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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요란스러웠던 주말은 빠르게 지나갔다. 평소라면 주말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했겠지만, 해영은 지금 주말 같은 평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방 안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아 재휘에게 추천받은 책을 펼쳤다.
한창 책장을 넘기던 때,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조심스럽게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가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오빠, 오늘 뭐 해?”
소윤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해영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 아무것도 안 해. 너는?”
“나도 일정 없어. 와 그럼 우리 집에 있는 사람들끼리 나가자!”
해영의 한가로운 말에 소윤의 얼굴에 금방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나가자는 말을 꺼내는 그녀를 보며 해영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한 해가 지나가도 사노비인 직장인들은 여전히 출근을 해야 했다. 반면에 인턴 실습이 끝나고, 오랜만에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는 방학을 보내며 해영은 완전히 백수가 됐다. 물론, 혹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 면접을 대비해 간간이 자소서와 이력서를 뒤적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직장인들이 빠져나간 집은 한적했고, 간만에 민호 또한 스케줄이 있다며 오전 일찍 나간 후였다. 남자 출연자는 해영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와중 소윤 또한 쉬는 날인지 집에만 있기 심심하다며 외출을 제안해 온 것이다.
“어디 가려고?”
“세희 언니가 이 앞에 사격 카페 있다고 해서, 거기 갈까 생각 중이었어.”
“세희 누나도 있어?”
당연히 출근했을 거라 생각한 이의 언급에 해영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희의 이름에 반응하는 그를 보며 소윤이 설핏 능글맞은 얼굴을 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나 정정할 틈은 없었다.
“응. 언니 회사 오늘 휴가래.”
“…그럼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누나 요즘 바빠 보이던데.”
해영이 연초부터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세희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의 주변에도 쉬는 날에 외출 약속을 잡으면 괴로워하던 좀비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자 소윤의 뒤에서 얼굴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문틈으로 내밀린 세희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해영이 입을 닫았다.
“아냐, 쉬는 김에 다녀오는 거지. 나 지금 총 쏘고 싶어.”
“그렇대.”
쾌활하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총으로 쏴 버리고 싶은 사람이 많아 보이는 말투였다. 세희의 말을 이어 소윤이 키득거리며 해영을 바라보았다.
“갈 거지?”
상대의 거절을 고려하지 않은 물음에 해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소윤이 신이 나 얼굴에 활짝 미소를 걸었다.
“그럼 셋이 가는 건가?”
해영이 담담하게 묻자 소윤이 고개를 내저었다.
“선우 오빠 퇴근했던데? 오빠한테도 같이 가자고 했어.”
“형 퇴근했어?”
“응. 선우 오빠 대체 어느 회사 다녀? 거기 유연 근무제야? 복지가 좋아 보여.”
“…글쎄.”
소윤의 말을 듣고 화들짝 고개를 들었던 해영은 이어진 물음에 어색한 미소를 걸었다. 그녀는 곧 선우가 회사원이 아닌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혹시 아는 것 없냐며 호기심 어린 눈을 하는 소윤의 시선을 피한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따지고 보면, 차선우는 회사원이 맞긴 했다.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어서 그렇지…. 그걸 입 밖에 꺼낼 수 없던 해영은 자리를 옮기는 것을 택했다. 옷만 갈아입고 나가겠다는 그의 말에 소윤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세희가 그럼 우리도 나갈 준비를 할 테니 30분 뒤에 만나자고 제안했다. 해영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소윤이 신나서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겉옷까지 챙겨 입은 해영이 계단을 내려왔다. 1층에 도착한 그는 복도를 가로질러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아직 세희와 소윤은 준비가 끝나지 않은 건지 여자 출연자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형?”
어디선가 커피 향이 풍겨 온다 싶더니, 다이닝 룸 안에 선우가 있었다. 겉옷만 벗은 채 커피 머신 앞에 서 있던 그가 안으로 들어서는 해영을 발견하곤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혹시 잘린 거 아니지?”
해영의 장난스러운 인사에 선우가 홈바를 짚고 있던 상체를 숙이며 숨죽여 웃었다. 제가 뭐 그리 웃긴 얘기를 했다고…. 즐거워하는 선우를 보며 해영은 잠시 제가 꺼낸 말이 그렇게까지 재밌었나 되짚어 봤다.
확실히, 회장 아들한테 회사에서 잘렸냐는 물음을 건네는 건 어이가 없다 못해 도리어 웃길 법도 했다.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젓던 선우가 해영에게 머그잔을 내밀었다.
“해영아, 커피.”
“아. 고마워.”
해영은 그가 기다렸다는 듯 건네는 머그잔을 받아 들며 인사했다. 방금 막 내려서인지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댄 채 식히던 해영이 간신히 한 모금을 삼켰다. 목으로 넘어가는 따뜻한 커피는 익히 알던 맛이었다.
익숙한 향과 익숙한 맛에 쉬이 풀어진 몸으로 커피를 홀짝이던 그는 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머그잔을 들고는 저를 마냥 쳐다보기만 하는 그를 보며 해영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맛있다.”
눈을 접으며 웃는 해영을 본 선우도 그제야 머그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해영은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며 선우를 훑어 내렸다. 시선을 내린 채 커피를 마시는 그는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를 보자 스멀스멀 어젯밤의 창백하던 낯이 떠올랐다.
‘별로 안 기다렸어.’
뻔뻔스레 거짓말을 하며 소리 없이 웃던 차선우.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유독 희게만 보였다.
그를 걱정스럽게 주시하는 사이 다이닝 룸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세희와 소윤이 준비를 끝마치고 나온 모양이었다. 곧 다이닝 룸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소윤이 나가자며 그들을 불러 왔다.
“나갑시다!”
활기찬 목소리를 들으며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사리 떨쳐 내지 못한 마음이 무거워 힐긋 선우를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그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한결같이 다정한 시선에 해영은 어쩐지 목이 메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결국 그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
네 사람이 찾아온 곳은 근처에 있는 사격 카페였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널찍한 사격 카페 안은 제법 한적했다.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는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사격장으로 안내받았다.
직원의 설명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네 사람은 각자 사격 라인 앞에 섰다. 제 앞에 놓인 소총을 만지작거리는 해영을 보며 세희가 웃으며 물어 왔다.
“해영이 잘해?”
떠보는 듯한 말에 멈칫한 해영은 잠시 고민하는 듯 뜸을 들였다. 즉각 나오지 않는 대답에 세희의 옆에 서 있던 소윤이 짓궂게 웃으며 장난을 걸었다.
“오, 자신 없나 본데.”
제게 호기로운 시선을 던져 오는 둘을 바라보며 해영이 헛웃음을 뱉었다. 뻔한 도발이었으나, 순순히 걸려 줄 수 있었다.
“이 정도 거리는 눈 감고도 맞혀.”
해영이 설핏 웃으며 턱짓하자 세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뒤늦게 눈을 찡그리듯 웃으며 농담이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엎질러진 물이었다.
세희와 소윤은 더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호승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영이 낭패 어린 얼굴로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 내기하자.”
해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세희가 내기를 하자는 제안을 걸어 왔다. 그녀의 말에 소윤 또한 눈을 빛냈다.
“내기 좋아! 팀 나눠서 하는 거 어때?”
“그럼 내가 소윤이랑 해야지~.”
순식간에 팀이 나눠지는 것을 보며 해영이 눈썹 위를 긁적였다. 아무리 그래도 카메라가 찍고 있을 텐데 이런 성비로 팀을 구성해도 괜찮은 건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뭐, 저야 오히려 좋았다. 세희가 저를 보며 눈을 찡긋거리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하여간, 내기를 하기로 한 것부터 팀을 나누는 것까지 무척 비민주적이고 원만한 합의에 따라 신속히 진행되었다. 이기는 팀이 밥을 사는 것으로 내기의 보상인지 벌인지 모를 상품까지 빠르게 결정되었다.
유독 평소보다 조용하던 선우가 제 옆으로 다가온 해영을 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해영아, 잘할 수 있겠어?”
“…형, 나 군대 있을 때 사격으로 포상 휴가 받은 거 기억 안 나?”
조곤조곤 흘러나온 선우의 물음은 그 어떤 도발보다 효과가 뛰어났다. 기가 찬 듯한 얼굴을 하던 해영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선우를 향해 눈짓했다.
총이라면 질릴 정도로 쐈다. 소총은 특히나 익숙했다.
누군가 의경이 그나마 할 만하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하필이면 기동대에 배치된 탓에 사격 훈련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사격 성적에 따라 포상 휴가를 준다길래 이 악물고 총질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했다.
그때 그 보상이었던 선우를 올려다보던 해영이 괜스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를 다시 만난 후로 종종 들고는 했던 감정이 다시금 속을 쓰리게 만들었다. 해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던 선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너만 믿을게.”
조용한 웃음이 서린 목소리가 간질간질하게 해영에게 내려앉았다.
저를 믿는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의심을 해야 했던 걸까. 사격 라인 앞에 서서 어설픈 자세로 총을 만지작거리는 선우를 보자, 해영은 애써 덮어 두었던 불안감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드는 것을 느꼈다.
“해영아, 자세 어떻게 잡아?”
“…….”
이윽고 선우가 던진 질문에 윤해영은 입을 달싹이다 끝내 그냥 다물고 말았다.
방금 설명해 주셨잖아. 뭘 들은 거야? 목 끝까지 차오른 의문을 꾹 눌러 삼킨 해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는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문득 망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형 군필 맞아?”
해영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고 있던 선우는 그대로 굳었고, 바로 옆 사격 라인에 서 있던 세희 쪽에서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윤해영은 몸을 돌려 세희를 보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누나, 지금 팀 못 바꿔요?”
“…못 바꿔.”
“못 바꾸신대.”
해영이 물은 상대는 세희였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선우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동시에 어깨 부근에서 일순 묵직함이 느껴졌다. 툭 어깨 위로 떨어진 머리가 투정을 부리듯 미약하게 비비적거렸다. 장난이었는데 서운했나? 손을 올린 해영이 목덜미 근처를 간질이는 머리칼을 쓰다듬듯 헤집다 몸을 돌리며 선우를 밀어 냈다.
“장난이야.”
웃으며 달래듯 말을 꺼낸 해영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으니 편하게 쏴 보라는 제스처였다. 그런 해영을 잠시 지긋이 바라보던 선우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며 총 앞에 섰다.
이윽고 그가 손을 뻗어 총의 그립을 쥐었다. 총을 잡는 사격 자세가 영 허술했다.
“형 혹시….”
기억 상실증 걸린 거 아니지? 묻고 싶은 말이 입 안 가득 차올랐으나, 해영은 꾹 삼키며 그저 묵묵히 선우를 지켜보았다.
총을 쥐고 자세를 잡느라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이 흰 이마 위를 덮었다.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긴 속눈썹이 깨끗한 피부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청순한 인상의 얼굴로 총대를 쥐고 있는 모습이 이질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해영의 입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해영아, 얼굴 뚫어지겠어.”
그 말에 움찔한 해영이 짐짓 입가에 삐딱한 미소를 걸쳤다.
“얼른 쏘기나 해.”
“네에.”
길게 늘어지는 대답에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총소리가 연쇄적으로 들려왔다. 고민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에 해영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차선우는 일말의 기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껴갔다.
