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7/13)

4

작은 캐리어에 대충 짐을 챙기던 해영이 고개를 든 것은 문밖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급하게 달려온 이가 누구일지는 뻔했다. 예상대로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민호였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비명을 내지르듯 말했다.

“아직 안 들어온 게 아니라… 먼저 간 거였어!”

“무슨 소리야?”

뭘 말하고 싶은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말에 해영이 캐리어 안으로 옷을 툭 던지며 되물었다.

“그니까, 여자들이 먼저 제주도에 갔다고!”

그런 해영을 보며 재차 입을 연 민호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먼저 제주도로 갔다고?

그가 뱉은 말을 곱씹던 해영이 픽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밖에서 식사하고 오라고 하더니, 그동안 여자 출연자들을 제주도로 이동시킨 모양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집이 지나치게 조용해 아직 아무도 집에 오지 않은 건가 했는데.

‘최종 선택은 제주도에서 이루어집니다. 어? 제주도?’

며칠 전 집으로 온 카드에 적혀 있던 말은 그것이었다. 카드를 쥔 채 적힌 것을 읽어 내리던 소윤은 제주도라는 말에 탄성을 흘렸고, 그녀의 옆에 있던 민호는 최종 선택이란 단어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벌써 최종 선택이야?’

그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흘러나온 혼잣말에는 긴장감이 여실히 묻어 있었다. 다른 출연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종 선택이라는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긴장하면서도, 동시에 제주도로 1박 2일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별수 없이 설렜던 것이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났다.

오늘은 목요일 저녁이었고 남자 출연자들끼리 함께 외식하고 돌아오라는 미션을 받아 나갔다가 막 들어온 참이었다. 물론 미션을 받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 제작진들이 구상해둔 그림이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난데없이 여자 출연자들을 먼저 제주도로 보내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내일 제주도로 떠나는 일정을 위해 짐을 싸던 도중 민호가 부리나케 달려온 것도 이해가 갔다. 해영이 짐을 챙기다 말고 벽에 기대어 서며 물었다.

“다들 먼저 간 건 어떻게 알았어?”

민호는 해영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가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을 꺼냈다.

“거실 테이블에 또 미션 카드랑 물건들 있어.”

“물건?”

“응, 아마 여자들 거 같던데.”

덤덤한 반응이 재미없다는 듯 민호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 단순한 표정을 보며 해영이 실없이 웃고 있을 때였다. 안쪽에서 짐을 챙기는 듯하던 선우가 드레스 룸을 빠져나왔다.

“형님! 저희 또 미션 봉투 왔어요.”

선우를 발견하자마자 민호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큰둥한 해영 대신 말을 전할 이가 나타나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선우는 조금 전의 해영보다도 더 무던한 반응을 보여 왔다. 희미한 웃음과 함께 되돌아온 목소리는 단숨에 대화를 단절시켰다. 누구에게나 곧잘 치대는 민호마저 어정쩡한 얼굴로 다시 침대에 털썩 앉았다.

챙길 짐이 많지 않은지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어두운색의 여행용 트렁크가 전부였다. 하긴, 고작 1박 2일인데 이것저것 챙기는 것이 더 웃긴 일이다. 해영은 반쪽이 텅텅 빈 제 캐리어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선우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처음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늘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으니까. 해영이 막힌 목을 가다듬으며 민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드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확인하러 갈까. 재휘 형도 나와 있어?”

“응. 지금 공용 공간에서 기다리시는 중.”

“그럼 지금 나가자.”

대수롭지 않게 말한 해영이 문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는 그의 모습에 민호도 금방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놓인 캐리어 옆으로 지나치면서 해영이 선우를 힐긋 올려다보았다.

“…형도.”

나가자는 듯 고갯짓을 하는 그를 보며 선우가 조용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은 그의 표정을 보며 움찔 떨리는 손끝을 안으로 말아 쥐었다.

흐릿한 미소가 신경 쓰였으나 먼저 손을 뻗기에는 다소 멋쩍었다. 누군가와 싸우고 나서 불편한 분위기를 오래 지속해 본 적 없던 해영으로서는 처음 겪는 위기였다. 하물며 그 상대가 5년을 만나며 한 번도 싸워 본 적 없던 차선우라면 더더욱.

어떻게 그동안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지? 해영은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거닐며 슬쩍 제 뒤에 선 선우를 곁눈질했다.

부딪히는 일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차선우가 서러운 얼굴을 했던 순간을 굳이 떠올리자면 생각나는 장면들이 몇몇 있었다. 가끔 그가 제 상황을 모른 체하는 말들에 열 받는 순간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럴 때마다 막상 선우의 얼굴을 보면 짜증을 내려던 것도 잊게 되는 게 문제였다.

‘와, 나 형을….’

‘…….’

‘진짜 사랑하나 봐.’

‘뭐?’

얼빠진 얼굴로 감탄하고 있자면, 그 또한 속상해하던 것을 잊은 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차선우는 울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자신을 끌어안아 왔다.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서러움을 토해 내는 그를 마주 안아 주다 보면 자잘한 문제들은 어느새 상관없어졌다.

해영은 애초에 화가 난 상황을 오래 곱씹는 편이 아니었다. 대체로 조금 진정이 되고 나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고, 그 과정에서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아내곤 했다.

당장 선우와의 관계에서 보이는 문제점은 분명했다. 애초에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기하고 도망쳤던 것이 아닌가.

당시에는 그것이 눈앞에 주어진 최선이었다. 헤어지고 나면 그가 더는 아빠와 엮일 일도, 자연히 돈을 주게 될 일도 없어질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후로도 아빠가 그에게로 찾아갔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나치게 안일했다.

“…아.”

“왜?”

“아무것도 아니야.”

짧은 한숨을 내쉬는 제게로 민호가 기웃거리며 물어 왔다. 덤덤히 웃으며 고개를 내젓자 그는 금방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빠를 만났던 며칠 전을 떠올리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선우로부터 들었던 말은 도화선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품에 안고 있던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었고, 해영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쉬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다 알고도 내가 다시 형을 붙잡을 수 있나? 그 전에, 형을 떠올리기만 해도 비참해지는데 앞으로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내가 초라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견디면서 계속 형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아예 안 볼 수는 있고?

자조 섞인 의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면, 가장 약한 곳을 비집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알게 돼도 네가 날 선택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해영이 공용 공간 안으로 들어서며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괜스레 앞머리를 털어 낸 그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재휘를 보며 손을 들어 보였다.

“형.”

짧게 그를 부르자 재휘도 곧장 눈인사를 전해 왔다. 해영은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바로 앞에 보이는 테이블 위에는 흰 카드 하나와 네 개의 물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마도 저게 민호가 말한 물건인 모양이다. 테이블을 주시하고 있던 해영이 제 옆의 1인용 카우치에 앉는 선우를 힐긋 눈짓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그것도 잠시, 당연하다는 듯 제게로 고개를 돌리는 선우를 보며 해영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티 나게 어색한 시선 전환에 괜스레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소지품의 주인이랑 제주도에서 데이트를 하게 되나 봐.”

마침 카드를 꺼내 읽은 재휘가 해영에게 말을 전했다.

“한 명씩 고르면 되겠는데. 어떻게 정할까, 가위바위보?”

재휘는 드물게도 의욕적인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평소에는 내내 멍하던 그가 왜 이렇게 조바심을 내는지 알 것 같았다. 마지막 데이트니 역시 이번에도 세희와 함께 데이트를 하고 싶은 거겠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민호도 그와 다르진 않았다.

평소라면 먼저들 정하라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해영은 재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민호의 신호에 따라 네 명이 한꺼번에 손을 내밀었다.

“어? 해영이….”

결과를 확인한 민호의 입에서 탄식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해영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허. 당황스러운 숨을 토해 내며 해영이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주먹을 낸 채였다.

“그럼 해영이 먼저 고르라고 하고 남은 사람들끼리 또 가위바위보 하자.”

민호가 해영을 힐끔거리며 입을 달싹거렸다. 선우는 그의 순서가 정해지자마자 곧바로 선택권을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고르겠다는 말에 민호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삼키며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을 다시 한번 살피던 해영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나 그럼 이거 고를게.”

뭐가 누구의 것인지 완전히 짐작할 수는 없어도, 누구의 것이라고 확신이 드는 게 하나 정도는 있었다. 해영은 그것을 향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

오전 비행기를 타고 제주 공항에 도착한 남자 출연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스태프들이었다. 들고 있던 짐도 빼앗긴 채 차 키를 건네받은 해영은 얼떨결에 차에 올라탔다.

차에 타자마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작은 실소를 흘렸다. 내비게이션에 이미 목적지도 찍혀 있는 것을 보니, 숙소로 가는 게 아닌 모양이다. 각자 다른 차에 올라탔으니 물건의 주인에게 가는 거겠지. 겉옷 주머니에 넣어 뒀던 물건을 만지작거리던 해영이 이내 핸들을 쥐었다.

공항을 빠져나가자마자 한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야자나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주도는 몇 년 전에 온 적이 있었다. 선우가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도 방학을 맞이했던 여름.

‘그때 형이랑 같이 왔었던 게 마지막인가.’

과외 일정도 미룬 채 그와 여행이 가고 싶어 무작정 떠났던 적이 있었다. 그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행복했던 순간.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며 다음에 또 같이 오자는 약속을 했었다.

…같이 오자고 했었는데.

핸들을 쥔 채 말없이 신호등을 바라보던 해영은 청신호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다시 액셀을 밟았다. 그때 같이 오자고 했던 약속을 이렇게 지키게 될 줄은 몰랐다. 해영이 어설프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매만지며 힐긋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목적지는 곧이었다. 해수욕장 근처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자 돌담으로 둘러싸인 주차장이 나타났다. 해영은 마침 여유롭게 빈 주차장 한편에 차를 세운 뒤 내렸다.

그는 걸음을 옮겨 바닷가 근처에 조성된 산책로 안으로 들어섰다. 파란 파도가 검은 돌에 철썩 부딪히며 흰 물거품을 만들어 냈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영은 저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내내 흰 입김만 내뱉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바닷바람이 매서운지 파도를 등진 채 서 있던 그녀 또한 해영을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다인아.”

