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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지. 윤해영은 캐리어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이를 보며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이가 빠드득 갈릴 지경이었다. 이하진, 이 배신자.
해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출연자들은 가장 늦게 도착한 마지막 출연자를 반기기에 바빴다.
“와, 키 엄청 크시다….”
앞에 서 있던 다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의식중에 뱉은 말이었는지 그녀는 감탄을 흘리고 나서야 뒤늦게 손을 들어 올려 입가를 가리며 비시시 웃었다.
그가 들어선 순간부터 저택 안의 기류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구태여 고압적인 표정을 짓지 않아도 분위기에 자연스러운 무게가 실리는 사람. 마치 중력처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한 번에 이끄는 사람. 그는 그 모든 게 태생적인 사람이었다.
해영이 자신도 모르게 꽉 주먹을 그러쥐었다. 애써 올린 입꼬리가 떨려 왔다. 좋아했던 그때처럼, 헤어지던 그때처럼 차선우는 여전히 똑같이 잘난 모습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할 만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옆에 놓인 슬리퍼로 갈아 신은 그가 완전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설핏 웃는 얼굴로 짧게 고개를 끄덕이듯 인사한 그는 이윽고 턱을 치켜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막을 헤매는 여행자처럼 건조하던 시선이 단번에 자신을 향했다. 화살이 꽂히듯 툭 박혀 들어온 눈길에 해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마주한 것 같은 눈빛. 이물질 없이 새까만 눈동자가 심해보다도 깊게 느껴졌다. 어둡던 눈은 해영이 담기자마자 생기를 머금듯 이채가 깃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처음 받아 보는 선우의 낯선 시선에 빳빳하게 굳어 있던 해영은 곧 그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꺼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일이 늦게 끝나서.”
그건 양해를 구하는 말도 사과의 말도 아니었다. 가장 늦게 온 것에 대한 변명치곤 짧았지만, 모두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선우를 중심으로 뭉친 분위기에 해영은 무의식중에 팔짱을 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순간 닿아 온 것은 벽이 아닌 타인의 인기척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벽에 기대서려던 해영이 예상 밖의 따뜻한 온기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시선에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 있던 건지 모를 만큼 조용히 와 있던 재휘였다. 숙소에 가장 먼저 온 출연자면서 가장 말이 없던 출연자.
아직 서로의 나이는 모르지만, 해영은 당연하게도 재휘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말이 별로 없고 멍하니 있으면서도 제법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냈던 것이다.
이번에도 재휘는 제게 대뜸 기대 오는 해영을 흘긋 바라보면서도 얼굴에 조용히 옅은 미소만 걸칠 뿐이었다. 죄송해요, 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재휘는 그래도 괜찮다는 듯 팔을 들어 해영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감싸기보단 올려 두는 것에 가까운 스킨십이라 그런지 재휘는 여전히 아무런 생각 없는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해영이 잠시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조금 낮아진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미… 많이들 친해지셨나 봐요.”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쪽으로 시선이 향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을 보지 못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부드러운 음성에 소윤의 반박이 곧장 뒤따라왔다.
“어,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건지 말을 뱉고 나서 푸스스 흘리는 웃음소리는 자신이 들어도 썩 귀여웠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밝고 구김살 없는 미소는 소윤이 가진 매력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리라.
“저희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제 저녁 준비해서 식사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다인도 말을 덧붙이며 발꿈치를 들었다. 아직 현관 앞까지밖에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벌써 출연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해 있었다.
그건 아마 차선우가 다정하게 웃고 있는 덕이 클 것이다.
화려한 인상 탓인지 그는 웃고 있지 않을 때면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그건 잠시뿐이었고, 한번 얼굴에 웃음기가 어릴 때면 분위기는 금방 눈 녹듯 따뜻해졌다. 햇살 같은 미소를 짓는 선우를 볼 때면 해영 또한 반사적으로 마주 웃어 버리곤 했었다. 지금은 그럴 수 없었지만.
‘하….’
해영은 숨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입만 벙긋거린 정도의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헤픈 웃음에 별수 없이 짜증이 났지만, 여기서 자신이 기분 나빠하는 건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굴지는 말자. 해영이 생각을 털어 내듯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차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는 듯 집요한 시선에 윤해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남자 출연자가 살갑게 말을 걸어오자 선우는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식사하셨어요?”
“아직이요.”
“와, 때맞춰서 잘 오셨네요. 함께 식사해요!”
다행인 게 맞나. 해영은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시선을 뒤쫓으며 어수선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대충 이야기가 끝났는지 출연진들이 가장 뒤에 서 있던 해영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갑작스럽게 받게 된 시선에 그가 멈칫하는 사이 재휘가 어깨에 두른 손에 가볍게 힘을 줬다. 정신 차리라는 듯한 손길에 해영이 이윽고 가장 먼저 발길을 뗐다.
복도를 따라 안으로 향하면서, 해영은 자신의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재휘를 향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감사해요.”
“뭘….”
재휘는 조그맣게 하품을 하다 말고 대꾸했다. 어딘가 멍한 얼굴을 힐긋거리던 해영이 부엌에 들어섰다.
“아, 짐 놔두고 오실래요? 저희가 이미 방을 정해 버리긴 했는데.”
“…네.”
뒤에서 다른 남자 출연자인 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말에 상대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어 한숨 같은 대답을 꺼낸다. 그것도 잠시였다. 선우의 목소리는 곧 들릴 듯 말 듯 멀어져 갔다. 아무래도 민호를 따라 계단을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오기 전 낮에 다른 출연자들과 방을 정했었다. 한 달간 지내게 된 이 집은 2층짜리 주택이었다. 1층에는 다이닝 룸과 여성 출연자들을 위한 방이 있었고, 2층에 공용 공간과 남성 출연자들을 위한 방이 있었다.
2층에는 각각 방이 두 개씩 있어서 자연스럽게 두 명씩 방을 나누게 되었는데, 해영은 재휘와 한방을 쓰기로 했다. 가장 마지막에 온 차선우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민호와 한 달간 같은 방에서 지낼 선우를 생각하던 해영이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저희 이제 음식 접시에 담기만 하면 되는 거죠?”
다인이 현아를 향해 물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과 넓은 8인용 식탁이 있는 다이닝 룸은 방금까지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상태 그대로였다. 요리를 꽤 할 줄 안다는 현아를 필두로 하던 저녁 준비가 끝나 가던 참이었다.
윤해영은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옆에서 재료 손질 따위를 도왔다. 그 이후에는 할 게 없어 도울 게 없나 기웃거리고 다니는 게 일이었다. 요리를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구태여 요리를 할 줄 안다며 나대고 싶지는 않았다. 할 줄 아는 거라고 해 봤자 자취 요리에 불과하기도 하고….
부엌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이들을 보던 해영과 물잔을 꺼내던 소윤의 눈이 마주쳤다. 멋쩍었는지 반사적으로 웃는 소윤을 따라 해영도 마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그대로 수저를 한 움큼 챙겨 들었다.
8인 테이블 위에 개수를 맞춰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자 소윤이 옆에 다가와 물잔을 내려놓았다. 가까이서 테이블 플레이팅을 하고 있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마주칠 때마다 생긋 웃는 소윤을 보며 따라 웃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웃음이 많은 건 차선우랑 비슷한 것도 같았다. 문득 그녀가 선우를 향해 살갑게 굴던 장면이 다시금 떠올랐다. 해영이 설핏 눈썹을 찡그리며 실소를 삼켰다.
아 정말 구질구질해…. 너 헤어졌다. 지랄하지 말자, 윤해영.
“뭐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다 했어요.”
곧 차선우와 함께 돌아온 민호가 소윤의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활짝 웃으며 소윤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다이닝 룸에 있던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렸다.
부엌에 혼자 남은 다인은 조금 굳은 얼굴로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들었다. 옮기려는 모양새에 해영이 그녀에게로 다가가 접시를 옮겨 받았다. 한 게 없는 것 같아 접시라도 옮기려고 했던 건데, 다인은 그런 행동에도 놀란 얼굴로 웃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첫날이라 그런지 다들 웃음이 많았다. 같은 공간에 선우가 있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자신도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실실 웃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해영이 작은 한숨을 삼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색함보다 긴장감이 더 컸으므로, 의식적으로 웃지 않으면 곧장 입가가 딱딱하게 굳을 것 같았다.
“식사할까요.”
테이블 위로 음식이 담긴 그릇들이 전부 오르자 부담스러운 식사 자리가 시작되었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여성 출연진과 남성 출연진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만약 맞은편에 선우가 앉아 있다면 음식을 삼키기도 전에 체하겠지.
해영은 서로 요리를 누가 했니 맛은 어떠니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출연자들 틈에서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 또한 마냥 조용한 성정은 아니었으므로 웬만하면 대화에 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선우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내가… 잘못했어, 해영아.’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무작정 자신의 잘못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가 붙잡은 손 위로 떨어지던 물기, 흔들리던 시선, 떨리는 목소리에 담겨 있던 눅눅한 감정들. 그날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 그를 두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하하 호호 웃는 낯을 보여 주기에 해영은 염치를 알았다. 무엇보다,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윤해영은 늘 자신의 상처보다 차선우의 상처를 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혹시 선우가 자신을 다 잊어서 이 프로그램에 나온 거라면 자신만 마음을 다잡으면 될 일이니 괜찮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게 문제였다. 해영은 굳이 선우의 앞에서 자신이 잘 지내는 꼴을 보여 그의 속을 긁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못 지내는 꼴을 보여 주려는 것도 아니었다.
“저희 그럼 다 모였으니까 소개 한번 다시 할까요?”
“네. 좋아요!”
들려온 말에 덜 썰린 양배추를 한입 크기로 조각내던 해영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냈던 세희부터 스타트를 끊었다. 그녀의 옆으로 여성 출연자들이 하나둘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김세희, 이다인, 하소윤, 고현아. 이미 낮에 한 번 듣긴 했으나, 이어지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곱씹던 해영이 자신에게로 몰린 시선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테이블의 맨 끝에 앉아 있어서인지 남자는 자신부터 소개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윤해영, 입니다.”
시선을 받은 해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시에 입이 살짝 벌어지며 곡선을 그리는 미소는 호감을 주기 충분했다.
맞은편에 앉은 다인이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해 보는 것을 보며, 어쩐지 멋쩍어진 그가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바로 다음 출연자의 소개로 넘어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순간, 아무도 예상치 못한 물음이 다정한 음성을 입은 채 날아들었다.
“해영 씨,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차선우였다.
형 미쳤어? 순간적으로 튀어 나갈 뻔한 말을 삼키며 해영이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선우가 뱉은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세희가 제게 흥미롭다는 눈길을 주었다. 가장 늦게 온 선우와 자신이 무슨 관계인지, 정말 아는 사이인 건지 궁금한 듯 번갈아 주시하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지 않냐고…. 설핏 굳으려는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웃은 해영이 잠시 입술을 물었다. 그가 어떤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차선우는 단순히 자신을 괴롭히려고 이런 말을 꺼낼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자신이 알던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있죠.”
다정한 사람. 차선우는 늘 다정한 사람이었고, 가끔 자신의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며 즐거워하긴 해도 곧 제가 바라는 대로 행동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선우를 알고 있는 해영은 대뜸 이런 물음을 꺼낸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화가 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차선우에게는 그래도 될 자격이 있었으니까.
어차피 영원히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대학 생활 내내 지겹도록 붙어 다녔으니, 모르는 척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숨겨 봤자 어차피 아는 사람이 방송을 보게 된다면 알려질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같은 과였잖아요.”
해영은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와 대조적으로 호선을 그리고 있던 선우의 입매는 순간 굳었다.
둘이 아는 사이라는 게 흥미로웠는지 선우와 해영을 번갈아 보던 이들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민호가 동그래진 눈으로 해영을 향해 물었다.
“오, 그럼 같은 대학 나오신 거예요?”
“그렇죠.”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 대답에 사람들의 눈에 한층 더 흥미로운 기색이 스몄다. 해영은 모르는 척 괜스레 시선을 돌리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여성 출연자들 사이에서는 신기하다며 웃음소리를 담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쉽사리 다음 화제로 넘어가지 않자, 해영은 젓가락 끝을 물고 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해영을 향해 앞에 앉은 현아가 물어 왔다.
“친했어요? 같은 과여도 데면데면한 사이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 물음에 해영이 입에 물고 있던 젓가락을 내렸다.
아직 이름을 제외하곤 서로의 나이나 직업 같은 정보를 나눌 수 없었다. 자르자면 자를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해영은 그러지 않았다. 물어본 상대를 굳이 멋쩍게 만들 필요는 없을 테니까.
“뭐, 평범했어요. 데면데면하기엔 눈에 띄잖아요. 과에서도 유명했어요.”
해영이 선선히 웃으며 답했다. 주어는 생략되었지만, 모두가 과에서 눈에 띈 유명인이 선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대화의 맥락을 떠나서도 이 자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늘 그랬다. 사람이 많은 경영학과 특성상 선후배 간의 문화가 견고하지 않은데도, 선배고 후배고 가릴 것 없이 차선우를 알았다. 가끔 과 행사를 할 때면 선우를 부르고 싶어 다들 집요하게 굴 정도였다. 자신을 부르면 선우가 따라온다는 것을 눈치챈 이들에게 이용당한 적도 더러 있었다.
과에서만이 아니었다. 대학 내에서 차선우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쉽게 잊을 수 있을 만한 외모가 아니지 않나. 해영이 다닌 대학은 국립대로 무척 넓었지만, 잘생긴 사람은 늘 희소했다. 잘생기면 자연히 알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선우를 향해 시선을 흘린 해영은 줄곧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눈과 마주쳤다. 웃음기 없던 눈이 찡그리듯 휘어졌다. 제게 곧잘 죄책감을 느끼게 했던 미소를 마주한 해영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평범했다고 말하면, 서운한데.”
이윽고 그의 입술 사이로 씁쓸한 목소리가 장난스레 새어 나왔다.
다른 출연자들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으므로, 해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눈을 피했다.
“와, 두 분 친하셨어요?”
그때 소윤이 선우를 향해 살갑게 물었다. 그는 해영에게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은 채로 답했다.
“네. 많이.”
기꺼운 긍정이 서슴없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방금까지의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는 음성이었다. 그 대답이 누구에게 향한 건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고개를 돌린 채로도 해영은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다음 분으로 넘어가죠.”
그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를 서글서글하게 뱉었다. 동시에 옆에 앉은 재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 흐르듯 차례를 넘기는 해영에 분위기의 주도권도 자연스럽게 재휘에게로 넘어갔다.
“저는 전, 재, 휘, 라고 합니다.”
이미 소개를 한 번 했던 후인데도, 그는 친절히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끊어 말했다. 그 덕에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재휘 옆에 앉은 김민호의 차례까지 지나가자, 출연자들의 소개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의 긴장감과 묘한 화기애애함 속에서 얼추 끝나 갔다. 마지막은 모두가 아닌 척 신경을 쓰던 선우의 차례였다.
익숙한 이름이 부드러운 울림을 가지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윤해영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차선우예요.”
순식간에 쏠린 분위기로 이 자리가 지금의 순간을 위해 마련된 것임을 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소개에 누구 하나 집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목소리가 엄청 좋으신 것 같아요.”
“맞아요! 분위기도 뭔가 배우…나 모델이실 것 같은 느낌?”
다인의 말을 이어 소윤이 발랄하게 호응했다. 소윤의 말에 여자 출연진들 사이에서 동의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선우는 큰 리액션 없이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거나 소리 없이 웃는 것으로 곤란한 대답을 대신했는데도, 그들 사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여성 출연자들과 선우를 중심으로 쉽사리 끼어들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해영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차선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디서나 호감을 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줄곧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웃는 소윤의 눈에서 해영은 뚜렷한 호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였을까. 해영은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에서 왜인지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멍하니 소윤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다 소윤의 옆에 앉은 출연진과 눈이 마주쳤다.
세희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생글 웃었고, 해영도 따라서 반사적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종일관 부자연스럽게 흘러가던 분위기가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한 것은 그때였다.
띠링-.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핸드폰 알림음이 울렸다. 이렇게 모두가 동시에 받을 연락이 뭔지 짐작한 출연자들은 조금 긴장한 얼굴을 했다.
제각각 핸드폰을 확인하는 이들 사이에서 해영도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 내용에 그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오늘 하루 마음이 향한 출연자의 이름과 메시지를 적어 주세요. 메시지는 상대에게 익명으로 전해집니다.
뭘 했다고?
문자를 읽어 내리던 해영이 황당한 기분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선택의 여지 없이 무조건 한 명을 골라야 하는 시스템이 당황스러웠다. 첫인상만 봤을 때 눈에 들어온 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상대에 대해 아는 것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자니 곤란했던 것이다.
아무나 쓰자.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한 해영이 흘긋 소윤을 바라보았다. 아마 선우 형에게 보내겠지. 고민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선우에게 메시지를 보낼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에게 모든 이의 메시지가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선우 형은?
‘아, 윤해영. 그런 거 생각하지 마.’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아 해영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마음을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왜인지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선우가 누구에게 보낼지를 추리하는 데에 온 신경이 쏠린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출연자들이 메시지를 보내는 잠깐 동안 이어졌던 침묵은 발랄한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어렵네요.”
아하하. 소윤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싱글싱글 웃었다. 어렵다는 것치고는 해맑은 얼굴이었지만, 그 미소가 하나도 밉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맞은편에 앉은 민호가 ‘별로 안 어려웠던 것 같은데요?’ 하며 장난을 걸었다.
“진짜 어려웠어요!”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휘는 얼굴에도 여전히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그 여유로운 얼굴을 보며 해영도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보낸 건지, 다들 이미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마무리된 분위기에 식사를 준비하지 않은 이들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지 않은 대신 뒷정리를 하고자 함이었다. 해영도 분위기를 눈치채고 먹으려던 것을 내려 둔 채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설거지 담당이 된 건 해영과 소윤이었다. 소윤이 거품 묻은 그릇을 넘기면, 해영이 물로 닦아 건조대에 넣어 두었다. 소윤이 다시금 거품 묻은 식기를 건네줄 것을 기다리면서 그는 부엌 한편에 서 있는 민호를 힐끔 바라보았다.
설거지 담당도 아니면서 김민호는 설거지하는 내내 자신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해영은 그의 시선이 소윤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챘다. 이렇게, 표정이나 행동에서 마음이 곧이곧대로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민호가 소윤에게 관심 있어 하는 게 빤히 보였다.
“내일 저녁은 뭘까요?”
기대감 어린 얼굴을 한 소윤을 보며 해영이 물었다.
“뭐 드시고 싶은데요?”
“저는 다 잘 먹어요! 근데 오늘 양식 먹었으니까 내일은 한식…?”
“어, 저도 한식 좋아해요.”
가볍게 한 대꾸에도 그녀는 공통점을 찾은 것이 반갑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계속 싱글벙글인 소윤을 보며 해영이 반사적으로 마주 웃었다. 그러다가 초조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민호를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설거지를 끝낸 해영은 주변을 서성이는 민호에게 차례를 넘겨주듯이 자리를 떴다. 그는 팔뚝까지 끌어 올려져 있던 소매를 내리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막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였다.
“해영 씨.”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불러 온 목소리에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 출연자 방은 공용 공간을 가운데 두고 양 끝에 떨어져 있었는데, 해영이 쓰기로 한 방은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보이는 방이었다.
자신을 부른 이는 방 앞에 선 재휘였다. 그의 옆에는 선우가 있었다.
해영은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선우가 이곳에 있는 이상 마주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마주칠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저 기다리신 거예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눈치챘지만, 해영은 괜스레 웃으며 재휘를 향해 물었다.
재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한 얼굴에 해영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해영은 말아 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선우 씨가 방을 바꿔 줄 수 있냐고 물어봐서요.”
제게 가까이 다가온 해영에게 재휘는 폭탄 같은 발언을 꺼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눈에 띄게 움찔한 해영이 반사적으로 선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장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했다. 한 번도 자신에게서 떨어진 적 없다는 듯 흔들림 없던 눈동자는 곧 휘어지는 눈매를 따라 드리워지는 긴 속눈썹 아래 가려졌다.
검은 머리칼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흰 얼굴. 그 위로 떠오른 화사한 웃음은 해영이 내내 그리워하던 것이었다.
윤해영은 아주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낯을 가린다고 했더니, 친절하게도 다들 바꿔도 괜찮다고 하시네요.”
선우가 타인의 친절이 기쁘기 그지없다는 듯 산뜻하게 말했다. 그 말에 방금까지 잘근잘근 물어뜯기던 해영의 입술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낯을 가려? 누가? 차선우가?
해영은 그가 태연하게 꺼내는 거짓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 차선우를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웃기지도 않는다며 비웃을 소리였다.
“우리가 평범한 사이는 아니었잖아요.”
그가 꺼낸 말은 아까 식사하던 자리에서 나왔던 말의 연장선이었다.
차선우는 나긋하게 말하며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목소리도, 미소도 전부 부드러웠는데 왜인지 해영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나를 불편해하지 않을 만한 사람은 해영 씨밖에 없는 것 같은데….”
보드라운 껍데기는 피부 위에서 금세 말라 바스라졌고, 껍데기와 달리 날카로운 알맹이만이 해영의 깊숙한 내부까지 손쉽게 파고들었다.
그건 아마 말의 내용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과는 달리, 이곳에서 차선우를 불편해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었으므로.
‘…망했네.’
해영은 시끄러운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곡선을 그리고 있던 선우의 입매가 굳어 갈 때 즈음, 그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윤해영은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정말 간절히 필요했다. 원래라면 관심도 주지 않았을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유가 뭐였든 간에 출연하겠다고 한 이상 뒤에 벌어질 일은 모두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그는 이미 한 달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반드시 데이트해야 한다는 상황을 수용했다. 마음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 상황과 감정들이 각색되어 남들 앞에 전시될지도 모른다는 상황까지도 받아들였는데….
전 애인이 출연하고, 그와 룸메이트까지 되는 상황 따위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완벽하게 망한 계획 앞에서 해영이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띠링-.
물론 해영이 참가한 트루먼 쇼는 등장인물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그는 들려오는 핸드폰 알림음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출처는 선우의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이었다. 알림음이 여러 번 울린다 싶더니 화면에 메시지가 여럿 떠올랐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틈은 없었다. 해영은 자신이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도 느껴지는 진동에 다시 고개를 내렸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았지만, 눈에 익은 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 또한.
앞으로 잘 지내봐요 ㅎㅎ
잠시간 화면에 뜬 문자를 내려다보던 해영은 그것이 다른 출연자가 자신에게 보낸 것임을 깨달았다. 뒤늦게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메시지를 다시 읽어 내렸다.
짤막한 메시지는 어색함과 반가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짧은 메시지를 수차례 눈에 담던 해영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프로그램을 찍으며 이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메시지가 온 것을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출연자 중에 선우가 있었던 탓이다. 그가 집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부터, 해영은 첫인상으로만 보자면 고를 사람은 한 명뿐이라고 생각했다.
“다 형한테 보낼 줄 알았는데….”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메시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방금 선우의 핸드폰으로 왔던 연락도 모두 다른 출연자들이 보낸 메시지일 것이다. 해영은 선우의 핸드폰이 아닌 방 안에 있는 드레스 룸 방향을 바라보았다.
드레스 룸의 안쪽에는 욕실이 있었는데, 짐을 정리한 선우가 먼저 씻겠다며 들어간 후였다. 그가 있을 곳을 자신도 모르게 주시하던 해영이 손을 들어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붙어 있던 마이크를 뗐다.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다 같이 입주한 장소는 2층짜리 전원주택이었다. 넓은 집 안에 곳곳이 카메라가 숨겨져 있었는데, 심지어는 정원에도 설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눈치채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곳에도 카메라는 존재했다. 다행스럽게도 해영은 하진으로부터 미리 어디쯤 카메라가 있는지 얘기를 들은 후였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테라스 문을 열고 나섰다.
또 다른 사각지대가 있을 수도 있으나, 일단 그녀에게 듣기로 카메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욕실과 방마다 붙어 있는 테라스뿐이었다. 제법 널찍한 테라스를 가로질러 난간 앞에 다다른 해영이 주저 없이 전화를 걸었다.
- …어, 해영아! 무슨 일이야!
평소와 달리 길어지는 통화 연결음에 불안해지려는 찰나, 수화기 너머 작위적으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찔리는 게 있는 사람 특유의 어색한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를 받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하진이었다.
자신이 왜 전화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능청스러웠다. 물론 그녀 나름대로 미안한 마음에 일부러 그러는 거란 건 알지만, 하진에게는 계약 체결 전 중요한 고지 사항을 알릴 의무를 저버린 책임이 있었다.
“왜냐니.”
픽 헛웃음을 터트린 해영이 덤덤하게 그 점을 짚었다.
“누나, 나한테 말 안 한 게 있던데.”
- 정말 미안.
되돌아오는 사과는 빠르고 진솔했다. 방금까지의 밝은 목소리는 연기였다는 듯 시무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차선우가 나온다는 걸 미리 말해 주지 않을 수 있나 싶었지만, 배신감을 느끼기에 해영은 그녀에게 받은 것이 더 많았다. 따라서 그는 더 화낼 의지를 잃고 투덜거렸다.
“미리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나 오늘 형 보고 진짜 놀랐어.”
- 너 혹시 차선우 보자마자 운 건 아니지?
하진의 물음에 움찔했던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안 울었어. 이제 더 울 것도 없고.”
- 그건 그래. 나 울다가 탈수 증세 오는 사람은 또 처음 봤잖아.
“…….”
