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1)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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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잠자리가 벌써 익숙해졌는지 보지도 않고 더듬더듬 머리맡으로 손을 뻗자 핸드폰이 손가락에 걸렸다. 그대로 끌고 내려와 얼굴 가까이에 대고 화면을 켜니 곧장 시간이 떠올랐다. 7시 30분.

바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했으므로 해영은 가슴팍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삼키며 침대 밑으로 발을 디디던 찰나였다. 해영이 불안한 예감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침대에 언제 올라왔지.”

어제 쭈그리고 앉아 궁상맞게 굴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미안함과 속상함이 뒤섞여 마음이 어수선하기도 했고, 여전한 다정함이 왜인지 울컥하게 만들어서…….

하. 기억을 곱씹던 그가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어쩌자고 그렇게 질질 짠 건지, 헤어지던 당시 이후로 운 건 처음이었다.

‘하진 누나가 보면 또 엄청 놀리겠는데….’

방에 달려 있는 카메라를 떠올리자 한숨이 나왔다. 해영이 얼굴을 덮은 손을 마른세수하듯 쓸어내렸다.

복잡한 감정이 얽혀 제가 상처를 주고도 마치 자신이 상처받은 것처럼 울던 밤은 고장 난 테이프처럼 끝이 잘려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침대에 누워 있는데, 정작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온 기억은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에 있는 다른 침대에는 사람은커녕 이미 침구가 가지런히 정리된 채였다. 침대의 주인은 벌써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그를 떠올리니 다시금 착잡한 기분이 들었으나 차라리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영은 찝찝한 기분을 간직한 채 출근 준비를 위해 욕실로 향했다.

겉옷까지 차려입은 채 방에서 나온 그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늘 아침마다 공용 공간에 있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재휘는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 조용하면서도 기묘하게 생기 있는 집을 둘러보던 해영이 다시 고개를 돌린 채 계단을 밟았다.

1층으로 내려서자마자 다가온 것은 냄새였다. 금방 허기를 불러일으키는 익숙한 음식 냄새. 벌써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나 싶어 다이닝 룸으로 향하던 길에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 같이 살고 있으니 이 자리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가 이미 출근했으리라 생각한 해영이 당황한 얼굴로 멈춰 섰다.

“해영아.”

“…형?”

다이닝 룸을 나오다 말고 자신을 발견한 선우가 슬쩍 웃으며 이름을 불러 왔다. 아마 기다린 모양이었다. 어제 일로 저만 마음고생을 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해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선우는 그런 해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얼떨결에 대답한 채 저를 멀뚱히 올려다보는 해영을 보며 그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아침 먹고 가.”

그의 입에서 나긋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여느 때처럼 다정했다. 그럴 거지? 이어서 나온 제안이 달짝지근해 해영의 어깨가 무의식중에 작게 떨렸다.

차선우는 가끔 타인이 자신을 거부하거나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는데,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드물 테니까.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윤해영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제의 일로 선우에게 조금의 미안함을 느끼던 차였다. 받았으니 돌려준 것뿐이긴 해도, 그의 앞에서 다른 출연자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떨치지 못하고 있던 찝찝함이 선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되살아났다.

주저하던 끝에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앉아 있어.”

“응.”

걸어가며 흘린 말에 해영이 간단히 대꾸했다. 그를 따라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서자, 테이블에는 또 뜻밖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형도 오늘 출근해요?”

“해영 안녕.”

평소와 같이 편한 차림인 것은 여전했으나, 조금 더 다듬어진 모습의 재휘가 테이블 앞에 앉아 구운 식빵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저를 보며 놀란 얼굴을 하는 해영에게 가볍게 손을 흔든 그가 먹고 있던 빵을 접시 위로 내려 두었다.

“이번 주는 출근….”

말을 잇는 재휘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가셨다.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에는 아침에 책을 읽으면서도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더니 그 역시도 출근은 피곤한 모양이었다. 곧 다시 생각이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식빵을 씹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해영이 부엌으로 눈길을 주었다.

출근하려는 차림 그대로 부엌에 서 있는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몸에 딱 맞는 와이셔츠는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언뜻언뜻 근육을 따라 구김이 지곤 했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해영이 곧 그릇을 들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선우를 보며 몸을 돌렸다.

“해영아, 거기 말고.”

