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2화(2) (4/13)

러브라인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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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아침을 맞이하며 해영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핸드폰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침대 머리맡을 헤집어 핸드폰을 집은 그가 부스스한 낯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알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에는 확실히 숙취가 한몫하고 있었다.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으나,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미약하게 지끈거려 오는 머리를 꾹꾹 누른 해영이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술을 마신 자신이 미친놈이었다. 오랜만에 동갑내기 친구와 떠든 것이 생각보다 즐거웠던 모양이다. 자제했어야 했는데 민호가 잔을 갖다 댈 때마다 번번이 전부 부딪쳐 준 게 실수였다.

자책하고 있는 해영에게 다가온 것은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이었다.

“해영아, 이거.”

언제 들어와서 제 옆에 섰는지 모를 선우의 목소리에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이미 출근 준비도 전부 마친 모양인지 겉옷만 입지 않았을 뿐 몸에 딱 떨어지는 정장을 차려입고 있는 선우가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쥐고 있던 손을 뻗어 컵을 받아 든 해영이 뒤늦게 멈칫했다.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당연하다는 듯 달달한 꿀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가에 머그잔을 가져갔다.

차선우는 독한 술이나 비싼 와인 같은 걸 곧잘 마실 듯한 외모와는 다르게 술을 잘 못 마셨다. 본인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 마시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런 주제에 제가 술을 먹고 온 다음 날이면 평생 해 본 적도 없을 꿀물을 타 주고 해장할 거리를 찾아 주곤 했다. 반사적으로 과거를 곱씹던 해영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단맛에 혀로 핥아 내렸다.

“해영아.”

“응?”

말없이 꿀물을 홀짝이던 해영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시선을 들었다. 따뜻하게 속을 데우는 온기에 노곤해졌던 정신이 금방 돌아왔다. 왜 불렀냐는 듯 자신을 멀거니 올려다보는 해영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선우는 곧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준비 다 하면 내려와. 아침 먹고 가.”

“…알았어.”

평소와 같이 웃어 주며 몸을 돌리는 그를 바라보던 해영이 다시 머그잔을 들었다. 방금 끓인 건지 아직 식지 않은 머그잔을 쥔 손이 따끈해졌다. 입으로 가져가 홀짝이자 단맛이 퍼지는 입 안도 금세 따끈해졌다.

해영은 컵에 담긴 것을 남김없이 들이켜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머그잔의 열기에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야 할 때였다.

빠르게 씻고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온 윤해영은 계단을 내려가려던 찰나 방 밖으로 나온 민호를 발견했다. 그 또한 씻고 나온 건지 얼굴이 제법 멀끔했다. 하지만 어제 저보다 더 많이 마신 탓인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표정을 보며 해영이 픽 실소를 흘렸다.

“해영, 너 괜찮아?”

“너는… 내 걱정 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제 옆으로 다가오는 민호를 보며 그가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쳤다. 해영은 그가 완전히 제 옆으로 다가와 선 후에야 천천히 계단의 층을 밟았다. 혹시 비틀거리기라도 할까 민호를 계단의 난간 쪽으로 붙인 채였다.

1층에 도착해 들어선 다이닝 룸에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재휘가 먼저 와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수프 그릇을 보며 옆에 서 있던 민호가 울상을 지었다.

“아침부터 웬 수프? 재휘 형 영국인이야?”

“내 거 아니고 너희 거라는데. 해장용으로.”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 입에 가져가던 재휘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 말에 옆에서 민호의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해장을 누가 수프로 해….”

안 그래? 자신을 보며 동조를 구하는 듯한 민호에게서 비스듬히 시선을 돌린 해영이 말없이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기 있었다. …해장을 수프로 하는 사람이.

“해영아, 여기.”

제가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자마자 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수프 그릇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가장자리에 흰 줄무늬가 들어간 초록색 그릇이 테이블에 단정하게 놓였다. 식기나 다른 것을 꺼내 오거나 준비를 도울 필요도 없었다. 이미 가지런하게 차려진 테이블을 잠시 바라보던 해영이 자리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고 희멀건 수프를 떠 올렸다. 입가에 가져가 후후 가볍게 불고 입에 넣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입 안에서 뭉글하게 퍼졌다. 해장으로 늘 먹었던 수프를 먹는데도 여전히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게 완벽했다.

‘울 것 같아….’

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간 얼굴에 해영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잠시 굳었다.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던 흰 손과 물기 어린 시선이 떠오른 것은 찰나였으나 그 장면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걸린 시간은 짧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묵묵히 입으로 음식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던 수프가 입 안에만 들어가면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온기뿐이었다.

윤해영은 어쩐지 울고 싶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그가 했던 울 것 같다는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가 자신의 습관을 잊지 않고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밀려오는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형도 느꼈던 걸까. 여태 지우지 못한 마음을 그때 이미 들켜 버렸던 건 아닐까.

가라앉는 기분을 모른 체하며 해영이 수프 그릇을 전부 비웠다. 갈대도 아니고 선우의 시선 하나 행동 하나에 흔들리는 제가 우스웠지만, 이전처럼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궁상을 떨고 있을 시간이 있으면 밥이나 먹는 게 나았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다 먹은 그릇을 들고 싱크대를 향해 걸어가는 해영의 뒤에서 민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 그냥 놔두고 출근해. 뒷정리는 내가 할게.”

“내가 먹은 것만 치우고 갈게. 별로 안 걸리니까.”

무슨 해장을 수프로 하냐며 우는소리를 할 땐 언제고, 식빵까지 찍어 가며 야무지게 먹고 있는 그를 보며 해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해영의 옆으로 익숙한 그림자가 늘어섰다. 식사를 마치고 다가온 선우를 향해 윤해영은 손을 내밀었다.

“형, 줘. 내가 할게.”

해영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그릇을 가져갔다. 제가 하겠다고 말하려던 선우가 이내 들고 있던 그릇까지 뺏겨 비어 버린 손바닥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동안 차가운 물이 쏟아져 해영의 손을 적셨다. 순식간에 제 그릇까지 가져가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닦고 있는 해영을 보며 차선우는 설핏 입꼬리를 늘렸다. 여전히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을 부리는 모습은 귀엽고 한편으로는 곤란했다.

“젖겠다.”

차선우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손을 뻗었다. 희고 기다란 손끝이 해영이 대충 걷어 올린 탓에 조금씩 물방울이 튀던 셔츠 소매를 가지런히 접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수도를 반대로 돌려 해영의 손 위로 쏟아지던 물줄기를 온수로 바꾸었다.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말없이 그릇을 닦던 해영이 조금 복잡한 얼굴로 선우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금세 반달 모양을 그리며 휘어졌다. 제가 하겠다고 했으니 가서 출근 준비를 하거나 다른 일을 하면 될 것을 아직도 옆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윤해영은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겨우 삼켜 냈다.

뒷정리를 끝내고 물기가 묻은 손을 털어 낸 그가 걷어붙였던 소매를 다시 내렸다.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걷어 올리곤 했던 평소와는 달리, 그가 걷어 준 셔츠 소매는 신경 써서 풀어내지 않으면 끌어 내릴 수 없을 정도로 공들여 접혀 있었다.

손끝에 힘을 주어 끌어 내리고 소매의 단추를 다시 채웠다. 세상에는 아주 잠시여도 오래 흔적을 남기는 것투성이다. 접혔던 자국이 옅게 남은 흰 와이셔츠를 내려다보던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식사를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하며 기다리던 재휘가 당연하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 셋이 나가는 게 당연해진 건지 저를 보며 눈짓하는 그에게 해영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형 저 기다렸어요?”

“응, 너랑 선우 씨.”

겉옷을 입던 선우가 제 이름이 들려오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재휘를 스쳐 지나간 시선이 해영에게 내려앉았다.

“갈까.”

눈길의 종착지에 선 해영은 대답 없이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먼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재휘와 선우도 선뜻 뒤따라 나섰다.

“어, 다들 출근하나 보네요.”

다이닝 룸을 나서던 와중 복도로 나온 세희와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편한 홈 웨어를 입고 있기는 했지만 이미 씻고 나온 것을 보니 그녀도 오늘 일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네, 출근합니다.”

해영이 제 뒤에서 흘러나온 대꾸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인사하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선우나 자신과는 다르게 재휘는 걸음도 멈춘 채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힐금거리던 해영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가려고요. 누나도 어디 나가요?”

“오늘 오전에 미팅 있어서. 잘 다녀와. 다들 출근 잘해요.”

“네, 누나도요. 이따 봐요.”

가볍게 손을 흔든 해영이 계단을 내려가는 선우의 뒤를 쫓았다. 재휘보다 먼저 차 앞으로 향한 탓에 선우가 올라탄 운전석 빼고는 모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짧은 고민 끝에 조수석에 올라탄 해영이 안전벨트를 맸다.

재휘까지 올라탄 후 출발한 차는 익숙하게 가까운 지하철역 입구 앞에 멈췄다. 안전벨트를 푸는 해영을 향해 차선우는 회사 앞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속닥이듯 말했고, 윤해영은 말없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 문을 열었다. 등 뒤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잘 다녀와, 해영아.”

차에서 내린 해영은 다정한 미소와 함께 건네진 인사에 잠시 입술을 물었다. 여전히 차 문을 닫지 못하고 선 해영에게 재휘의 시선이 닿았다.

결국, 문을 닫으며 그는 끝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한참 주저하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고민 끝에 나온 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했다.

“다녀올게.”

단조롭게 내뱉어진 인사에 선우의 눈매가 그림처럼 휘었다.

***

인턴 기간이 넉넉했던 탓에 무리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험의 연속이었던 로펌의 실무 실습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마지막 공통 과제가 팀으로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돌아서인지 인턴들 사이의 기류도 차츰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 기류의 중심에는 윤해영도 있었다.

평소 인사 정도만 하고 지냈던 다른 테이블의 인턴이 그에게 다가와 생글 웃으며 음료를 주고 가기도 했고, 점심시간 즈음 같이 식사를 하자는 메시지도 날아오기도 했다.

다성 인턴십 김채훈

해영씨 오늘 점심은 같이해요

다른 팀이랑 식사할 기회가 많이 없었잖아요~

다른 변호사 아래에서 실습을 받는 탓에 큰 교류가 없던 채훈의 연락에 해영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팀과의 교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맞은편의 다른 팀 인턴들과는 종종 식사를 함께했으니까.

채훈이 말하는 건 그런 점심 식사 자리가 아니었다. 아마 다른 인턴들이 저녁마다 회사 근처에서 모이는 자리를 말하는 거겠지. 해영은 촬영을 하고 있는 탓에 인턴들끼리 저녁 식사를 하는 건 알지만, 꼬박꼬박 참석하진 못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던 그가 옆에 앉은 여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채훈씨가 점심 같이 먹자는데 괜찮아요?

여은씨 불편하면 그냥 우리끼리 먹어요.

정여은

으으음

전 상관없어요!

주로 여은과 함께 점심을 먹었던지라 그녀가 불편하면 구태여 다른 이들과의 자리에 나갈 마음은 없었다. 처음에 낯을 가리는 편이라고 했던 기억이 있어서 물어봤으나 여은은 흔쾌히 수락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다른 인턴들과 함께 식사한 해영은 오후 일정을 여유롭게 마무리했다.

겨울은 낮이 짧은 탓에 그리 늦지 않은 퇴근길이 제법 어두웠다. 특별할 것 없었기에 평온했던 하루였으나 그래도 낮 대부분을 앉아 있던 탓에 몸이 뻐근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며 가볍게 목을 기울이며 스트레칭하고 있을 때였다.

“어?”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온 이는 프로그램의 여자 출연자인 다인이었다. 등 뒤에 검은색 기타 케이스를 지고 있는 것을 보니 연습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며칠 전, 해영은 동갑내기인 그녀가 민호와 터놓고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며 말을 놓기로 했다. 그 이후로 별달리 대화를 많이 나눠 본 적은 없지만, 나이가 같아서인지 부쩍 친근하게 느껴졌다.

“다인아.”

해영이 인사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지금 퇴근하는 거야?”

“응. 너는?”

“나도 오늘 공연 연습 있어서….”

나란히 걸어서 동네를 올라가던 와중 다인이 뭔가를 발견한 듯 멈춰 섰다. 그 탓에 함께 걸음을 멈춘 해영이 그녀가 바라보고 선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시선의 끝은 골목길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카페를 향하고 있었다.

밖에도 흰 칠이 되어 있어 제법 눈에 띄는 아기자기한 카페가 다인의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쉽게 눈을 떼지 못하던 그녀가 이내 미련이 남는다는 듯 해영을 바라보았다.

“저기 꽤 유명한데 혹시 알아? 인스타에도 자주 올라오는데. 커피가 완전 맛있대. 가 보고 싶었는데 내가 올 때는 늘 닫았더라고.”

드물게 제 앞에서 긴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정말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해영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듯 가볍게 물었다.

“잠깐 들렀다 갈까?”

뜻밖의 제안에 휘둥그레 눈을 뜬 다인이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되물었다.

“그래도 돼?”

안 될 거야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퇴근도 일찍 한 편이었고, 집 가는 길에 잠시 카페에 들르는 것쯤은 힘든 일도 아니었으니까.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이상했다.

해영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평소 조용하던 다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먼저 앞장서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이 퍽 경쾌했다. 그 뒤를 쫓아 걷던 해영이 툭 꺼내듯 말했다. 다인아, 너 걷는 거 완전 음악 하는 사람 같아. 리듬감 있어. 그 장난스러운 말에 앞서 걸어가 카페 문을 잡은 다인이 휙 뒤를 돌며 밉지 않게 눈을 찌푸렸다.

“빨리 와.”

재촉하고는 문을 열고 자신을 기다리는 그녀를 보며 해영이 걸음을 빨리했다. 다가가 문고리를 대신 잡자 문을 열고 있던 손을 떼어 낸 다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오기 전 겉으로 봤던 아기자기한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다양한 빵들로 가득 찬 카페였다.

크진 않지만 베이커리 카페여서인지 저녁 시간대인데도 빵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옅은 주황빛 조명 아래 전시된 빵들 사이에서 설레 하는 다인의 얼굴을 보며 해영이 집게와 나무로 된 트레이를 집었다. 커피를 마시자더니 아무래도 빵이 목적이었던 것 같다.

“다 먹고 싶다, 어떡하지?”

“다 골라. 다른 사람들이랑 나눠 먹으면 되지.”

“너… 혹시 천재야?”

별거 아닌 대답에 감동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다인을 보며 해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큭큭 웃음을 흘렸다. 함께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던 탓에 몰랐는데, 그녀는 빵에 무척이나 진심인 듯했다.

다인이 먹고 싶은 것을 손짓할 때마다 해영은 집게로 하나씩 집어 차곡차곡 트레이에 쌓았다. 정신없이 빵을 고르던 다인은 이내 너무 제가 먹고 싶은 것만 담고 있다 생각했는지 아차 싶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해영아, 너는 뭐 먹고 싶어?”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며 전시된 빵들을 구경하던 해영이 불현듯 들려온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다지 빵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던 해영은 뭘 먹고 싶냐는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식사 대용으로 간단하게 때우기 위해 먹을 때가 있긴 하지만, 주변에 있는 빵들은 그런 종류는 아닌 것 같았다.

해영은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다며 고개를 내젓는 대신 빵들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다른 이들이 먹을 걸 고를 생각이었다.

선우 형은 뭐 좋아하려나… 형 집에 있으려나? 형은 단것도 잘 먹으니까 크림 올라간 거 사 갈까.

“이거.”

그가 블루베리가 올라간 것을 집게로 들어 올렸다. 해영이 고른 것을 확인한 그녀가 점원에게 그것까지 함께 포장을 요청했다. 곧 해영은 점원이 다시 건네주는 종이봉투를 손에 들고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온 해영이 다인이 나올 때까지 문을 잡고 기다리며 찬 바람이 스친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주황빛 조명 아래서 온기가 감도는 카페 안에 있다 나와서인지 밖이 조금 더 쌀쌀하게 느껴졌다.

“내가 들게!”

“됐어, 너 지금 너만 한 가방도 메고 있잖아.”

나오자마자 자신이 들고 있는 종이봉투로 손을 뻗는 다인에게 해영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잠시 안절부절못하던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등에 지고 있던 검은 기타 가방을 고쳐 멨다.

해는 이미 저물었지만, 곳곳에 세워진 가로등 덕에 사위는 어둡지 않았다. 다만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동안 거주하게 된 주택은 동네 안에서도 제법 올라가야 했기에 둘은 나란히 집까지 걸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카페를 나오자 느껴진 시선은 아마 카메라일 것이다. 괜히 머쓱해져 말을 아꼈던 해영이 다시 조용해진 다인을 힐긋 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둘이 대화하는 거 처음이네.”

“어, 그러게…!”

원체 조용한 성격인 건지 아니면 낯을 가리는 건지 그녀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말을 붙이면 곧잘 대답해 주긴 했다. 지금처럼.

“네가 맨날 아침 일찍 나가니까 마주칠 시간이 없잖아. 밤에 다 같이 술 마시고 대화할 때 빼면.”

그사이 자신이 조금 편해진 건지, 다인은 한결 가벼운 어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해영은 뒤이어 들려온 이름에 움찔 고개를 들었다.

“선우 오빠도 그렇고.”

그의 이름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등장했다. 대화의 맥락과 어울리지 않게 튀어나온 이름에 해영은 손을 들어 뻣뻣해진 목을 쓸어내렸다. 차가운 물이라도 뒤집어쓴 듯한 표정을 갈무리해야 했다.

“아침이라도 같이 먹으면 좀 친해질 수 있을 텐데, 둘 다 너무 일찍 나가.”

“아, 그러게.”

다인의 말에 해영이 웃으며 동조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이후에 들어오다 보니, 아직도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쉬이 동의한 그가 한숨을 삼키며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남자 출연자들과는 교류가 그나마 있는 편인데, 그에 비해 여자 출연자들과는 교류가 적었다. 그건 선우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해 놓고 자신은 내내 선우만을 신경 쓰고 있었고, 그는 줄곧 제게 시선을 주었음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선우가 아닌 다른 이에게 신경을 쓰고 싶다는 건 아니었지만.

아, 신경이 쓰이는 상대라면 하나 더 있기는 했다. 불현듯 하진의 얼굴을 떠올린 윤해영은 저도 모르게 내심 불안해졌다. 그녀도 제게 많은 것을 바라고 출연을 제안한 건 아니겠지만….

‘이래도 되나….’

연애하려고 나오는 사람 없으니 꼭 연애는 안 해도 된다고 했던 그녀의 말만이 지금의 해영에게는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녀가 당부한 것은 전부 지키고 있다는 구실은 동아줄 같았다.

“아침에 어떻게 그렇게 잘 일어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에게 다인이 신기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 물음에 해영이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나도 원래는 아침에 잘 못 일어나. 누가 깨워 줘야 일어나고 그랬었어.”

“헐, 나도! 사람이 깨워 주지 않으면 알람도 잘 못 듣고 자고 그래.”

그거 알지. 해영이 공감한다는 듯 씩 웃자 다인은 한결 더 풀어진 얼굴을 했다. 자신을 전보다 부쩍 편해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 차이를 읽어 낸 해영도 보다 가볍게 말을 걸었다.

“지금은 사람 많으니까 나가면서 깨워 달라고 말해 봐.”

그 말에 좋은 생각이라는 듯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럼 너 내일 아침에 나갈 때 깨워 줄 수 있어?”

별 고민 없이 흘러나온 다인의 물음에 해영이 멈칫했다.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자신을 애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해영을 보며 고개를 기울이던 다인은 곧 제가 생각한 말을 떠올리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당황했는지 양손까지 가슴께로 치켜든 그녀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좀 그런가? 내 방에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꼭 너한테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근데 막 내가 너한테 여지를 두고 한 말은 아닌데. 무슨 말인지 알지?”

허둥지둥 흘러나온 말에는 제대로 완성된 문장이 없었다. 횡설수설한 내용을 가만히 듣던 해영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다인아.”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알았어.”

여전히 목소리에 배어 있는 웃음기에 다인이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해영은 알 듯 말 듯 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 또한 깨워 달라는 다인의 말에 다른 의도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친근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거란 것도 알았다. 다인이 제 행동으로 오해하지는 않겠지만….

보는 사람이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이가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해영은 선우를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헤어진 이후에도 선우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여전히 유효했다.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는데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우스웠고 조금쯤은 씁쓸했다.

침묵 속에서 걷던 해영이 흐려지는 눈앞을 무시하며 유연하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나 네 노래 들어 봤어.”

“으악. 진짜? 부끄럽다….”

“왜? 좋던데. 유튜브에서 공연하는 것도 봤어.”

“미치겠다.”

다인이 못 들어 주겠다는 듯 결국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어둠 속에서도 새빨개진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 해영이 조그맣게 키득거렸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제 노래를 좋다고 해 준 것이 영 싫지는 않은 듯 다인은 손을 아래로 내려 눈을 빼꼼 드러냈다. 눈동자에 어린 분명한 기대감과 함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가 제일 노래 잘하는 거 같아?”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해영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음…. 열심히 고민하는 듯 느릿하게 걸음까지 멈춰 가며 시간을 끌던 그가 툭 말을 꺼냈다.

“드럼 치시는 분이 멋있던데.”

“아, 말고.”

기대하던 답이 아니었는지 슬쩍 미간을 찌푸린 다인이 가차 없이 해영의 대답에 빨간 빗금을 그었다. 오답으로 표시된 제 답안을 다시 손에 쥔 그는 전보다 한층 더 심사숙고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래를 내려다보는 해영의 눈가에 장난기가 돌았다.

“키보드 치시던 분?”

“야!”

또다시 기대를 배신당한 다인이 반사적으로 언성을 높여 해영을 불렀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던 그녀가 이내 비죽 입을 내밀자 해영이 표정에서 진지한 기색을 지워 내고 가볍게 웃었다.

“장난이야, 베이스 치는 사람이 제일 잘하더라고.”

장난이라고 달래면서도 목소리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다인이 어깨에 걸린 베이스 기타 가방끈을 붙잡고 흘깃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해영은 다인이 정말로 화가 나진 않았단 걸 알았다.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물었다.

“공연 준비하다가 온 거라고 했지?”

“응. 근데… 우리 밴드가 그렇게 알려진 밴드가 아니라, 사실 공연이라고 해도 규모가 큰 건 아니고. 그냥 라이브 카페 빌려서 소소하게 하는 거야.”

그래? 별다른 덧붙임 없는 담백한 대꾸에 다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말이 없어진 그녀를 해영은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우리 원래 올해까지만 해 보려고 했거든. 그래서 정해진 거로는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야.”

문득 튀어나온 말이 고요한 정적을 부쉈다. 수면에 커다란 파문을 야기하기 충분한 무게의 말이었으므로 해영은 곧바로 입을 여는 대신 잠시 입을 닫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대꾸할 말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중간에 멈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지 않았다. 차마 포기할 수 없는 마음과 계속해 나가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 사이에서 몇 번이고 고민하고 도망쳤던 경험은 저 또한 있었다. 위로의 말을 골라내지 못한 그가 결국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공연하면 꼭 보러 갈게.”

“진짜? 약속했다?”

“응.”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해영을 보며 다인이 조금 들뜬 기색으로 허리를 세웠다. 이내 한결 경쾌해진 다인의 걸음걸이를 따라 해영도 보폭을 늘려 걸음 속도를 맞췄다.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도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집에 다 와서 문고리를 잡은 그가 슬쩍 다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계속하면 좋겠다. 네 노래 정말 좋던데.”

“…….”

“들어가자, 다인아.”

도어 록을 눌러 내내 닫혀 있던 문을 연 해영이 먼저 들어가라는 듯 섰다. 잠시 멀거니 서 있던 다인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녀를 따라 들어선 해영은 복도를 가로질러 2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오르자 당연하다는 듯 공용 공간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또 일찍 온 이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가겠다며 1층에 있는 방으로 향했던 다인 대신 해영이 공용 공간으로 들어섰다.

“해영 왔어?”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세희에게 그 또한 눈짓을 통해 인사했다. 공용 공간에는 이미 그녀뿐만 아니라 재휘와 현아, 소윤과 민호까지 있었다. 자신을 반기는 이들 앞으로 다가가는 해영에게 재휘가 물었다.

“밥은?”

“전 먹었어요. 다들 저녁 이미 먹었어요? 이거 사 왔는데.”

테이블 위에 흰 박스를 내려 두자 테이블에 가장 가까이 있던 민호가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팔을 뻗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개의 빵에 다른 이들도 모두 관심을 가졌다.

모양도 예쁘고 맛있을 것 같다며 감탄하는 이들 사이로 민호가 물어왔다.

“지금 먹어도 돼?”

“잠시만. 다인이가 골라온 거라서, 다인이 오면 먹으면 좋을 거 같은데.”

그 말에 쉬이 수긍한 이들이 박스 안에 들어 있던 빵칼을 꺼내며 꼴깍꼴깍 침을 삼켰다. 저녁을 먹었을 텐데도 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을 보니 별수 없이 입꼬리가 실없이 올라갔다. 해영이 그들을 구경하는 와중 드디어 2층으로 올라온 다인이 민호의 시야에 걸렸다.

그가 박스 안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먹어도 돼, 다인?”