해영이 짐짓 장난스레 웃으며 다가섰다.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해영을 발견하자마자 놀란 듯 굳었다. 잠시 얼어 있던 얼굴에 이윽고 밝은 빛이 떠올랐다.

“진짜 너야?”

단숨에 올라가는 입꼬리에서 자신을 반기는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믿지 못하겠다는 듯 구는 다인을 보며 해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나야.”

그가 되돌려 준 확답에 다인이 웃던 얼굴 그대로 삐걱거렸다.

“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

“당연하지. 알아채라고 놓은 거 아니야?”

해영이 주머니에서 넣어 뒀던 하늘색 기타 피크를 꺼냈다. 어떻게 몰라.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끝에 걸린 제 피크를 바라보던 다인이 붉어진 얼굴을 푹 숙였다.

“알아채라고 놓은 건 맞는데….”

목도리에 숨겨진 입이 자그맣게 달싹였다.

“나인 걸 알고도 골라 줄 줄은 몰랐어.”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해영이 입을 다물었다.

다인의 소지품은 제주도에 오기 전, 어제 소지품을 고르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물건이었다. 눈에 익은 하늘색 피크는 보자마자 다인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부터 익숙하게 느껴졌던 건 아마 그녀가 공연할 때 쓰던 모습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그의 눈에 귀와 볼이 발갛게 얼어 있는 다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해영은 고민하던 것을 접고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냈다.

“일단 어디라도 들어갈까? 추운 것 같은데.”

다인은 제게 건네는 핫 팩을 얼떨결에 손에 쥐었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해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먼저 걸음을 뗀 것은 해영이었지만, 곧바로 다인이 앞장서서 그를 안내했다. 이미 오늘 하루 어디를 갈 건지도 정해 놓았다고 했다. 얼마 걷지 않아 둘이 도착한 곳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카페였다.

밖에서 볼 때도 규모가 크던 카페는 내부도 넓었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한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으로 들어서서 마실 것을 주문하던 해영은 다인이 베이커리 진열장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먹을 것도 살까?”

그 물음에 그녀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웃는 얼굴을 보며 해영도 주문을 이어 갔다.

자리를 잡고 앉자 곧 주문한 것들이 나왔다. 해영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컵을 들어 입에 가져간 뒤 한 모금 넘겼다. 그가 음료를 홀짝이는 동안 열심히 스콘을 조각내던 다인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컵을 물고 있던 해영은 문득 들려온 물음에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올렸다.

“근데 어떻게 고른 거야?”

“피크?”

“응. 혹시 남은 게 내 거밖에 없었던 건 아니지?”

은근슬쩍 물어 온 음성에는 살짝 긴장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장난스레 묻기는 했으나, 얼굴 한편에 떠오른 걱정스러운 빛은 숨길 수 없었다. 해영이 그런 다인과 눈을 맞추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제일 먼저 골랐어, 이다인.”

가위바위보에서 1등을 했다는 덧붙임에 다인의 연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양 그녀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해영이 앞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 데이트잖아.”

덤덤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다인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어딘가 기대가 어린 눈을 하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무겁게 아래를 향했다.

“마지막….”

이후를 기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 단어였다.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주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녀를 향해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골랐어. 너랑 얘기하고 싶어서.”

여전히 장난기가 스민 음성이었으나, 조금 전보다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해영은 저를 바라보지 않는 이의 눈길을 좇으며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전에 내가 너 멋있다고 했었잖아.”

“…….”

“진심이야. 네 말 들으면서 배운 게 많아. 아, 맞다. 나 우울해 보인다고 샌드위치도 챙겨 줬었잖아. 나 그거 되게 감동이었는데, 다인아.”

설핏 입꼬리를 올린 그가 의자의 팔걸이에 기댄 채 턱을 괴었다. 어느덧 날이 개면서 흐리던 하늘이 밝아졌다. 두 사람이 앉아 있던 테이블 옆의 통창으로도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합숙한 지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고마운 일들이 가득했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배운 것도 많았다. 해영은 그중에서도 마지막 데이트 상대로 다인을 골랐다.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어.”

진심 어린 인사에 그녀의 입이 꾹 다물렸다. 일자를 그리던 입매가 차츰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다인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 조심스러운 태도에 이번에는 해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당연하단 듯 눈썹을 올리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어?”

돌아온 물음에 입가에 어설픈 미소가 걸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묻는 말에 어떤 마음이 실려 있는지 모를 수 없었다.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해영은 타인이 건네는 호의를 가볍게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에둘러 말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대신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있어.”

신중하게 말을 고른 것치고 나온 대답은 단순할 정도로 짧았다.

“…그렇구나.”

다인의 대꾸도 꽤나 빨랐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해영과 눈을 맞췄다. 시선을 교환하는 시간은 짧았다.

“많이 좋아하나 본데, 너?”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미묘하게 흐르던 분위기는 단숨에 깨졌다. 다인이 하는 노력에 맞추어 해영도 짐짓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요즘은 좀 미치겠어.”

그의 입으로는 처음 들어 보는 격한 표현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다인이 이내 소리 내어 경쾌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채 눈을 접어 웃으면서도 해영은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무거웠다.

적당히 좋아할 수 있었다면 이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가 안 돼서 곤란했다. 차선우는 언제부턴가 제 세계의 전부였다. 삶의 전부였던 사람이 어째서 포기할 때는 일부가 되는 건지.

일부가 빠져 버린 빈 자리가 허전해 몇 달 내내 그 자리에는 눈물이 대신 고여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그를 조금도 잊지 못한 증거들이 선명해 해영은 조금 힘이 빠졌다.

불현듯 찾아온 침묵을 깨며 다인이 화제를 돌렸다.

“이제 다음 코스로 이동할까?”

“그럴까. 어디로 갈 건데?”

“비밀이야. 근데 기대해, 극소수의 아는 사람들만 아는 엄청 유명한 맛집이랬어.”

“극소수만 아는데 엄청 유명할 수가 있는 거야?”

“…제주도 사람들이 추천한 진짜 맛집이라고.”

사소한 지적에 다인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그를 밉지 않게 째려보았다. 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카페를 나섰다. 차로 이동하면서도 장난스레 말을 거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다인아, 내가 맞혀 볼게. 거기도 빵 나오지.”

“야, 나도 맨날 빵만 먹는 건 아니거든? 빵이… 나오기는 하는데.”

다인이 소심하게 덧붙인 말에 해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비밀이야! 잔말 말고 따라와.”

그녀가 찌릿 눈을 흘기며 해영의 팔을 가볍게 찔렀다. 그는 여전히 키득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데이트 상대로 다인을 고른 것은, 그녀에게 말한 대로 이것이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최종 선택을 앞두고 전해야 할 말은 전부 전했다. 무엇보다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끝까지 자신을 배려해 준 다인 덕분에 고마운 것이 하나 더 늘어 버렸다.

데이트답지 않은 데이트만 하게 되는 것 같아 잠시 하진에게 미안해지긴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다인과 대화를 하며 머릿속도 조금은 정리가 되었다.

다른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 선우의 얼굴을 그리며, 해영은 세워 뒀던 차에 올라탔다.

***

이른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현아와 민호가 둘을 반기고 있었다. 숙소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풀 빌라였다. 마당에 있는 풀장은 심지어 온수까지 나왔는데, 평소라면 물개처럼 첨벙거리고 있었을 민호는 다소 풀이 죽은 채였다.

바로 제 뒤를 이어 물건을 고르더니 소윤이 아닌 현아의 것을 집은 모양이다. 어쩐지 첫날부터 꾸준히 소윤의 것을 쥐는 법이 없다.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 편인 저조차도 민호에게 타이밍이 따라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다들 아직 안 온 거지?”

“응. 나 한 시간 전부터 현아 누나랑 둘이서만 기다리고 있었어.”

씁쓸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평소라면 제게 치대 오는 민호를 귀찮아하며 밀어 냈을 해영도 그가 기대 오는 것을 묵묵히 받아 주었다.

빌라는 연결된 건물 두 개가 이어진 형태였다. 이미 제작진들이 건물 배정까지 끝내 놨기 때문에 해영은 안으로 들어서면서 다인과 갈라졌다. 한 동에 방이 두 개씩 있는 것을 보니 성별별로 나눈 것 같았다.

잠시만. 설마….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해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1층과 2층에 방이 한 개씩인 것을 보면 두 명씩 방을 쓰는 것일 테다. 어쩐지 제 룸메이트가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해영은 빌라를 둘러보던 걸음을 돌렸다.

“해영…. 맥주 마시자.”

민호가 복도를 거니는 그의 뒤를 졸졸 쫓으며 말했다.

“알겠어, 나 우선 옷 좀 갈아입고.”

“진짜지?”

“어, 진짜. 근데 1층에 있는 방이 내가 쓸 방이야?”

“아마 그럴걸? 아까 저 방에서 네가 가져온 캐리어 본 거 같아.”

제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민호가 슬슬 귀찮아지던 차였다. 해영은 힐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되돌아온 대답에 그는 망설임 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빼앗겼던 짐 가방은 어두운 방 안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역시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겉옷을 벗은 그가 아직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침대 위에 놓인 여행용 트렁크에 눈길을 주었다. 그것 또한 잠시였다. 해영은 옷걸이에 옷을 걸어 둔 채로 몸을 돌렸다.

“가자, 김민호.”

달칵. 문을 닫은 그가 자신을 기다리는 민호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

“어? 해영 이제 들어가게?”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해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고작 와인 몇 잔을 마셨다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웃기기도 했고, 제법 귀엽기도 했다.

그가 다시 기운을 차린 것은 소윤이 숙소로 돌아오고 난 다음부터였다.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둑해진 다음에야 그녀는 선우와 함께 마지막으로 숙소에 들어섰다.

최종 선택을 앞둔 마지막 밤이라고 해서 평소와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한 명씩 제작진들의 부름에 따라 나가서 인터뷰를 하고 왔다는 것 정도일까. 촬영하는 동안 처음 해 본 인터뷰라 초반엔 머쓱하게 웃기만 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누구를 선택할 건지 종이에 써내면서는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가장 마지막 차례였던 해영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슬슬 자려고.”