테이블에 앉기 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해영이 멈칫하고 섰다. 원래는 이미 앉아 있는 재휘의 맞은편에 앉으려고 했으나, 선우는 그 옆자리에 식기를 놔 주었다.

“네 자리는 여기.”

앉으려던 자리가 아닌 그 옆자리 의자까지 손수 꺼내 주는 행동에 얼떨떨해진 해영이 고분고분 앉았다. 재휘의 맞은편 대각선 자리에 앉게 된 그는 그릇 옆에 가지런히 놓인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밥 한 숟갈을 떠 입에 넣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해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며 식빵을 우물거리고 있는 재휘와 눈이 마주쳤다. 하필이면 대각선에 앉은 탓에, 고개까지 돌린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가 설핏 눈썹을 들었다.

“왜요, 형?”

“울었어?”

덤덤한 어조였으나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는 물음이었다. 뜻밖의 질문에 놀란 나머지 숟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손끝에서 빠져나간 숟가락과 접시가 맞부딪쳐 쨍그랑하는 소리를 냈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금세 정신을 차리고 숟가락을 힘 있게 쥔 해영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침이라 그런 거예요.”

“많이 부었는데.”

“그래도 잘생겼죠?”

비시시 뻔뻔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리자 재휘도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주었다.

그사이 제 식기를 들고 다가온 선우가 해영이 원래 앉으려던 자리에 착석했다. 제 옆으로 다가오는 인기척보다 먼저 닿은 것은 익숙한 향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제 옆에 앉은 그를 해영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앉으려는 걸 저지하고 굳이 자리를 배정해 주더라니…. 옆에 앉고 싶어서 그랬던 건가? 아니면 제가 재휘의 맞은편에 앉는 것이 싫어서?

해영은 머리를 굴리느라 저도 모르게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제 옆모습으로 꽂히는 시선을 알았는지 선우가 흘긋 눈을 맞추며 생긋거렸다.

그 웃음에 반사적으로 눈길을 돌린 해영이 다시 손을 움직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빠르게 아침 식사를 끝내고 싶었으나 먼저 식사를 마친 재휘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접시 위로 빵가루가 묻은 손가락을 털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꺼냈다.

“어제 데이트 다녀왔잖아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화제에 국을 떠먹던 해영이 고개를 조금 더 아래로 숙였다. 이런 와중에조차 밥은 맛있었다.

“어땠어요? 두 사람은 밤에 다 같이 대화할 때 없어서 못 들었는데.”

“…….”

“해영 씨는 세희 씨랑 다녀왔잖아.”

아. 묵묵히 식사를 이어 나가던 해영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휘와 둘만 있었더라면 모를까 선우까지 있는 자리에서 말하기는 제법 신경이 쓰이는 화제였다. 아무렇지 않게 재밌었다며 대꾸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쩐지 몇 번이고 할 말을 고르게 됐다. 잠시 고민하던 해영이 망설이던 입을 떼었다.

“전 세희 누나랑… 데이트하고 나서 전보다 더 편해졌어요.”

“데이트하고 나서 편해졌다는 건 재밌었다는 건가.”

재차 이어진 물음을 들으며 해영은 재휘의 물음이 어쩐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세희라든가.

출근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재휘는 멍한 평소보다는 뚜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해영의 고개가 미묘하게 옆으로 기울었다. 의아함을 굳이 얼굴 위로 표현하지 않은 채 그가 소리 없이 고민했다. 재휘 형이 세희 누나한테 호감이 있나.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잠에서 막 깬 듯한 민호가 다이닝 룸 안으로 하품을 삼키며 저벅저벅 들어섰다. 해영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자 그 또한 손을 흔들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내내 조용히 식사하던 선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전 어제 데이트하고 나서 오히려 긴장되던데.”

그 조곤조곤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다이닝 룸에 단숨에 무거운 침묵이 떨어졌다. 유리문을 통해 바람이라도 새어 들어오기라도 하는 듯 얼어붙은 분위기였다. 가장 당황한 것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유리컵에 따라 마시던 민호였다.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두고 보려고 했는데….”

“…….”

“그러면 안 될 것 같더라고.”

달그락거리는 소리 없이 조용히 수저를 내려 둔 선우가 힐긋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윽고 자신을 바라보는 해영과 눈을 맞추며 살살 눈을 접어 웃었다. 그 순간 자신과 다르게 차선우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순전히 제 착각이었음을 해영은 깨달았다.