해영이 그가 쏜 과녁판을 손에 쥔 채 눈을 깜박였다. 설렁설렁 쏠 때부터 설마 하긴 했지만, 완벽하게 정중앙을 비껴 나간 구멍들을 바라보며 해영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선우가 쏜 과녁을 옆에서 함께 구경하던 세희가 경쾌한 콧소리를 흘렸다.
잠시 말을 잃은 해영을 향해 선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잘했어?”
슬쩍 시선을 올려 저를 바라보는 선우와 눈을 마주한 해영이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잘했어. 전부 중앙이랑 가깝네.”
그래, 이 정도면 잘했지. 과녁 밖으로 나간 것도 아니고 다 과녁 안을 맞혔는데. 해영이 당연하다는 듯 선우를 감싸며 제 사격 라인 앞에 섰다.
제 차례를 기다리며 총의 개머리판 윗부분을 만지작거리던 해영은 자연스럽게 다시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사격 결과야 그렇다 치고, 집에서 그를 봤을 때부터 내내 왜인지 모를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제 착각일 뿐이라기에 그는 눈에 띄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글거리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쁜 것 같진 않은데…. 선우를 주시하는 해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 할게!”
선우에게서 의심스러운 시선을 떼지 못하던 해영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윤이 총을 쥐고 사격 자세를 잡고 있었다.
초반에는 더러 움찔하며 입 밖으로 저도 모르게 아쉬운 감탄사를 흘리던 소윤은 곧 적응했는지 시원스레 과녁의 중앙을 노렸다. 준비된 총알을 모두 쏘고 난 뒤 확인한 결과도 좋았다. 처음 과녁의 가장자리를 맞힌 몇 발을 제외하면 구멍은 모두 중앙에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다.
“해영 오빠, 이제 오빠 차례.”
제가 쏜 것을 보며 내심 뿌듯해하던 소윤이 비시시 웃으며 해영을 돌아보았다.
제게 꽂히는 모두의 시선을 느끼며 해영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소윤과 선우가 가져온 점수는 엇비슷했으므로, 내기의 승패는 자신과 세희의 결과로 판가름이 날 것이다. 장난스레 허세를 부렸던 업보가 퍽 무겁게 돌아왔다.
꼭 이겨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충 하고 싶진 않았다. 거슬리는 게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총의 그립을 쥐는 동안 옆에서 보내온 시선이 퍽 노골적이었다는 것이다.
“형, 나야말로 얼굴 뚫어지겠어.”
헛웃음을 흘린 윤해영은 곧바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전역 이후 오랜만에 쥐는 총이었으나 손에 감기는 감촉이 본능처럼 익숙하게 느껴져서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속으로 침음을 삼킨 해영이 과녁의 정중앙만을 노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손에 힘을 줄 때마다 고막을 울리는 총성과 함께 상체 전체에 묵직한 반동이 전해졌다.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다 보니 어쩐지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쏘고 난 그가 이전보다 시원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요.”
“그렇지? 나 스트레스 풀고 싶을 때 사격장 자주 와.”
이어진 세희의 말에 멈칫한 해영이 순간적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격장을 자주 온다는 말이 걸렸다. 안 그래도 잘할 것 같긴 했는데, 경험까지 많다면 실력이 좋을 것은 뻔했으니까. 해영이 세희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방금 쏜 과녁판이 그의 손안으로 돌아왔다.
송송 뚫려 있는 구멍이 과녁의 중앙에 모여 있는 깔끔한 과녁판이었다. 해영의 옆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소윤이 감탄하며 웃는 낯으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듯 손바닥을 내미는 그녀를 보며 해영도 웃으며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형.”
이어 그는 선우의 눈앞에 소윤이 그랬던 것처럼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 손과 해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선우가 설핏 눈을 휘었다.
해영의 손에 선뜻 제 손을 맞춘 선우는 그가 다시 팔을 거두기 전에 손가락을 굽혔다. 손 틈 사이로 빈틈없이 파고드는 손가락에 해영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손을 빼내 보려고 했지만, 얼마나 단단히 깍지를 낀 건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을 놓으라며 눈빛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지만, 차선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떡하려고 틈만 나면….’
전에는 그래도 둘만 있을 때였지, 지금은 다른 사람들도 있는 데다가 어디선가 촬영도 하고 있을 것이다. 해영이 서둘러 제 등 뒤로 맞잡은 손을 내리며 몸을 돌렸다.
눈을 돌리니 멀찍이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스태프가 보였다. 렌즈의 방향을 확인한 해영이 비스듬히 몸을 돌려 서며 깍지 낀 손을 보이지 않게 숨겼다. 그는 곧 등 뒤로 슬쩍 팔을 흔들었다.
놓으라는 신호였으나, 어깨 너머에서는 숨죽인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오, 좀 하는데.”
그때, 해영의 과녁을 들여다보던 세희가 씩 웃으며 칭찬 비슷한 것을 건네 왔다. 해영도 그녀를 보며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렸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제게서 시선을 뗀 세희가 이윽고 사격 자세를 잡은 후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쏘기 전 몇 가지를 체크해 보려는 듯 뜸 들이는 세희를 내려다보면서도 해영은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소윤도 세희가 쏘려는 것을 집중해서 지켜보고 있었고, 카메라에 맞잡은 손이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괜히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이 아니라 불씨라도 쥔 듯 선우와 맞잡은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그건 분명하고 실체적인 온기였다.
‘미치겠네….’
해영이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앞머리를 털어 내는 척 얼굴을 가렸다. 순간 자신이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뒤에 선 이가 지나치게 태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의식할 만한 상황이 맞았다.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에 제 발 저린 게 아니라, 저지른 행동을 들킬까 조마조마한 거였으니까.
헤어진 사이에 손을 잡고 있는 게 적절한 행동일 리 없다. 문제는 머리로 이미 알고 있는데도 선우의 손을 힘줘서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었다. 문득 밀려오는 자괴감에 해영이 슬쩍 등 뒤를 노려보았다.
‘왜?’
시야에 들어온 입술이 달싹거렸다. 선우의 여유로운 물음에 울컥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들려온 작은 환호에 해영은 다시 앞을 바라보아야 했다. 어느새 차례가 끝난 건지 세희가 과녁판을 받아 들고 있었고, 그 옆에 선 소윤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감탄을 흘리고 있었다.
해영도 세희에게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며 상체를 기울였다. 그는 시야에 들어온 과녁판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탄식을 뱉었다.
“와, 누나 왜 이렇게 잘해요?”
“멋지지. 반하겠지.”
“진짜로요….”
이 누나 혹시 전직 사격 챔피언인가?
혹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국가 대표였냐고 물으려던 해영이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손에 힘이 실린 타이밍이 절묘했기 때문이다.
흘깃 제 어깨 뒤로 시선을 주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선우가 보였다. 입가에 걸린 흐릿한 미소에 해영이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또 왜 심사가 꼬였어?
애매한 의구심에 해영이 슬쩍 미간을 모으며 손가락으로 선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내 손바닥을 펴 달래듯 어깨를 문지르니 선우가 꽉 쥔 채 놓지 않고 있던 손에서 차츰 힘을 풀었다. 스르륵 떨어지면서도 미련이 남은 듯 제 손끝을 쥐고 만지작거리던 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해영은 안도감과 동시에 왜인지 모를 허전함에 빈손을 꽉 그러쥐었다.
“와, 언니 너무 멋져!”
소윤이 세희의 팔을 붙들고 연신 발꿈치를 들었다. 들뜬 목소리와 오르락내리락하며 팔랑이는 머리칼이 그녀의 신난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굳이 계산해 보지 않아도 누가 내기의 승자인지는 명백했다.
“졌어요.”
해영이 입가에 허탈한 웃음을 걸치며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
승패가 어떻게 나든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기고 지는 걸 가리기 위해 시작했던 내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승리한 팀이 밥을 사는 조건까지 걸었다. 후련할 정도로 총을 쏴서인지 유독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밥 먹으러 가자며 앞장서는 세희를 따라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고른 식당은 분위기도 괜찮았고, 인테리어나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식기구들도 깨끗하고 아기자기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네 사람은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화제는 집에서 있었던 사소한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었다. 음식을 먹던 도중 소윤이 돌연 다른 주제를 꺼내기 전까지는.
‘이제 마지막 데이트만 남았잖아.’
음식을 먹다 말고 와인으로 입을 헹군 소윤이 잠시 뜸을 들이다 평소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특유의 발랄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테이블 위에 화두를 던지는 태도는 평소처럼 가볍지만은 않았다.
방금까지 쾌활하게 웃던 것과는 다른 조심스러운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소윤에게로 꽂혔다. 그녀는 오직 선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기를 망설이듯 달싹이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선우 오빠는… 처음부터 마지막 데이트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었고. 그 생각 아직도 변함없어?’
소윤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차린 해영은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선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게로 향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 찰나에 윤해영은 아주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한 감각이었다. 들고 있던 물 잔을 놓칠 뻔해 간신히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해영을 주시하던 시선은 이내 소리 없이 떨어져 나갔다. 선우는 소윤을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고갯짓과 함께 그가 입을 열었다.
‘응, 변함없어.’
담담하게 흘러나온 그의 말에 소윤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렇구나.’
곡선을 그리던 입매가 일순 흔들렸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평소처럼 마냥 유쾌하기보단 오히려 씁쓸한 느낌을 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간신히 덤덤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해영이 비슷한 처지의 세희를 발견했다. 제게서 동병상련이라도 느꼈는지 어떡하냐는 듯 눈을 깜박이는 그녀에게 해영이 어색한 웃음을 비쳐 보였다.
그 뒤로 이어진 식사 분위기는 해영과 세희가 나서서 심폐 소생을 한 덕에 조금씩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렇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나오던 참이었다.
“맛있었지, 소윤아.”
가게를 가장 먼저 빠져나온 세희가 소윤이의 팔에 제 팔을 끼워 넣으며 물었다. 그에 소윤이 평소와 같은 밝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오랜만에 많이 먹었어.”
앞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목소리나 가볍게 끄덕여지는 고개는 그녀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히려 식사하기 전보다 한결 더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심 안도한 해영의 시선이 다시 선우를 향했다. 희게 내뱉어진 입김 사이로 드러난 눈가가 발갰다.
“…이상한데.”
해영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흘렸다. 평소보다 상기된 그의 얼굴이 그렇지 않아도 식사 내내 마음에 걸렸다. 선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매가 무의식중에 길게 늘어졌다.
아무리 봐도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왜?”
해영을 따라 나오던 그가 제게 향한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돌렸다. 제법 집요한 시선에 선우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형, 아까 와인 한 잔밖에 안 마시지 않았어?”
해영은 대답 대신 선우를 보며 되물었다. 제게 돌아온 질문에 멈칫한 그가 손을 들었다. 대꾸 없이 손등을 제 뺨에 대 보는 선우의 몸짓에 해영의 눈매는 더더욱 가늘어졌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는 입가심용으로 와인 한 모금 정도 마신 것이 다였다. 애초에 차선우는 그다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술을 몇 모금 마신다고 해서 곧장 얼굴이 달아오르는 유형은 더더욱 아니었다.
의문점이 늘어 갈수록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모른 척하고 싶은 가정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들었다.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해영이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형, 잠시만.”
뻗은 손바닥이 선우의 이마에 닿았다. 제 이마에 닿는 손길과 이마에 올린 손끝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온기에 두 사람은 동시에 굳고 말았다.