와인 잔을 들고 가끔 목을 축이는 수준으로 느릿하게 마시던 해영은 한 잔을 비우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이들이 그를 향해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평소보다 텐션이 높은 게 확실히 취했다 싶었다. 입가에 설핏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그대로 몸을 돌리던 해영의 눈에 저를 따라 몸을 일으키는 선우가 보였다.

자리를 벗어난 그는 자러 갈 거라고 했던 말과는 다르게 방이 아닌 현관으로 향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마이크는 진작 떼어 놓았다. 신발에 대충 발을 욱여넣은 그가 검은 후드 집업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며 문을 열고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불어온 거센 바람에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에 닿아 오는 바람에 살갗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바람 자체가 차가운 게 아니라, 숙소 바로 앞에 있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제법 매서웠다. 작은 가로등의 불빛에 의지해 그는 널찍한 정원을 벗어나 바다로 향했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세차게 들려오는 밤바다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구석진 곳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에 혹시나 하던 그가 낯익은 뒷모습을 보며 가까이 다가섰다.

“누나.”

“아, 깜짝이야.”

“자러 들어간 거 아니었어요?”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바다를 주시하던 세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휘둥그레 눈을 뜨면서도 흰 막대를 쥔 손에는 흔들림이 없는 게 웃겨 해영은 나직하게 키득거렸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그녀가 실없이 웃으며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해영은 그녀가 앉아 있는 둑에 반대 방향으로 걸터앉았다.

“그러려고 했는데, 심란해서. 생각 정리에 이것만 한 게 없다….”

입김보다 확연히 희뿌연 연기가 허공에 토해졌다. 그녀의 손에 걸린 흰 담배 개비가 이미 반쯤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걸 제법 유심히 구경하는 시선을 알았는지, 세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거들먹거리는 어조를 흉내 냈다.

“너는 이런 거 배우지 마라.”

과장된 연기조차 우스꽝스럽지 않게 잘 어울렸다. 해영의 입에서 결국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울 일 없어요. 알면 기절할 사람 하나 있어서.”

아니다, 둘인가? 해영이 제가 뱉은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차선우는 물론이고 하진 또한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언제부터 피웠냐며 눈을 치켜뜰 모습이 뻔히 상상되었다.

곧 괜한 생각을 접은 해영이 세희를 보며 씩 웃었다.

“누나랑은 자주 마주치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생각해 보면 내가 주변에 미남이 잘 꼬이는 체질이긴 해.”

“살면서 처음 들어 보는 체질인데.”

“네가 아직 덜 살아 봐서 그래.”

세희의 능청스러운 말에 해영이 졌다는 듯 웃는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두 살 더 많은 그녀가 이렇게 한참은 어른인 것처럼 굴 때면, 자연스레 하진이 떠오르곤 해서 꼼짝할 수 없어졌다.

바다를 등진 탓에 막 숙소에서 빠져나왔을 때처럼 머리가 흐트러지진 않았으나, 그는 손을 들어 후드 집업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목뒤가 가려져서인지 한층 따뜻하게 느껴졌다. 움츠렸던 어깨를 펴는 해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희가 툭 말을 꺼낸 것도 그때였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 해도 되는데, 혹시 전에 기분 안 좋아 보였던 날 있잖아.”

갑작스레 던져진 화두에 해영이 윽, 소리를 내며 상체를 숙였다. 그가 방심했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세희를 올려다보았다. 어색하게 웃는 해영과 눈을 맞춘 그녀가 조심스레 물음을 이었다.

“그날 선우 씨랑 무슨 일 있었어?”

예리한 추측이었다.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던 해영이 후드 안으로 손을 넣어 제 목덜미를 쥐었다.

“그 질문 벌써 두 번째 받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 질문은 제가 울린 거냐는 물음이었지만 말이다. 해영이 한숨을 흘리듯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처음 묻는 게 아니라는 말이 놀라웠는지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누가 또 물어봤었어?”

“네.”

“혹시, 음. 본인이?”

“…네.”

“미안한데, 그쪽 진짜 재밌다, 해영아. 편집 없이 그대로 방영되면 시청률 20퍼센트 찍을 텐데.”

현직 콘텐츠 제작자다운 시선이었다. 제 일 아니라고 마냥 흥미로워하는 세희를 보며 해영이 헛웃음을 뱉었다.

“누나, 요즘 뉴스도 그 정도 안 나와요.”

“당연하지, 그건 재미없잖아.”

그렇다면 제 사정은 재밌다는 말인가? 선우와의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자신과 다르게 세희는 세상 쿨하게 대답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네 편인 거 알지?”

언젠가 들었던 말이었다. 그녀의 시원시원한 말에 해영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고마워요.”

“뭘.”

그때나 지금이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채로도 세희는 제 편이라는 엉뚱한 선언을 했다. 그 가벼운 응원에도 해영은 쉬이 위로받았다.

문득 숙소를 나서기 전 봤던 얼굴이 떠올라 해영은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의 편은 누가 되어 주지.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를 포기하면서 뺏어 간 것은 단순히 연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연인인 동시에 기댈 수 있는 친구였고, 아무것도 약속되진 않았으나 가족이기도 했다. 저 또한 세희처럼 무작정 선우의 편을 들어 주며 그를 격려하던 때가 있었다. 차선우가 제게 그러했듯이.

“더 밖에 있을 거예요? 추운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얼굴에 해영은 결국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바람에 머리가 나부끼는데도 세희는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이 주머니 안에 있던 핫 팩을 꺼내 그녀에게로 건넸다.

“오, 땡큐.”

“저 먼저 들어갈게요. 누나도 얼른 들어와요.”

“알겠어. 근데 너… 별것도 아닌 말 하면서 그렇게 웃지 좀 마.”

내가 뭘 어쨌다고. 웃던 낯 그대로 해영이 억울하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늘였다.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몸을 돌렸다. 발길을 옮기는 해영의 등 뒤로 세희가 휘적휘적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목에 섰을 때였다. 익숙한 인영이 눈에 박혀 들었다.

“…….”

가로등 밑에 서 있던 선우가 그를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뗐다. 제게로 다가오는 초조한 발걸음을 보며 해영이 얼어붙은 채 섰다.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말릴 새도 없이 옷을 벗어 해영의 어깨에 둘러 주던 선우가 돌연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미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언뜻 불쾌해하는 것도 같았고, 조금쯤은 당혹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잠시 말없이 해영을 내려다보던 그는 다시 묵묵히 옷을 입히는 데에 열중했다. 그러고 나서야 차선우는 손을 떼며 한숨과 함께 물었다.

“언제부터 피웠어?”

언제부터 피웠냐니, 순간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해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착잡한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저한테 거슬리는 게 있는 건 분명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해영은 뒤늦게 탄식을 흘리며 팔을 들었다. 그대로 킁킁거리며 옷의 냄새를 맡던 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냄새나? 내가 피운 거 아닌데.”

담배를 피운 게 제가 아니라고 하자, 이번에는 복잡한 표정이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흡사 담배가 아니라 바람이라도 피우고 온 사람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누구랑….”

느릿하게 열린 입에서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되묻다 말고 주저하며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얇은 입술을 잘근거리는 모습을 보며 해영이 기가 찬 듯한 숨을 삼켰다.

유구하게도 차선우는 뜬금없는 부분에서 자신을 불신하는 병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도 이러는 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누구긴. 세희 누나 있길래 잠깐.”

해영이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선우의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에게로 다시 옷을 둘러 주었다. 지금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옷을 벗어 주는 게 말이 되나. 창백해져서는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

“하, 내가 이걸 왜 해명하고 있지?”

찬찬히 눈을 굴리던 해영이 이내 실없이 조소했다. 습관처럼 선우의 표정을 살피며 그를 달래던 제 모습이 퍽 웃겼던 것이다.

제주도에 오기 전까진 의식적으로 그를 피해 다녔다. 선우의 얼굴을 보면 금방 마음이 약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쪽을 향한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면 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곤 했다.

소윤이 방으로 찾아오면서 흐지부지 대화가 끝이 난 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제대로 된 대화라곤 없었다. 여럿이서 사는 와중 진솔한 대화를 하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뒤늦게 카메라 같은 것들이 의식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 내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 놓고, 오랜만의 대화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조차도 우스웠다. 함께한 시간이 이래서 무섭다는 건가 싶기도 했다. 5년을 만나다 헤어진 사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허물이 없는 느낌이었다.

해결되지 못한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는데.

또다시 떠오르는 사념을 털어 내며 해영이 그를 향해 물었다.

“왜 나와 있어. 나 기다린 거야?”

대답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역시나 끄덕, 하고 말없이 떨어지는 고개에 입가의 힘이 풀렸다.

“자꾸 이럴래? 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해영이 신경 쓰이게 좀 하지 말라며 불평을 토했다. 상대에게서는 여전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차선우는 제 옷의 매무새를 정돈해 주는 데 열중하느라 무표정한 해영의 얼굴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며칠의 공백이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해영은 평소와 같은 다정한 목소리를 흘렸다. 덤덤한 얼굴에 오히려 선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게 구는 모습이 마치 제게 거리를 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잠긴 목을 긁으며 다급한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해영아.”

“왜, 선우야.”

해영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평소라면 제 불온한 대답에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렸을 그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단정히 아래로 향하는 속눈썹이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웃자고 꺼낸 건방진 대답에 그는 웃는 대신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내가 잘못했어….”

힘겹게 뱉은 말은 해영의 덤덤하던 가면을 완전히 부서트렸다. 얕은 곡선을 그리고 있던 입매가 금세 가라앉았다.

등지고 있는 가로등의 노란 불빛 아래서도 선우의 얼굴은 유독 하얗게 보였다. 그를 올려다보는 해영의 눈동자가 여지없이 흔들렸다.

‘내가… 잘못했어, 해영아.’