그 웃음에 해영은 말을 잃었고, 민호는 불길한 조짐이라도 느낀 이처럼 눈살을 찌푸린 채 더듬거리며 물었다.

“뭐, 뭐를… 뭐가… 안 돼요?”

“지켜보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그에 선우가 담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민호일 것이 분명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고요 속에서 차선우는 산뜻하게 말했다.

“열심히 해야겠어.”

뭘 해? 뭘 열심히?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면 어떻게 되는데? 머릿속 가득 의문이 들어차 혼란해졌다. 폭탄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 놓은 주제에 유려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차선우를 해영이 넋을 잃고 올려다보았다.

그가 말하는 상대가 소윤이리라 생각했는지 민호는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듯한 얼굴을 하며 뻣뻣하게 굳었다. 울상을 한 그의 눈빛이 제게로 향하는 것을 눈치챈 해영이 빠르게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시발….

차선우의 열심히 한다는 말은 당연하게도 봄날의 돌풍처럼 평화롭던 집 안에 새로운 기류를 가져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윤만을 신경 쓰는 데에 급급했던 민호의 초조함에 기름을 쏟고 불씨를 떨어트린 것이다.

우유를 마시다 말고 민호는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올리는 선우 옆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해영 씨는 아침에 어떻게 출근해?”

그런 와중 제가 먹은 것을 모두 정리한 재휘가 두툼한 패딩을 입으며 물어 왔다. 의자에 걸어 둔 겉옷에 다시 팔을 꿰던 해영이 그 물음에 고개를 들며 대꾸했다.

“전 보통 이 앞에서 버스 타고 지하철로 환승해요.”

“귀찮겠네. 같이 갈래요?”

“형 운전해요?”

출근길에 태워 주겠다고 권하는 듯한 재휘를 보며 윤해영은 겉옷의 매무새를 정돈하며 되물었다.

업무 환경상 정장 위에 긴 코트를 걸친 자신과 다르게 그는 물 빠진 색의 청바지에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평소보다 직장인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얼굴에 출근에 대한 강렬한 염증 같은 것이 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낯으로 짧은 한숨을 흘린 재휘가 식기를 정돈하고 다시 테이블을 향해 다가오는 선우를 무표정하게 눈짓했다.

“아니, 선우 씨가 가는 길에 내려 준대서.”

가까이 다가온 그가 제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았는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선우 형? 해영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의문이 꽉 들어찼다. 재휘 형과 선우 형의 조합이라니,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았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재휘는 그를 제법 편해하고 있는 것 같았고 선우 또한 재휘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 같았다.

“해영 씨도 껴도 괜찮죠?”

선우가 민호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떨어트렸다면, 이번에 난데없이 폭탄 발언을 떠안은 것은 해영이었다. 그 폭탄을 떨군 상대는 다름 아닌 재휘였다.

미묘한 분위기를 곱씹으며 저도 모르게 작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해영은 돌연 들려온 말에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표정을 보고도 제가 당황한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차선우는 자신을 보며 웃음을 띤 채 답했다.

“네, 저는 좋아요.”

가볍게 흘러나온 대답에서 어쩐지 진심이 느껴졌다. 해영에게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조금 불편한 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휘 형까지 있으니 괜찮으리라.

얼떨결에 선우의 차에 동승해 셋이 나란히 출근하게 된 해영이 앞장서서 집을 나서는 이들의 뒤를 쫓았다. 그 옆을 민호가 따라붙었다.

“형. 형님. 오늘 퇴근 언제 하세요? 남자들끼리 찐한 자리 한번 가져 볼까요?”

제 뒤를 졸졸 쫓으며 끈질기게 권해 오는 민호의 제안을 웃는 낯으로 무시한 선우가 지하의 차고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섰다. 상대에게 전혀 들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는 이번에 고개를 돌려 재휘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재휘 형, 형은요?”

“오늘 저녁은 약속 있어.”

“엑, 진짜요?”

더 붙잡을 여지가 없을 정도로 깔끔한 거절에 민호가 울상을 지었다. 거부당한 기억은 잠깐이었다. 그에게는 아직 최후의 보루가 남아 있었다. 차고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민호도 계단을 내려가며 해영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올렸다.