“어! 그거 해영이가 고른 건데?”

다인의 대답에 민호의 고개가 빠르게 휙 돌려졌다.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해영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민호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 그건… 선우 형 거.”

다인의 뒤로 따라 들어오던 선우가 제 이름이 들려오자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나서야 뒤늦게 눈치를 보며 눈을 굴린 해영이 입가에 어설픈 미소를 걸었다. 그러자 상대도 화답하듯 눈을 접어 웃어 주었다.

“다녀왔어?”

다가온 그가 해영의 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물었다.

씻고 나왔는지 코끝을 간질이는 좋은 향기에 어깨가 설핏 굳었다. 해영은 내색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응, 다녀왔어. 평범하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끝이 약간 흐려졌다. 움찔한 그가 슬쩍 시선을 올려 선우를 바라보았다.

차선우는 여전히 부드러운 낯을 띠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마음을 놓던 해영이 옆에서 들려온 음성에 휙 고개를 돌렸다.

“이거 형 거래요.”

…시발.

튀어 나갈 뻔한 비속어를 꾹 삼키며 입을 다문 해영이 조금 당황한 낯으로 민호를 주시했다. 잼이 발린 무화과스콘을 집어 먹던 그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생각 없는 얼굴로 눈을 깜박여 왔다. 그 무구한 표정에 할 말을 잃은 해영에게 선우가 얼핏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물어 왔다.

“네가 고른 거야?”

민호가 손짓한 빵을 확인해 놓고 그가 아닌 제게 되묻는 것은 어째서인지. 자신을 생각해서 골라 온 것이리라 확신하고 있는 듯한 표정에 왜인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부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가 무엇을 좋아할지 고민하며 골라 온 건 맞았으니까.

거짓을 말할 수도, 그렇다고 쉬이 긍정할 수도 없어 입을 열지 못하는 자신을 안다는 듯 차선우는 얕게 웃었다. 말하지 않더라도 소리 없이 휘어지는 눈꼬리에 해영은 그가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았음을 깨달았다. 선우는 손을 뻗어 제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듯 쓰다듬은 뒤 옆의 의자에 앉았다.

“…….”

형 여기요. 민호의 뒤이은 목소리와 다른 출연자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말소리가 들려왔으나 어쩐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다소 굳은 얼굴의 해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들어 선우가 헤집고 간 머리를 약하게 털었다.

다른 사람들의 앞이었고 눈에 바로 들어오지 않을 뿐 카메라도 있을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우가 머리를 만지고 지나갔다고 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앞머리의 끝을 만지작거리며 시큰둥한 표정을 가장했지만 사실 해영은 제가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아 씨…. 심장 터질 것 같아.’

결국, 씻고 나오겠다며 몸을 돌려 방으로 향한 그는 그대로 드레스 룸으로 직행했다. 겉옷도 벗지 않은 채 욕실로 향하는 도중 협탁 위에 놓인 거울 앞에 선 해영이 제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거울 속 남자의 얼굴이 점차 미묘해졌다. 슬슬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낯을 바라보며 해영은 협탁을 붙잡은 채로 녹아내리듯 주저앉았다. 쿵. 매끄러운 나무 서랍장에 부딪히듯 박은 이마에서는 아픔보단 차가움이 먼저 느껴졌다.

“…돌겠네.”

짓씹던 입술 틈으로 감정이 억눌려 엉망이 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길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차선우는 걸핏하면 넘어와 달라느니, 노력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꺼냈지만, 기실 그에게 있어 노력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았다. 노력해야 하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버리지 못한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며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겠다고 밤새 다짐해도 그의 앞에서는 번번이 무력해지고야 마니까.

‘알아. 너 아직 나 좋아하잖아.’

이곳에 처음 들어온 날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고장 난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처럼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자신은 여전히 거짓으로라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라도 그를 밀어 내지 못하는 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에 불과한지 해영은 알고 싶지 않았다.

한심하게 다물려 있던 입이 야트막하게 열리고 곧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 너무 좋아해. 형, 선우 형, 차선우…. 아직도 너무 좋아해서 비참할 정도야. 끝내 말하지 못할 마음이 숨결에 섞여 허공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

새로운 집에서 눈을 뜨고, 다신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선우와 함께하는 일상이 어느덧 익숙해진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맡에 앉아 눈을 비비적거리던 해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침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러곤 비어 있는 침대를 멀뚱히 바라보던 그가 곧 곤란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치고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 주변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깨어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것 같은 적막한 집에는 찬 기운까지 맴도는 것 같았다. 1층으로 내려온 해영은 다이닝 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 재휘 형?”

“안녕, 해영.”

내려와 있는 사람은 재휘뿐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우유와 토스트를 먹던 그가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는 자신을 발견하고 짧은 인사로 반겼다. 재휘를 빼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괜히 부엌을 두리번거리던 해영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선우 씨는 새벽 일찍 나가는 거 같던데.”

누구를 찾는지 알고 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낸 재휘가 유리잔을 들어 우유를 마셨다. 그럴 리 없는데도 뭔가를 들킨 듯한 느낌에 잠시 얼어 있던 해영이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왜인지 밥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해영은 밥을 차리는 대신 재휘가 꺼내 놓은 식빵 봉투를 집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비닐 안에서 식빵 두 개를 꺼내고 버터를 녹인 프라이팬에 가지런히 집어넣었다. 빵이 구워지길 기다리며 멍하니 부엌의 붙박이장에 기대어 서 있던 때였다.

말 없는 해영을 향해 재휘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선우 씨 먼저 나가서 아쉽지.”

“네?”

“아침에 선우 씨가 태워다 주는 거 편한데.”

“…아.”

그런 말이었어?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당황해 몸을 바로 세웠던 해영이 맥이 풀린 듯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하여간에 재휘 형은 이상한 구석에서 핀트가 어긋나는 말을 꺼내서 사람을 놀라게 하곤 한다. 얕은 한숨을 삼킨 그가 이내 능청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우리만 편하고 선우 형은 귀찮았던 거 아니에요?”

가벼운 장난이었으나 재휘는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눈을 껌벅였다.

“그럴 리가. 처음에 먼저 태워 주겠다고 했는데?”

“…….”

“나한테 먼저 같이 가자고 했어. 또 출근길 겹치는 사람 있으면 물어보고 같이 가자고.”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말에 해영은 쉬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가 그러했듯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유리창 밖으로 간간이 내리는 흰 솜털 같은 싸라기눈조차 허공에 박제된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덩어리진 숨이 늑골에 걸리고서야 해영은 멈춰 있던 게 세상이 아닌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뭉쳐진 숨을 내쉰 그가 말없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불규칙한 숨을 가다듬는 방법은 이제 익숙했다. 선우와 헤어진 후부터 숨쉬기 힘들어지는 순간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곤 했으니까.

멍하니 빼놓고 있던 정신을 차린 건 재휘가 느릿하게 한마디를 내뱉고 난 뒤였다.

“…탄내 나는데.”

그 말에 급하게 뒤돌아선 해영이 약하게 켜 뒀던 인덕션의 전원 버튼을 눌러 껐다. 약불이었는데도 한참 굳어 있던 탓인지 뒤집어 본 식빵은 새까맣게 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고작 빵 하나 태웠을 뿐인데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신 차려, 윤해영. 우울함을 떨쳐 내기 위해 머리를 내저은 해영이 재휘를 향해 식빵의 탄 부분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형, 이거 봐요. 석탄을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게, 연금술사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답해 주는 듯하던 그는 멍하던 기색을 지우고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어, 요리사에서 연금술사로 전직하는 거 좀 재밌는 스토리 같다.

문득 말하다 말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재휘를 뒤로한 채 해영은 다 타 버린 식빵을 쓰레기통에 망설임 없이 집어넣었다. 하루 정도는 아침을 거르고 출근해도 괜찮겠지. 어쩐지 식욕이 돌지 않아 그는 끝내 빈속으로 집을 나섰다.

문제가 있다면 퇴근할 때까지도 뭔가가 잘못된 듯한 느낌이 계속해서 어깨를 짓눌렀다는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아침의 출근길에 느낀 공허함의 연장선에 있음을 해영은 모르지 않았다.

합숙을 시작한 지 이제 2주 차에 접어들었으니 선우와 다시 만나고 함께 출근한 것도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사이에 벌써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제 형 없는 게 더 이상하네….’

그 사실이 멋쩍어 해영은 집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괜스레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선우가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날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던 탓이다. 그와 함께 지내는 게 불편하다는 것마저 겨우 다잡은 마음이 또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차고 넘치는 증거에 해영은 제 마음에 대한 판결이 어떻게 날지는 두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한참 전에 난 결론을 뒤집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적은 일이다. 그렇다면? 그럼 자신은 어떡해야 하지?

어수선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한 해영이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심호흡을 했다. 얼굴에 그려져 있던 심란한 기색을 지워 내고 나서야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밟은 해영은 2층으로 올라와 다른 곳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방으로 향했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은 어두웠다.

“어….”

예기치 못한 풍경에 해영의 입에서 당황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이 있다고 일찍 나가는 듯하더니 퇴근도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방의 조명을 켠 해영이 서늘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가 잠시 빈방을 돌아보았다. 공백이 지나치게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방에 침대가 두 개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한 명뿐이기는 해도.

텅 빈 공간을 등진 해영이 방을 나와 공용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누구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었고 오늘도 여럿이 모여 있었다. 자신을 발견하고 반가워하는 이들에게 설핏 웃으며 인사한 그는 곧 민호의 옆에 앉았다.

“왔어? 오늘 퇴근 빠른데?”

“어, 할 게 없어서. 선우 형 아직 안 들어온 거지?”

해영은 제게 말을 거는 민호에게 되물으며 그가 들고 있던 쿠션을 가져갔다. 예상하지 못한 나머지 그대로 안고 있던 쿠션을 빼앗긴 그가 황망한 표정으로 해영을 바라보았다.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는 민호를 보며 윤해영은 웃음을 삼키지 못하고 키득키득 입 밖으로 흘렸다.

“아마도… 아니 근데 네 뒤에 쿠션 있는데 왜 내 거 가져가?”

“네 거가 좋아.”

“혹시 이것도 고소돼?”

“아무래도 어렵지?”

해영이 키득키득 웃는 낯으로 경쾌하게 대꾸했다. 장난기가 가득한 대답을 들은 민호는 얄밉다는 듯 우는 얼굴을 했으나, 피해자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 소윤이 짧은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 선우 오빠 오늘 출장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오늘 안 들어올걸?”

곰곰이 기억을 되짚는 듯 눈썹을 모은 채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움찔한 사람은 둘이었다.

그 주인공인 민호와 해영은 각자의 이유로 당황을 삼키는 중이었다. 그래도 해영은 민호보다 표정 관리에 능숙한 편이었는데, 제 기분에 솔직한 민호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얼굴에 초조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민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제 기분을 눈에 띄게 티 내는 게 좋지 않은 버릇일진 몰라도, 그가 소윤을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이 아주 조금쯤 부럽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게 유쾌할 리 없지 않나. 더군다나 제가 보기에 민호는 소윤과 첫 데이트를 했던 선우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 상태였다. 소윤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민호가 불안함을 느끼는 것 자체는 합당했다. 불합리한 이유로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사귈 때는 물론이고 헤어지고 나서도 차선우의 소식을 제게 전달해 주는 이는 없었다. 늘 그에게서 직접 소식을 듣거나 혹 그럴 필요도 없이 늘 함께였으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우의 소식을 듣는 것은 해영에게 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에 윤해영은 왜인지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불쾌감이라고 하기에는 미약하고, 신기함이라고 하기에는 묵직했다. 그 감정은 낯설었고….

‘정신 못 차리지, 윤해영.’

헤어진 연인을 상대로 느끼기엔 지나치게 치졸하고 우스운 구석이 있었다. 해영이 제 머리를 빗어 내리듯 헤집으며 당황스러운 기분을 털어 냈다. 그는 곧 웃는 낯으로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의 틈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현아가 들고 있던 편지 봉투를 내려놓은 것은 그때였다.

“그럼 이건 우리끼리 열어 봐야겠네.”

여자 출연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설레하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남자 출연자들은 뒤늦게 그녀가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편지 봉투에 시선을 주었다. 해영 또한 연분홍색의 봉투를 내려다보며 턱을 괴었다. 들어 있을 만한 내용이야 뻔했다. 데이트 장소나 아니면 무슨 미션이라도 적혀 있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편지 봉투 안에는 네 장의 엽서와 함께 짧은 카드가 들어 있었다.

“엽서를 하나씩 나눠 가지세요. 같은 엽서를 고른 사람과 두 번째 데이트를 하게 됩니다….”

세희가 동봉되어 있던 카드를 읽어 내린 뒤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전부 다른 그림이 그려진 엽서가 테이블에 펼쳐졌고, 출연자들은 그 네 장의 카드를 바라보다 이내 서로를 알게 모르게 눈짓했다. 그 묘한 기류를 깨트린 것은 쾌활한 목소리였다.

“아, 이거 우리 방에도 있던데. 남녀 따로 골라야 하는 건가 봐.”

가만히 바라보던 민호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당장 방으로 달려가 그걸 가지고 올 듯한 모양새에 해영이 헛웃음을 흘리며 그를 붙잡았다.

“같이 가.”

“왜?”

“어차피 따로 골라야 하는 거 같은데 방에 같이 가서 고르자.”

“오, 그래!”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민호는 금방 고개를 끄덕여 왔다. 해영의 말에 앉아 있던 재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엽서를 고르기 위해 방으로 향하는 남자들을 바라보던 소윤이 잊을 뻔했다는 듯 물어왔다.

“그럼 선우 오빠 건 어떡해?”

“…남는 게 선우 형 거 되겠지. 아니면 해영이가 고르거나.”

제법 들떠서 방으로 들어가려던 민호가 소윤의 물음에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려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어색한 표정에서 채 지워 내지 못한 속상함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선우를 언급한 것만으로도 울적해지는 모양이었다.

민호의 옆에서 걷던 해영이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틀어쥐었다. 그에 소윤을 주시하던 민호의 얼굴이 해영에게로 향했다. 축 처진 눈을 마주한 해영이 설핏 웃으며 방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만 들어가자는 몸짓이었다.

제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는 해영의 뒤를 쫓으며 민호가 한숨을 삼켰다. 재휘가 그런 민호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손을 들어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손짓에 감동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던 민호가 멍한 얼굴로 하품을 하고 있는 재휘를 발견하곤 다시 한숨을 삼켰다.

“이거 맞지.”

먼저 방에 들어와 있던 해영이 뒤따라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테이블에 올려진 흰 편지 봉투를 집었다. 현아가 들고 있던 편지 봉투와 같은 디자인이었으니 아마 맞겠지만, 확인차 물어본 해영은 재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오자 그에게로 봉투를 내밀었다.

“순서는 어떻게 정하지?”

“형이랑 민호가 먼저 골라도 돼요.”

봉투 안에서 방금 보고 온 것과 같은 엽서를 꺼내 늘어놓는 재휘를 향해 해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해영….”

굳이 먼저 선택할 이유가 없어서 선택권을 넘긴 것뿐이었는데, 그게 무슨 대단한 양보라도 된다는 것처럼 민호는 금세 촉촉이 젖은 음성으로 자신을 불러 왔다. 하여간에 감수성 풍부하다니까…. 해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엽서 네 장을 테이블 위로 늘어놓고 꽤 오래 고민하던 둘은 이내 각각 한 장씩을 가져갔다. 고민이 긴 것을 보면 두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상대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해영이 멀거니 남은 엽서 두 장을 바라보며 두 사람이 잘 뽑았어야 할 텐데, 하는 한가한 생각을 할 때였다.

“네가 고르고 남은 거 선우 형 거로 하면 되겠다.”

민호의 말에 뒤늦게 제 차례가 왔음을 깨달은 그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세웠다. 남은 건 두 장의 엽서였다. 제가 한 장을 고르고 나면 남은 건 선우의 몫이 될 테다. 의도치 않게 그의 데이트 상대 결정권을 쥔 해영의 목에 빳빳한 긴장이 어렸다.

시원시원하던 눈매가 이내 곤혹스러움으로 얼룩져 날카로워졌다. 오래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어쩐지 쉽게 손이 나가지 않아 해영은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은 한숨을 숨겼다.

‘아… 왜 이렇게 싫지.’

그와 함께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이상 서로 다른 상대와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게다가 윤해영은 이미 한 번의 데이트를 경험한 참이다. 질투조차 늦은 때가 아닌가. 이제 와 제가 그의 데이트 상대를 고른다고 생각하니 슬쩍 거부감이 들고 속이 쓰려 온다는 사실이 우스울 정도였다.

“…나는 그럼 이거.”

윤해영은 저도 모르게 모으고 있던 미간을 풀며 손을 뻗었다. 알알이 조명이 달린 아기자기한 그림의 엽서를 집어 든 해영을 보며 민호가 마지막 남은 엽서를 들어 올렸다.

파란 하늘이 펼쳐진 엽서가 해영에게로 들이밀렸다.

“그럼 이게 선우 형 거네. 네가 전해 줄 거지?”

“…….”

그걸 바로 받지 못하고 잠시 내려다보던 해영이 시선을 내리깐 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방을 쓰고 있으니 제가 전해 주는 게 맞았다.

민호에게 전해 받은 엽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을 넣은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앞에서도 띠링, 거리는 알림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다 같은 문자를 받은 듯했다.

해영은 확인하지 않아도 그 문자의 내용을 알 것만 같았다.

오늘 하루 마음이 향한 출연자의 이름과 메시지를 적어 주세요. 메시지는 상대에게 익명으로 전해집니다.

역시나. 이제는 익숙해진 메시지를 대충 읽어 내린 해영이 고개를 들고 재휘와 민호에게 짧게 목 인사를 했다. 문자를 보고 있던 이들이 나가는 해영을 배웅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방을 나선 그는 어렵지 않게 문자를 보낸 뒤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찌뿌둥한 목을 주무르며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가로지르던 와중, 해영은 기다렸다는 듯 서 있는 세희와 마주쳤다. 저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는 해영을 보며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너 무슨 엽서 골랐어?”

다른 건 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어 오는 세희의 당당한 태도에 해영이 반사적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제 초반에 잡았던 청순한 이미지는 어느 정도 던져 버린 것 같았다. 꾸밈없는 태도로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희의 모습은 훨씬 편해 보였다. 해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가 들고 있던 자신의 엽서를 꺼내 보여 주자, 세희가 살짝 인상을 썼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도 자신이 갖고 있던 엽서를 보여 주었다.

“어, 나는 이건데.”

“아….”

“엇갈렸네.”

그녀가 들고 있는 엽서는 재휘가 고른 것과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출연자 중에서 가장 데이트할 때 마음이 편한 세희와 같은 엽서를 고르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재휘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으니 어쩌면 더 잘된 일이었다.

하긴, 이곳에서 두 번째 데이트를 마냥 기대하지 못하고 있는 건 자신뿐일 것이다. 바람 빠지듯 허탈하게 웃은 해영이 이내 들어가 보라며 계단 앞까지 세희를 배웅했다. 그녀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온 그가 느른하게 선우의 침대 앞으로 향했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침대 앞에 선 해영이 들고 있던 엽서로 시선을 내렸다. 울창한 숲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 그림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던 해영이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 두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던 그는 주저하다 결국 다시 침대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았다.

해영은 침대에 턱을 괸 채 팔을 뻗어 제가 내려놓은 엽서를 집어 올렸다. 맥없는 손끝에 걸린 종이가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졌다. 시선은 쉽사리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오랫동안 엽서 위에 머물렀다.

침묵이 가득하던 공간에 다시금 진동 소리가 울렸다. 침대 위에 잠시 올려 두었던 핸드폰 화면이 켜지며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냈다.

이번에 같이 데이트 못해서 아쉽네ㅎㅎㅎ 그래도 패션코치 필요하면 나 찾아와

공연 보러오기로 약속한거 꼭 지켜!

화면에는 메시지가 떠올라 조명처럼 반짝였지만, 해영에게는 그것을 오래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엽서를 잡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리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두웠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추위를 느끼며 해영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도망치기 위해 눈을 감았다.

***

선우가 머니캐처라면 해영이는

윤해영은 입주자들 카운셀러로 들어온듯

민호랑 밖에서 만나서 저녁먹는 장면에서 민호 징징거림 안받아주는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잘 달래줌ㅋㅋㅋㅋㅋ 그리고 다인이 말해뭐해 퇴근길 장면 에바임.. 마지막 공연이라니까 보러간다고 말하고.. 집 들어가기 직전에 네 노래 좋은데 계속하면 좋겠다 이러는거...야이건 반칙이지...

(댓글 28개)

진짜 다 모르겟고 문앞에서 계속하면 좋겠다 이러는거 보고 해영다인 주식삼 이건 된다

└ㄹㅇ설렘 ㅠㅠ 솔직히 럽라에서 해영이 매력 압살이야

└그건 아니지 분위기까지 따지면 선우 이기는 출연자 없음

└ㅋㅋ으휴...지랄좀 작작... 방송만 봐놓고 분위기는 뭔 망상ㅋㅋㅋㅋ

└??방송만 보고 말하지 그럼 뭘보고 말하는데? 첫날에 여출 대부분 다 선우한테 문자한게 팩트고 출연자중 젤 귀티나는것도 사실인데?

└출연자중에서 정보공개 제일 안된거 누구지ㅋㅋㅋㅋㅋㅋ가진게 있으면 그렇게 분량 쥐뿔도 없을리 없죠?ㅋㅋㅋㅋㅋㅋ 논리 존나 어이없네

└싸우지마... 이건 그저 방송일 뿐이야....

근데 뭐든 둘 중하나랑 사겨보고싶다

민호 귀여움 해영이랑 동갑케미 존좋ㅜㅋㅋㅋㅋㅋ

└ㅁㅈ 얘네둘 성격 진짜 좋은거같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상 윤해영의 무료상담소 아니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영 다인 진짜 잘어울리긴 한다...

동갑이라 그런가?? 퇴근길 티키타카 너무 좋아ㅋㅋ 해영이 다인이가 가고싶어하니까 같이 카페 가주는 것도 설레고

다인이가 밴드에서 누가 제일 잘하냐고 물어보는데 윤해영 괜히 다인이 말 안하고 다른 사람 말하면서 장난치는 것도 졸귀ㅜㅜ 다인이도 장난 다 잘받아줌

해영이 계속 다인이 놀리면서 찐으로 귀여워하는거 같던데ㅋㅋㅋ계속 빵터지고ㅋㅋㅋ

만약 첫데이트가 세희가 아니라 다인이었다면 이 둘한테는 어쩌면 타이밍이었을 수도 있을 거같음... 다인이는 이날 해영이한테 문자보내는데 해영이는 한결같이 세희한테 문자보내서 내가 더 아쉬웠어 너무 잘어울려 둘이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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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4개)

근데 다인이가 아침에 깨워달라니까 입다무는거 보면 좀 가능성 없음...ㅋㅋㅋㅋㅋㅋ해영이는 온리 세희 직진인듯

└ㄹㅇ다인이 깨워주려고 방 가면 세희도 마주칠테니까 말 못한거잖아

└아직 모른다...이거 아직 모른다....

움짤 존좋ㅠㅠㅠ 티키타카 쩔어 둘 케미 ㄹㅇ좋다ㅠㅠ

이러구 문자 못 받앗자넝

└ㅜㅜ

└같이 있음 다정하긴한데 정작 문자는 안주니까...ㅎ에휴

아진짜 솔직히 내가 설렜음ㅋㅋㅋㅋ 과몰입 개쎄게 했어

└나도...보면서 다인해영 과몰입함 제발 다해 서사 더 풀어줬으면 ㅜㅜㅜㅜㅜ

└나두 둘이 잘 어울려서 밀고 있어.ㅜ

집 돌아와서 민호가 빵 먹어도 되냐고 하니까 다인이 올라오면 같이 먹자고 하는 것도 레전드

└이건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다인이었으면 바로 반함 윤해영 솔직히 아무마음 없이 이랬다? 고소해야돼 진짜로

└저 얼굴이면 전과 있어도 사랑해ㅇㅇ

하루종일 일하고 겨우 퇴근하는데 별로 관심없던 여자랑 카페 가고 대화 다 맞춰주면서 기분 안나쁘게 장난치는거 진짜 중노동이다 집가서 씻고 눕고 싶었을텐데.. 호감 없다고 볼수없음

└222해영다인 타이밍만 맞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33333가보자고

나 원래 해영세희파였는데 지지를 철회하고

오늘부터 해영소연을 지지하기로 함...

(댓글 17개)

소윤 오타났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타 아냐 내가 소연이

└미쳤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제발ㅠㅋㅋㅋㅋㅋㅋㅋ

아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소연이는 누군가 했네

ㅋㅋㅋㅋㅋㅋㅋㅌㅋ당연히 해영소윤인줄 소연이 존나 상상도 못한 정체

경찰불러

└제 남친이 곧 변호사 될 사람이에요

└사형

何 @ojima_bojima ·202X.3.4

나 지금 삘이 왔어 해장 스프로하는 사람 윤해영인거 같음,, 들어봐 술마시고 왔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스프 끓이는게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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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0 ♡ 98

LOSS???? @Lossluvline ·202X.3.4

아....

