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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건 몰라도 한가지만큼은 확실하네요.
간만에 필력이 돌아왔습니다.
옛날처럼 하루 한편이 가능해지네요."그래, 바크오 프류나드의 후손이라고?"
"예. 셜리 프류나드라 합니다."
요새의 책임자이자 지휘관, 오리아 백작은 바크오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일반병을 개인 심문하기 위해 자신의 오두막으로 불러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셜리의 모습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평민이라고 보기 힘든 깨끗하고 오밀조밀한 얼굴, 자연스래 기품이 나오는 무의식적인 작은 동작들, 그리고…….
"자네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는…확실히 나의 수준을 넘어섰군……."
오리아가 가진 기사로서의 재능은 뛰어난 편이며, 중년의 나이가 되면서 더이상 성장하기 힘든 완성된 무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이스터와 승부를 하면 지긴 지겠지만, 최소한 죽기전에 마이스터의 팔다리 하나 정도는 잘라낼 수 있는 실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그녀가 셜리의 기세를 느끼자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기운은 왕국에 존재하는 마이스터급 기사보다 동급, 혹은 한 수 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더욱 놀라운것은 그녀의 기운이 아직 제대로 갈무리 되지 못한, 쉽게 말하자면 아직 미완성의 무인이라는 뜻이다.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왕국 최고의 기사에 비등한 기운을 가진 젊은 무인. 오리아 백작은 사지死地인 제로 랜드의 토벌대를 자진해서 맡을 정도로 충성심이 강하였기에 그녀가 바크오의 후계자든 아니든간에 국가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인재라는데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의문은 해결해야만 한다.
"자네의 실력은 분명 나보다 윗줄이네. 그런데 어째서 일개 병사로서 활약하였는지 이해가 안되는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반병으로 위장했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나는 자네의 대답 여하에 따라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압하거나 참살하기 위해 검을 들수 밖에 없어."
"…위장이 아닙니다. 분명 제가 바크오의 후계자이긴 하지만, 조상님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패라던가 증표를 만들지 않으셨고, 그 분의 기술은 전설속처럼 휘황찬란한게 아닌지라 저 스스로 바크오의 후손이라 주장해봤자 남들은 겉멋만 허풍쟁이라 여겼을 겁니다."
"흐음……."
확실히 마왕강림때 활약했던 바크오의 진정한 힘은 무기나 마법 아이템도 아닌 특이한 마나 라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그것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원래 마나 라인 이라는것은 '마나가 지나가는 길' 을 신체 내부에 만드는 것이다. 즉, 마나 라인 수련서라는 것은 자신의 몸속에 마나가 흐르는 회로를 '새겨넣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과서에 불과하다.
삼태극 국가에서는 단전을 통해 내공을 끌어모은다면, 로카스트의 기사들은 몸에 마나가 통하는 길을 만들어 능력을 발휘한다.
어떤 형식의 마나 라인을 만드느냐에 따라 힘이 강해질수도 있고, 스피드가 강화될수도 있지만, 현재 로카스트 내의 기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밸런스형 신체 강화와 아케인 소드(검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효율적이고 보편적인 마나 라인이다.
옛날에는 마법 무기가 흔하였기에 힘이나 스피드의 강화만으로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마법 무기가 귀해지면서 인간들은 평범한 검을 일시적으로 그에 준하는 무기로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공격력을 강화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단지 문제는 옛날엔 개성적이고 자신의 재능에 따라 선택해왔던 마나 라인이 지금은 보편적인 방식이 되어 마치 현대 주입식 교육처럼 똑같은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이 각자의 개성을 죽이고 말았다.
어쨌든, 마왕강림때 다른 국가에서도 수많은 영웅들이 참전하면서 그 사건을 계기로 삼태극의 영웅들과 교류하게 된 로카스트의 영웅들은 인체에 혈도라는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혈도를 건드는 방향, 힘의 강약 수준에 따라 마나 라인의 힘과 종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크오는 그 중, 가장 먼저 마나 라인과 혈도의 조합을 성공시켜 영웅이 된 케이스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아직 자신에게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은 그는 곧바로 은거에 들어가고 말았고, 특별한 보물이라던가 재산, 가문같은게 없었기에 프류나드라는 성만 받으면서 후손인 셜리는 영웅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전설속에서 등장하는 문구에 의하면 그가 한번 휘두른 일격에 태풍이 몰아치고 바다가 몰아치고, 화산이 터졌다는 식으로 전설속 영웅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허무맹랑한 활약상을 그려넣고, 600년이라는 시간동안 와전되어 셜리의 말대로 그녀가 바크오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힘든 상황.