공부하다가 지친 거라는 변명은 도통 들어 주질 않는다. 헤어지고 난 뒤에 힘들었던 건 맞지만, 해영은 그런 와중에도 시험 기간을 견뎌야 했고 과외 알바도 몇 개씩 병행하고 있었다. 그게 몸에 무리를 줬던 것이다.
하루에 3시간도 겨우 자면서 버티다 결국 쓰러졌고, 눈을 떴을 때는 응급실이었다. 옆에는 빨개진 눈으로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한 하진이 앉아 있었다.
해영은 그녀가 이 약점 아닌 약점을 앞으로도 아주 오래 들먹거릴 것임을 직감했다. 그것이 못내 억울했지만, 해영은 제 무고함을 주장하는 대신 시린 손과 함께 주머니 속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 내가 차선우한테 말한 건 아니야. 근데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네… 미리 말 못 해 준 건 진짜 미안.
“…누나가 말한 거 아니었어?”
잠시 멈칫한 해영이 느릿하게 되물었다.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선우에게도 하진이 출연 요청을 한 건 아닐까, 잠깐 생각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굳이 그가 나올 이유가 없지 않나. 그가 얼마나 부유한지는 해영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돈이 필요해서 나온 건 아닐 것이다.
“그럼….”
형이 나와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해영은 순식간에 답답해지는 명치 끝에 손을 올리며 치밀어 오른 의문들을 애써 무시했다.
이미 벌어진 상황이었다. 자신 때문에 나왔을 거란 거만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해영은 덤덤하고자 노력하며 하진의 말을 받아들였다. 선우가 출연한 것만으로도 곤혹스러웠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근데 누나, 나 차선우랑 같은 방이야.”
- 뭐?
하진이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아니, 어쩌다?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이러한 상황까지는 예기치 못한 모양이었다. 도리어 해영이 나서서 놀란 하진을 달랬다.
“걱정하지 마. 조심할게. 조심하긴 할 건데,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기 위해 꺼냈던 말이 끝내 자신 없이 흩어졌다.
- 허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하진을 따라 해영도 후, 낮은 숨을 뱉었다. 깊게 피어오른 희뿌연 입김이 시야를 메우다 사라지곤 했다.
겨울은 유독 해가 빨리 저물곤 했다. 빼곡한 어둠을 가로지르는 입김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영이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손을 들어 뺨을 덮었다.
얼굴이 살갗이라기보단 얼음덩이에 가까울 정도로 꽝꽝 얼어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가지고 나올까…. 보지 않아도 빨개졌을 볼을 체온으로 녹이며 해영이 결심한 듯 몸을 돌렸다.
뒤를 돌자마자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하고 멈춰 서야 했지만.
“…누나, 일단 끊을게.”
- 응,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어차피 편집은 내가 할 거니까 넌 남한테 들키지만 말고.
난간에서 몸을 떼고 뒤를 돌았을 때, 문턱에 기대어 서 있는 인영과 마주한 그는 마침내 얼음이 되어 딱딱하게 굳었다.
“해영 씨.”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등지고 서 있던 선우가 그를 불렀다. 묵묵히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신을 보며 어쩔 줄 모르겠단 얼굴로 굳어 있는 해영을 보며 선우는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어둠이 깔린 테라스로 나와 당연하다는 듯 해영에게로 다가섰다.
“해영아.”
“…….”
“한겨울에 외투도 안 입고 나오면 어떡해. 감기 걸리려고.”
차선우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해영에게 둘러 주었다. 어깨부터 팔까지 꼼꼼히 둘러 주는 동안 해영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추위마저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거 봐, 몸이 차갑잖아.”
속상하게…. 그가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가 목덜미에 내려앉고서야, 해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선우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까처럼 낯선 존댓말을 쓰지 않고, 전처럼 다정한 말들을 건네는 차선우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해영의 등이 난간에 닿았다. 숨을 쉴 수 있는 아주 약간의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퇴로가 막혔다. 그와 같은 공간에서 사는 이상,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주지시켜 주는 것만 같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같은 한가한 인사를 꺼내기에는 이미 늦었다. ‘잘 지냈어?’ 같은 물음을 꺼낼 수도 없었다.
차선우는 발아래 뚜렷한 선이라도 그어진 것처럼, 한 발짝 떨어진 거리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주시했다. 그런 선우를 보며 해영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다, 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형도 당황했지? 내가 있을 줄 몰랐을 텐데.”
“무슨 소리야, 해영아. 네가 여기 있으니까 온 거지.”
쿵, 순식간에 발밑까지 떨어진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꾸며 낸 가벼운 어투에 그 또한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의 입에서 선선히 흘러나온 목소리와는 다르게 대답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기껏 감정을 추스린 게 무색할 정도로, 해영이 저도 모르게 꽉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사실 어쩌면, 왜 여기에 출연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있어서 온 걸지도 모른다는 거만한 생각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 염치없게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해영의 눈동자는 그런 자신을 기민하게 살피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따위 프로그램에 왜 나오겠어.”
해영은 이어진 선우의 말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놀란 듯 커진 눈도 함께였다.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툭 튀어나오는 거친 단어들이 영 그가 쓰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한 해영은 그제야 그의 기분이 무척 가라앉은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연애하면서도 자신에게 한 번도 화낸 적 없던 선우가, 처음으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난주였나, 네가 여기 나간다는 말을 들었어. 나는 그래서 나왔어.”
차선우는 당연하다는 듯 손을 올렸다. 얼굴 가까이 다가오던 손가락은 이내 방향을 바꿔 목덜미를 쥐었다. 쓰다듬듯 파고드는 손길에 움찔할 틈도 없이, 그가 다정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랑 연애를 하겠다고? 꿈 깨, 해영아.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봐.”
금세 자리한 미소에는 여전히 짙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
윤해영이 차선우를 만난 건 6년 전, 대학에 막 입학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데에 여념이 없던 봄날이었다.
그때 해영은 중학교 3학년인 여학생과 고등학교 2학년인 남학생 둘을 과외하고 있었기에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바쁘게만 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신입생 OT에서 친해지게 된 동기와 선배가 꼬시는 것에 넘어가 학생회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돈을 준다길래 과 대표까지 했는데, 해영은 그 경험을 계기로 인생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윤해영은 생각했던 것처럼 즐겁고, 생각했던 것보다 바쁜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진으로부터 밥 사 줄 테니 만나자며 연락이 온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내내 자신이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 꼭 맛있는 밥을 사 주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꼭 하진과 같은 대학에 입학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언제고 밥을 사 주었을 테지만 말이다.
여하간 그녀는 해영이 입학한 후부터 내내 벼르고 있었는데, 해영에게 할 일들과 약속이 계속해서 증식하는 바람에 일정이 번번이 밀리던 와중이었다.
- 더는 못 참아. 너 데리고 갈 맛집 리스트 뽑아 놨으니까 이번 주에 당장 만나.
전화해서 이를 빠득 갈며 말하는 하진에게 해영은 쾌활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공강 시간을 비워 두겠다며 달래듯 말하고 나서야 하진은 평소처럼 호쾌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지금껏 얻어먹기만 했으니 자신이 밥을 사겠다고 말했을 때는 가차 없이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 웃기지 마. 내가 가오가 있지, 새내기한테 밥 얻어먹을 줄 알고? 너는 몸만 오면 돼.
그녀의 말에 해영이 못 말린다는 듯 비죽 입을 내밀었다.
하진은 같은 동네에서 자라, 해영이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던 이였다. 특히나 고등학생 때 받았던 도움을 헤아리자면 해영은 그녀에게 갚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둬 어딜 가든 사장님 아들 소리를 들어 왔던 해영은 어릴 때부터 구김살 없이 자라 왔다. 환경이 유복하니 굳이 성격이 모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달라진 건 18살이 되었을 때였다. 평소처럼 집에 돌아온 해영이 싸늘한 공기와 온 집 안에 붙은 압류 딱지들을 마주했을 때.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해영은 한참을 서 있던 후에야 자신이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며칠간의 집안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누누이 해외로 사업을 확장할 것이라 말하며 분주하던 것의 연장선이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제껏 영위해 온 삶이 앞으로도 이어지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모르는 척해 온 현실은 아직 고등학생이던 해영에게 지나칠 정도로 냉정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뒤 화목했던 가정은 떨어진 유리그릇처럼 산산조각 났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그 괴리를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유난히 삐걱거리던 부모님은 그 일을 계기로 완전히 갈라섰고, 해영만이 둘 사이에서 붕 뜬 채 남겨졌다.
그때, 어릴 적부터 집안끼리 인연이 있던 하진의 부모님이 해영을 맡아 주었다. 그 시절 하진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주말마다 본가로 돌아와 해영의 공부를 봐주곤 했다.
그녀는 해영에게 지금 당장 답이 없어 보여도, 힘든 상황은 언젠가 지나가리라고 말해 주었다. 인생은 한 번의 악수로 결과가 판가름 나는 게임이 아니라고.
“이럴수록 이 악물고 공부해야 돼. 집안이 망했지, 네가 망했냐? 내년이면 고3이다, 너.”
“알겠어. 근데 누나, 이거 계산 틀린 거 아니야? 그래프가 이렇게 그려져야 되는데.”
“…야, 내가 수능 본 지가 오래돼서 그래.”
하진은 마치 자신의 엄마처럼 굴었다.
집에 올 때마다 자신이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나 확인하고, 이따금 문제집도 사 오고는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로부터 문제집을 여럿 받는다고 말해도, 그건 내신에 더 적합한 내용이라면서 모의고사 대비집을 한 움큼 들고 왔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그런 하진에게 너무 애를 잡지 말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러면서 해영에게는 공부한다고 굶고 다니지 말라며 손에 용돈을 쥐여 주시고, 고생한다며 간식거리를 방에 넣어 주셨다.
하진에게도, 아주머니와 아저씨에게도 해영은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은혜를 졌다.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아 놓고도 해영이 쉼 없이 일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대학 입학 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생활비가 필요해진 탓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받은 것을 갚아 나가고 싶었기 때문에.
해영은 갚아야 할 빚이 많았다. 하진과 그녀의 가족들이 들으면 서운하다며 불같이 화낼 것이 뻔했지만 말이다. 윤해영은 그 착한 사람들 덕분에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노력하다 보면 앞으로는 더 좋아질 것이다. 분명히.
“해영아, 여기.”
그러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던 해영에게 믿음의 보답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하진과의 점심 약속에 나갔다가 차선우를 만난 것이다. 앞으로의 인생에 두 번 다신 없을 사람을.
“얘는 차선우. 너 보고 싶다길래 데려왔어, 괜찮지? 나이는 나랑 동갑이고, 너랑 같은 경영학과니까 필요한 건 얘한테 다 부탁해.”
만나기로 한 장소는 학교 근처의 제법 분위기 있는 양식집이었다.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은 하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해영은 자신이 혹시 식당이 아니라 드라마 세트장에 들어온 것은 아닌지 몇 번이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 해영아.”
휘어지는 눈꼬리를 따라 긴 속눈썹이 영화처럼 움직였다.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오는 입술은 얇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해영은 그걸 잠시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뭐 이렇게 예쁜 사람이 다 있어….’
차선우의 첫인상은 지나치게 인상적이었다. 그런 해영의 반응은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 공간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아닌 척 선우를 보고 있거나, 대놓고 선우를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해영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안녕하세요, 같은 평범한 인사말이 아니었다.
“형… 다들 형만 쳐다보고 있는 거 알아요? 와. 지금 사람들 눈에 전 오징어로 보일 거예요.”
“뭐?”
차선우는 뜻밖의 말을 들었단 듯 제 말에 웃던 낯 그대로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아 미친…. 뭐 저런 표정을 지어도 예뻐?
해영이 감탄하며 작게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하진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해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던 선우는 설핏 웃으며 답했다.
“너도 잘생겼는데. 귀엽게 생겼어.”
평소라면 감사하다며 서글서글하게 눈을 찡긋거릴 윤해영은 그 말을 들으며 왜인지 어이가 없어졌다. 자신은 그저 서로의 얼굴에 금칠이나 해 주자는 의미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순수한 진심이었던 것이다.
“알고 있어요. 저도 아는데, 형이 말하니까 좀 진정성이….”
해영이 말하다 말고 머뭇거리며 말을 흐리자, 낄낄 웃던 하진이 그를 달랬다.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잘생겼어, 해영아.”
“진짜?”
“음….”
금세 감동해 눈을 빛내는 해영에게 하진이 대답을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해영은 꾹 말고 있던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해영은 타인의 외모에 큰 가치를 두거나 관찰하면서 미추를 판단하는 편이 아니었다. 애초에 타인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차선우를 만나기 전까진. 그의 외모는 시큰둥한 해영의 시선을 손쉽게 붙잡았다.
“정말 귀엽네….”
선우가 해영을 보며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흘렸다.
그 간질간질한 목소리에 어쩐지 기분이 미묘해졌다. 해영은 괜스레 목덜미를 만지작거렸고 하진은 그런 차선우를 보며 당장에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차선우가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봤다고 하진이 말해 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하진에게서 그를 소개받은 이후, 해영은 지금껏 마주치지 못했던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주 차선우와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이 많은 경영대 특성상 선우와 빈번하게 마주치는 건 제법 신기한 일이었고, 그만큼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같은 반인 동기들보다 더 자주 만날 정도였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우연히 마주치는 것 외에도 차선우는 해영을 자주 찾아왔다. 어느 정도였냐면, 과방에 있는 해영에게 찾아와 테이크아웃 커피를 건네주는 선우의 모습을 과 사람들이 익숙하게 바라볼 정도였다.
“해영아, 커피.”
“혀엉… 사랑해.”
“나도.”
시험 기간이라고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선우는 곧잘 자신의 커피를 사다 주었다. 해영은 선우에게 받은 커피를 탁자 위에 올려 둔 뒤 양손으로 하트를 그려 보였다.
선우는 그런 해영을 보며 피식피식 입꼬리에 실없는 미소를 걸었다. 그런 헤픈 웃음은 차선우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주는 남다른 분위기를 유화시키고는 했다. 해영이 커피를 조용히 홀짝이며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선우의 얼굴을 구경할 때였다.
“형 저도 커피 사 주세요.”
해영의 옆에 있던 동기 중 하나가 선우를 향해 애교스럽게 말했다.
“카드 줄게….”
돌아온 선우의 대답에 과방에 있던 동기들이 킥킥 웃음을 흘렸다.
선우는 누구에게나 친절했지만, 모두에게 동등한 다정함을 내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 해영을 대할 때는 분명히 다른 점이 존재했는데, 해영의 주변은 그런 그의 사뭇 다른 분위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오직 한 사람을 빼고는 말이다.
“나 선우 오빠가 이러는 거 처음 봐.”
과방에 오랜만에 들렀던 혜인이 얼빠진 얼굴로 해영과 선우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혜인은 경영학과 학생회장이었고, 다음 수업 전까지 잠시라도 자고 싶어 과방에 들른 참이었다. 그녀가 소파에 앉아 해영을 비롯한 후배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와중 과방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사람은 3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이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였다.
혜인은 해영에게 익숙하게 다가와 곁에 서는 선우를 보며 멍한 표정을 했다.
여태 과방 한번을 오질 않던 사람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뭔 상관이냐는 얼굴로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드디어 자려는 건지 몸에 담요까지 야무지게 덮은 후였다. 그대로 눈을 감으려던 혜인이 불현듯 두 눈을 번쩍 뜨며 해영을 향해 물었다.
“둘이 사귀는 건 아니지?”
“언니, 곧 과 CC 생길 거 같아요.”
“아, 안 돼! CC는 안 돼!”
발작처럼 외치는 혜인의 목소리에 과방에 있던 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꽤나 요란한 캠퍼스 커플이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였기 때문이다.
해영도 그들을 따라 웃다가 자신의 옆에 선 선우를 장난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형, 나랑 사귈래? 내가 잘해 줄게….”
“응. 좋아.”
“해영아, 안 돼!”
해영의 물음에 선우의 빠른 화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담요 아래에서 들려온 혜인의 비명에 과방은 다시 한번 웃음으로 가득 찼다.
만나면 만날수록 해영은 그가 좋은 사람인 걸 알 수 있었다. 선우 형은 무척 다정했고, 자신이 실없는 농담을 하거나 장난스럽게 허세를 부려도 대단히 재밌는 것을 본 사람처럼 즐거워했다. 오죽하면 ‘내가 웃긴 사람이었던 걸까, 지금이라도 개그맨으로 진로를 틀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고민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아무튼, 자신과 있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해영으로서도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차선우는 늘 지나치게 다정했고, 그의 일상적인 다정함이 제게 특별하게 다가왔다는 것뿐이었다.
만약 선우가 여자였다면 해영은 그가 자신에게 주는 호의가 호감이라고 믿고 덥석 고백했을 수도 있으리라. 지금도 이렇게 헷갈리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윤해영은 선우의 다정함이 좋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고, 앞으로도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그와 함께하면서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형, 하진 누나도 같이 보자. 누나가 오늘 시간 된다고 했거든.’
그 뒤로 해영은 선우와 만나는 약속에 꼬박꼬박 하진을 부르기 시작했다.
‘영화? 그거 누나도 보고 싶다고 했던 건데, 물어볼까?’
해영이 바란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형의 다정함이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깨달을 시간. 그의 세심한 배려에 익숙해지고 나면 지금의 혼란스러움도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그때의 윤해영은 알지 못했다. 그러한 노력이 오히려 선을 넘어와도 좋다고 허락해 주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던 차선우의 여유를 잃게 만들리라곤.
***
“해영아, 저녁 먹으러 가자.”
“응. 그럼 누나한테도 연락해 볼까? 누나도 강의 끝났을 시간인데.”
“…….”
강의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선우는 자신의 물음에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드는 해영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며칠간 반복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해영의 몸짓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하진에게 연락하기 위해 꼼지락거리는 해영을 내려다보는 선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대로 삐딱한 시선이 말간 해영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 내린다.
“아니, 오늘은 둘이 먹자.”
“어?”
당연히 괜찮다고 말해 줄 줄 알았던 선우가 흘린 말에 해영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선우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접으며 그린 듯한 웃음을 지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웠지만, 해영은 그 완벽한 미소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눈을 깜박이며 머리를 굴리던 그가 이윽고 나지막한 침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약속에 계속해서 하진을 불러내는 것이 그로선 기분 나빴을 수도 있었다.
‘너무 하진 누나만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나? 형이랑 둘만 있으면 기분 이상해서 그런 거였는데….’
답답하긴 했으나, 자신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해영은 제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히 미안한 마음에 선우 형의 셔츠 소매 끝을 붙잡았다. 그것이 미안하단 인사를 대신하는 멋쩍은 사과라는 것을 눈치챈 형의 미소가 짙어졌다.
또 귀엽다니 뭐니 부끄러운 소리를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해영은 선우가 쓸데없이 예쁜 얼굴로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전에, 그를 잡아끌었다.
뭘 먹고 싶냐는 물음에 해영은 단박에 고기를 외쳤다. 그냥 그 순간에 고기가 먹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선우 형이 데려온 곳은 또 쓸데없이 분위기 있었다.
테이블들이 놓인 쪽의 벽면이 전부 유리창이어서인지 창밖으로 노을 지는 풍경이 쏟아져 들어왔다. 테이블 간의 간격이 넓은 데다 머리 위에서 잔잔하게 들려오는 뉴에이지 피아노곡의 선율이 더해져 다른 테이블의 대화는 잘 들리지 않았다.
‘연인이랑 데이트할 때나 올 분위기인데….’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어 맞은편에 앉은 선우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어쩔 수 없이 해영은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선우의 시선을 은근히 피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뚝딱거리던 해영이 평소와 같아진 것은 음식이 나온 후였다. 앞에 놓인 스테이크에 정신이 팔려 열심히 나이프를 움직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형! 이거 봐. 완전 일정하게 잘랐지. 셰프님도 이거 보시면 반할 듯.”
해영이 반듯한 네모 모양으로 잘린 스테이크를 뿌듯해하며 자랑했다. 그런 해영을 보며 선우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게, 잘 잘랐다.”
느릿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또였다. 사람 마음을 괜히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간질간질한 음성. 해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유쾌한 웃음이 다시 어색해졌다.
해영도 평소에 곧잘 다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고, 짓궂은 장난들을 남발하며 다니기도 했다. 그것이 장난인 걸 알고 있으므로 모두가 유쾌하게 받아 주었다.
아마 선우 또한 그러한 장난의 연장선에서 이런 괜히 쓸데없이 사람 설레게 하는 말들을 내뱉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윤해영은 그의 호의를 멋대로 오해하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이런 장난을 치는 사람이 차선우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이렇게까지 곤란하지도 않았을 테다.
‘그래도 이거 받는 사람이 여자였으면 백 퍼 오해했다.’
해영이 심란한 속을 달래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접시를 들고 몸을 일으켜 반도 잘리지 않은 선우의 접시와 바꾸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나이프를 쥐고 선우의 스테이크였던 것을 자르기 시작하며 구시렁거렸다.
“형. 자꾸 이러면 나 오해할지도 몰라.”
“…오해해 주면 좋겠는데.”
차선우는 해영이 자신의 앞에 놓아 준 접시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손대기 어려운 예술품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 접시 위에 머물렀다. 얼마간 잘린 고기를 눈에 담던 그는 조용한 맞은편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선우는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해영을 발견했다.
“와, 큰일 낼 사람이네, 진짜.”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벙긋거리던 해영이 뒤늦게 말을 뱉어 냈다. 기가 찬다는 심정이 얼굴에 곧이곧대로 드러났다.
그런 해영을 보는 차선우의 입에선 또다시 실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형한테 반하면 어떡하려고 이래? 이래 놓고 책임 안 지면 집에 고소장 날아가.”
형 집 어디야. 위협하듯 미간을 모으는 해영을 보며 선우가 못 참겠다는 듯 결국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가 뭔 말만 하면 웃는 그를 해영은 멀뚱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웃던 선우가 웃음기가 남은 얼굴을 들었다.
“책임질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지나치게 달았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해영이 단박에 움찔해 반사적으로 주먹을 쥘 정도로.
“그러니까 나한테 반해 줘, 해영아.”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분명 부드러웠음에도, 해영의 귓가에 거칠게 박혀 들었다. 해영은 순간적으로 받아칠 말을 까먹고 눈동자를 굴렸다.
형이 이런 목소리로 뱉는 말들은 괜스레 사람 기분을 미묘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는 어느 정도 자신이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으나, 해영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 그렇게 말하면 아무도 장난이라고 생각 안 한다니까.”
곧바로 들려온 대답은 끝내 해영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장난 아닌데….”
“아, 좀…!”
한 소리 해야겠다 싶어 고개를 든 해영은 마주친 선우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선우의 얼굴이 저보다 더 처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래로 고개를 기울인 탓에 길게 늘어진 속눈썹. 그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금세 물기를 머금고 해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왜 안 믿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새어 나왔다. 자신이 믿지 않는 게 영 서운하다는 듯, 한껏 속상한 얼굴을 한 선우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내가 남자라서 그래? 아니면 연상은 싫어? 어떻게 해야 날 좋아해 줄 거야?”
“어?”
“나한테 예쁘다고 했잖아. 그런데 취향은 아니야?”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해영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쓰던 해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취향이 아니냐니. 예쁘다고 못해도 백 번은 말했을 텐데 취향이 아닐 리가 없다. 윤해영은 조금 황당해졌다. 선우 형 예쁜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저런 질문은 치사했다.
“형, 잠시만, 그게…. 아 씨. 형 나 좋아해?”
잔뜩 당황한 탓에 어버버거리던 해영이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물은 질문이 무색해질 정도로 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좋아해.”
대답은 짧았고, 감정은 명확했다.
아주 조금의 불확실성도 없이.
“좋아해, 해영아.”
각인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꾹 억누른 목소리가 해영에게 닿았다. 늑골 안쪽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뚝 떨어지는 감각이 섬뜩할 정도로 선명했다.
해영은 발밑으로 떨어진 게 제 심장인지 선우가 건네는 무거운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고스란히 스스로를 내어 줄 뿐이었다.
“정말 좋아해. 처음부터 그랬어. 널 처음 봤을 때부터.”
“…….”
“미안해.”
뭐가? 해영은 고백 뒤에 이어지는 뜬금없는 사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백한 것이 미안하다는 걸까? 아니면 좋아하는 게?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전자든 후자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해영은 며칠 내내 앓고 있던 이가 빠진 것처럼 알 수 없는 명쾌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길어지는 침묵 탓에 점점 더 굳어지는 선우의 표정을 본 해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뭐가 미안해? 나는 내가 혼자 김칫국 들이켜고 있는 건가 했잖아. 아, 괜히 고민했네!”
들려온 목소리에 차선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얼굴로 해영을 바라보았다.
“뭔가 그럴 거 같았거든? 맨날 밥 사 주고, 커피 사다 주고, 영화 보여 주고, 집에 데려다주고. 시도 때도 없이 귀… 엽다고 그러고.”
윤해영은 멋쩍어서인지 괜스레 투덜거리듯 말했다.
“솔직히 내가 애도 아니고 이따만 한 남자 새낀데 자꾸 귀엽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잖아. 왜 이렇게 날 좋아하지 싶고. 근데 그냥, 그냥 좋아하는 거였어.”
그는 말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해 나갔다. 말하다 보니 자기애가 조금 과한가 싶어 비죽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바라본 선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형 나 진짜 좋아하는구나.”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그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상대가 전하는 확신은 자신의 마음을 직면하게끔 만든다. 모르는 척하고 싶어서 애써 덮어 두었던 마음을.
왜인지 얼굴에 훅 열이 쏠렸다. 보지 않아도 얼굴부터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젠장.