럽라 4화 보는중 후기: 얘들아 그래도 나랑 선우해영 해줄거지 제발...

???? ↺ ♡ 58

LOSS???? @Lossluvline ·202X.3.4

ㅜㅜ 조금 더 두고봅시다... 큰거 온다

로스님 솔직히 윤해영 너무 헤남 그자체예요ㅋㅋㅋㅋㅋㅋㅋㅋ최종커플 세희 아니면 다인 확정일듯요...

???? ↺ ♡ 49

Charlie @ch_ach_a ·202X.3.4

다녀왔어? 하고 웃으면서 머리 쓰다듬어주는 연상이랑 연상이 쓰다듬어주고 간 머리 한참 만지작거리는 연하 어떻게 생각해 근데 이제 둘다 남자고 연애프로 출연자인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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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1,002 ♡ 2,813

로투스 @2_012022

라는 포타가 있다고요?

Charlie @ch_ach_a

놀랍게도 티비에서 방영되고 있는 연애프로입니다 러브라인보세요 HBC 금요일 밤 9시

말렝 @gsk_professor

당황스러운데 뭐랄까 보는 내가 소외감 느껴지는 그런거 뭔지 알지 그니까 연애프로 보고 있는건데 뭔가 커플 브이로그 본거 같은,, 나는 그냥 방영된 프로그램을 본것뿐인데 괜히 뭔가 커플일상 훔쳐본거 같은,,

천사갓기 @thisis_19

나 이거 안보는데 이게 그니까 연애상대가 이성인지 동성인지는 상관없는거지? 아니면 여기서 이성애를 어케 먹지 이걸보고도? 그 집념이 정말 대단하고...눈물나고...

LOSS???? @Lossluvline ·202X.3.4

얘들아 내가 큰거 온다고 했잖아 ** 더 큰 대한민국 가보자고

세희언니는 저랑 사귀면 될듯해요

???? 1 ↺ ♡ 99

신열깅???? @talking_sally

세희언니는 무슨 죄를 저질렀어요??

***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새벽녘 특유의 어슴푸레한 빛이 얼굴에 드리웠다. 빛에 예민한 편은 아니었으나 출근이 예정된 몸은 이 시간 즈음이면 반사적으로 긴장하기 마련이다. 눈을 뜬 해영이 갑갑함을 느끼며 몸을 뒤척일 때였다.

잠들었는지 감긴 눈가에 길게 뻗은 속눈썹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을 떴을 때나 감았을 때나 변함없이 예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영이 떨치지 못한 잠기운에 눈을 감으며 팔을 뻗을 때였다.

‘아. …잠시만.’

하마터면 습관적으로 끌어안아 버릴 뻔했네.

놀란 눈으로 빳빳하게 굳어 있던 해영이 허공에 떠 있던 팔을 조심스레 거두었다. 그는 제 허리께에 둘린 팔을 들어 침대 위로 내린 뒤 최대한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 맡에 앉은 해영은 뻑뻑한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대체 왜 선우 형 침대에서 자고 있던 거지? 찬찬히 어둠 속을 되짚어 가던 도중 기억은 끝내 어젯밤에 다다랐다.

그의 침대 앞에서 한참을 생각하고 복잡한 감정에 쉬이 걸음을 떼지 못했던 순간. 그 이후로 내려온 어둠 뒤에서 무슨 일이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우가 와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침대로 옮긴 것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해영의 입가에 얕은 한숨이 고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절하듯이 잠든다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도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기진 않아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어나지 못하거나 갑자기 걸어가다 쓰러져 잠드는 것도 아니고….

‘근데 형은 출장 갔다고 하지 않았나?’

차츰 정신이 들자 의아함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소윤에게서 그가 출장을 갔다는 말을 들은 게 어제였다. 당연히 오늘까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가 여기서 자고 있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침대를 빼앗기면 자신의 침대에 가서 자면 될 걸 왜 비좁게 싱글 침대에서 함께 잔 건지도.

깊게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파질 뿐이었으므로 해영은 모르는 척 덮어 두기로 했다. 어차피 밤에 남자 둘이 쓰는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관심을 가질 리도 없으리라. …그래야만 했다.

되도록 가볍게 생각하며 해영은 슬슬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한 참이었다.

“…어디 가?”

탁, 잡힌 손에 놀라기 무섭게 등 뒤에서는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듣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분명한 음성에 해영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아, 깜짝이야.”

떨떠름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졸린지 제대로 뜨지 못하던 선우의 눈이 슬쩍 휘었다. 오랜만에 보는 부스스한 모습에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해영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잡힌 손으로 눈길을 돌렸다. 붙잡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도 아직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다 해영이 팔을 움직여 보았다.

앞으로, 옆으로, 위로, 아래로 휙휙 허공을 내젓는 자신의 팔을 따라 선우의 팔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잡은 팔을 놓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놔.’

해영이 가늘게 눈을 뜬 채 입을 벙긋거렸다. 제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게 분명하건만 그는 쉬이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을 빼며 홈 웨어로 입고 있던 해영의 니트 소매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옷 안으로 파고들어 손목뼈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해영은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선우가 다시 한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디 가게, 해영아.”

“나 이제… 출근 준비해야지.”

목 끝에서 걸린 목소리가 입 안을 간지럽히며 튀어나왔다. 선우의 물음에 정확한 대답을 돌려준 해영은 저를 지분거리는 걸 멈추지 않는 그를 내려다보며 어깨에 힘을 실었다.

그대로 팔을 들어 올리자 단단히 힘을 주고 있지 않던 손이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아쉽다는 듯 느릿하게 침대 위로 떨어지는 희고 기다란 손을 바라보던 해영의 목울대가 짧게 움직였다. 이윽고 내뱉어진 나지막한 목소리가 선우에게로 닿았다.

“근데 형, 언제 들어왔어?”

“음… 1시쯤?”

그의 물음에 선우가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그 대답을 들으며 해영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생각보다는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이었다. 제가 12시 전에 기절하듯 잠들지만 않았어도,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었을 테다. 출장을 가서 들어오지 않을 것 같더니 어떻게 그렇게 일찍 들어온 건지 의아해졌다.

“형 출장 간 거 아니었어?”

되돌아온 물음에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선우가 이내 기분 좋게 눈을 접어 웃으며 물었다.

“응, 다녀온 건 어떻게 알았어?”

그 물음만으로도 달갑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겨울을 비추는 햇살처럼 다정한 낯을 바라보며 해영이 설핏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어쩐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역시 아침부터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차선우를 마주하는 건 위험 요소가 너무 크다. 방금만 해도 생각 없이 끌어안을 뻔하지 않았나.

‘아 씨, 생긴 건 쓸데없이 왜 이렇게 예뻐서.’

물론 그의 외모는 절대 쓸데없지 않았지만, 제 마음을 다잡는 데만큼은 결코 단 하나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선우를 보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어제인데, 막상 윤해영은 그를 앞에 두고 그런 계산을 할 수 없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으니 잠깐 대화를 할 시간은 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거린 채 고민하던 해영이 침대 바로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누워 있는 선우와 시선을 맞춘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윤이가 형 출장 갔다고, 아마 안 돌아올 거 같다고 했는데.”

아. 야트막한 탄성이 내내 곡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한참 해영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선우가 작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함께한 세월이 자그마치 5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해영은 선우가 짓는 표정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고민이 있을 때면 설핏 미간을 찌푸리곤 도리어 입을 다물고는 했다. 마치 지금처럼.

달라진 건 남이 되었다는 것뿐인데, 이번에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해영에게로 선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영아.”

“어?”

“소윤 씨한테 들었어?”

많이 친해졌나 보네. 그가 입가를 매만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이윽고 선우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옅은 미소였다. 그는 조금 곤란한 듯 찡그리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출장 다녀온 건 맞는데…. 일찍 가서 일찍 끝내고 왔어.”

선우의 시선이 다시 해영의 눈을 향했다. 괜스레 간지러운 느낌이 들게끔 하는 집요한 눈길에 해영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입가를 가렸다. 손으로 얼굴의 반절을 가린 채 자신을 응시하는 해영의 눈빛에 선우가 침대 위로 떨어졌던 팔을 들었다.

침대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향해 뻗어진 손끝이 해영의 앞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흐트러져 있던 머리칼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난 눈동자를 바라보며 선우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안 들어올 거라고 생각해서 내 침대에 기대서 잔 거야?”

그런 건 아니었는데, 구태여 그에게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는 말까지는 할 필요 없으리라. 게다가 그가 돌아올 줄 알았다면 애초에 그의 침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지도 않았을 테니 결과적으로는 틀린 말도 아니었다.

분명해진 것은, 자신을 침대로 옮긴 것이 그라는 사실뿐이었다.

대답을 주저하자 눈가를 매만지듯 훑던 손이 떨어졌다. 그에 살짝 움찔거렸던 해영이 약간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갈수록 아무렇지 않게 저를 만지는 것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은데…. 또 그런 손길 하나하나에 멈칫하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깨우지 그랬어.”

“나 찾는 거 같아서 귀여웠는데 왜.”

자그맣게 내뱉어진 투덜거림에 선우가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가도 이내 입술을 짓씹으며 해영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짙은 애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왜 그렇게 자고 있어. …속상하게.”

이번에도 일부러 그렇게 자려던 건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대답을 피하는 제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그의 입에서 이내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한테 말 안 하고 안 들어오는 일 없잖아, 해영아.”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해영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자느라 마이크를 달고 있지 않았던 것만이 감사한 순간이었다.

간신이 대답을 참아 낸 그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 진짜 씻으러 가야겠어, 나지막하게 꺼낸 말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는지 아닌지 볼 틈도 없었다. 몸을 돌려 욕실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해영이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어쩌면 이 관계에 더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인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윤해영은 제가 그에게 선뜻 손을 뻗을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나 댈 수 있는데도 여실히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다.

“하….”

연애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더라도 절대 연애는 하지 않을 거라 말한 것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물론 해영에게도 변명거리는 존재했다. 이 프로그램에 차선우가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상기된 얼굴이 가라앉을 때까지 찬물을 끼얹던 해영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아침에 너무 미적거린 탓에 출근 시간이 꽤 촉박했다. 아침 식사를 거른 채 바삐 출근하려는 자신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1층 복도로 내려오자마자 차고로 내려가는 길목에 서 있는 선우가 보였다.

해영은 기다렸다는 듯 건네는 토스트를 받아 들며 얼떨결에 선우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차에 올라타 선우의 옆에 앉아 식빵을 우물거렸다. 늦었으니까 로펌 앞까지 태워 주겠다는 말에 입을 열지 못하고 가까스로 고개만 겨우 끄덕일 무렵, 해영이 식사를 마친 것을 확인한 선우가 재차 물어 왔다.

“해영아, 오늘 늦어?”

“오늘?”

익숙한 일상적인 물음에 윤해영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늦을 거 같은데. 금요일이 인턴 마지막 날이거든. 그날 팀별 발표가 있어서, 오늘 아마 남아서 사람들이랑 같이 준비할 거 같아.”

“힘들겠다.”

“어. 그래서 오늘 저녁도 팀 변호사님이 맛있는 거 사 주신다고….”

언제 그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인지,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종알거리고 있었음을 깨달은 해영이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무는 것까지도 보면서 기분 좋게 웃던 선우는 익숙하게 운전해 해영을 회사 앞에 내려 주었다.

차에서 내리며 해영은 자신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선우를 향해 살짝 손을 들어 보였다.

“…다녀올게.”

그를 뒤로한 채 회사로 향하는 걸음이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선우와 함께하는 출근길이 첫날보단 익숙해져서일까. 이가 떨릴 정도로 추웠던 겨울 한파가 끝나기라도 한 양, 어제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

마지막 공통 과제였던 팀 과제 준비가 막바지였다. 다른 인턴들에게서 러브콜을 제법 받았던 해영은 고민 없이 여은과 팀을 꾸렸다. 남은 팀원들은 러브콜을 보내왔던 채훈과 그가 데려온 이들로 구성되었다.

발표 리허설까지 모두 끝내고 나서야 해영은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모습을 보면 축 처졌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기진맥진해 쓰러진 해영을 향해 옆에 있던 여은이 가는 길에 커피라도 한잔 마시겠냐고 물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채로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던 해영은 그녀의 물음에 이내 고개만 꺾었다. 완곡한 거절을 꺼내기 전 입꼬리를 늘린 채로 웃는 얼굴에 미안함이 떠올라 있었다.

“마음은 그러고 싶은데, 당장은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어요….”

“그럼 커피는 내일 회사 오는 길에 사 올게요.”

“어, 정말?”

선뜻 흘러나온 여은의 말에 가늘게 늘어져 있던 그의 눈매가 금세 휘둥그레졌다. 단번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눈에 담으며 여은이 긍정의 의미로 눈을 깜박였다.

“해영 씨가 제일 고생했으니까. 발표 분량도 제일 많잖아요. 리서치 방향성 잡은 것도 해영 씨고.”

“여은 씨가 해 준 리서치에 제가 숟가락만 올린 건데.”

비실비실 웃는 해영의 얼굴에 그녀도 별수 없이 마주 웃었다. 그럼 이만 일어서자는 그녀의 말에 해영이 몸을 바로 세웠다.

다른 팀원들은 초반부 발표가 끝나자마자 돌아간 뒤였다. 남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챙겨야 할 것은 가방에 쓸어 담은 그가 겉옷을 입으며 여은을 기다렸다.

“갈까요?”

해영의 물음에 준비를 마치고 나온 여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창밖은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여은과 함께 건물을 빠져나오던 해영은 눈앞에 나타난 인물에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해영아.”

어쩐지 조금 긴장한 듯한 선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는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리한 상태였다. 녹초가 된 탓에 제가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싶었던 해영이 손을 들어 눈을 비비적거렸다. 한참이나 꾹 감았다 뜬 눈에 들어온 이는 아무리 봐도 선우였다. 차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차선우.

잘못 본 것도, 꿈을 꾸는 것도 아니었다.

“형?”

예상하지 못한 채 그를 맞닥뜨린 해영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선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눈을 깜박이는 해영을 힐끔 올려다본 여은이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짧게 잡았다가 뗐다.

팔에서 느껴진 가벼운 압박감에 고개를 내린 그를 따라 선우의 시선도 여은에게 닿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담담한 어조로 해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영 씨 데리러 온 거 같은데, 전 이만 가 볼게요.”

“네, 그럼 내일 봐요, 여은 씨.”

그는 손가락을 들어 반대 방향을 손짓하는 여은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지하철역 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한 후에야 다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선우는 긴장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미소를 띤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영은 그런 그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해영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뭐야?”

반가움을 숨기기 위해 나온 말은 투덜거림에 가까웠다.

선우의 앞에 도착한 해영이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짧게 달싹인 입술 틈으로 내뱉어진 물음은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밀려드는 파도 같았고, 겨울인 탓에 새어 나온 새하얀 입김은 파도의 포말이었다. 그 희뿌연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사내는 바깥에서 제법 오래 서 있었던 건지 안 그래도 흰 피부가 창백해져 있었다.

당장 양손을 뻗어 차갑게 얼은 그의 두 뺨을 매만져 녹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므로, 해영은 두 손을 꽉 그러쥐어야만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데리러 왔어.”

그의 뒤로 보이는 차는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동안 끌고 다니던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눈에 익숙한 실루엣은 해영이 익히 알고 있는 차였다. 선우가 원래 타고 다니던 차였으니까.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던 해영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니까.”

왜 데리러 왔냐고…. 그는 차마 끝까지 묻지 못하고 하려던 물음을 삼켰다. 그걸 물었을 때 꼬리를 물고 이어질 대화의 양상이 빤히 그려졌던 것이다. 자신이 아는 차선우라면 어떤 목적이 있어 저를 데리러 왔다기보단 그냥 데리러 오고 싶어 왔을 확률이 높았다.

출근길에 데려다주고 싶고, 퇴근길에 데리러 오고 싶고. 다른 부차적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자신과 하고 싶은 것들이 늘 끊이질 않는 차선우를 알았고,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또한 알았으므로 해영은 캐묻는 대신 그가 문을 열어 준 차에 말없이 올라탔다.

차가 익숙해서 그런지 이 좁은 공간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제가 차에 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차체 뒤로 돌아온 선우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 과정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 뒤늦게 이게 맞는 일인가 고민하던 해영은 옆에서 들려온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냥 보내도 되는 거였어? …아니면 내가 방해한 건가?”

주어가 빠져 있어도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가 여은과 같이 나오는 것을 보았으니 아마 그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지. 여느 때처럼 나긋한 물음이었으나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이 실려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건 채 움직일 생각은 안 하는 그의 모습에 해영이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아, 또 무슨 방해를 해. 그냥 인턴 동기야.”

그 말에 선우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한 얼굴을 했다. 단지 눈을 크게 떴을 뿐이지만, 원체 화려한 인상 탓인지 그것만으로도 표정 변화가 극적으로 보였다.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보며 해영은 방금 자신이 파렴치한 말이라도 했는지 되짚어 봐야 했다.

말을 잃었던 선우가 야트막하게 벌어져 있던 입을 닫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는 이내 다시금 해영을 불러 왔다.

“해영아, 회사 내에서 직장 동료 간의 관계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이게 또 어디로 튀는 거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으며 윤해영은 기가 찬다는 듯 실소했다. 전부터 차선우는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될 걱정들을 구태여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와, 나 형이 신입사원 OT 간다고 했을 때 딱 그 마음이었는데. 이제 내 마음 알겠다, 차선우.”

“…안 갈 거라고 했는데 끝까지 다녀오라고 했던 건 누구야, 윤해영. 나는 너랑 있고 싶었는데.”

“허.”

자신의 실언을 주워 담기는커녕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는 모습에 해영이 눈매를 가늘게 늘렸다.

“아니 회사에서 나오라는데 안 나가는 신입 사원이 어딨어? 까라면 까야지…. 형, 사실 이미 회장님 아들인 거 다 들통났지. 숨길 생각 하나도 없지?”

윤해영은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와 사귀는 내내 크게 싸운 적이 없는 이유는 말다툼이 정말 다툼으로 번지기도 전에 어영부영 끝나 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너무 좋아서 서러운 일이 생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사람을 서럽게 만드는 일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윤해영은 차선우를 이기지 못했고 차선우는 윤해영을 이기지 못했다.

그때 그렇게 덮어 두고 넘어갔던 씨앗이 오랜만에 다시 파내어졌다. 다시금 자라난 대화의 싹을 두고 선우가 어린애처럼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형 진짜 거짓말 존나 못해.”

마치 그와 별것도 아닌 거로 티격태격하던 그때처럼 허물없는 말투로 떠들던 해영은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선우를 보며 멈칫했다. 뭐가 좋아서 웃고 있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다시금 찾아온 깨달음이 그를 덮쳤다.

‘아, 맞다. 우리 헤어졌지.’

어떤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을 넘어 감각을 야기한다. 새삼스레 가슴께에 퍼지는 충격에 해영은 나지막이 호흡하는 대신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가 입을 다물자 차에는 금방 정적이 내려앉았다.

“…해영아.”

자그맣게 들려온 부름은 어딘가 간절한 구석이 있었다. 방금까지 웃으며 투덜거리던 자신이 갑자기 입을 다문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늘어지는 말끝에 묻은 숨결에서는 언뜻 애타는 기색까지 느껴졌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해영은 선우의 얼굴을 마주하고 한순간 호흡을 멈췄다.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 혼잡한 감정들을 발견한 순간 발아래가 툭 꺼진 것처럼 심장이 철렁였던 탓이다.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나, 검은 눈동자가 담은 대상은 명백했다.

절벽 끝에 선 듯한 그의 눈빛에 해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형, 춥지.”

걱정스러움이 여지없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다정한 물음과 함께 제게서 시선을 떼고 히터의 조작 버튼을 향해 팔을 뻗는 해영을 선우는 놓치지 않았다.

“이거 온도 높일게?”

자신을 흘긋거리며 버튼 위로 손가락을 가져가는 그에게 선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해영이 손을 몇 번 움직이자 차 안에는 더 훈훈한 열기가 감돌았다.

볼을 따끈하게 만드는 따뜻한 바람을 느끼며 해영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괜찮지? 형 처음 봤을 때 얼굴이 너무 얼어 있어서 신경 쓰였어.”

“…신경 쓰였어?”

“그럼 안 쓰이겠어?”

제가 입을 다물어 생겼던 공백을 메꾸려는 듯 해영은 장난스럽게 툴툴거렸다. 그런 해영을 바라보는 선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자신의 기분을 곧바로 눈치채고 화제를 돌리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눈에 보였으니까.

곧 출발한 차가 도보 옆에서 떨어져 나와 미끄러지듯 차도로 진입했다. 차는 금방 훈훈한 온기로 가득 찼고, 반면에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막 타오르려던 순간에 억지로 덮은 불씨처럼 꺼져 가고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창가에 툭 머리를 기댄 채 점점 창에 서리는 물방울을 바라보던 해영이 손가락을 들었다. 뿌연 유리창에 닿은 손길이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지나간 자리는 잠깐 선명해졌다가 다시 희뿌옇게 덮이기를 반복했다.

지워 내려 해도 지워 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정말 차선우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미 닿아 버린 온기가 차가운 유리창에 닿아 송알송알 물방울로 맺히는 것을 바라보던 해영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을 감았다. 끝끝내 버티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

눈을 떴을 때는 여전한 어둠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차 안은 따뜻했고, 언제 푼 건지 모르겠으나 안전벨트도 풀려 있었다. 제가 풀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 선우 형이 했겠지.

해영은 자기 편하게 뒤로 젖혀진 시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탓에 담요처럼 몸 위로 덮여 있던 무언가가 스륵 무릎 위로 떨어졌다. 선우의 옷이었다.

‘형은 어디 갔지?’

차 안에 혼자 남은 해영이 빈 운전석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기 무섭게 운전석 쪽의 창 너머로 눈에 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정장 재킷을 입고 있는 뒷모습의 주인은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차선우임을 알 수 있었다. 몇 년을 보아 왔는데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추울 텐데.’

차 안은 아직도 히터가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굳이 겉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따뜻한데도 제게 겉옷을 덮어 준 채 밖으로 나가다니 바보 같았다. 바보 같은 차선우.

해영이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무릎 위로 떨어졌던 선우의 겉옷을 다시 집어 들었다. 차의 문고리를 잡은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한 발을 차 밖으로 떼자마자 들려온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입단속 좀 시키세요. 해영이가 그걸 다 알아야 하나….”

들려온 이름에 해영이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왜 밖에 있나 싶었더니 다른 사람과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타인과 통화를 하며 제 이름이 나올 일이 뭐가 있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파고드는 의문들에 잠시 굳어 있던 그가 끝내 차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들려온 인기척을 느꼈는지 창을 등지고 전화를 하고 있던 그가 몸을 돌렸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흔들리던 검은 머리칼이 가볍게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서늘하게 굳어 있던 얼굴은 차에서 나온 해영을 발견하자마자 눈 녹듯 녹아내렸다.

“…내일 보고하세요.”

짙은 입술이 나지막하게 달싹였다. 곧바로 전화를 끊고 차를 향해 다가온 그가 어두운 한강 변을 배경으로 한 채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윤해영은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는 낯을 보며 무의식중에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선우의 뒤로 보이는 다리에서 반짝이는 불빛보다 그의 입가에 박힌 미소가 더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어쩐지 목이 말랐고, 손끝이 자꾸만 안으로 굽었다. 그에게서 눈을 떼고 싶지 않은 동시에 시린 눈을 꽉 감아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잘 잤어?”

선선히 흘러나온 물음이 평소처럼 다정했다. 방금 전화하면서 들은 냉정한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닌 것 같을 정도였다.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게 언제였냐는 양 천사같이 웃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영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은 차 문을 닫은 채 빠르게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살갗을 얼릴 정도로 뺨 위를 매섭게 스쳐 지나가는 칼바람에 잠기운도 달아난 지 오래였다. 선우의 앞에 선 해영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안 추워?”

제 앞으로 다가온 해영을 보며 고개를 기울이던 선우가 곧장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린 듯한 이목구비 위로 떠오른 가련한 표정에 해영의 표정도 따라서 미묘해졌다.

“추워, 해영아….”

“그니까 왜 겉옷도 안 입고 나가.”

“네가 추우면 어떡해.”

“그걸….”

순간적으로 울컥 치밀어 올라 입을 열었던 그가 말을 다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지금 그걸 걱정할 때인가? 자신은 히터가 틀어진 따뜻한 차 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한겨울에 밖으로 나가 전화를 하던 주제에? 눈썹 한쪽을 삐딱하게 들어 올린 채 그를 못마땅하게 주시하던 해영이 작게 혀를 찼다.

“진짜 미치겠네.”

헤어졌다는 걸 새삼스럽게 다시 의식한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전처럼 그를 걱정하고 아무렇지 않게 굴게 되는 것은 단순히 아직도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 또한 그를 제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차선우랑 있으면 이제 이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자꾸 잊게 되고, 나아가 잊고 싶어지게 되는 것이다. 윤해영은 자꾸만 막히는 목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형은… 사람 걱정시키는 데 뭐 있어.”