"그 부분은 인정하지. 그토록 젊은 나이에 왕국 최고의 기사와 동수를 이룬다면 바크오의 후계자라고 인정할 수 밖에. 하지만, 자네의 실력이라면 기사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어. 그런데 어째서 굳이 병사가 되었는가?"
"저 또한 처음엔 기사가 되고자 노력했습니다만……."
영웅 바크오의 마지막 후계자가 된 그녀는 영웅의 후손답게 천재적인 재능으로 영웅이 남긴 모든 기술을 독학으로 배워나갔지만, 최후의 오의는 아무리 노력해도 깨우칠 수 없자 사람들과 섞여 현존하는 기사들과 대련을 하다보면 다양한 경험을 얻게 되어 작은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산하게 되었다.
처음엔 시골 영지에서 실력을 보이자, 촌구석에서 썩어가고 있던것을 한으로 여기던 귀족은 곧바로 그녀를 기사로 들여보냈으나 기사로서의 삶은 그녀가 생각했던것과 너무나 달랐다.
원래 기사란, 기사의 종자 생활을 하여 기사의 서임을 받는 평민 출신과 기사가 되기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하급 귀족들이 주축을 이루는데, 그녀는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종자 생활없이 기사가 되면서 평민 출신 기사들과 하급 귀족 출신 기사들에게서 질시를 받아왔다.
게다가 시골 영주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주변 영지를 굴복시키거나 약탈을 명령하면서 중앙 진출을 위해 자금력과 힘을 기르려고만 하니 기사로서의 첫번째 삶에 실망한 셜리는 어느정도의 월급을 챙기고 물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배운것으로 만족해하며 밤중에 떠나고 말았다.
멀리 떨어져 상당히 번화한 도시에서 용병 등록을 하고 자유롭게 의뢰를 받아가며 다양한 삶과 경험을 쌓던중, 미개발 던전을 발견한 귀족가에서 함정제거용 고기방패 용병들을 모집하였고, 거기에 멋모르고 참가한 셜리는 귀족가의 행패에 분노하며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세우는 귀족가의 사병과 기사들을 참살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귀족가에서 오히려 그녀의 행동에 원한을 품어 암살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하였고, 암살자들을 격퇴하다가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암살자에게 의뢰를 한 귀족가를 박살내면서 끝이 나는듯 하였다.
하지만, 용병들을 토사구팽하려던 귀족은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 싫어 일부러 자신을 살려준 셜리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자신보다 더 윗줄의 고위 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자신과 같은 라인에 있던 귀족을 위해 간단히 일을 처리할 심산으로 기사단을 보냈으나 고위 귀족의 기사단이 오히려 그녀에게 깨지고 말았다.
여기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고위 귀족은 본격적으로 암살자와 용병들을 고용해 셜리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계속된 습격에 버거움을 느낀 그녀는 어찌어찌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를 모병하는 관리의 포고령을 듣게 되었다.
일단 자신에게 기사같은 고급 자원을 쏟아붓지 않고 암살자들이나 용병을 고용하여 공격하는게 전력을 보존하기 위함이라 여긴 그녀는 암살자들이나 용병들이 공격해오지 못하게 병사가 되어 병영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제 아무리 뛰어난 암살자나 용병이라 해도 자칫하다간 조직 자체가 반역자로 몰릴 수 있는 위험 부담을 안으며 왕국 수도 병사들이 우글거리는 병영까지 침투할 수 없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안 고위 귀족은 그녀를 죽이기 위해 병영 내의 부패한 병사들에게 그녀를 죽이도록 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도의 병사라 해도 결국은 병사였기에 셜리는 오히려 병사들을 물리치면서 일단락 되는듯 했으나, 고위 귀족은 자신의 연줄이 닿은 기사들을 이용해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압박감에 탈영이라도 해야 할까 싶던 도중, 제로 랜드를 공격하기 위해 기사들과 병사들중에서 지원자를 받게 되자 차라리 몬스터들과 나부끼는게 낫다고 생각하여 자원을 하게 되었다.