이별의 순간 그가 했던 말과 같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 적어도 해영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처음 들었을 때는 마냥 미안했다면 지금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도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잠깐이었다. 머리가 식은 뒤 남은 것은 조금은 더 애틋하고, 어쩌면 조금 더 무거운 감정이었다.

감정의 진창이 연신 발목을 잡아 왔다. 그 탓에 꼼짝도 못 한 채 입을 다물고 있는 해영에게로 선우가 손을 뻗었다. 차갑게 언 손끝이 발간 눈가를 쓸었다가, 이내 아래로 내려와 그의 뺨을 쥐었다. 찬기 때문인지, 그 접촉 때문인지 빳빳하게 굳어 있던 해영이 한발 늦게 팔을 들었다.

“…나중에.”

제 얼굴 위로 올라온 손을 쥔 해영이 아래로 끌어 내렸다.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 말고.”

“…….”

“나 도망치는 거 아냐.”

울 것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해영은 쓰게 웃었다.

그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제가 도망쳤던 이유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무 좋아서 부끄러웠고, 과분하다 느낄 정도로 사랑해서 절망적이었다.

그가 아빠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제 부족한 점들을 의식할 때마다 덜 비참했을까? 그의 곁에 있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숱하게 떠올린 가정들은 모두 무의미했다. 과거는 벌어진 일이었고, 해영은 그에게서 이미 한 번 도망친 적이 있었다.

이번 한 달간 그와 함께 있던 순간은 떨어져 있던 날들보다 견딜 만했다. 선우가 뭘 두려워하는지도 해영은 이제쯤 알 것 같았다.

“포기… 안 할게. 안 떠날게, 형.”

그 말이 허울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나, 거기에라도 매달려야만 했다. 이미 그어져 있던 선 위에 올라탄 두 사람은 중심을 잡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아무리 버겁고 위태롭더라도 외줄 타기를 멈추고 떨어질 수는 없었다. 마주 보고 선 곳에 서로가 있었기 때문에.

***

하필 그날 밤에는 흰 눈발이 흩날렸다.

그 바람에 해영은 잠들기 전 창밖을 바라보며 비행기가 뜨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했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자고 일어나 마주한 오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최종 선택은 각각 다른 장소로 이동해 진행한다고 했다. 숙소를 나서려던 해영이 겉옷을 입는 선우를 발견했다.

나가려다 말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간 해영이 이미 정리를 끝낸 가방을 다시 열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안을 뒤적거리던 손이 이내 기다란 목도리를 꺼냈다.

“형, 이거.”

가방을 닫고 다시 몸을 일으킨 그가 선우에게 다가갔다. 제게 건네지는 목도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차선우가 설핏 몸을 숙였다. 제게로 기울어지는 상체에 눈을 깜박거리던 해영이 헛웃음을 삼켰다.

삐딱한 미소를 입가에 건 해영은 선우를 밀어 내는 대신 손을 뻗어 목에 목도리를 걸어 주었다. 제법 꼼꼼한 손길로 목도리를 둘러 주던 그가 잠시 멈칫하며 짓궂게 중얼거렸다.

“나도 확 리본으로 묶어 버릴까.”

그 목소리에 선우의 입에서도 기어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검은색의 목도리 위로 보이는 입술은 유독 붉었고, 피부는 흠결 없이 하얬다. 쓸데없이 예쁜 얼굴을 보며 해영은 그가 이전에 제게 목도리를 매 주며 했던 말을 십분 공감했다.

역지사지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선우의 얼굴을 바라볼 때였다. 해영이 깜박하고 있었다는 듯 허겁지겁 몸을 돌렸다.

“선우 형, 잘 다녀와. 김민호 너도.”

먼저 나선 재휘의 다음 순서가 자신이었다. 숙소에 남아 있는 두 사람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준 해영이 문을 열고 나왔다.

정원을 뛰듯 달려간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려 주지 않고 출발한 차는 곧 등대가 세워진 방파제 위에서 멈췄다. 전화번호와 함께 언제 전화를 걸면 되는지까지 알려 주는 치밀함에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혼자 덩그러니 방파제 위에 서 있자니, 겨울 특유의 서느렇지만 깨끗한 공기가 살갗에 닿았다.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멀뚱히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하던 해영이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전화할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걸 수 있는 것도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정말 하고 싶은 사람에겐 전화할 수 없었으니까.

“여보세요?”

- 네, 여보세요.

전화 연결음이 끊기자 들려온 목소리가 평소처럼 쾌활했다. 전화가 연결된 후 잠시간 이어진 침묵에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작 얼굴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렇게 전화로 말하자니 어쩐지 머쓱했다. 실없이 웃던 해영이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한 달간 누나가 있어서 진짜 다행이었어요. 알고 있어요?”

- …응, 나도. 너랑 알게 돼서 좋았어.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 만난 것도 다행이에요.”

- …….

“누나 좋은 사람이니까.”

해영의 말에 수화기 너머는 잠시 조용해졌다. 그 정적 속에서 세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왜인지 웃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제 그녀가 짓고 있던 복잡한 얼굴도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연애는 안 할 거라더니. 장난스러운 말이 입가에 맴돌았으나, 제가 했던 말에 걸려 넘어진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해영은 한층 더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제가 더 잘생기지 않았어요?”

누군가를 겨냥한 물음에 세희가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넘어오는 핸드폰을 붙잡고 해영 또한 숨죽여 키득거렸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잦아든 즈음이었다.

입가에 보조개를 건 채 해영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잘 지내요.”

- 응. 해영이 너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던 해영이 뒤늦게 하진을 떠올리곤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최종 선택에서 차인 남자치고 지나치게 태연했나. 그런 걱정이 들었으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한참 까만 화면을 바라보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해영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시선을 멀리에 두었다. 입에서 나온 희뿌연 입김에 가려져 세상이 흐려졌다. 끝없이 펼쳐져 있던 수평선에 파도가 치듯 일렁였다.

모든 걸 알기 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날이 좋을 때면 한강을 바라보며 앉아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집 앞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추운 날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달려가 언 손을 붙잡고 입김을 불어 넣던.

그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들 순간순간, 문득 이유 모를 초라함을 느끼는 찰나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

방파제에 부딪히며 부스러지는 물보라를 멍하니 바라보며 해영이 몸을 굽히고 앉았다. 솔직해지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을 뿐, 사실 답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날 포기하지 마.’

그의 말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알게 돼도 네가 날 선택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비록 그의 반대편 선택지에 놓인 게 나 자신일지라도.

***

럽라 마지막까지 레전드였다

노래까지 완벽... 펑펑울다 끝남 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껏 본 연애프로 중에서 이정도로 감정선 찐한거 본적 없음... 세희언니... 잘살아요.... 여출들 사랑해... 남출들은...뭐 .. 건강하세요 ..

세희언니 끝까지 고민한 것 같았는데 해영이 전화받고 마음 정한듯..? 전화 끊자마자 재휘한테 가는거 미쳤고... 둘이 만나서 꽁냥꽁냥하는거 보여주더니 혼자 남은 해영이 클로즈업하는 연출... 이 미친 프로

소윤이 최종선택이 민호일줄은 1도 예상 못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둘이 진전이 있었나봄? 아무튼 생각보다 좋고ㅋㅋㅋㅋ 마지막에 출연진들 인터뷰로 마무리되는 것까지 너무 좋았어 영화야뭐야 ㅠㅠㅠ

(댓글 21)

ㄹㅈㄷ야.. 울고웃고 마지막에 깔리는 노래까지 갓벽

└ㄹㅇ,, 막화까지 걍 레전드 프로로 문닫고 끝냄

마지막 인터뷰 보고 울다가 웃음ㅋㅋㅋㅋ 선우랑 해영이 인터뷰 겹치는거 뜬금없는데 웃기잖아ㅜㅜ 가장 신경 쓰이는 출연자로 여출 아니라 서로 지목하는게ㅋㅋㅋㅋㅋ

└22 방송만 보면 둘이 엄청 친해보이진 않았는데 같은 방 쓰다가 친해졌나?ㅋㅋㅋㅋㅋㅋ 귀엽ㅠ

└윤해영: 그형은... 너무 웃어요....

└아 이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필 진지하게 말해서 더 웃겼음

해영세희 마지막 봐도봐도 안질림

└근데 제가 더 잘생기지 않았어요? 레전드..

└세희 눈 그렁그렁한 채로 있다가 해영이 농담 듣고 웃는거 영화같음 ㅠㅋㅋㅋㅋ 좋은사람 이 말도 무슨 대본 아니냐고...

울었어? 다른 남자때문에 울었어? 재휘 이거 개좋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ㅎ

└이 부분 최고야진짜 재휘가 진국이다

└해영세희보고 울다가 여기서 웃음 ㅋㅋㅋㅋㅋ둘이 더 풀어줬으면 좋았을듯ㅠ

세희 전화 끊고 해영이만 1분 넘게 보여준거 같은데.. 방금까지 나오던 노래 끊고 숨소리랑 바닷소리만 들려주는 연출... 미친 프로

└나진짜여기서 울었다..

말도안돼 내 주식 다 실패함

└뭐잡았는데?

└확신의 해영다인ㄴㅇㄱ

여출들한텐 사랑한다고 해놓고 남출들한테는 건강하세요 이러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민호 어떻게 소윤이한테 픽당함..?

└ㄹㅇ ..선우소윤 아닐까? 했는데 하루이틀만에 이렇게 바뀌네

└그 전날 데이트 때 각 잡혔음.. 소윤이 너무 좋아서 쳐다도 못 보고 계속 웃고 설렌다고 말하는데 ㅅㅂ 나였어도 민호한테 흔들렸어

연애프로 아니고 다인이 성장서사임

주어 러브라인

사실 해영다인 밀었거든 근데 해영이 처음부터 끝까지 세희라고? 어떻게 이래...