해영은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버벅거리더니 접시에 코를 박을 듯 고개를 숙였다. 접시 위에는 자르다 만 고기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일단 밥부터 먹고 다시 얘기하자….”
해영이 끙끙거리며 속삭였고,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침묵 속에서의 식사를 빠르게 끝마쳤다.
당연한 얘기지만, 윤해영에게는 차선우를 거절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한 연애가 5년이나 가리라고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선우와 하는 연애는 어렴풋이 떠올리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질리기는커녕 그가 점점 더 좋아져서 곤란할 만큼.
아, 사귀게 되고 나서 그가 말해 준 것이 있었는데, 아마 자신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그는 개강 날에 자신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선우의 말마따나 첫날부터 늦을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윤해영은 그가 말하는 상황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캠퍼스를 헤매다 아무나 붙잡고 경영대 건물이 어디냐고 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도 같았다.
형은 대뜸 자신을 붙잡는 손에 놀랐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길을 묻길래 반사적으로 대답해 줬다나. 그랬더니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바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름을 물어볼 걸 후회했다고 했다.
다시 자신을 만나게 됐을 때 정말 기뻤다고. 다른 사람을 보며 반가움을 느꼈던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했다.
‘해영아. 윤해영.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모를 거야.’
학교로 걸음을 옮기던 해영의 귓가에 선우가 집을 나서기 전 건넨 음성이 되살아났다. 그의 말에 코웃음을 친 윤해영은 형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잖아, 하고 받아쳤고, 차선우는 못 살겠다는 얼굴로 웃으며 잔뜩 입을 맞췄다.
그러다 하마터면 오전 수업에 늦을 뻔해 겨우 그를 밀어 내고 나온 참이었다. 바쁘게 학교로 향하는 도중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선우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한 해영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전화를 하는 건지. 웃는 얼굴로 괜히 고개를 저은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빠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차선우가 아니었다. 예고도 없이 걸려 온 전화에 윤해영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사업이 망하고 가족들이 흩어진 이후, 아버지에게서는 아주 오랜만에 오는 연락이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건 아마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이었을 것이다. 학교 앞으로 찾아온 아버지는 고깃집에 데려가 고기를 구워 전부 자신의 앞에만 놓아 주셨다.
자신은 많이 먹었으니 아빠야말로 좀 드시라고 해도, 자기 걱정은 말고 먹기나 하라는 말에 입 안에 꾸역꾸역 고기를 욱여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보던 아버지가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해 올 때도, 해영은 아무 말 없이 입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삼켜 냈다.
헤어지기 전 아파트 단지 입구의 가로등 아래 선 아버지는 해영의 손에 지폐 두어 장을 쥐여 주었다. 자신은 괜찮으니 날 추워지는데 아버지나 새 옷 사 입으시라며 극구 밀어 내고 하진의 집에 돌아왔을 때.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던 해영은 기어코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 뭉치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걸 본 순간 배 안이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해졌다. 속에서부터 치솟는 열기는 당장 토해 내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으나, 해영은 울지 않았다. 다만 이불 속에 파고 들어가 눈을 감고 아주 얕은 숨을 내쉴 뿐이었다.
집이 한순간에 망했을 때도, 부모님 중 그 누구도 해영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을 때도, 수시 원서를 접수하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어 한참을 망설이다 연락한 하진에게서 아무 말 없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을 때도.
윤해영은 울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건 상황일 뿐이었고 하진이 말했듯 그 상황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들에 서러워지곤 했지만, 해영은 순간순간마다 좌절하기보다 앞으로를 생각하고자 했다.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상황은 나아질 것이고, 감사한 것들도 차차 갚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해영은 오랜만에 온 아버지의 연락 앞에서 반가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복잡한 기분에 잠시 굳어 있던 그가 연결이 끊어지기 직전 뒤늦게 전화를 받았다.
- 해영아….
“아빠?”
불안한 마음을 꾹 누른 채 해영이 밝은 목소리로 상대를 불렀다.
잘 지내고 계세요? 지금 어디 계세요? 몸은 안 좋은 곳 없어요? 해영이 쌓아 왔던 걱정들을 쉴 새 없이 꺼내는 동안 수화기 너머는 잠잠했다. 상대가 너무 조용한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해영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아버지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물어 왔다.
- 그, 넌 잘 지내고 있는 거냐?
윤해영은 푸석한 목소리가 건넨 물음에 꾹 주먹을 그러쥐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자꾸만 잠기는 목소리를 애써 끌어 올린 해영이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렸다.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묻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어쩐지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윤해영은 합격 소식을 보자마자 친구들과 하진 누나, 그리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제 일처럼 기뻐해 주는 이들을 보며 고맙고 감사했다. 하지만 내심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밤새 건 전화에 그 누구도 받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네 엄마가 그러던데, 수석으로 대학에 입학해서 장학금도 받았다고.
해영은 그 말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께 말씀드렸던 게 어머니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러면 전화라도, 아니, 문자라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슬그머니 드는 마음을 다시 묻어 둔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은 공부하면서….”
이전보다 한결 밝아진 어투로 꺼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잘렸다.
- 그러면… 그 학자금 대출이라는 거, 못 받는 거냐?
“…대출이요?”
대출.
하려던 말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낯선 단어가 해영의 머릿속에 굴러 들어왔다.
- 빚에 발목이 잡혀서… 해영아, 아빠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조금만 해결이 되면 뭔갈 해 보겠는데, 이게….
이어지는 말에 해영은 왜인지 점점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가 하는 말이 곧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 학자금 대출 같은 건 쉽다던데…. 너한테 부담 주려는 말은 아니고, 아빠가….
“…….”
- 지금 급해서 정신이 잠깐 나갔나 보다. 해영아, 끊자.
그 말에 얼어붙은 듯 서 있던 해영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아빠!”
다급하게 입을 연 해영은 정작 그를 붙잡아 놓고선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해영은 왜 아버지의 말이 이렇게까지 충격적으로 다가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주머니에 있는 지폐를 전부 꺼내 제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던 아버지처럼,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얕은 숨을 내쉬듯 말했다.
“모아 둔 돈이 있어요. 많이는 아니고, 몇백 정도인데….”
수능이 끝나자마자 과외를 비롯해 이런저런 알바를 하면서 모아 놨던 돈을 생각하며 해영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하진에게 빌렸던 돈을 갚고 싶었고, 돈으로 드리면 마다하실 게 분명하니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선물을 사 드리고자 했던 돈. 대학생답게 여기저기 놀러도 다니고 학교 다니면서 여기저기 나갈 것을 생각해 모아 두었던 돈.
없으면 불안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없으면 죽을 만큼 간절한 돈은 아니었다. 해영은 그것으로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가끔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오는 것 외에 해영의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시험 기간에 동기들과 열람실에 처박혀 밤새 공부하는 것조차 재밌었고, 고등학생 때보다 더 자유롭게 놀러 다닐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원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해영은 선우와 함께 동아리에 들기도 했다. 바쁘지도 않은지 선우는 자신이 회식이나 활동을 하러 갈 때마다 매번 함께하곤 했다.
차선우는 해영과 웬만하면 떨어져 있는 일이 적었지만, 그가 따라올 수 없는 곳도 분명히 존재했다. 해영이 2학년을 막 마친 후였다.
“진짜 머리 깨질 거 같아.”
“그러니까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해영아.”
“마지막이라고 내 입에 들이붓는데 어떡해.”
정해진 입대 날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차선우는 친한 동기들과 술을 잔뜩 먹고 취한 해영을 데리러 왔다. 그는 익숙하게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안아 든 채 씻기고 옷까지 갈아입히곤 침대 위에 눕혔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채 누운 해영은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갈빛 조명에 드러난 시선이 자신을 삼킬 듯이 담고 있었고, 그 집요한 눈빛에 술기운은 빠르게 가셨다.
“500cc 잔 알지, 형. 정민재가 그거에 술을 가득 채우더니 나보고 먹으라는 거야.”
“정민재….”
“진짜 미친놈이라니까. 그거 다 마시고 난 뒤에 완전 정신 잃었어. 나 노래도 부른 거 같은데… 아이 씨, 애들이 그거 찍은 거 같아.”
핸드폰 꺼 놓을 거라며 해영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러다 말고 슬쩍 눈을 내밀어 선우를 바라보았다.
“혀엉… 형이 나 대신 한 번 더 다녀오면 안 돼?”
“그럴까.”
해영은 지금껏 백 번 정도 했던 물음을 또 뱉었고, 선우는 매번 그랬듯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녀왔다고 말 존나 쉽게 하네?”
“아하하하.”
해영이 주먹으로 선우의 팔을 가볍게 때리자, 선우의 입에서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우가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해영의 뺨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 간질거리는 느낌에 기분 좋게 기대는 해영을 보며 선우도 지금껏 백 번 정도 했던 말을 또다시 내뱉었다.
“기다렸다가 같이 갈걸.”
“그니까 왜 그렇게 빨리 갔다 왔어. 형 눈치 없어?”
“그니까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났어, 윤해영. 아쉬워 죽겠네….”
그렇게 말하는 차선우의 목소리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슬그머니 가시고 물들기 시작하는 서러움에 해영이 다급하게 양팔을 벌렸다.
조용히 하고 안기라는 몸짓에 선우는 그대로 울 것처럼 웃으며 몸을 숙였다. 해영의 품 안으로 파고든 그가 맞닿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오지 않았으면 했던 날은 그들의 바람을 비웃듯 빠르게 찾아왔다. 칼바람이 뺨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다.
“아, 진짜. 이렇게 예쁜 차선우를 두고 어떻게 가지?”
해영이 양손을 들어 선우의 뺨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선우가 없었다면 제법 쿨하게 군대를 다녀왔을 거라고 해영은 생각했다. 자신만 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다 가는 건데 굳이 호들갑 떨 필요가 없지 않나.
군대에 있는 동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도, 제 미래나 돈에 대한 걱정도 한편에 치워 둘 수 있으리라. 해영은 오히려 사회로부터 합법적으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마음 가볍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애인이 차선우라는 것뿐이었다. 길을 걸어가면 사람들이 돌아보고, 틈만 나면 다른 사람들이 접근해 올 정도로 예뻐 죽겠는…. 잔뜩 심란한 해영을 붙잡고 선우가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는 자신을 곧잘 놀리더니, 차선우는 정작 당일이 되자 장난은커녕 웃지도 않았다. 해영이 오히려 선우를 달래야 할 정도였다.
“해영아, 떨어져 있어도 나만 생각해야 해….”
“지금 누가 할 소리를, 잠시만, 형 울어? 왜 울어.”
돌겠네. 해영이 당황한 낯으로 그의 뺨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손에는 부정할 수 없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군대 기다려 준 애인 차면 쓰레기래, 해영아. 그러니까… 전역하면 나랑 결혼해 줘야 해. 지금 약속해….”
“울지 좀 말고 얘기해.”
누가 보면 자신이 여기서 차선우를 찬 줄 알 것이다. 발개진 눈가에서 소리 없이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는 그의 모습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도 멈춘 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 씨. 그 시선에 해영이 얼른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선우의 얼굴을 덮었다. 차선우가 이렇게 예쁜 얼굴로 울고 있는 걸 다른 사람들에겐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울보 차선우.”
그가 다시 양손을 뻗어 선우의 뺨을 감쌌다. 엄지로 눈에 고인 물기를 문지르듯 닦아 낸 해영이 찡그리듯 웃었다.
선우가 그런 해영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나랑 결혼할 거지?”
앵무새도 아니고 또 익숙한 물음을 던져 오는 그를 향해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건이 되면….”
“전역하고 복학해서 어리고 예쁜 후배 만났다고 나 버리면 안 돼. …상상했더니 죽고 싶어졌어, 해영아.”
“굳이 그런 상상을 하는 이유가 뭔데. 대체 어디서 뭘 본 거야?”
해영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 역지사지가 안 되는 인간이다. 갓 입학한 자신을 열심히 꼬시던 과거는 전부 잊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삐죽 입을 내민 해영이 선우를 숨기고자 머리 위로 덮어 두었던 겉옷 속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선우는 어둠 속에서도 축축한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긴 속눈썹 끝에 눈물이 맺힌 눈물이 금방에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런 애인을 보며 속상함을 꾹꾹 억누른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쪽, 선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옷에서 빠져나온 그가 햇살 아래서 밝게 웃었다.
아쉬운 건 선우뿐만이 아니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여기서 둘 다 울었다간 사람들의 시선을 두 배로 끌게 될 터였다. 윤해영은 손등을 들어 제 눈가를 대충 문질러 닦았다.
“형, 진짜 진짜 사랑해. 편지도 쓰고 폰 받으면 바로 전화할게. 요즘 군대 그냥 캠프래. 걱정하지 마.”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씩씩했다. 해영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숨긴 채 선우를 감싸 안았다.
지금의 헤어짐은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해영은 참을 수 있었다. 다시 만나기까지의 기다림을 견디는 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될지라도.
해영이 다시 사회로 나왔을 때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군대 가기 전 온 연락에서 아버지는, 요즘은 생활비 대출이라는 것도 있지 않으냐며 물어 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동안 받은 연락은 단 한 번뿐이었다.
아빠
그간 미안했다. 우리아들..
빌렸던 돈은.네 통장으로 넣었다.
항상 사랑한다,
몸 건강해라..
돈이 있을 리가 없는데 대출 상환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 문자를 보고 해영은 오랜만에 참아 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올 때마다 초조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저도 당장 돈이 없다고 에둘러 거절하는 상상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죄책감과 자괴감, 알 수 없는 애정이 뒤섞여 속에서 들끓었다.
그건 해영의 고민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이따금 발끝에 걸려 그를 넘어지게끔 하는 돌부리처럼. 문자를 보고 나서도 앓던 이가 뽑힌 것 같은 기분은커녕 도리어 죄송해졌던 건 그래서였다.
전역 후에는 아버지에게서 일절 연락이 오지 않았다. 가끔 어머니에게서는 안부를 묻는 연락이 왔지만, 아버지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자연스레 걱정이 먼저 앞서긴 했으나, 해영은 애써 불안한 생각들을 덮어두었다. 복학하고서 1년은 빠르게 지나갔다. 자신은 이제 4학년을 앞두고 있었고,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듯이 진로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면서, 해영의 목표는 빨리 돈을 버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어떻게든 전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므로.
취업을 우선해 경영학과에 입학하긴 했지만, 해영은 사실 법을 공부하고 싶었다. 더 공부하겠다는 욕심이 사치라는 걸 알면서도 해영은 막상 고민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저울은 쉽게 기울지 않았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준비해야 할 것들은 갈수록 많아졌다. 알바를 조금 줄이는 대신 해영은 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예 아침 일찍 나와 밖에서 할 일을 다 끝내고 귀가하는 것이 그나마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해영의 지정석은 카페 유리창에 붙은 바 테이블이었다. 책에 고개를 파묻고 공부하고 있으면 해가 지는 것도 쉬이 알아차리지 못하곤 했다.
그러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곧장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 앞에는 해영이 기다리던 선우가 서 있었다.
근사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선우를 보며 해영도 씩 입꼬리를 올렸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제 옆자리를 고갯짓하자 선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해영아, 많이 기다렸어?”
옆으로 다가온 선우가 자신을 부르며 손가락으로 볼을 쿡 찔렀다.
그 장난스러운 손길에 해영도 장난스럽게 그를 째려보았다. 그러곤 손을 들어 제 뺨을 찌르고 있는 선우의 손을 감싸 쥐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그의 손은 꽤 차가웠다.
“형 걸어왔어? 강 비서님은?”
“강 비서님은 오늘 할 일이 있어서. 괜찮아, 바로 앞이잖아.”
“그래도 추웠겠다….”
차선우는 졸업 후 바로 그의 아버지 회사로 들어갔다. 이전에도 선우가 제법 잘산다는 건 알았지만, 해영은 그제야 비로소 그가 생각보다도 더 잘산다는 걸 알게 됐다. 아니, 고작 잘사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제 그룹은 여타 재벌들이 그렇듯 가족 경영으로 그 세를 이어 오고 있었는데, 차선우는 한제 그룹 계열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차기현 회장의 아들이었다. 해영은 그 사실을 알았던 날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어쩐지 혼자 사는 집이 너무 좋더라니….
“공부하고 있었어?”
“응. 10분만 있다가 밥 먹으러 가자. 이거 조금만 더 하면 돼.”
해영이 대충 주변을 정리하며 옆자리를 내주었다. 선우가 자리에 앉는 것까지 본 해영은 그를 향해 씩 웃어 준 후 다시 책과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노트에는 오늘 내내 했던 고민들이 낙서처럼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 위로 잠시 눈길을 주던 해영이 한숨처럼 투덜거렸다.
“하늘에서 돈이나 떨어졌으면 좋겠다….”
“준비할까?”
뭘 준비해. 황당한 대답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선우와 눈이 마주친 해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또 뭐 저렇게 진지한 얼굴이야? 아무리 봐도 장난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실수로 고개라도 끄덕이면 바로 머리 위로 수두룩한 돈다발을 떨어트려 줄 것 같은 분위기였던 것이다.
“형은 진짜 나랑 만나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벌써 전 재산 털렸어.”
“털어 가도 괜찮은데.”
“아, 진짜 무슨 소리야.”
자신이 그의 재력을 걱정하는 게 웃기긴 했지만, 아무튼 해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차선우는 상대에게 지나치게 퍼 주는 경향이 있어서 잘못하다간 집안 기둥까지도 뽑아 먹을 것이 분명하다고.
그런 자신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선우는 제 말에 조그맣게 키득거릴 뿐이었다. 그러게, 하고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는 하고 싶은 거 해. 형이 내조할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해영에게 닿았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말하지 않고 매번 혼자 끙끙거리는 게 답답할 만도 하건만, 그는 늘 묻지 않고 이렇게 다정한 격려만을 건넸다. 그의 따뜻함은 해영의 마음을 말랑해지게 만들었다.
차선우는 뭐가 고민인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문제를 알아채는 세심한 능력이 있었다. 그와 있는 순간들이 전부 꿈만 같았다. 너무 달아서, 해영은 자신이 꾸고 있는 꿈에서 언젠가는 깨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언제부터였는진 모르겠지만, 가끔 그가 제게 과분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좋아져서 이따금 제 감정의 크기를 직면하기 벅찰 정도였다.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했으면 좋겠어. 그래도 돼, 해영아. 내가 그렇게 하게 도와줄게.”
“…….”
어떡하지. 나 네가 좋아서 죽겠어.
밖이라서 꺼내지 못한 말 대신 해영은 선우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꾹 문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해영의 얼굴을 보며 선우는 피식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말로 하지 않아도 둘은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해? 응?”
“됐어. 고마운데 이 정도는 나도 해결할 수 있어.”
“해영이는 왜 내가 도와주고 싶다고 해도 싫어하지…. 어차피 우리 결혼할 거잖아.”
“또 왜 얘기가 그렇게 돼? 그리고 싫어하는 게 아니라.”
해영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는 선우와 자신의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깨닫고야 만다.
설명하면 이해 못 해 줄 선우가 아니었지만, 굳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다. 조금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털어 낸 해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몸을 돌려 선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형 어디 가서 보증 서 주지 마. 알았지. 그리고 누가 돈 빌려 달라고 하면 일단 나한테 물어봐.”
“뭐?”
“형이 부자인 건 알겠는데, 형은 좀 돈을 너무 쉽게 쓰는 경향이 있어. 돈은 쓰면 없어진다고.”
“안 없어지던데….”
“와, 방금 발언 좀 재수 없다…. 꼭 형이랑 결혼해야지.”
해영의 감탄에 선우가 정말? 하고 답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러다가 강 비서님에게 전화를 걸더니 이민을 위한 서류들을 준비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해영이 기겁하며 그런 선우의 전화를 빼앗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은 생각보다 쉽게 일단락됐다. 지원한 대학원의 합격 통보를 받으면서, 그전까지 팽팽하던 저울이 금세 한쪽으로 기운 것이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게 되어 첫 학기 등록금에 대한 부담은 덜었다. 여유가 생기자마자 해영이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내일은 선우를 만나기로 했었으므로 해영은 제법 들뜬 상태였다.
전화를 걸면서도 아버지가 받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걸 알리고 싶어 전화를 했을 때도 받지 않았었으니까. 받아 주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선우가 제 일처럼 기뻐해 주는 것을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해영은 충분할 것 같았다.
연락이 될 거라는 기대를 내려놓고 있던 그는 뜻밖에 이어지던 전화 연결음이 끊기자 놀라서 허리를 바로 세웠다.
“아빠!”
해영이 반가운 목소리로 상대를 불렀다. 아버지의 음성이 언뜻 들려왔으나, 수화기 너머 잡다한 소음들이 섞여 들어와 쉬이 알아듣기 힘들었다.
- 해영이냐? 웬일로 네가 전화를 했어?
윤 사장, 한잔 받아야지! 어어, 어디 가? 잠시만요 아들한테 전화가, 하하하.
소란한 주변이 스피커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해영은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얼큰한 취기를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해영의 발치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모든 일이 잘 풀려 가고 있었다. 적어도 해영은 그렇다고 믿었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하던 일상에 위화감이 순식간에 찾아들기 전까지는.
“술… 드셨어요?”
- 조금. 조금 마셨어. 네 덕분에 사업 자금도 넉넉해져서 숨통이 트이지 뭐냐, 우리 아들이 아주 효자야, 효자.
“네?”
쉬이 이해하지 못할 말들이 이어졌다. 멍하니 있는 사이에 해영의 귓가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박혀 들었다. 많이 취했는지 발음이 새는 와중에도 그 이름만큼은 분명했다.
- 한제 물산 후계자랑 아는 사이일 줄이야. 아, 진짜로 한제라니까요, 장 대표님. 차기현 회장 아들이 우리 아들이랑 친하다고 하더라구요.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모양인지, 낯선 목소리들이 쉼 없이 섞여 들었다. 윤 사장 돈줄이 어딘가 했더니. 거물을 잡았잖아? 에이, 허풍이겠지, 한제가 동네 마트도 아니고. 산발적으로 튀어 오르는 말들 중 귀에 익은 단어들이 해영의 머릿속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제 물산, 후계자, 차기현 회장 아들. 그러한 수식어가 가리킬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차선우.
“…선우 형이요? 아빠가 선우 형을 어떻게 알아요?”
발치를 맴돌던 불안한 기운은 점점 해영의 몸을 타고 기어올라 왔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데.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으나 해영은 알아야 했고, 알고 싶지 않았으나 입은 마음대로 움직여 대답을 재촉했다.
“선우 형이 돈을 줬어요? 왜요? 형이 왜….”
- 해영아! 잠깐, 그게 아니라….
“아빠 선우 형한테… 돈, 받았어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는 잠시 요란한 소리가 이어지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떠들썩한 자리에서 벗어난 것인지 쥐 죽은 듯 조용한 핸드폰을 붙잡고 해영이 입술을 짓씹었다.
침묵은 잠시뿐이었다. 아버지는 선우에게 말하지 말라며 사정했다. 절박한 목소리에 방금까지의 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말하지 않기로 했다며, 자신이 말한 걸 알면 다시 돈을 뱉어 내라 할지도 모른다며 살려 달라고 빌었다.
살려 달라고.
그 말을 들으며 왜인지 해영은 도리어 목이 졸리는 기분을 느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호흡을 멈추고 있던 해영이 쉬어지지 않는 숨을 가까스로 몰아 내쉬었다.
- 너도 돈 다 갚아서 좋지 않았냐, 굳이 말해서 좋은 게 뭐냐. 응? 해영아.
쿵. 딛고 선 발아래가 무너지는 아득한 감각에 해영이 질끈 눈을 감았다.
더는 무너질 것이 없는 것 같은 순간에도 바닥은 존재한다는 걸 말해 주려는 건지, 비극적인 순간은 늘 마음을 놓을 때쯤 찾아온다. 모든 게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제 착각일 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돈도, 그것도… 형이 준 거였어요?”
더듬더듬 흘러나온 목소리는 간절히 부정을 바라고 있었으나, 해영은 듣지 않고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기라도 한 듯이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자신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왜인지는 알 것 같았으나 그 배려에 오히려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배신감을 느껴도 되나? 해영은 자신이 선우에게 배신감을 느낄 자격이 있는 건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누굴 탓해야 하지? 누구를…….
“어떻게 그래요? 어떻게.”
그가 몰아붙이듯 말하다 말고 입술을 씹었다. 속이 울렁거려서 똑바로 말할 수가 없었다.
해영은 처음으로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졌다. 선우도 원망스러웠다. 그런 가운데 가장 싫은 건 자신이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면을 내보이게 된 스스로가 싫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또다시 비참해졌다.
- 해영아, 아빠 말 좀….
“어떻게… 형한테 돈을 받, 아요, 윽, 나는, 내가 이렇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해영은 허겁지겁 전화를 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헉. 아무리 깊게 숨을 몰아쉬어도 숨이 막혀 왔다.
윤해영은 빚지는 것을 싫어했다. 천 원을 빌리면 다음 날 2천 원으로 갚고, 선배가 밥을 사 주겠다고 하면 잔뜩 신이 나 얻어먹어 놓고는 다음 날 케이크와 커피를 사 들고 찾아갔다. 남에게 준 만큼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받은 것보단 더 돌려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차선우는 그런 해영의 위로 알지 못하는 새에 부채를 끊임없이 쌓아 올렸다. 물론 그게 온전히 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제 잘못이었다. 수많은 것을 받고도 돌려줄 것이 없는 자신의 잘못.
내가 형한테 뭘 줄 수 있지? 나는 가진 게 없는데.
해영은 늘 그랬듯이 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으나, 아무리 고민해도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신의 마음조차 그의 것보다 초라했으므로.