고위 귀족은 제로 랜드로 가는 그녀를 더이상 건들 수 없게 되었다.
제로 랜드 정벌에 지원한 병사들과 기사들은 따로 왕국에서 주어지는 장소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고위 귀족의 입김이 닿은 기사들과 병사들은 한명도 셜리를 죽이기 위해 제로 랜드에 지원할 생각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디엔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야, 너 지금 무슨 판타지 소설 보고 왔냐?' 라고 물을정도로 판에 박힌 양판소 형태의 스토리였지만, 여기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오리아 백작은 지휘관으로서의 얼굴을 지우고 바닥을 내려볼 수 밖에 없었다.
현실감 넘치는 그녀의 스토리에 왕국의 부패한 귀족들 때문에 왕국 최고의 기사가 될 수 있는 영웅의 후계자를 -후계자가 맞든 아니든간에 그녀만한 유망주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잃어버렸다는게 너무나 부끄러웠고 화가 났기 때문이다.
군인으로서 다양한 사람들을 겪고, 통솔해오면서 부하들의 마음을 해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오리아는 이미 그녀에게서 이 나라를 위해 검을 들 의도따윈 조금도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아니, 오히려 타국으로 건너가지만 않으면 다행이리라.
단지 자신의 힘이 어느정도인지 몰라 멋모르고 병사가 되었다면 얘기가 쉬워지지만, 왕국의 기사들에게 실망감을 느끼고 왕국의 귀족들에게 죽음의 위기를 수차례나 겪은 그녀에게 아무리 설득해도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하아아……. 할 말이 없네. 그런 일을 겪은 자네에게 왕국의 기사가 되라고 말한다면 나는 천하의 개년, 혹은 바보라는 것을 알리는 꼴밖에 안되겠군. 대신, 이 전쟁이 끝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를 공격한 귀족들을 단죄하겠다고 약속하겠네. 이건 왕국의 부패한 자들을 처단함과 동시에 자네에게 조금이나마 사죄를 하기 위함이네."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행히 오리아 백작은 귀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올곧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만약, 그녀가 셜리를 공격한 다른 귀족들과 똑같은 부류였다면 그녀를 안심시키고 돌려보낸후에 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말을 하기 미안하지만, 이번 전쟁이 끝날동안만 기사로서 활약해주지 않겠나? 자네도 봤다시피 그 오우거 메이지는 보통의 오우거 메이지가 아니였네. 자네만한 능력자가 아닌 다른 기사가 그 오우거 메이지를 막아섰다면 오히려 당하는건 우리측 기사였겠지. 자네가 우리 로카스트 왕국에게 실망하였다는건 알고 있지만, 이곳에 온 기사들과 병사들은 신념을 가지고 이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애국자들이네. 나는 이 전쟁에 패배해도 좋으니 나라의 주축이 될 새로운 세대들이 허망하게 죽는 모습만큼은 보고 싶지 않아. 자네의 능력, 부디 이 전쟁에서 활약해주게."
백작은 진심어린 목소리로 셜리에게 기사로서, 영웅의 후계자로서 모든 능력을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사용해주길 간절히 요청하였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 또한 오의를 터득하기 위해 실전 경험을 얻고자 하니 너무 저자세로 부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인 오리아 백작이 한참이나 어린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니 셜리도 그녀의 진심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지금 당장 예비용 갑옷과 보급품, 숙소를 배정해주겠네!"
"편의를 봐수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전쟁이 끝나면 이곳에서 얻은 실전 경험을 소화하기 위해 은거하여 선조의 오의를 깨닫으려 하니 이 전쟁이 끝나도 저를 기사로 옭아매려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여기서 더 바라는건 나의 욕심이니까. 이 전쟁이 끝나면 자네는 사망 처리 해주겠네. 이거면 되겠지?"
알아서 후속 처리 방법을 얘기한 오리아 백작의 모습에 셜리는 귀족이라고 다 부패한것이 아님을 확인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예.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하지만 대외적으로 자네가 죽었다고 말하겠다만, 나는 귀족된 의무로서 자네의 존재를 여왕님께 전해야만 하네. 아마 자네를 찾으려는 왕국 기사들을 보겠지만 부디 이 부분은 이해해주게."