그럴거면 왜 다인이랑 같이 카페 가주고 노래 좋다고 말해줬어... 왜 선우랑 다인이랑 정원 나가니까 다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냐고... 왜 꽃 사서 공연 보러가고 저녁 먹으면서 사람 꼬시고? 왜 다인이 기타가방 들어주고 샌드위치 포스트잇 답장 써서 돌려줬어 소지품 고르기 할 때 1등 해놓고 세희 물건 안 고르고 다인이 물건 먼저 골라놓고ㅠ 최종 선택이 다인이가 아니라고? 이 남자한테 유죄구형

한편으로는 둘이 최종커플 안된게 너무좋음.. 둘이 커플 됐으면 럽라도 그냥그런 썸타는 연애프로중 하나였을텐데 다인이 서사 하나로 럽라 아이덴티티 만들어짐... 최종선택포기 이것도 원래 없었을 것같은데 다인이 때문에 만든 것 같아.. 선택포기하면서 자기 러브라인은 아직 음악인것같다고 ㅠㅠ

당연히 최종선택 해영이일줄 알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해변에 해영이한테 줬던 피크 두고 오는 것도... 다인이 홀가분하게 웃는것도... 엔딩까지 이렇게 보여주면 시청자인 내가 감동하게 되잖아

다인이 첫인터뷰 때 지금 밴드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마지막 인터뷰에선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도 해보고 싶다고 웃는거ㅠ 하 다인깅.. 이 수미상관 뭐냐고...

마지막 인터뷰 끝나고 나서 첫 입주하던 때 보여주고 끝내는 것도 미친거 아니냐고 진짜... 괜히 자기전에 봤나봄 여운이 길어서 잠이 안와ㅋㅋ큐ㅠㅠㅠㅠㅠ

담주에도 또 해줘요ㅠ 아쉽다 럽라 못 보내...

(댓글 20)

다인이 성장서사...이게맞다

└ㅁㅈ 주인공이지 뭐

러브라인은 성장물이다... 이상 막화 본 사람

아 그니까!!!! 끝이라니.. 내가 다 시원섭섭해

출연자들 다 처음 입주했을 때보다 마지막 인터뷰때 더 성장?한 모습 보여서 뭔가 뭉클함..

마지막에 다인 해영 서로 안 고른 덕이 큼.. 만약 해영이가 마음 돌려서 다인이 선택했으면 열애시그널 시즌1 커플들 꼴났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 이것도 맞음 누가 봐도 다른 사람한테 마음 있는데 최종커플 되는 것보단 나아

다인해영 명작 만드는데 큰몫했다 ..

└진짜 이둘 덕분에 끝까지 봄

ㅇㅈ 최애는 아니었지만 다해 때문에 보기 시작했고 마지막은 럽라인 통틀어 명장면 ㅇㅇ

└맞지.. 나도 다해 때문에 보기 시작함 그런 사람 많을걸

럽라인 아이덴티티가 다인이라는건 오바

└아 예

└다른 사람들이 비중 더 많았는데 다인이가 주인공이라는건 무슨 억지임ㅋㅋㅋㅋㅋㅋㅋㅋ

└알았다고요 가시라고요

혹시 패널들이 윤해영 낳았음? 해영이랑 다인이 대화할 땐 다들 입꼬리 주체 못하고 광대 치솟다가 세희랑 대화할 땐 다들 휴지에 눈물 닦는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ㅈㄴ웃겨ㅠ

└ㄹㅇ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해영이 패널들 과몰입 버튼임

└패널들은 모르겠는데 난 윤해영 내가 낳은듯...

여자사랑함 @real1oveya ·202X.4.29

ㅁㅊ...세희 선택 재휘임

세희재휘라고????

안 믿겨...

.avi

???? ↺ 84 ♡ 29

여자사랑함 @real1oveya ·202X.4.29

해영씨 표정 어쩔거...

.avi

???? 7 ↺ 150 ♡ 45

hikikuu @likehikiiw ·202X.4.29

러브라인 최종선택

소윤♡민호

세희♡재휘

해영->세희

현아->재휘

다인 선택 포기

선우 선택 포기

???? ↺ 1194 ♡ 310

hikikuu @likehikiiw ·202X.4.29

출연자들보다 더 구질구질하게 럽라 못보내주는중... 다들 러브라인2에서 다시 만나자고요...

???? 1 ↺ 5 ♡ 19

***

모두가 떠난 숙소에 남아 인터뷰를 해야 했던 선우는 가장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멀거니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으나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선우 씨, 어디 아파요?”

옆에서 함께 탑승 수속을 밟았던 여자 출연자가 퍽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어 왔다. 이름이 뭐였더라. 예민해진 머릿속에는 그녀의 이름이 뭐였는지조차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선우는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으나, 상대는 쉬이 눈에서 걱정을 지우지 않았다. 선우는 낯빛이 좋지 않아 보인다며 저를 주시하는 그녀의 시선에서 비켜섰다.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거는 그의 모습에 현아도 결국은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부터였나, 아니면 그제부터였나.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도 기억나지 않는 두통이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나오면서 선우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힘없이 떨어져 있던 고개가 들린 것은 멀찍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해영아!”

“와, 이렇게 다 같이 가는 거야? 이건 좀 잔인하지 않나?”

“커플 매칭된 사람끼리는 따로 오나 봐. 여긴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

“다인아….”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서는 해영이 보였다. 그는 찡그리듯 웃는 얼굴로 다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말간 얼굴을 보니 속이 탔다.

해영아, 나 아파. 입을 다문 채 그는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머리가 어지러운 나머지 미약한 구토감까지 치밀었다. 차선우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제게로 와 줄 윤해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너잖아. 그러니까 나 좀 봐 줘. 나한테 와 줘. 당장에라도 그에게 매달리고 싶어 입 안에 자꾸만 축축한 언어들이 고였다. 그때 선우는 자신의 팔목을 잡아 내리는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꼈다.

“형… 어디 아파?”

“…….”

“나 좀 봐 봐.”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이 끌어 내려지면서 어두운 시야가 다시금 환해졌다. 밝은 자리에 대신 들어찬 것은 사랑해 마지않는 이의 얼굴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설핏 미간을 구기고 있는 해영의 시선에 걱정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아. 굳게 다물려 있던 선우의 입술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작은 몸짓으로 끄덕여지는 고개에 그의 옆에 서 있던 현아가 흠칫하며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열은 안 나는데.”

손등을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대고 열이 나나 확인한 해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얼굴과 찡그려졌는데도 여전히 곧은 눈매. 대학에서 처음 봤을 때도 해영은 이런 얼굴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선명한 장면을 떠올리며 선우가 손을 들었다.

날 좋아하면서. 날 보지도 않고 있다가 달려와 아픈 걸 눈치챌 정도로 좋아하면서. 왜 멀어지려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우의 손끝이 해영의 눈가로 올라왔다.

“…안 아프지?”

해영은 대뜸 눈꼬리에 와 닿은 차가운 손끝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헛웃음과 함께 그를 올려다보는 눈길에 의심이 어렸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흘릴 뻔한 웃음을 삼켰다. 그는 애써 눈썹을 내려트리며 해영에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아냐. 나 머리 아파, 해영아.”

“그럼 일단 이거라도… 아 잠시만, 물이 없네.”

그건 썩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를 보며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해영은 물을 사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며 몸을 돌린 채 어딘가로 달려갔다.

이런. 선우는 덩그러니 남은 그의 짐가방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실소를 뱉었다. 아프다고 하면 곁을 떠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래서야 제 손으로 등을 떠민 꼴이 돼 버렸다.

해영이 가쁜 호흡을 고르며 뛰어왔을 때는 벌써 탑승 시간이었다. 진통제 한 알을 물과 함께 넘긴 후 선우는 그와 함께 비행기에 올라탔다. 우연인지, 두 사람의 좌석은 붙어 있었다. 창가로 들어간 해영은 제 옆자리에 앉는 선우를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머리 아픈 건 좀 나아졌어?”

“응, 이제 괜찮아.”

“아까보다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혹시 계속 아프면 말해.”

“정말 괜찮아졌어.”

잠시 말을 멈춘 선우가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너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형은, 씨, 진짜 틈만 나면….”

그의 잇새로 비속어가 짓이겨지는 것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작게 씨근덕거리던 해영은 곧 고개를 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탑승이 마감되지 않은 비행기 안은 소란스러웠고, 두 사람의 조용한 대화를 들은 이는 없어 보였다.

해영이 그제야 안심한 듯 다시 좌석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비행기 안 어딘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대한에어를 이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비행기는….

기장의 안내 멘트를 들으며 윤해영은 턱을 괸 채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도 별다른 미동은 없었다.

선우도 따라서 의자의 팔걸이에 팔을 걸쳤다. 창가를 향해 몸을 비스듬히 돌린 그의 시선은 해영에게 꽂혀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정적인 얼굴의 윤곽을 덧그리며 차선우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자신의 아프다는 말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정작 그야말로 오늘따라 얼굴이 창백했다. 이따금 눈을 깜박일 때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꺼풀과 굳게 다물린 입술. 무언갈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끔 쭉 뻗은 콧잔등이 미세하게 찌푸려지기도 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차선우는 비행기가 영영 착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프로그램에 그가 출연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마냥 끔찍했는데, 지금은 촬영이 완전히 끝난 뒤에도 그가 자신을 봐 줄지 알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윤해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은 선우에게 있어 절대적이었다. 좋아한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지만, 그가 자신의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란 믿음은 없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제게서 떠나간 전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멈춰 왔던 호흡을 시작하듯, 선우는 느릿한 한숨을 내쉬었다.

“차선우! 여기!”

출구에서 빠져나오던 선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저를 보며 씩 웃고 있는 하진을 향해 차선우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잘 다녀왔어? 숙소는 괜찮았고? 제발 사고 안 쳤지?”

싱글싱글 웃는 얼굴 한편에는 예리하게 자신을 살피는 시선이 있었다. 사고라도 쳤으면 금방 목을 졸라 버리기라도 할 눈빛이었으나, 선우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손을 내밀었다.

“줘.”

하진이 제게 내민 손바닥을 바라볼 때였다.

“누나?”

선우의 뒤에서 고개를 내민 해영이 그녀를 불렀다. 하진이 이곳에 있는 게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하진은 그런 해영을 바라보다가 꿋꿋이 손을 내밀고 있는 선우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어설픈 미소가 걸렸다. 귀찮은 일에 엮였다는 감상이 노골적으로 표정에 떠올랐다.