더 침착하지 못한 쪽은 단연 해영이었다. 한겨울인데도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도저히 평범한 수준이라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 위에서부터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해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열나잖아.”
“그래? 몰랐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간신히 꺼낸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선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으나, 해영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바보도 아니고, 선우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열이 이 정도로 올랐으면 진작 컨디션이 안 좋다는 걸 본인도 느꼈을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지? 사격장에서도 영 집중을 못 했던 것 같은데. 어쩐지 손이 평소보다 따뜻하더라니….
입술을 짓씹던 해영은 문득 오늘 낮,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컨디션이 그닥 좋지 않아 보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무슨 일이야?”
따라오지 않고 가게 앞에 멈춰 선 해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앞서 있던 세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선우 형이… 몸이 좀, 안 좋은 거 같아서.”
“어? 선우 씨, 어디 아파요?”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선우의 대답을 들은 해영이 애써 입에 걸고 있던 미소도 지운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울컥 치미는 마음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제 불안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것만은 알았다. 소윤이나 세희도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고, 촬영하는 카메라는 아직도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었으니까.
윤해영은 손을 들어 한 번 얼굴을 쓸어내린 뒤 침착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희의 눈에 걱정이 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와 눈을 마주하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해영이 세희를 다독이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죄송한데, 스태프분들한테 양해를 좀 구하고 병원에 다녀와야 할 거 같아요.”
“응응, 알았어. 뭐가 죄송해. 조심히 다녀와.”
세희가 괜찮다는 손을 내저었고, 그녀의 옆에 선 소윤도 걱정스럽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였는지 그들을 기웃거리는 카메라맨을 발견한 해영이 서둘러 그에게로 다가갔다.
사정을 말하니 촬영 중이라 직접 이동하는 것은 어렵지만, 택시를 불러 주겠다며 나섰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던 해영이 설핏 배어 나오는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바로 핸드폰을 들어 택시를 부르는 스태프를 뒤로한 채 해영이 선우에게로 되돌아왔다.
“병원 가자.”
“해영아, 정말 그 정도는 아니야.”
“…형이 뭘 알아.”
그에게 투덜거릴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오히려 저를 달래려는 선우를 보니 불합리한 서러움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린 채 애써 감정을 갈무리하던 해영이 결국 중얼거리듯 선우의 옷깃을 잡아 왔다.
“형이 의사야?”
조심스러운 몸짓과는 다르게 속상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차선우는 결국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갈게, 해영아. 병원 가자.”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해영의 귓가에 떨어졌다. 그가 병원에 가겠다고 하고 나서야 시선을 든 해영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태프가 부른 택시는 오래 걸리지 않고 도착했다. 자신들이 가는 모습을 배웅하려는 듯 먼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기다려 준 세희와 소윤이 고마워 해영은 복잡한 얼굴로 인사를 전했다.
달고 있던 마이크를 반납한 뒤 해영은 선우와 함께 택시 뒷좌석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근처 대학 병원이었다. 부드럽게 출발한 차체 안에서 선우는 피곤한 듯 눈 위를 손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몸이 안 좋은데 왜 말을 안 했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결국 책임은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원체 몸을 챙기지 않아도 건강한 선우가 아플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어젯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그가 떠오른 해영이 입술을 짓씹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애초에 형이 일찍 퇴근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왔고, 그 자리에는 결국 자신의 책임이라는 결론만이 나와 있었다.
선우가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아픈 모습을 본 기억이 없어서,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계속 함께 어울려 줬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윤해영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창문에 비치는 풍경들은 눈에 담기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갈 뿐이었다. 그런 그가 고개를 돌린 것은 제 어깨 위에 선우의 머리가 툭 떨어지고 난 후였다.
그는 말없이 손을 뻗어 선우가 조금 더 편히 기댈 수 있도록 그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꽉 쥐고 있던 품 안의 옷도 조심스럽게 펴 선우의 몸 위로 덮어 두었다. 더 불편해 보이는 곳은 없나 눈을 굴리던 해영이 이내 선우를 따라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에 빠져들지는 못했다. 아마 의사에게서 선우가 괜찮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쉬이 잠들 수 없으리라. 해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난 후였으므로 두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응급실밖에 없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 진찰을 받은 결과 단순한 감기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올겨울 독감이 유행이라며 몇 가지 검사를 했던 것치고 병명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해영은 완전히 안도하진 못해도, 참아 왔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가 응급실 침대에 기대듯 누워 수액을 맞고 있는 선우를 보며 말했다.
“아, 진짜 차선우. 그냥 집에서 쉬지….”
그를 탓할 게 아님을 알면서도 괜스레 말이 투덜거리듯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들은 선우가 하하, 나직한 소리로 웃었다.
“너만 보내라고? 해영아…, 그냥 죽으라고 해.”
이윽고 돌아온 대답에 윤해영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뭐라는 거야, 이게 죽을 일인가. 조금 슬플 수는 있겠지. 조금 슬프기는 해도 살 수는 있을 것이다.
“대체 뭔 소리야?”
해영이 어딘가 풀어진 얼굴로 농담 한번 살벌하다며 헛웃음을 흘렸다. 선우는 그 말을 정정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 침대 옆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앉아 있는 거 힘들지 않아? 그냥 침대에 올라와서 누워.”
“수작 부리지 마.”
한꺼번에 긴장이 풀려 다소 멍한 얼굴을 하던 해영은 들려온 말에 얼굴을 굳혔다. 헛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을 들으며 선우는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형은 아픈데 웃음이 나와?”
“응…. 아프니까 네가 계속 옆에 있어 줘서 좋은데.”
눈을 접으며 웃는 선우는 정말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팔뚝에 거대한 바늘을 꽂고 있는 주제에 저를 보며 그저 좋아 죽겠단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기가 찼다.
해영은 대체 몇 살이냐 삐딱하게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픈 사람한테 성질을 부릴 만큼 여유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저를 아는지 마는지 선우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매일 아파도 좋을 것 같아….”
그의 입에서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달짝지근했다. 열이 오른 것처럼 귓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쥔 해영이 마음을 가다듬고자 깊게 심호흡을 했다.
존나 어이없지만, 아픈 사람을 때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잠이나 자. 눈 감아.”
수액을 천천히 넣는다고 했으니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택시 안에서도 꾸벅꾸벅 졸던 것을 보면 선우 또한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여 왔던 것이 분명했다. 여러모로 그를 재우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해영이 입을 다문 채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해영아.”
“…….”
정작 그는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차선우는 눈을 감기는커녕 살살 눈웃음까지 쳐 가며 저를 불러 왔다. 꼭 몸이 안 좋으면 평소보다 더 투정을 부려 오는 어린아이 같았다. 빨리 그를 재우고 싶은 해영만이 더더욱 심란해졌다.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가 더 창백해지니 애틋할 정도로 안쓰러웠다. 해영의 얼굴에 다시금 씁쓸한 기색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해영아.”
“왜, 선우야.”
“나 두고 어디 가면 안 돼….”
“아픈 사람을 두고 내가 어딜 가. 안 가.”
대체 환자를 두고 제가 어딜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계속 말을 걸어오는 선우의 얼굴에는 언뜻 초조함까지 엿보였다. 그가 아픈 건 별수 없이 속상했으나, 드물게 애처럼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기도 했다.
픽 실없는 웃음을 흘린 해영이 그를 달래기 위해 침대의 프레임을 붙잡았을 때였다.
“떠나면 안 돼. 나 다시 눈 떴을 때도 내 옆에 있어야 해.”
“…….”
“빨리 약속해 줘, 윤해영.”
사근사근한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다정했으나, 저를 채근하는 어조에서는 평소의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던 해영으로서는 그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 아래 가려져 있던 깊은 불안의 민낯이 드러났다. 생전 처음 보는 그의 면면이 낯설어 해영은 순간적으로 프레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프레임을 그러쥔 손이 희게 질려 갔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집에도 같이 돌아가야 하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웃어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지금의 상황만을 두고 묻는 거였다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눈치챈 이상 해영은 그저 모르는 척 능청스레 넘길 수만은 없었다.
“…자기나 해.”
입술을 여는 것조차 무겁게만 느껴졌다. 해영이 애써 웃으며 프레임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는 선우의 눈 위를 손으로 덮으며 자라는 듯 부드럽게 토닥였다.
할 말이 남은 듯 입가에 애매한 곡선을 그리고 있던 선우 또한 결국 한 손을 들었다. 눈을 가린 손 위로 제 손을 겹친 선우가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손을 떼기라도 하면 바로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킬 만한 자세였다.
이윽고 손을 간질이는 감각으로 그의 눈이 감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해영의 입에 걸려 있던 흐릿한 미소가 쉬이 무너졌다.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나, 선우의 집에서 제 짐들을 챙기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제 것이 아닌 게 더 많아 책과 옷가지 몇 개만 챙기다 보니 가방 두 개로도 충분했다. 손에 든 짐은 무겁지 않았지만, 집을 나서는 걸음이 무거워 한참을 문 앞에서 멈춰 서 있던 시간.
그 시간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후 어느덧 두 번의 계절이 지났다.
윤해영은 집으로 돌아온 차선우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떠올릴 수 없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자신이 빠진 늪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정작 제가 선우에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빼앗았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해영아.’
무작정 자신을 잡던 손길이 다시금 떠오른 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그로부터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얻었듯, 저 또한 그에게 동등한 트라우마를 남겼음을 해영은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해영이 제 손을 쥔 채 누워 있는 선우를 향해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형, 미안해.”
응급실은 마냥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 이상 주변의 소음에 휘말려 놓칠 수도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코끝에 감도는 병원 냄새에 집중하다 보면 제대로 듣지 못할 만큼.
그 작은 사과에 상대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일으켰다. 한순간도 그에게서 신경을 거둔 적 없다는 듯 조금의 머뭇거림마저 없었다. 해영은 제 팔이 침대로 끌어당겨지는 힘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침대 쪽으로 기운 해영의 상체가 곧 단단한 품과 맞닿았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킨 선우는 곧바로 굳어 있는 해영을 끌어안았다. 그건 안는다기보단 매달린다는 것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왜 그래….”
낮은 목소리의 끝이 갈라지듯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몸이 해영의 쪽으로 쏠린 탓에 주삿바늘이 연결된 링거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해영이 놀란 눈으로 급히 선우의 어깨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공중에 매달린 유리병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링거에 파동이 생겨 있었다.
흔들리고는 있지만, 멀쩡해 보이는 링거대를 확인한 해영이 침대를 짚은 선우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주삿바늘이 꽂힌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할 것 같아 그는 급하게 팔을 뻗어 선우의 손 아래 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나 정말 안 아파, 해영아. 너 잘못한 거 없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응?”
딱딱할 정도로 굳은 몸과 다르게 목소리는 조심스러웠고, 간절했다.
“나한테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마. 네가 미안할 거 없어. 정말… 하나도 없어.”
이어지는 말들에 당황한 듯 벌어져 있던 해영의 입도 차츰 다물렸다.
지금 이 순간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윤해영은 그저 이 순간을 빌려 내내 하고 싶었던 사과를 건넸고, 차선우는 그런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진 해영이 입을 꾹 다문 채 망설이던 손을 들었다.
저를 끌어안고 있는 선우의 뒤로 올라간 손은 그의 등을 쓸어내리듯 토닥였다. 한동안 이어진 다정한 몸짓에 몸에 실려 있던 긴장이 조금씩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누워.”