집이 망하고 하진의 집에 얹혀산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도 해영은 부끄럽지 않았다. 해영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곁에 있는 이들이지 타인의 시선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심히 살다 보면 주변에 받았던 것들을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해영이 믿는 것은 그것이었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 그 희망을 기반으로 기죽지 않고 자라났던 자존감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소리가 고막을 가득 메우는 것만 같아서 해영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한참을 도망쳐야만 했다.
도망칠 곳이 없는 세계에서.
선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며 해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 순간에서조차 그가 너무 좋아서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그가 보고 싶어서 스스로가 더 끔찍해졌다.
형을 보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해영은 처음으로 선우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
나갈 준비를 마치고 현관 앞에 선 해영이 손을 들어 부스스한 머리를 꾹 눌렀다. 거울 속의 자신은 머리칼만큼이나 부스스한 꼴을 하고 있었다. 눈가가 발갛게 부어 짓무른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집 밖으로 나서지 않은 지 얼마나 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선우와 마지막으로 만난 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세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누가 봐도 멀쩡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꼴에 조금은 우스워졌고 조금은 짜증이 났다.
너무도 초라해서. 그 초라함이 선우에게서 도망치는 게 옳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거울을 보며 입술을 짓씹은 해영은 들고 있던 검은 캡 모자를 푹 눌러쓰며 집을 나섰다.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가야 했다. 오늘도 살아 나가야 했으니까.
막 대학원에 입학해 적응하기 바빴던 봄날이었다. 겨우내 봄이 오면 여기저기 가자며 했던 약속들이 잔뜩 쌓여 있던 계절, 윤해영은 차선우와 5년의 연애를 끝냈다.
***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아래서 해영은 쉬이 꺼낼 말을 고를 수 없었다. 평소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였으나 그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은 말에 담긴 까칠한 단어들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시선은 꽤 오래 맞부딪쳤다. 마주한 선우의 검은 눈동자가 어둑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이채 어린 눈에 담긴 선명한 감정은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다.
익숙해서 괴로웠다. 그러면 안 되는데도 아직 당연하게만 느껴져서. 해영이 잘근거리던 입술을 떼었다.
“…형, 손.”
그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해영은 동시에 팔을 들어 올려 제게 닿았던 선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 냈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손길에 해영의 목으로 파고들던 손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선우의 입가에 걸려 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해영은 그 작은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선우를 곧게 올려다보던 시선이 빠르게 아래로 떨어졌다. 어쩐지 지금 그가 서러운 얼굴을 한다면, 쉬이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에.
“하진 누나한테는 조심하겠다고 말했어. 형도 내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하겠지만, 서로 조심하면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을 거야.”
“해영아.”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하는 해영을 선우가 붙잡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 불편해해야 하는 사이였어?”
느릿하게 흘러나온 음성은 건조한 동시에 지독한 습기에라도 닿은 듯 눅진했다. 그 무게감이 왜인지 해영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물론, 선우의 되물음에 반박할 말은 당연히 존재했다. 우리가 불편한 사이지 그럼 뭐냐고. 5년을 만나다 헤어졌는데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인가? 계속 만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헤어진 사이에 전처럼 친근한 것도 웃기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곱게 헤어진 거면 모를까, 해영은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한 날 이후로 그의 연락을 전부 피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피하고 밀어 냈던 사람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시 마주하는 것은 당연히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구질구질하게 그런 마음을 꺼내 놓고 싶진 않았던 해영이 얕은 숨을 내쉬듯 답했다.
“서로 조심해야 하는 사이지.”
“…조심.”
그의 말을 곱씹듯 선우가 따라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은 작은 목소리에 멈칫한 해영이 괜스레 신경을 돌리려 어깨 위에 둘린 겉옷을 만지작거렸다.
애써 신경을 돌려 보려고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옷의 주인도, 그 옷을 직접 제게 둘러 준 사람도 차선우라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해영이 자꾸만 내려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형이랑 이런 거로 논쟁하기 싫어. 그리고 형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해영의 말에 선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랬어?”
“그랬어. 원래는 더 다정하고….”
해영은 차마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켜 냈다. 당황한 마음에 횡설수설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릴 내뱉을 뻔했다.
시선을 내리고 있는 탓에 보이는 건 곧게 뻗은 콧대와 꾹 다물린 입매뿐이었으나, 차선우는 그것만으로도 해영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슬쩍 짓궂은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쩌면 자신을 도통 봐 주지 않는 윤해영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조금쯤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못되게 굴어서라도 자신을 바라보게끔 하고 싶단 욕심은 해영에게 한 치의 상처도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번번이 패배했다. 패배의 순간마다 차선우는 종종 울고 싶었다. 자신에게 시선 한 점 주지 않는 윤해영은 알 수 없겠지만.
“해영아, 헤어지자고 해 놓고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 하는 거야?”
냉정한 물음과는 달리 다정한 목소리에 해영은 다물고 있던 입술에 꽉 힘을 주었다.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윤해영은 아주 조금 속상해졌다. 아니, 제법 많이.
그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줘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건 누구보다도 해영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아는데도 선우의 얼굴을 보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게 되는 것만이 문제였다.
해영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에 도리어 멈칫한 것은 선우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던 그는 자신을 밀어 내던 손길을 기억하곤 한숨과 함께 거둬들였다.
“전처럼 굴지 않아서 속상했어?”
그의 낮은 목소리가 해영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해영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미안해.”
속삭임 같은 사과에 꾹 다물려 있던 해영의 입술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선뜻 흘러나오는 사과가 오히려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또한 그가 갑자기 연애 프로그램에 나간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차선우처럼 앞뒤 재지 않고 따라 출연할 생각까진 못 하겠지만.
“속상하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었어. 내가… 지금 조금 여유가 없었나 봐.”
들려온 말에 해영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선우의 표정은 정말이지 울적해 보였고, 그의 말마따나 흐트러진 얼굴이 여유가 없음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에 해영이 손을 움찔 떨었다.
차선우는 곧잘 웃는 만큼 곧잘 울었다. 왜 이렇게 눈물이 헤프냐고 놀리면 제게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며 변명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놀린 주제에 자신 또한 차선우가 울 때마다 애틋해했지.
관계는 변했으나, 본질적인 건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해영은 그 처연한 낯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사이 차선우는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 긴 속눈썹 아래 가려져 있던 검은 눈이 다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해영을 집어삼키듯 담았다. 절로 죄책감이 들 정도로 가련한 표정에 비해 주시하는 시선은 집요했다.
선우가 무겁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네가 다른 사람들이랑 동거하면서 연애를 하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제정신이겠어.”
“…연애하려고 여기 출연한 건 아니야.”
굳이 정정하는 해영의 태도에 선우가 손을 들어 올려 설핏 휘어지는 입가를 가렸다.
“알아. 너 아직 나 좋아하잖아.”
뭔…. 당황스러운 마음에 입을 벙긋거리던 해영이 헛웃음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야? 하고 되묻는 듯한 눈빛에 해영은 말없이 눈을 돌렸다. 전보다 기분이 풀려 보이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제 안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으리라. 혹 그와 앞으로 같은 집에서 보내야 할 걸 생각해 장난스럽게 받아칠 수도 있을 것이다. 도무지 그럴 수 없었던 건, 제 대답에 선우가 지을 표정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미안, 나, 이제… 형 안 좋아해.’
그때의 표정. 차선우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짓말했을 때, 그가 지었던 표정을 윤해영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 얼룩지던 짙은 절망과 공포에, 해영은 외려 저 자신이 상처받는 기분이었다. 우습게도 윤해영은 그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죽고 싶은 걸 어떡해. 나는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윤해영. 솔직히 말하면… 그냥 엎고 싶어.”
해영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찔 떨렸다. 차선우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하지만 그럼 네가 싫어하겠지. 네 말대로 할게. 그러니까, 해영아.”
그가 달래는 듯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 왔다. 그 다정한 부름에 해영은 어째서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선우가 그런 해영에게로 손을 뻗었다. 희고 곧은 손가락이 해영의 어깨 위에 가볍게 올라타더니 이내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일단 들어가자. 너 추위 많이 타잖아,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선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에 온 감각을 곤두세우고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도 이런 와중에 앞으로는 또 어떻게 지내야 할지 해영은 불안해졌다.
이제야 조금 괜찮아졌는데.
이제야 조금 그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시작했는데,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어떡하면 좋지. 도무지 그와 함께 지내며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해영은 한겨울밤의 테라스에서 벗어나 다시 안으로 들어섰으나, 여전한 추위에 떨리는 주먹을 꽉 쥐어야만 했다. 손바닥에 파고든 손톱이 살갗 깊숙이 자국을 남길 때까지.
***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뜬 해영이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았다. 그러곤 눈을 비비적거리며 화면을 켜 익숙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40분.
원래 아침잠이 없는 편이 아닌데도 인턴 출근을 시작하고부터는 7시도 되기 전에 자연스레 눈이 뜨였다. 아무래도 잠들기 전까지 계속 긴장을 놓지 않고 있는 탓이 클 것이다. 그래도 이곳에 입주한 덕에 출근하는 로펌과 가까워져서 부쩍 여유가 생긴 것은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잘까 싶었지만, 이미 가신 잠기운에 해영은 밤새 뒤척거리느라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몸을 애써 일으켰다. 쉬이 잠에 들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간밤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탓이다.
최대한 선우가 누워 있을 침대로는 시선을 주지 않고 몸을 일으킨 해영이 방에 붙어 있는 욕실로 향했다.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복도를 가로지르던 해영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를 부른 이는 공용 공간의 소파에 앉아 있던 재휘였다. 그는 긴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 늘어지게 앉아 있었는데, 손에 들린 책이 단박에 시선을 끌었다. 해영이 잠시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7시 10분. 해가 아직 다 뜨지도 않아 어슴푸레한 빛이 유리창을 통해 고스란히 새어 들어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재휘는 말끔한 얼굴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멍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뭐지? 컨셉인가….’
의아함에 고개를 기웃거리던 해영이 아직 제가 재휘의 말에 답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뒤늦게 탄식을 흘렸다. 그는 무시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 주려는 양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이제 출근해야 해서요.”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는 재휘에게 해영이 저도 모르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내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오는 해영의 입꼬리가 무의식중에 설핏 올라갔다.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다녀오라는 사소한 인사에도 기분이 금방 좋아졌다.
1층으로 내려와 다이닝 룸에 들어선 해영이 식탁 의자 위에 겉옷을 걸쳐 두곤 팔을 걷어 올렸다. 셔츠가 조금 구겨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냉장고 문을 연 해영이 안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재료 몇 개를 꺼냈다.
아침을 꼭 먹는 습관이 든 건 하진 누나의 집에서 얹혀살 때부터일 것이다. 하진의 모친인 정은미는 해영이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아침을 챙겨 주었다. 아저씨도 아침을 드시지 않고 출근하는 마당에 꼬박꼬박 아침을 챙겨 주시는 것이 죄송스러워 몇 번 거르고 등교하자, 어느 날 그녀는 집을 나서려는 해영을 붙잡았다.
‘해영아, 밥 먹고 가. 아줌마가 방금 해서 따뜻해.’
안 그래도 죄송할 것이 많은 해영은 그 권유를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어색하게 식탁 앞에 다시 자리한 해영을 두고 그녀는 반찬을 이것저것 꺼내 주며 말했다.
‘혹시 내가 못 챙겨 주더라도 아침은 거르지 마. 응? 아침을 먹어야 하루를 든든하게 버틸 수 있는 거야.’
배곯고 다니는 것만큼 서러운 일은 없다는 그녀의 말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서일까. 아니면 저를 위해 차려 줬던 아침 식사의 온기가 남아서일까, 해영은 성인이 되어 나와 살고 나서도 되도록이면 아침을 챙겨 먹고자 했다.
가장 먼저 전기밥솥에 쌀을 안친 해영이 그 틈에 꺼내 둔 재료들을 손질했다. 익숙하게 국을 끓이며 간간이 시간도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 짧아진 덕분에 자취방에서 출근하던 요 며칠보다 확연히 여유로워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소윤이 한식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다. 넉넉하게 준비했으니 일어나면 다른 출연자들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맛있어야 할 텐데, 하고 멍하니 서 있던 해영이 밥솥에서 들려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취사가 완료되었다는 소리에 찬장에서 그릇 두 개를 꺼내 든 해영이 밥과 국을 담아 들고 식탁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숟가락으로 밥을 떠 입에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이와 정면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출근하려는 모양인지 단정하게 차려입은 선우를 발견한 해영이 저도 모르게 멈칫 몸을 굳혔다.
꼭 아침을 챙겨 먹는 자신과 달리 차선우는 제가 없으면 굳이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았다. 늘 먼저 일어나 자신의 아침을 챙겨 줬던 탓에 그가 원래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아주 나중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번에도 역시 거를 모양이었던 게 분명한 선우를 보는 해영의 미간이 점차 찌푸려졌다. 사람 신경 쓰이게 왜 밥을 거르냐고…. 신경 꺼. 신경 끄자, 윤해영. 머릿속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입은 제멋대로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
짤막한 부름에 선우가 당연하다는 듯이 멈춰 섰다. 막상 불러 놓고 주저하던 해영의 눈꼬리가 점차 내려갔다.
진짜 멍청한 윤해영, 바보 같은 윤해영, 구질구질한 거머리 같은 윤해영. 왜 칼같이 미련을 떨쳐 내지 못하지? 속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퍽퍽 내리치며 해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아침 먹고 가. …요.”
그 제안을 들은 차선우의 동공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가느다랗게 휘어지는 눈매 속으로 사라졌다.
“네, 그럴게요.”
선선히 대답하며 발길을 바꿔 다이닝 룸으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해영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당연하다는 듯이 밥솥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찬장에 있는 그릇 꺼내서 국 떠 와요.”
익숙하게 시키고는 주걱과 그릇을 들고 밥솥을 열었던 해영이 잠시 멈칫했다. 멍하니 굳어 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슬쩍 뒤쪽을 눈짓했다. 그러자 제 말대로 고분고분하게 그릇에 국을 옮겨 담고 있는 차선우가 보였다.
‘아… 미친, 이게 뭐지?’
윤해영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얼굴에 떠오른 황당함을 숨겼다. 제가 이러는 것도, 지금의 상황도 전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영은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감으로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며 입술을 물었다.
상대가 선우 형이었기에 더 신경 쓰였던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꼭 그가 아니더라도 자신은 누구에게나 아침을 한 번쯤은 권했을 것이다. 그러니 피고 윤해영은 단순한 호의를 건넸을 뿐이고, 그 의도가 떳떳하진 않을지언정 죄는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이어지던 공방전은 결국 변호인 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도 굶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한쪽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판결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빈약한 변명에 밥을 푸는 손에 유독 힘이 들어갔다. 퍽, 퍽 흰 쌀밥에 파고드는 주걱이 제법 거친 소리를 냈다. 어느새 그릇 위로 밥을 잔뜩 쌓아 올린 해영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전기밥솥을 다시 닫았다.
밥그릇을 들고 몸을 돌렸던 해영은 시야에 들어온 풍경에 다시금 멈춰 섰다. 단번에 해영을 곤란하게 만든 장면은 하나뿐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차선우.
다이닝 룸에 있는 식탁은 8인용으로 구비되어 무척 컸다. 제 자취방에 들어가면 방이 꽉 찰 게 분명할 정도로 널찍한 크기였다. 제가 앉은 자리를 빼더라도 의자가 7개나 남았으니 충분히 넉넉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넓은 테이블에서 차선우는 제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같이 먹는데 굳이 따로 앉아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그 상대가 차선우라는 것만이 문제였다. 이번에도.
시선이 마주치자 조용히 눈웃음을 짓는 모습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어설프게 마주 웃어 보인 해영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대충 꺼내 든 채 테이블에 다가섰다. 밥그릇과 수저를 선우의 앞에 놔 주고 저 또한 자리에 도로 앉은 해영은 느껴지는 눈빛에 숟가락을 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차선우는 수저를 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저를 눈에 담고 있었다. 왜 저래. 해영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의 시선에 의아해졌다.
“…왜요?”
혹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한 건지 왼손으로 턱과 입을 더듬거리던 해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자신을 보며 어리둥절해하는 해영을 향해 선우가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이던 그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려 제 앞에 놓인 수저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던 와중 머리를 넘긴 탓에 훤하게 드러난 흰 이마에 설핏 주름이 졌다. 동시에 찡그린 눈썹 아래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잦게 떨렸다.
해영의 얼굴 위로 설핏 낭패감이 떠올랐다. 그는 차선우가 어떨 때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았다. 저런 얼굴을 하면 다음에 뭐가 이어지는지도.
“왼손을 쓰는 건 어떻게 알고.”
한숨을 흘리듯 웃은 차선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곧 울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에 어쩐지 마음이 급해진 해영이 초조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뭐라고 말하지? 윤해영은 답할 말을 고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망할 카메라만 없었어도 어떻게 모르냐며 적당히 타박하고 끝낼 일이었으나, 이곳저곳에 달린 카메라는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 밤 예정된 신상 공개 시간 이전까진 서로 아는 척을 해선 안 된다는 룰이 해영은 처음으로 번거롭게 느껴졌다.
아, 모르겠다. 점점 흐릿해지는 선우의 미소를 바라보던 해영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어제 왼손으로 식사하신 거 같아서.”
“그랬어요?”
성의 없이 꺼낸 변명에 선우의 눈매가 다시금 가늘게 곡선을 그렸다. 그의 입에서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 안 보고 있는 줄 알았어요, 해영 씨는.”
“…….”
괜한 핑계를 대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어 버렸다. 해영은 기쁘다는 듯 웃는 차선우의 화려한 미소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는 고작 저를 떠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윤해영은 그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꾹 다물린 선우의 입가 옆으로 보조개가 파여 있었다. 그 미소에 해영은 왜인지 속이 불편해졌다.
안 보고 있었다. 잠깐 보지 않은 게 아니라, 식사 시간 내내 선우를 일부러 피했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꺼낸 거짓말에 그가 기뻐하자 불편한 마음이 배가됐다. 거짓말은 여전히 성격에 안 맞는다. 그게 소중한 사람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슬쩍 인상을 찌푸렸던 해영이 아침에 열심히 빗어 내렸던 머리를 제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원래 알고 있었어요. 전부터.”
아무렇지 않게 툭 꺼내듯 말을 정정한 해영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밥 한술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더 이상의 대화를 차단하는 몸짓이었다.
그의 말뜻을 바로 파악한 선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어도 괜찮았다. 어느 쪽이어도 좋다. 차선우에게 있어 윤해영은 그런 의미였다.
“알아요. 그냥 혼자 감동한 거예요. 잊지 않아 줘서.”
가감 없이 흘러나온 말에 해영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목이 메었는지 컵을 들어 물을 삼킨 해영이 잠시 주저하더니 다시 열심히 밥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반면에 차선우는 쉬이 수저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물기 없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듯 쓸어내리던 선우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눈 아래 얼굴을 완전히 가린 커다란 손 틈으로 조그마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울 것 같아….”
작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앞에 앉은 해영으로서는 충분히 들릴 만한 크기였다. 아이 씨. 해영이 입 안에 있던 것을 전부 삼킨 후 그를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차선우라면 정말 울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또한 그가 짓던 표정으로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므로, 윤해영은 당황하지 않고 그를 달랬다.
“울기만 해 봐, 진짜. 참아요.”
최대한 소리를 낮춰서 속삭이듯 건넨 말은 달랜다기보단 협박에 가까웠다. 선우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되물었다.
“못 참겠는데 어떡하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눈에 힘주든가.”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대답하던 해영이 아차 싶은 얼굴로 말을 돌렸다.
“아 됐고, 밥이나 먹어요.”
상체를 숙인 채 속삭이던 해영이 몸을 바로 세웠다. 이게 정말 뭐 하는 짓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투덜거리듯 대꾸하며 선우의 앞쪽으로 반찬이 올려진 접시를 밀었다.
선우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때부터 심장이 덜컥거린 해영이었다. 그의 눈에 혹시 물기라도 어릴까 다급해진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말이 거칠게 나왔다. 크게 언성을 높인 건 아니었지만, 해영은 괜히 짜증스럽게 대꾸한 것이 마음에 걸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부지런히 손만 움직였다.
그런 제 마음을 눈치챈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곧 고개를 끄덕인 선우가 순순히 수저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해영의 손이 차츰 느려지기 시작했다.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진 식사는 선우가 결국 수저를 내려놓고 나서야 끝이 났다. 밥을 너무 많이 푼 탓에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던 해영은 그가 깔끔하게 그릇을 비우자 안심하고 긴장을 풀었다. 그릇을 물에 헹궈 식기세척기 안에 넣어 놓은 해영이 걷어붙인 팔을 내리며 겉옷을 들었다.
선우 또한 출근하는 길일 테니, 이대로 헤어진다면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선우가 있는 공간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던 그가 겉옷에 빠르게 팔을 꿰었다.
마지막으로 무늬 없는 깔끔한 검은색 가방까지 메자 출근 준비가 끝이 났다. 해영은 곧장 다이닝 룸을 나서려다, 들려온 목소리에 다시 멈춰 섰다.
“출근길이면 같이 나가요. 데려다줄게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차선우였다.
목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준비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온 건지 의아했으나, 해영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 앞에서 버스 타면 돼요.”
“어차피 가는 길일 텐데요. 차 타고 가면 해영 씨도 편하잖아요.”
거절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선우를 보며 해영이 자못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형은 지금 내 말이 들리지가 않나? 그러한 심정을 담아 올려다보았으나, 선우는 저를 바라보는 해영에게 생긋 웃어 줄 뿐이었다.
“안 될까요?”
달짝지근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이성을 배반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오른 탓이었다. 잠깐의 대치 끝에 해영이 얼굴을 찌푸리며 짧은 한숨을 삼켰다.
절대로 차선우에게 져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더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차선우는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고,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선택지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뿐이다.
윤해영은 이젠 모르겠다는 듯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고마워요.”
해영이 허탈하게 제안을 받아들이자, 선우의 얼굴이 한층 환해졌다. 별 볼 일 없는 대답을 고맙다며 덥석 받아 무는 것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을 보며 윤해영은 거절하지 않은 것을 조금쯤은 다행이라고 여기고 말았다.
선우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해영이 익숙하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맨 채 시동을 거는 선우를 기다리던 그는 차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발견했다.
‘무슨 카메라가 없는 곳이 없어….’
작지 않은 크기도 신경 쓰였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서인지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해영은 최대한 그쪽을 보지 않기 위해 앞을 주시했다.
“어디로 갈까요?”
주차장을 빠져나와 기어를 쥐고 있던 손을 핸들 위로 올린 선우가 물었다.
“그냥 가까운 역에 내려 주세요.”
“이 시간에 지하철 사람 많을 텐데.”
뭐래. 말꼬리를 늘리며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의 모습에 해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옥철은 경험도 못 해 봤을 차선우가 저런 말을 하니까 어이가 없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눈치챘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생긋 웃을 뿐이었다.
“나는 시간 많으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부담을….”
어떻게 안 가질 수 있겠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곧장 항의하려던 해영이 카메라를 의식하곤 입을 다물었다.
아, 정말이지. 이런 게 두려웠던 것이다. 이건 호와 불호를 넘어선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선우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도,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던 친한 선후배 사이처럼 태연하게 연기할 자신도 없었으니까. 지난 시간을 없었던 일로 칠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에 해영은 헤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은 늘 두려웠다.
단순히 차선우에게 약한 것만이 아니었다. 윤해영은 선우의 앞에서 계속 약해지고 싶어 하는 스스로를 알았다. 모르는 척 염치도 없이 그의 곁에 남고 싶은 이기적인 미련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했다는 것 또한. 그래서 이렇게 애매하게 굴면서 완전히 그를 밀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종로 쪽으로 가 주세요.”
울적해지려는 기분을 숨기며 해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창밖을 주시하는 그의 모습에 멈칫하며 굳었던 선우가 느릿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낯선 동네를 벗어난 차는 머지않아 익숙한 도로 위로 올랐다. 몇 번의 신호를 받으면서 목적지로 달려 나가는 동안 해영은 줄곧 창밖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괜히 선우를 보고 있다간 답도 없는 감정의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 분명했다.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경험한 일이었으므로 해영은 출근하면 해야 할 일을 정리하며 능숙하게 머릿속을 환기했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멍하니 눈에 담던 해영이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아. 형, 여기서 우회….”
전, 시발….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은 해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기치도 못한 순간 튀어나온 말버릇에 가장 놀란 건 윤해영 본인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카메라를 흘깃거리던 그가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손을 내렸다.
멍청한 실수야 이미 여러 번 저질렀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깊게 좌절하기보다 윤해영은 적극적으로 살길을 찾아 나갔다. 어차피 하진이 편집을 맡을 테니 몇 번의 실수 정도야 기꺼이 삭제해 줄 것이다. 곱게 넘어가진 않을 테지만.
“…우회전이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은 말에 옆에서 가벼운 회답이 돌아왔다.
“네, 우회전.”
꾹 참고 있는 듯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구태여 보지 않아도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뻔한 음성에 해영이 속으로 비속어를 씹어 삼켰다.
이전의 말버릇들이 툭툭 튀어나올 때면 애써 그어 둔 선이 흐려지는 듯해 곤란했으나, 차선우는 그것이 그저 기꺼운 모양이다. 즐거운 듯 핸들을 툭툭 두드리기까지 하는 선우의 손가락에 해영이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조심하려고 할수록 실수하게 되는 게 조금 속상했다.
숨 막힐 정도로 불편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목적지에 다다른 이후였다. 해영은 로펌이 있는 건물 앞을 손짓했고, 차는 미끄러지듯 도로변에 멈추었다.