“해영, 너는? 너는 어때. 오늘 퇴근하고, 콜? 내가 근처로 갈게.”

“너랑, 나랑?”

“응.”

“둘이?”

“응.”

“…….”

해영의 얼굴에서 빠르게 흥미가 사라져 갔다. 음. 짧게 고민하는 듯한 음성을 흘린 그가 민호를 보며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 보고.”

“내가 살게, 어? 진짜 분위기도 괜찮고 맛있는 집 있는데!”

그니까 그 분위기 좋고 맛있는 집을 왜 나랑 가냐고…. 해영이 차마 뱉지 못한 말을 표정에 담았다.

꼬시는 대상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지 않았나 싶었다. 소윤이 마음에 들어서 불안하다면, 소윤에게 더 어필해야 하는 게 아닌가. 뜬금없이 그녀가 아닌 다른 출연자들을 붙잡고 데이트를 하자고 하는 그의 행동을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해영은 남의 연애에 관여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어설프기 그지없는 민호의 표현 방식에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갔다. 입 안에 토해 내지 못한 헛웃음이 고였다.

그렇다고 해도 직접 나서서 소윤과 그의 사이를 이어 줄 마음은 없었다. 민호가 뭐라고 하든 그러진 않겠지만… 끙끙 앓는 것을 들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알았어, 그럼 이따 봐.”

아싸. 기어코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민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 말에 짧게 주먹을 움켜쥐는 그를 보며 손을 흔들어 준 해영은 차를 향해 걸어갔다.

조금 늦게 뒤따라갔으니 당연히 먼저 조수석에 올라 있을 줄 알았던 재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잠시 멈칫했던 해영이 별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가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는 것까지 확인한 선우가 그제야 차를 출발시켰다.

남자 출연자 셋이서 할 말이 딱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차 안에 내려앉은 침묵은 이전과 달리 무겁지 않았다.

“아, 저는 여기 역에서 내려 주시면 될 거 같아요.”

주택 단지를 빠져나와 큰길에 들어설 때까지 내내 조용했던 재휘가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에 아무 말 없이 차선을 변경한 선우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입구 앞에 매끄럽게 차를 세웠다.

내릴 준비를 하는 재휘를 따라 해영도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를 타고 가지 않고 굳이 역에서 내리려 드는 해영을 보며 선우가 물었다.

“여기서 내리게?”

“어…. 형도 바쁠 텐데 그냥 지하철 타고 갈게.”

“나 안 바쁜데.”

차 문을 반쯤 연 채 자신을 돌아보는 해영을 보며 그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말마따나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에 해영이 저도 모르게 설핏 미간을 모았다. 그러자 선우가 금세 입을 다문 채 손을 들어 해영의 눈썹 위를 살살 매만졌다.

그러다 곧 손을 떼어 내어 가볍게 흔들었다.

“잘 다녀와, 해영아.”

차선우는 해영에게 속삭이듯 말하곤 그 뒤를 눈짓하며 짧게 인사를 건넸다.

“재휘 씨도요.”

“네, 이따 집에서 봐요.”

차 앞에 서 있던 재휘가 그런 선우에게 마주 인사했다. 순식간에 지나간 상황에 해영은 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잠시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가 다시 출발해 멀어지고, 재휘가 가만히 서 있는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뗐다.

화상이라도 입은 듯 붉은 것은 귓가였는데도, 해영은 제 눈썹 위를 만지작거리며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섰다.

***

퇴근 시간에 회사 밖으로 나선 해영이 손을 들어 뻑뻑한 눈 위를 꾹 눌렀다.

실무 실습 기간의 마지막 공통 과제가 나오기 전이라 주어진 일정은 그렇게 바쁘지 않았지만, 팀의 멘토 변호사님이 주신 개인 과제를 파고들다 보니 오늘도 오후 내내 리서치 지옥에 빠져 있어야만 했다. 오래 글을 읽는 것이 생각보다 더 눈에 피로를 주는 일이었던 탓에 해영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리고 있을 때였다.

“해영!”

멀리서 들려온 부름에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상했듯 민호였다.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제게로 걸어오고 있는 민호를 보며 해영 또한 눈을 덮고 있던 손을 들어 흔들어 주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오겠다더니 정말 딱 알맞게 도착했다. 모델임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액세서리까지 달고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는 민호를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해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쟤는 진짜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너 술 좀 마시냐?”