해영은 그런 선우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그 누구도 먼저 눈을 감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으면 좋겠는데, 차선우는 도통 제게서 시선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를 내려다보던 해영이 결국 몸을 숙여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소리 없이 그 위로 올라온 손이 느릿하게 해영의 머리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아픈 와중에도 내색 없이 자신만 바라봤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리고….
“하….”
윤해영은 그의 올곧은 마음을 차갑게 내쳤던 자신이 싫어졌다. 욕심을 내고 싶었다.
***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으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다이닝 룸에 있었던 건지 허겁지겁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해영의 시야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형, 아침에 출근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반긴 것은 소윤과 민호였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며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던 해영이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두웠던 화면이 밝은 빛을 내며 켜졌다. 화면에 떠오른 시간은 새벽 한 시를 넘겨 있었다.
…안 자고 기다린 건가? 해영이 의아해하던 찰나,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도 괜찮고, 회사도 병가 내면 되니까 괜찮아.”
지금까지 기다린 이들이 걱정할까 대충 둘러대는 것일 게 분명했다. 다행히 소윤에게는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근무 시간도 탄력적인데 병가도 마음껏 내 주는 그 복지 좋은 회사가 대체 어딜까 궁금해하는 빛이 다시 한번 소윤의 눈에 스쳤다. 결국, 호기심을 적당히 끊어 내기 위해 해영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일단 늦었으니까, 올라가자.”
그의 말에 선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이들도 그러자며 선뜻 동의했다.
1층에 있는 방을 쓰는 소윤이 가장 먼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자 복도는 금세 적막해졌다. 해영은 남은 두 사람과 함께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왔다.
“형님, 주무세요! 해영, 잘 자.”
“어, 너도.”
각자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 앞에서 민호가 밝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민호에게 손을 흔들어 준 해영도 자신을 기다리는 선우에게 눈짓하며 방 안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방은 여태껏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어두웠다. 해영이 조명을 켜기 위해 스위치가 있을 만한 벽을 짚었다. 곧 짧게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은 금세 환해졌다.
밝게 쏟아지는 빛에 해영이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형, 내일 출근해?”
그가 겉옷을 벗으며 저를 따라 들어오는 선우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선선한 끄덕임에 해영은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아픈데….”
하루도 못 쉬냐는 말이 나올 뻔한 것을 삼켰다.
해영이 겉옷을 벗다 말고 멈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더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그게 선우의 말에 납득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세상에는 많았다.
‘회장님 아들도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건 똑같네.’
해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옷을 갈아입었다. 그 조용한 얼굴에서 선우는 해영이 속상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표정을 들여다보던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하지 말까?”
“안 해도 돼?”
그는 물음이 끝나자마자 곧장 고개를 드는 해영을 눈에 담았다.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 스치는 기대감이 뚜렷했다. 웃음을 삼킨 선우가 어리광을 부리듯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응, 나 아파, 해영아.”
“뭐?”
본능적인 상황에서 말보다 빠른 것은 늘 행동이기 마련이다. 선우의 말에 놀란 해영이 동그랗게 커진 눈을 하고는 황급히 발걸음을 뗐다.
“어디가?”
한걸음에 코앞까지 다가와 제 뺨을 붙잡는 해영을 내려다보며 선우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저를 들여다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 안쓰럽다가도, 걱정하는 눈에 고스란히 드러난 애정이 달가웠다. 윤해영의 모든 것들이 전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걸음도, 시선도, 감정도 모두. 선우는 아주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숨통에 묵직한 공기가 들어가서인지, 늑골 안쪽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마저 지금 당장 살아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조차 느끼지 못하던 시간을 뒤로한 채 그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입매에 해영의 시선이 꽂혔다. 아프다더니 입가에 걸친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에 의아해하기도 잠깐이었다.
“마음이….”
이 형이 진짜…. 절로 주먹이 꽉 쥐어지는 대사에 순간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해영이 선우를 노려다 보며 그의 뺨 위로 올렸던 손을 내렸다. 스륵 내려가는 손을 놓치지 않고 잡아챈 선우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눈썹을 늘어트렸다.
“진짠데.”
“형 혹시 머리가 아픈 거 아냐?”
되묻는 목소리에는 실소가 묻어 있었다.
이왕 병원에 갔던 거 사진이라도 찍어 볼 걸 그랬다. 뇌에 문제 있을 때 찍는 게 MRI던가. 입가에 삐딱한 미소를 걸고 선우를 노려보듯 주시하던 해영이 이내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장난을 치는 걸 보니 몸은 확실히 괜찮아진 모양이다. 지금 당장은 그 사실이 가져다주는 안도감이 훨씬 컸으므로, 해영은 틀어쥔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
어쩐 일인지 알람을 맞춰 두지도 않았는데 눈이 일찍 떠지는 날이 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씻고 나온 해영은 약 기운 때문인지 여전히 잠들어 있는 선우를 방에 남겨 둔 채 1층으로 내려왔다.
“형.”
다이닝 룸에는 아직 출근하기 전인 듯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재휘가 있었다. 해영이 그를 부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자, 우유에 잔뜩 만 시리얼을 퍼먹던 재휘가 손을 들어 화답했다.
그런 재휘를 지나쳐 부엌으로 향한 해영이 냄비를 꺼냈다. 시리얼을 전부 씹어 삼킨 재휘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선우 씨는?”
출근 시간이 겹쳐서인지 아침이면 곧잘 마주치곤 했기 때문인지, 그는 자연스럽게 제게 선우의 행방을 물었다.
“아직 자고 있는데, 좀 더 자라고 안 깨웠어.”
해영이 냄비와 남은 밥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등 뒤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들려왔다.
“아, 몸이 안 좋다고 했나.”
“그래도 괜찮아진 거 같긴 한데….”
들려오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던 해영이 대뜸 냄비를 든 채 몸을 돌렸다. 재휘는 열심히 시리얼을 퍼먹고 있었다. 해영은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형, 죽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그거… 그냥 밥에 물 넣고 끓이면 되는 거 아니야…?”
죽 레시피를 물을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뜸을 들이던 재휘가 더듬더듬 대꾸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을 몇 번 두드리나 싶더니, 곧 쉬워 보이는 계란죽 레시피를 찾았다며 고개를 들었다.
재료와 레시피를 차례대로 불러 달라는 해영의 요청에 재휘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가만히 그가 말하는 것을 듣던 해영은 냉장고에서 양파와 당근, 달걀 세 알을 꺼냈다. 물을 끓이는 사이 꺼낸 재료를 잘게 다진 해영이 조금 전 들었던 레시피를 다시금 복기했다.
직접 죽을 요리해 먹을 일이 없다 보니, 간단한 요리인데도 제법 생소했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죽을 사다 주면 사다 줬지 만들 생각은 못 했던 것이다. 게다가 선우와 같이 사는 동안 그가 아픈 것도 보지 못했던 해영으로서는 더더욱 죽을 만들 일이 없었다.
“어, 해영 일찍 일어났네? 오빠 안녕.”
“…안녕.”
해영이 프라이팬에 다진 재료들을 볶는 사이 다이닝 룸 안으로 세희가 들어섰다. 세희가 들어서자마자 등 뒤에서 부산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었더니, 뒤늦게 재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묘한 긴장감이 깔린 음성에 불을 줄이던 그가 숨죽여 키득거렸다.
해영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인사를 건넸다.
“누나, 이제 출근하려고요?”
“응. 선우 씨는 좀 괜찮아?”
“아마도….”
애매하게 대답한 해영이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까 나올 때 확인해 보니까 열은 없어서.”
“아, 그럼 다행이다.”
해영은 제 말에 안심하는 세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그는 제가 지금 지내고 있는 공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따뜻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건 단지 물리적으로 다가오는 집 안의 온기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전에 지내던 자취방을 생각하면 지금 지내는 고급 주택이 황송할 지경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영이 느끼는 온기는 조금 더 추상적이면서도 실체적인 영역에 있었다.
타인과 함께하는 것에서 오는 온기. 잠시라도 외로움을 잊게 해 줄 수 있을 만한 따듯함. 해영은 그 온기에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몸에서 긴장을 풀고 있었다. 외줄 타기를 하는 것만 같던 때가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촬영 기간 한 달이고 길어져 봤자 4주 이내야. 그동안 숙식 알바 투잡 뛴다고 생각해. 그냥 새로운 사람들 만나서 환기나 좀 하는 거라니까.’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처럼, 처음에는 자신 또한 돈을 목적으로 출연을 결정했다. 이후로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직 돈이 목적이었던 때는 고작 며칠뿐이다. 해영은 몇 주간 함께 생활한 이들에게 제법 정이 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쩌면 그래서인지 모른다. 이곳에 와서 다시금 느낀 온기가 따뜻했기에.
“누나, 혹시 죽 먹을래요? 남을 거 같은데.”
냄비에 볶은 재료와 밥과 풀어 놓은 달걀을 넣고 휘젓던 해영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던 세희가 자신을 향한 물음에 곧장 반가운 얼굴을 했다.
그래도 되냐며 묻는 그녀에게 당연하다는 듯 끄덕인 해영이 대충 죽의 간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레시피에서 말한 대로 참기름까지 넣자, 다이닝 룸 안에 꽤나 고소한 냄새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해영아, 너도 커피 마실래? 한 잔 더 내릴까?”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해영이 대답 대신 고맙다며 시원스레 웃었다.
“아메리카노, 진하게 맞지.”
“네.”
해영이 죽을 끓이던 불을 끄고 그릇에 세희가 먹을 만큼의 양을 더는 사이 세희는 그가 마실 커피를 내렸다. 이윽고 그는 테이블 위에 죽이 든 그릇과 수저를 내려놓았다.
“와, 맛있겠다. 잘 먹을게.”
“저도요.”
해영이 그녀가 건네는 커피 잔을 손에 쥐며 화답했다. 재휘의 옆에 앉은 그는 후후 죽을 불어 먹는 세희에게서 시선을 떼고 커피 잔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신 때였다. 테이블 위에서 작지 않은 진동 소리가 울렸다. 근원지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올려 둔 자신의 핸드폰이었다.
그가 마시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문자를 보내온 번호는 생소했으나, 첫마디에 박힌 이름은 익숙했다.
“…어?”
무의식중에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슬그머니 미간을 모은 해영이 들고 있던 컵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메시지를 열었다.
법무법인 다성 채용연계형 동계 인턴
[Web발신]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다성의 인사 담당자입니다. 이 문자는 면접 대상자를 대상으로 발송되었으며 이에 따른 세부 사항은 홈페이지(www.dasung.com/1021392)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개인별 일정은 아래를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문자 내용을 확인한 해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보였다. 해영은 반사적으로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걸쳤다.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하는 듯한 시선을 보니, 연락 내용을 읽는 제 표정이 퍽 심각해 보였던 모양이다.
“왜?”
“아뇨, 별일 아니에요.”
재휘에게서 들려온 물음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던 손이 안으로 굽어 마디가 툭 불거져 있었다. 제 손을 내려다보던 해영이 입술을 물었다.
열심히 했던 만큼 기대하기는 했지만, 정말 면접을 보러 오란 문자를 받으니 기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듣기로 면접은 형식적인 것에 가깝다고 했다. 실무 실습을 하며 받은 성적으로 합격자가 결정된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면접을 보러 오란 연락을 받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합격 통보에 가까운 결과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면접을 허술하게 준비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누나, 다 먹으면 접시 싱크대에 두고 가요. 내가 치울 테니까.”