말을 꺼내며 그는 손을 뻗어 들고 있던 옷을 선우의 어깨에 걸쳤다. 차선우는 꼼꼼히 제게 옷을 입혀 주는 해영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를 불러 왔다.

“해영아.”

“왜.”

“내가 걱정됐어?”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달짝지근한 음성에 해영이 손끝을 움찔 떨었다.

“나 좀 봐 줘. 응?”

꾹 입을 다물고 제 가슴팍 위만을 노려보듯 주시하는 해영을 내려다보며, 선우가 손을 들어 제 옷깃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을 쥐었다.

해영의 손은 잠깐 밖에 나와 있었다고 금세 차가워져 있었다. 손바닥 안에서 느껴지는 찬기를 꾹 잡으며 차선우는 한숨을 삼켰다.

“이제 나 안 예뻐?”

“…뭐?”

뒤집힌 코트의 옷깃을 정리하다 손을 붙잡힌 해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올리자마자 자신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이제 자신이 예쁘지 않냐고?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가차 없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을 것이다. 혹은 짓궂게 대꾸하며 상대를 놀리거나. 성인 남성이 하기엔 꽤나 웃긴 물음이었으나, 그 말을 꺼낸 이가 차선우인 순간 해영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릴 수밖에는 없었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제가 예쁘다는 건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뻔뻔한 물음을 건네 오지. 해영이 그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빼내며 뒷걸음질 치듯 차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말에 왜 이렇게 맥락이 없어?”

“…어떻게 꼬셔야 할지 모르겠어서.”

윤해영은 반사적으로 꺼낼 뻔한 반박의 말을 애써 삼켰다. 곧이어 입 안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헛웃음을 흘린 그는 지금도 자신을 쓸데없이 열심히 꼬시고 있는 차선우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늘렸다.

‘아. 얄미워, 차선우.’

어떻게 꼬셔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살살 눈을 접으며 웃는 게 말이 되나. 이런 얼굴을 하면 제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자꾸 웃는 게 분명했다. 마음을 다잡을 여유도 주지 않는 선우를 보며 해영이 괜스레 입을 비죽거렸다.

“내가 뭘 해야 다시 봐 줄까. 전엔 얼굴만 봐도 좋아해 줬는데.”

“그건 형이겠지.”

해영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솔직히 반박할 수 없었지만, 그냥 반박하고 싶었다. 실소와 함께 툭 내뱉어진 말에도 차선우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지금도 보기만 해도 좋아.”

“…하.”

받아칠 말이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해영은 한숨과 함께 손을 들어 제 머리를 헤집었다.

“집에 가자.”

그는 선우의 말에 대꾸하기를 포기했다.

바깥에 오래 서 있다 보니 찬바람에 슬슬 몸도 떨려 오는 참이었다. 코트 깃을 세우고 최대한 몸을 움츠려 그 안에 얼굴을 숨기던 해영은 차로 향했다. 막 한 발짝을 떼던 그는 까먹을 뻔했다는 듯 다시 선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근데 형. 방금 전화하면서 내 이름 말하지 않았어?”

해영의 물음에 웃는 낯을 유지하던 차선우의 표정이 일순 흔들렸다. 눈에 띄게 멈칫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 망설이는 듯한 얼굴은 그가 당황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뭐야?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해영의 눈초리에 달렸던 의심이 짙어져 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참 뒤에 나온 대답은 주저하던 끝에 한 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단출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해영아.”

한 번으로는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제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인 건지 그는 다시 한번 아무것도 아니라며 강조했다. 그 거듭된 대답에도 해영은 아무런 의심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게 자신이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화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냐는 물음에 선우는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저렇게 뻔한 방식으로 말을 돌리는 건 어떻게 보면 차선우다웠고 동시에 그답지 않았다. 제가 전부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연애 기간 동안 해영이 아는 바로 그가 자신에게 숨긴 것은 없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선우를 바라보던 해영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스미기라도 한 듯 천천히 그림자가 드리웠다.

말하지 않는 이유는 변화된 관계와 관련이 있는 걸까. 이제 시답잖은 것들을 주고받고 시시콜콜한 서로의 얘기에 귀 기울이던 사이가 아니게 되어 버렸기 때문인 걸까.

새삼스럽게 이별을 실감할 때면 해영은 그와 자신 사이에 첨예한 선이 그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당연했던 일들이 이제 당연하지 않게 되었음을,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형.”

꽉 주먹을 쥐고 있던 해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선우를 불렀을 때였다. 그 순간 들려온 진동 소리에 그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고 외투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정여은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해영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설핏 찌푸려졌다. 퇴근하고 나면 연락할 일이라곤 없는데 뜻밖에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 오다니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화면을 바라보던 해영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을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선우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괜찮으니 어서 받아 보라는 의미였다.

“…….”

입가에 내뱉지 못한 무거운 한숨이 고였다.

중간에 끊겨 버린 대화가 신경 쓰였고, 여은이 걸어 온 전화의 목적은 더더욱 신경 쓰였다. 짧은 망설임 끝에 해영은 결국 전화를 받으며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네, 여은 씨. 무슨 일이에요?”

- 해영 씨,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혹시 자고 있는데 깨운 거 아니죠?

“괜찮아요. 안 자고 있었어요.”

해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어쩐지 미안함과 동시에 초조함이 서린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나 용건은 마지막 발표 과제와 관련된 거였다. 피피티를 마무리하던 와중 서문에 사용한 판례를 바꾸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단체 채팅방에 의견을 올렸는데, 아무도 읽지 않아 따로 연락하게 되었다는 여은에게 해영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급한 목소리만큼 해영 또한 마음이 급했다. 그를 초조하게 만드는 대상은 당연히 눈앞에 있는 차선우였다. 해영이 슬쩍 선우를 흘긋거리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제가 집에 가자마자 확인하고 바로 피드백할게요. 혹시 피피티 수정안 부탁할 수 있을까요?”

- 네! 그럼 고맙죠!

그녀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뭐가 고마워요, 여은 씨가 제일 고생하고 있는데. 조곤조곤한 어조로 내뱉어진 말에 여은의 기분도 보다 풀어진 듯했다.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목소리에 안심하고 입꼬리를 올린 해영이 귓가에 가져다 댔던 핸드폰을 내렸다.

“그럼 끊을게요.”

서글서글하게 인사한 그가 전화가 끊긴 화면을 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자리에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차선우가 있었다. 당황을 숨기고자 꾸며 내던 어설픈 미소가 아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평소의 다정한 미소를 걸친 선우가.

“집에 가자, 해영아.”

제가 전화하는 모습을 보며 일이 생긴 걸 눈치챘는지 그가 차를 향해 고갯짓했다.

이대로 차에 올라타 집으로 향하면 하던 대화는 흐지부지 끝나 버릴 것이라는 걸 알았다. 집에 가자는 선우의 말이 그런 의도를 담고 있음도 모르지 않았다. 알면서도 대답을 채근하기가 머뭇거려졌다.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친 해영이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형한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 생각보다 기분 더럽네.

문득 치켜든 초조한 마음에 해영은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순간 울컥 내뱉으려던 말을 간신이 삼킨 그가 자신을 향한 시선에서 비켜서며 차로 향했다. 의아함이 담긴 눈길이 제 뒷모습을 좇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해영은 그에게 돌려줄 말이 없었다. 솔직할 수 없는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당장 집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경은 계속해서 한 사람에게만 쏠렸다. 어둡게 넘실거리는 한강 물은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해영의 기분 또한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내려앉았다.

***

드디어 마지막 날이었다. 여은이 수정한 피피티를 다시 업로드하고 자신이 대본까지 다시 써서 올렸는데도 다른 팀원들의 대답이 없길래 조금 불안했는데 다행히도 전부 숙지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푹 잤는지 팀원들은 멀끔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고 해영 또한 담담하게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던 건 아니지만, 혹시 다시 볼 수도 있는 사이에 굳이 안 좋은 인상을 남길 이유는 없지 않나. 대학 생활을 하며 깨달은 바가 있다면, 팀 과제를 하면서는 인간적으로 좋았던 사람도 싫어질 수 있다는 거였다.

오히려 가장 많이 떨었던 것은 제일 오래 준비한 여은이었다. 발표 순서가 다가오려면 멀었는데도 벌써 덜덜 대본을 쥔 손을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영은 이미 외운 대본을 앉아 있던 자리 옆에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정수기로 다가가 두툼한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담아 와 여은에게 건넸다. 그녀가 들고 있던 대본을 대신 받아 든 윤해영은 두 손으로 컵을 들고 따뜻한 물을 홀짝이는 여은을 슬쩍 확인했다.

아직 굳은 얼굴인 것은 여전했지만, 이전보다는 한결 나았다. 그는 차례가 오기 전에 여은이 긴장을 푸는 것을 기다리며 시선을 내렸다.

“해영 씨, 그, 연애 프로 같은 거 찍는다고 했잖아요.”

“네.”

형법 제310조의 위법성 조각 사유 적용에 관해…. 습관적으로 대신 들고 있던 여은의 대본을 읽던 그가 다시 고개를 들며 답했다.

마지막 과제 발표를 앞둔 지금 꺼내기에는 뜬금없는 화제였다. 상황과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신경을 돌려 긴장을 풀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해영이 편히 말하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마음에 드는 분 있어요?”

“…….”

편히 말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바로 꺼내진 폭탄 같은 화제에 그가 멈칫했다. 엉뚱한 물음의 의도도, 그 물음에 대한 답도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이 있는 상대라면 한 명뿐이었으나 그 이름을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슬쩍 미간을 찌푸리던 해영이 손을 들어 눈썹 위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저기, 여은 씨.”

막상 여은을 불러 놓고 해영은 주저하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생각해 보면 나쁘지는 않은 화제였다. 그녀의 물음에 곧장 장난스럽게 대답했다면 여은의 긴장을 한층 더 풀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생각도 하기 전에 그렇게 굴었을 가능성이 컸다.

같이 촬영을 하는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이가 있냐는 그 흔한 물음에 움찔하게 되는 건 제가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어제 여은에게도 그를 보여 주는 바람에. 그녀의 물음에 하필이면 바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익숙한 낯이 있었기 때문에….

“그건 왜요?”

“아니, 인기 많을 것 같아서요. 잘되어 가는 분이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던 그녀가 꺼낸 말을 듣고 해영은 찡그린 얼굴로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역시 자신이 괜히 찔려서 과하게 생각한 것이 맞았다.

너무 긴장이 되다 보니까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그런 와중에 제가 눈앞에 있으니까 자신과 관련한 화제가 떠오른 것이리라. 생각해 보면 여은의 질문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한순간에 맥이 풀린 그가 실없이 웃으며 되물었다.

“저 인기 많을 거 같아요?”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대본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 바람에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여은이 그런 해영을 보며 짧은 침음을 삼켰다. 어딜 가나 사랑받을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여유로운 미소였던 것이다.

생글 웃는 해영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따라 웃던 여은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를 흘겨보았다.

“…제가 질문을 했으면 대답으로 받아 줘야죠.”

장난스럽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여은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해영이 보조개가 들어간 입가를 긁적거렸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 줄 만한 실없는 소리들은 많이 있었으나 꺼내도 될까 잠시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짧게 머리를 굴리던 해영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출근할 때는 마이크를 차고 있지 않으니 여은과의 대화가 방송에 나갈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혹시 발견하지 못한 카메라가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본 그가 곧 들고 있던 대본으로 옆얼굴을 가리며 속닥였다.

“적어도 절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너무 추상적인 대답인데요.”

“겸손한 게 제 매력이라고 하더라고요.”

겸손의 미덕을 내세운 말의 내용과는 달리 얼굴에는 한껏 뻐기는 듯한 표정이 꾸며져 있었다.

그 거만함을 흉내 내는 표정에 여은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경쾌하게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해영도 이내 표정을 풀고 픽 웃었다.

별로 웃긴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웃어 주는 걸 보니 내내 긴장하고 있던 건 잊은 것 같다.

“이제 긴장 풀렸어요?”

그가 여은을 향해 물었다. 다른 팀원들의 눈치가 보여서인지 고개를 숙인 채 최대한 웃음을 참던 그녀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시선을 들었다. 한참이나 유쾌함이 고여 있던 눈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가볍게 끄덕여지는 고개를 보며 안도한 해영이 들고 있던 대본을 돌려주었다. 곧 발표할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드디어 로펌 실무 실습의 마지막 날과 마지막 과제가 모두 끝이 났다.

모든 팀의 발표가 끝난 뒤에는 어디서든 곧잘 그러하듯이, 다들 앞으로도 간간이 연락하자며 연락처를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다. 다시 연락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해영 또한 연락처를 물어 오는 이들에게 순순히 번호를 넘겼다.

그러고 나서는 마지막 날을 그냥 보내기 아쉬우니 다 같이 뒤풀이를 가자는 인턴 동기들에게 해영은 아쉽다는 듯 웃어 보이며 거절했다. 정작 떠나는 이보다 남은 이들이 더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웃는 낯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곤 미련 없이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바로 다음 날에 두 번째 공식 데이트 일정이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이번 데이트를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주제에 전날 술이나 마시고 귀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영은 적어도 함께 있을 때는 그 시간에 충실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제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소윤을 발견했던 것이다.

‘오빠, 내일 나랑 데이트하는 거 알지?’

그녀의 물음에 해영이 입을 다문 채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대충 다른 이들의 대화와 분위기로 어렴풋이 자신의 데이트 상대가 소윤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있었다. 민호가 신경 쓰여 알고 있는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이제야 알았다는 듯 굴까, 순간 고민하던 그는 별수 없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의 짧은 고갯짓에 소윤이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 데이트 어디서 하는지 알 것 같아.’

‘진짜? 어디서 하는데?’

‘그건 비밀.’

뭐야. 말해 줄 듯하다가 곧 비밀이라며 입을 다무는 소윤을 보며 해영이 찡그리듯 웃었다. 놀리는 거냐 묻는 시선에도 그녀는 대꾸 없이 빙긋 웃을 뿐이었고, 해영은 결국 백기를 들며 고개를 기울였다.

‘힌트도 없어?’

‘으음. 알았어, 힌트 줄게. 옷은 캐주얼하게 입는 게 좋을 거 같아.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캐주얼….’

힌트치고는 스무고개에 가까운 대답이었으나 해영은 알았다며 끄덕거렸다. 움직이기 편한 캐주얼한 차림을 하고 오랬으니 아마 활동적인 데이트 코스가 잡힌 거겠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상관은 없었다.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소윤과 함께 2층으로 올라온 해영은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복도에서 우뚝 멈춰 섰다. 슬쩍 고개를 돌려 소윤에게 공용 공간에 민호가 있냐고 묻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집에 있으면 소윤의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그답지 않은 행동에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자신이 오는 걸 알지 못했을 선우가 기다렸다는 듯 방문을 연 것도 그때였다. 잠시 고민에 빠져서 복도에 서 있던 해영은 자신이 지내는 방의 문이 열리는 걸 보며 고개를 들었다.

‘다녀왔어?’

방 밖으로 나오다 말고 자신을 발견한 그는 마치 조명이라도 켜지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렸다. 저를 내내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웃는 그를 보며 해영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보면서도 차선우는 자신이 매일 반가운 듯했다.

짧은 고갯짓을 본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칠 뻔한 해영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방에 안 들어가게, 해영아?’

‘어… 나 잠깐 옆방 좀 들르게. 김민호 삽질하는 거 같아서 보고 오려고.’

‘…나도 삽질 잘하는데.’

뭐라는 거야.

해영이 저를 집요하게 좇는 눈길을 애써 무시한 채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민호가 있는 방으로 향하는 동안 뒤에서 선우가 ‘다정하네, 해영아. 걱정된다고 이 시간에 다른 남자 방도 찾아가고.’ 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클을 거는 게 들려왔지만, 해영은 들리지 않는 척 꾹꾹 참았다.

옆방에 도착한 그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민호를 불렀다.

‘김민호.’

‘어, 어….’

마치 썩은 파프리카 같은 얼굴로 앉아 있던 민호가 자신을 부르는 해영의 목소리에 눈에 띄게 어색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의식하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그를 보며 해영은 사근사근한 말로 달랠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궁지에 몰렸다 싶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침울해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뭐, 좋아 죽겠다면야.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해영이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은 민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눈높이가 낮아지자 고개를 떨구고 있는 민호의 얼굴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등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으나, 해영은 민호를 올려다보며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왜 이렇게 죽상이야.’

에둘러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던져진 물음에 민호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건지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곧 포기한 듯 입꼬리를 내린다.

‘마지막인 것도 아니잖아. 이번 데이트만 하고 끝나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걱정이냐고.’

해영은 그를 달래 주려던 계획을 일찌감치 버렸다. 다년간 과외를 해 온 경험상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벌써 시무룩해져선 전의를 잃은 학생에게는 쓴소리가 약이었다. 이후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쳐 속상해하고 있다면 위로를 건네야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할 일이고.

절박해질수록 시야는 좁아진다. 민호가 견제하는 대상에 자신도 속해 있다는 것에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가 지금 자신을 견제하는 게 쓸데없다는 건 확실했다. 현재 소윤의 마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명확했으니까.

해영의 시선이 슬쩍 뒤에 서 있던 인물에게로 향했다. 선우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열린 문가에 기대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는 얼핏 놀란 얼굴을 하더니 곧 소리 없이 눈을 접어 웃었다.

‘…견제 대상 1위가 저기 서 있는데.’

고작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속이 술렁거렸다. 얕은 한숨을 뱉은 해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민호를 바라보았다.

걱정이 돼서 오긴 했지만, 사실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제가 누굴 걱정할 처지가 되나. 방 밖으로 나오다 저를 발견하곤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선우를 마주했을 때, 다녀왔냐며 인사를 건넸을 때. 해영은 문득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민호에게 조언이랍시고 말을 꺼내는 것도 웃겼다. 해영은 무릎에 턱을 기댄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나 마음에 둔 사람 따로 있어.’

옅은 웃음기가 배인 목소리가 나직하게 떨어졌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어조였으나 그 말은 민호의 고개를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말에 담긴 마음이 묵직했다.

품고만 있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행위는 두루뭉술하던 마음에 분명한 형체를 부여하고 이름표까지 붙여 주는 것과도 같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꾹 덮어 둔 채 모르는 척하고 있던 마음을 기어코 들췄다. 그것이 순전히 자신의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밀려드는 자괴감을 애써 삼키자 입 안이 썼다.

내색하지 않은 채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해영을 보며 민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너, 그럼… 정해진 거야?’

누굴 생각하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해영은 민호가 떠올리고 있는 인물이 그게 누구든 오답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벙한 얼굴을 보니 괜스레 놀려 주고 싶다는 짓궂은 마음이 피어났으나 꾹 참았다. 조금 더 놀렸다가 혹 울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해영은 대답을 애매하게 피한 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민호는 제가 하고 있던 고민을 한결 덜어낸 듯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일 잘 다녀오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그 이후에 고민해. 이미 정해진 걸 바꿀 수는 없잖아.’

제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해영은 조금 불안한 웃음을 흘렸다. 전보다 얼굴에 드리워 있던 그늘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썩은 파프리카 같던 민호의 낯빛이 밝아진 것에 만족한 해영이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몸을 돌렸다.

방 앞에는 여전히 선우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해영은 이만 돌아가자는 듯 방 밖을 고갯짓했다. 그제야 문가에 기대고 서 있던 몸을 바로 세운 그가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여유롭게 열린 통로로 빠져나간 해영은 곧장 자신이 지내는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늘 두는 곳에 가방을 내렸다. 동시에 코트를 벗으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겉옷을 잘 걸어둔 해영이 넥타이만 풀어 협탁 위에 올려 둔 뒤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세면대 앞에 서서 씻기 위해 와이셔츠의 소매를 끌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해영아.’

자신을 뒤따라오던 선우가 문득 이름을 불러 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거울을 통해 욕실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발견한 해영이 일순 당황해 굳었다. 마치 파고들듯 옆으로 다가선 기척과 훅 가까워진 거리감이 해영으로 하여금 숨 쉬는 법을 잊게 했다.

차선우는 세면대를 마주 보고 선 해영의 앞으로 팔을 뻗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차가운 은색 수전을 가볍게 밀어 올렸다.

쏴아아, 세면대로 거칠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울렸다. 귓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 사이를 뚫고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마음에 둔 사람, 나지?’

나직하게 꺼내진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와는 달랐다. 단단하던 확신은 거품처럼 물속에 녹아 버리고, 익숙한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물음. 해영은 불현듯 눈앞이 아득해졌다.

세면대를 쥐고 있던 손이 희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던 해영이 어깨를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 싶었으나, 선우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세면대를 짚은 팔에 다시 한번 꽉 힘이 들어갔다.

‘아직… 나 좋아하지? 응? 해영아.’

느릿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결코 여유롭지 못했다. 해영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다정했으나, 여러 감정이 섞여 어딘가 혼잡한 면이 있었다.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비죽 튀어나온 미소를 보며 윤해영은 가슴 안쪽을 답답하게 죄어 오는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저도 모르게 어젯밤을 곱씹던 해영은 멀찍이서 들려온 목소리에 깊게 잠겨 있던 기억에서 떨어져 나왔다.

“해영 오빠!”

친숙한 목소리에 그는 멍하니 걷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찍으면서 짐작하긴 했지만, 정말 이번 데이트 장소는 놀이공원이었던 모양이다. 매표소 앞, 안쪽으로 들어가는 에스컬레이터 주변에 서 있는 소윤이 시야에 들어왔다.

편한 옷을 입고 오라기에 과연 어디를 가는 걸까 했는데, 실내에 조성된 놀이공원은 해영에게도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겉옷은 어디 맡기고 온 건지 겨울인데도 상의로 갈색 셔츠만 걸친 소윤이 손을 휘젓고 있는 것을 보며 해영은 금방 손을 들어 마주 흔들어 주었다.

저렇게 손을 크게 휘젓는 모습은 언뜻 민호가 생각나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오빠, 이거.”

걸음을 빨리한 해영이 소윤의 앞에 다가가 섰다. 서로 이성적인 호감이나 관심이 없는 상태여서인지 보자마자 멋쩍은 기분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해영은 편하게 웃는 낯으로 소윤이 건네는 티켓을 받아 들었다.

“빨리 가자!”

소윤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해영을 이끌었다. 제 옷깃을 잡고 앞서 걷는 그녀의 뒤를 해영 또한 순순히 쫓았다.

놀이공원 안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면서 소윤은 아이처럼 신난 얼굴로 해영에게 속닥거렸다.

“오빠 놀이 기구 잘 타?”

“응.”

기대감이 잔뜩 어린 물음에 해영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는 곧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호기롭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 완전 잘 타.”

꽤 자신이 있는 듯 담담한 얼굴에 소윤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 대답을 기대했다는 듯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며 그녀가 제법 결연하게 속삭였다.

“우리… 오늘 여기 있는 거 전부 다 타는 게 목표야.”

“…전부?”

“응. 나 여기 진짜 오랜만에 오거든. 온 김에 다 타고 갈 거야.”

전부 다 타자는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던 해영이 이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데이트보다는 놀이공원을 기대한 듯한 얼굴을 보니 도무지 웃지 않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보다 놀이 기구에 더 관심이 쏠린 게 해영으로서는 반가웠고, 기왕 온 거 뽕을 뽑아 보겠다는 각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 건 저 또한 진심으로 어울려 줄 수 있었으니까.

“그래, 다 타 보자.”

그가 웃음을 삼키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랬던 대로 해영 또한 제법 비장하게 말한 탓에 소윤의 미소는 한층 진해졌다.

두 사람에게 공동의 목표가 생겨 바빠진 것은 촬영을 담당하는 스태프들이었다. 데이트답게 천천히 걸어 다니며 대화를 나눈다거나 줄이 짧은 놀이 기구를 타는 것은 사치라는 듯 두 사람은 쉼 없이 걸어 다녔고, 스태프들 또한 카메라를 짊어진 채 그런 둘을 쫓아다녀야 했던 것이다.

바이킹을 타고 내려오자마자 소윤은 그다음 코스로 플룸라이드를 타러 가자고 했고, 해영은 조금 떠오른 머리를 꾹꾹 누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자신 또한 못 타는 편이 전혀 아니었으나 소윤은 압도적인 구석이 있었다. 플룸라이드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너무 재밌지 않았냐 조잘거리며 웃는 뺨이 상기되어 발그레했다.

“오빠 어디 탈래?”

기구에 타기 직전 고개를 든 소윤이 해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플룸라이드는 4인승이었고 줄지어 앉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촬영 중인 것을 감안해 맨 뒷자리에는 스태프 한 명이 함께 타기로 한 참이었다.

그녀는 남은 앞쪽과 뒤쪽 중 어느 곳에 타고 싶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상관없어. 넌 어디 타고 싶은데?”

“그럼 내가 앞에 탈래!”

선선히 흘러나온 대답에 소윤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놀이공원 스태프가 나직하게 ‘앞자리는 물이 많이 튈 텐데….’하고 중얼거렸으나,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녀는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기구에 올라탔다. 해영 또한 그녀의 뒤로 가 앉자 촬영 스태프까지 자리한 기구가 덜컹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롤러코스터와는 다르게 플룸라이드는 물 위로 가는 놀이 기구였다. 물살이 배 모양의 기구 몸통에 철썩이며 부딪힐 때면 연신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맨 처음 있었던 짧은 낙하 구간을 지난 플룸라이드는 곧 긴 리프트 벨트에 걸려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야에는 점점 앞이 아닌 천장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긴장된다! 그지, 오빠.”