드디어. 해영의 가슴이 이유 모를 흥분으로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차 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안전벨트를 푼 그는 선우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는 내내 고르고 고른 말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놨던 인사를 꺼낸 해영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보도 위로 올라서자마자 폐부를 찌를 듯 차가운 겨울 공기가 밀려들었으나, 해영은 오히려 그 서늘함에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망치듯이 차를 빠져나와 호흡을 가다듬던 그의 귓가에 또다시 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따라 내리는 이가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차에 남아 있는 이는 애초에 한 명뿐이었으므로.
“해영아.”
윤해영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려다 멈칫했다. 그의 목소리에 곧장 반응하는 것은 지금의 제게는 허락되지 않는, 빌어먹을 습관의 일종이었다.
이젠 해선 안 되는 몸짓 대신 해영은 굳어 선 채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어진 발소리는 차 앞을 돌아온 선우가 해영의 앞에 도달해서야 멈추었다.
“괜찮아, 뒤따라오는 차에서 녹음은 못 할 테니까.”
자신의 부름에 딱딱하게 굳은 것이 촬영을 신경 쓰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선우는 그러한 말을 꺼내 해영을 안심시켰다.
뒤따라오고 있는 차가 있는 줄도 몰랐으나, 해영은 그의 말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해영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걸었다.
늘 자신을 곧게 올려다보던 해영이 언제부터 제 시선을 피했는지 차선우는 기억하고 있었다. 애초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제멋대로 떠오르려는 마지막 기억을 억지로 몰아낸 선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12월의 겨울바람이 스며든 탓인지 유난히 창백한 기다란 손가락이 해영의 가슴팍에 닿았다.
차선우는 오늘 아침 해영을 본 순간부터, 출근하려는 듯 낯선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본 그 순간부터 밀려들었던 수많은 감정들을 내내 억눌러야만 했다. 여전히 복잡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며 그는 신중하게 해영의 넥타이 끝을 매만졌다.
“넥타이. 여기가 이렇게 나와야 해.”
“…내가 할게.”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거리며 밀어 내는 해영의 말에도 선우는 넥타이를 다시 매어 주는 데에 열중했다.
“이번 한 번만 봐줘.”
그에게는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동시에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에는 그 이상의 욕심도 들어 있지 않았다. 묘한 위화감을 느낀 해영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다 했어. 벌써 이렇게 멋지게 입고 일하러 다니고. 다 컸네, 윤해영.”
그는 조곤조곤하게 말하며 마지막으로 해영의 옷깃까지 가지런히 정돈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손은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그 쓸데없이 자상한 손길에, 제게 아무것도 탓하지 않는 목소리에 윤해영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는 탓에 가라앉은 입매, 담담하지만 끝이 떨리고 있는 음성,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 속 숨기지 못한 애정…. 해영은 차선우가 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어 놓은 선, 그 앞에 선 그가 고스란히 보여 주는 감정의 무게가 해일처럼 해영을 덮쳐 왔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은 하나도 빛바래지 않은 채 선명했다.
처음 출근하는 날에 꼭 자신이 선물한 옷을 입어 달라던 차선우, 넥타이도 제가 매 주고 싶다던 차선우, 출근하는 길도 꼭 데려다줄 거라던 차선우, 제게 잘 다녀오라고 말해 주고 싶다던 차선우. 그런 사소한 일들을 마치 대단한 꿈이라도 꾸는 양 말하던 그에게 해영은 마음대로 하라며 키득키득 웃어 줬었다. 그 지나간 약속을 잊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해영은 이제야 오늘 아침부터 그가 고집을 부리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알아채지 못했다면 더 좋았을 것들이었다. 뒤늦게 어설프게 재현한 장면은 오히려 엉망으로 속을 뒤집어 놓을 뿐이었으므로.
구태여 마음을 꺼내 놓지 않아도 둘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서로를 알았다.
“데려다주고 싶었어. 욕심내서 미안해, 해영아.”
차선우는 더 욕심내지 않겠다는 듯 한 발짝 걸음을 물렀다. 해영은 고작 그 한 발짝 멀어진 거리가 다시는 넘어갈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알고 있다. 그건 자신이 직접 그은 선이었으므로, 서글퍼할 자격 따위는 없었다.
입가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입김은 서느런 공기 중에서 빠르게 흩어졌다. 시야는 여전히 연기라도 핀 듯 희뿌옇기만 했다.
“잘 다녀와.”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해영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 채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긴 목소리가 어설프게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고마워.”
다녀올게, 라는 말은 뱉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선우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으니까.
제가 먼저 들어가는 것을 보겠다는 듯 선우가 옆으로 비켜섰다. 길을 터 주며 자신을 배웅하는 모습에 해영이 머뭇거림을 잘라 내고 말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꾸 돌아보고 싶은 구질구질한 마음이 들었으므로 걸음을 더욱 빨리해야만 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따갑게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것에 아파할 겨를은 없었다.
해가 막 뜨고 있는 분주한 아침 출근길의 풍경, 찻길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들, 건물 앞에 세워진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들과… 뒤에서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차선우. 모든 것이 예전에 상상했던 출근길 그대로였으나, 모든 것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변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는데도.
윤해영은 오직 그 사실만이 아팠다. 어쩔 수 없는 고통이었다.
***
해영의 일상을 떠받드는 건 늘 8할이 목표 의식이었다. 해내야 할 목표가 있을 때 윤해영은 결코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 실무 실습 중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해야 하는 일거리가 없었더라면 또 온종일 형에 관한 생각으로만 머릿속이 꽉 찼을 것이 분명했다. …올봄에 그러했듯이.
어쨌건 그때와 달리 지금은 채용을 전제로 한 동계 인턴 실습을 수행하고 있었다. 평가에 반영되는 공통 과제는 계속해서 나왔고, 하루하루가 바빴으므로 해영은 멍하니 흔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이번 실습을 잘 마쳐 채용이 확실시되면 이전보다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럼 변호사 시험 보기 전까진 아르바이트에 전념해 좀 더 벌 수 있겠지.
앞으로 인턴은 2주 정도가 남았고, 끝나면 프로그램 촬영도 일주일 정도가 남을 것이다. 해영이 달력을 보면서 이후 일정을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해영 씨, 이거요.”
속닥이며 말을 걸어온 건 옆자리에 앉은 인턴 동기 여은 씨였다. 점심을 먹은 뒤 어딘갈 가는 듯싶더니 약국을 다녀온 모양이다. 해영은 제 자리로 넘어온 흰 손에 들린 약 봉투를 보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여은 씨….”
“감동했어요? 아니, 아까 최 변호사님이랑 식사할 때 얼굴이 좀 안 좋길래.”
“진짜 감동했어요.”
안 그래도 약국 다녀오려고 했는데…. 해영이 그녀에게서 봉투를 받아 들며 한껏 고맙다는 얼굴을 했다.
여은 씨는 한 살 많지만 같은 로스쿨 1학년생이었다. 이번 인턴 실습에서 같은 팀으로 배정되었는데, 팀의 멘토 변호사님이 주신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이 머리를 싸매다가 부쩍 친해졌다. 점심이나 저녁도 함께 먹으러 다닐 만큼 편해진 사이였다.
오늘은 오전 내내 속이 좋지 않아 점심을 거르려다가 멘토 변호사인 최 변호사님이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셔서 여은 씨와 함께 나갔다 돌아온 참이었다. 식사 내내 티를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딱 들킨 해영이 감동한 얼굴 위로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뭘요. 공통 과제는 얼마나 했어요?”
여은이 대수롭지 않게 꺼낸 물음에 해영이 웃는 낯으로 볼을 긁적였다.
“아직 구상까지만 했어요. 이제 써야 해요.”
“거짓말. 최 변호사님이 첫 번째 공통 과제 해영 씨가 1등이었다는데요.”
어디서 연막을. 밉지 않게 눈을 흘기는 여은을 향해 파티션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해영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밴 목소리가 실없이 흘러나왔다.
“그건 제가 봐도 좀 잘 쓰긴 했는데….”
우쭐대 놓고 제풀에 움찔해 웃는 해영을 보며 상대도 어이없다는 듯 마주 웃었다.
상황 보고 할게요. 해영이 파티션을 붙잡고 여은을 향해 속닥거렸다. 알았어요, 그럼 파이팅! 살갑게 응원을 건네는 그녀를 향해 해영 또한 손을 가볍게 들어 꽉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는 다시 앞을 보고 여은이 준 봉투에서 약을 꺼내어 물과 함께 삼켰다. 당연히 약을 먹자마자 좋아지는 극적인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생각해 건네준 마음만으로도 어쩐지 속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감은 눈 위를 꾹꾹 누른 해영이 다시 노트북 화면을 주시했다. 그녀의 말대로 연막이면 좋겠으나 아직 형식 외에 작성한 것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이번 공통 과제는 답변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로스쿨에서 배운 적 없는 특별법이 나와서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전 동안 쟁점을 파악하고 생각한 해답을 어떻게 풀어 쓸지는 대강 구상해 두었으니, 리서치만 조금 더 하면 오늘 내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뻐근한 목을 잡고 스트레칭한 해영이 이내 주어진 과제에 돌입했다.
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늘 지옥 같았다. 문득 아침에 지하철은 사람이 많을 거라니 뭐니 하던 선우가 생각나 해영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다.
퇴근 시간에 맞춰 겨우 과제를 제출하고 다른 인턴들과 저녁 식사까지 함께한 후였다. 그런 뒤 지하철에 올라탄 몸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돌아갈 곳이 원래의 집보다 가까웠다는 것이다. 어느새 도착한 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자 벌써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못한 고급 주택가를 걸어 올라가던 해영의 눈에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이 들어왔다. 고작 한 달을 머무를 곳인데도 환하게 불이 켜진 집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집 안에 들어선 해영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다들 2층에 모여 있던 것인지 한 칸씩 올라갈수록 사람들의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어? 해영 씨다!”
2층으로 올라서자 발견한 것은 소윤이었다. 대부분 공용 공간에 비치된 소파에 앉아 있거나 카우치에 느슨한 자세로 누워 있었는데, 그중 소윤은 다인용 소파 옆의 1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쩐지 해영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환영 인사였다. 소윤이 손으로 그를 가리키며 친근하게 웃었다. 어제보다 부쩍 편해하는 듯한 얼굴을 보며 해영도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현아 또한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다.
“해영 씨 이제 퇴근한 거예요? 식사는 했어요?”
“퇴근 늦어서 피곤하겠네….”
현아의 물음에 이어 중얼거리듯 말을 덧붙인 건 재휘였다. 아침과 같은 차림에 여전히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오늘 내내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제 말도 몇 마디 나누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출연자들을 보며 해영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무 생각 없이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던 해영이 멈칫하고 다시 걸음을 돌렸다.
“네, 먹고 왔어요. 저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올게요.”
그는 공용 공간으로 향하지 않고 바로 복도를 가로질러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걸 쥐고 그대로 밀어 문을 열자 고요한 어둠이 해영을 맞이했다.
선우가 아직 오지 않았는지 방 안은 온기도 빛 한 줄기도 없었다. 달칵, 해영이 벽에 달린 스위치 중 가장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방의 가장자리에 달린 조명에서 은은한 빛이 들어왔다.
빈방을 힐긋 둘러본 그는 가방을 내려 두고 그대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손을 씻고 세수를 한 그는 세면대를 잡고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에는 출연자들의 정보가 공개되는 시간이 있었다. 나이를 비롯해 서로를 좀 더 알아 갈 수 있겠지. 그럼 전보다 사이도 자연스레 가까워지고 편해질 것이다.
선우 형과도 그럴 수 있을까? 윤해영은 자신이 없었다. 오지 않은 이의 자리로 계속해서 시선이 가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한숨을 흘린 해영이 다시 한번 찬물로 얼굴을 거칠게 씻어 내렸다. 더 구질구질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불편한 속을 끌어안고 수없이 마음을 다잡은 후였다. 전보다 담담한 얼굴을 한 해영은 이내 그럴듯해 보이는 홈 웨어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서기 위해 드레스 룸을 빠져나갔다.
문고리를 쥐기도 전에 닫혀 있던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어….”
방으로 들어서던 선우와 정면에서 마주한 해영이 삐걱대듯 멈춰 섰다.
방금 돌아온 건지 그에게선 아직 바깥의 겨울 공기가 묻어 있었다. 찬바람이 밴 옷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향이 해영에게로 훅 끼쳐 왔다. 동시에 날아드는 시선. 조명을 다 켜지 않아 밝지 않은 사위 속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뚜렷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른 나무처럼 건조하던 눈빛에 금세 파고든 온기가 한 곳을 향했다.
그를 보면 꺼내기 위해 빼곡히 정리해 두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혼잡하게 뒤섞였다. 잠시 얼어 있던 해영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다. 옷 안쪽에 붙은 마이크를 꾹 틀어쥐어 막은 채였다.
“형, 있잖아….”
사뭇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선우에게 닿았다.
어제는 그와 이곳에서 만났다는 사실에 놀라 제대로 말을 못 했지만, 한집에 살면서 같이 촬영을 해야 하는 이상 그들 사이에는 한 번쯤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그건 근본적인 문제를 들춰내 해결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가 보이지 않게 그 위로 천을 덮어 두는 응급 처치에 가까울 것이다.
그사이 겉옷을 벗어 팔에 든 선우가 해영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응. 알아, 걱정하지 마.”
한숨과 닮은 목소리였다.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늘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고민거리를 눈치채던 선우였다. 윤해영은 이번에도 그가 알고 있다는 말이 사실일 거라 생각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달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한 다정함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걸리는 게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결 안심한 해영이 선우를 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몸짓에 입가에 짙은 미소를 건 차선우는 문에서 비켜서며 말했다.
“먼저 나가 있어, 해영아.”
그는 아직 옷도 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그의 말에 나지막이 답하고 문가로 다가서는 해영에게 선우로부터 배어 나온 향이 다시금 코끝을 스쳤다. 밖에서 묻히고 들어온 서늘한 겨울의 향기 속 익숙한 향이 단번에 구별되었다.
어떠한 향은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 찰나의 순간과 절대 잊지 못할 감정까지도 단숨에 되살리는 것이다. 질척하게 되살아나 발목 언저리에 달라붙어 오는 감정들을 가로지른 해영이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 밖의 환한 빛이 해영에게로 쏟아졌다. 공용 공간으로 나온 해영을 보며 앉아 있던 세희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해영 씨죠?”
“네?”
“아침에 된장찌개 해 놓고 간 사람이요, 해영 씨 맞죠.”
“아, 저 맞아요.”
그녀의 물음에 해영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와중 재휘는 펴고 있던 다리를 접고 옆으로 슬쩍 움직여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그 세심한 배려에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간 해영이 재휘의 옆에 앉았다. 선우만 오면 이제 출연자들이 전부 모이게 된다.
아직 나오지 않은 선우를 생각하던 해영에게 소윤이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와! 저희 그거 진짜 맛있다고 하면서 먹었거든요!”
“정말요? 괜찮았어요?”
해영의 얼굴에도 곧장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기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다들 왜 그렇게 자신을 반기나 했더니만, 아침에 해 놓고 간 요리가 제법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에 드러난 뿌듯함을 보며 소윤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웃음소리를 흘렸다.
“저희 저녁 하면서도 계속 아침 만드신 분 얘기했거든요.”
해영이 듣고 있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하셨을까 생각해 봤는데 먼저 나가신 분이 해영 씨랑 그… 선우 씨여서요. 뭔가 선우 씨보단 해영 씨일 거 같다고 추리하고 있었어요.”
소윤이 방긋 웃으며 종알종알 말을 꺼냈다. 타인의 입에서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선우의 이름에도 이제는 눈에 띄는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던 해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한 건 줄 알았어요?”
“네. 어젯밤에….”
소윤이 말하다 말고 말끝을 흐리며 애매한 미소를 걸쳤다. 막힘없이 술술 말을 꺼내던 그녀가 처음으로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다른 이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모인 이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쑥스러운 듯 소윤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머뭇거리며 말했다.
“같이 설거지할 때, 내일은 한식 먹자고 했었잖아요. 해영 씨도 한식 좋아한다고 해서….”
“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해영이 가벼운 탄식을 뱉었다. 그 의미 모를 반응에 금세 시무룩한 얼굴을 한 소윤이 부끄럽다는 듯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거 때문에 하신 줄 알았는데… 저 김칫국 마시고 있었던 건가요? 으윽.”
말하면서 그녀는 멋쩍은 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윤해영은 그런 소윤을 보며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국을 끓이면서 소윤이 했던 말을 생각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말해서 굳이 무안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기억해서 한 거 맞아요.”
쉬이 꺼내진 긍정의 말에 소윤에게 향해 있던 시선은 또 제게로 몰렸다.
그 시선에 아무런 의도 없이 대꾸한 것인데도 어쩐지 민망해졌다. 규칙 중에 대놓고 호감을 표현하면 안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호감을 표현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초반부터 혹시 애매한 분위기가 만들어질까 해영이 태연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제가 기억력이 좋아서요.”
분위기를 가볍게 하고자 뱉은 말을 소윤 또한 덥석 받아 주었다. 아, 예. 진짜 좋으시네요. 짓궂게 대답하는 소윤을 보며 해영도 장난스럽게 마주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치는 것도 잠시였다.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는 다른 출연자들 사이에서 어색한 표정의 민호를 발견한 것이다.
아차. 해영은 입가에 실없이 걸고 있던 웃음기를 서서히 지웠다. 민호는 어젯밤부터 유독 소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보인 이였다. 소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아니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써서 나쁠 것도 없을 것이다.
“저는 다 좋아해요. 중식도 좋아하고.”
조심스럽게 소윤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와중 재휘가 엉뚱하게 말을 걸어왔다. 장난인가 의아했지만, 어딘가 멍한 듯 진지한 얼굴을 보니 긴가민가했다. 해영이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 기억해 둘게요. 근데 저 중식은 할 줄 모르는데….”
“괜찮아요. 여기 버스 정류장에서 좀 더 내려가면 잘하는 집 있어요.”
재휘가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모를 얼굴로 해영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한번 같이 가요.”
“아, 네. 같이.”
반사적으로 제안을 수락했던 해영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이거 혹시 저희 둘이 데이트하는 거예요?”
“재휘 씨 데이트 신청했네.”
“아직 데이트 상대 정할 차례 아니에요. 재휘 씨 진정하세요.”
해영의 어리둥절해하는 얼굴과 상황이 제법 웃겼던 모양인지 다른 출연자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소윤도 허물없이 웃자 그제야 민호 또한 설핏 굳어졌던 얼굴을 풀었다.
선우가 방에서 나온 것은 그때였다. 복도를 가로질러 오는 그의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한 민호가 반갑다는 듯 상체를 내밀었다. 어두운색의 니트와 면바지를 입은 그는 이전의 서늘한 기색은 벗어 두었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제 다 오셨다!”
소윤의 말과 함께 남아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은 선우가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확히는 해영에게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민호가 즐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우를 반가워한 기색이 영 거짓은 아닌 듯했는데, 아마도 모든 출연자가 모여야 오늘의 이벤트가 시작되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저희 오늘 드디어 서로가 누군지 알게 되네요.”
모두 서로를 궁금해하고 있었는지, 민호가 아닌 다른 출연자들의 얼굴에도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이거 선물이랑 같이 공개하는 거 맞죠?”
다인이 테이블에 놓인 선물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유리로 된 테이블 위에는 알록달록하게 포장된 선물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이곳에 입주하기 전부터 몇 가지 수칙을 전달받았고, 당장 이번 주말에 있는 크리스마스에 첫 데이트를 진행한다는 것도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걸 들었을 때, 선우 형이 아닌 다른 사람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이 오랜만이라 묘하게 낯선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어쨌거나 남자 출연자들에게는 선물을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으니 여자 출연자들이 준비한 선물을 고르고, 그 선물의 주인과 함께 데이트를 하게 되는 시스템인 것 같은데.
‘받기만 해도 되는 건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표방하면서 일방적으로 받는 모양새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영이 예쁘게 포장된 상자들을 바라보며 의아해하는 사이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시작점을 끊은 것은 민호였다.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선물을 고르는 순서를 정하는 건 어떠냐는 그의 말에 모두가 멋쩍은 듯 순서를 양보했다. 그 바람에 가장 먼저 선물을 고르게 된 민호는 버건디색 박스를 집어 들었다.
“저는 이거 고를게요.”
“민호 씨, 선물 열기 전에 소개 먼저 해 주세요.”
“어? 다인 씨 선물인가 보다.”
내내 조용히 있던 다인이 급하게 나서는 것을 보며 현아가 알 것 같다는 듯 웃었다. 동시에 민호의 얼굴이 설핏 굳었으나, 애써 방황하는 시선을 갈무리한 그가 다시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였다.
“아, 저 소개해야 하죠? 저는 스물여섯 살 김민호고요. 아직 학생 신분이긴 한데…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
민호의 소개에 해영이 반사적으로 짧은 탄성을 흘렸다. 어쩐지 자신이랑 비슷한 나이일 거 같더라니, 같은 나이였다. 뜻밖에 동갑내기를 만난 것이 반가워 놀란 얼굴을 하는 해영을 향해 세희가 은근히 웃었다.
“해영 씨 반응 이상한데요. 혹시 해영 씨도 모델이신가.”
“네? 전혀 아닌데, 어, 그렇게 보이나요?”
세희의 갑작스러운 추리에 멈칫하던 해영이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아, 좋아한다, 좋아한다. 옆에서 장난스럽게 놀리는 소윤의 목소리에 키득거린 해영은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민호 씨 선물 열어 봐야죠.”
“맞아요! 뭔가 상자가 무거워 보이는데.”
해영의 말을 이어 소윤이 그를 재촉했다. 제게로 돌아온 소윤의 시선에 민호가 슬쩍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선물의 주인은 역시나 다인이 맞았다. 상자 안에서 나온 책과 앨범을 보며 다인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라며 수수한 웃음을 지었다.
“저도 민호 씨처럼 스물여섯 살이고요, 저는 밴드에서 보컬 겸 베이스를 맡고 있어요. 아마 많이들 모르실 텐데….”
“저…! 저 알아요. 다인 님, 이다루 밴드 맞으시죠.”
소윤이 말끝을 흐리는 다인에게 수줍게 물어 왔다. 다인 씨에서 다인 님으로 격상된 호칭이 그녀의 팬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다인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녀가 속한 이다루 밴드는 간간이 청춘 페스티벌에 참가하거나 가끔 개인 공연을 하는 것 말고는 대중과 만날 일 없는 인디 밴드였다. 소윤이 보내온 관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 다인이 열없이 웃었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다음으로 선물을 고르게 된 건 해영이었다. 재휘는 먼저 고르라며 해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고, 차선우는 말없이 해영의 어깨 위에 올라온 재휘의 손에만 시선을 줄 뿐이었다. 비어 버린 차례의 공백에 윤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럼 제가 고를게요.”
그는 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베이지색 선물 박스를 집었다. 깔끔하지만 꼼꼼히 포장된 상자를 보며 해영이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벗겨 냈다. 아무 생각 없이 포장을 뜯던 그는 상자를 열기 직전, 잊을 뻔했다는 듯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아, 저 소개해야 하죠. 저도 민호 씨랑 다인 씨랑 같은 스물여섯 살이에요. 아직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겨울 동안 실무 실습을 하게 되어서….”
어디까지 소개해야 하는 건지 애매했다. 말을 흐리며 잠시 고민하던 해영이 너무 자세하게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결론 내렸다.
“종로에 있는 로펌에서 인턴 실습을 하고 있어요.”
“로펌이면 변호사 준비하는 거예요?”
네.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인 해영이 선물을 열어 보았다. 박스 안에는 흰 천이 한 겹 더 덮여 있었는데, 그 아래 감춰진 것은 옷처럼 보였다. 그가 보들보들한 천을 만지작거리며 스티커를 떼어 낼 때였다.
소윤이 기억났다는 듯 작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맞아, 맞아. 오늘 해영 씨 정장 입고 출근했었죠!”
“아, 그러네~ 변호사는 진짜 생각 못 했다.”
“아직 변호사는 아니고 그냥 학생이에요.”
해영이 시선을 들고 쑥스럽다는 듯 실없이 피식 웃었다.
변호사라고 하기엔 고작 대학원을 다닌 지 1년 남짓이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치열하게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인턴 실습을 시작하고서부터는 무지에서 비롯된 한계를 여러 번 맞닥뜨려야만 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해영은 더 많은 것을 배워 가고자 움직였다.
지금은 제 몫도 완벽히 수행하지 못하는 학생에 불과하지만, 졸업한 뒤 다시 돌아올 때 즈음에는 쓸 만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해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와, 옷이다.”
포장을 풀어내는 데에 집중하느라 굳게 닫혀 있던 입이 벌어졌다. 깔끔한 아이보리색의 짜임이 굵게 들어간 두툼한 니트가 눈에 들어왔다. 해영이 숨을 들이마시며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거… 저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세희 씨 선물이죠.”
“어떻게 알았어요?”
해영의 말에 턱을 괸 채 가만히 웃는 낯으로 지켜보던 세희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처음 자신을 보자마자 세희가 은근히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내리는 것을 해영은 알았다. 그것은 사람을 재는 것보다는 물건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업가의 시선에 가까웠다. 이따금 선우가 일할 때의 눈과 닮은 시선으로 내내 저를 지켜보던 그녀는 갑작스레 툭 말을 꺼내 왔었다.
‘해영 씨는 더 캐주얼한 옷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스트릿 패션이나.’
세희의 말을 듣고 의류 사업과 관련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해영은 굳이 그 순간을 설명하는 대신 말없이 세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정답이라는 듯 기꺼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고, 최근에는 의류 브랜드를 새로 론칭 준비 중이에요.”