나라에 충성하는 백작으로선 바크오의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자신의 군주에게 알려야만 하였고, 이 부분은 그녀를 진정한 귀족으로 인정한 셜리로서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셜리 프류나드는 기사로서 활약하게 되었고 오리아 백작은 옛 영웅의 후계자가 참전한 이 전쟁에서 승리를 예감하였으나, 옛 영웅들조차 절망감을 느끼게 만들 괴물이 자신들의 뒤쪽에서 아가리를 벌리며 기다리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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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의 능력은 루이네와 비등합니다.
원래 리메이크 전에는 바크오의 수련서를 얻은 자칭 영웅이라 외치는 오만한 기사가 나대다가 제카쿰에게 끔살 당하는 스토리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리메이크판에서 그녀의 운명은....(생략)
이제 앞으로 등장할 인간측 주요 인물은 성녀님(학학학 수녀 모에 학학학학) 뿐이군요.
본문과 관계없지만 참고로 말하자면 트와일라잇 엑스의 전사들중 제카쿰과 헬카인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인물은...첼카루입니다. 단지 남의 불행을 뒤에서 지켜보는걸 즐기는 성격때문에 전면에 안 나설 뿐이죠.
어쨌든 네이드와 벨켄의 능력이 나왔으니 쿠엘과 첼카루의 활약이 남았군요.
이제 전쟁씬 중반을 지나가게 되었으니 능욕씬을 기대하시는 분들께선 좀 더 스토리를 감상해주세요.
전쟁씬이 긴 만큼 능욕씬도 길고 자극적으로 꾸미고 있으니(특히 성녀님. 학학학) 지금은 스토리에만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슴다.
PS:유리 멘탈과 빠른 정신력 회복. 그것이 나의 특기이자 특징.베쿨락 패배!
이 사건은 모든 몬스터들에게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셜리가 갑자기 가해온 기습 공격이 예상 범위를 초과하여 방심하다 일격을 맞은것도 있고, 베쿨락의 진정한 힘은 마법을 사용했을때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에 제대로 승부를 하면 결과는 달라져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결국 인간의 검에 베여 크나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는 것이다.
승전을 축하하며 하루를 지낸 후, 산맥 루트를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그 정보를 얻은 디엔은 자신도 모르게 노인처럼 무릎을 탁 내리치며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어! 이걸로 우리는 살았다!"
"키릿?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케사르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듯이 환호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그는 고령 리자드맨으로서 다방면으로 뛰어난 지혜와 깊은 생각을 보여주고 있지만, 계략, 세력과 세력간의 힘 대결에서 파생될 깊은 대립 구도까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소규모 클랜의 지도자였던 그에게 거시적인 대국을 보는 눈이 길러지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기에 디엔은 차근하게 설명해주었다.
"베쿨락이 나를 위험 종자로 여기고 싹을 짓밟으려고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예. 게다가 리벨리오나까지 주군을 증오하면서 제로 랜드의 4대 클랜중 절반이 우리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잖습니까? 그것 때문에 요 근래엔 제대로 잠도 못자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외의 행운으로 베쿨락이 알아서 탈락해버리고 말았어! 실질적으로 우리가 대립해야 하는 녀석은 리벨리오나가 이끄는 패링 클로 뿐이야!"
"예?"
디엔의 설명은 이러했다.
인간의 실력이 어찌됐든간에 한낯 인간 따위에게 당해버린 베쿨락의 위엄은 상처를 받아 버렸고, 상처입은 맹수는 그 자리를 노리던 다른 하이에나들에게 기회를 주게 되었다.
물론,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눈 앞에 적의 대군이 있는데 자기들끼리 물어뜯는 바보같은 짓거리는 하지 않겠지.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다.
무적일줄 알았던 맹수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상처를 입는 모습을 목격했기에 베쿨락은 전쟁이 끝난 후에 상처가 낫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는, 4대 클랜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은, 동메달리스트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말씀은……!"