민호의 질문에 해영은 말없이 씩 웃어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얼굴 위에 떠오른 제법 자신 있다는 기색에 민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얼굴에도 곧 알 수 없는 호승심이 가득 들어찼다.

왜 남자 출연자 둘이 만나는 건데도 카메라가 따라붙는 것인지, 어딜 가나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바라본 해영이 저녁거리가 될 만한 음식을 시켰다. 식사도 겸하는 모양인지 루프탑에 위치한 바에 배를 채울 수 있는 메뉴가 많았다.

주문한 음식은 빨리 나왔다. 쓸데없이 예쁜 야경을 바라보면서 해영이 허기를 채우고 있을 때였다. 벌써 술잔을 반이나 비운 민호가 사뭇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음 데이트는 꼭 같이했으면 좋겠는데….”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묻지 않아도 데이트를 같이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소윤임을 알 수 있었다. 모르는 척, ‘나랑?’ 하고 되물으며 장난으로 분위기를 환기할까 하던 해영이 천천히 말했다.

“평소에도 할 수 있잖아. 꼭 데이트하지 않더라도, 같이 있을 때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면 되지.”

제법 살갑게 나온 음성이 민호의 마음을 달랜 듯 보였다. 한결 더 친근해진 듯한 얼굴로 그가 머뭇거리던 진심을 꺼냈다.

“근데 난… 솔직히 여기 들어와서 좀 자신감 없어졌어.”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말에 반사적으로 손끝이 굽었다. 루프탑 가득 흘러나오는 흥겨운 음악이 잘 어울리는 민호가 도리어 기가 죽은 채 있으니 영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모델이라고 했으니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의도는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해영은 그가 처음부터 소윤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 내뱉는 말들이 진심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출연자들이 다 너무 멋지잖아. 나만 뭐 없는 거 같고, 좀?”

그 시무룩한 말에 해영이 그를 바라보다 들고 있던 마른안주를 던졌다.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땅콩을 잡은 민호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야. 나 곧 인턴 끝나면 백수거든? 넌 모델이면서 왜 무직자인 나보다 더 초조해해.”

“…모르나 본데, 너도 경계 대상이야.”

“어? 진짜?”

슬쩍 자신을 경계하는 민호의 발언에 해영이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자기도 경계 대상에 껴 주는 거냐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민호가 얄밉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와 둘이서만 가진 자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유쾌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같은 또래라는 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술이 들어갈수록 분위기가 더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로 민호가 제 고민이나 걱정거리들을 말하고 해영이 들어 주는 식이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취기가 오른 해영 또한 곧잘 장난을 치곤 했다. 그는 자신이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로 민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까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도 멀쩡했고, 걷는 것도 삐뚤지 않고 일정했으니까. 다만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이 좋은 상태일 뿐이었다. 공용 공간에 모여서 맥주를 마시며 대화하고 있는 이들에게 푸스스 웃으며 인사를 건넨 해영이 이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섰다.

“어….”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방에 불이 켜져 있는데도 비어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방금 공용 공간에서도 선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방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영은 의아한 얼굴로 겉옷을 벗으며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섰다. 벗은 옷을 걸어 둔 채 옆에 달린 욕실에서 손을 씻고 세수를 한 그가 순간 뒤늦게 올라오는 취기에 휘청이며 벽을 짚었다.

너무 오랜만에 마신 게 문제였던 것 같았다. 다신 이 정도까지 마시지 않겠다 다짐하며 느릿하게 욕실을 빠져나온 해영의 눈에 거울 앞 협탁에 놓인 상자가 들어왔다. 모르는 척하기에는 지나치게 컸던 탓에 선물용으로 포장된 상자는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선우의 것이겠거니 했던 해영은 제 이름이 쓰인 카드를 보며 말없이 그것을 들었다.

아무런 장식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제법 고급 용지처럼 보이는 베이지색 카드에 쓰인 것은 아무리 봐도 제 이름이 맞았다. 그렇다면 카드가 올려져 있던 선물 상자 또한 제게 주기 위한 것이리라. 평소라면 망설였을 손끝이 술기운에 힘을 얻어 단번에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옷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네이비색의 니트. 선물의 내용에 기시감을 느낀 해영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잠시 잊고 있었다. 차선우에게는 제법 유치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사귈 때는 그게 못내 귀여웠고….