“CEO시네! 멋지다!”
가장 리액션이 활발한 소윤이 이번에도 눈을 반짝였다. 고개를 끄덕인 세희가 해영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청순한 이목구비 위로 떠오른 장난스러운 미소가 제법 잘 어울렸다.
“그리고 스물여덟 살. 누나라고 부르세요.”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해영이 네에, 하고 흔쾌히 대답하며 다시 옷을 박스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다음 순서는 재휘였다. 그가 고른 선물은 현아의 것이었다. 책을 하루 종일 들고 있길래 글을 쓰는 직업인가 했던 재휘는 게임 회사의 디렉터였다. 주로 컴퓨터 게임만 하는 해영도 알 만한 콘솔 게임 회사에서 일하다가 이번에 회사를 옮겼다고 했다. 뜻밖의 직업에 해영은 선선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하지 않을 때는 스위치를 내려 두고 살아서 그래요.”
재휘가 자신을 보며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여전히 멍한 얼굴로 설명했다. 서른한 살이라고 소개한 그는 현아에게로 순서를 넘겼다.
현아는 스물여덟 살의 치과 의사였다. 친언니와 함께 개인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에 출연자들은 다시 한번 감탄을 흘렸다. 다들 멋진 직업을 갖고 있다고 중얼거리던 소윤과 눈이 마주친 해영이 반사적으로 웃어 보였다.
남은 선물 상자는 하나뿐이었다. 선물의 주인도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껏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선우가 남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기다란 손 위에 올라온 녹색의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흰 손에서 시선을 뗀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왜인지 모르게 들떠 보이는 소윤의 얼굴과 상대적으로 굳어 보이는 민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는… 회사 다녀요.”
금세 찾아온 침묵과 자신을 향한 출연자들의 시선 속에서 선우가 느릿하게 말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해 봐도 가장 간단한 소개에 해영이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회사 다니는 건 맞지…. 맞는 말이었다. 조부가 한제 그룹의 회장인 것을 말하지 않았을 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은 설명을 꺼내 놓고 차선우는 제 나이를 말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나이를 밝히자 다들 의외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반응이 해영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히 밖이 아니라 집에서 편한 차림으로 있을 때의 차선우는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는 면이 있었으니까. 아마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가 한몫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 틈에서 웃고 있던 해영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선우를 향했을 때였다. 한 번도 다른 곳을 향하지 않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선우가 담백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얇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형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냥 선우라고 불러도 괜찮고.”
민호가 그의 말에 시원스레 대꾸했다.
“형이라고 부를게요!”
선우가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는 금세 그가 편해진 듯 웃는 낯으로 선우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이고 있었다.
해영은 앞서 동일한 말을 꺼냈던 세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곧장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대답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자신을 담고 있는 눈은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해영이 그 눈을 마주하다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으음, 마지막 선물은 제 거예요.”
가장 마지막으로 자신을 소개한 소윤이 선우를 눈짓하며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무릎 위에 올라가 있던 해영의 손가락이 움찔하며 안으로 굽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확실히 시선을 끄는 면이 있었다. 선우가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면, 소윤은 가지고 있는 밝은 에너지가 계속해서 그녀에게 시선이 가게끔 했다. 스물다섯 살로 출연자들 중 가장 어린 소윤은 대학원을 다니는 학생이었다.
“다들 정말 멋지신 거 같아요. 직업도 그렇고.”
자기는 아직 다른 분들처럼 진로를 정한 건 아니고 고민 중이라는 그녀를 향해 출연자들이 좋을 때라고 장난스레 웃었다. 말없이 비시시 웃는 소윤의 얼굴을 바라보던 해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방금까지 붕 떠 있던 기분은 쉬이 가라앉았다.
스물다섯. 그때의 자신도 어떤 길을 향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소윤의 상황이 자신의 것과 같지 않겠지만, 고민하는 마음만큼은 알 것 같았다. 아마….
‘형이 없었더라면.’
머릿속에 그를 떠올리자마자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늘 그렇듯이 차선우가 있었다. 한 번도 제게서 떨어진 적이 없는 눈에 선명한 애정을 드러낸 채. 그 사실에 어쩐지 서러워졌고 동시에 안도를 느끼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그 시기를 더 힘들게 보냈을 것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힘든 것을 알아차려 주는 사람. 캐묻는 대신 밤새 내 이름을 부르며 안아 주는 사람. 그가 있었기에 해영은 헤매는 와중에도 웃을 수 있었다.
자신 또한 그에게 웃음만 되어 주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서.
‘너도 돈 다 갚아서 좋지 않았냐, 굳이 말해서 좋은 게 뭐냐. 응? 해영아.’
그런 주제넘은 욕심이 고개를 들 때면, 깊이 묻어 놨던 악몽이 되살아나 머릿속을 덮쳐 왔다. 묻고 살 수 없다는 듯이, 망각하지 말라는 듯이.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해영의 양심을 꾹꾹 찔러 왔다.
헤어짐을 고하는 순간에마저도 그에게 따지거나 사과하지 못한 건 직접 입으로 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는 일말의 자존심이 해영의 입을 막았다.
띠링,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알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들을 끊어 냈다. 잠겨 있던 생각에서 벗어난 해영이 선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 하루 마음이 향한 출연자의 이름과 메시지를 적어 주세요. 메시지는 상대에게 익명으로 전해집니다.
같은 번호, 같은 내용. 해영의 마음이 가리키는 이름 또한 변함없이 같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을 적는 대신 낯선 세 글자를 적어 보냈다.
사실은 누군가 차선우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대신 전해 줬으면 했다. 제대로 끝내지 못한 마지막이 해영에게는 여전히 사무치게 남아 있었던 탓이다. 무슨 말을 보내야 할지도 이미 한참 전에 생각해 두었다.
사랑하는 선우 형, 이렇게 시작하는 말들이.
미처 꺼내지 못했던 그때의 고백이 아직도 마음에 고여 있어 그를 떠나보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해영은 이번 촬영 기간 동안 마음을 정리하고 관계에 매듭을 지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럼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어쩌면.
***
문자를 보낸 출연자들이 슬슬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해영 또한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복도를 걷던 그를 누군가 붙잡았다.
“진짜 갈래요? 시간 비는 날.”
재휘였다. 대뜸 건네는 물음에 잠시 멈칫했던 해영은 아까 그가 말한 중식집을 함께 가자는 제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이 형은 왜 다른 여성분들한테 어필할 생각은 안 하고 나한테 이러지? 무언가를 탐색하듯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던 해영이 이내 씩 웃었다.
뭔진 몰라도, 아무래도 당장은 친구를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형이 사 주면 가죠.”
“…사 줄게.”
“형 저 많이 먹는데 괜찮아요?”
“그럼 고민 좀 해 보고.”
재휘가 덤덤한 목소리로 발을 뺐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해영은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봤다고 그는 이제 재휘가 이런 얼굴로 곧잘 장난을 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못 물러요. 저 이미 시간 빼놨어요.”
해영이 도망칠 곳은 없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쾌활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복도 벽에 팔을 붙인 윤해영은 제법 껄렁한 자세로 재휘를 주시했다. 제 방은 반대 방향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길을 막는 그를 보며 재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새 시간을 뺐다는 게 말이 돼요?”
“당연하죠. 빼놓은 날짜 말해 드릴 테니까 형이 맞춰서 나오면 돼요.”
“너 얻어먹는 주제에 되게 당당하다.”
재휘가 느릿하게 해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타박 아닌 타박에도 기죽지 않고 키득거리는 그는 이미 재휘를 편하게 여기는 듯했다.
만난 지 고작 하루가 지난 사이치고 친근하게 대해 주는 해영의 태도에 재휘도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방에 가는 듯싶던 민호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그의 옆에는 선우가 서 있었다.
“어? 뭘 얻어먹어요? 재휘 형, 저는요?”
민호가 보폭을 크게 하며 재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애교 섞인 그의 물음에 재휘가 흘긋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민호 씨도 갈래요?”
“네! 저 맛집 같은 거 돌아다니는 거 좋아해요.”
“어, 나도 그런데.”
민호와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는 재휘를 보며 해영은 내내 해 오던 의심이 얼추 들어맞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가 친구를 만들기 위해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라는 가정에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는지 선우가 선뜻 입을 열었다.
“저도 가도 되나요?”
물음의 형식을 띠곤 있지만,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음성이었다. 부드러운 어조에 실린 무게에 해영은 눈을 깜박였고 재휘는 잠시 멈칫했으며, 민호는 활짝 웃었다.
“오! 그럼 다 같이 가는 거네요.”
아니… 시발. 이게 무슨 소리야. 뭘 다 같이 가. 흔들리는 눈으로 민호를 주시하던 해영이 휙 고개를 돌려 재휘를 바라보았다. 믿을 만한 사람은 그밖에 남지 않았다. 사교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핀트가 어긋나는 구석이 있는 재휘가 쓸데없이 벽이라도 쳐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해영의 바람은 오늘도 소리 없이 무시당했다.
“네, 되는데… 저는 해영 씨만 사 줄 거예요.”
그가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핀트가 어긋나기는 했으나, 재휘는 벽을 치긴 무슨 너무나도 쉽게 선우를 선 안으로 들였다.
윤해영은 그것이 나름대로 재휘의 장난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차선우는 그것이 장난이라는 걸 모르는 얼굴이었다. 실상… 잠시 입을 다문 채 재휘를 바라보는 표정을 보면 장난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보이기도 했고.
“괜찮아요, 제가 살게요.”
그가 설핏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선이 부드러운 얼굴에 웃음기가 스미자 한없이 선해 보여, 곰 같은 재휘의 멍한 얼굴에 일순 당황이 스쳤다. 제가 실수한 거냐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기, 선우 씨. 장난이었어요.”
“알아요. 그래도 제가 살게요.”
재휘의 정정에도 그는 다정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차선우가 또 돈을 쉽게 쓰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한 소리를 할 뻔한 해영이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저 그러고 싶다는 얼굴로 웃던 선우의 시선이 제 얼굴 위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마치 불가항력적인 외부적 힘이 작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럼… 나중에 시간 될 때 다 같이 가요.”
상황을 정리하는 해영의 말에 다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한 해영이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발짝 뗀 순간이었다.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경쾌한 알림음에 해영이 아무런 고민 없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데이트 할 때 봐요~ ㅎㅎ
그는 화면에 떠올라 있는 메시지를 읽어 내린 후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진동 소리는 선우에게서도 들려왔지만, 그는 곧바로 확인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태여 표정으로 티를 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 시간에 올 문자라면 다른 출연자들의 것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민호가 들고 있던 핸드폰에 시선을 주었다가, 퍽 실망한 얼굴로 다시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기다리는 이는 한 명뿐일 것이다. 내내 그가 시선을 보내던 소윤이겠지. 하지만 그녀가 누구에게 보냈을지는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모를 이는 없으리라.
“그럼 쉬세요.”
시무룩해진 민호의 얼굴을 보고 분위기를 모르지도 않을 텐데, 선우는 여전히 부드러운 낯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 앞에 서 있는 해영에게 다가온 그가 들어가자는 듯 고갯짓을 했다.
“어, 그럼 주무세요!”
선우의 몸에 시야가 가려지자 해영이 고개를 옆으로 빼 재휘와 민호에게 허둥지둥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등 뒤로 문이 열렸다.
제 옆으로 팔을 뻗어 문고리를 잡은 선우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해영은 빠르게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가기 전에 켰던 조명을 선우가 끄지 않고 나왔는지, 방은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환했다. 그새 사람이 들락날락했다고 온기가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해영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존재감 또한 선명했다.
“해영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다정한 목소리가 해영을 불러 왔다. 해영은 돌아보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윤해영.”
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다는 듯 들려오는 음성이 담담했다. 알면서도 오늘 자신의 얼굴을 봐야겠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소 잠긴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게 피하면 나 슬플 것 같아.”
아, 이런 말은 반칙이다. 하나도 애처롭지 않은 목소리로 꺼낸 슬프다는 말이 왜 이렇게 애틋하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지만. 윤해영은 원래부터 차선우의 슬픔에 면역력이 없었으므로 별도리가 없었다.
어깨를 움찔 떤 해영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가 곧장 시야에 들어와 박혔다. 이번에는 확실히 돌아볼 줄 알았다는 듯 닫힌 문에 기대고 선 그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살랑살랑 웃는 얼굴에 왜인지 불쑥 반박부터 나갔다.
“안 피했어.”
저도 모르게 들킬 게 뻔한 거짓말을 뱉어 놓고 해영이 눈을 굴리며 슬쩍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미안. 1분도 못가 툭 꺼낸 사과에 차선우의 눈매가 속절없이 풀어졌다.
그가 옷 안쪽에 있던 마이크를 떼어 내며 바로 앞에 놓인 기다란 서랍장 위로 내려 두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은 조용한 몸짓이었다. 그런 선우를 보며 해영도 급하게 마이크를 떼어 내던 와중이었다.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
“조심하겠다고 했잖아. 네가 싫어할 짓 안 해.”
어린아이를 어르듯이 사근사근하게 흘러나오는 말들이 오히려 해영을 얼어붙게 했다.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형.”
나는 형한테 미안한 것들밖에 없어. 온통 미안해해야 하는 일투성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형이 조심할 건 없어. 결국, 내 문제고 내 탓인데… 왜 형이 눈치를 보고 기분을 맞춰 줘.
내가 뭐라고.
그를 불러 놓고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이 계속해서 속에 뭉쳤다. 하루 종일 좋지 않았던 속이 다시금 꼬이는 것만 같았다. 울적해지려는 기분을 빠르게 떨쳐 낸 해영이 꿋꿋하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아까 하려던 말이 뭔지 알지?”
그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선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한 기색을 얼굴 위에 내비칠 여유는 없었다.
화제를 돌리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는 직설적인 태도는 윤해영다웠다. 선우는 이전과 같이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해영을 보며 언뜻 웃어 줄 수밖에는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싶다는 거잖아. 사람들 앞에서 말했듯이,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였던 것처럼.”
정답을 들었는데도 가슴 안쪽이 따끔거렸다. 꺼낼 수 있는 답이 하나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해영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고갯짓에 선우는 짐짓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나 특별히 의심 살 만한 행동 하지 않았는데.”
하마터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뻔한 해영이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차선우는 제 말에 문제 있냐는 듯 여전히 처연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나? 해영은 잠시 고민하듯 손으로 눈 위를 매만졌다.
물론 제가 선우의 행동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귀던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 한집에 살게 되었는데 어떻게 민감하지 않을 수 있지? 머릿속으로 스스로를 변명하던 그가 곧 고개를 들며 반박했다.
“형이 자꾸 나만 보고 있잖아.”
그의 시선이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해영은 그걸 눈치채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을 거라 확신하지 못했다. 선우를 향해 호감 어린 눈빛을 하는 이들을 봤고, 좋아하는 사람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으로 눈길을 주게 되니까.
“보는 것도 안 돼? 우리 사이에.”
차선우는 그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했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나긋한 여지를 남기는 목소리와 시선이 진득하게 해영을 향했다.
해영이 불만을 삼키며 침착하게 되물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형, 이제 전이랑은 달라.”
“알았어, 그러면 내가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사이.”
미련을 잘라 내기 위해 꺼낸 말을 선우는 간단하게 붙잡았다.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운 그는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로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해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포식자로부터 도망치는 피식자의 원초적인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선상 위에서 마주한 세이렌을 피해 가기 위해 힘껏 노를 젓는 방어 기제에 가까웠다. 무섭진 않은데 차선우가 어쩐지 미인계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단 소리다. 그가 짓는 미소의 의도를 모르는 척하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엷은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차선우를 피하다 보니 어느새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문에 다다랐다. 등에 닿아 오는 벽을 느끼며 해영이 낭패감 어린 얼굴로 눈앞의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더 욕심 안 내겠다고 했잖아. 이건 그냥 내가 매달리는 거야, 해영아.”
“…….”
“나한테 매달릴 기회는 줄 수 있잖아. 이것도 싫어?”
그 말에 움찔한 해영이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다. 그와 헤어지면서 해영은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가장 먼저 핸드폰과 전화번호를 바꿨고, 그의 집에서 나왔으며, 함께했던 추억과 남은 선우의 흔적들을 모조리 숨겨 두었다. 여태 버리지 못한 것은 미련뿐이었다.
그때 버리지 못한 미련이 나타나 자꾸 제게로 시선을 주고, 애써 덮어 둔 추억을 들췄다. 윤해영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그와 함께하지 않는 것밖에 없었듯이, 차선우에게는 그와 함께하지 않는 선택지란 없다는 것처럼.
“너는 모르는 척해도 돼. 다른 사람이랑 웃어도 돼. 밥을 먹어도 되고, 데이트해도 돼.”
하고 싶으면 하라는 듯 선우가 선선히 말했다. 속상함을 꾹꾹 눌러 담아 숨긴 채 말하는 목소리에 해영은 도리어 속상해지고 말았다.
차선우를 모르는 척할 수 있다고? 윤해영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 같았다면 당장 그의 뺨을 잡은 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단단히 타일렀을 것이다. 속에 담고 있는 말을 당장에라도 꺼내고 싶어 손끝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선우의 목소리가 그런 해영의 조바심에 부채질을 했다.
“해영아.”
“…응.”
“연애는 안 돼.”
그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를 흘렸다. 생각만 해도 비위가 상한다는 듯 찡그린 눈가에 설핏 물기가 맺힌 것도 같았다.
형이 초조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냐고 묻고 싶었으나 해영은 입술을 물어 삼켰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라고, 형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말로 꺼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관계가 변하면서 해영은 자신이 많은 것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선우를 마주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정작 가장 귀한 것들은 놓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한 것들 사이에서도, 제게 있어 제일 소중했던 차선우.
앞으로 선우에게 오는 타인의 연락들을 당연하게 바라봐야만 할 것이다. 그가 제게 주던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 줬을 때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해영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제게만 향하던 시선이 다른 이에게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며 괜찮을 수 있을지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으리라. 그건 당연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고 마땅히 치러야 할 값이었다.
그만큼 돌려줄 수 없는 것들을 받은 것에 대한 빚. 그 채무는 선우와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끝내 변해 버린 관계를 놓아야만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윤해영은 여태 절망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듯이 앞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형 나는….”
해영이 손에 힘을 주자 마이크가 손바닥 안으로 깊숙이 말려 들어갔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여기 연애하러 나온 거 아니야. 촬영이 끝나도 다른 사람이랑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거야.”
이번에는 그의 입에서 어르는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게 흘러나왔다. 윤해영은 제법 설득력 있게 말하는 법을 알았고, 자신의 진심이 이번에도 닿기를 바랐다.
나한테 매달리지 마. 그런 말로 끊어 내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영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형은 그런 거 걱정하지 마.”
말이 끝나자마자 차선우의 속눈썹 끝에 매달려 있던 물기가 기어코 흰 뺨을 타고 뚝 떨어져 내렸다. 아이 씨. 해영이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서랍장 위에 티슈를 왕창 뽑아 그에게로 내밀었다.
해영이 내민 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받아든 선우가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를 달래 줄 수 없는 해영은 그저 소란스러운 제 속만 달랠 뿐이었다.
말없이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와중, 선우가 이내 조금 진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알았다며 팔을 뻗는 그를 보며 해영이 저도 모르게 입을 내밀었다. 익숙한 모양의 손은 악수라도 하자는 듯 모로 내밀려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어?”
“손잡자는 뜻이잖아. 단지 그뿐이야.”
어디까지나 협력하자는 의미라는 듯 그가 울적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동시에 허공에 들린 선우의 손이 가볍게 까딱였다.
잠시 그 손을 노려보다시피 주시하던 해영이 결국 선우의 마이크가 올려진 서랍장 위로 손을 올렸다. 탁, 손바닥과 나무판이 맞닿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왔다. 쥐고 있던 마이크를 내려놓은 해영이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선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이 맞닿는 순간, 차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펴 엇갈리게 바짝 맞추어 잡았다.
“아, 진짜…!”
단지 그뿐은 무슨. 이렇게 긴장을 풀어 놓곤 손깍지를 껴 오는 선우를 보며 해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불쌍한 얼굴을 해도 소용없다. 어디서 연기를 하고 있어? 선우의 손을 떼어 낸 해영이 주먹을 쥐어 선우의 어깨를 가차 없이 툭 내리쳤다. 그러곤 그대로 그를 밀어 내며 몸을 돌려 침대로 향했다.
잠에 쉬이 들 수는 없겠지만, 내일도 출근하려면 자야 했다. 윤해영은 내일의 해가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베개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밤새 요란한 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댄 탓에 해영은 한참이나 잠을 설쳐야만 했다.
***
윤해영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오히려 추위에 무딘 쪽이었다. 다만, 추울 때면 피부가 금방 울긋불긋해지는 탓에 선우는 제 얼굴이 찬 바람에 조금만 얼어 있어도 속상해하고, 안쓰러워하곤 했다.
또 쓸데없이 과거를 헤집는 이유는 다시금 겨울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 집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몸을 돌돌 만 담요를 더 단단히 감싼 해영이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어 별이라곤 몇 개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밤에 곧장 잠들지 않고 밖에 나와 서성이게 된 건, 차선우의 눈물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던 날 이후부터였다. 밤새 같은 방에 누워 있는 선우를 신경 쓰고 그의 말과 표정 같은 것들을 곱씹느라 쉬이 잠들지 못했던 날.
그다음 날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출근한 해영은 이렇게 한 달을 보낼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면, 피하기라도 해야 했다. 그는 선우가 잠들 때까지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어.”
난간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해영은 아래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금세 허공에 흩어지긴 했지만, 냄새는 쉬이 흩어지지 않았다. 코를 찌르는 향에 난간 아래로 몸을 숙인 해영의 시야에 들어온 건 제법 익숙해진 인물이었다.
“어라….”
“세희 누나?”
“쉿….”
선우와 해영이 쓰는 방 아래는 바로 여자 방이 있었고, 그쪽 테라스에 세희가 서 있었다. 해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걸린 짤막한 흰 막대. 그건 분명히 담배였다.
어색하게 담배를 든 손을 아래로 내린 그녀가 다른 손으로 검지를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해 달라는 제스처에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저를 얌전히 바라보고 있는 해영을 올려다보며 세희가 숨죽여 웃으며 정원 쪽을 손짓했다.
‘잠깐 볼래?’
입 모양과 정원을 향해 기울인 몸으로 해영은 그녀의 메시지를 바로 파악했다. 왜 부르는 건진 모르겠으나, 알겠다는 신호로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 해영이 몸을 돌렸다.
방 안으로 들어서서 테라스로 향하는 유리문을 단단히 닫은 그는 어두운 조명이 깔린 방을 가로질렀다. 조용히 나서려던 해영의 걸음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어디 가?”
잠기운이라곤 전혀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침묵이 감돌던 방 안에 내려앉았다. 들려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멈춰 선 해영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선우의 시선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어두워서 보이는 것은 실루엣뿐이었지만,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에는 잠기운 하나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해영이 망설이다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잠시 바람 쐬러. 형은 다시 자.”
“…안 잤어. 나 원래 너보다 늦게 자잖아.”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역시나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해영은 담요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문의 손잡이를 쥐었다. 선우를 등진 채 그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자. 형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그러자 그는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유는 시선에 온도가 담겨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금 전보다 낮아진 온도의 시선. 그 서늘함에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었으나 해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문을 열었다.
달칵, 복도로 나와 방문을 닫고 선 해영이 돌연 멈춰 섰다. 등에 닿은 단단한 문에 잠시 기대어 서 있던 그가 한숨을 삼키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와 1층의 다이닝 룸에서 정원으로 향하는 유리문을 밀었다. 동그란 조명이 알알이 걸려 있는 나무 앞에 세희가 서 있었다.
“마이크 없지?”
“네. 그래도… 여기 나와 있는 거 들키면 안 될 텐데.”
“괜찮아, 여기 사각지대야. 저 카메라에서 줌 땡겨도 우리 이목구비도 안 보일걸.”
그녀가 건물 벽에 달려 있는 카메라를 손짓하며 말했다. 그러곤 짓궂게 웃는 얼굴을 보며 해영도 긴장을 풀고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아직 대화를 많이 해 봤다고 할 만한 여성 출연자는 없지만, 굳이 꼽자면 소윤과 세희 정도일 것이다. 오늘도 퇴근하자마자 세희와 함께 저녁 준비를 했으니까. 요리하는 내내 자기를 편하게 생각하라며 싱글벙글 웃어 주는 그녀 덕분에 해영도 몇 번이나 따라 웃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격 없이 얘기할 만한 자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화장기 없이 수수한 얼굴의 세희는 잠옷 차림에 카디건 하나만 걸친 채였다. 팔짱을 낀 채 팔을 쓸어내리는 그녀에게 해영이 자연스럽게 두르고 있던 담요를 건넸다.
“정말 고마운데, 근데 해영, 너도 춥지 않아?”
“누나 근데 이미 덮고 있잖아요.”
“내가 이런 걸 사양을 안 해. 하하하.”
건네받은 담요를 돌돌 몸에 두르며 세희가 쾌활하게 웃었다. 고마워, 그래도 너무 추우면 꼭 말해 줘. 걱정과 고마움을 함께 담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희에게 해영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불렀어요?”
나오기 전에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 시계는 이미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이크를 차지 않고 몰래 만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으니 들킨다면 문제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해영을 부른 것이다.
“한 번은 대화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세희가 잠시 눈을 굴리더니 툭 말을 뱉었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바이거든.”
“……?”
예고도 없이 벼락처럼 떨어진 말에 해영이 잠시 미동도 없이 굳었다.