해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는 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슬쩍 풀어진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둘 다 잘 다녀와요.”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그는 다이닝 룸을 나섰다.
주저 없이 계단을 오른 그가 2층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세희와 재휘를 뒤로한 채 계단을 오른 이유에는 다른 게 있지 않았다. 그저, 기쁜 소식을 들으면 가장 처음으로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우 형.’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선우가 생각나는 것은 습관인 모양이다. 여태 지우지 못한 습관이 자연스럽게 그가 있는 쪽으로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선우가 있을 방으로 향하면서 해영은 당연하게 이어질 상황들을 떠올렸다.
아마 제 얼굴을 보자마자 좋은 소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제가 꺼낼 말을 기대 어린 눈으로 기다리다가, 드디어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하면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해 주겠지.
그린 듯한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접히고, 시원스레 올라갈 입꼬리가 벌써 눈에 그려졌다. 그의 흰 얼굴 위로 소년 같은 웃음이 떠오를 때면 해영은 자신이 노력해 온 모든 시간의 보답을 받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해영이 방 앞에 섰다. 선우는 아직 잠들어 있을 것이다. 문고리를 손에 쥐고 조용히 문을 연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실루엣에는 미동이 없었다. 해영은 등 뒤로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철컥,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는 천천히 선우의 침대로 다가갔다. 해영은 침대 앞에 다리를 굽혀 쭈그리고 앉아 잠든 선우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의 감겨 있는 눈이 떠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해영아.’
눈을 뜨고 저를 발견하면 불러 올 목소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대체로 지루한 것이었고, 혹은 떨리거나 외로운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홀로 그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다리는 행위마저 즐거울 수 있다는 건 선우와 만난 후 알게 된 것이었다. 그가 지금껏 자신을 기다려 왔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에.
턱을 괸 채 그의 이목구비 위를 따라 눈으로 윤곽을 덧그리던 순간이었다.
짧은 깜박임과 함께 내내 감겨 있던 선우의 눈이 떠졌다. 길게 늘어져 있던 속눈썹 사이로 드러난 검은 동공에는 아직 지울 수 없는 잠기운이 묻어 있었다.
그 안에 자신을 바라보는 해영이 담긴 순간, 얼굴에 고여 있던 몽롱함이 단숨에 가셨다. 마치 손짓 몇 번으로 공기 중의 연기를 흩트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영아?”
선우가 눈을 문지르며 잠긴 목소리로 해영을 불러 왔다. 애매하게 올라간 부름에 해영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걸렸다. 입꼬리 옆으로 쏙 들어가는 보조개로 선우의 시선이 꽂혔다.
제가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현실인지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응. 형, 일어났어?”
턱을 괸 채로 얼굴을 기울인 해영이 짐짓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어딘가 들뜬 인사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멈칫했고, 해영은 그를 향해 왼팔을 뻗었다.
선우의 얼굴 위로 올라간 손등이 곧 그의 이마를 덮었다. 손등이 닿은 이마의 온기는 아침에 방을 나서기 전과 비슷했다. 혹 그가 깰까 쉬이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해영이 한결 걱정을 내려 두었다.
해영이 그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열을 재 보는 동안, 선우는 그런 해영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선우의 시선이 입가에 박힌 보조개에 머물렀다.
“기분 좋아 보이는데….”
들려온 목소리에 해영의 굽어 있던 어깨가 바로 세워졌다. 척추를 따라 흐르는 짜릿한 감각에 선우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상체가 힘이 들어가 빳빳해진 탓이었다.
아, 맞혔다.
점차 흐려지고 있던 보조개가 다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했던 그대로 반응하는 선우를 보며 애써 웃음을 삼킨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슨 일이야?”
궁금하다는 듯 그가 해영이 있는 침대의 가장자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해영은 나지막한 침음을 흘렸다.
“음….”
“빨리 말해 줘, 해영아.”
차선우는 손을 뻗어 해영의 뺨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내뱉어진 채근의 기저에는 숨기지 못한 설렘이 어려 있었다. 그 기대감을 알아차린 해영의 목울대가 한 번 물결을 치듯 위로 일렁였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구태여 그가 빨리 말해 달라 재촉하지 않아도 순순히 입을 열 생각이었다. 그저 제가 알았던 모습 그대로, 예상에서 조금의 벗어남도 없이 굴어 오는 그를 보니까…. 어쩐지 가슴팍이 간질거려 괜히 뜸을 들이게 되었을 뿐이다.
선우를 바라보던 해영이 제 뺨 위로 올라온 손끝을 쥐며 입을 열었다.
“인턴 실습 했던 로펌… 붙을 거 같아.”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덤덤했다. 태연한 척 말하긴 했지만, 설핏 올라간 시선은 선우의 표정을 끈질기게 좇고 있었다.
문자를 본 순간 기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다가왔던 감정은 놀라움이었고, 이어서 고개를 치켜든 것은 기대감이었다. 해영은 제가 받은 문자의 내용을 선우에게 전하고, 그의 얼굴에 물드는 기쁨을 보아야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제 말에 설핏 눈이 커지더니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며 해영은 제 생각이 맞았음을 알아차렸다. 선우가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붙을 것 같은 건 뭐야….”
“아직 확정은 아니니까.”
“떨어질 리 없잖아.”
“…….”
자신보다 더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 제게도 없는 믿음이 어디서 나온 것일지 잠시 생각하던 해영은 쥐고 있던 선우의 손을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그가 가진 믿음의 절반 이상이 아마 애정에 기반하고 있으리라. 이성적이기보다는 지극히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근거였다. 선우의 확고한 대답에 해영이 헛웃음을 흘리며 반박했다.
“떨어질 수도 있지.”
“…그럴 리 없어. 내가 그동안 지켜봤잖아. 너 정말 열심히 했어, 해영아.”
당연하다는 듯 떨어진 신뢰가 해영의 늑골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말문이 막힌 것은 그래서였다.
해영은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따라오는 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력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 주는 운 좋은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도저히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세상에는 그저 노력으로만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눈앞의 남자 또한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이, 서로의 자랑인 관계. 그런 관계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가 있었다. 해영은 그와 헤어지던 순간을 기점으로, 이제는 그런 사람을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미 퇴색되어 버린 줄만 알았던 관계는 선우의 미소 앞에서 금세 먼지를 벗고 다시 제 형태를 드러냈다. 해영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웃음이 서서히 무너지듯 일그러졌다.
“형은 진짜….”
힘을 잃은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해영은 무릎 위로 걸치고 있던 팔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안쪽에서 웅얼거림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해영아?”
“…응.”
“해영아, 너…, 혹시 우는 거 아니지?”
머리 위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물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이불을 걷어 내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선우가 해영을 위에서부터 끌어안았다.
단단한 애정 속에서 해영은 당장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마주 안고 싶었다.
‘아, 나 네가 좋아 죽을 거 같아.’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주는 애정과 제게 쏟아지는 온기에 기꺼이 매달리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면접 일정은 문자를 받은 후 이틀 뒤였다.
여유롭지 않은 시간에 쫓겨 그가 면접 준비에 몰두하는 동안, 선우는 그런 해영의 옆에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해영이 ‘형, 잘린 거 아니지?’ 하고 물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분명 출근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문득 고개를 들 때면 곁에 늘 선우가 있었다. 그가 일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영이 자연스럽게 하품을 삼키며 그를 따라 현관으로 나섰다.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해영아, 잘 다녀와.”
아침 일찍 출근하는 선우를 배웅하던 해영이 그 인사에 잠시 멈칫했다. 그는 이내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썹 위를 긁적였다.
“…지금 출근하는 건 형이잖아.”
그가 건넨 인사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선우는 그저 다정한 미소를 건 채 자신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하얀 입김이 나올 만큼 시린 겨울, 해영은 그 시선에 어쩐지 햇살 아래 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해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다녀와, 형. 이따 봐.”
다녀오라는 인사에는 어떤 힘이 있는 걸까. 그 짧은 인사말이 뭐라고, 타인의 빈 자리를 외롭지 않게 만든다. 미리 주고받은 약속대로 결국은 그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게끔 하면서.
선우를 보낸 후 해영은 남아 있던 다른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면접을 위해 간만에 꺼내 입은 정장을 보며 호들갑을 떨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면접은 꽤 길었다. 그 탓에 대기하는 시간도 자연스레 길어질 수밖에는 없었는데, 그사이 아는 얼굴들을 몇몇 스치듯 마주치곤 했다.
면접장 안에 들어가서는 연습할 때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몇 주간 인턴 과정을 통해 많이 가까워진 멘토 변호사들이 면접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얼굴에 한결 긴장을 푼 해영이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질문과 그에 따른 대답이 이어졌다.
‘인턴십 과정 동안 제출한 공통 과제에서 전부 고득점을 가져갔는데, 어떤 점이 가점 요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첫날 연수에서 교육받은 형식을 익히고 적용하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충실하게 사건을 바라보고 정리한 것이 가점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하하. 처음 자소서에 썼던 변호인에 대한 가치관과 인턴십을 거친 현재의 가치관 사이에 변화한 부분이 있나요?’
면접은 대부분 자소서를 기반으로 한 인성 면접이었다. 영어 면접은 준비한 내에서만 나왔으므로 해영은 모두 어려움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질의응답이 이어지는 동안 면접관들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면접장을 나서는 해영의 걸음은 이전보다 한층 더 가벼웠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으니, 면접은 나름 잘 본 것 같았다. 해영이 로펌이 있는 빌딩을 웃는 낯으로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겉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들렸다.
“선우 형인가.”
중얼거림과 함께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순간 떠오르는 얼굴에 해영의 입꼬리에 슬쩍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이런 순간은 매번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어째서인지 꿈은 늘 가장 행복한 순간 깨어나고, 비극은 이제야 조금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을 때 즈음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
들뜬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던 해영의 표정이 곧 딱딱하게 가라앉았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선우의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단어였으나, 절대 낯설 수 없는 단어가 해영의 시야에 어지러울 정도로 선명히 박혀 들었다.
아빠
***
낯선 동네에 선 해영은 두리번거리며 가게 위에 붙은 간판들을 살폈다.
전화로 들은 고깃집 이름이 적힌 간판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의 지도 어플을 잠시 내려다본 해영이 이내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혹시 제가 가게 이름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할 때였다. 골목의 어귀에 전화로 들었던 이름이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해영은 가게를 발견하고 나서도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들어가지 않고 그저 가게 앞에서 잠시간 멈춰 서 있을 뿐이었다.
“…하.”
꾹 다물려 있던 입에서 조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소리가 내뱉어졌다.
면접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망연히 선 채로 해영이 마른세수를 했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그는 돌아가면 자신을 반겨 줄 얼굴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곧 집으로 돌아올 누군가의 얼굴 또한 떠올렸다.
그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자신을 찾을 테고, 마주한 후에는 면접은 어떻게 봤는지, 잘하고 왔는지 같은 물음을 꺼내는 대신 수고했다며 다독여 줄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다정한 시선 아래서 키득거리며 잘 보고 온 것 같다는 말을 꺼낼 차례였다.