“하. 나도 모르겠다.”

하진이 짧은 한숨과 함께 검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무언가를 찾듯 뒤적이던 그녀의 손이 이내 선우가 내민 손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그녀가 떨어트린 것은 은색의 매끄러운 반지였다.

제 손바닥 위로 떨어진 반지를 집은 차선우는 자연스럽게 그걸 약지에 꼈다. 힐긋 제 옆에 선 해영을 내려다보자 창백해진 채 굳어 있는 얼굴이 눈에 담겼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하진이 꺼낸 게 무엇인지 눈치챈 얼굴이었다.

“윤해영, 잘 다녀왔어? 바람 많이 불었다는데 안 추웠고? 숙소는 따뜻했지? 어제 저녁은 많이 먹었어?”

“…잘 다녀왔고, 많이 안 추웠고, 숙소도 따뜻했고, 밥도 잘 먹었어. 누나는 잘 지냈어?”

“이 똑똑한 자식, 하나도 안 빼놓고 전부 대답하는 거 봐.”

선우의 손가락에 틀어박힌 시선을 돌리려는 듯 하진이 그의 흰 뺨을 쥔 채 질문을 우수수 쏟아 냈다. 눈을 돌린 해영이 그녀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성실히 대답하면서도 입가에 건 미소가 영 서투르게 느껴졌다. 결국, 시선은 다시금 선우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몇 년간 한 번도 뺀 적 없던 자리가 한 달이나 비어 있었다. 선우는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해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끼고 있는 반지는 원래 두 개가 한 쌍이었다. 남은 반지의 주인은 당연히 윤해영이었다.

프로그램 촬영이 시작된 당일 이하진은 안으로 들어가려는 저를 붙잡고 손을 내밀었다.

‘촬영 끝나고 돌려줄게, 반지 나한테 줘.’

손에서 빼기 싫었으나, 주기 전엔 안 들여보내 줄 거라며 눈을 치켜뜨는데 별수 없었다. 그때를 곱씹던 선우의 시선이 흘긋 해영의 손으로 떨어졌다. 비어 있는 약지는 한 달 내내 봤던 것인데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맞다, 짐 많을 거 같아서 데리러 왔는데. 집까지 태워다 줄게, 해영아.”

“누나 차 가져왔어? 그럼 나 좀 빌려주면 안 돼?”

해영의 말에 하진이 뜬금없단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위로 질끈 묶은 검은 생머리가 그 몸짓을 따라 옆으로 늘어졌다. 그녀는 가타부타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뒤적여 차 키를 꺼내 주었다.

“주차장 출입구 바로 앞에 있어. 내 차 뭔지 알지?”

“응, …고마워.”

별말을 다 한다며 코웃음 치는 하진에게 팔을 뻗은 해영이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하진은 저보다 훨씬 큰 그의 등을 익숙하게 토닥여 주었다.

이윽고 몸을 물린 채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해영은 웃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공항을 빠져나가는 그의 뒤를 선우가 당연하다는 듯 쫓았다. 뒤에서 하진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앞서 걷던 해영은 예상했다는 듯,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형, 우리도 가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윤해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시원스레 씩 웃었고, 의아해하는 선우에게로 툭 말을 던졌다.

“여행.”

***

공항으로 올 때 촬영용 차를 다 같이 타고 왔기 때문에, 하진에게서 차를 빌리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렇다고 내일 출근을 해야 할 차선우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여행을 가자는 난데없는 제안에도 차선우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어디를 말하든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운전석에 앉은 자신을 보며 잠시 멈칫하긴 했으나, 그는 고분고분 차에 올라탔다.

공항에서부터 출발한 차는 제법 오랜 시간을 달렸다. 점심도 먹기 전에 출발했기 때문에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대충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곧잘 장난도 주고받으면서 괜찮은 분위기에서 식사했는데, 결국 그대로 체하는 바람에 또 다음 휴게소에 들러야만 했다.

“해영아, 여기.”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에게 선우가 작은 병을 내밀었다. 다른 손이 병의 뚜껑 부분을 쥔 채 가볍게 돌려 열었다.

액상형 소화제가 든 갈색 유리병을 보며 해영이 멈칫했다. 속이 안 좋다느니 하는 말 같은 건 한 적도 없었다. 운전 중에 참지 못하고 휴게소에 들어서면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 했을 뿐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 같긴.

복잡한 눈길을 지운 해영이 그에게서 약을 받았다. 본인 아픈 것에는 무딘 주제에 제가 아픈 건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빈 병을 쓰레기통에 버린 해영은 선우와 함께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차된 차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자연스럽게 운전석으로 가려던 해영을 붙잡은 선우가 단정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운전할게.”

부드럽지만 어딘가 단호한 구석이 어린 음성이었다. 해영은 설핏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아냐, 내가 할 수 있어. 형 지금 운전까지 하면 내일 엄청 피곤할걸.”

“괜찮아, 하나도 안 피곤해.”

“그래도….”

“응, 해영아.”

웃는 낯으로 나긋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해영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보라는 듯한 시선을 받으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순순히 선우가 문을 열어 준 조수석에 올라탔다.

선우는 이미 내비게이션으로 찍어 둔 경로를 따라 차를 운전했다. 그가 운전하는 모습을 힐끔거리던 해영의 눈에 기어코 들어온 것은 핸들을 쥔 손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핸들을 쥐고 있는 왼손 약지에 있는 은색 반지.

‘미치겠네….’

공항에서 선우와 대면하고 있는 하진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섰을 때였다. 하진은 저를 보자마자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에 해영 또한 그녀가 선우에게 건넨 물건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온 물건이 뭔지 알아차렸을 때는, 순간적으로 손끝이 차가워져 들고 있던 가방을 놓칠 뻔했다. 해영은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심장이 철렁였다.

제가 줘 놓고 알아보지 못할 리가…. 해영이 선우를 힐긋거리던 시선을 떼며 정면을 주시했다.

그가 막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아마 가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차선우는 뭔가를 같이하는 건 좋아해도 같은 물건을 맞추는 취미는 크게 없었는데, 그중 예외였던 것이 반지였다. 졸업이 가까워지는 무렵 그는 유독 더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그때마다 해영은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곤 했다.

맞추기 싫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 학교를 같이 다니는 것도 아니니 걸리는 것도 없었다. 다만 대학생이던 때의 자신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와중에 반지만큼은 제가 직접 선물하고 싶었다. 그동안 받기만 해 왔던 것이 내내 걸렸는데, 마침 졸업이라는 적절한 명분이 생겨 주었다.

‘졸업 축하해, 형. 이건 선물.’

해영은 알바 자리 하나를 더 늘려 모은 돈으로 그에게 졸업식 날 반지를 선물했다. 저가 모델은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다. 반지가 껴질 곳이 차선우 손가락인데, 우아하게 뻗은 그 손가락에 아무거나 끼울 순 없지 않나.

결국, 하진에게 도움을 구해 가며 어렵게 골랐다. 비록 함께 고민해 주는 내내 ‘근데 왜 그걸 네가 준비해야 하느냐’,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걔 사실 존나 부자다’, ‘뭘 돈을 쓰냐 손가락에 펜으로 반지 그림을 그려 줘도 좋다고 처웃을 거다’ 등등의 말들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긴 했지만, 어쨌거나 고른 결과물은 자신이 보기에도 썩 괜찮았다.

졸업식 날, 검은색과 파란색이 들어간 졸업 가운을 입고 차선우는 안고 있는 꽃다발보다 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해영이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기 전까지는.

‘나중에 돈 더 많이 벌면 좋은 거 해 줄게. 기다려 줘, 알았지?’

멋쩍은 탓에 부러 더 시원스레 입꼬리를 올린 해영이 쥐고 있던 선우의 손을 놓았다. 평소였다면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을 그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말이 없던 선우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조용히 벌어진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잔뜩 눅눅해져 가라앉아 있었다.

‘…싫어하는 줄 알았어.’

‘뭘, 반지를?’

해영이 선우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그가 설핏 고개를 끄덕이자, 해영의 웃던 낯에 슬쩍 미안한 감정이 떠올랐다. 넌지시 말을 꺼낼 때마다 은근슬쩍 화제를 돌린 것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니 괜스레 속이 뭉클해졌다.

해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사진을 찍느라 바쁜 것을 확인한 그가 손을 들어 선우의 뺨을 쥐었다.

‘내가 왜 싫어. 차선우 내 거라고 티 내고 싶어 죽겠는데.’

장난스레 말하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결국, 선우의 붉은 눈가가 삽시에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내리깔아 기다랗게 늘어진 속눈썹 사이에 물기가 엉키듯 맺혔다.

그를 올려다보던 해영이 당황해 손끝으로 옷소매를 쥐었다.

‘또 울어? 또 우냐고.’

당황이 섞인 물음은 거의 타박에 가까웠다. 말과는 다르게 해영은 다정한 손길로 소매를 쥐고 선우의 눈가를 살살 찍어 눌렀다. 하얗던 와이셔츠가 금세 얼룩을 그리며 젖어 가도록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해영이 그의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부단히 닦아 내는 동안, 선우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짙은 시선 속에 담기는 것은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나지막하게 달싹였다.

‘껴안고 싶어….’

‘여기서? 좀 참아 봐.’

‘못, 참겠….’

‘아, 제발 형…! 차선우. 선우야아.’

해영이 제게로 쓰러지듯 기대 오는 그를 꾸역꾸역 지탱했다.

그대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 한참을 토닥이고 나서야, 울어서 엉망이 된 사진 한 장을 건질 수 있었다. 아, 물론 차선우는 울고 나서도 여전히 혼자 예쁜 얼굴을 자랑하고 있었고 엉망인 건 제 쪽이었다.

그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으려나. 문득 떠올린 해영이 입술을 짓씹었다. 없어졌다면 왜인지 서러움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어떠한 간극이 존재하든 간에, 간직할 수 있지 않나. 사진 한 장 정도는.