“귀여워서 짜증 나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니트를 만지작거리던 해영이 다시 상자 안에 옷을 잘 갈무리해 넣었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방 밖으로 나섰다.

이미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면 선우가 먼저 온 것은 확실했다. 올라오면서 2층에 없는 것을 봤으니 1층에 있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와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섰으나 불이 켜진 공간 안에도 사람은 없었다. 괜스레 인기척이 없는 공간을 두리번거리던 해영의 시선이 전면에 있는 유리창에 꽂혔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의 가장자리에 선우가 서 있었다. 누군가와 전화하는 듯하던 그가 해영을 발견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얼핏 눈썹을 치켜세우던 그가 곧장 전화를 끊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얼굴에 해영이 정원으로 나섰다.

“형.”

“왜 겉옷도 안 입고 나왔어. 춥겠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해영을 보며 선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해영은 내민 옷을 입을 생각은 안 하고 묵묵히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경계하는 듯한 눈동자를 보며 차선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제 어깨에 옷을 걸쳐 주는 그에게서 뭔가 캐낼 것이 있는 양 주시하던 해영이 끝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주는데?”

“왜 주냐니, 추울 것 같으니까.”

“이거 말고.”

선우는 해영이 무슨 말을 꺼내는지 알아차렸다. 아마도 올려 둔 선물을 이제야 발견한 거겠지. 그가 곧게 선 허리를 앞으로 기울인 채 해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꾹 다물린 입술, 비스듬하게 아래를 향한 시선, 날카로움이 가신 이목구비, 조금 처진 눈썹. 취기가 올라서인지 울긋불긋한 눈가와 뺨. 제 앞에서 마음이 약해졌을 때 곧잘 나왔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제게 무른 해영을 바라보며 그가 다정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냥 주고 싶었어. 크리스마스였잖아.”

그러자 해영의 속눈썹이 얕게 떨렸다. 흔들리는 기색에 차선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이제 주면 안 된다니까….”

“크리스마스 선물은 꼭 사귀어야만 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되묻던 선우가 중얼거리듯 의문을 덧붙였다.

“그럼 산타는 어린애한테 사심이라도 품고 선물 주는 거야?”

“형, 내가 취해서 그런가? 형이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가 안 가.”

형도 취했어? 가만히 듣고 있던 해영이 번쩍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무슨 또라이 같은 말을 하는 거냐는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해영에 선우가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근데 나는 사심이 있는 거 맞아, 해영아.”

웃음과 함께 새어 나온 목소리가 달짝지근했다. 그에 움찔 떨리는 손끝을 쥐었다 편 해영이 반사적으로 선우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끌었다. 혹시 술김에 무의식적으로 힘이라도 가해질까 싶어 손아귀 힘을 풀었는데도 그는 해영의 손에 가만히 잡혀 있었다.

정원 구석의 나무 뒤로 가고 나서야 선우의 손이 자유로워졌다. 그는 그 자유가 내키지 않는 듯 아쉬운 시선으로 해영의 손을 좇아 시선을 옮겼다. 허전하기라도 한지 선우가 붙잡혀 있던 손목을 매만지는 동안 해영은 혹 누가 있지는 않은지 수풀 밖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가 그러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차선우도 해영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 옆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와 눈이 마주친 해영이 뻘쭘한 얼굴로 괜히 저택을 손짓했다.

“혹시 누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음….”

“여기에서는 카메라가 잘 안 보인대. 찍혀도 우리인지 모를걸? 다른 사람들도 정원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못 볼 거야.”

다정한 시선에 해영은 또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길게 늘어놓았다. 차선우는 그런 해영을 내려다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기가 찬 것 같기도 했고, 조금쯤은 속상해 보이기도 했다.

눈을 내리깐 그는 이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캐묻거나 왜 여기로 데려왔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웃음을 삼킨 채 해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래? 안 보여?”

“어….”