갑자기? 의아해하던 와중 해영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에 튀어나온 돌멩이처럼 그냥 넘길 수 없는 구석이 존재했던 것이다. 세희는 ‘나도’라고 말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양 꺼내 놓은 사실이 자신에게만 해당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 말이었다.
이런…. 해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갔다.
“처음 들어왔던 날, 해영이 너랑 선우 씨랑 대화하는 거 들어 버렸어. 그때 테라스에서.”
세희가 검지와 중지를 펼친 채 입가에 가져다 댔다.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가 들은 모양이었다. 엄습해 오는 낭패감에 해영이 쉬이 입을 열지 못한 채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편집은 제가 할 거니까 남한테 들키지만 말라던 하진의 말이 귓가에서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너무 조심하지 않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고 말았다. 대학을 같이 다닐 때도 들켜 본 적 없는데, 아무래도 선우의 앞에서 긴장한 탓에 주변을 살피는 걸 놓친 모양이다. 곤란한 듯 희게 질린 얼굴을 한 해영을 보며 세희가 어르듯 말했다.
“둘한테 무슨 사정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뭐 상관없고. 어쩌다 보니 듣게 됐다는 건 말해 줘야겠다 싶었어. 어디 가서 절대 안 말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고마워요. 더 조심해야겠다 싶어서 이제야 정신이 들어요.”
금세 어른스러운 태도로 자신을 달래는 그녀를 보며 해영이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아직 심장은 뭍으로 건져 올려진 물고기처럼 거칠게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누나는….”
그가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말문을 텄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의아한 점이 생겼던 것이다. 가령 오늘 받았던 메시지와 같은.
“알면서 저한테 문자 보낸 거였어요?”
“응.”
“왜요?”
“나는 여기 연애하러 온 거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근데 어차피 골라야 할 거면 너한테 보내는 게 제일 부담 없잖아? 선우 씨보단 네 쪽이 더 취향이기도 하고.”
“…….”
“저기, 혹시 피팅 모델 같은 건 생각 없어?”
청순한 얼굴과 평소의 차분하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툭툭 내뱉는 말들이 거침이 없었다. 해영은 이게 그녀의 본모습이리라 생각했다. 시원시원하게 제 할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다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거 하면 많이 벌어요?”
선뜻 되묻는 해영의 모습에 세희가 장난스럽던 분위기를 지운 채 자세를 바로 했다.
“생각 있어요? 내가 또 보는 눈이 있잖아…. 이건 대박이 날 수 있다. 아, 내가 명함을 안 가지고 나왔네.”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하는 그녀를 보며 해영이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밤중에 몰래 나온 것을 의식해 숨죽여 큭큭거리는 것이 고작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자신을 보며 급기야 두르고 있던 담요까지 다시 돌려주려는 세희를 향해 해영이 씩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요. 누나 두르고 있어요.”
“인성까지 겸비했네. 참 사람이 됐다. 해영, 우리가 유튜브도 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런 건 관심 없는데.”
“야,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이게 또 노다지라니까?”
세희가 적극적으로 해영을 꼬여 내고자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가 어두운 사위를 둘러보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평소의 완벽하고 차분한 그녀의 모습도 좋았지만, 확실히 지금의 대화로 인해 더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세희도 그런 해영을 눈치챘는지 은근히 말해 왔다.
“아무튼. 사정은 모르지만 나는 네 편이야.”
편이라니…. 가리키는 대상이 없어도 그게 선우와 자신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영의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사뭇 흐려졌다.
“더 신중해도 돼요. 제가 잘못한 거면 어쩌려고요, 누나.”
“괜찮아. 용서해 줄게.”
이게 무슨 말이지? 뜬금없이 용서를 받은 해영이 세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 맞다. 내가 용서할 문제가 아니지. 근데… 봐 봐. 원래 연하한테는 이기려고 드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소리지 이게…?”
“너도 나이 먹으면 알게 돼.”
저와 별로 차이도 안 나는 그녀가 나이를 운운하자 해영은 입가에 헛웃음이 고였다. 반박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굳이 그녀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여기 있는 동안 잘 지내보자고. 나는 너 마음에 드니까.”
세희가 시원스럽게 뱉은 말에 해영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곧 길게 늘어지는 눈이 유쾌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말간 얼굴에 걸린 웃음이 희었다.
“저도 누나 마음에 들어요.”
“어쭈….”
조곤조곤 담백하게 꺼내진 그의 음성에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그런 해영의 팔을 가볍게 친 세희가 안으로 들어가자며 집이 있는 뱡항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세희와 함께 집 안으로 다시 들어선 해영이 계단 앞에서 그녀와 헤어졌다. 2층으로 올라와 방 앞에 선 그가 잠깐 주저하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대로 조심스럽게 열자, 방은 이미 조명까지 전부 꺼진 채였다.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달빛만이 선우의 침대를 어렴풋이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형은… 아마 자고 있겠지. 순간 가슴이 조이듯이 답답해졌다. 세희에게 대화를 들켰다는 사실을 곱씹을 때면 더더욱 그랬다. 선우가 있을 곳을 바라보던 해영이 조용히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테라스로 향하는 유리문이 열려 있어 찬 바람이 고스란히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까 제대로 안 닫고 나갔었나. 그쪽으로 다가간 해영은 문을 다시 제대로 닫은 후 침대 위로 쓰러졌다.
세희와 했던 대화 덕분일까. 생각이 많아졌는데도 오늘 밤은 어쩐지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예상대로 해영은 오랜만에 깊게 숙면했다. 얼마나 푹 잤는지, 이상하게 눈을 뜨고서도 눈꺼풀이 무겁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보이는 것은 흰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었다. 기묘하게 평화로운 주변과 지나치게 화창한 밖을 보며 해영이 숨도 내쉬지 못한 상태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침대맡으로 손을 뻗은 그가 핸드폰을 쥐었다.
허겁지겁 화면을 켜자 보이는 시간은 이미 오전 10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하….”
그냥 죽고 싶다….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린 해영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씻고 나와 급하게 드레스 룸에서 옷을 꺼내 들 때였다.
다가오는 발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던 해영에게로 의아함이 가득 담긴 음성이 들려왔다.
“해영아, 뭐 해?”
“나 늦었어. 나중에, 형.”
대충 꺼낸 대답에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걸려 있는 와이셔츠를 되는대로 잡았다가 지나치게 좋은 촉감에 불에 덴 듯 손을 놓을 때였다.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문가에 기대어 그런 해영을 바라보던 선우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늘도 출근해? 토요일인데.”
그 물음에 다급하던 해영이 눈에 띄게 멈칫하며 굳었다. 그러다 곧 입술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어색하게 돌아서서 선우를 주시하는 얼굴이 아직 부스스했다.
눈을 껌벅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해영을 주시하는 차선우의 눈매는 반대로 가늘어졌다. 물을 묻혀 붕 뜬 머리를 열심히 내린 듯했는데, 여전히 혼자만 툭 튀어나와 있는 옆머리를 보던 선우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가 조용히 양팔을 들어 팔짱을 꼈다.
“…오늘 토요일이야?”
해영이 사뭇 간절함을 담아 물었다. 선우는 그 물음에 짧게 고갯짓을 했다.
“응. 아침 다 준비돼서, 깨우려고 올라왔어.”
“아침….”
“그런데 이미 깨어 있네.”
해영이 그 말에 한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쪼그리고 앉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그를 보며 선우가 느릿하게 몸을 굽혔다.
턱을 괸 채 해영을 바라보던 차선우가 나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더 잘래?”
해영은 제 눈높이에 맞게 다리를 굽히고 앉은 그를 보며 찡그리듯 웃었다. 그러곤 눈 주변을 꾹 누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미 다 깼어.”
“그럼 내려가자.”
“아침 준비했다고 했지. 그럼 다들 일어나 있겠네. 아… 나도 도왔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깨우지 말랬어. 어제도 피곤해 보였다고.”
선우의 말에 눈가를 만지작거리던 해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평소보다 피곤한 건 아니었는데, 들어오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나와서 바로 저녁 준비를 한 게 제법 좋게 비친 모양이다. 제 사정을 봐준 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함과 곤란함이 더 커서 해영은 얕은 한숨을 다시금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미 늦게 일어나 버린 걸 돌이킬 순 없다. 해영이 굽혔던 다리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깨우러 와 줘서 고마워. 내려가자, 형.”
문 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는 그를 올려다보던 선우도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우보다 앞서 방을 빠져나가면서 해영은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 세희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지나치게 선우만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것조차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였다.
해영은 잠들기 직전까지 제 실수를 반성하고 앞으로를 생각했다.
인정하자, 차선우를 보면 구질구질해지는 건 아직도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제 더는 그래선 안 되지만.
“어, 해영 일어났네?”
윤해영은 마음을 다잡으며 다른 이들이 있는 공간에 발을 들였다.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세희가 부엌에서 나오다 말고 아는 척을 해 주었다.
“네, 누나 그거 저 주세요.”
해영이 빠르게 걸어가 세희가 들고 있는 접시를 받아 들어 테이블로 옮겼다. 그를 따라 들어온 선우도 금세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빠는 좀 쉬어요. 준비도 거의 다 오빠가 했는데.”
소윤이 부엌에 남은 그릇을 드는 그를 보면서 말렸으나, 선우는 선뜻 웃으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괜찮아, 내가 할게. 하고 속삭이듯 나온 목소리에 소윤의 얼굴이 설핏 붉어지는 것을 보며 해영이 고개를 돌렸다.
“아, 이거 형이 했어?”
“응. 선우 오빠 완전 척척 하던데 되게 의외야. 원래 이렇게 요리 잘했어?”
테이블에 그릇을 올리며 흘린 해영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물음에 옆에 서서 포크와 숟가락 등을 놓던 다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다인과는 동갑인 덕에 말도 놓고 부쩍 친해진 참이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한테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긴 하지만, 그래도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벌써 다른 출연자들과 어느 정도 편해졌다. 아무래도 함께 산다는 것이 빠르게 친해지는 데에 크게 한몫한 것 같았다.
잠시 음, 하며 목을 고른 해영이 그녀의 눈을 마주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남들 눈에 비칠 선우와의 관계는 친한 선후배 관계. 그거면 됐으니까.
“어. 형 원래….”
그는 자신보다 요리를 잘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건 아니었고, 언젠가부터 갑자기 이것저것을 해 주더니 자신은 못 하는 요리들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먹는 걸 그다지 즐기지도 않고 여태껏 요리할 일이라곤 전혀 없었던 이가.
아.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해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흐려졌다.
“원래 잘했어.”
반사적으로 달싹인 입에서는 퍽 그럴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애매하게 기울어지는 입꼬리를 다시 끌어 올리려 애쓰다가, 이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빈속인데도 속이 술렁거렸다.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지를 새삼 곱씹게 될 때면 윤해영은 지나친 과분함을 느꼈다.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갚아 나갈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의 곁에 머무를 만큼 뻔뻔하진 못하지만, 해영은 제 의지대로 떳떳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가는 중이었다.
그것이 해영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으므로 쓸모없는 기분을 떨쳐 내며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
이번에도 설거지는 해영의 담당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늦게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함께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던 해영이 제가 하겠다며 자원한 것이다. 괜찮으니 같이 하자며 다가오는 선우도 무서운 얼굴을 해 가며 쫓아낸 후였다.
그런 그의 옆으로 자기가 돕겠다며 세희가 웃는 얼굴로 걸어왔다. 뽀득뽀득 소리 나게 접시를 닦고 물로 헹구던 해영이 그녀를 보며 반쯤 얼어붙었다.
한 번만 봐 달라는 듯 그가 간절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동시에 쥐고 있던 접시를 들고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제가 하면 돼요. 먼저 올라가요.”
“그릇 많잖아. 둘이 하면 훨씬 빨리 끝나.”
그런 해영의 모습이 웃긴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린 세희가 서랍 아래서 새 고무장갑을 꺼내 들었다. 장갑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녀는 빨리 오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혼자 하는 것보단 둘이 하는 게 더 재밌잖아.”
“설거지는 안 하는 게 재밌죠, 누나….”
“그건 그래. 그러니까 빨리 끝내자.”
더 토 달지 말라는 듯 세희가 가볍게 발끝으로 해영의 발목을 툭 쳤다. 그 장난스러운 몸짓에 해영도 결국 졌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 그릇까지 닦은 해영이 식기 건조대에 내려놓으며 세희를 돌아보았다. 손에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고 스트레칭을 하는 그녀에게 해영이 팔뚝까지 끌어 올렸던 소매를 내리며 물었다.
“근데 누나 오늘 어디 나가요?”
아침부터 예뻤다. 토요일인데 출근을 하나? 의아한 얼굴로 묻는 그를 향해 세희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이브잖아. 오늘은 여자들끼리 데이트. 아마 저녁까지 먹고 올걸.”
올라가자는 그녀의 말에 해영도 다이닝 룸을 벗어났다.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공용 공간에서 여성 출연자들은 모두 겉옷을 이미 챙겨 입고 있는 채였다.
소파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듯하던 이들이 2층으로 올라온 해영과 세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민호였다. 어쩐지 자신을 보자마자 과하게 밝아지는 얼굴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들 나간대. 우리도 남자들끼리 나가자!”
그런 예감은 늘 틀리는 법이 없다. 대책 없이 해맑은 그를 보며 곡선을 그리던 해영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딱해졌다.
아, 진짜 저 새끼가….
민호에게 별다른 사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싫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좋지도 않았는데, 따지고 보자면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가까웠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단합을 중시하거나 무언가를 추진하는 데에 거침이 없다는 면만 빼자면 말이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해영도 그런 민호의 밝은 성격에 기꺼이 어울려 주었을 것이다. 전 애인과 함께 외출하게 되는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더욱이 그 전 애인이 여전히 신경 쓰이는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민호로서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았다. 알지만, 해영은 제발 입 좀 다물라며 민호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고 싶어졌다.
그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안 소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세희에게로 다가왔다.
“세희 언니도 왔으니까 그럼 이제 나가요!”
그런 소윤을 향해 세희가 겉옷만 꺼내 오겠다고 말하며 아래층을 가리켰다. 두 사람의 대화를 신호로 다른 여성 출연자들도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민호가 점점 비워지는 자리들을 보며 입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해영아, 나갈 거지?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인데.”
“글쎄.”
크리스마스이브든 뭐든 썩 끌리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담아 웃자 표정을 읽어 냈는지 민호가 금세 타깃을 바꿨다. 몸을 돌린 그는 이번엔 옆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재휘에게 물었다.
“형, 형은 좋지? 저번에 말한 중식집 이번에 가자.”
그새 말을 놓기로 했는지 민호가 애교 섞인 목소리를 꺼냈다. 커피잔을 홀짝이는 재휘를 해영 또한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던 그가 조용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그 선선한 대답에 민호의 얼굴에 환한 빛이 떠올랐다. 해영은 나가게 될 확률이 막 절반을 돌파했음을 깨닫고 말았다. 어쩌면 이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동안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김민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해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형님!”
그때였다. 민호는 방에서 막 나오던 선우를 보면서 다 같이 나가자고 물어 왔다. 어딘가 갈 곳이 있는지 집 밖을 나서려는 것처럼 옷을 차려입은 모양새였는데, 차선우는 그 물음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갈 거야? 입을 열어 묻지 않아도 그의 시선에서 물음을 읽어 낸 해영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의 고갯짓을 확인한 선우도 민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민호가 신나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금방 준비하고 오겠다며 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그를 보며 해영도 몸을 돌렸다. 나가려면 옷도 갈아입고 씻어야 했으니까.
“근데 선우 씨는 나가려던 거 아니에요?”
“…잠깐 일이 생기긴 했는데, 중요한 건 아니에요.”
등 뒤로 재휘와 선우의 짤막한 대화가 들려왔다. 그의 대답을 끝으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방의 문고리를 잡고 흘긋 바라보니 선우는 핸드폰을 쥔 채 어딘가에 연락을 보내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긴 했지만, 해영은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혹시 자신 때문에 선우가 선약을 취소하고 따라나서는 것은 아닐까 거만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는 곧 후, 하고 짐짓 가볍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재휘가 이전에 말했던 중식집은 정말 이 동네 안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택 단지를 내려가다 보면 있는 길의 끝에 있었다. 해영이 차에서 내리며 3층 높이의 가게를 올려다보았다.
부유한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집값 높은 동네여서 그런지 중식집마저도 쓸데없이 크고 우아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내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룸으로 안내받아 들어가자 흰 천이 깔린 원탁 테이블과 널따란 유리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분위기 좋다.”
방 안의 깔끔한 인테리어를 이곳저곳 살펴보던 민호가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해영은 잠시 기다렸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선우와 함께 의자를 꺼내 앉았다.
메뉴판의 첫째 장에는 점심과 저녁을 위해 준비된 코스 요리가 적혀 있었다. 가격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구성을 보면 해영도 종종 본 적이 있는 요리였다. 코스로 주문하자는 다른 이들의 말을 따라 그도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을 조금 늦게 먹었던지라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것이 무가치한 고민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대가 성인 남자 넷이었음을 간과한 결과였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테이블 위에 감돌던 미묘한 침묵도 요리가 하나둘 나오자 서서히 걷혀 갔다.
“근데 형님은 어느 회사 다니세요?”
“그냥 형이라고 부르세요.”
“아. 이게 입버릇이라. 불편하시면 형이라고 부를게요!”
민호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선우가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말에 민호가 멋쩍음을 드러내는 대신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선우도 그런 민호를 보며 나지막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해영은 기다란 접시 위에 올라간 전복 옆에 놓인 데친 채소를 입에 넣고 조용히 우물거리며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재휘에게도 곧바로 말을 놓고 형, 형 하던 민호가 선우를 더 어려워하는 건 신기했다. 누가 봐도 재휘 형보단 선우 형이 더 다가가기 쉽지 않나. 해영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곰같이 생기긴 했지만, 무표정일 때가 많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재휘 형에 비해 선우 형은 더 유한 인상이었고 웃음도 말투도 부드럽고 다정한데.
일단 선우는 곧잘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예쁜 눈가에 웃음기가 맺힐 때면 해영은 몇 번이고 본 미소에도 절로 움찔하며 굽는 손가락을 말아 쥐어야 했다. 사람이 너무 화려하게 생겨서 오히려 다가가기 힘든 거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민호의 물음을 자연스럽게 넘긴 선우가 되물었다.
“민호 씨는 모델이라고 했었죠.”
“네. 어디 속하진 않고 그냥 프리랜서로요. 가끔 컨택 온 거 받을 때도 있는데, 주로 했던 형님들이랑 일하고 그래요.”
“멋있네요.”
“멋… 은 형이 더 멋있죠. 와하하. 저 거짓말 안 하고 형 들어올 때 포스 때문에 연예계에서 일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종알종알 떠드는 민호를 향해 선우는 간간이 웃으며 그럴 리가요, 하고 대꾸해 주었다. 일 얘기와 여러 가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던 그가 끝내 테이블에 날카로운 날을 숨긴 화두를 던졌다.
“내일 데이트잖아요. 다들 어때요?”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그가 내내 던지고 싶어 하던 질문의 윤곽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민호가 은근히 선우를 눈짓하며 대화를 주도했다.
왜 그가 이런 물음을 꺼내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이 자리에 없으리라.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맑은탕을 마시고 있는 재휘라면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아무튼 그의 관심사는 소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도 내일 함께 그녀와 데이트를 할 선우일 테다.
전복을 집어 입가에 가져가려던 해영이 멈칫하며 대신 입을 열었다.
“재밌을 것 같은데.”
“해영 너는 세희 누나랑 데이트 가지? 어때. 괜찮아?”
괜찮냐는 물음은 애매했다. 제 기분을 묻는 건지, 상대가 마음에 드냐고 묻는 건지 뚜렷하지 않았으니까. 마찬가지로 ‘괜찮다’라는 애매한 답을 꺼내는 대신, 해영은 선우가 앉은 옆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좋아.”
“오…!”
민호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을 보니 경쟁자 하나는 줄었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하는 바가 곧이곧대로 드러나는 얼굴을 보며 해영이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입을 틀어막고 싶다는 충동이 들게 할 때가 많긴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
“형은요?”
그는 웃고 있는 얼굴 그대로 선우를 향해 몸을 슬쩍 기울였다. 저 정도면 은근슬쩍도 아니고 대놓고 떠보는 거 아닌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해영이 재휘가 열심히 먹고 있는 탕으로 시선을 주었다.
“나도….”
선우가 나직하게 대답하며 손을 뻗어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원판을 돌렸다.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탕을 국자로 뜨는 해영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민호를 바라보았다.
“괜찮지.”
애매한 물음에 대한 애매한 대답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으나 산뜻한 표정을 보면 긍정에 추가 기운 듯 보였다.
해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접시를 들어 맑은 국물을 삼켰고, 재휘는 저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며, 민호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지만 울상을 숨기며 애써 담담한 얼굴을 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고 있던 선우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재휘에게 물었다.
“nl소프트 다니신다고요. 그럼 최근 바쁘실 텐데.”
제게 향한 물음에 재휘가 먹던 것을 멈춘 채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대학 졸업 이후 기업 동태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는 해영은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고 남은 국물을 열심히 입으로 운반했다.
“제가 할 게 있나요. 저는 개발자인데. 그리고 요즘은 재택근무가 주라서요.”
회사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재휘는 평소의 멍한 기색은 떨쳐 낸 채 제법 뚜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뭔가를 준비한다고 말하는 걸 보면 상장 준비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대화의 흐름에 관심은 없었지만, 선우가 식사 자리에서 일 얘기를 하는 것은 처음 보는 해영으로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형 원래 저랬나….’
그에 관해 모르는 면을 발견하게 될 때마다 왜인지 기분이 묘해졌다. 내색하지 않고 식사를 마친 해영이 테이블 가장자리에 두었던 물티슈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어…, 고마워.”
재휘와 대화하다가도 선우는 자연스럽게 제 쪽으로 치우쳐져 놓인 티슈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며 입가를 닦은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민호는 눈을 껌벅이며 둘의 대화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민호가 원한 것은 이런 식사 자리가 아닐 것이 분명했는데도, 곧잘 경청하는 태도가 썩 웃겼다. 귀여운 자식. 해영은 원하는 답은 전혀 얻어 내지 못했는데도 금세 고민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꽤 마음에 들었다.
디저트까지 나오고 난 후 식사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맛있었다며 엄지를 치켜드는 민호의 옆에서 재휘도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일은 데이트가 있는 날이니 집에 돌아가면 밀린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해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은 당연하다는 듯 차선우가 했다.
***
오늘은 드디어 첫 번째 공식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고, 크리스마스였다. 집 안 곳곳에 장식된 겨울 분위기의 소품과 반짝이는 전구가 달린 트리가 아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라는 사실만으로도 설레는 날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공식적인 데이트를 나가는 이들은 더더욱 그렇게 보였다. 데이트 장소가 먼 곳으로 배정된 이들은 꽤 일찍부터 집을 나섰으므로 아직 2층에 남아 있는 것은 선우와 해영이 유일했다.
“형, 언제 나가?”
해영이 드레스 룸 안쪽에 있는 욕실을 향해 물었다. 선우의 대답 또한 담담하게 들려왔다. 점심 즈음 나갈 모양인 듯했다. 제법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하룻밤 사이 미련을 털어 냈다거나 아무렇지 않아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제 외출 후 돌아와 집에서 밀린 공부를 하다가, 저녁을 먹고 돌아온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늦은 밤까지 대화를 나눈 시간이 해영의 긴장을 한결 풀어 주었던 것이다.
선우보다 먼저 씻고 나온 해영은 머리를 말리다 말고 손을 내렸다.
“음….”
머리를 올릴지 내릴지 고민하며 거울을 노려보던 그는 결국 결정하지 못한 채 드라이어를 내려 두었다. 해영은 곧 방을 빠져나가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여자 출연자들이 사용하는 방 앞에 선 해영이 짧게 문을 두드렸다.
“해영 오빠?”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소윤이었다. 앞머리에 동그란 롤을 말고 있는 그녀가 열린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뺐다. 해영이 그런 소윤을 향해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 세희 누나 있지?”
“응, 불러 줘?”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소윤은 곧장 몸을 돌려 방 안쪽을 향해 외쳤다.
“언니! 해영 오빠가 불러.”
그녀는 세희를 불러 주곤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소윤이 떠난 빈자리에 세희가 다가와 섰다. 준비가 거의 끝난 차림의 그녀가 해영을 보며 반가운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건지 묻던 그녀는 곧 해영이 입은 옷을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내가 선물한 옷 입었네?”
기분 좋은 기색이 담긴 음성이 해영에게 닿았다.
“선물 받았으니까요. 저 괜찮아요?”
“뭘 물어. 어떡해, 너무 잘 어울린다. 역시 나… 보는 눈이 있어.”
세희가 손으로 턱을 짚은 채 해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어코 스스로의 머리까지 쓰다듬는 그녀가 웃겨 해영 또한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즐거워 보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해영이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용건을 꺼낼 차례였다.
“누나, 저 머리 올릴까요, 내릴까요?”
엉뚱한 물음에 그걸 물어보려고 온 건가 싶어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세희가 이번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가 경쾌해 안에 있던 소윤이 무슨 일인가 슬쩍 눈짓할 정도였다.
한참을 웃던 그녀가 자못 진지한 얼굴로 해영을 스캔하며 이것저것을 지시했다. 머리 올려 봐. 다시 내려 봐. 아니, 올려 봐. 하고 신중히 생각하는 듯하던 그녀는 마침내 툭 꺼내듯 말했다.
“둘 다 잘생겼는데?”