“해영아, 아직도 속 안 좋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를 힐긋거리던 선우가 걱정스레 물어 왔다. 해영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완전 멀쩡해. 나 원래 튼튼한 거 알잖아.”

태연한 척 씩씩하게 웃으며 한 말에 대답은 늦게 되돌아왔다.

“…알지.”

그의 대꾸에도 옅은 웃음기가 배 있었다. 모를 수 없다는 듯 담담한 어조에 움찔한 해영은 손을 들어 목덜미를 쥐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목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사진 한 장 정도는 간직할 수 있지 않냐니. 5년을 함께하며 남은 건 사진 한 장 정도가 아니었다. 모두 지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는데도….

해영이 입을 다물며 한숨을 삼켰다. 지워야만 할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이전처럼 그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비록 다 게워 내긴 했지만 오는 와중에 이른 점심을 먹었기 때문일까, 해영은 조용하게 달리는 따뜻한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선우가 가볍게 어깨를 쥐었을 때였다.

해영이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떨어져 있던 고개를 들었다. 차선우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편해 보여서 벨트 풀어 주려고 했어. 편하게 자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데 선우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해영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졸았네, 미안. 눈 감긴 줄도 몰랐어….”

“시트 젖혀서 좀 더 자, 해영아.”

“아냐, 다 깼어. 여기가 어디야?”

해영이 선우를 향해 물으며 유리창 밖을 두리번거렸다.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종료되어 있는 걸 보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기는 했다. 차가 멀찍이 주차된 탓에 줄줄이 늘어선 나무들 너머 바다가 펼쳐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도착했어.”

창밖을 기웃거리는 그를 보며 선우가 선선히 입을 열었다. 돌아온 대답에 해영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가자. 바다는 보고 가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이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이미 졸린 기색도 지워졌다. 선우가 별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영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뒷좌석에 던져 두었던 외투도 꺼내 걸쳤다. 그를 따라 차에서 내린 선우는 해영이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얀 패딩을 입어서인지 머리나 눈썹이 유독 짙어 보였다. 시원스러운 이목구비가 한층 더 뚜렷하게 시야에 박혀 들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선우가 뒤늦게 차의 문을 닫았다.

제주도보다 한층 더 거센 겨울바람이 해영의 머리카락을 잔뜩 흩트렸다.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이제는 미뤄 왔던 선택을 고해야 할 때였다. 스무 살,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장면의 주인공이었던 남자를 향해.

***

동해는 제주도의 바다와 뚜렷한 차이가 존재했다. 어젯밤 눈이 온 탓도 있겠으나, 동해가 확연히 더 수심이 깊어 보였다. 푸른 물색은 쉬이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툼한 질감을 지니고 있었다. 쉬지 않고 철썩이는 물살은 해변으로 가까워지면서 물보라가 되어 하얗게 부서졌다.

산산이 조각난 파도들이 발치로 밀려들어, 멍하니 핸드폰으로 바다를 찍던 해영은 황급히 뒤로 몸을 빼야만 했다. 모래사장에 발이 걸려 휘청이는 그의 몸을 선우가 뒤에서 잡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떨결에 기대어 섰던 해영이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차선우는 비스듬히 시선을 내린 채 꾹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하고, 결국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해영이 멋쩍은 얼굴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 씨, 쪽팔려. 잠시 볼을 긁적이던 해영은 이내 선우의 팔을 붙잡고 제가 카메라로 담던 바다의 앞에 세웠다.

“형, 사진 찍자. 내가 찍어 줄게.”

“…혼자?”

“어. 여기까지 왔는데 사진도 한 장 찍어야지.”

해영이 후다닥 뒤로 멀어지며 그를 마주 보고 섰다. 바다를 찍던 핸드폰에는 아직도 카메라 어플이 켜져 있었다. 화면에 들어찬 선우의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졌다.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선우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가를 허물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려고 했으나, 핸드폰 위로 슬쩍 드러난 곧은 눈썹을 발견한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멀리 있어도 그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해영의 입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이윽고 다시 손을 내린 선우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가 저런 다정한 눈웃음을 지을 때면, 쉬이 말문을 잃게 되곤 했다.

대체 예쁘긴 왜 이렇게 예뻐.

그의 눈가에 새겨진 섬세한 웃음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마음이 벅차올랐다. 해영은 뒤로 펼쳐진 바다보다도 더 인상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사진으로 담았다.

“와…. 나 사진작가 해야겠다.”

찍은 사진을 확인한 해영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잠시 제게 사진을 찍는 재능이 있었나 고민하다, 곧 피사체가 차선우라는 사실을 상기해 내곤 상념을 접었다.

선우는 그저 멀거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잘 찍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사진은 곧잘 모델이 주는 효과를 보곤 했다. 해영이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섰다.

“형, 이거 봐. 잘 찍었지.”

“같이 찍자, 해영아.”

선우를 향해 핸드폰을 들이밀던 해영의 어깨가 떨렸다.

“난 됐어, 머리도 좀 엉망이고.”

해영은 손을 들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제 거절에 입을 다문 선우를 힐끔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 찍자.”

“…나중에?”

선우는 물으면서도 어쩐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랑 또 올 거야?”

되묻는 목소리도 그가 짓고 있는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안이 어린 물음에 해영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 형 나랑 이제 바다 안 오게?”

해영은 퍽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삐딱하게 휘어진 치켜 올라간 눈썹을 주시하던 선우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발치 가까이 올 듯 말 듯 하다 멀어지는 파도를 바라보던 해영이 괜스레 운동화로 모래를 툭툭 쳤다. 아, 어쩌면 대화가 끊긴 지금이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그는 아래를 향해 있던 고개를 들었다. 여태 자신을 보고 있던 눈동자와 삽시에 시선이 마주했다. 그 눈에 비친 짙은 일렁임에 해영은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형.”

“커피….”

부드러운 목소리가 해영의 말을 잘라 냈다. 한 번도 한 적 없던 일을 벌인 선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초조한 시선으로.

“해영아, 커피 마실까?”

그 속삭임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는 없었다.

커피를 마시자고 할 때는 언제고, 카페에 들어간 후 그는 속이 좋지 않은데 커피를 마셔도 되냐며 집요하게 굴었다. 앞과 뒤가 다른 행동이었으나 이상하게 반박할 말은 없었다. 해영은 결국 따뜻한 유자차를 손에 든 채 카페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테이크아웃 잔에 든 음료를 전부 비울 동안,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꺼내지 못했다.

한 달간 프로그램 촬영을 하며 있었던 일, 인턴 실습을 하며 만난 사람들, 실습 첫날 과제를 받고 곤혹스러웠던 것, 2학기에 형사소송법 시험을 공부하다 코피를 흘렸던 일까지,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말들을 주고받으면서도 해영은 어쩐지 대화가 겉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둘 다 근본적인 문제가 뭔지 알면서도 묻어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가의 쓰레기통에 빈 컵을 던져 넣은 해영이 그를 불렀다.

“나 할 말이 있는데.”

“저거 봐, 해영아. 오리 모양 수제 버거래.”

“갑자기 무슨….”

해영은 제 말을 끊고 나온 엉뚱한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해안가를 따라 걷는 동안 그가 눈에 띄게 화제를 돌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쯤 되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차선우는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도 모르면서 지레 초조해하며 회피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안중에도 없을 주변에 관심을 주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해영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굴렸다. 그러던 중 그의 발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모래사장에서 한참을 거닌 탓인지, 선우의 신발 끈이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모래밭 위로 늘어진 흰 신발 끈을 보며 해영이 몸을 굽혔다.

“형, 잠시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선우의 발치로 손을 가져갔다. 신발 끈을 다시 묶는 손길은 익숙했고 자연스러웠다. 꼼꼼히 다시 매고 나서야 해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차선우는 그런 자신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며칠 사이 익숙해진 시선에 해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어색해졌다. 제주도에 가기 전 짧은 말다툼을 한 뒤부터, 늘 저 상태였다. 말수는 부쩍 줄어들었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시선이 자신만을 좇았다.

제가 말없이 훌쩍 떠나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니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해영이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얘기하기로 했잖아. 내 말 좀 들어봐.”

“싫어….”

“나 참. 이게 싫다고 할 일이야?”

그는 입술을 짓씹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왜인지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 같아서 귀엽긴 했지만, 이런 비협조적인 태도가 이어진다면 곤란했다.

“들어 봐, 형.”

단단한 음성이 선우를 붙들었다. 저를 봐 주지 않는 그의 시선을 열심히 쫓으며 해영은 허탈한 웃음을 삼켰다.

아버지를 만난 후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복잡한 머릿속에 문득 선우가 떠오를 때면 별수 없이 그리워진 순간도 수차례 찾아왔다. 생각을 정리하고자 애쓰다 보니 그가 왜 헤어지는 순간에도 이유를 묻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른다. 제게 그가 소중하듯, 차선우에게도 윤해영만이 소중했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전처럼 돌아가는 건 힘들지 않겠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제법 덤덤했다. 해영이 설핏 웃는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도리어 얼굴이 굳은 건 선우였다.

“해영아.”

“그래도 형은 나한테 유일한 사람이야.”

“…….”

“그러니까 노력하려고.”

몇 번이나 곱씹으며 연습한 탓에 말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계속 형 옆에 있을 수 있도록.”

“…그게 무슨 말이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희고 깨끗한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잡혔다. 해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헤어져도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 많잖아.”

“친구?”

발밑이 훅 꺼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졌다. 검은 눈동자가 충격에 일렁였다.

차선우는 생경한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그가 뱉은 단어를 되짚었다. 흔들리는 시선이 해영의 눈을 주시하다가, 그의 입가에 걸린 옅은 보조개에 꽂혔다.

말을 잇지 못한 채 얼어 있던 선우는 대뜸 그의 머리로 손을 올렸다. 해영은 난데없이 제 이마를 짚는 차가운 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선우는 퍽 심각한 얼굴로 남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덮었다. 아무리 봐도 열을 재 보는 듯한 모양새에 해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뭐 하는 거야.”

“어디 아픈 거 같은데.”

“…사람이 용기 내서 말하고 있잖아, 지금.”