부드럽지만 어딘가 의뭉스러운 음성과 함께 그가 해영을 제 앞으로 옮겼다. 돌연히 선우를 정면에서 마주하게 된 해영이 사뭇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택을 등지고 선 탓에 빛이 닿지 않아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음에도 그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얇은 속 쌍꺼풀이 가늘게 늘어지는 눈매를 따라 깊어지는 웃음. 그린 듯한 미소는 보지 않아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것이었다. 어둠 위로 웃음을 덧그리던 해영이 성큼 가까워진 거리에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탓에 그의 얼굴이 눈에 보다 뚜렷하게 들어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열없이 웃던 선우가 설핏 입매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자꾸 모르는 게 생기네. 해영이 처음은 늘 나였는데….”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으나 해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술기운이 돌아 이곳에 입주한 뒤부터 내내 바짝 하고 있던 긴장은 이미 녹아내린 상태였다. 선우가 내뱉는 말이 정말로 서운함을 토로하는 건지 아닌지 정도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또 미인계 쓰네….’

차선우는 자신이 저러면 제가 넘어갈 줄 안다. 문제가 있다면 정말로 넘어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제가 자신에게 무르다는 사실을, 흔들면 흔드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 진짜… 얄미워.”

해영이 혼잣말을 흘리며 파르르 떨리는 선우의 속눈썹을 노려보았다. 횡설수설 나오는 말들이 정말 술김인 탓인지 마음이 놓여 예전의 말버릇이 계속 나오는 것인지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다. 삐죽 고개를 치켜드는 적신호를 무시하며 윤해영은 짓궂은 말들을 꺼냈다.

“사실 다 처음은 아니야. 뽀뽀는 이미 다른 사람이랑 했었지.”

“…그럴 줄 알았어. 아니라고 해 놓고. 윤해영, 거짓말쟁이.”

“누가 누구 보고 거짓말쟁이래? 형도 나한테 첫 키스라고 거짓말했잖아.”

그걸 내가 속겠어? 속아 준 거야. 중얼중얼 속마음을 꺼내는 해영을 보며 선우가 서럽단 얼굴을 했으나, 입가에는 웃음기가 여실히 배어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 봐도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쩔 수 없었다.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나 얼굴을 보니 해영은 취한 게 확실했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제게 말을 붙이는 모습이 별수 없이 기뻤던 것이다.

“너랑은 전부 처음이었어.”

“어이없네, 그런 거로 치면 나도 형이랑은 처음이었어.”

소곤소곤 내려앉는 목소리가 간지럽다는 듯 해영이 반사적으로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고선 지레 놀라 주변을 눈짓하며 인기척이 없는지 살핀다. 제게 가려져 있는데도 밝은 빛 아래 선 듯한 얼굴을 보며 선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비밀 연애 하는 거 같아.”

짧은 중얼거림과 함께 해영의 얼굴 위로 차가운 손끝이 닿았다. 평소의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는 목 끝에서 무언가에 걸린 채 나온 듯 탁했다. 그 위화감에 선우에게 붙잡힌 해영이 당황한 낯으로 눈을 굴렸다.

“형, 잠시만. 너무… 가까워.”

한겨울의 추위도 느끼지 못할 만큼 올랐던 취기가 단숨에 가셨다.

얼음장처럼 매끄러웠던 해영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곧게 뻗은 기다란 손가락이 주저함 없이 선우의 어깨를 잡고 슬쩍 접근을 막았다.

넘어올 듯 말 듯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저를 밀어 내는 그를 집요하게 주시하던 선우가 이내 느릿하게 시선을 떨궜다. 그러고는 해영에게로 기울었던 상체를 바로 세우며 떨어졌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벽에 몰린 것처럼 당황하던 얼굴에 차츰 불안함이 가시는 게 보였다.

멀어지는 거리에 불안함을 느끼고 마는 것은 한 사람뿐인 것처럼 보였다. 차선우는 그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겨우 닿자마자 억지로 거둬야 했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며 안으로 힘 있게 말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드러냈던 조급한 기색을 숨긴 채 해영을 이전과 같은 다정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해영은 술기운이 확 달아난 얼굴을 한 채로 투덜거렸다.

“그, 여기 카메라가 없는 곳이 없는데 어떻게 비밀 연애를 해.”

뜬금없는 부분에서 나온 반박에 선우의 눈썹이 순간 위로 들렸다. 하지만 해영은 그런 선우를 보지 못한 채 제가 뱉은 말을 곱씹고 있었다.

카메라가 없는 곳이 없는데. 말로 뱉고 나서야 성큼 찾아온 현실에 윤해영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짚었다.

