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라인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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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해영은 침대에 홀로 누워 있었다. 대신 침대의 가장자리가 아닌 안쪽에 누워 있었는데, 아무래도 선우가 나가면서 자세를 바로 해 준 듯했다.
뻑뻑한 눈을 비비적거리던 해영이 이윽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수만 한 채 방 밖을 나선 그가 계단을 내려오며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었다. 1층으로 내려와 습관처럼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니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소윤이 보였다.
“안녕. 잘 잤어?”
해영이 설핏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소윤 또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응. 괜찮아?”
잘 잤냐는 물음에 엉뚱한 되물음이 돌아왔다. 잠시 멈칫한 해영이 곧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평소의 활기차던 소윤의 목소리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뭘 걱정하는 건지 눈치챈 그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은 곧장 부엌으로 가 컵을 꺼내어 물을 따랐다. 그가 물을 마시는 것을 지켜보던 소윤이 이내 툭 꺼내듯 말했다.
“오빠, 냉장고.”
“…냉장고?”
물을 마시다 말고 입을 뗀 해영이 들고 있던 컵을 내렸다. 어두운 아일랜드식 식탁에 유리컵이 닿으며 짧게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해영은 몸을 돌려, 소윤이 손으로 가리키는 대로 냉장고를 열었다. 덜컹거리며 열린 냉장고는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어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제 눈높이에 있는 샌드위치뿐이었다.
의아한 얼굴을 하던 그의 등 뒤에서 소윤이 말했다.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가벼워져 있었고, 얼핏 웃음이 실린 것 같기도 했다.
“그거 오빠 거야.”
“어?”
예상치 못한 말에 해영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에 소윤이 참지 못하고 키득키득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안에 샌드위치 있잖아. 다인 언니가 오빠 일어나면 먹으래.”
소윤의 말에 해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냉장고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그는 이내 방금 보았던 샌드위치 접시를 꺼냈다. 샌드위치를 싼 비닐 위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해영아 파이팅!
p.s 맛없어도 맛있게 먹어줘
모서리에 나뭇잎이 그려진 포스트잇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동글동글한 글씨체는 모르는 채로 봤어도 다인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식탁에 잠시 그릇을 내려 둔 해영이 그 위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만을 떼어 내려다보았다.
귀여운 글씨였으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해영은 고마운 동시에 감출 수 없는 멋쩍음을 느껴야만 했다.
‘대체 얼마나 죽을상을 하고 들어왔길래….’
그가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당황스러운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어났네?”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든 해영은 다이닝 룸 문 앞에 선 세희를 발견했다. 들어오다 말고 아치형 입구에 선 채 그녀는 제 얼굴을 꼼꼼하게 훑어 내렸다. 해영의 입가에 어색하게 박혀 있던 보조개가 한층 진해졌다.
…세희 누나까지?
자신을 주시하는 눈빛에 서린 것은 분명 걱정이었다. 제 기분이 괜찮나 살피고 있는 것이 분명한 눈길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에서 힘을 뺐다.
“누나.”
인사 대신 그녀를 부르자, 세희는 그제야 멈춰 서 있던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싱긋 웃는 얼굴로 해영에게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커피.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하는 거, 맞지?”
익숙한 로고가 그려진 테이크아웃 컵이 해영이 짚고 있는 식탁 위로 놓였다.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 옆에 놓인 컵에 그의 시선이 향했다.
컵에 박힌 로고는 이전에 다인과 함께 갔던 적이 있는 카페의 것이었다. 세희의 간편한 옷차림을 보니 마을을 가볍게 산책하던 길에 사 온 것 같았다.
해영이 손을 뻗어 제 앞에 놓인 컵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컵 안에 든 커피가 식지 않아서인지, 손바닥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고개를 들어 세희를 바라보는 얼굴에 고마워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누나….”
그녀를 불러 놓고 가타부타 말없이 팔을 벌리는 해영을 보며 세희가 키득키득 웃음을 삼켰다.
“나도 안아 주고 싶은데, 스킨십 금지 조항이.”
“아.”
들려온 말에 해영이 짧은 감탄사와 함께 곧장 팔을 내렸다. 진짜 고마워요, 하고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는 얼굴에 옅은 웃음이 서려 있었다.
