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라인 1권
프롤로그
- 해영아, 누나 급한 거 알잖아. 비주얼이 필요해서 그래.
“관심도 없고 무엇보다 바빠. 누나도 알잖아. 로스쿨 방학은 진짜 방학이 아니라니까? 나 지금 실무 수습도 하고 있고.”
- 너…. 윤해영, 내가 너 급할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등록금 빌려줬지. 그때 차선우가 의심할 때 난 끝까지 입 다물고 있었다?
“…….”
차선우.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이름에 해영은 저도 모르게 꾹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에 하진은 자신의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조기 졸업 후 1년 만에 방송국 취직, 그 어렵다는 언론 고시를 한 번에 통과해 학교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걸었던 인재가 바로 하진이었다. 3사에서 몇 년을 버티다 갑자기 HBC로 이직한다기에 사내에서 무슨 괴롭힘이라도 당한 건가 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옮기자마자 바로 예능 프로그램 편성을 받아 온 것이 아닌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전해 온 소식에 축하해 주기도 잠시였다. 그게 무슨 짝짓기 형식의 프로그램이라는 데에서 해영은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물론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한 번도 관심 가져 본 적 없는 소재라 생소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것을 가장 잘 챙기는 사람이 바로 이하진인데 걱정은 무슨.
해영은 제법 자신만만해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어련히 잘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녀의 새로운 도전에 자신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하진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면 해영은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해영에게 있어 의미가 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제게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고 제안해 오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왜 나야.”
- 남자 출연진 캐스팅이 너무 어려워. 오죽하면 내가 너한테 이런 부탁을 해? 얼굴 좀 반반하다 싶으면 창놈 같고, 스펙 좀 괜찮다 싶으면 뒤가 구리고. 여자 출연진이랑 더치 페이스가 되어야 보는 사람들도 이입을 하지. 해영아, 내 이름 들어가는 프로그램에 하자 있는 걸 쓸 수는 없어.
창놈…. 노골적인 단어 선택이었다. 해영이 피식 입 밖으로 웃음을 흘렸다.
“하자라면 나도 만만치 않은데.”
- 죽을래? 곱게 키운 내 새끼한테 그런 발언 삼가라.
가볍게 뱉은 자조에 하진이 단박에 목소리를 깔았다. 곧장 달려와 주먹이라도 뻗을 것 같은 단호한 엄포에 해영이 넵, 하고 고분고분히 대답했다.
장난스럽게 말하기는 했지만, 해영은 진심이었다. 진심이라는 걸 알아서 그녀 또한 웃음기 없이 대답한 것일 터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던 하진은 차선우를 제게 소개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같은 과니까 서로 알고 지내면 좋지 않겠냐며 다리를 놔 줬던 게 아마,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지.
자신보다 세 살 많았던 차선우는 신입생의 눈에 너무 어른스러워 보였고, 그 태가 남다른 외관 때문만이 아니라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나긋한 목소리, 다정하지만 이따금 숨기지 못하고 배어 나오는 짓궂은 태도, 웃을 때면 문득 보이는 소년스러움까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 그는 태생적으로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같은 학번 동기들의 이름도 다 외우기 힘든 경영학과에서 차선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윤해영은 그런 차선우와 5년간 길다면 긴 연애를 했다. 지금은 비록 헤어진 지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해영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을 바꿔 들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은 아래로 내린 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고작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도.
차선우를 잊을 수 있을까? 평생 뺄 수도 존재를 잊을 수도 없는 파편을 가슴팍에 꽂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건 하자가 있는 게 맞지 않나?
그것 말고도 가지고 있는 하자는 또 있었지만, 해영은 꽉 주먹을 쥐는 것으로 무거운 생각들을 털어 냈다.
- 너 아직 차선우 못 잊은 거 알아.
그런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 담담하게 꺼낸 하진의 목소리에 해영이 멈춰 섰다. 하진은 제게 차선우를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그와의 연애 사실을 알고 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해영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가를 쓸었다. 동시에 멈췄던 발도 다시 느릿하게 떼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화기 너머에서는 하진의 목소리가 종알종알 흘러나오고 있었다.
- 내가 여기 너 연애하러 나오라는 거 아니야. 야, 여기 진짜 연애하려고 오는 사람이 있을 거 같아? 다 자기 홍보하려고 오는 거야. 가게, 쇼핑몰 홍보하고, 무명 배우가 얼굴 알리고, 돈 많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인스타 팔로우 늘리려고 나오는 거라고.