그건 그가 선우와 지난 몇 년에 걸쳐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해 온 방식이었다. 오늘도 그럴 예정이었던 해영은 정해진 순서를 따르지 못하고 갑작스레 예상치 못한 길 위에 놓여 있었다.
그때,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에서 다시금 진동이 울렸다.
아빠
화면 위로 떠오른 단어는 여지없이 조금 전 해영과 통화했던 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귀신같네….’
제가 하도 오지 않아 연락을 걸어 온 거겠지만, 가게 앞에 서 있던 해영으로서는 주저하는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한 전화에 쭈뼛 몸이 굳었다. 결국, 그는 다소 경직된 얼굴로 가게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문에 달린 도어 벨이 딸랑거리며 해영이 공간에 들어섬을 알렸다. 요란스럽게 울리던 전화는 그가 들어선 것을 발견했는지 머지않아 뚝 끊겼다.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해영아…!”
결코 모를 수 없는 목소리가 해영의 이름을 불러 왔다. 오면서도 심란한 마음에 부러 떠올리지 않았던 아버지. 고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뒤늦게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해영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빠.”
잇새로 숨소리가 섞인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해영이 뱃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사념들을 털어 내기 위해 짧게 호흡을 골랐다. 그러고는 곧 어설픈 웃음과 함께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가 앉아 있는 4인 테이블로 다가간 해영이 맞은편 의자를 꺼냈다. 자리에 앉으며 그는 아버지의 행색을 본능적으로 눈으로 훑었다.
아버지의 겉모습은 고등학생 때 봤던 것에 비교하면 무척이나 깔끔했다. 비록 제법 오래전의 일이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해영은 그가 제게 고기를 사 주던 날 입고 있던 해진 바람막이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제 손에 쥐여 주려 했던 모습도.
‘아빠, 저 진짜 돈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비싼 건 아니더라도 좀 더… 따뜻한 새 옷 사 입으세요.’
가을의 끝물과 겨울의 초입, 환절기는 그 시기가 가진 애매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추위를 몰고 오곤 한다. 해영은 그 쌀쌀한 밤에 얇은 바람막이 하나를 입은 채 저를 걱정하던 얼굴을 잊지 못했다.
하필이면 오랜만에 다시 마주하게 된 장소도 고깃집이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때처럼.
그것 때문인지 해영은 아버지를 마주하고 가장 먼저 그의 옷차림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전보다 말쑥한 옷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미약한 안도감마저 밀려올 지경이었다.
“누구 아들이길래 이렇게 잘생겼냐? 양복도 멋들어지게 차려입었네?”
그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제 옷차림을 살핀 아버지가 허허실실 웃으며 건네 온 물음에 해영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오늘 면접을 보고 와서요.”
물음에 대답하던 해영의 말이 거기서 뚝 끊겼다. 어색하게 끝이 잘린 대화에 테이블 위에는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어릴 때의 자신이었다면, 아니 적어도 20대 초반의 자신이었다면…. 아버지를 만나자마자 처음 보이는 제 말쑥한 정장 차림을 자랑하며 오늘 보고 온 면접에 대해 떠들었을지도 모른다.
칭찬받을 만한 일이 생기면, 부모님이 가장 먼저 떠오르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런 순간마다 한 번도 연락이 닿지 않던 그들을 떠올리던 해영이 애써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어떻게 지냈어, 아들.”
문득 들려온 물음에, 테이블의 옆에 놓인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던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그의 앞에 꺼낸 수저를 가지런히 내려놓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공부도 하고 실습도 하고, 이것저것 하면서 지내고 있었어요. 아빠는요? 잘 지내셨어요?”
“그래, 나도 잘 지냈지. 걱정 마라.”
해영의 되물음에 그는 어딘가 머쓱해진 얼굴로 웃었다. 확실히 이전보다는 근심이 적어 보이는 미소였다. 덕분에 해영은 내내 가슴 한편에 품고 있던 죄책감을 적게나마 덜어 낼 수 있었다.
“저도 잘 지냈어요.”
해영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부러 밝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건, 그에게서 선우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다. 그때는 당황해 아버지에게 원망만 토해 내다 전화를 끊었다. 그 일이 다시금 상기되자 해영의 미소가 금세 흐려졌다.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그는 울렁거리는 속을 무시하며 제 발목을 잡은 채 아래로 끌어 내리려는 기분들을 밀어 냈다.
어쨌건, 정말 잘 지내는 것 같은 모습에 안도를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온전히 아버지만을 위한 안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갈매기살 3인분 나왔습니다.”
해영이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접시에 한가득 올라간 생고기가 나왔다. 아버지가 미리 주문해 놓은 모양이었다.
고기와 함께 몇 가지 밑반찬들을 내려놓는 직원에게 해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전했다. 자연스럽게 고기와 함께 나온 집게로 손을 가져가던 차였다.
그보다 먼저 집게를 집어 가는 손이 있었다. 허무하게 집게를 빼앗긴 해영이 고개를 들자, 아버지가 그런 해영에게 제가 구울 테니 먹기나 하라며 가벼운 엄포를 놓았다.
“아빠, 제가 구울게요. 집게 저 주세요.”
그에 해영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뻗었으나, 그는 못 들은 척 집게로 고기를 집어 불판 위에 올릴 뿐이었다.
순식간에 불판 위로 올라간 고기 몇 덩이가 곧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익어 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해영이 졌다는 듯 내밀고 있던 손을 회수했다.
“이거 다 익었다. 얼른 먹어.”
집게를 들고 굽는 데에 열중하던 그가 해영의 앞쪽으로 구워진 고기들을 밀어 주었다. 접시 위로 떨어지는 고기 한 덩이를 입에 넣으며, 해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인지 우물거리며 입 안에서 씹히는 고기가 무슨 맛을 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관성적으로 턱을 움직이면서도 해영은 제 앞에 쌓여 가는 고기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신 앞으로 밀리는 고기들을 보면서 그는 고등학생 때 아버지와 만났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때도 아버지는 당신은 드시지 않고 본인의 몫까지 전부 제 앞으로 밀어 주셨다.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에서 해영은 어쩐지 조금 서러워졌고, 조금 많이 죄송스러워졌다. 그건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를 원망한 시간 속에서도 제가 받은 것들에 대해 한 번쯤 더 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그렇게 못 할 말들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더 찾아봤어야 하는 거 아닐까?
무슨 맛인지도 모를 고기들을 질겅거리던 해영이 결국 젓가락을 들었다. 그는 제 앞에 놓인 고기들을 아버지의 그릇 위로 하나씩 옮겨 두었다.
“아빠도 좀 드세요.”
“아빠 걱정은 말고. 일단 우리 아들 먹여야지.”
그는 그러지 말라는 듯 집게로 해영의 젓가락질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그때는 접시 위로 고기를 몇 개나 옮긴 후였다.
해영이 내심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그러고 나서야 저 또한 다시 입 안에 고기를 밀어 넣었다. 방금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던 고기 맛이 불쑥 입 안에 퍼졌다.
분명 타진 않았는데, 숯불 향이 배어서인지 고기에서는 어쩐지 탄 맛과 비슷한 씁쓸한 맛이 났다. 해영은 묵묵히 고기를 씹었다. 열심히 먹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차츰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가게는 저녁 시간에 접어들어서인지 차츰 손님들이 몇몇 들어오기 시작했고, 떠들썩한 소음 속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사이 혹시 술 한잔하는 건 어떠냐는 아버지의 제안에 해영은 고민하다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언젠가는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한잔하는 꿈을 꿀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해영은 술이라면 몇 궤짝 정도는 족히 마신 성인이었다.
더군다나 촬영하는 와중에 술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기회가 또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내심 아쉬움을 달래던 해영에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해영아, 아빠 때문에… 속 많이 상했지?”
아버지의 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접시 위로 올라온 고기 한 점과 함께 느릿하게 내뱉어진 말이 해영을 멈칫하게 했다. 순간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놓칠 뻔한 그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아버지가 올려 준 고기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제법 매서웠다. 젓가락을 그러쥔 손만큼이나 눈에도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울컥한 마음이 눈물샘을 건드릴 것만 같았다. 설핏 입술을 짓씹은 해영이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절레절레, 가로로 흔들리는 머리에서 이미 원망 같은 건 쉬이 휘발되어 사라진 듯했다.
“아비가 되어선 해 준 것도 없고. 못난 아빠 원망 많이 했을 거 안다.”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아니라고는 했으나, 해영은 입 안에 난 가시 같은 거짓말에 따끔한 고통을 느꼈다. 그의 말에 움찔하지 않았다면 그게 거짓말일 것이다.
아버지가 돈을 달라는 연락을 해 올까 부담스러워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수중에 지니고 있는 돈이 여유롭지 않을 때면 덜컥 겁이 나기도 했고, 가끔은 못 들은 척 아버지에게서 온 연락을 피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돈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좀 지내보고 싶다고 답답함을 토로하는 상상을 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모두 상상일 뿐이었다. 그런 상상을 하다가 덜컥 현실로 끌어당겨질 때면 해영은 제가 가진 치졸한 마음에 별수 없이 환멸이 났다.
부끄럽고 죄송해서 자꾸만 안으로 굽어 드는 손가락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다행인 건 처음처럼 불안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었다. 차츰 긴장을 풀던 해영의 머리 위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런데, 그, 해영아. 아빠가 요즘 하는 일이 있는데.”
일?
대뜸 들려온 말에 해영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눈가에 어색한 곡선을 그렸다. 우물쭈물하던 눈매에 곧 굵직한 힘이 실렸다.
해영은 자신에게 꽂히는 눈빛을 보며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가 기억하는 어릴 적 아버지의 눈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면서 늘 호탕한 웃음을 짓던 아버지의 눈빛. 익숙하긴 했으나, 어째서인지 해영은 그 반질거리는 시선을 보며 왜인지 모를 기시감을 느껴야만 했다.
“왜, 전에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잖아. 이게 좀 잘될 조짐이 보여. 아빠가 이런 곳에 또 촉이 좋은 거 알지? 슬슬 국외로 발을 넓히려고 하거든.”
이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부자연스러운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중요한 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해영이 그가 뱉은 말을 곱씹으며 미간을 모았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얼어붙은 해영의 입에서 간신히 무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
“규모를 좀 키우려고. 근데… 이 확장이라는 게, 아무래도 위험성이 없지 않지 않냐. 그래서 초반에는 대기업이랑 연을 터놔야 한다더라. 그래야 지지 기반도 확실하고, 신뢰성도 생기고.”
사업, 국외, 확장….
쨍그랑, 해영의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간 젓가락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 누구도 떨어진 젓가락 따위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사업.
아버지의 사업은 해영의 트라우마였다. 그와 마지막으로 했던 연락에서 어떻게 또 사업을 시작할 수 있냐며 따져 물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걸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헤어지고 난 후에도 선우 형이 아버지에게 돈을 줬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해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게의 소음을 비롯해 피부에 닿아 있던 모든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순간. 손쓸 도리 없이 표백된 뇌리에 스쳐 지나간 것은 고등학생 시절의 기억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잠겨 있지 않아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던 문,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야에 가득 찼던 빨간 종이들. 얼마 전부터 늘 이어지던 부모님의 다투는 소리… 결국 집을 나서며 제게 시선을 주지 않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
이후 며칠을 술에 취해 살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불 꺼진 집에서 혼자 밤을 보내며 해영은 낯선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하곤 했다.