이내 그는 컵을 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손에 닿는 온기만큼이나 따뜻한 커피의 씁쓸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잠시간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던 그가 시선을 들었다.
세희와 소윤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한 응원과 걱정을 한 몸에 받은 해영이 입가에서 컵을 떼며 물었다.
“다들 고맙긴 한데…. 나 혹시 오늘 생일이었나?”
장난스럽게 올라간 입꼬리에 그를 주시하던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서로를 눈짓했다. 시선으로 무슨 대화가 오간 건지는 모르겠으나, 잠깐의 정적 끝에 소윤이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어제 오빠 완전 힘없이 들어왔잖아.”
…그렇게 힘이 없어 보였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세희가 이어서 물어 왔다.
“면접 망친 거 아니야?”
그녀의 물음에 답할 말을 찾느라 눈을 굴리던 해영이 멈칫했다.
다인부터 세희까지 다들 저를 지나치게 살피고 응원한다 싶더니, 어젯밤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면접을 망치고 왔다고 생각한 듯했다. 해영의 눈길이 다시 다인이 적었던 포스트잇에 머물렀다. 그제야 그녀가 포스트잇과 함께 샌드위치를 남겨 두고 간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나름의 격려였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면접 결과가 나빴으리라 생각하고 다들 아침부터 이렇게 자신을 챙겨 줬다는 거지…. 해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아니고.”
선선히 고개를 내저은 그가 샌드위치가 든 접시와 커피를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해영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 맞은편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접시를 감싸고 있던 비닐을 떼어 낸 그가 샌드위치 하나를 집으며 입을 열었다.
“면접은 괜찮게 보고 온 거 같아요.”
“잘 안된다고 해도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쪽에 이력서 넣으면 바로 뽑아 줄게.”
“어, 진짜요?”
해영이 감탄하며 얼굴에 시원시원한 웃음을 걸었다. 긍정적으로 대답하기는 했으나, 진심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세희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면접을 못 봤어야 내 제안에 혹했을 텐데.”
자기도 아무한테나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니라며 그녀가 눈매를 가늘게 늘렸다.
괜찮은 남자 모델을 찾는다고 말했었는데 아직도 못 찾았나. 그녀가 모델을 고르는 기준이 깐깐한가 싶기도 했지만, 저한테 곧잘 장난인 듯 진심 어린 제안을 툭툭 던져 오는 걸 보면 생각해 둔 이미지가 뚜렷이 있는 것 같았다. 해영이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누나 출근은요?”
“오늘은 오후 출근.”
세희가 커피를 홀짝이며 답했다. 그 대답에 옆에 앉아 있던 소윤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 역시 대표님….”
장난스러운 대답에 세희도 귀엽다는 듯 소윤을 바라보며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내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뗀 해영이 샌드위치 하나를 금세 먹어 치웠다. 손바닥만 한 샌드위치가 몇 입 만에 사라졌다.
“어쨌거나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말없이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는 그를 보며 세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다 먹으면 냉장고에 있는 주스도 마셔. 현아가 아침에 해 줬는데, 네 것도 넣어 놨어.”
이것까지도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입 안에 있는 것을 전부 삼킨 해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 있는 냉장고를 눈짓한 그는 다시 앞을 보며 웃음기 섞인 한숨을 흘렸다.
“…밥이라도 사야겠는데.”
느릿하게 꺼낸 말은 진심이었다. 받은 것이 많으니 밥이라도 사서 갚아야 하지 않나. 덕분에 혼자였다면 우울했을 아침에 웃을 일이 많았다.
“오빠가 아침 해 놓고 나간 적이 더 많은데 뭘.”
해영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소윤이 코를 찡긋거리며 반박했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는 세희도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그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웃으며 남은 샌드위치를 손에 들었다. 괜스레 코끝이 시려 와 해영은 샌드위치를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집은 어제 밖을 나서기 전과 똑같이 따뜻했고, 모두가 변함없이 유쾌하고 상냥했다. 어제 하루 좀 울적해져서 돌아왔다고 저를 위로해 주려는 이들의 마음이 다정했다.
이곳에서 사는 동안 느꼈던 온기는 전부 함께 지낸 이들 덕분일 것이다. 따뜻함에 익숙해진 게 조금쯤은 서러웠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누군가의 빈자리를 저도 모르게 주시하던 그가 입을 다물었다.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저 그 형이랑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곱씹던 해영의 얼굴에 딱딱한 미소가 걸렸다.