“나는 별로 얼굴 알리고 싶지도 않아.”
그가 설핏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얼굴을 알린다니 그럴 이유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관심 있는 건 오직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들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는 것뿐이었다.
하진은 해영이 이렇게 나올 걸 예상했다는 듯 숨겨 왔던 카드를 꺼내 들었다.
- 출연료 천.
“뭐?”
다시 한번 발이 멈췄다. 수화기에서 들려온 금액을 쉬이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천? 천이라고?
해영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예능 프로그램에,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한집에서 살면서 연애 기류를 만들어 내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제가 연애하는 걸 보여 줘야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꺼려졌지만, 그는 돈이 필요했다. 그러던 와중에 하진이 꺼낸 제안은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천만 원이라니….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월급으로는 하루아침에 모을 수 없는 액수일 것이다.
곰곰이 따져 보던 해영이 이윽고 하진을 불렀다.
“거짓말이지? 누나, 장난하는 거 아니고 진짜 천만 원?”
해영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미세하게 높아졌다. 살짝 뜬 목소리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하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 내가 돈 가지고 장난하는 거 봤어? 예산이 아직 정확히 나오진 않았는데 최소 천부터인 건 확실해.
흔들리는 마음에 쐐기를 박아 넣듯 하진이 사근사근하게 말을 이었다.
- 너 실무 수습 하는 거 절대 방해 안 해. 촬영에 관해서 먼저 양해 구하고, 안 된다고 하면 출퇴근 장면만 찍을게. 촬영 기간 한 달이고 길어져 봤자 4주 이내야. 그동안 숙식 알바 투잡 뛴다고 생각해.
“음….”
- 그냥 새로운 사람들 만나서 환기나 좀 하는 거라니까. 물론 프로그램이니까 시키는 건 좀 해 줘야지. 그래도 데이트 몇 번 하고 그런 거 빼면 남는 시간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
머릿속에 있던 저울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들은 출연료의 무게가 제법 나갔던 것이다. 길어지는 침묵에서 해영이 거의 넘어왔다는 걸 눈치챈 하진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 너 전에는 여자 친구도 있었고, 여자랑 어울리는 게 껄끄러운 것도 아니잖아. 누나 한 번만 도와줘, 어?
“출연하게 돼도 누구를 좋아하진 못할 텐데.”
- 그건 모르는 일… 아니다. 그래, 대충 분위기만 맞춰 줘. 케미는 편집으로 살릴 테니까. 그럼 너 출연한다는 거지? 나 네 이름 넣어서 결재받는다?
“…그래.”
주저하던 해영이 끝내 돈에 굴복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념을 앞세워 거절하기엔 지나치게 큰 액수였다…. 한 달 광대 짓 해서 천만 원이 들어온다면, 기꺼이 할 의향이 있었다.
윤해영은 돈이 필요했고 제법 간절했다. 가난 앞에서 사람은 쉽게 초라해지고 궁지에 몰리곤 하니까.
- 고마워! 고마워, 윤해영! 누나가 촬영 끝나고 맛있는 거 사 줄게. 아, 이 예쁜 자식!
급기야 수화기 너머로 쿵쿵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요란한 소음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리고 있다 보니 곧 다소 진정한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만 끊을게, 하는 통보와 함께 답도 듣지 않고 뚝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게 그녀다웠다.
그는 끊긴 전화를 잠시 내려다보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찔러 넣었다. 휴학 상담을 위해 학교로 가는 중이었는데, 순식간에 상담의 목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교수님께 밥이나 얻어먹을까. 해영이 허기진 배를 쓸어내리며 학교의 정문을 넘었다.
졸가리만 남아 유독 쓸쓸해 보이는 벚나무를 보며 윤해영은 한숨을 삼켰다.
대학원은 타 대로 갈걸. 이 학교는 선우 형과의 추억이 너무나도 많았다. 대학 시절을 고스란히 함께 보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하진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 아마 높은 확률로 선우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사람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지. 자신이 나왔다는 말에 찾아볼지도.
형은 스크린 속의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헤어지자고 먼저 이별을 고했던 사람이 하기에는 제법 구질구질한 망상이었다. 해영은 짧은 조소와 함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선우의 얼굴을 애써 지워 냈다.
이미 깊이 새겨진 것을 지워 내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막 헤어졌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바로 편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선우가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스물여섯의 윤해영은 이제 차선우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