몇 번이나 머리를 만지게 시킨 것치곤 맥 빠지는 결론이었다. 진지한 표정과는 다르게 장난스러움이 담긴 대답에 해영이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진짜야.’ 하며 제 진정성을 강하게 표현하는 세희에 해영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씩 웃었다.
“그건 알고 있고, 누나 취향이 궁금한 건데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도 마찬가지로 장난스러웠다. 해영의 대답에 멈칫한 세희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윤해영은 이곳에 카메라가 달려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입에서 어쭈, 같은 말이 튀어나왔으리라 확신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올리는 거.”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세희가 내린 결정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이따 봐요. 하고 몸을 돌린 해영은 다시 2층으로 향했다.
인턴 출근을 하면서 매일 아침 머리를 만진 덕에 이제는 직접 머리를 하는 것이 제법 능숙해졌다. 해영이 드라이어를 잡고 약간 덜 마른 부분을 말리고 있는 사이 준비를 끝낸 선우가 다시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이 남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느긋한 자세로 입구에 섰다. 스프레이를 잡고 가볍게 흔들던 해영은 거울 너머로 선우와 눈이 마주치고 어색하게 팔을 멈췄다. 얼굴에 닿는 집요한 시선에 해영이 마지못해 말꼬리를 흐리며 물었다.
“왜….”
이마가 드러나게 머리를 손질하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선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머리, 내리는 게 더 예쁜데.”
“그래?”
해영이 솔깃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차선우가 그런 해영과 눈을 맞추며 옅은 웃음을 그렸다.
“올리면 얼굴이 다 드러나잖아.”
“…그래서?”
“그래서 싫어.”
“…….”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말에 해영이 멈칫했다. 잠시 옷 안쪽으로 힐끔 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제자리에 붙어 있는 마이크가 보였다. 하진에게 싹싹 빌어야 할 일이 늘어나 버렸음을 해영은 깨달았다.
왜인지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으니까.
선우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어딘가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단단하게 억제되어 있었다. 사근사근한 말투와는 다르게 표정도 썩 좋지 못했다. 저게 지금 웃는 거야 마는 거야…. 그의 표정을 읽어 내리던 해영이 올리려던 머리를 다시 빗으로 빗어 내렸다.
세희에게는 머리를 하다가 망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이해해 줄 것이다. 해영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 손질을 끝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이내 거울의 맞은편에 있는 옷 방으로 들어가 안쪽에 걸어 둔 코트를 꺼냈다.
겉옷까지 입은 해영이 드레스 룸 밖으로 나설 때였다. 선우가 들고 있던 것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해영아, 밖에 추우니까 이거 하고 가.”
그가 내민 것은 익숙한 목도리였다. 어두운 톤의 짙은 남색 목도리. 윤해영은 그게 뭔지 못 알아볼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그에게 선물한 것이었으므로.
여기서 볼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물건에 해영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덜컹거렸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그가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를 꺼냈다.
“아냐, 괜찮아.”
“코트 입었잖아. 오늘 추운데.”
선우가 코트 위로 드러난 목덜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해영의 목 주변으로 길게 풀어진 목도리를 감았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해영은 제가 줬던 선물을 다시 자신의 목에 걸어 주는 그의 행동에 이상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하겠다고 해야 하는데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고, 장난스럽게 넘겨야 하는데 도무지 장난스러운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하얘진 머리를 핑핑 돌리는 해영과 시선을 맞춘 선우가 눈을 접어 웃었다. 익숙할 정도로 다정한 눈웃음은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동시에 이유 모를 안도감을 가져왔다. 점차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런 해영에게로 선우가 나긋하게 말했다.
“이거 소중한 거니까 꼭 돌려줘.”
“비싼 건가 보네. 밖에다 팔아 버리고 와야겠다. 윽.”
“그러기만 해.”
그가 목도리의 매듭을 짓다 말고 손에 힘을 주어 목을 답답하게 조였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는데도 과장되게 몸을 움츠린 해영이 웃는 낯으로 단호한 표정을 짓는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서서히 떨어져 나가는 흰 손을 따라 자연스레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보인 것은 제 목에 걸린 천 뭉텅이였다. 뭉텅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선우가 묶어 준 목도리의 꼴을 발견한 윤해영은 왈칵 미간을 찡그렸다.
“형 장난해? 누가 목도리를 리본으로 묶어.”
기가 찬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으나 차선우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장난한 것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좀 덜 멋있었으면 좋겠어, 윤해영. 근데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그의 입가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짜 돌겠네.”
데이트를 해도 좋으니 연애만 하지 말라던 차선우는 자신이 데이트를 간다니까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해영이 입을 비죽거리며 목도리 위로 손을 올렸다.
“다시 해 줄게.”
“됐어. 내가 하면 돼.”
“나 못 믿어, 해영아?”
하. 그의 물음에 해영이 결국은 소리 내어 헛웃음을 흘렸다.
어지간하면 그를 믿는다고 답했을 테지만, 이 집에서 살면서 차선우의 말간 얼굴에 몇 번이나 속아 넘어갔던 것을 해영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놓고도 뻔뻔하게 저를 못 믿냐는 말을 꺼내는 그를 보며 해영이 리본 모양으로 묶인 목도리를 풀어 헤쳤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엉터리로 묶은 매듭인데도 왜 곧장 풀리지 않는 건지 손끝이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목에 목줄이라도 걸린 느낌이었다. 해영의 얼굴이 설핏 찡그려지자 가만히 지켜보던 선우가 팔을 뻗어 손쉽게 매듭을 풀어냈다.
“형은 회사 다니지 말고 한번 출마해 봐. 형 신뢰도 보니까 정치인감이야.”
“믿음직스러워?”
“아이 씨. 그래, 됐다.”
알아들어 놓고. 목도리를 다시 목에 두르며 해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옷깃을 정리하고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선우가 담겼다.
“해영아, 잘 다녀와.”
그 말에 윤해영은 끝까지 이상한 기분으로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처럼 마냥 서글픈 것만은 아니었으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마음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같았다. 전 애인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받으며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러 가다니. 여태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불편한 것 같기도 했고, 어쩐지 웃긴 것 같기도 했고, 언뜻 미안함도 고개를 들었다.
“형도… 잘 다녀와.”
제게 작게 손을 흔들어 주는 선우의 흰 얼굴을 보며 해영도 나지막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때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선우를 지나친 그가 문고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는 순간 본 선우의 표정은 흐릿했으나 해영의 눈에는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그 검은 눈동자가 어쩐지 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
오랜만의 운전에 바짝 긴장했던 해영이 주차를 무사히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데이트 장소는 서울 외곽에 있는 아이스 링크였다. 크리스마스라서 사람이 많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없어서 의아했는데, 시간별로 예약을 받아서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스 링크를 독점하게 된 해영과 세희가 스케이트로 신발을 갈아 신은 채 아이스 링크 입구 앞에 섰다. 날이 날카롭긴 했지만, 맨땅에서 중심을 잡고 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선우 형이랑은 한 번도 스케이트장에 와 본 적 없네. 무의식중에 선우를 생각하던 해영이 지레 놀라며 생각을 떨쳐 냈다.
그가 아닌 다른 이와 하는 데이트가 익숙한 장소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 본 적 있는 장소에 갔더라면 더 짙은 추억에 잠겼을 테니까. 입에 감도는 씁쓸함을 삼키며 해영이 먼저 빙판으로 올라섰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따라서 빙판 위로 오르는 세희를 향해 말했다.
“스케이트장 오랜만에 와요. 어릴 때 오고 거의 처음인가.”
제법 능숙하게 몸을 세운 그녀는 이내 자신을 보며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애인이랑 데이트하면서 안 와 봤어?”
그 말에 멈칫한 해영이 당황을 숨기지 못한 낯으로 세희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선우를 생각하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에 지레 찔렸던 것이다.
다 알면서…. 조금의 억울함이 속에서 찰랑였다. 알면서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그녀가 짓궂게 느껴졌던 것이다. 세희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기를 훑던 그의 시원시원한 눈매가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누나는 와 봤어요?”
“나는 와 봤지.”
대답은 거침없었다. 그렇게 여과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오히려 해영이 놀랄 정도였다.
아무리 자신에게 연애 감정이 없다지만, 그래도 촬영 중인데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금세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며 세희가 키득키득 웃었다.
“친구랑.”
이어 뱉어진 대답에 해영은 그녀가 장난을 쳤다는 것을 눈치챘다. 웃음기가 여실히 밴 목소리에 긴장해서 빳빳하게 들고 있던 머리가 툭 떨어지듯 앞으로 기울었다.
눈앞으로 흩어지는 머리칼 사이로 해영이 힐난하듯 세희를 주시했다.
“…누나 치사해요.”
“아하하하.”
기어코 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손을 들어 해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익숙하게 앞장서서 스케이트를 타는 세희를 따라 해영도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미끄러지듯 빙판 위를 달린 그가 앞서가던 세희를 여유롭게 따라잡았다. 손쉽게 제 옆으로 다가온 해영을 보며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왔다는 거, 거짓말이지? 너무 잘 타잖아.”
“저 원래 운동은 다 잘해요.”
해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담백한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밉지 않게 부리는 허세에 세희도 피식거리며 따라 웃을 정도였다. 곧 제 옆에서 느긋하게 달리는 해영의 팔을 손으로 슬쩍 찌른 그녀가 돌연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럼 누가 더 빠른지 보자. 시작!”
멋대로 시작을 외쳐 놓고 달려 나가는 그녀를 보며 해영이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희는 정말 조금도 봐주지 않고 힘껏 빙판 위를 가로질렀다. 그 속도에 들썩이듯 휘날리는 긴 갈색 머리칼을 멀뚱히 바라보던 그 또한 뒤늦게 속도를 높였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스케이트 시합의 승리는 정해진 듯이 세희에게로 돌아갔다. 한겨울의 빙판 위에서 더운 숨을 내쉬는 그녀의 옆에서 해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고 나서 향한 곳은 식당이었다. 크리스마스답게 식당으로 향하는 골목에는 곳곳이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이 있어서, 두 사람은 걷는 내내 힐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꾹 삼켜야만 했다. 제작진들이 원했던 것도 저것과 비슷한 그림이었을 텐데, 서로의 사이에 아무런 긴장감이나 설렘도 맴돌지 않는 게 제법 웃겼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찾아간 식당은 양식 위주의 파인다이닝이었다. 크리스마스여서인지 연말 분위기가 나게 장식된 가게에는 이번에도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해영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가게 안을 둘러보며 제작비를 꽤나 많이 들였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크리스마스 같네.”
의자에 외투를 벗어 내려놓으며 세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해영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가 나오지 않아 비어 있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해영이 물을 따라 세희의 앞으로 건넸다. 고맙다고 눈짓한 그녀가 물을 홀짝이곤 물었다.
“오늘 재밌었지.”
“네, 재밌었어요.”
해영이 제 컵에 물을 따르다 말고 시선을 들었다. 슬쩍 입가에 걸리는 웃음과 흔쾌히 끄덕여지는 고개를 보며 세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당연하다는 듯 뱉어진 대답에 해영은 첫 번째 데이트가 그녀와 걸려서 다시 한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각오하고 출연한 거긴 하지만, 순수하게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출연자와 데이트를 하게 됐다면 미안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 또한 연애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출연했다며 스스럼없이 밝혀 준 세희가 고마웠다. 해영은 그녀와 있는 시간이 불편하지 않았다.
촬영하는 카메라를 의식해 진솔한 대화는 할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술을 마시지 않았으므로 해영은 다시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겨울은 해가 일찍 지는 계절인 탓에 집 근처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이미 하늘에 보랏빛의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끄자 세희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따라 내리던 해영은 잊고 있었다는 듯 짧은 탄식을 흘렸다.
“아. 잠시만요, 누나.”
“응?”
차 뒷문을 연 그가 안쪽에서 작은 쇼핑백을 꺼냈다. 손에 걸린 흰 종이 백에 박힌 로고가 익숙해서 세희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을 때였다.
그녀에게로 다가간 해영이 잊을 뻔했다는 말투로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이요.”
“뭐? 어, 진짜…? 진짜로?”
세희가 얼떨떨하게 해영이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선물을 받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뭐냐며, 평소처럼 쾌활하게 웃으며 받아 줄 줄 알았던 그녀가 지나치게 놀란 모습에 해영이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누나도 저한테 선물 줬으니까요.”
“이거 좀… 뜻밖이야.”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곧 익숙한 웃음을 흘렸다. 평소와 같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희를 보며 해영 또한 마음을 놓고 가볍게 웃었다.
세희는 얼른 방에 돌아가서 열어 보고 싶다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해영은 그 뒤를 천천히 쫓아 걷다, 이내 그녀가 벽이라도 만난 듯 걸음을 멈추자 따라 멈추어 섰다.
“어….”
세희의 입에서 당황을 가득 담은 음성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이전의 당황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보다 더 창백해져 얼어 버린 것은 해영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형.”
집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서 있던 선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바보같이 떨리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누가 봐도 곤란해하는 해영과는 다르게 그는 잠시 해영을 바라보다 이내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다녀왔어?”
그 다정한 인사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분명했다. 세희가 어색하게 끊기는 웃음을 흘리며 태연한 척 대답하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빠른 퇴장에 계단 앞에 남은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먼저 들어가, 해영아.”
“…….”
“나는 잠시 나갔다 오려고.”
그는 손을 들어 올려 쥐고 있던 차 키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쉬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해영을 보며 선우가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속상하게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응?”
주저하는 마음을 안다는 듯 흘러나온 낮은 목소리가 해영에게 무겁게 내려앉았다. 굳어 있던 해영이 고개를 끄덕이곤 도망치듯 걸음을 뗐다. 괜찮냐는 물음도, 미안하다는 말도 모두 기만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뒤에서 날아온 시선이 끝까지 따라붙었다.
쉬지 않고 곧장 2층으로 올라온 해영은 공용 공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을 뒤로한 채 바로 방문을 열었다. 겉옷도 벗지 않은 채 욕실로 향한 그가 세면대를 붙잡고 물을 틀었다.
쏴, 거칠게 쏟아지는 물길을 노려보는 시선이 마치 돌덩이가 된 것 같았다. 뼈가 도드라질 만큼 꽉 세면대를 쥔 손가락 위로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한참을 손을 적시다 억눌린 한숨과 함께 얼굴을 씻어 낸 해영이 물기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침실로 나왔다. 성큼성큼 뻗어지는 걸음은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여유가 없었다.
침대 옆에 놓인 가방을 연 그가 안에 있던 쇼핑백을 꺼냈다. 멀끔하게 포장된 쇼핑백 안에는 세희에게 줄 선물을 고르던 날 함께 고른 향수가 들어 있었다.
그건 1년 가까이 한 번도 돈을 허투루 써 본 적 없던 해영이 처음으로 사치를 부려 구매한 물건이었다. 원래는 퇴근길에 세희의 선물만 사고 나오려 했으나, 걸어가다 코끝을 스친 익숙한 향에 저도 모르게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충동적인 구매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영은 제 행동을 자책하며 얼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걸 든 채 선우의 침대로 다가간 해영이 머리맡에 멈춰 섰다. 머뭇거리며 침대 위로 쇼핑백을 내려놓은 그가 입을 꾹 다문 채 덩그러니 놓인 제 선물을 노려보았다. 한동안 침묵 속에서 서 있던 해영이 결국 다시 손을 뻗어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하.”
참았던 숨을 토해 낸 그가 다시 몸을 돌려 돌아와 가방 안에 쇼핑백을 쑤셔 넣었다. 거칠게 욱여넣느라 처음과는 다르게 꾸깃해진 채로 가방에 박혀 있는 물건을 바라보던 해영이 결국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발. 그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삼키며 팔에 얼굴을 묻었다. 젖어 있던 얼굴 탓인지 눈가에 닿은 옷이 젖어 들어갔다.
멍청하게 왜 샀을까, 주지도 못할 거. 주면 안 되는 게 맞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방금 보았던 그의 웃음이 걸려 해영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내색하지 않는 슬픔은 결국 두 사람을 상처 입힌다.
선우는 먼저 집에 돌아올 때면 늘 불을 켜 놓은 채로 자신을 기다렸다. 환한 방에서 웅크려 앉은 채 해영은 제 초라함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윽….”
해영이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정작 마음이 쓰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게 누군데, 바보 같은 차선우는 오히려 저를 달랬다. 형이 상처받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들끓었다.
끝을 고한 주제에 상대를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욕심이고 위선이었다. 가난한 마음이 누군가를 닮아 다정한 조명 아래서 발가벗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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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싹 긁어옴...ㅎㅎ
(댓글 26개)
정성추
└222
정성추! 고생했어!
존나고마워 이미 봤던 장면인데도 또설레네
└22ㅋㅋㅋㅋㅋㅋㅋㅋ개저웃음 지으면서 스크롤내림
얼굴합 너무 좋다ㅠㅠ 세희 윤신영 닮았어 넘 예뻐
└윤신영 ㄹㅇ
└윤신영에다가 박지유 느낌도 있는듯
아진짜 좋다 둘이 순정만화 찍어...ㅠ 웃는거 왤케 예뻐 둘다??
얼빡샷 나도 모르게 계속 보고잇게되네..ㅋㅋ
└ㅇㅈ스크롤 정지 구간이야 ㅋㅋㅋㅋㅋ
머리 올릴까요 내릴까요 윤해영은 솔직히 대본아냐?
└대본 인정 저런 대사를 그냥 뱉을 수가 없어
└미쳣음 저 질문하는데 하필이면 얼굴 클로즈업되가지고 존나 발림
└저래놓고 세희가 둘다 잘생겼다니까 알고있다면서 누나 취향이 궁금한데요? 이러는것까지 백퍼 대본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대본이어도 넘어갔다ㅎㅎ
└이게 ㄹㅇ임 저순간 패널들 표정이 내 표정이야 발칙한 연하남ㅋㅋㅋㅋㅋ
누나 취향이 궁금한건데요... 드르륵 탁
누나 취향이 궁금한건데요... 드르륵 탁
누나 취향이 궁금한건데요... 드르륵 탁
와 ㅈㄴ 잘생겼다 그냥 현실설렘이야..
넘좋다ㅠㅠㅠㅠㅠ 정성추 고마워!
해영세희 데이트 귀여워
스케이트장이면 서로 손잡고 끌어주면서 몽글몽글한 분위기 내야하는거 아님? 아무리 그래도 썸인데ㅠ 뭐 저렇게 둘다 전력질주하냐고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중에 서로 보면서 웃는데 저게 뭐라고 설레냐...
(댓글 12개)
세희가 애인이랑 스케이트장 데이트 안해봤냐고 물어볼 때부터 이미 끝났음ㅋㅋㅋㅋㅋㅋ
└나도 여기서 같이 끝남 해영이 세희한테 말리는데 또 은근히 지지 않음.. 이게 바로 연하의 맛..?
└22여기서 연하남 매력을 알아가네ㅠ
해영이 도착할 때쯤에 일부러 벽 붙잡으면서 속도 늦추는거 보고 걍 미쳤다 생각했어ㅋㅋ 그대로 갔으면 이기는거였는데
└그리고 다음에는 안진다고 말하는거까지 레전드... 은근슬쩍 다음 약속 잡는거 맞죠?
└여우임... 연애프로만 하면 여출 여우타령 뇌절하는데 럽라에선 안나오는거 봐 남출이 다 해먹고 있어서 ㅋㅋㅋ
둘이 서로 힐끔거리면서 눈 마주칠 때마다 웃는거 하오츠하오츠
└ㅇㅈ냠냠굿~
└드라마 그자체임....ㅋㅋ 데이트 시작 전부터 끝까지 제일 재밌음 해영세희는 된다
└해영세희 서사 더줫으면 좋겠어ㄹㅇ 작진들아
차선우 데이트 섹시하긴 했는데
이건 솔직히 얼굴이 다했다고봄 민호다인 데이트가 제일 노잼이었다는 아래글 보고 글찌는거 맞음ㅇㅇ
소윤이는 둘째날부터 계속 선우한테 문자보냈고 데이트하는거 보면 선우한테 마음있는거 빼박임 근데? 선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하고 매너는 있지만 소윤이한테 연애 상대로 호감이 있어 보이느냐 하면 객관적으로 아님...
선우는 모든 여출한테 저정도 온도로 대함ㅇㅇ 딱 끌리는 사람도 없어 보이고 (물론 아직 많이 진행되진 않았지만) 오히려 민호는 소윤이 보자마자 반했으니까 다인이한테 영혼없는거 이해가
근데 선우는 내가 볼 때 머니캐처임... 결론: 소윤아 민호 잡아....
(댓글 34개)
머니캐쳐 인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ㄴㅋㅋㅋㅋㅋㅋㅋㅋ
내말이 이말이라니까ㅋㅋㅋㅋㅋ 민호가 다인이한테 마음 없어보이는건 딱 보이는데 선우는 아리까리할 때마다 갑자기 얼굴 클로즈업하면서 배경음악 깔아줌... 그럼 그냥 홀려서 나도 소윤이 심정으로 보고있어ㅋㅋㅋㅋㅋㅋㅋ
└ㅅㅂ이게 맞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럽라음감 유독 열일해 물론 좋은뜻..ㅎ
얼굴이 너무 미슐랭이라 재밌음
└ㅇㅈ 소윤이가 하는 말 전부 집중해서 들어주고 웃을 때마다 쳐발려...ㅋㅋ
이게 딱 내가 보면서 느낀 감정이야... 소윤이가 반한건 딱 보이는데 선우는? 그닥?
아직 초반인데 머니캐처라는건 넘 궁예인듯...ㅜ 이런 프로그램 나왔다는건 인지도를 쌓으려는 목적이 없지 않을텐데(일반화하려는건 아님!) 선우는 직업도 그냥 회사원이랬고 인스타도 딱히 없는걸 보면 그런데 욕심없이 출연한것 같음....
└보통 이런 프로그램은 인스타 디엠으로 컨택하지 않나??
└나도 잘은 모르는데 꼭 그런 경로만 있는건 아니지 않을까?
└와 인스타 없는건 몰랐다ㅋㅋㅋㅋㅋ 대체 어떻게 섭외한거지
선우픽 해영이라 그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 인정
└22구라안치고 해영이랑 출근전에 밥먹을때 제일 눈에서 꿀떨어짐
└존나웃겨 썸프로 출연해서 같이밥먹고 같이출근하는 남자들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쿠ㅜㅜㅜㅜㅜㅜ
소윤이 뭔 맘인지 알겠어 나라도 선우 좋아할듯...ㅋㅋㅋㅋㅋ 처음 등장하는 장면부터 분위기가 달랐어 무명연예인일줄 알고 인스타 뒤졌는데 안나오더라...
└무명이기엔 와꾸가 무명일수가 없는데...
└ㅇㅈ근데 일반인인건 더 이상해
Loss???? @loss_in_bisette ·202X.2.18
못참고 만들었어요 럽라 과몰입계 @Lossluvline 근데 주로 여출얘기+선우해영 얘기함 자물쇠 걸어 놓을게요ㅋㅋㅠㅠ
???? 2 ↺ 18 ♡ 47
LOSS???? @Lossluvline ·202X.2.18
2화 보고 참을 수 없어짐 밥먹으려다가 선우랑 눈마주치고 밥먹고 가라고하는 해영이 귀여워 죽ㄱ겠음...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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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99
│
ddoddo???? @lovelovedo
솔직히 밥먹는 장면 풀로 공개해줘야하는거 아닌가 조용히 밥만 먹진 않앗을거 아니냐고요 제작진들 이렇게 시청자 마음을 몰라...? 하..
│
LOSS???? @Lossluvline
왼손잡이인건 어떻게알고 〈여기 뒷장면 어디감? 소신발언... 해영이 쳐다볼 때 선우 눈 반짝이는데 저거 눈물인 거같애
LOSS???? @Lossluvline ·202X.2.18
이 장면 화질 구리긴 한데 선우가 해영이 넥타이 매주고 있는거 맞지??? 과몰입을 안할래도... 분량 소멸한 선우가 유일하게 찍힌 투샷이 전부 해영이랑이라는게...ㅋㅋㅋ 얘네 뭐하냐 왜 둘이 연애하냐
(2220218922.gif)
???? 10 ↺ ♡ 158
│
쿠로밍 @onandonooi
내가 뇌절하려는게 아니고 얘네는 진짜 사랑을해
(125718.jpg)
LOSS???? @Lossluvline ·202X.2.18
진짜 지독하다...ㅅㅂ
이성애 프로에서 꾸역꾸역 호모착즙하는 나 vs 이성애 프로 출연해서 꾸역꾸역 지들끼리 사랑하는 선우해영
후자압승
???? ↺ ♡ 85
↺ LOSS님이 리트윗했습니다
hikikuu @likehikiiw ·202X.2.25
나 썸프로 안 본 게 없을 정도로 많이 봤는데...
이렇게까지 남출들끼리 케미 만드는 건 럽라가 처음이야.. 보통 남자들끼리 저런 텐션으로 서로 목도리 매줘? 아무리 친한선후배사이라고 해도? 이와중에 선우씨 목도리 리본으로 묶은거ㅆ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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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980 ♡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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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해 @arraddo_
이러고 세희언니랑 간질간질한 데이트 하고오는 윤해영 유죄 존나유죄 내가 말했지... 헤남이 호모 젤 잘만든다고
│
JW @ja_e_yun
해영이 최종선택이 젤 궁금해 선우인지 세희인지
│
hikikuu @likehikiiw
아니 은근슬쩍 선우 끼는게 개웃기네ㅠㅠ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리얼임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내 머리 내리쳐서 막방 때 깨워줘
│
미미???? @deliciousmim
넥타이 매주는 차선우에 이어 목도리 매주는 차선우 이거 자기거라고 목걸이 채워두는거 아님??? (ㅈ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