무덤덤한 눈길이 정면의 통유리창을 주시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정원에 새벽 내 내린 눈이 얇게 깔려 있었다. 언제부턴가 느껴지지 않았던 추위가 성큼 다가왔다.
***
저녁에는 집에 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모두가 오면 열어 보자며 기대하는 소윤에게 해영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한 사람씩 집에 도착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더더욱 밝아졌다.
저녁은 집에 있는 이들끼리 차려 먹었는데, 마침 재료가 떨어진 탓에 밖으로 나가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오기도 했다. 장을 보고 온다고 해 봤자 당장 요리해 먹을 재료들을 사 온 것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저녁 식사한 것들을 뒷정리하고 다이닝 룸에서 빠져나올 때였다. 해영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다인을 발견하고 잠시 멈추어 섰다.
“다인아, 왔어?”
“어?”
현관에 쪼그려 앉아 신발을 벗던 다인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에 앞으로 치우쳐져 있던 기타 가방과 가볍게 머리를 부딪쳤다. 설핏 얼굴을 찡그리는 그녀를 보며 작게 웃음을 흘린 해영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현관으로 가 다인의 기타 가방을 들어 주었다. 고맙다며 인사를 전하는 작은 목소리가 발치에서 들렸다.
신발을 벗은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해영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뗐다. 제 기타 케이스를 돌려주지 않고 앞장서는 모습에 다인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얕은 웃음을 흘리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줘.”
복도를 가로질러 여자 방 앞에 선 다인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힐긋 내려다보던 해영은 들고 있던 가방을 복도 벽에 세워 두었다. 주머니를 뒤적인 그가 곧 다인의 손바닥 위에 작은 종이를 올렸다.
반듯하게 접힌 손톱만 한 종이를 본 그녀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침에 잘 먹었어, 샌드위치.”
해영은 뭐냐는 물음이 돌아오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다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금방 얼굴 위로 떠오르는 쑥스러운 웃음에 해영이 살짝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이따 위에서 봐.”
다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가 걸음을 뗐다. 여자 방으로 들어가는 복도에서 나와, 계단을 오르기 위해 몸을 돌렸던 해영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
때마침 집 안으로 들어서던 선우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잠시 눈을 마주하던 끝에 먼저 시선을 피한 건 해영이었다.
“왔어?”
다행인지 입에서 튀어나오는 인사는 스스럼없었다. 태연한 목소리에 잠깐 말이 없던 선우도 이내 선선히 인사를 건네 왔다.
“응, 왔어.”
귓가에 떨어지는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해영은 계단의 난간을 쥐었다. 평소라면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대화가 어색하게 잘렸다.
그 공백이 낯설어 괜스레 웃어 보일까 했던 해영은 단념하고 말없이 걸음을 뗐다.
2층을 오르는 그의 뒤로 한기 서린 몸이 따라붙었다. 선우가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바깥에서 외투에 묻혀 온 겨울 내음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속에서도 가려지지 않은 익숙한 향기에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해영은 괜스레 손을 들어 빳빳해진 목을 쓸어내렸다. 바짝 뒤쫓는 인기척이 바로 등 뒤에서 느껴졌다.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선 후, 뒤따라 들어온 그가 방문을 닫을 때까지 줄곧.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도 전이었다. 방 안쪽으로 무작정 걸어 들어가던 해영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제부터 계속….”
“…….”
“네가 왜 울었을지 생각했어.”
거부하기도 전에 몸이 돌려진 그가 선우의 시선 아래 놓였다. 혼잣말처럼 꺼내진 목소리는 조용했다. 작은 숨이 섞인 것을 보면 고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줄곧 따라다니던 선우의 의문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해영에게서 종결지어졌다. 그의 입에서 헛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려온 직후였다.
주저하는 해영에게로 속삭임과도 같은 질문이 날아들었다.
“…나 때문이야?”
짧은 머뭇거림 끝에 나온 물음은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정말 몰랐기에 묻는 것은 아니었다.
“말해 봐, 해영아.”
어딘가 억제된 목소리가 어르고 달래듯 나긋하게 그를 불러 왔다. 숨겨지지 못한 긴장감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해영 또한 입술을 물었다.
