금 한국에 없기도 하고, 직접 물어보기도 뭐해서.”
- 급한 거면, 강 실장님이라도 연결해 줄까?
익숙한 이름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응, 누나만 괜찮으면…. 도와줘.”
머릿속을 얼핏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얼굴에 해영이 다급히 동아줄을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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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S???? @Lossluvline ·202X.5.6
럽라 종방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나
???? ↺ ♡ 12
LOSS???? @Lossluvline ·202X.5.6
떡밥 끊긴 지 일주일째... 윤해영 인스타 다시 시작해주는 상상... 유튜브 채널 개설해주는 상상...
해영이 라방 켜서 스터디윗미 찍고 있는데 선우 등장하는 상상
아 둘이 친하다며ㅜ
???? 3 ↺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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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해???? @sunssun014
#윤해영인스타해주라 럽스타도 환영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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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S???? @Lossluvline
럽스타는...이미... 했잖아 ...? 해영이 인스타에 꼬박꼬박 적힌 형이 선우 아닐시 두사람 결혼식에 축의금 천만원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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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해???? @sunssun014
나 벌써 선우해영 결혼식때 하객룩 뭐 입을지 고민중
해영아 누나 기대할게
@윤해영
hikikuu @likehikiiw
그냥...친하다? 흠.... ㅋ 그게 그냥 친한 거면....흠.... 저는 친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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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S???? @Lossluvline
제말이 이말입니다 #윤해영해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