하진의 가족이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해영아, 네 엄마한테 연락받았거든? 걱정하지 말고, 아줌마네 집에 가서 살자.’
학교에 가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과장된 웃음을 흘리고 다니던 나날이었다. 아주머니께서 내밀어 주신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고등학교 생활은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해영은 그때의 기억을 쉬이 지울 수 없었다. 그건 아문 상처가 아닌 트라우마로 남아 가끔, 아주 가끔씩 불쑥 되살아나 그의 발목을 붙잡곤 했으니까.
그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가족들 모두를 산산조각 냈다. 그걸 여전히 기억하는 해영으로선 어떻게 그가 사업을 다시 시작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도 과도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다 문제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대체 어떻게.
“꼭 해야 해요?”
숨결 섞인 목소리에는 그가 느낀 충격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제발…. 제발, 아빠. 그러지 않아도… 평범하게 살 수 있잖아요.”
해영이 바라는 건 그거였다.
윤해영은 남들보다 풍족하게 살진 못해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평범하게, 가끔은 좀 부족할 수 있어도 불행하지는 않게. 짓씹듯 간절하게 흘린 말은 상대에게 닿지 못한 채 흩어졌다.
“철없는 소리 하지 마라. 네가 지금 이게 어떤 기회인 줄 모르니까 하는 소리야.”
냉정한 말에 해영의 입에서 헛웃음과도 같은 한숨이 뱉어졌다. 그의 표정에 서린 황당하단 기색을 알아차린 건지, 아버지는 곧 누그러진 목소리로 해영을 달랬다.
“한제랑 연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그걸 왜 써먹으려고 하질 않아? 바보처럼.”
“…….”
“한제한테서 계약을 따내면 바로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 해영아,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라, 응?”
이어지는 말에 해영은 머리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뜨거운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것만 같았다. 무릎 위에 놓인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
“저….”
입을 열었던 그는 보잘것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다시 입을 닫았다. 모르는 사이 눈에 힘이 실린 모양이었다. 눈이 시려 왔다.
해영은 반사적으로 턱을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느릿하게 고개를 내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을 보며 예의 그 기이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윤해영은 울컥한 마음에 달싹거리던 입술을 꾹 깨물며, 홧김에 내뱉을 뻔한 말을 삼켰다.
아빠, 제가 알았던 건 한제가 아니라 차선우예요. 그거 아세요? 저 선우 형 좋아했어요. 아니, 사실은 지금도 좋아해요. 근데 형이 아빠한테 돈을 줬다는 사실이 절 너무 초라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헤어졌어요.
뱉지 못한 말이 안에서 뭉쳐 달아오른 속의 장작이 되었다. 해영은 꾹꾹 눌러 삼킨 말 대신 단호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씹어뱉었다.
“저 그 형이랑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말과 동시에 눈앞에는 다시 분명한 선이 드리워졌다.
해영은 없던 선이 그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제가 애써 무시하는 동안 잠시 흐릿해졌을 뿐, 선은 내내 그어져 있었다. 해영은 그 위에 걸치고 있던 발을 한 발짝 뒤로 뺐다.
그래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은 머리보다 직감으로 먼저 알았다. 선우가 더 이상 아버지와 연관되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해영아, 잘 다녀와.’
그가 집을 나서며 제게 건넸던 인사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해영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 하필 그 다정한 목소리가 떠오를 것은 뭔가. 그와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는 걸 스스로 선언하는 순간에. 하필이면 그래야만 하는 순간에.
“그 비서 말로는… 거기 회장 아들이 널 끔찍하게 생각하는 거 같던데.”
더 비참해질 수 없으리라 생각한 순간에도 늘 최악은 존재했다.
해영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믿지 못하는 얼굴로 야트막하게 입을 벌렸다. 말의 내용이 묘한 위화감을 가져왔던 것이다. 곧 그의 미간이 속절없이 찌푸려졌다. 일그러진 낯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잘못 들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헛된 바람은 이어진 말들로 간단히 부서졌다.
“사업 얘기를 좀 하려고 회사에 찾아가니까, 거기 비서가 그러더라. 들어 보니 네가 말하면 어떻게 계약이 잘 풀릴 거 같던데, 왜, 전에… 너랑 각별한 사이라고 투자금도 주고 했지 않냐.”
“…투자금이요.”
해영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투자에는 그 자금에 대한 회수가 전제되어 있었다. 되돌아올 이익을 기대하지 않은 채 돈을 쥐여 주는 일을 그 누구도 투자라고 하지 않는다. 해영은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다.
아버지가 받은 건 투자가 아니었다. 그건 연인 관계에서 비롯된 기부였고, 그렇기에 비참했었다. 마치 지금처럼.
“…선우 형, 만나셨어요? 형이 있는 회사까지 찾아가서… 만나셨어요? …언제요?”
대답을 구하긴 했으나 사실은 묻고 싶지 않았다. 그가 뱉을 말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잠시 뜸을 들이던 아버지가 해영을 꼬여 내듯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지지난 주… 크리스마스 전날인가, 얼굴을 본 건 아니고, 회사에 없다고 해서 비서만 만나고 왔어. 근데 그 사람이 계약에 대해서 뭘 알 리가 없지.”
“…….”
크리스마스 전.
해영이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떠오르는 날이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 민호가 다 같이 나가자며 외출을 제안했던 날.
‘근데 선우 씨는 나가려던 거 아니에요?’
‘…잠깐 일이 생기긴 했는데, 중요한 건 아니에요.’
차선우는 어딘가 갈 곳이 있는지 급하게 옷을 차려입은 채였다. 나서려다 말고 저를 스치던 시선이 선명했다.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은 서서히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해영은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때 자신은… 그가 저 때문에 선약을 깨는 건 아닐까 주제도 모르는 걱정을 했다. 자만했던 시간이 가슴 안쪽을 좀먹으며 파고들었다.
이제는 더 떨어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노력해서 다시 미래를 계획해 나갈 일만 남았다고….
그러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영아….”
자신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서 도망치듯, 해영은 결국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쳐진 것만 같았다.
“진짜 이번 한 번이야. 이번 사업만 성공하면, 어? 전처럼 가족끼리 모여 살 수 있어. 아빠가 약속할게, 이 계약만 네가 말을 잘해 주면….”
자신을 회유하려는 말을 듣다못해 해영이 결국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곧 말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의자의 등받이에 걸어 두었던 겉옷과 가방을 챙겼다.
드르륵, 거칠게 뒤로 밀려 나는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해영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아버지는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자신을 붙잡으려는 듯한 아버지의 손길을 피하며 문가로 발길을 돌렸다.
딸랑, 들어올 때는 경쾌하게만 들렸던 도어 벨 소리가 시끄럽게 해영의 귓가에 박혀 들었다. 그가 가게 밖으로 나서자,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따라 나온 아버지가 해영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해영아, 말은. 말은 잘해 줄 거지?”
팔이 붙들려 멈춰 섰던 해영은 저를 붙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어딘가 비굴해 보이는 표정에는 자신을 향한 기대감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애써 끌어 올리고 있던 입꼬리에서 힘이 풀렸다.
억지로 욱여넣었던 음식들을 다시 토해 내고 싶었다. 해영은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시야가 어지러웠으나, 이 자리를 뜨기 전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아버지니까, 그래도 가족이니까 하지 못했던 말이 결국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업, 하실 거면, 저한테 다신….”
어쩐지 무언가가 계속 목에서 턱턱 걸리는 듯했다. 그 탓에 잠시 말을 멈췄던 해영이 잠긴 목소리를 힘겹게 꺼냈다.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차가운 음성이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해영은 팔을 비틀어 저를 붙잡고 있는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해영아.”
그는 이름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굳혔다. 아버지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눈을 피하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갔다.
해영이 시선에 담은 건 그의 눈도, 입도 아닌 그 근처 어딘가 허공에 피어오르는 흰 입김이었다. 공기 중에서 얼어 버린 알맹이가 뿌옇게 뭉쳤다가 다시 흩어지는 모습을 그는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희뿌연 공기가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해영은 의식적으로 눈에 꾹 힘을 주었다. 오늘부터 한파가 시작된다더니, 그 말대로였다. 살을 에는 추위였다. 아, 선우 형이 오늘은 꼭 목도리라도 하고 따뜻하게 나가라 했었지.
“아빠한테 이러는 거 아니다…. 가족이 서로를 도와야지.”
“…….”
“결국,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건 가족밖에 없는 거야.”
해영은 들려오는 말에 실소가 섞인 한숨을 뱉었다.
“하….”
제 입에서 나온 입김을 주시하며 해영이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저한테 미안하긴 하셨어요?”
그건 여태껏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가장 비참했던 순간, 유일한 위로가 되어 주던 이에게서조차 배신당한 것만 같아 그 어디에도 위안 삼을 구석이 없던 순간, 해영은 그것이 궁금했다.
왜 그랬을까, 제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러니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어쩌면 해영은 아버지를 아주 조금쯤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가 건넨 속상했냐는 물음에 쉬이 마음을 놓지 않았나.
“정말 한 번이라도, 저한테 미안했던 적 있어요? 저는….”
해영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삼켰다. 정작 그 말을 꺼내고도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가 비스듬하던 시선을 완전히 아래로 내리며 몸을 돌렸다.
자신은 마지막 연락 이후 며칠이나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원망스럽다가도 그에게서 받았던 것들이 떠오르면 아버지를 원망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지곤 했다. 왜 제 주머니에 넣어 주었던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은 그런 순간 떠오르고 마는 건지.
여태 모르는 척할 수 없었던 건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결국은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해영이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골목을 떠나는 내내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다면 제 말을 후회하게 될 것 같았으므로.
정신없이 길을 따라 무작정 걷던 해영은 버스 정류장을 발견했다. 광고판이 붙어 있어서인지 유독 더 환하게 느껴지는 정류장 뒤로 타오를 듯한 노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해영은 불현듯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 해가 지는 무렵이었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혹독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살갗 안으로 파고드는 추위에 해영이 짧은 탄식을 흘렸다.
“아.”
맞다, 겨울이었지. 뒤늦게 의식하자마자 밀려온 추위에, 공허한 속 가득 바람이 불었다. 들고 있던 옷을 꺼내 팔을 꿰입은 해영이 정류장으로 다가섰다. 그 앞까지 다가간 시선은 곧바로 버스 운행표를 찾았다.
다행히도 집 근처까지 향하는 버스가 있었다. 해영은 안심하고 정류장에 비치된 벤치에 걸터앉았다. 멍하니 앉아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던 그의 입에서 불현듯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 와중에도 추위를 느끼고, 집에 가는 길을 찾고 있는 스스로가 웃겼다.
‘이렇게까지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나….’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산다는 것이 너무 누추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포기하고 전부 놓아 버리고 싶었다.
안 돼, 생각하지 마, 윤해영. 금방 침전하는 기분에 그가 손을 들어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마른 손이 얼굴 위를 쓸고 지나갈 때마다 처참했던 표정이 지워졌다. 이윽고 얼굴을 가리던 손이 떨어지자, 붉어진 눈가가 성마르게 정면을 주시했다.