차선우는 느릿한 손길로 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해영의 턱을 잡았다. 힘을 주지 않고도 그는 쉬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해영은 마주치는 시선 속에 짙은 빛으로 일렁이는 선우의 눈동자를 보았다.
“내가 널 울렸어?”
낮게 떨어진 목소리에 설핏 어깨가 굳었다. 그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해영이 끝내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아니야.”
씹어 내듯 부정했으나 말을 내뱉자마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울었냐고? 그런 걸 제 입으로 그의 앞에서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형이 아빠한테 돈을 준 게 쪽팔려 죽을 거 같고, 나도 모르는 사이 아빠가 형을 찾아갔었다는 사실에 미칠 거 같아. 형을 보기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어.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을 해영은 꾹 삼켰다. 목울대가 위로 치솟았다가 느릿하게 아래로 가라앉았다.
제 밑바닥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걸 차선우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아니야?”
되묻듯 흘러나온 음성에는 안도보단 의심이 깔려 있었다. 그 기묘한 기색에서 어떠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부정에도 그의 긴장감은 하나도 해소되지 않은 채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어딘가 까칠한 목소리는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
잠시만, 알고 있다고?
비스듬히 피하던 눈동자가 곧장 선우를 향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은 여느 때처럼 다정했지만, 숨기지 못한 초조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윤해영은 그 안에서 어렴풋한 확신을 발견했다. 그건 그저 울었던 원인이 제게 있다는 막연한 추측이 아니었다. 뚜렷하게 드러난 불안감은 답을 알기에 두려워하는 것에 가까웠다. 순간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이 내리쳤다.
설마.
“…알고 있었어?”
“…….”
“알고 있었네. 다 알고 있었지?”
하. 입에서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토해졌다. 새하얘진 머릿속을 헤집던 해영이 손을 들어 선우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힘이 실려 있지 않던 그의 손이 쉽게 떨어져 나갔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아래로 낙하하는 손을 내려다보던 해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금 그에게 꽂혔다.
“해영아.”
“형, 잠시만 입 다물어 봐.”
되돌아온 날 선 말에 선우의 입이 닫혔다. 5년간 한 번도 크게 싸워 본 적 없다는 건, 그에게 이런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는 것도 처음이란 소리였다. 익숙하지 않은 비수를 던진 해영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 말고 한숨을 내쉬듯 입을 열었다.
“미안.”
짧은 사과에 선우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힘없이 내저어지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낯이 못내 신경 쓰였으나 거기까지는 도저히 마음을 쓸 겨를이 없었다.
아, 시발.
눈앞이 깜깜해지는데 속은 돌연 부글부글 끓는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배신감? 지금껏 혼자 자책하다 보니 이제 그게 자신이 가져도 될 감정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가 이별의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자신을 도망치게 했는지. 그러니까, 그가 아빠에게 몰래 돈을 줬다는 걸 자신이 알았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는 거지…. 헤어질 때도 알았어?”
“…….”
대답은 없었으나 침묵이 곧 긍정이었다.
차선우는 거짓말로라도 몰랐다고 말하는 대신,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해영이 마른세수를 하던 손을 내리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물기 어린 눈을 보면서 이런 와중에도 멈칫하게 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염치도 없이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는 자신을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형은 내가….”
성급하게 입을 열었던 해영이 헛웃음과 함께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감정적으로 나서고 싶지 않았으나, 불길이 솟듯 울렁거리는 감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잠시 진정하고자 턱을 치켜들어 천장을 바라본 시야에 카메라가 들어왔다. 카메라에 담기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겁해 보일까. 새까만 렌즈를 회피하듯 다시 시선을 내렸으나, 그 자리에는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해영은 느릿하게 눈을 껌벅이며 호흡을 골랐다.
“몰래 우리 아빠한테 돈을 주면서….”
그리고 내뱉어진 목소리가 전보다는 한결 차분했다.
“계속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싫어할 거라는 건 알면서, 들킬 거란 생각은 안 했냐고.”
뒤늦은 원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헤어질 때 물었어야 했던 것을 해영은 이제야 묻고 있었다. 결국, 더는 숨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난 지금에서야.