“긴장하고 있는 거 맞아?”

“조용히 해.”

소윤은 긴장된다고 말하며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난스럽게 되묻자 밉지 않은 핀잔까지 던지는 여유를 보일 정도였다. 조용히 하란 말을 들은 해영만이 작게 키득거릴 뿐이었다.

고점까지 올라간 기구는 잠시 후 예고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머리가 흐트러지는 걸 의식할 새도 없이 바로 앞에서 신난 기색이 역력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 즐거운 비명은 얼마 가지 않아 기구가 낙하를 끝내자마자 쏟아진 물벼락에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쉽지만, 저희 워터보트 운행은 여기서 종료됩니다. 나가시는 문은 오른쪽입니다!”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는 물 흐르듯 처음 기구를 탔던 지점으로 돌아왔다. 리듬감이 살아 있는 놀이공원 스태프의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축축한 몸을 이끌며 배에서 내렸다.

오른쪽에 있는 통로로 빠져나오며 소윤이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와, 나… 다 젖었어. 물이 이 정도로 튈 줄은 몰랐는데 어떡하지….”

물기가 묻은 머리칼을 가볍게 털어 내던 해영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시야에 들어온 소윤의 모습에 애매하게 웃으며 침음을 삼켰다.

확실히 맨 앞자리에 앉은 소윤은 뒷자리에 앉은 저보다 훨씬 더 젖은 정도가 심했다. 저는 머리와 얼굴에만 물기가 조금 튀고 말았을 뿐이지만, 그녀는 상의까지도 젖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축 젖은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필 어두운 색상의 셔츠를 입은 탓에 물 자국이 눈에 띄었다. 소윤은 옷에 남은 물 얼룩을 애매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마를 때까지만 내 옷 입고 있을래?”

“그래도 돼?”

“응, 좀 있다 보면 마를 테니까 일단 이거라도 입고 있어.”

해영이 그런 소윤을 향해 제 겉옷을 내밀었다. 실내에 있었으므로 굳이 겉옷을 입지 않아도 충분히 따뜻했다. 고맙다는 듯 눈짓하며 겉옷을 받아 간 소윤이 외투에 팔을 꿰어 넣었다.

“오빠, 어때? 나 지금 좀 웃기지.”

겉옷을 걸친 소윤이 해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른 옷을 뺏어 입은 것 같은 모습을 눈에 담은 해영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진짜 솔직히 말해?”

“됐어. 그냥 조용히 있어.”

짓궂은 되물음에 소윤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주먹을 쥐어 그의 팔을 가볍게 때렸다. 그러다가 또 금방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바뀌는 표정을 보며 해영이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나 사진도 찍고 싶었단 말이야. 근데 머리 다 젖어서 망했어.”

“왜, 지금도 괜찮은데? 찍으면 되지.”

“머리 젖어서 사진 이상하게 나올 거 아냐.”

이럴 줄 알았다면 사진 먼저 찍을 걸 그랬다며 소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사진이 찍고 싶었는지, 퍽 속상해하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무언가가 잡혀 들었다.

“소윤아, 저거 할래?”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우울하게 떨궜던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백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해영의 눈에 웃음기가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소윤은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밝은 조명 아래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전시된 기프트 숍이 있었다. 소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해영이 한번 가 보자는 듯 고갯짓을 하며 발을 뗐다. 앞으로 향하는 그를 따라 소윤도 얼떨결에 걸음을 옮겼다.

기프트 숍 안으로 들어온 해영이 천으로 된 모자들이 진열된 곳 앞에 섰다. 모자라고 하기에는 실용성이 떨어져 보였지만, 젖은 머리를 가려 주기엔 충분할 듯했다. 위에 흰 토끼 귀가 달린 모자를 집은 그가 씩 웃으며 소윤을 향해 내밀었다.

“이거 어때? 너랑….”

닮았다고 하려던 해영이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디까지나 장난이 섞인 가벼운 말이었으나, 뒤따라오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윤은 별다른 대꾸 없이 제가 내민 것을 받아 들며 곧장 머리에 썼다. 옆에 놓인 거울을 보며 모자와 머리를 이곳저곳 매만지던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나랑 어울려?”

“응, 어울려.”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 그녀 또한 제가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물은 것일 테다. 방금까지 우울해하던 것은 잊었는지 금세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소윤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어딘가 조금 쑥스러운 듯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비시시 웃는 낯으로 다시 해영을 힐끔 바라보았다.

“헤헤. 오빠도 쓰면 안 돼?”

“…나?”

기분이 풀린 듯한 소윤을 보며 안심하던 그는 들려온 말에 제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해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어색해졌다.

“내가 이걸?”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소윤의 머리 위를 손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 물음은 제가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닌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묻는 것에 가까웠다.

토끼 모자를 응시하던 해영이 떨떠름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스물여섯이나 먹고 쓰기엔 조금…. 그보다, 열일곱 살 때 수학여행을 가서도 쓰지 않았던 걸 이제야?

소윤이 끼고 있는 것만 보면 꽤나 귀여운 모양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귀여워서 문제였다. 저걸 제 머리에 뒤집어쓰면 대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해영은 쉬이 상상할 수 없었다.

“아, 꼭 하라는 건 아니야! 싫으면 굳이 안 해도 돼.”

고민하는 듯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소윤이 뒤늦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한층 조심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쓰지 않아도 크게 서운해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제 기분을 먼저 생각해 주는 소윤의 말이 도리어 해영의 고민을 잘라 냈다.

그에게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었다. 양심이 있다면 마음이 없어도 순간순간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진은 어차피 여기서 진짜 연애를 하고 싶어 나오는 사람은 없다고 했지만, 그는 원래 받은 만큼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개그맨 한번 하지 뭐…. 해영이 고개를 내저으며 진열된 모자를 집어 들었다.

“아니야, 쓸게. 근데 웃으면 안 돼.”

“응!”

모자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하는 그에게 소윤이 활기차게 대꾸했다. 금방 기대 어린 눈을 하는 그녀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한 해영이 머리에 모자를 얹었다. 눈 앞으로 흘러내리는 토끼 귀를 잡고 대충 뒤로 던진 그가 조심스럽게 소윤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지. 해영은 자신을 보며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눈을 가늘게 늘렸다.

“너 지금 웃고 있는 거 알지, 하소윤.”

“…안 웃고 있는데?”

웃음을 삼킨 그녀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한껏 순진무구해 보이는 얼굴에 결국 해영의 입에서도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소윤의 앞에 있는 거울에 모습을 비춰 보며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어설프게 쓰고 있던 모자와 그 아래 삐죽 튀어나온 머리를 잠깐 매만진 해영이 소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지 않아?”

“진짜 솔직하게 말해?”

장난기 어린 그녀의 대답에 해영이 잠시 멈칫했다. 그 짓궂은 물음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 제가 놀리듯 꺼냈던 되물음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입 안에 가벼운 실소를 머금은 그가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다 결국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너…. 됐어, 사진이나 찍자.”

능청스럽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윤에게서 시선을 뗀 해영이 기프트 숍 밖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소윤은 그런 그의 옆에서 걸으며 간간이 킥킥거렸다.

그녀는 이윽고 해영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포토 존이나 놀이 기구 앞에서 사진을 찍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던 그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듯 거침없이 발을 옮기는 소윤의 뒤를 따랐다.

***

“오늘 진짜 재밌었다. 사진도 잘 나왔어.”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도중 들려온 말에 해영이 고개를 내렸다. 옆에서 나란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윤은 놀이공원 안에서 찍었던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해영도 그러게, 하고 덤덤히 수긍했다.

찍는 과정은 어설프고 마냥 정신없기만 했는데,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해영이 보기에도 제법 그럴듯했다. 오히려 너무 그럴듯해서 문제였다. 김민호가 만약 이걸 본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해영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진짜 배고파….”

“어… 진짜 배고프다.”

힘없이 흘러나온 소윤의 말을 이어 해영이 돌림 노래를 부르듯 따라 말했다.

오늘 저녁 집에서 다 같이 신년 파티 겸 마당에서 바비큐를 구워 먹기로 했다. 그래서 평소라면 저녁을 먹고 들어왔을 테지만, 이번 데이트 일정에서는 저녁 식사가 빠지게 된 것이다.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부지런히 놀이 기구를 타러 다녔던 둘로서는 뒤늦게 밀려오는 허기를 이겨 낼 수 없었다.

아침 식사 이후로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윤은 돌아다니다가 보이는 간식거리를 몇 개 먹기도 했으나, 해영은 기다리는 동안 마셨던 커피 한 잔이 다였다. 대신 곧 있을 바비큐 파티를 생각하며 두 사람은 빠르게 집 안으로 향했다.

도어 록을 누르고 문을 열자마자 다가온 집 안의 훈훈한 온기가 찬 바람이 닿았던 피부를 녹였다. 불도 전부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먼저 온 사람들이 꽤 있는 듯했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뒤 복도로 향하자, 1층의 다이닝 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소윤 또한 그걸 느꼈는지, 다이닝 룸을 향해 손을 뻗으며 해영을 돌아보았다.

“벌써 저녁 식사 준비하고 있나 봐.”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아직 차가운 외투를 팔에 걸치며 그가 소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서 도와야겠다.”

그 말을 들은 소윤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현관에서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복도의 중간에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층계에 발을 올린 해영에게 소윤이 이따 보자는 듯 눈짓할 때였다.

“어?”

멀찍이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소리의 근원지는 다이닝 룸이었다.

주방을 돌아다니던 와중 문득 발견한 건지, 아니면 소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내내 현관 쪽을 신경 쓰고 있던 건지 민호가 자신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해영은 아마 후자일 것이라는 데에 한 표를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민호가 누가 봐도 반가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꼬리를 활짝 끌어 올린 그가 앞뒤 잴 것도 없이 한걸음에 다이닝 룸 입구로 나오며 소윤을 불렀다.

“소윤, 왔어?”

“응! 오빤 언제 왔어?”

“나도 왔어.”

저는 보이지도 않는 건지 소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민호를 보며 해영이 픽 웃었다. 민호는 그제야 머쓱하게 그를 보며 눈인사를 했고, 해영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온 지 별로 안 됐어. 오늘 뭐 했어?”

“우리… 진짜 재밌게 놀고 왔어.”

그치? 자신을 힐긋 올려다보며 싱글벙글 웃는 소윤을 향해 해영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화답해 준 뒤 슬쩍 민호를 확인했으나, 기분이 크게 나빠 보이진 않았다. 두 사람의 뒤에 서서 해영은 누구도 모르게 속으로 안도의 숨을 삼켰다.

“놀이공원 다녀왔거든.”

“…놀이공원?”

“응, 사진도 찍었는데. 볼래?”

소윤의 말에 데이트 장소를 곱씹는 민호의 얼굴이 슬쩍 흐려졌다. 사진이란 말을 듣자마자 당황한 해영이 그녀를 말리려다 말고 꾹 주먹을 쥐었다. 말릴 수 있는 마땅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눈치를 보던 해영은 결국 소윤을 말리길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그는 급하게 몸을 돌려 계단을 밟았다.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피해 주려 했으나, 이마저도 계단을 내려오는 이와 맞닥뜨려 단번에 실패로 돌아갔다.

때마침 선우가 1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다소 피곤해 보이던 그는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언제 무표정했냐는 듯 얼굴에 살가운 빛을 띄웠다.

‘아, 진짜 망했다.’

어떻게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나 싶었던 해영은 차마 내뱉지 못한 욕설을 입 안으로 삼켰다. 그의 흔들리는 시선이 자신에게로 가까워지는 선우에게 향했다. 이런 삼자대면은 결단코 원한 적 없었다.

‘…사람이 넷이니까 사자대면인가?’

삼자대면이든, 사자대면이든 둘 다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해영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사이, 소윤도 계단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계단을 밟는 발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선우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비시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선우 오빠도 벌써 왔네.”

“응, 잘 다녀왔어?”

선선히 소윤의 인사를 받아 준 차선우는 한결같이 해영을 돌아보았다. 곧바로 자신을 향하는 시선에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해영을 눈에 담으며 선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차선우는 눈치가 빨랐고, 윤해영은 그의 앞에서 뭐든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눈을 피하는 것을 여지없이 알아차린 그가 눈썹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해영의 얼굴을 살폈다.

“흐음….”

의아한 얼굴을 하던 그가 이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둘러 묻는 것 없이 흘러나온 음성은 다정했다.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같은 건 애초에 품을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그의 물음에 멀거니 서 있던 민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소윤이랑 해영이가 사진 찍었다고 해서, 그거 얘기하고 있었어.”

“사진?”

민호의 말을 들은 선우의 시선이 다시금 해영을 향했다. 자신에게 꽂히는 눈길에 윤해영은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손을 들어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지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제가 한 일이 있었으므로 어쩐지 그를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놀이공원에서는 소윤과 아무런 이성적 교류 없이 순수하게 놀이 기구만 즐기다 왔던 것이니 떳떳하지 않을 게 없었지만, 사진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이성과 둘이서 찍은 데다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하필이면 데이트 도중 찍은 것이지 않나.

그건 선우에게든 민호에게든 오해의 여지를 남길 수 있는 증거물이었다. 진퇴양난 속에서 윤해영은 증거 인멸죄라도 저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맞다.”

그런 해영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소윤이 까먹을 뻔했다는 듯 집에 들어오면서 가방에 다시 넣어 뒀던 사진을 꺼냈다.

“짠, 진짜 귀엽지.”

빙긋 웃으며 꺼내든 사진에 단박에 시선이 꽂혀 들었다.

그 시선의 주인 중 하나인 민호는 돌이라도 된 듯 굳어 있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윤의 시선에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어, 귀…, 귀엽다.”

마지못해 대꾸해 놓고 눈을 껌벅이던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뒤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걸었다. 묘해진 기류에 해영이 조심스럽게 몸을 뒤로 물리며 소윤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졌다.

멀어지는 몸짓이 조용했고, 다른 이들의 신경은 온통 사진에 가 있었으므로 그에게 주목하는 시선은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빈말조차 꺼내지 않은 차선우의 시선이 해영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의 시선은 다시금 소윤의 손에 들린 사진에 못이라도 박힌 듯 들러붙었다. 방금까지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흔적만을 남긴 채 흐릿해졌다.

선우는 아무 말도 없이 입을 다문 채 사진을 주시하고 있었고, 해영은 그런 선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다만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보며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얹힌 듯 답답해질 뿐이었다.

‘아직… 나 좋아하지? 응? 해영아.’

어젯밤 선우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라 해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 물음에 쉬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던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형. 차라리… 화내면 안 돼? 화내고, 욕을 하면 안 돼? 그냥….’

나한테 잘해 주지 마. 이기적인 마음에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입 안에서 굴리며 윤해영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세면대에 쏟아지는 물줄기에 젖어 가는 자신의 손 위로 흰 손이 다가왔다.

‘매달리는 입장에서 화내는 사람이 어딨어.’

손등부터 감싸듯 쥐는 선우의 손길에 해영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나 좀 불쌍하게 봐 줘. …나 좀 봐 줘, 윤해영.’

이윽고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 그 바로 아래 목덜미까지 닿는 짧은 숨결. 욕실 안을 가득 울리는 거친 물소리조차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 순간.

그 찰나에서 오랫동안 도망치지 못하고 서 있었듯, 해영은 이번에도 제자리에 선 채 굳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이나 사진을 바라보던 선우가 몸을 돌린 후였다.

‘…미치겠네.’

다시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영은 손을 들어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제법 신경질적인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휙 고개를 돌렸다.

“너 그거 마실 거야?”

민호의 손에 들린 맥주를 발견한 해영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소윤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던 민호는 저를 향한 물음에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어? 어, 아니. 너 마실래?”

“응.”

민호가 얼떨떨한 얼굴로 건네는 맥주 캔을 손에 쥔 해영이 계단을 올라가는 층계를 밟았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내려오겠다 말하는 그에게 소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해영은 주저 없이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했다. 방으로 향하는 복도 앞에서 멈춰 선 그가 그 자리에서 캔 따개에 손가락을 넣고 그대로 뚜껑을 깠다.

치익, 탄산이 터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곧바로 캔을 입가로 가져간 해영은 꼴깍꼴깍 술을 목으로 넘겼다. 갈증이 가시질 않는 것처럼 멈추지 않던 그는 캔이 점차 가벼워지고 나서야 입을 뗐다.

손등으로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은 해영이 내용물이 반 정도 남은 맥주 캔을 들고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선우가 있는 곳이었다.

***

차선우 머니캐처라고 했던 발언 취소합니다

나 소윤해영 사진에서 시선 못떼는 선우 보면서 가슴 찢어질뻔했잖아...

누가 차선우한테 심장이 없댔어...

누구야...

(댓글 23개)

오른손 들어서 그대로 얼굴에 내리쳐

└미안 나 1화 보고 선우 따라서 왼손잡이 하기로 했어

작진 미친거 아냐? 어떻게 이렇게 끝낼 수 있어

담주 어떻게 기다려...다음편 예고 보니까 더 궁금해 미쳤네ㅜ

이 사각관계 개꿀잼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딱 복도에서 셋이 서로 존나 눈치게임 하고 있는거에서 끊기는거 보고 육성으로 비명지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나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패널들이랑 같이 소리질렀잖아ㅠㅠ

└다들 표정 관리 못하는데 소윤이 혼자 방긋방긋 ㄱㅇㅇ ㅠㅠ

근데 별개로 선우 되게 조용한거 같은데 해영이랑 있을 때는 왜이렇게 장난꾸러기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해영이가 민호방 가니까 졸졸 쫓아가면서 다정하네? 걱정된다고 다른 남자방에 가고 이러는거 ㅈㄴ웃겨ㅠㅠ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선우 해영이 좋아한다니까

└22나도 이게 맞는거 같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3333

└뇌절 금지;

└작작해ㅡㅡ 뭐만 하면 브로맨스로 먹는거 극혐

[예능] 러브라인 오늘자 윤해영 ㅅㅍ

민호랑 상담하면서 마음에 둔 사람 따로 있다고 하잖아 누구인 것 같아?

(댓글 16개)

난 세희 같던데

ㄴㄷ 세희

세희 같긴한데 해영이가 첫날 소윤이한테 문자 보냈던거 생각하면... 이번 데이트 결과 나와봐야 알듯

└맞아 변수 있다ㅇㅇ

민호..

└아 미친 존웃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능성있음 이 장면에서 선우는 딸 낳은 중전 민호는 아들 낳은 첩 구도임

└딸낳은중전ㅋㄱㅋㅋㅋㄱㅋㄱㅋㅋㅋㅋㅋㅋㅋㅋ

세희 같긴 한데 소윤이한테 흔들렸으면 좋겠어ㅠㅠㅠ 이번편 보면서 개설렘 유죄영 고소갈겨

└ㅁㅈㅁㅈ특히 생생네컷 찍은거 너무 예뻤음 해영이 넘 다정한거 아니냐구ㅜ

[본인표출] 나 근데 럽라 윤해영 대학동긴데 (회원 전용)

+) 회원전용으로 돌렸어 ㅠㅠ 근데 이미 퍼질 대로 퍼진것 같다...ㅎㅎㅠ

저번에 한 번 얘기했던 적 있어서 본표 달았어 ㅠㅠ

럽라 대본 아니고 해영이 찐으로 저런 성격이야 ㅋㅋㅋ 윤해영 대학 다닐 때부터 유명했어ㅋㅋㅋ 대형과라 과활동 참여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꼬박꼬박 참여하고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평판 좋아서ㅋㅋㅋㅋ

댓글 (82)

익명1

헐 대학동기익 왔네

익명2

뭐 일화 같은 거 없어?

글쓴이 (글쓴이가 고정함)

신상 안털리는 기준에서 기억나는 일화는.. 과에서 문제 생겨가지고 분위기 심각할 때였나? 선배들 싸해져서 후배 애들이 다 눈치보고 있는데ㅋㅋㅋㅋ 그와중에 윤해영이 여친 전화 받고 알겠어 지금 갈게 공주님~ 이러고 그냥 나가버린 적 있어ㅋㅋㅋㅋ 이건 좀 유명해ㅋㅋㅋㅋㅋㅋ (꽤 오래 사귄거로 알아 다들 그분이랑 결혼할 줄 알았음ㅎ) 아 그리고 여친없었으면 럽라 다른 출연자인 ㅊㅅㅇ랑 사귄다고 생각할 정도로 붙어다니기도 했고

익명3

공..주님?공주...님????????

익명4

그게 어떤 상황이었던거야? 저렇게 그냥 가면 분위기 더 조지는거 아님...?

글쓴이

일단 우리 과가 대형과라 선후배간의 끈끈한 건 별로 없거든? 근데 윤해영은 좀 과장보태서ㅋㅋㅋㅋㅋ1학년 1학기 내내 매일 다른 선배들이랑 밥약했다는 썰있어ㅋㅋㅋㅋㅋㅋㅋ 과사 선배들이랑도 친하고 학생회 선배들이랑도 다 친하고...ㅇㅇ 저때는 우리가 아니라 아래 학번에서 문제 터진 거였는데

글쓴이

우린 선배들 눈치 보이니까 대놓고 말리지는 못하고 있었거든.. 근데 해영이가 전화 받고 나가면서 진짜 바쁜 일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 이번 일은 자기가 해결해보겠다고 선배님들은 걱정마세요~ 이래서 다들 공주님 기다리시면 가봐야지 이러곸ㅋㅋㅋㅋㅋㅋ 넘어갔었어ㅋㅋㅋㅋㅋ 이후로 다들 해영이 볼 때마다 공주님 잘계시냐고 물어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69

쓴아 이거 퍼갈 수도 있으니까 회원전용해 ㅜ

익명70

이미 퍼진듯 걍 인사나해✌✌

익명71

근데 ㅇㅎㅇ 사실상 연예인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인데 이런 식으로 일화 다 까발려지는 거 별로인 것 같아.. 사생활은 지켜줘야지

익명 73

이미 럽게까지 생겼는데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리야??? 다른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뭔데 그럼??

익명 71

당연히 그 프로그램 참가자들 사생활도 지켜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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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S???? @Lossluvline ·202X.3.11

알티한거 봤는데 난 걍... 여친 공주 대접하는 윤해영이 바로 상상되고.. 너무 잘 어울려서 할말 잃음ㅋㅋ 얘들아 일단 후퇴하자...

???? ↺ ♡ 34

젤로???? @y8jKnd2vlrsjq

그래서 담주 본방 볼? 말?

LOSS???? @Lossluvline

아ㅋㅋ 그건 봐야지

LOSS???? @Lossluvline ·202X.3.11

근데 혹시 차선우랑 사귄거 아닐까...? 둘이 친했다며...ㅎ .. 이런 말 하지말까...??

???? ↺ ♡ 67

선해???? @sunssun014

각떴다 선우해영 CC 맞다

LOSS???? @Lossluvline

이거 맞아? 일단 내 눈에는 객관적으로 선우 공주같긴 한데

선해???? @sunssun014

공주 맞아 증거 가져옴

(ef3ncBjVAAE2cjh.gif)

何 @ojima_bojima ·202X.3.11

대학 새내기 때였을거임 추운 겨울날에 경경관 앞에서 윤해영 준다고 커피 두개 사서 윤해영 마주치자마자 선배님 안녕하세요! 마침잘됐다 제가 친구 주려고 커피 한잔 더시켰는데 친구가 갑자기 못온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거든요ㅠㅠ 하고 커피 건네는데

???? 17 ↺ 31 ♡ 56

何 @ojima_bojima ·202X.3.11

윤해영이 그럼 잘마실게, 지마야. 하면서 웃어주고 근데 계속 밖에 있던거야? 추워 보이는데, 이거라도 입고 있을래? 하면서 들고 있던 외투 나한테 잠깐 들려줌. 헐 뭐야 이거 그린라이트인가? 하면서 흘끔흘끔 바라보는데 갑자기 윤해영 얼굴 존나 환해지더니

何 @ojima_bojima ·202X.3.11

이제 가봐야겠다. 옷은 추울테니까 조금 이따 강의실에서 돌려줘.하고 달려감... 그래서 뭐지?하고 보니까 멀리에 차서누가 있음...윤해영 외투 없다고 차선우가 자기 외투 벗어줌 그럼 또 윤해영 그거 입겠다고 커피 잠깐 차서누한테 건네는데 서누 그걸 또 거리낌없이 마심..........