케사르도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니 표정에 희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디엔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여가며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 베쿨락과 우리의 거리는 대략 15일 정도의 거리! 주변 놈들이 평소처럼 자신의 위엄에 짓눌린 상태였다면 원거리 원정을 통해 우릴 공격했겠지만, 사방에서 도전자가 나타날테니 본진이 털릴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우리를 공격할 생각따윈 하지 못할거야!""
"키샤아앗!"
지금까지 왠만해선 정숙하고 정갈한 이미지를 지켜오던 케사르조차 경망스럽게 환호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제 아무리 4대 클랜이라 해도 자신들의 모든 힘을 사용한다면, 그 중 하나 정돈 힘대결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드디어 자신들이 살아남을 구멍이 생겼다는것이 미치도록 기뻤기 때문이다.
"카하하하핫! 드디어 내게도 행운이 따라주는구나!"
지금까지 불운을 기회로 만들고 힘겹게 세력을 키워가며 개같이 굴러왔는데, 처음으로 사소한 행운이 아니라 세력 자체가 되살아날 수 있는 거대한 행운 덩어리를 맞이한 디엔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불안감을 모두 떨쳐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클랜들은 부하들을 지휘하는 카리스마, 혹은 그에 준하는 괴력같은 지배자 개인의 능력을 기대면서 만든 세력이 대부분이다.
데드 스컬은 디엔의 능력보단 그의 이상에 동조하면서 충성을 맹세하였고, 계속해서 충성도를 1이라도 올리기 위한 디엔의 노력 덕택에 그가 힘이 없어진다 해도 뿔뿔이 흩어지는 모래성같은 세력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하다해도 한 세력의 주인이 불안에 떨면 부하들의 사기가 급감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기에 부하들의 눈앞에서는 호탕한척, 아무 걱정할필요 없다는듯이 평소처럼 행동했었지만, 그 또한 4대 클랜중 둘이 공동 전선을 펼치는 모습은 상상만해도 호러 영화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그런 호러 영화급 군세를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 고민한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정체모를 인간 덕분에 베쿨락의 카리스마에 금이 가면서 숨통이 트인 것이다.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예상외의 행운.
고민스러웠던 일이 해결되어 너무나 기분좋은 아침을 맞이한 디엔이 기뻐하고 있을 무렵, 오리아 백작은 영웅의 후계자가 가세한것에 기뻐하던 마음이 당혹감으로 변하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 때문에 정기 보고가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거냐!"
숲으로 들어오는 몬스터 군세는 막아냈지만, 산맥의 좁은 협곡을 틀어막고 있는 마르바 자작으로부터 정기 보고가 두절된 것이다.
협곡을 지났다고 바로 요새가 보이는게 아니라, 반나절정도 이동해야 하는 거리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하루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정기 보고를 하는것을 의무화 시켰는데, 그 정기 보고가 끊겨버렸으니 인간쪽에선 기간틱 레피드 파이어가 있음에도 협곡이 뚫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무기는 종래의 병기가 가진 상식을 파괴하는 전술 병기다. 다수 대 다수에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최강의 죠커.
3분이라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기사들이 있고, 마르바 자작은 뛰어난 지휘관임과 동시에 무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계략과 함정에 당한 몬스터들의 멍청한 모습 때문에 그들의 전투력을 무의식적으로 하향조정 하였지만, 개활지에서 정면승부로 맞붙는다면 자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지 뼈저리게 느끼리라.
어찌됐든, 분명한 사실은 마르바 자작에게서 아무런 보고가 없으니 무슨 일이 생겼는지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숲에서 함정을 보수하고 있던 레인저 한 명을 빌린 오리아 백작은 마르바 자작쪽의 상황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점심때가 되자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보고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마르바 자작의 수비군은 전멸하였고…기간틱 레피드 파이어가 몬스터들의 수중에 넘어가버렸습니다……."
"뭣!"
수색을 한 레인저의 절망섞인 보고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모여있던 참모부, 간부들 모두 경악성을 지르고 말았다.
여기에 있는 모두 기간틱 레피드 파이어가 가진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무기가 자신들을 향해 날라온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의 오만함이라고 해야 할지, 방심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둘 다라고 할 수 있는 인간측의 실수가 드러났다.
분명히 이번에 개발한 신무기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그 병기를 적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최악의 결말이 드러났을때를 대비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자폭하게 만든다거나, 기계 장치를 망가뜨리게 만드는 마법진같은 것을 만들었어야만 했다.