머지않아 해영은 제 앞에 멈춰 선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버스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언덕을 오르는 버스가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릴 때마다, 심장이 갑갑하게 조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해영이 비스듬히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무는 해가 시멘트 건물들을 삼키기라도 할 듯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잠깐 시선만 끌 뿐이었다. 잔상으로조차 흔적을 남기지 못한 풍경들이 그저 눈앞을 지나쳐 가기만 했다. 마치 보지도 않는 TV를 틀어 놓은 사람처럼 해영은 무감하게 밖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든 건 귓가에 째질 듯한 음성이 틀어박힌 후였다.
“이봐요! 어디까지 가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해영이 곧바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북적거리던 버스 안에는 어느새 자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언성을 높여 물은 것은 저에게 향한 것일 테다. 난처한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대체 언제 어두워졌던 건지, 벌써 해가 저문 창밖은 푸르스름했다.
“…죄송한데, 여기가 어딘가요?”
“종점 전이에요. 정류장은 아닌데, 여기서 내려 드려요?”
걸걸한 목소리가 해영의 물음에 답했다. 그러면 감사하겠다며 고개를 숙이자, 대꾸 없이 버스의 뒷문이 열렸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몸을 옮겨 버스를 빠져나온 그가 길 위에 망연히 섰다.
“여기가 어디야….”
이마를 짚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선 끝에 익숙한 중식당이 들어왔다. 화려한 외관의 건물을 발견한 그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른 이들과 함께 왔던 식당이었다.
차를 타고 왔을 때는 10분 정도 걸렸으니, 걸어간다면 30분 정도 걸리려나. 보이는 길을 쭉 따라 올라가다 보면 늘 내리곤 했던 정류장이 나타날 것이다. 아마 두 정거장에서 세 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더 온 것 같았다.
대체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있던 건지, 자신의 부주의함에 조소하던 해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해가 떨어진 겨울 저녁은 추웠다.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생각에 잠기고 싶지 않아 구태여 주변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주고, 가로등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걷던 해영의 시야에 드디어 익숙한 주택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올 때면 늘 내리던 정류장도 얼핏 멀찍하게 보였다.
다 왔다는 생각에 걸음을 빨리하던 그는 이윽고 정류장에서 보이는 실루엣에 잠시 멈칫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초조하게 서서 버스가 오는 쪽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 슬쩍 미간을 찌푸린 해영이 천천히 정류장으로 다가섰다.
“…….”
가까이 갈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정류장에 서 있는 훌쩍 큰 키부터 눈에 띄었다. 보기 드문 체격을 가진 상대는 해영이 눈을 감고도 알아맞힐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도 모르게 빨라졌던 발걸음이 정확히 정류장의 앞에서 멈췄다. 해영은 그 앞에 서서 흰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하게 질린 선우를 눈에 담았다. 대체 이 겨울에 자신을 밖에서 얼마나 기다린 건지, 귓가가 유독 붉었다.
이… 바보 같은….
그를 보자마자 울컥 치솟으려는 눈물을 해영은 꾹 참았다. 버스가 오는 쪽을 주시하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선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발견한 선우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해영은 놓치지 않았다.
“왜 그쪽에서….”
왜 버스가 아닌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는 것인지 물으려던 듯했다.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놀란 듯 순간적으로 미미하게 커졌던 눈동자가 다시 가늘어졌다.
그는 얼어 버린 것처럼 멈춰 선 해영의 앞으로 한걸음에 다가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뺨을 붙잡은 선우가 제법 심각한 얼굴로 해영을 들여다보았다.
그 다정한 시선에 어쩐지 참아 왔던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아,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그런 해영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선우가 이윽고 그의 얼굴에 올렸던 손을 떼었다.
해영이 떨어지는 손길을 좇아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린 순간이었다.
“해영아, 여기는 카메라도 없고, 마이크도 없어.”
떨어지는 온기를 아쉬워하던 눈길을 알아차린 걸까. 해영은 제 머리 위로 덮이는 두툼한 천의 감촉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깜박여도 보이는 것은 그저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제 겉옷을 벗어 해영의 얼굴 위로 감싸듯 가린 선우가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해영은 제 어깨와 등을 감싸 안아 오는 단단한 팔에 몸을 굳혔다.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을 헤매던 해영에게로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아무도 너 못 봐.”
“…….”
“그러니까….”
“…….”
“그러니까 울어도 돼, 해영아.”
“…윽….”
입에서 말릴 새도 없이 뜨거운 숨이 토해졌다. 억눌러 온 감정들이 눈가에 불을 붙인 듯 화끈했고, 뺨이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윤해영은 저를 꽉 안아 오는 품속으로 파고들며 참아 왔던 울음을 토해 냈다.
***
솨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해영의 얼굴이 어두웠다.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왔으면서 그는 그저 물이 튀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울어도 돼, 해영아.’
먹먹할 정도로 울리는 물소리에도 귓가에 맴도는 것은 오직 그 음성뿐이었다.
울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가장 무너지고 싶었던 순간 눈앞에 나타나는 건 뭐란 말인가. 자신을 기다리느라 차갑게 얼어 있던 선우의 손끝을 떠올리던 해영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던 밖과 다르게 집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차츰 진정하고 정신이 돌아올 때 즈음,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르작거리는 해영에게 선우가 어르듯 말했다. 그 이상의 문제는 없다는 양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로.
동시에 단단히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한 발짝 멀어지는 온기를 느끼며 해영은 손을 들어 얼굴에 깊이 덮여 있던 옷을 들쳤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어둠이 벗겨져 나가는 순간, 선우의 등 뒤에서 달려오는 버스 전조등의 환한 빛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그 순간에서조차 그가 겉옷도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게 습관처럼 신경 쓰였다. 해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섬광을 헤쳐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 걸려 있던 옷이 금방 선우의 어깨 위로 둘렸다.
이제 괜찮아졌다고는 해도 열이 나던 게 엊그제였다. 혹 다시 열이라도 오를까 싶어 그의 몸 위로 옷을 덮어 주는 손이 분주했다. 주저함 없던 손길은 선우에게 단단히 옷을 입히고 나서야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왜….’
잠긴 목을 긁으며 튀어나온 음성이 형편없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뱉은 목소리가 낯설어 잠시 입을 다물었던 해영이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형은 왜 자꾸 나를 기다려.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조금 차갑게도 들리는 목소리였으나, 상대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언제든 돌아올 거잖아. 그렇게 약속했잖아, 해영아.’
담담히 되돌아온 말에 해영은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답할 수 있는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 속삭임에는 아침에 주고받았던 다녀오라는 인사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아….”
거울 안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던 해영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영 엉망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대놓고 광고라도 하는 듯한 꼴에 자신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선들이 뒤늦게 이해가 갔다.
특히, 가장 둔해 보이는 김민호조차 눈치를 채지 않았나.
‘해영! 왔….’
저를 발견하자마자 신나서 손을 흔들었다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던 장면이 선명했다. 굳이 평온하던 공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방으로 들어왔는데, 거울에 비친 표정을 보니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했을 듯했다.
그것까지 떠올리니 안 그래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해영은 손에 물을 가득 담아 얼굴을 적셨다.
걸핏하면 생각이 새어 나가는 바람에 물 아래 서 있던 시간이 길었다. 밤이 늦어져서인지, 씻고 나왔을 때는 이미 집 전체가 조용했다.
대충 머리를 말린 해영이 드레스 룸을 빠져나왔다. 머리를 털며 침실로 들어서던 그는 아직 조명이 켜져 있는 방 안을 발견하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던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침대 옆 스탠드의 빛이 그러지 않아도 섬세한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드러냈다. 차선우는 그 빛을 조명 삼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대로 눈을 들어 올려 자신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왜 아직도 안 자고 있는 건지, 혹시 자신을 기다린 건지. 그러한 물음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해영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먼저 잠들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익숙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던 해영은 이름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 도망칠 곳을 잃었다.
“해영아.”
그가 제 허리춤까지 끌어 올려져 있던 이불을 가볍게 들췄다. 동시에 제 옆자리를 눈짓하는 모습은 명백하게 자신의 옆에 와서 누우라는 신호였다.
윤해영은 그런 선우를 바라보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형.”
느릿하게 떨어졌던 입술이 머뭇거리다 결국 다시 닫혔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꽤 오래전부터 쌓여 왔지만, 해영은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 결국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그랬어? 왜 우리 아빠한테 돈 줬어? 그게 끔찍하게 싫었는데, 나랑 헤어진 후에도 아빠를 만났어? …어떻게 내 앞에서는 전부 모르는 척할 수 있었어?
어떻게.
그 모든 의문을 묻지 못한 채로 삼켰다.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밀려오고 나서야 윤해영은 자신이 쌓아 오던 발밑의 성이 모래성이었음을 깨달았다. 무의식중에 꽉 그러쥔 손의 마디가 툭 불거져 나왔다.
무너진 발밑을 들키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사람에게만 번번이 들키고 마는 것이 비참했다. 알지도 못하는 새에 그에게 빚을 진 게 싫었고, 자신이 알지 못한 곳에서 벌어진 일이 부끄러웠다.
‘…거지 같아.’
보이고 싶지 않은 꼴사나운 모습들을 자꾸 보이게 될 때마다 자존심이 무너졌다.
한 번도 차선우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해 본 적 없었다. 살면서 자존심이니 자존감이니 그런 것에 연연한 적도 한번 없었다. 따라서 제게도 지키고 싶은 최소한의 것이 존재했음을 깨달았던 건, 이미 그게 무너져 내리고 난 뒤였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스스로가 우습다 못해 서러워졌다.
“카메라… 있잖아.”
“괜찮아.”
돌아온 대답에 왜인지 울컥 눈이 시려 왔다. 뭐가 괜찮아? 형은 뭐가 다 괜찮아.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입을 열어 부정하고 싶었으나 해영은 사실 그가 건네는 괜찮다는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차선우는 그게 어떤 일이든 제가 신경 쓸 만한 문제가 되지 않게 기꺼이 나서서 해결할 것이다. 그가 제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응? 해영아.”
다정한 목소리가 언뜻 초조함을 드러낸 채 재차 자신을 불렀다. 그 음성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이리 와.”
슬쩍 기우는 고개가 빈자리를 향했다.
하고 싶은 말들을 꾸역꾸역 삼키며 서 있던 해영이 발을 뗀 것도 그때였다. 터벅터벅 말없이 다가간 그가 비어 있는 선우의 옆자리로 올라갔다.
이불을 덮어 주는 익숙한 손길에 해영이 입술을 물었다. 차선우는 침대 옆 협탁 위로 들고 있던 책을 내려 두며 스탠드의 조명을 껐다. 이윽고 찾아온 어둠과 함께 해영은 자신을 감싸듯 끌어안는 팔을 느꼈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한참을 혹사당한 머릿속이 욱신거려 왔다. 스위치 하나로 찾아오는 어둠처럼, 해영은 단 하나의 버튼으로 모든 고민을 떨쳐 내고 싶었다.
“잘 자.”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가 스위치를 내려 주었다. 어정쩡하게 침대로 파고들었던 해영이 자신을 끌어안는 팔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감긴 눈 사이로 비죽 새어 나온 눈물이 소리 없이 하강했다. 조명을 꺼서 다행이었다. 해영은 얼굴에 닿는 천의 감촉에 고개를 파묻으며 뺨을 가로지르는 물기를 숨겼다.
“…형도.”
느릿느릿하게 흘러나온 나지막한 대답에 어쩐지 힘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그 웃음이 진짜인지 그저 환청인지 분간하기도 전에, 의식은 단숨에 멀어져 갔다. 암전이었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