何 @ojima_bojima ·202X.3.11

난 그 모습을 존내 바라보기만 하면서 아......하고 혼자 마음속으로 이래서 ㅅㅂ잘생긴 사람들은 다 끼리끼리 만나는거지...하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는 유사연애

hikikuu @likehikiiw

ㅋ아니 진짜 도라이냐고 윤해영 실제 학식썰인줄 알고 흥미진진하게 보다가 갑자기 선우씨가 등장함 여기서부터 뭐지?싶었는데 이자식 혼자 알페스 퍼먹는거였음

3/28공일이컴백 @012486ww__

와ㄷㄷ이정도 디테일이면 고소당해도 사실적시 명예훼손 성립할듯

럽라과몰입러 @i_lovefemale ·202X.3.18

소윤깅 진짜 귀여운 점: 놀이공원에서 해영이 쫓아가는 동안 뒤에서 모자에 있는 토끼귀 세우는데 이때 까치발 드는거

(2128391110.gif)

???? 1 ↺ 164 ♡ 98

hikikuu @likehikiiw ·202X.3.18

7화 보면서 머리 쥐어뜯는중

윤해영 우리 엄마 사위가 되지 못할 바엔 그냥 게이해

???? 4 ↺ 52 ♡ 40

LOSS???? @Lossluvline

이미 선우랑 뉴질랜드에서 식 올렸다고 하네요,,, 그럼 이만

hikikuu @likehikiiw

선우씨는 좋겠어요..? 랩잘하는 남친 둬서....ㅋ

러브라인 윤해영 대한고 졸업식 랩

조회수 51만회 · 12일 전

???? ????

김수영 〔구독〕

(댓글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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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님이 고정함

윤해영 • 5일 전

수영아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근데 영상 좀 내려주면 안 돼? 만나면 밥살게 ㅋㅋㅋ

???? 890 ????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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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럽시처럽시 • 5일 전

찐?????

진세영 • 5일 전

진짜 본인인가..?

곰bear • 5일 전

본인등판했는데 냅다 고정해놓은게 킬포네ㅋㅋㅋㄱㅋㄱㅋㄱㅋㄱㅋㅋㅋㅋㅋㅋ

미스터텅텅 • 4일 전

헐 랩 너무 잘 들었어요ㅠㅠ 다음은 쇼미더머니 출연해주세요♡

강희나 • 4일 전

@미스터텅텅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쇼미더머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방문 앞에 선 해영은 입고 있던 니트 안쪽에 붙은 마이크를 떼어 냈다. 그러고 나서야 방 안으로 들어가, 문 바로 옆에 놓인 협탁 위에 마이크를 올려 두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 시선은 곧장 방 안을 훑었다. 조명은 전부 켜져 있는데, 정작 그가 찾는 사람은 없었다.

“…형?”

조금은 눅눅한 목소리가 선우를 불렀다. 대답 대신 테라스로 향하는 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미약한 찬기가 해영에게 닿았다.

어쩐지 선우가 테라스에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유리문을 향해 다가가 흰 커튼을 치워 내며 문을 열었다.

차선우는 예상대로 그곳에 있었다. 밤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서 있는 뒷모습에 문득 심장이 철렁였다. 긴장해서인지 목덜미가 빳빳해진 해영이 저도 모르게 맥주 캔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알루미늄 캔에서 까드득,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푼 그는 자신을 돌아보는 선우에게로 다가갔다.

“왜 나왔어. 추운데.”

자신을 돌아본 선우는 놀란 듯한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덤덤히 다정한 음성을 흘렸다. 방금 선우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듯이, 아마 제가 올 거라는 것을 그 또한 확신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누가 누굴 걱정해…. 내뱉지 않은 말을 삼키며 해영이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에 담긴 그의 얼굴은 제법 처연해 보였으나,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는 끝내 숨기지 못한 채였다.

그의 예상대로 행동한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화가 나지도, 웃음이 나지도 않았다. 윤해영은 제가 타인에게 곧잘 휘둘리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차선우 앞에서는 잘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속절없이 휘둘리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는 것은 제 마음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영이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내가 나와서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니야.”

“정말 아니야?”

“…….”

이럴 줄 알았지. 대답하지 못하고 애매한 미소만 흐릿하게 걸고 있는 선우를 보며 해영이 한숨을 삼켰다. 겨우 맥주 몇 모금 마셨다고 취기가 오른 건지, 속에서부터 홧홧한 불이 붙은 것 같았다.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차갑게 언 공기가 살갗을 할퀴듯이 스치고 지나가는 날씨였다. 차선우는 이런 겨울밤에 겉옷도 걸치지 않고 홈 웨어 차림으로 있었다. …제정신이야? 설핏 미간을 찌푸린 해영이 선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해영이 제 겉옷을 자신에게 둘러 주는 것을 보던 선우의 눈빛에 점점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가 아는 해영은 미안한 일이 있으면 금방 굳은 얼굴로 입꼬리를 내리곤 했다. 입꼬리를 축 내린 채 묵묵히 제게 옷을 입혀 주는 걸 보니 속으로는 쩔쩔매는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와.”

“너 입어. 너야말로 감기 걸리면 어떡해.”

“형한테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형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해영은 울컥 치미는 마음을 꾹 누르며 선우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혼자 울고 있을 것 같은데 모르는 척해?”

툭툭 모난 말을 던지는 건 자신이면서도 윤해영은 제가 던진 돌을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언제부터인가 속에서 응어리지던 불안이 점점 몸집을 불리더니 이제는 밖으로 나가고 싶다며 목구멍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불안의 이름이 뭔지 알 것 같았으므로 해영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삼켰다.

있던 정이 떨어질 만도 하지 않나. 해영은 선우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고 웃으며 대화를 하는 걸 보면서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다지 보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지 차선우는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순간마다 번번이 제 앞에 나타났다.

어쩌면…. 벌을 받는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순간에서도 자신에게 이전처럼 다정하게 굴었으니까.

“울면 곁에 있어 줄 거야?”

“울기만 해 봐.”

슬쩍 말꼬리를 늘리던 선우는 대번에 돌아온 따끔한 목소리에 소리 죽여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면서도 해영은 쉬이 속의 불안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게 마냥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내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이 달빛 아래서도 쓸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데이트 재밌었어, 해영아?”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

“다정하게 사진도 찍고.”

“그건.”

해영은 답답한 마음에 꺼내려던 말을 다급하게 삼켰다. 변명하고 싶은 것도, 반박하고 싶은 것도 있었으나 지금 와서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중요한 건 무슨 마음으로 다녀왔는지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어떤 이유에서 간에 데이트를 다녀왔다는 것, 그게 문제였다.

답답한 마음에 해영이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할 말은 많았으나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꾹 삼킨 그의 입에서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정하긴 뭐가 다정해. 우리 진짜 그냥 친구처럼 놀다 왔어.”

“친구?”

“그래, 친구.”

“앞으로도 친구일지 어떻게 알아, 해영아. 너는 너무… 경각심이 없어.”

뭐라는 거야. 선우를 올려다보던 해영이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자신의 경각심을 끊임없이 무너트리는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차선우. 그런 그가 제게 경각심이 없다느니 하는 게 황당할 지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린 해영이 눈에 힘을 주었다.

잠시간 그와 눈싸움을 하던 해영은 기어코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입가로 가져갔다. 남아 있던 내용물을 전부 입 안에 쏟아 넣는 동안 선우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콰직, 손안에서 구겨지는 맥주 캔을 꽉 쥐며 해영이 다른 손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형,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제대로 들어. 나는 다른 사람 못 만나.”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확언에 선우가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아 씨 진짜.”

해영이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제 발언의 신뢰성을 지적하는 물음이었다. 그는 술기운이 올라 뜨끈해진 뺨을 손등으로 덮으며 그를 뚫어질 듯 주시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너 아니면 안 되는데.”

쓸쓸한 목소리가 겨울바람처럼 해영의 심장에 시리게 박혀 들었다.

문득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꿈 깨라던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순간에, 해영은 그가 건네는 애정이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차선우는 한결같이 해영이 다른 이들과 연애를 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말했다. 매달릴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라는 걸 전제한 듯한 태도에 윤해영은 이제 당황을 넘어 슬슬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럼 누구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진짜 매달리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고작 맥주 한 캔이었는데도 너무 급하게 들이켜서인지 속에서 금방 홧홧한 취기가 올랐다. 억울한 마음이 치미는 게 그저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모르겠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차선우가 처음부터 틀린 가정을 전제로 말을 꺼내고 있단 것뿐이었다.

틀린 건 바로잡고 넘어가야 했다. 해영은 선우를 노려보던 눈에 힘을 풀었다.

“내가 형을 만나다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 눈에 차겠냐고. 미안한데, 형도 멀쩡한 남자 하나 혼삿길 막아 놨으니까 우리 적당히 합의하자.”

“그럼 그냥 혼삿길 막힌 남자 둘이서 결혼하면 안 될까?”

“…….”

말문이 막힌 해영이 벌어져 있던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알코올 섭취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였던 탓에 하마터면 선우의 논리에 넘어갈 뻔했던 것이다.

한 번도 타인에게 쉽게 휘둘리는 성격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선우와 함께 있으면 의식할 새도 없이 그의 말에 쉽게 설득되곤 했다. 정확히 따지자면 말보다는 비언어적 요소에 의해 매료되는 것에 가깝긴 하지만, 여하간 차선우는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 재능이 있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냥 미친 척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르는 척 넘어가 그를 제 곁에 둬 봤자 더 많이 손해 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차선우 아닌가.

“하….”

결국은 그게 문제였다. 해영의 입에서 입김과 함께 토해진 가벼운 한숨이 허공에서 희뿌옇게 흩어졌다. 선우와의 관계에 외면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매달리고 싶어져서 씁쓸했다.

슬쩍 고개를 들자 물기가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선우가 보였다. 그 얼굴에 자연스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태연함을 가장한 해영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듯 입을 열었다.

“형 원래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었어? 어떻게 깜찍하게 5년을 속였지.”

눈꼬리에 눈물까지 단 채로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선우는 그 말에 곧장 눈을 크게 떴다.

“나 귀여워?”

순전히 그게 궁금하다는 듯 순수한 되물음에 해영의 손안에 있던 맥주 캔이 얇게 찌그러지는 소리를 냈다.

이 형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선우를 올려다보며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리던 그가 설핏 미간을 모았다.

“아니, 지금 그 말이 형이 귀엽다는 게 아니잖아.”

귀엽긴 한데….

해영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물끄러미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당황을 오히려 반기는 듯한 선우의 모습에 기가 찬 해영이 다시금 할 말을 잃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자신을 바라보는 눈꼬리가 슬쩍슬쩍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기 시작한다. 방금까지 서러워하던 낯은 어디로 갔는지, 틈을 보이자 또 금방 파고드는 그를 보며 해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줄 것 같은 눈동자를 보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일렁거리곤 했다. 예전에는 그런 순간마다 손을 뻗어 그를 제게로 끌어당겼다. 이제는 그럴 수 없어 허전해진 품으로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빳빳해진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해영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응.”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어차피 여기서 신경 쓰이는 사람은 형밖에 없어.”

주저하던 끝에 내뱉은 말은 그것이 담고 있는 마음만큼이나 단단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단 한 순간도 변한 적이 없음을 나타내듯.

해영은 제가 꺼낸 말에 놀라지도, 곤란한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무의식중에 저도 모르게 토해 낸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발아래 그어져 있던 선 위를 툭 밟은 채 어딘가 뚱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올라가자 마주친 눈동자가 어쩐지 놀란 기색을 담고 있었다.

저를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숨기지 못했을 텐데도 차선우는 마치 이제야 알기라도 했단 양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전에 대놓고 신경이 쓰인다는 유의 말을 꺼낸 적도 있으니,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 또한 어느 정도 연출된 장면일 것이다.

해영이 삐딱한 눈빛을 하자 선우가 곧장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게 무슨 의미야?”

…알면서. 제가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 알면서 물어보는 게 틀림없었다. 해영이 다소 짜증스럽게 고개를 기울이자 입 밖으로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 선우가 발을 뻗었다.

해영이 밟고 있는 선 위로 또 하나의 발이 성큼 올라왔다. 선우는 조심스럽게 발을 걸친 해영과 달리 성큼 그에게로 다가섰다. 꾹 웃음을 참는 얼굴이 해영의 이름을 불러 왔다.

“해영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여지없이 묻어났다. 제게 다가와 몸을 숙이는 선우를 보면서도 해영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지기 싫다는 듯 제 시선을 피하지 않는 해영을 보며 선우의 입꼬리에 밴 웃음은 더더욱 진해져만 갔다.

“대답 안 해 주면 내 마음대로 생각할 거야.”

“…….”

“나 기대해도 돼?”

선우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해영의 어깨로 손을 올렸다.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올라간 손끝이 어깨를 간질이듯 붙잡았다. 그 간질거림에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린 해영이 저를 보며 웃는 선우를 비딱하게 주시했다.

결국, 먼저 항복을 선언한 사람은 해영이었다.

“형이랑 계속 같이 있어서 그런지, 자꾸 우리가 헤어졌다는 걸 까먹게 돼.”

조금 전의 단단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담백하게 뱉어진 진심이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기가 처음 다짐했던 것과 달리 선우를 밀어 내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툭툭 이전 버릇이 나오곤 했던 것만 봐도 얼마나 긴장을 풀었는지 알 수 있었다. 최근에는 제가 그렇게 군 걸 의식하고 나서도 후회는커녕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나.

새삼스럽게 되짚어 보고 나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해영은 제가 뱉은 말을 주워 삼키는 대신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사실은… 잊고 싶은 것 같아. 어떡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정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헤어지고 난 뒤 취해야 할 적절한 태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이 이끄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그어 놓았던 경계는 선우의 앞에 설 때면 번번이 흐려졌다.

“나 진짜 어떡하지, 선우 형….”

뒤이어 내뱉어진 말은 이전보다 힘 빠진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자조 섞인 목소리에 해영의 어깨를 잡은 선우의 손끝에 설핏 힘이 실렸다.

“…해영아.”

그가 속삭이듯 자신을 불러왔을 때. 다시 한번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해영은 한겨울의 추위를 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날 포기하지 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꺼내진 말은 다정한 동시에 파괴적이었다.

그와 헤어지던 봄은 추웠고, 여름엔 내내 비가 내렸다. 여름내 눅눅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찾아온 가을은 짧았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 탓에 계절이 변한 것도 모른 채 겨울을 맞이한 속은 바닥에 떨어진 낙엽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그러니 한동안 낙엽 부스러기처럼 건조하던 마음에 떨어진 불씨가 단숨에 몸집을 키우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주린 뱃속 가득 차오르는 연기에 가슴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 건네는 울림은 속을 어수선하게 했다. 저도 모르게 꽉 주먹을 그러쥔 해영이 선우가 뱉은 단어를 곱씹듯 중얼거렸다.

“…포기.”

“나는 못 하니까.”

확고한 음성에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시선에 담긴 차선우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딘가 조급해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입가에 걸린 미소가 오히려 선우를 짓궂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가 이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을 때면 해영은 자연스럽게 선우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의 연상은 자꾸만 그때의 감정들을 울컥 되살아나게 한다. 해영은 눈에 뭐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 괜스레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다가 또다시 긴 한숨을 내뱉는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퍼지는 흰 입김과 그 사이로 보이는 선우의 시선이 늘 그렇듯 선명했다.

해영은 답답한 마음을 숨길 수 없어졌다. 서러움이 담긴 목소리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왜 못 해. 형은 속도 없어?”

내가 형 찼잖아. 형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데도 못 본 척 그냥 돌아섰잖아. 쫓아와서 붙잡은 손 전부 뿌리쳤잖아.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해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뿐일까. 헤어지고 나서 연락처도 바꾸고, 말도 없이 집에서 짐도 뺀 채 나왔다. 그렇게 그의 인생에서 자신을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 동안 해영은 몇 번이고 선우를 떠올려야만 했다. 그를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틈만 나면 자신도 모르게 선우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으므로.

상념에 잠겨 무의식중에 짓씹던 입술 위로 차가운 손길이 닿았다. 해영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불쑥 가까워져 있는 선우가 여느 때보다 단호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힘주어 다물렸다가 떨어진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윤해영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뻗을 뻔한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차선우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견고한 사람이었다.

자존심도 내려놓은 채 매달리고 싶을 만큼, 영영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눈길을 주는 사람.

“너만 있으면 돼, 해영아.”

그 말을 들은 순간 해영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어졌다.

멀찍이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해영아? 선우 형?”

저를 불러 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해영이 유리문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길쭉한 실루엣을 보지 못했더라도 밝은 목소리를 통해 상대가 민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해영은 짧게 혀를 차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찾으러 왔나 봐.”

“…그러게.”

해영의 말에 선우의 느릿한 긍정이 뒤따랐다. 들어가자며 안쪽을 향해 고갯짓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으로 향하면서도 해영의 어깨에 올린 손은 내리지 않은 채였다.

마침 테라스로 향하는 유리문 앞에서 기웃거리던 민호가 안으로 들어서는 둘을 발견했다.

“둘이 밖에서 뭐 하고 있었어?”

“알면 다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민호를 향해 해영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가 자기 빼고 둘이서 뭘 했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취조에 더 얼버무리다간 귀찮아질 것을 예상한 해영이 대충 말을 돌렸다.

“근데 왜 불렀어?”

“아, 맞다.”

민호가 까먹을 뻔했다는 듯 아차 하는 얼굴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방 밖을 가리켰다.

“바비큐 준비 다 돼서 부르러 왔어.”

그 대답에 해영의 얼굴에 설핏 낭패감이 스쳤다.

원래는 얼른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내려가서 준비를 도울 생각이었으나, 선우와 마주친 이상 도저히 그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선우의 뒤를 쫓아 2층으로 올라와서부터는 온전히 마음이 가는 대로 했다. 왜 그랬을까. 자문해 봤자 뻔한 물음을 해영은 괜스레 곱씹었다.

‘…스무 살도 아니고.’

아마 이 집에 들어온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이 늘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고, 언제든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들이 가득 찬 꿈같은 공간. 촬영 장소일 뿐이었던 집은 생각보다 더 안락했다.

현실과 유리된 공간의 힘은 컸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 줄곧 고민하던 것에서 신경을 돌릴 수 있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해영은 슬쩍 제 옆에 서 있는 선우를 눈짓하다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마음을 잘 감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스로를 너무 과신한 듯했다.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해영이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마이크를 다시 집어 들었다.

니트 안쪽에 다시 마이크를 고정시킨 그가 자신을 기다리는 민호를 따라 방을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서 흘긋 뒤를 바라보니 저를 뒤따라오고 있는 선우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잠시 눈썹을 치켜들더니 곧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뭐 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층계를 반쯤 내려가다 뒤를 돈 민호가 왜 안 오냐는 듯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런 민호를 발견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해영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 해영아.”

정원으로 나가기 위해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던 때였다. 뭘 담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쟁반만 한 그릇을 양손으로 들고 있던 다인이 해영을 보며 아는 척을 했다.

“다인아, 그거 가지고 나가려고?”

해영은 그녀를 향해 다가가 들고 있던 그릇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 물 흐르듯 해영에게 접시를 뺏긴 다인이 잠시 눈을 깜박거리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휘 오빠가 고기 담을 접시 필요하다고 해서.”

“…벌써 고기 굽고 있어?”

“응, 다들 배고프대서. 지금 벌써 8시잖아.”

그녀의 말에 서둘러 정원으로 향하는 유리문 밖으로 몸을 뺀 해영이 이내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다 차려져서 제가 도울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텐트인지 뭔지, 찬 공기를 막아 줄 거대한 천막도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는 것도 머쓱한데, 이번에는 숟가락조차 올릴 구석이 없었다.

“아, 나도 도왔어야 하는 건데.”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해영을 올려다본 다인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냐! 이거 처음부터 이렇게….”

허둥지둥 해영을 달래던 그녀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곧 입을 벙긋거리며 ‘제작진분들이 준비해 놓으신 거야.’ 하고 언질을 줬다. 카메라에 잡힐세라 눈치를 보며 속닥이는 다인의 모습에 해영은 안도와 함께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전보다 편해 보이는 옷 위에 두툼한 외투를 걸친 소윤도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까지 나오자 해영은 선우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정원으로 발을 디뎠다.

“형.”

“다녀왔어?”

짧은 부름에 고개를 돌린 재휘가 제 옆으로 다가오는 해영을 발견했다.

그는 정원 한쪽에 있는 그릴 앞에 집게를 들고 서 있었다. 다른 출연자들은 옆에 세팅된 테이블에 하나둘 앉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가 고기를 굽겠다고 나선 모양이었다. 흘긋 눈짓해 상황을 확인한 해영이 재휘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내가 구울까요?”

“아냐, 됐어. 앉아 있어.”

집게를 달라는 듯 손을 내미는 해영에게 재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고기라도 제가 구울까 했던 그는 재휘의 사양에 으음, 하며 짧게 아쉬운 소리를 흘렸다. 그런데도 선뜻 발길을 떼지 못하고 있던 해영이 재휘의 덩치에 가려져 있던 이를 발견하곤 눈썹을 치켜올렸다.

“세희 누나?”

“이제야 본 거야?”

저를 향해 짓궂게 웃는 세희에게 반사적으로 눈인사를 하곤 잠시 멀뚱히 내려다보던 해영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말없이 고기를 굽고 있는 재휘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그릴만 내려다보는 줄 알았는데, 그 또한 저를 힐끔거리고 있었는지 곁눈질하는 재휘와 눈이 마주쳤다.

정원으로 나온 후 재휘에게 다가서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니, 아마 제가 나오기 전부터 세희는 그의 옆에 있었을 것이다. 재휘와 세희를 번갈아 보던 해영의 눈매가 설핏 가늘게 늘어졌다.

“흠….”

어쩐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해영은 그걸 구태여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애초에 남의 연애사에 크게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을 게 분명한 상황에서 쓸데없는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으니까.

들고 있던 접시를 세희에게로 건네준 해영이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해영아, 여기.”

테이블을 향해 몸을 돌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부르는 선우가 보였다.

다른 이들은 전부 앉아 있는 와중 홀로 서 있는 모습에 해영의 손끝이 설핏 떨렸다. 주저하지 않고 다가간 해영이 자리에 앉으며 고갯짓을 했다. 서 있지 말고 어서 앉으라는 몸짓이었다.

테이블의 중앙에는 널찍한 접시가 들어갈 공간이 넉넉하게 비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고기를 놓을 곳인 듯싶었다. 먼저 자리에 잡은 탓에 좀 더 중앙 가까이에 앉게 된 해영이 가장자리에 앉은 선우를 힐끔거렸다.

‘조금 먼 것 같긴 한데….’

해영이 선우와 테이블을 번갈아 보는 동안, 재휘가 고기와 구운 야채가 잔뜩 올라간 접시를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고기는 표면이 반질거렸고, 바싹 익어 먹음직스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재휘의 뒤를 따라 들어온 세희가 비어 있던 해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재휘의 자리는 선우의 맞은편이 되었다.

“배고프죠. 얼른 식사합시다.”

“와,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재휘 오빠!”

재휘의 덤덤한 말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신나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잔뜩 쌓여 있던 고기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자 금방 반절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영도 쭉 팔을 뻗어 집게를 쥐고 가운데에 모여 있는 따끈한 고기 몇 점을 집어 들었다. 깨끗한 선우의 앞접시 위로 올려 준 후, 다시 팔을 뻗어 제가 먹을 고기 몇 점을 가져왔다.

“다들 데이트는 어땠어요?”

말을 꺼낸 것은 대각선 자리의 테이블 끝에 앉은 현아였다.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해영이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마냥 가볍게만 들리지 않는 그녀의 말은 잔잔하게 보이던 호수에 던진 돌멩이와도 같았다. 갑작스레 생긴 파동 속에서 은근히 얽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묘한 기류를 만들어 냈다. 그 분위기에서 입에 구운 고기를 집어넣던 해영은 그녀의 시선이 제 옆으로 향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현아의 시선을 따라 옆을 슬쩍 눈짓했다. 옆으로 본 시야에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은 채 주위를 살피고 있는 선우가 있었다.

“아.”

가벼운 탄식을 짧게 흘린 해영이 고기 옆에 있던 양념 그릇을 집었다. 차선우가 생마늘을 먹지 않는다는 걸 잠시 깜박했다. 그는 선우 앞에 놓인 작은 그릇 안에 있는 편마늘을 전부 제 그릇에 옮겨 두었다.

대신 해영은 빈 그릇 안에 양념장들을 조금씩 덜어 다시 선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고마워.”

제 앞에 놓이는 양념 그릇을 보며 선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인사했다. 늘 그렇듯 사소한 행동에도 꼬박꼬박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선우에게 해영 또한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퍼진 기류에서 한 발짝 멀어진 채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식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어진 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선우 씨도 팔이 있는데.”

흐음. 콧소리와 함께 새어 나온 말에 입가에 고기를 가져가던 해영의 몸이 멈칫 굳었다. 시선을 들어 앞에 앉은 세희를 바라보자, 알 만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그녀가 보였다.

…뭐야. 그 시선에 돌연 억울해진 해영이 허공에 들려 있던 고기를 입 안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고기를 소리 없이 우물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해영에게 세희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희의 말에 선우의 시선이 해영에게 향했다. 살짝 틀어진 고개는 줄곧 제 옆에 앉은 해영에게 향하고 있었으나, 해영은 여전히 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로 향하지 않는 눈을 좇으며 선우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낮은 목소리로 내뱉어진 긍정에 앞을 향하던 시선이 제게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의식하지 못한 채 설핏 찡그리고 있는 해영과 눈이 마주쳤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안에 제가 담기는 것을 주시하며 차선우는 기분 좋게 입꼬리를 당겼다. 건조하던 눈결에 단숨에 웃음기가 어렸다.