최적의 장소와 조건에서 무기를 사용한다는 생각만 했지, 빼앗겼을때의 대비책은 그야말로 전무한 상황.
"그…그런 말도 안 되는! 마르바 자작이 하루만에 당했다니!"
"뭔가 잘못된게 분명해!"
참모들은 이 상황을 믿기 힘들어 하였으나, 덕분에 지휘관으로서의 이성을 되찾은 오리아 백작이 호통을 치며 책상을 쿵 내리쳤다.
쾅!
"지금 이게 왕국에서 선발된 참모들의 모습이 맞는가! 당장 기간틱 레피드 파이어를 탈취하거나 파괴할 계획을 짜도 모자를 판에 이 무슨 추태들이야!"
"……."
"……."
원래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허둥대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였지만, 그녀의 호통에 참모들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조금씩 냉정을 되찾아갔다.
"당시 상황은 모르겠지만, 마르바 자작이 한번이라도 기간틱 레피드 파이어를 사용했다면 몬스터들도 그 위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전투 도중 파괴되었다면 좋겠지만, 노획당했다는 정보가 들어온 이상, 100% 확률로 요새벽을 파괴하는데 사용할겁니다."
그녀의 호통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참모 하나가 정보를 정리하자는 식으로 현 상황을 설명하였다.
전술, 전략이란 그냥 마구잡이로 만드는게 아니라 여러가지 정보를 토대로 변경하거나 새롭게 판을 갈아엎기도 해야하는 고도의 정신적 창조 행위다.
아주 작은 정보라도 놓치면 완벽해보이는 전술, 전략에도 구멍이 생겨나버리기 때문에 정보를 다시 한번 재검토하는 것은 남들이 보기엔 다 알고 있는 말을 짜증나게 반복해서 말하는 짓에 불과하지 않지만, 전략가들에겐 자신의 창조물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유용한 재검토의 기회다.
오리아 백작도 그것을 알기에 참모가 말한 정보의 재검토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기간틱 레피드 파이어가 아깝긴 하지만…지금으로선 소수 정예를 운용하여 파괴해야 정답이라고 봅니다."
크기가 보통의 발리스타보다 3배 이상 크기 때문에 그만큼 탈취가 어려운 전술 병기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황.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하던 참모는 파괴를 주장하였지만, 다른 참모가 이에 반박하였다.
"미개한 몬스터들 따위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술력과 고도의 마법진으로 개발한 신무기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설령 적이 사용한다 해도 3분이라는 단점은 그대로입니다. 그 시간 안에 이쪽의 병력을 투입시켜 몬스터들을 퇴치하면 기간틱 레피드 파이어는 다시 우리들의 수중으로 들어올 수 있을겁니다."
"그건 희망론입니다. 자칫하다간 이쪽의 피해가 생길 수 있단 말입니다."
"애초에 피해 없는 전쟁이 어디 있습니까? 다소의 희생을 입더라도 신무기의 재탈취는 앞으로의 전황을 바꾸는데 큰 역활을 할겁니다."
그렇게 탈취해야 한다,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이 참모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절반씩 갈라져버렸다.
오리아 백작은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하지만, 쉽게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양쪽 모두 뚜렷한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소수 정예가 잠입하여 파괴한다면 요새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으나, 앞으로의 전투에서 전황을 한꺼번에 바꿀 수 있는 결정적 한방이 사라지고 만다.
재탈취를 하면 위험도가 크긴 하지만,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돌연변이처럼 강한 몬스터를 정밀 조준하여 즉사시킬 수 있고, 이쪽의 공격으로 적의 기세를 단번에 깍아내릴 수 있다.
이쪽의 손에 들어있을때는 든든하기 그지 없던 신무기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니 계륵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상황에 오리아 백작도 머리가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오리아 백작의 뒤에 있던 금발의 기사가 손을 들었다.
"대화를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한 마디만 말해도 괜찮겠습니까?"
실전을 위해 불편함을 최소화한 깔끔한 은빛 필드 플레이트 아머를 입으면서 정통적인 기사의 품격을 드러내는 금발의 여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각 부대의 지휘관이나 참모만 참석한 자리였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임시적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셜리 프류나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