오랜 연애를 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매 순간 조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해영이 주로 경계하는 대상은 다른 이의 시선이었다. 함께 거주하는 이들을 신경 쓰기도 벅찬 마당에 카메라까지 신경 쓰려면 긴장을 한시도 놓아선 안 될 테다.

“아….”

꾹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나지막한 탄식에 가만히 지켜보던 선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해영아.”

담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머리를 짚고 있던 손을 내린 해영이 조금의 억울함을 담고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뭘 걱정하는 줄 알고.”

“그게 뭐든.”

저를 올려다보는 해영과 눈을 맞추며 선우는 조곤조곤 그를 달랬다.

“걱정하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

어쩐지 늑골 안쪽이 잠시간 수축되는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순간 숨을 멈추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해영은 속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의 원인이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파편처럼 박혀 있는… 차선우.

이런 순간에마저도 그는 본인보다 제 마음을 더 우선하곤 한다. 늘 그래 왔듯이.

그런 배려를 고스란히 느낀 해영이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입술을 짓씹었다. 가끔, 아주 가끔 해영은 자신이 그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곤 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윤해영. 솔직히 말하면… 그냥 엎고 싶어.’

문득 그가 이곳에 들어온 첫날 했던 말이 되살아나 뇌리를 스쳤다. 갑작스레 왜 그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으나, 해영은 그것이 완전히 제 기우에 그치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 해가 되면 해가 됐지 그에게 득이 될 리 없었다.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 일은 하는 법이 없었다. 차선우에게 있어 흠은 오직….

오직 자신뿐이었다. 한숨을 삼키는 해영을 향해 선우가 손을 뻗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었잖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겨울 속에서 사는데도 봄날의 햇살을 받고 서 있는 것 같게끔 하는 목소리, 다정한 시선, 아주 귀한 것을 만지는 듯한 손길. 그는 뒷걸음질을 치느라 조금 흘러내린 겉옷을 다시 꼼꼼히 덮어 주었다. 제 어깨에 와 닿는 애정에 해영이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내리깐 채 옷깃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이내 손끝에 힘을 준 채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뱉었다.

“나 내조 정말 잘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 슬쩍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기다란 속눈썹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도 이채를 띠는 눈동자가 진득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홀린 듯이 주시하던 해영이 곧 정신을 차리고 입을 비죽거렸다. 다른 사람이 하면 그냥 웃고 넘길 말도 선우가 하면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얼굴의 영향이 클 것이 분명했다.

하마터면 또 넘어갈 뻔했네.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선우를 향해 윤해영은 삐딱한 시선을 보냈다.

“형은 아직도 내가 형 처음 봤을 때의 스무 살 윤해영 같지? 근데, 형. 나도 이제 스물여섯이야. 형이 꼬신다고 다 넘어갈 거 같아?”

헛웃음 섞인 목소리가 선우에게 날아들었다.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주시하던 차선우가 눈을 접어 웃으며 어설픈 목소리를 냈다.

“넘어와 줘, 해영아….”

차선우는 스무 살의 윤해영도 좋아했고 스물여섯의 윤해영은 더 좋아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같은 언어 안에 감정을 전부 담을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좋아하는 마음은 전혀 덜어지지 않고 오히려 무게를 더할 뿐인데 상대가 감당할 수 없다면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받아 줄 만한 크기로 덜어 내 보여 주는 수밖에.

“눈웃음치지 마, 진짜.”

사근사근하게 웃는 선우를 보며 해영이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곧게 뻗은 손 위로 드러난 눈매가 날카롭게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그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입술을 길게 늘어트릴 뿐이었다.

“하지 말랬다.”

단단히 엄포를 늘어놓아도 갈수록 처연해지는 웃음에 해영이 더 말하지 않겠다는 양 몸을 돌렸다. 먼저 성큼성큼 집 안으로 향하는 자신을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얼거림에 해영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워야만 했다.

“…더 노력해야겠네.”

뭘 더 노력해. 하지 마.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꾹꾹 집어삼키며 해영이 걸음을 더더욱 빨리했다. 문제는 당장 그 자리에서 도망쳐도, 결국 둘의 목적지는 같다는 데에 있었다.

침실로 향하는 내내 해영은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불씨라도 집어삼킨 듯 화끈거리는 속을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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