해영이 저를 보며 눈웃음치는 선우의 모습에 어쩐지 이유 모를 불길함을 느낄 때였다. 선우가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을 그러쥐며 그 위로 턱을 괴었다.

“제가 손을 쓰기도 전에 해영이가 다 해 주네요. 마음을 읽었나.”

나긋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다정했다. 언뜻 장난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웠으므로, 그의 앞에 앉은 재휘는 아무 생각 없는 멍한 얼굴로 쌈을 싸 입에 넣었다.

크지 않은 목소리라 오늘 했던 데이트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은 듣지 못한 듯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다른 이들의 얼굴을 살피던 해영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세희가 잡혔다.

“…그렇구나.”

가만히 선우를 관찰하듯 응시하던 그녀가 흥미롭다는 말투로 물었다.

“텔레파시라도 통했나?”

“그런가 봐요.”

짓궂은 물음에 차선우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사근사근하게 긍정했다.

오히려 동요한 쪽은 해영이었다. 선우야 그렇다 쳐도, 세희까지 그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출연자 중 저희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아닌가.

슬쩍 떠보는 듯한 시선에 당황하던 해영이 이내 태연을 가장하며 입꼬리를 당겼다. 그녀가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이런 묘한 분위기를 더 이어 나가는 건 사양이었다. 괜히 제 발이 저려 당황하게 되는 건 자신뿐이었으니까.

구차하게 입을 열어 구구절절 변명을 꺼내는 대신 해영은 몸을 돌렸다. 고기 몇 점을 더 집은 그가 제 옆에 앉아 있던 민호의 접시 위로 올렸다.

“어?”

한창 오늘 한 데이트 얘기가 나와서 그 주제에 정신이 팔려 있던 민호가 제 접시에 올라온 고기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기 집게를 다시 그릇 위로 내려 두던 해영이 저를 바라보는 민호의 시선을 발견했다.

놀란 듯 동그래진 눈에 곧 감동의 빛이 물결치며 떠올랐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해영은 실소를 삼키며 덤덤히 말했다.

“접시 비었길래.”

“너 왜… 나 꼬셔?”

“…….”

반사적으로 지랄하지 말라고 말할 뻔한 해영이 꾹 입을 다물었다. 이 새끼는 귀엽기는 한데 종종 오버하는 게 문제였다.

잠시 고민하던 해영의 입매에 장난기가 비쳤다. 곡선을 그리던 입술이 열리며 담백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고기 집어 주면 넘어와?”

“아니, 네가 갑자기 챙겨 주니까.”

“쉽네, 김민호….”

해영의 중얼거림에 민호가 금세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반대로 축 늘어진 눈썹이 그의 황당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야, 나 쉬운 남자 아니야.”

야. 해영, 윤해영. 듣고 있어? 옆에서 들려오는 항변을 간단히 흘려들으며 해영이 시선을 돌렸다. 눈에 들어온 이는 막 맥주 한 캔을 전부 비운 거 같은 재휘였다.

“형, 한 캔 더 줘요?”

해영이 제 앞쪽에 있는 맥주 캔들을 가리키며 그를 불렀다.

“너는?”

고개를 끄덕인 재휘가 해영에게 되물었다.

“아, 난 아까 이미 한 캔 마셔서.”

시원스레 웃으며 대답한 해영이 맥주를 집었다. 그는 몸을 반쯤 일으켜 재휘에게 맥주 캔을 건네주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해영이 분주하게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건네자, 세희와 선우 사이에 이어지던 대화는 흐지부지 사그라들었다.

“해영아, 이거 진짜 맛있어.”

이후 제가 짓궂었던 걸 알았는지 세희는 시선이 스칠 때면 미안하다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그에 해영 또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동안 고기가 쌓여 있던 접시는 슬슬 바닥을 보였다. 분명 대화가 끊이질 않았는데도 인원이 여럿이어서 그런지 고기가 사라지는 속도가 빨랐다. 먹은 양이 적진 않은데, 아무도 배부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 형, 내가 고기 더 구워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한 재휘를 말린 해영이 제가 구워 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접시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소윤이 재빨리 집게를 들고 남아 있던 고기를 다른 접시로 옮겼다.

그녀로부터 집게를 건네받은 해영이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했다. 그는 곧 접시와 집게를 들고 캐노피 텐트를 빠져나와 그릴 앞으로 다가갔다. 고기는 그릴 옆 테이블에 놓인 아이스박스에 있었다.

반쯤 열려 있는 아이스박스에서 고기를 꺼냈다. 대충 이 정도면 되려나. 설핏 미간을 모은 해영이 인원수를 생각해 먹을 수 있을 만한 양을 불판 위로 올려 두었다.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은 그릴 위로 올라간 고기들이 치익, 소리를 내며 빠르게 익어 갔다.

“해영아.”

고기를 굽는 데 집중하던 그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부른 이는 다름 아닌 선우였다. 해영이 제게로 다가오는 선우를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응?”

추운데 안에 있지 않고 왜 나왔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을 때, 입가로 불쑥 손이 다가왔다.

“아.”

입을 벌리라는 듯 선우가 아, 하며 입가에 쌈을 가져다 댔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입을 벌린 해영의 입 안으로 작은 쌈이 쏙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쌈을 받아먹은 해영이 저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선우를 눈치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건 낯이 다정스러웠다. 쌈을 우물거리던 해영이 뒤늦게 시선을 돌려 익어 가는 고기들을 열심히 뒤집었다.

노려본다고 해서 고기가 더 빨리 익는 것도 아닌데 그의 시선은 불판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고기를 뒤적거리던 해영이 집게를 쥐지 않은 손등으로 제 뺨을 짚었다.

“많이 뜨거워?”

얼굴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 몸짓을 놓치지 않은 선우가 곧장 물어 왔다.

“많이는 아니고. 불… 앞에 서 있어서 그런가 봐.”

단지 그것 때문에 얼굴을 가린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고기를 굽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얼굴에 열이 올랐을 때 변명할 거리를 찾기 어려웠을 테니까.

“집게 나 줘. 해영아.”

“아니야, 다 구웠어. 이제 옮겨 담기만 하면 돼.”

손을 내미는 선우에게 고개를 내저은 해영이 반듯이 잘린 고기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다시금 수북이 쌓인 고기 접시를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접시는 그보다 빠르게 허공에 들렸다.

먼저 접시를 집어 든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선우였다. 그가 고기가 든 접시를 든 채 안으로 들어가자며 텐트를 향해 고갯짓했다. 그 탓에 허공을 휘젓게 된 해영이 선우를 보며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이내 허물어진 입가에서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에게 약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바비큐 파티를 거하게 끝내고 나서 뒷정리를 하는 동안에도 다들 들뜬 모습을 보였다. 다른 날도 아니고 12월의 마지막 날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신년을 앞둔 시간은 새삼 여러 기분을 들게 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결국, 입주할 때 미니 빔 프로젝터를 들고 왔다는 민호의 말에 다들 영화를 보자며 의견을 모았다. 12시를 알리는 종이 치기 전까지는 잠들지 않겠다는 열의가 대단했다. 슬슬 졸린 것은 자신뿐인 듯했다.

“해영, 볼 거지?”

뒷정리를 끝내고 집 안으로 들어서던 도중 민호가 물어 왔다. 해영은 입가를 가린 채 작게 하품하다 말고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내내 프로젝트를 준비한 피로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오늘 놀이 기구를 타러 온종일 돌아다닐 때는 피곤하다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뒤늦게 밀려온 피로에 해영이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서며 뻑뻑한 눈을 비볐다.

“많이 피곤해, 해영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슬쩍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선우가 금세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걸었다.

느릿하게 눈이 접히는 단정한 미소가 왜 그가 하면 단정치 못하게 느껴지는지. 해영이 잠시 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저기… 선우 오빠.”

조심스럽게 들려온 목소리가 다이닝 룸 안으로 막 들어선 선우를 잡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맨 마지막으로 들어오던 다인이었다. 그 자그마한 부름에 선우를 올려다보고 있던 시선 또한 그녀에게로 향했다. 부른 대상은 선우였으나 덩달아 멈춰 선 해영이 의아한 얼굴로 다인을 바라보았다.

한순간 얼핏 눈이 마주쳤던 것도 같다. 먼저 시선을 피한 다인이 선우를 향해 부탁했다.

“밖에 옮길 게 하나 남았는데 잠깐 도와줄 수 있어?”

주저하며 꺼낸 물음치고는 어렵지 않은 요청이었다. 옆에 서 있던 해영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나도 도와줄게.”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으나, 선뜻 흘러나온 대답에 다인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됐다. 멈칫하는 기색을 눈치챈 해영이 눈을 굴리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매하게 제 시선을 피하는 다인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아니, 그건 긴장보다는….

“아.”

보다 설렘에 가까운 들뜬 감정이었다. 해영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불현듯 떠오른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언제부터였는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검은 눈동자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고개를 치켜든 것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왜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다인이 처음부터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녀와, 형.”

곡선을 그리며 열린 입에서 태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해영이 선우에게서 시선을 떼며 이내 다인을 보며 웃었다.

“둘이서 안 될 것 같으면 부르고.”

팔 한쪽을 들어 보이는 폼을 잡자 다인의 입에서 기어코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조용하지만 밝은 웃음소리에 해영도 내심 안도하며 소리 없이 입꼬리를 당겼다.

왜 바로 눈치채지 못했는지는 뻔했다. 늘 그렇듯 자신이 차선우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다녀올게.”

잠시 말이 없던 선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스스럼없는 거리감에 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끝이 움찔거렸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테이블에 기대어 선 해영이 웃으며 끄덕거렸다.

이윽고 다시 정원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차츰 흐려졌다. 걸어가던 도중 멈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고, 선우의 입에는 슬쩍 웃음까지 맺혔다.

“…하.”

꾹 다물려 있던 입술에서 무거운 한숨이 내뱉어졌다. 차라리 고개를 돌려 먼저 방으로 올라갈까 했으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원 한편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퍽 잘 어울렸다. 숨도 멈춘 채 그들을 바라보던 해영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격 없는 조바심에 속이 울렁거렸다.

***

다인을 따라 정원으로 나선 선우는 발아래 밟히는 잔디를 묵묵히 주시했다. 겨울인 탓에 축축하게 젖은 잔디밭의 질퍽함이 기분을 저조하게 했다.

“뭘 옮기면 돼?”

익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한 선우는 곧잘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덧그렸다. 지금 든 감정을 표현할 대상이 눈앞의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은 해영이 제게 선뜻 다녀오라고 말했을 때부터였다. 아니, 사실은 다인이 말을 걸기 전부터, 윤해영이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러 갔을 때부터. 혹은 그 전… 그가 이런 웃기지도 않은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단 한 순간도 괜찮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제게 향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순간 속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으나 선우는 여전히 입가에 걸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분위기가 시종일관 부드러웠으므로, 다인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사실 진짜 옮길 게 있어서 부른 건 아니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준비했던 말이었는지 한번 입이 열리자 쏟아지는 말들이 매끄러웠다. 함께 나온 목적과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는데도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누구와 관련이 있는지도. 그렇지 않았다면 구태여 뻔히 보이는 수작에 순순히 걸려 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남은 마지막 데이트에서도 반드시 하고 싶은 사람이랑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녀가 뱉은 ‘우리’라는 단어를 곱씹던 선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사실 해영이랑 더 알아 가 보고 싶거든. 남은 시간이 적다 보니까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따로 약속을 잡으려고 하는데….”

“…해영이랑 더 알아 가고 싶어?”

천천히 내뱉어진 물음에 다인이 쑥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곧바로 꺼내지는 대답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탓에 마냥 소극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다인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잠시 다이닝 룸의 유리창으로 향했다. 이쪽을 보고 있는 얼굴이 먼 곳에서도 시야에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왜 내가 이런 말까지 듣게 해. 순간 스친 원망은 곧 덧없이 사그라졌다. 눈이 마주친 걸 알아챘는지 해영이 순간적으로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선우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걸렸다.

“선우 오빠가 해영이랑 전부터 친하다고 했으니까, 알고 있을 거 같아서요.”

다시금 다인을 돌아보는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그녀가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상형 같은 거.”

목소리에는 은근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이상형?”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느릿하게 걸린 미소가 부자연스러웠으나 그런 걸 눈앞의 상대가 알 리 없었다. 이런 걸 아는 건 윤해영뿐이겠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확신하고 있음에도 이상한 불쾌감이 뱃속에 든 것을 전부 뱉어 내라고 성화를 부리는 것 같았다.

“해영이 이상형….”

그런 건 본인한테 직접 묻는 게 좋지 않을까, 따위의 말이 입 안에 맴돌았으나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 가서 직접 이상형이든 뭐든 말을 거는 걸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으니까.

온 신경이 곤두선 것을 깨닫자 도리어 힘이 빠졌다. 스스로가 어디에서든 무던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윤해영을 만나기 전까진.

시선이 다시 힐끗 유리창 너머의 해영에게로 향했다. 테이블에 기대어 선 채 발치로 시선을 내리고 있는 얼굴. 당장 그 앞으로 달려가 아무도 보지 못하게 품 안에 가둬 두고 싶었다.

이상형.

선우는 한 번도 그에게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본 적 없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가 누굴 좋아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연상을 좋아하던가.”

느지막하게 떨어진 목소리에 다인의 얼굴에 눈에 띄게 동요가 일었다. 바라지 않았을 대답인 것이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차선우는 상냥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접었다.

“키가 크고, 손도 크고….”

“키….”

이미 흐트러진 표정을 보면서 그는 느릿하게 눈을 굴렸다.

“또 뭐가 있지.”

기울어진 고개가 다시금 유리창 너머를 향했다. 테이블에 기대어 서 있던 해영이 다이닝 룸을 느릿하게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해영아, 너는 내 어떤 점이 좋았어?

직접 묻지 못한 물음이 속에 조용히 쌓였다. 채 접히지 못한 손가락들이 단숨에 안으로 말려들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다인을 향해 선우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표정이 안 좋은데 괜찮아?”

“…아, 아니야, 괜찮아.”

“내가 실수한 거면….”

다인이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실수한 거 없다며 오히려 말해 줘서 고맙다는 그녀에게 선우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잖아.”

그러니 마음 쓰지 말라는 어조에 잠깐 머뭇거리던 다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는 아니었으나, 금방 생각을 정리한 듯 흔들렸던 눈에도 또렷한 빛이 감돌았다. 포기하지 않은 채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고 있을 머릿속이 읽혔다. 선우가 손을 들어 눈 위를 매만지다 아래로 내렸다.

“그럼 해영이는 혹시 뭘 좋아해?”

“글쎄….”

윤해영은 나 좋아해. 그는 살짝 미소를 짓다 만 채로 입을 다물었다.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킬 때마다 마음이 깎여 나가는 것 같았다.

“그건 잘 기억이 안 나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가 뭘 좋아하는지는 굳이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떠올랐다. 해영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좋아하는 것은 습관이었다. 선우는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윤해영에 관해서라면 그 누구에게도 단 한 줌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아, 그렇구나….”

다인의 입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쉽긴 해도 완전히 기대를 접은 기색은 아니었다. 또 제게 무언가를 물어 올 듯 달싹이는 입술을 발견한 선우가 집이 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찾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영화를 보기로 했던 걸 잊고 있던 다인이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이제 들어갈까? 오빠, 그, 나 때문에 곤란했다면 미안해.”

“그럴 리가.”

선우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걱정을 달랬다. 자연스럽게 발길을 돌리는 그를 따라 다인 또한 걸음을 재촉했다. 정원으로 나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유리문에 가까워질수록, 그 안에 있는 이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여태 자신을 기다리던 윤해영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찡그리듯 어설픈 미소를 걸었다. 제일 잘 짓는 웃음조차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또 자책하고 있겠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감정 소모였다. 선우가 해영을 달래듯 부르며 고민을 잘라 냈다. 그를 당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곳에 온 뒤부터 그는 제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쉬이 곤란하단 낯을 했다.

“해영아.”

네가 다시 나를 선택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나를 포기할 수 있었어, 넌?

“같이 올라가려고 기다렸어.”

“응, 잘했어.”

준비한 변명은 간단했고 윤해영다웠다.

저와 다인이 함께 있는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했으면서 이렇게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잘했다며 손을 들어 머리칼 사이를 헤집으니, 설핏 노려보면서도 귀 끝에는 순식간에 피가 쏠려 발개지는 것도. 전부 그가 제게만 보여 주는 반응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다인아, 옮긴다고 했던 건?”

…하. 그 순간 들려온 물음에 선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닌데도 이런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윤해영답지 않았다. 슬쩍 내려가는 시선이 텅 빈 다인의 두 손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 또한 평소보단 조급하다는 게 드러나는 눈짓이 기꺼웠으나, 그마저도 다른 이에게 향했다는 사실에 속이 들끓었다.

“내일 옮기자. 내가 도와줄게.”

다인이 당황하는 것을 보며 곧바로 서슴없이 웃으며 제 말을 주워 담는 모습은 자신이 알던 그대로였다.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눈을 찡긋거리자 다인 또한 곧 그게 장난이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손을 들어 해영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밀었다. 그러자 키득거리는 얼굴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다들 기다리겠다. 올라가자.”

해영의 말에 세 사람은 뒤늦게 걸음을 떼었다. 계단을 오르며 선우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한 칸씩 오르면서 손끝과 목덜미가 스칠 때마다 해영의 어깨가 뻣뻣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방에 들렀다 갈게. 먼저 가 있어 다인아.”

“응, 다녀와!”

2층에 올라와 복도 앞에 선 해영이 다인을 향해 말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등을 돌려 공용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해영은 설핏 고개를 틀어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어이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던 해영이 한숨을 흘렸다.

“뭐가 문제야, 또.”

해영은 손가락을 들어 그의 뺨을 툭툭 가볍게 건드렸다. 얼굴에 닿은 손길에 선우는 그제야 입가에 습관처럼 걸려 있던 미소가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가 문제냐고.

선우가 제 뺨 위로 올라온 손끝을 쥐었다. 해영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으나 그는 쥔 손을 놓지 않았다. 끝내 포기한 해영은 손이 잡힌 채 방으로 향했다.

뒤따라 걷던 선우는 방문 앞에서 멈춘 해영의 뒤에 섰다. 원래는 흉터 하나 없이 흰 목덜미가 유독 울긋불긋했다. 차선우는 손을 대 보지 않아도 그 목덜미를 쓸어내리면 어떤 감촉인지, 어떤 온도인지, 해영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걸핏하면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등 뒤에 선 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해영은 머뭇거림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훈훈한 방 안의 온기가 훅 몸을 덮쳐 왔다. 찬 바람이 스며든 몸을 녹이는 따스함에 절로 노곤해졌다.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으로 들어서며 코에 팔을 가져다 대던 해영이 이후로 들려오지 않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선우는 평소보다 흐트러진 얼굴을 한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입꼬리를 당겼으나, 그 미소에 평소와 같은 여유는 없었다. 짙은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들이 어두운 빛으로 일렁였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이 무거워 여유가 없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라앉은 표정을 보자마자 해영은 제가 하고 있던 모든 생각을 뒤로했다.

“뭐 때문에 차선우 심사가 꼬였을까.”

턱을 짚은 채 가느다란 눈으로 그를 훑어 내리며 중얼거리자, 이내 선우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해영아.”

“응, 형.”

“해영이 좋다는 사람이 너무 많네.”

“…….”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해. 해영의 눈썹이 기가 찬다는 듯 위로 들렸다. 방금 다인과 함께 정원에서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고 온 사람이 누군데.

그의 입에서 나온 인기 운운에 울컥 입을 열려던 해영이 잠시 멈칫했다. 말마따나 그는 방금 다인과 따로 얘기를 나누고 오지 않았나. 그런 시점에서 이렇게 못마땅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혹시….

“다인이가.”

자신에 대해 얘기했냐고 물으려던 해영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촬영을 의식했기 때문이 아니라, 눈앞에 선 그를 신경 썼기 때문이었다.

“…기다리겠다. 우리도 빨리 나가자.”

말을 돌리면서 그는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만 했다.

그러니까 다인이가 관심을 가진 게 선우 형이 아니라는 거지.

깨닫자마자 찾아온 안도감에 울렁거리던 속이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진정되었다. 제 생각보다 더 선우와 다인이 함께 있는 모습에 신경을 많이 쏟고 있었던 모양이다. 소모했던 감정의 독이 점차 다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팔을 들어 옷에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던 해영이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와, 형. 옷에 고기 냄새 밴 거 같아.”

대화의 화제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 기분 좋은 기색을 보며 선우는 도리어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인이 무슨 말을 했을지 눈치챘으면서. 그런데도 이렇게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목이 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잇새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잘 모르겠는데.”

“가까이 있으면 날걸. 옷 갈아입고 가야겠다.”

해영은 곧 입고 있던 니트를 벗기 위해 소매 부분을 쥐었다. 그런 그를 묵묵히 눈에 담던 선우가 예고도 없이 성큼 걸음을 떼었다.

해영이 제 코앞까지 다가온 선우를 의아한 얼굴로 불렀다.

“형?”

“응, 해영아.”

“뭐….”

제게 다가와 한쪽 어깨를 그러쥐는 행동에 멈칫하기도 잠시였다. 차선우는 이윽고 품 안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고개를 숙였다.

목에 얼굴을 묻은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니트 위로 드러난 목덜미의 맨살결을 스치는 머리칼에 해영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런가…?”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특유의 사근사근한 어조가 귓가에 닿기도 전에 피부에 닿았다. 순간적으로 굳어 있던 해영이 눈매를 가늘게 늘어뜨렸다.

“형, 일부러 이러지.”

“뭐가?”

되돌아오는 물음에 나지막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 다정한 음성에 해영이 헛웃음을 뱉었다. 아, 이건 일부러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해영은 모르는 척하는 그의 손에 거짓말 탐지기라도 달고 싶어졌다. 그럼 차선우의 고의성을 입증하는 일은 눈 깜박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

“너도 모르는 척하고 있잖아….”

“…….”

할 말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 해영은 여전히 제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손으로 더듬더듬 입가를 매만진 그가 어색하게 입을 가렸다.

“한 번만 봐줘, 선우 형.”

손에 가로막힌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어딘가 억눌러져 있었다. 입가를 가린 손 위로 보이는 눈이 곧게 선우를 직시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발간 눈가를 눈에 담으며 차선우는 침음을 삼켰다.

목울대가 느릿하게 치솟았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가려진 눈에 잠시 원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는 마지못한 몸짓으로 해영을 놔주었다.

선선히 뒤로 물러서는 선우의 품에서 빠져나온 해영은 드레스 룸으로 향하다 멀고 멈춰 섰다.

“아, 맞다.”

짧은 탄식을 흘린 해영이 드레스 룸으로 가려던 몸을 돌렸다. 대신에 제 침대로 향한 그가 옆에 놓인 가방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한 번도 연 적 없던 가방 안으로 들어간 손이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찾던 물건은 머지않아 손끝에 걸려 왔다. 종이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포장지를 잠시 만지작거리던 해영은 망설이던 끝에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리자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선우가 보였다. 그의 앞으로 걸어간 해영이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형 거.”

제게 내민 상자를 발견한 그의 눈에 순간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전보다 크게 떠진 눈이 다시 해영을 향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는지 뭔갈 말하려는 듯 달싹이던 그의 입이 이내 굳게 다물렸다. 선우가 조용한 손길로 해영의 손 위에 들린 상자를 가져갔다.

그는 제 손에 들린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고, 해영은 그런 선우를 지켜보며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정적은 짧았다. 설핏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표정에 해영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형, 별건 아니야. 그냥 크리스마스에 주려다가 못 준 건데….”

그걸 주고 싶단 생각이 든 건, 아무래도 방금 느꼈던 조바심의 탓이 클 것이다. 다인과 선우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기분은 제가 느낄 자격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후 다인이 관심 가진 상대가 그가 아니라는 것에서 찾아온 안도감 또한 불합리했다. 알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 대신 에둘러 선물을 꺼내 보인 자신의 비겁함을.

“형.”

“…응.”

“진짜 대단한 거 아니야.”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물기 어린 눈이 소리 없이 해영을 향했다. 대단한 게 아닐 리 없다는 듯 부정이 강하게 서린 눈빛에 윤해영은 그를 따라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부러 장난스럽게 말하기는 했지만, 대단한 게 아니라는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저한테나 값이 나가는 물건이지, 선우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비싼 물건은 아닐 테니까.

누군가의 기준은 늘 각자만의 것이기 마련이다. 어두운 남색 상자의 각진 부분을 만지작거리던 선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좋아.”

조곤조곤하게 새어 나온 목소리는 어딘가 억눌린 구석이 있었다.

많은 감정이 함축된 음성이었다. 꾹 눌러 담은 목소리에서 해영은 그가 삼킨 뒷말을 알 것만 같아졌다. 그래도 좋아, 네가 준 거니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선우는 정말 자신이 길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 와도 키득거리며 가져가 집에 모셔 둘 사람이었다. 더 좋은 걸 주고 싶어서 조바심이 들 때면, 그는 그런 자신을 놀리듯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고맙다며 웃곤 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향수네.”

포장지를 벗겨 내고 상자를 연 그가 안에 든 걸 확인하곤 눈을 접으며 웃었다. 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차선우는 연신 웃음을 흘렸다.