윤해영은 팔을 들어 제 이마 위에 올라온 손을 치워 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급기야 저를 심신 미약 상태로 몰고 있었다.

그렇게 황당한 소리였나? 하지만 그게 제가 찾은 타협점이었고, 결코 쉽게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제가 어떤 비참한 상황에 놓이건 간에 차선우의 곁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끝난 것만 같던 관계에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서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연인 사이로 남지 못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남는 것이 더 끔찍했다.

하지만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와중에 그의 흠까지 되고 싶진 않았다. 비단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윤해영은 이미 제게 같잖은 자존심보다 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단지 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도출된 단 하나의 결론이었다. 자신에게는 차선우가 필요했다. 여태 그랬듯, 앞으로도.

“그럼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나긋하게 묻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다정했으나, 해영은 그 물음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달싹이는 입 위로 길게 늘어진 눈에 웃음기가 지워져 있었다.

“친구, 해영아. 친구라고. 너랑 내가?”

그건 질문 같기도 했고, 어쩌면 혼잣말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단 기색이 역력했다.

“친구란 이름이 아니어도 돼. 그냥….”

머릿속으로 어설픈 변명거리들이 떠다녔다. 해영은 곧장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뻗어 선우의 팔을 쥐었다.

“이전처럼 함께하려는 거야. 단지 전처럼 형한테는 내가 전부가 아니고, 나도….”

선우를 설득하기 위해 조곤조곤 나열되던 말끝이 도중에 흐려졌다. 차마 제게도 그가 전부가 아닌 순간이 올 것이라는 말은 꺼내기 어려웠다.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짧은 순간 떠오른 의문에 해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하려던 말 대신, 그는 선우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못 해.”

애써 덤덤하던 표정은 선우의 대답에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찡그리듯 미소 짓고 있던 낯이 점차 흐려졌다.

어쩔 수 없이 콧날이 시큰했다. 그에게 친구 같은 사이로라도 지내자며 매달리는 모습은 제가 보기에도 퍽 구질구질했다.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초라해지는 것 같아 해영은 짧은 실소를 흘렸다.

“못 하면 어쩔 건데. 앞으로 안 보고 살 거야? 나는 형한테 이미 못 볼 꼴 다 보였고,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는데.”

집이 망했다는 게 학교에 퍼졌을 때도 부끄럽지 않았고, 친구들은 대학생이라고 놀러 다니는데 빽빽하게 짜인 알바 일정에 시간을 내지 못할 때도 속상하지 않았다. 노력하다 보면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번에는 아니었다. 상황은 여전히 답이 없어 보였고, 선우의 앞에 서면 자꾸 마음이 가난해졌다. 그의 곁에 있고 싶은 스스로가 우스울 정도로.

“답을 모르겠으니까 뭐라도 해 보자는 거잖아. 남들 보기엔 그냥 친한 친구 사이처럼….”

“…….”

“그렇게 지내면, 형이랑 아무렇지 않게 얼굴 보고… 연락하고, 그럴 수 있을 거 아니야.”

장난스러웠던 음성이 갈수록 가라앉았다. 해영 또한 제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끝내 입술을 짓씹듯 다무는 그에게로 선우가 손을 뻗었다.

차선우는 언제부터인가 희게 질릴 정도로 꽉 쥐여 있던 해영의 주먹을 감쌌다. 살살 손등을 매만지는 손길에 점차 주먹에서 힘이 풀려 가는 것이 느껴졌다. 느슨해지는 손 틈 사이로 선우는 제 손가락을 끼워 넣고 견고하게 마주 잡았다.

“너와 관련된 것 중에… 아무렇지 않은 일은 단 하나도 없어.”

선우의 입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깍지 낀 손가락이 그의 입가로 끌어 올려졌다. 차선우는 단단히 쥔 해영의 손가락 마디 위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입술과 살갗이 맞닿는 순간, 짧은 마찰음이 작게 울렸다. 그의 몸짓을 멀거니 지켜보던 해영의 팔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선우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시선만 들어 올려 해영을 바라보았다.

“함께 보낸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덮어 두는 거, 난 못 해.”

느릿하게 흘러나온 선언은 언뜻 고집스럽게도 느껴졌다. 해영의 신경은 오롯이 선우가 쥐고 있는 손에 향해 있었다. 속삭일 때마다 입가에 닿은 손가락 위로 얕은 숨결이 느껴졌다.

그가 어디에 신경이 쏠렸는지 눈치챈 선우가 야트막하게 입술을 벌렸다. 잇새로 살짝 해영의 손가락을 물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였다. 화들짝 어깨를 떤 윤해영은 황급히 선우에게서 손을 빼냈다.

“왜, 왜 물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물음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답은 뻔했다. 잔뜩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작은 심술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모양이지. 알면서도 순간 놀란 탓에 저도 모르게 방어적인 질문이 튀어 나갔다.

왜인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그가 물었던 손끝이 욱신거렸다. 해영이 제 손을 다시 힘주어 말아쥐는 것을 보며 선우가 힘없이 웃었다.

“태어나자마자 모든 게 정해졌다고 생각해 본 적 있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두 정해진 거 말이야.”

두서없이 꺼내진 말이었으나, 해영은 그에게 시선을 보내며 귀를 기울였다.

“쉽고, 무기력하고, 모든 게 의미 없었어. 널 만나기 전까진.”

“…….”

“해영아.”

“…응.”

“넌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원해 본 사람이야. 나한테 처음으로 주어졌던 의미고, 유일하게 어려운 사람인데….”

차선우는 숨을 멈추듯 말을 멈췄다. 어중간하게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린 그가 잠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시금 손이 떨어지고 드러난 미소는 핏기 없이 창백했다.

“이걸 어떻게 아무렇지 않다고 여겨.”

그는 목이 졸린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영은 그 얼굴을 보며 덩달아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지금 제가 하려는 게 대체 뭐로 보이냐고, 적반하장으로 서러움을 토하고도 싶었다. 이 관계를 놓지 못하고 이런 구차한 말로라도 그를 붙잡으려 하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런 해영을 향해 선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날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미약한 웃음기가 서린 음성이었으나, 어쩐지 희미한 원망이 배어 있는 것도 같았다.

“응?”

작게 내뱉어진 짧은 물음이 해영에게 대답을 갈구했다.

“포기하는 거 아니야.”

해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자신과 나란히 놓인 차선우라는 선택지에서 선우를 택했다.

“근데 형은….”

나오려던 말이 목에 걸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에게 꺼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하지 못한 말이, 자신을 포기하고 선우를 생각하자 쉽게 흘러나왔다.

그에게 있어 자신이 전부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것은 이별과 동시에 예정된 일이었다. 이번에 자신이 감당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러한 순간에서조차 그의 곁에 남아 있겠다는 것이다. 서로가 최우선은 아니어도, 어쩌면 유일한 관계로.

해영이 예정된 결말 앞에서 조금쯤은 비딱하게 조소했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만 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웃음을 걸친 채 입을 열었다.

“형은 더 좋은 사람 만나야 해.”

그것이 제가 선우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기원이었으니까.

***

물러서는 사람이 없는 대화가 원활하게 이어질 리 없다. 결국, 붉게 타오르는 석양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마땅한 타협점은 찾지 못한 채로.

해영은 차 앞에 서서 제가 운전하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선우는 그 손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차 키를 건네주지는 않았다.

“데려다줄게. 차도 내가 가는 길에 만나서 돌려주면 돼.”

장시간 운전하면 피곤할 거라는 것이 요지였다. …그럼 자기가 피곤한 건 안 중요한가? 설득력이 부족한 주장이었으나, 그의 고집에 해영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형은 형을 좀 챙길 필요가 있어. 출근해야 하잖아. 내일 엄청 피곤할 텐데 걱정도 안 돼?”

“네가 대신 걱정해 주잖아.”

“…….”

“이제 안 해 줄 거야?”

언뜻 장난스러우면서도 뼈가 있는 물음이었다. 해영은 애써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해영이 입을 다문 채 창밖을 주시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운전에 집중해야 하는 선우는 가끔 옆에 앉은 그를 힐끔거릴 뿐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길거리를 눈에 담으며 해영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선우와 연애하는 동안 거의 동거하다시피 했기 때문일까.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자취방으로 향하는 것은 어쩐지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헤어진 지 반년이 흘렀는데도 자신이 아직 이곳에 지낼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신기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당연하다는 듯 목적지를 설정했다.

좁은 골목 안으로 매끄럽게 들어선 차가 목적지에 다다랐다. 차 앞에 달린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건물 벽을 환하게 비추었다. 해영은 느릿한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알겠어.”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갈 듯한 그를 바라보며, 선우가 내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알겠다니, 뭘? 찰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여태 그가 유보해 온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다려 온 말인데도 막상 그에게서 들으니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그러자.”

해영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웃음기 없던 선우의 눈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부드럽게 휘었다.

“네 말대로 하자, 해영아.”

재차 흘러나온 대답이 마치 못을 박는 것 같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끝까지 다정했다.

“고마워. 다음에 봐, 형.”

해영은 가까스로 마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윽고 차에서 내린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회색빛이 도는 은색의 차 문은 소리도 나지 않고 부드럽게 닫혔다. 닫힌 차 앞에 서서 잠시 주저하던 해영은 이내 뒤돌아보지 않고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선 그는 좁은 신발장에 갇힌 듯 서 있었다. 몸에 힘이 빠진 듯 뒤로 기울었다. 바로 등 뒤에 선 철문 덕에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고마워? 고맙다고? 뭐가 고마워, 대체.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 손바닥 두 개를 펼친 것만 한 현관에 서서 말없이 허공을 주시하던 해영의 무릎이 꺾였다. 주저앉은 그의 무릎 위로 머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그는 그대로 미동이 없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깨가 천천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윽, 으….”

악문 잇새로 작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리 입을 막아 봐도 소용없었다. 선우의 앞에서 보였던 웃음은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 그는 몸을 웅크린 채 참아 왔던 감정들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물어야 했다.

머리를 비추던 현관의 조명은 얼마 가지 못해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혼자 남은 그를 덮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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