그때나 지금이나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가능하면 영영 숨기고 싶은 모습이었다. 원한 적 없는 자비를 베풀어 줘 봤자 고맙지 않았다. 고마워하기를 바랐을까. 그래서 자신이 알아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렇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 차선우를 알았고, 차선우 또한 자신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믿고 싶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기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했어.”
“…했어? 지금 했다고 말했어?”
희고 단정한 낯으로, 그는 덤덤히 대답했다. 거짓 한 점 말하지 않을 것 같은 진실한 모습은 죄를 고백하는 수도사 같았다. 한편으로는 시선을 내리깐 얼굴이 지나치게 태연하게도 보였다.
선우를 올려다보는 해영의 눈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쥔 주먹이 안으로 꽉 말려들었다.
“무슨….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의 끝이 떨리고 있었다.
선우는 그런 해영을 가만히 눈에 담았고, 해영은 그의 눈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또한 자신의 눈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했을까. 곧 검은 눈에 차오르는 물기에 해영은 숨을 멈췄다.
목이 졸린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주제에, 마치 정해진 각본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는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알게 돼도 네가 날 선택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알고 있는 언어인데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해영은 잔뜩 찌푸린 미간으로 그를 주시했다.
알게 되어도 네가 날 선택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제게 선택지가 있었다면 그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의미하는 바가 부정확한 말을 해석하던 해영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네가 날 선택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아니라 나를.
“때려도 돼, 해영아.”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허공을 배회하던 해영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시야에 들어온 차선우는 자신의 주먹 쥔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에 오히려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쉬이 인정하는 동시에, 제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미련 없어 보이는 태도가 열 받았다. 그 비참한 순간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던 그의 말에 언뜻 서러워졌다.
“때려?”
해영이 짓씹듯 잇새로 물었다. 선우의 앞에서 처음 보이는 얼굴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기가 찬 것 같기도 하던 얼굴에 이윽고 실소가 들어찼다.
“내가 형을?”
되묻는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안으로 말려 있던 주먹에서 힘이 풀렸다. 해영은 그대로 팔을 들어 올려 열 오른 목덜미를 감쌌다. 그가 고개를 기울인 채 선우를 신경질적으로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무리 화가 나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건 있었다. 사랑하는 상대여서가 아니라, 제 분을 못 이겨 폭력을 사용하는 일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 한숨 같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와 만나는 내내 싸울 일이 없었으므로 한 번도 그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 본 적도 없었다. 화가 나도 얼굴만 보면 풀리곤 해서 홧김에 손을 들 일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이가 없었다.
고작 주먹을 쥐고 있는 것만 보고 때리라는 말이 이렇게 쉽게 나와?
“해영아….”
달싹이던 입에서 간절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무슨 말을 내뱉는지 보겠다는 듯 해영이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 보았다.
그때 똑똑, 하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을 끊어 버리는 소리에 선우는 해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다물었고, 해영은 그의 어깨 너머 문가로 눈길을 돌렸다.
“어? 혹시 둘이 중요한 얘기 중이야?”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사람은 소윤이었다. 그녀는 묘한 분위기로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잠시 당황한 얼굴로 기웃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무슨 일이야?”
해영이 설핏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소윤은 금방 의아한 기색을 떨쳐 낸 채 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 편지 다 같이 뜯어보기로 했잖아. 재휘 오빠도 방금 돌아와서, 이제 슬슬 모일까 하고.”
“아, 그거.”
그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선우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해영이 그녀를 향해 다시금 웃어 보였다.
“알았어. 바로 나갈게, 소윤아.”
가벼운 대답에 소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닫힌 문가를 잠시 바라보던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들어온 그녀가 침묵을 깨기 전부터 그러했듯, 차선우는 여전히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면서도 동시에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거칠게 털어 낸 해영은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택했다.
“…일단 나가자.”
해영이 문가를 턱짓하며 말했다. 그대로 선우의 어깨를 간단히 밀어 낸 그가 문을 향해 걸어가다 우뚝 멈춰 섰다.
하, 씨….
굳게 다물려져 있던 입술 사이로 거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선 채로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해영이 이내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선우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손을 들어 젖은 눈가를 쓸었다. 손끝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 나오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우의 속눈썹에 걸려 있던 눈물을 완전히 닦아 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몸을 돌려 문가로 향했다. 문고리를 쥐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연 해영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