향수를 꺼내 든 그가 선뜻 소매를 내밀었다. 손목 언저리에 한 번 뿌린 뒤 냄새를 맡아 본 그가 슬쩍 눈을 들어 올리며 해영을 바라보았다.

“해영아, 알고 고른 거야?”

“뭐가?”

“향수.”

목소리에 섞인 나지막한 웃음기에 해영이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왜 이런 뜻 모를 물음을 던져 오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형 이런 향 쓰지 않았어?”

혹시 이게 아니었나? 정확하게 같은 향수인지는 모르지만, 향은 얼추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맞아.”

의심 어린 눈을 하는 그에게 선우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네가 선물해 주는 건 특별해서.”

“…….”

“알고 주는 걸까 궁금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해영이 의아한 얼굴로 설핏 미간을 모았다. 그는 먼저 말할 생각이 없는지 옅게 웃는 얼굴로 자신의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결국, 뭘 알아야 하는 거냐며 묻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때마침 주머니 안에 꽂힌 핸드폰에서 익숙한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 타이밍에 올 만한 메시지라고는 뻔했다.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문 해영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 하루 마음이 향한 출연자의 이름과 메시지를 적어 주세요. 메시지는 상대에게 익명으로 전해집니다.

역시나였다. 예상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문자 내용을 대충 읽어 내린 해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같은 문자를 받았을 선우도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자를 보면 늘 고민도 없이 손을 움직이곤 하던 평소와는 달리, 오늘은 곧장 답을 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내리깔았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면서 긴 속눈썹 사이에 가려져 있던 짙은 눈동자가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눈동자 안에 자신이 담겼다. 해영은 화면을 누르고 있던 손을 멈췄다.

“누구한테….”

차선우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끝을 길게 늘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보내려고?”

여태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물음이었다. 어조는 평이했으나, 그가 처음으로 꺼낸 질문에 해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답을 기다리는 선우의 고개가 설핏 기울어졌다. 머뭇거리는 자신을 살피는 시선이 다정했다.

그의 물음이 없었더라도, 오늘 누구에게 문자를 보낼지 고민이 되는 건 맞았다. 잠시 생각을 고르던 해영이 미간을 모으며 답했다.

“잘 모르겠어.”

“보내고 싶은 사람 없어?”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금 질문이 들려왔다. 그 물음에 문자 보낼 상대를 고민하느라 아래를 향해 있던 고개가 반사적으로 들렸다. 저를 주시하고 있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해영은 문득 메시지를 처음 받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적고 싶은 이름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을까. 아마 알 것이다. 원래부터 답을 알면서도 제 귀로 듣고 싶어 직접 묻는 걸 좋아했으니까. 해영은 그런 문제에 놓였을 때 늘 정답을 꺼내곤 했다.

“…있어.”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린 그가 눈썹을 매만지며 답했다.

서로가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허공에서 시선은 빈틈없이 맞닿았다. 대화는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해영이었다.

“옷 갈아입고 올게. 형 먼저 나가 있어.”

“알겠어.”

차선우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놓고는 저를 따라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왔다. 넓지 않은 공간에 비집고 들어와 제 옆에 선 그를 보며 해영이 자그마한 실소를 흘렸다.

주로 옷을 갈아입는 장소라 그런지 드레스 룸 내부에는 카메라가 달려 있지 않았다. 대신 드레스 룸으로 통하는 복도와 화장대 앞에는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그 시야가 여기까지 닿을까 신경 쓰인 해영이 밖을 힐끔거릴 때였다. 가까이 다가온 선우에게서 제가 준 향수의 향이 훅 풍겨 왔다.

밖을 힐긋거리던 해영의 시야가 선우의 몸에 가려졌다. 시야가 차단되기도 전에 이미 그의 향에 갇혔던 해영은 삐딱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옷 갈아입어야 된다니까.”

그 말에 선우는 갈아입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순간 의심할 뻔했으나, 해영의 의심은 싹이 트기도 전에 사라졌다.

윤해영은 그가 눈치가 없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선우의 입가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가 유독 장난스럽게 느껴졌다.

‘…꼬인 거 맞네.’

그를 올려다보는 해영의 입꼬리가 점점 더 비뚜름해졌다.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을 보며 니트 아래 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게 떨어지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해영은 기꺼이 니트를 끌어 올려 벗었다.

공용 공간에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은 해영과 선우였다. 이미 영화 볼 준비를 마쳤는지, 어두운 공간 안에는 빔 프로젝터에서 쏟아져 나온 빛만이 벽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또 맥주 캔이 여럿 올라가 있었고, 영화를 보면서 먹을 생각인지 나초 같은 주전부리도 함께 놓여 있었다.

테이블을 둘러보던 해영이 소파의 빈자리를 찾아 눈을 돌렸다. 그때 시야에 잡힌 것은 저를 눈짓하는 다인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가 제 옆자리를 손으로 소심하게 가리켰다.

‘나?’

해영이 검지로 저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되물었다. 다인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누군가 그 자리에 먼저 앉았다.

“…….”

소파에 느긋한 태로 자리를 잡고 앉은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정면에서 스치자 그가 슬쩍 눈을 접으며 제 옆자리를 고갯짓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잠시 허탈한 마음이 들었으나, 해영은 말없이 선우의 옆으로 다가갔다. 긴 소파의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나니 카우치에 앉아 있던 민호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지각이야.”

“미안, 옷 갈아입느라.”

해영은 작게 웃으며 변명을 꺼냈다.

“뭐 볼지는 이미 우리끼리 정했어.”

“뭔데?”

민호가 건네준 팝콘 통을 받으며 그가 물었다.

“〈라스트 데이트〉. 다니엘 레널드 나오는 거.”

“아, 나 그거 안 봤는데.”

짧은 감탄사와 함께 그가 아직 따끈한 팝콘 한 알을 입에 집어넣었다. 우물거리던 해영은 또 한 알을 집어 옆에 앉은 선우에게로 건넸다.

당연히 손으로 받을 줄 알았는데, 그대로 기울어지는 고개를 보며 해영이 황급히 손을 뺐다. 다시 회수한 팝콘은 얌전히 해영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하마터면 카메라 앞에서 팝콘을 먹여 주는 장면을 연출할 뻔했다.

해영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는 사이, 선우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주시했다.

왜, 뭐. 제게 꽂힌 시선을 보며 윤해영은 입을 벙긋거렸다. 황당해하다가도 곧, 비죽 튀어나오는 그의 입술에 꾹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 형 진짜 귀여운 짓은 혼자 다 골라 하네?’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차선우가 남의 시선 신경 안 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카메라 앞에서도 이럴 줄은 몰랐지만, 그는 가끔 눈에 자신밖에 안 보이는 것처럼 굴 때가 있었다. 역시 앞으로도 내가 더 많이 신경 써야지. 해영은 제게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서 비껴 서듯 고개를 돌리며 다짐했다.

“어, 해영 너 이거 안 봤어?”

“진짜?”

세희의 물음에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소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럴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본 사람들이 꽤 있는지 쏟아지는 시선에 머쓱해진 해영이 입가를 긁적였다.

“다 왔으니까 이제 시작할게.”

세희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은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저기서 기대 섞인 화답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오프닝 크레디트에 멈춰 있던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자 소란스럽던 주변이 잦아들고 모두의 시선이 영상이 투사된 벽으로 꽂혔다.

요즘은 바빠서 그럴 여유가 없었지만, 해영 또한 영화관에 가거나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긴 했다. 그런데도 그간 쌓인 피로 때문인지 갈수록 영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끼며 해영이 눈을 비비적거릴 때였다.

“졸려?”

남들에게까진 들리지 않을 작은 속삭임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익숙한 선우의 목소리였다. 그 숨결이 간지러워 괜스레 몸을 움찔거렸던 해영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게로 큼지막한 쿠션이 건네졌다. 품 안에 들어온 쿠션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은 해영이 영화에 다시금 시선을 줬다. 정신을 차리려고는 했으나, 한 번 눈을 감았다 겨우 뜰 때면 영화는 당최 알 수 없는 장면으로 해영을 떨어트려 놓곤 했다.

잔잔한 배경 음악과 함께 남자 주인공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찬 것을 마지막으로 해영은 결국 완전히 눈을 감았다.

***

새해가 밝았다. 12월의 마지막 날, 신년 파티를 한답시고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잠들어 버린 해영은 허무하게 들이닥친 새해를 맞이했다.

그는 간만에 출연자들이 아닌 사람을 만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섰다. 친구를 만나면서 프로그램과 관련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라는데, 누굴 만나면 되는지도 하진의 선에서 이미 결정되었다.

만나기로 한 곳은 대학로 근처의 카페였다.

“윤해영!”

먼저 와 있던 해영은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이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대학 동기인 정민재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네가 이런 프로그램 나올 줄 진짜 몰랐는데, 너 혹시 데뷔하냐?”

“아니, 이거 하진 누나 프로그램이라.”

“아하. 근데 누나는 왜 나한테는 출연하라고 말 안 했지? 나 이런 프로 다 챙겨 봤는데.”

그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흐리멍덩한 눈을 보며 해영이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몰라서 물어? 누나도 눈이 있어.”

“…빡치는데 할 말이 없어서 더 빡쳐.”

요즘 회계사 시험을 준비한다더니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이 없는 건가 싶었지만, 대학 시절을 떠올려 봐도 한결같이 그는 정신이 없었다. 그에 해영의 머릿속에서는 그를 향한 연민이 금세 지워졌다.

테이블 근처로 다가온 직원에게 마실 음료를 시킨 민재가 해영을 보며 물었다.

“근데 왜 나 불렀어? 너… 사실 날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생선 같던 눈이 감동의 빛으로 반짝였다. 그 시선에 해영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아니고. 네가 제일 한가할 거 같아서.”

“나도 바쁘거든?”

대답을 들은 민재가 열 받는다는 얼굴로 항변했다. 그때, 카메라 설치를 마친 건지 스태프 하나가 다가와 그의 옷에 마이크를 달아 주었다. 긴장이라도 한 건지, 마이크를 달자마자 차분해지는 얼굴이 웃겼다.

주문했던 음료가 나옴과 동시에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신호를 받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해영이 아이스아메리카노 잔을 멀뚱히 내려다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민재를 바라보았다.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일단은 예의상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뭐 하고 지내.”

“마음에도 없는 거 물어보네.”

“…….”

긴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제가 멍청했다. 비협조적이기 그지없는 대답에 해영은 못 들은 척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됐고, 거기서 다 같이 사는 건 어때?”

“좋아. 집이 궁궐이야.”

“오? 꽤 재밌나 본데.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어?”

민재의 물음에 해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흐리멍덩하던 얼굴에 곧장 흥미롭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눈에 떠오른 선명한 호기심에 어쩐지 불안해졌다.

“미쳤다, 그 사람도 너한테 관심 있대?”

“음….”

신나서 물어 오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해영이 대답을 주저했다. 그 애매한 반응에 정민재는 한층 더 신이 나서 놀리고 싶어 환장한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인데?”

어떤 사람이긴, 너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지. 민재를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던 해영이 에둘러 답했다.

“그냥 계속 신경 쓰이는 사람.”

“내가 맞혀 볼게. 연상에 키 크고 좀 화려한 미인이시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 이상형이잖아.”

“나 이상형 없는데?”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해영에게 민재가 시원하게 코웃음을 쳤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말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 입학할 때부터 봤는데, 네 이상형을 모르겠냐.”

뭐래 이 새끼가. 마이크만 없었어도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비웃었겠지만, 촬영 중인 것을 생각해 해영은 꾹 참았다. 대신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컵에 꽂힌 빨대를 질겅거렸다.

“내가 왜 널 불렀을까.”

한탄이 섞인 혼잣말에 민재가 또 시답잖은 말을 걸어왔다. 그사이 해영의 신경은 이미 반쯤 다른 곳에 쏠린 지 오래였다. 연상이니, 키가 크니, 화려한 미인이니 뭐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니 저절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혹시 뭔갈 알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합리적 의심이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해영은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

정민재와 만난 이후 해영은 바로 집으로 가는 대신 대학로에 있는 작은 공연장으로 향했다. 실내에 있는 공연장은 소극장 정도의 작은 규모였는데, 공연 시작 전부터 미리 입장해 있는 사람들로 인해 가득 차 보였다.

무대는 제법 넓었고, 천장은 높았다. 아직 어수선한 공연장 안을 두리번거리던 해영이 무대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곧 시작하는 건지 어두운 무대 위로 오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윤해영은 그 어둠 속에서 아는 얼굴을 찾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밴드와 함께하는 공연이라고 했으니, 첫 순서에 그녀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신중히 무대 위를 바라보는 해영의 시야에 곧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베이스 기타를 쥔 채 무대에 서 있는 다인이었다.

‘해영아, 나 내일 공연인데… 혹시 올 수 있나 해서.’

어젯밤 방문을 두드렸던 다인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어 왔다. 거절에 대한 걱정이 담긴 한편 언뜻 기대감까지 내비치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해영은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가야지. 나 안 부르려고 했어?’

입가에 걸린 장난스러운 미소가 순식간에 다인의 긴장을 녹였다. 차츰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들뜬 기색을 보며 해영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전에 꼭 보러 가겠다고 말했잖아.’

이전에 그녀와 대화하며 공연을 하면 꼭 보러 가겠다 약속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실무 실습이 끝나 일정이 여유로웠으므로, 다인이 지금 물어 온 것이 오히려 달가웠다.

티켓을 건네주며 그럼 꼭 와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서던 게 어제의 일이었다. 하루 사이 사람이 바뀐 것도 아닐 텐데, 무대에 서서 기타를 쥔 모습에는 평소의 조심스럽고 부스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자마자, 이렇다 할 소개도 없이 드럼 연주로 시작한 밴드의 오프닝에 관객들에게서 작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해영 또한 기타의 줄을 튕기며 관객을 향해 웃는 다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첫 곡은 이다루 밴드의 단골 오프닝 ‘방과 후 낙서’를 들려드렸는데요….”

경쾌하게 이어지던 연주가 끝나자 방금까지 신나게 기타를 치던 다인이 마이크를 쥐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은 조금 떨려 하는 듯도 했고, 어딘가 다소 흥분한 듯도 했다.

말을 하면서 관객석을 훑던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순간 말을 멈춘 다인을 향해 해영이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 작은 인사에 그녀의 얼굴에는 곧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며칠 전 인스타 라이브에서 공개한 저희 신곡을 들려드릴게요. 여기 여러분이 함께 불러 주셔야 하는 구간이 있거든요?”

조심스럽지만 위축되지 않은 태도에서는 그녀가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관객과 소통하는 모습은 진솔했고, 노래하는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공연하는 내내 해영은 다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난 후, 다인은 같은 밴드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대신 해영과 저녁 식사 하기를 택했다. 유리창 앞에 놓인 바 형식의 테이블에 앉은 해영은 그녀를 곤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 이거면 돼?”

“응, 나 샌드위치 엄청 좋아해.”

배고프다면서 공연장을 뛰쳐나오자마자 다인이 향한 곳은 바로 앞에 있던 샌드위치 가게였다. 포장을 꼼꼼히 벗겨 입에 한가득 집어넣는 모습을 보며 해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빵을 좋아한다더니 진짜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좋은 공연을 본 값을 치르려 했던 해영으로서는 충분히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 오늘은 비싼 곳 가도 되는 차림으로 왔는데.”

그가 입고 있던 검은 재킷을 들춰 보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다인이 샌드위치도 내려놓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나 공연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못 먹거든. 오늘도 하루 종일 굶어서 다른 곳까지 갈 힘이 없었어.”

그럼 더더욱 맛있는 걸 먹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해영은 그녀의 말에 구태여 토를 달지 않았다.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꽃도 받았잖아.”

다인이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던 꽃다발을 가리키며 입꼬리를 당겼다. 생글생글 웃어 보이는 얼굴에 해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주 웃었다.

공연장으로 가던 도중 근처에서 산 꽃이었는데, 받고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사길 잘했다 싶었다. 다인을 지켜보던 그 또한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겨 한입 베어 물었다.

둘 다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느라 작은 가게 안은 한참이나 조용했다. 다인이 다시금 입을 연 것은 손에 든 샌드위치를 전부 해치운 뒤였다.

“몇 년째 발전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여기까지인가? 이게 내 한계인 건가? 그런 생각이 좀 많았거든.”

들려온 말에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던 해영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인은 유리창 밖의 신호등 근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힐끔 저를 보는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그녀는 꿋꿋이 앞만 바라본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네가 나한테… 내 노래가 좋다고 했었잖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응.”

“그 말 듣고 내가 처음 시작할 때 음악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떠올랐어. 지금 포기하면, 음, 앞으로는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못할 것 같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게 열등감으로만 남을 거 같아서….”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설핏 떨리고 있었다. 다인의 손에서 잘게 잘린 하얀색 샌드위치 포장지가 접혔다. 아무렇게나 찢어져 있던 포장지는 곧 반듯하게 접혀 네모난 쪽지 모양이 됐다.

잠시 입을 다문 다인은 제가 접은 종이 모양을 구경하듯 내려다보았다. 곧 제법 꼼꼼히 접었던 종이가 미련 없이 그녀의 손을 떠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해 보려고.”

앞을 주시하는 다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해영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 두었다. 비시시 올라가는 입꼬리, 반짝이는 눈매가 단단한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해영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인아.”

“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다인과 정면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멀뚱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보며 해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가에 슬쩍 걸린 미소 옆으로 작은 보조개가 보였다.

“너 정말 멋있다.”

“어, 어…?”

툭 내뱉어진 말에 다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큰 눈을 빠르게 깜박이던 그녀가 곧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왜… 멋지다고 해.”

“그냥, 멋있어서.”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급기야 고개까지 돌려 버리는 다인을 보며 해영이 키득키득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제 입으로 멋진 말을 뱉어 놓고 뒤늦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웃겼다.

멋있다는 말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는 다인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윤해영은 언젠가 포기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리석게 미련을 붙들고 있는 것은 제게도 상대에게도 독이 될 거라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날 포기하지 마.’

그런데 왜 이 순간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마는 건지.

해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결국은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식어 버린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입가를 가렸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차선우.

느릿하게 저를 향하는 짙은 시선을 떠올린 해영이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식은 커피를 목으로 넘겼다. 한참이 지나도 목을 태우는 갈증은 여전했다.

***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두웠다. 깜깜한 어둠을 헤치고 집 안으로 향하던 해영이 문 앞에 섰을 때였다.

“해영아.”

정원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문고리를 쥐었던 손이 멈췄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수 없는 음성은 평소처럼 다정했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해영은 평소보다 음울한 미소를 지은 선우를 발견했다.

“다인아, 먼저 들어갈래?”

해영이 옆에 있던 다인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해영은 재킷 안쪽에 붙어 있던 마이크를 떼어 문 옆의 우편함 위로 올려 두었다. 그는 곧장 걸음을 옮겨 정원에 들어섰다.

선우가 정원에 있는 것을 본 순간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왜 집 밖에 있지? 전화하느라 정원에 나와 있던 건가? 불쑥 떠오른 의문들은 선우의 창백하게 질린 낯을 본 순간 바로 뒷전이 되었다.

“형. 여기서….”

뭐 하냐는 물음은 삼켰다.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제 옷깃을 잡아 오는 손끝에 초조함이 어려 있었다. 해영은 그가 정원에 서 있던 것이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함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군가가 자신이라는 것도. 해영은 제 옷깃을 잡은 선우의 손끝을 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말려 들어오는 체온이 얼음장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지면서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오늘 낮에 정민재 만났어. 형도 기억하지.”

“…응.”

“그러고 나서 다인이 공연 보고, 집에 오는 길에 저녁으로 샌드위치 사 먹었어. 공연 끝나고 나니까 시간이 늦어서.”

“그랬어?”

“어.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이 추운 날씨에 형이 여기 서 있는 거 보니까 미치겠네.”

해영의 거친 목소리에 상대는 돌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희게 질린 얼굴 위로 떠오르는 옅은 미소에 속은 더더욱 쓰렸다. 잔뜩 삐진 것 같더니 저를 탓할 생각은 안 하고 웃기만 하는 모습이 애틋했다.

“얼마나 기다린 거야?”

“별로 안 기다렸어.”

웃기지 말라는 말이 입 안에 맴돌았으나 해영은 속상한 마음을 억눌렀다.

“안에 있지.”

“…….”

“손이 다 얼었어.”

손에 꾹 힘을 주며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순간이었다. 귓가에 내려앉은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불안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에 깔린 것은 꾸미지 않은 연약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 해영아.”

짙은 불안을 뒤로한 채 검은 눈동자에는 자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윤해영은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를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

이번편 다해 완벽했어...

분위기 좋은 곳 가서 식사했을 때는 절대 이런 분위기 안나왔을 듯...ㅠㅠ

(가게밖에서.gif)

(샌드위치.gif)

(다인이보는해영.gif)

개인적으로 가게 밖에서 두사람 보여주는 각도 완전 취향ㅠ 영화인 줄 알았잖아

(댓글 11개)

ㅇㅈ 샌드위치 가게였던 게 신의한수야

대화 흐름 미쳤다고ㅜ 다인이 말하는 거 가만히 들어주다가 마지막에 멋있다고 하는 것까지 그냥... 찢었다

└내가 다인이었어도 넘어감ㅋㅋ

└22 그래서 지금 혼인신고하러 가는중ㅎㅎ

└뭐래 또.. 콱...

배경음악까지 완벽했음

└ㄹㅇ럽라 음감 누구야ㅠㅠ 변태 아냐? 음악때문에 과몰입 더 쎄게함

└이때 나온 노래 뭐야?

└스무살 어느날

근데 해영이 취향 ㅈㄴ 일관적인듯ㅋㅋㅋㅋㅋㅋㅋ

선우가 다인이랑 얘기할 때 말한 것도 그렇고 해영이랑 친구랑 대화하는 장면에서 나온 것도 그렇고 남이 말해주는 이상형이 너무 일관적인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특히 선우랑 친구분이랑 둘다 연상에 키큰 거 이상형으로 뽑았잖아ㅋㅋㅋㅋ 선우랑 해영이 대학 다닐 때 친했다더니 진짜구나 싶었음

선우는 이상하게 해영이랑 문자 보내는 사람 다 겹치는데 또 서열질은 안하길래 남한테 관심없는 쿨가이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까? 걍 친해서 다 파악하고 있던건가 싶고?

(댓글 27개)

오 그러네...?

ㅋㅋㅋㅋ 선우가 말하는 이상형이랑 친구분이 말하는 이상형 똑같은거 보고 놀랐어

└해영이가 어리둥절한 반응 하는 것도 개웃겨 남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는 이상형

└나 이상형 없는데? 이러고 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영이 이상형 딱 세희 아닌가? 연상이고 키 크고ㅇㅇ

└나도 이생각함.. 해영이가 관심있는 것도 세희 같았는데 이상형 토크 보고 확신했어

└ㅇㄱㄹㅇ

선우같은 ㅅㅌㅊ는 서열질 필요없으니까 안하는데 파악은 다함

└이거지 굳이 다른 사람 견제 안해서 여유있고 어른스러워

└소윤해영 데이트 다녀온날 해영이 견제하던데...?

└이건 또 뭔 개소리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선우가 소윤이한테 가진 마음이 그렇게 커보이지도 않았어

└아니 게시글에 선소 소해 선해 얘기는 하나도 없는데 왜 싸워...

└선해는 설마 선우해영?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자연스러웠다

[#러브라인레전드] 아련 터지는 차선우의 눈물 그렁그렁 모먼트 │#러브라인

조회수 97만회 · 2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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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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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iqo

근데 차선우 그렁그렁 모먼트에 항상 윤해영 껴있음ㅋㅋㅋㅋㅋ이정도면 윤해영이 차선우 눈물제조기 아니냐

솔직히 둘이 뭐 있다고 존나 내 촉이 외치고 있는데

???? 3천 ????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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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nedj • 19시간 전

응 니만 그렇게 생각함 ㅋㅋㅋㅋㅋㅋ

쿠키맛

3:24 소윤이 진짜 너무 예쁨... 본방 보면서 첫데이트에 선우님이 별로 표현 안한 건 오히려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걸수도 있겠다 싶었음.. 특히 9:08 이장면에서 해영님이랑 소윤이랑 찍은 사진 넘 사랑스러운데 그거 보는 선우님 표정이 소윤이 진심으로 좋아하는거 같아서 슬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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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주영

선우의 온도가 좋네요... 진지한 분위기를 잡지 않아도 본인만의 분위기가 있고

한마디한마디 하는 것에 진심이 느껴지는데 부담스럽지 않고...ㅎㅎ

처음에는 속을 알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윤이가 보여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거 보고

저도 같이 심장 찌르르 했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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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뽁쀡

0:48 근데 여기선 왜 눈물 그렁그렁인거임? 아침에 밥먹고 가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나 감수성 풍부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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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텅텅 • 12시간 전

감수성풍부ㅋㅋㄱㅋㄱㅋㅋㅋㅋ 근데 진짜 왜우는거지

바사삭 • 11시간 전

왜 그러는지 궁금해하지마 그냥 감사합니다 해

미스터텅텅 • 11시간 전

@바사삭 아니 감사하긴 한데 사연이 궁금해지는 눈빛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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