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톡, 토톡. 톡톡톡.
머리맡에서 들리는 나직한 소음에 이예주의 눈살이 꿈틀거렸다.
람이 분명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해 뒀다고 한 것 같은데, 단잠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기어이 등장했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이불을 끌어 올려 뒤집어썼다.
요즘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기력이 달리고 잠이 쏟아졌다.
애써 소리를 들은 적 없는 것처럼 베개를 고쳐 베며 다시 수마에 빠져들던 순간이었다.
톡, 토도독. 톡톡.
“아오 씨!”
다시 한번 들리는 거슬리는 소리에 이예주는 결국 이불을 확 걷어 냈다.
축축 늘어지는 몸과는 달리, 한 번 잠에서 깨고 나니 머릿속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떡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배 때문에 무척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이예주는 뒤뚱뒤뚱 문으로 걸어갔다.
쾅, 문을 열어젖히자 오두막 주변을 얼기설기 감싸고 있는 넝쿨 위에 쪼로록 앉아 깍깍대고 있는 새 몇 마리가 보였다.
“망할 까마귀 새끼들! 다 죽여 버……!”
무려 양손을 모두 사용하여 그쪽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쳐들던 이예주는 멈칫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예주. 이런 말 하면 안 돼! 예쁜 말, 고운 말.”
그녀는 중지들을 고이 접고 둥실둥실한 제 배를 쓰다듬었다.
배가 부풀어 오르고 태동이 느껴지면서 아기가 들을세라 얼마나 입조심, 행동 조심을 해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과 람뿐인 뤼미에르 들판 지역에서나 가능하던 일이었다.
북쪽 대륙으로 오니 빌어먹을, 아니 나쁜 까마귀 놈들이 어찌나 성가시게 구는지 갱생됐던 성격이 하루가 멀다 하고 도로 더러워졌다.
“왜 또 온 건데! 이제 보석 필요 없으니까 좋은 말 할 때 가라. 응?!”
이예주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위를 향해 소리쳤다.
오두막 지붕을 덮은 가시 위에 앉아 있는 붉은 눈의 까마귀들이 저들의 얼굴만 한 틈을 통해 그녀를 지켜보며 갸웃거렸다.
그리고 태평하게 답했다.
“까아악.”
“까악, 인까악―”
인간.
자신을 부르는 까마귀 언어를 그녀는 이제 곧잘 알아들었다.
“하…….”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예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렸다.
그러던 중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자그마한 돌멩이들이었다.
가시 장벽 때문에 오두막에 접근하지 못하자 까마귀 놈들이 돌멩이를 주워와 넝쿨 틈을 통해 창문으로 던진 것이다.
“소름 끼치는 놈들.”
이예주는 제 양팔을 문지르며 놈들의 지능과 집념에 몸서리쳤다.
톡, 토독―
그때 무언가 그녀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아!”
그녀는 화들짝 놀라 제 머리를 맞추고 떨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풀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돌멩이가 굴러다녔다.
500원짜리 동전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였다.
그녀가 부푼 배를 붙잡고 힘겹게 쭈그려 앉아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 걸려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놈들이 신나게 넝쿨 틈 사이로 둥지에서 가지고 온 것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톡, 토독. 투두두둑―
“아!”
사방에 반짝이는 보석 비가 내렸다.
대부분이 이예주의 정수리를 치고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흉악해지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이 망할 놈의 새 새끼들! 내가 이제 필요 없댔지!”
이예주는 오두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시 장벽까지 한달음에 다가갔다.
주인과의 계약 조건을 착실히 지키듯 그녀가 도착하자 가시넝쿨들이 스르륵 얽힌 줄기를 풀어 길을 터 주었다.
그녀는 까마귀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그 사이를 뒤뚱뒤뚱 뛰쳐나갔다.
어느덧 뛰지 말라는 람의 당부는 까맣게 잊어버린 후였다.
“에휴…….”
호기롭게 넝쿨 밖으로 나온 것이 무색하게 이예주는 금방 지쳤다.
뛰는 것에 가깝던 빠른 걸음은 곧바로 너털너털한 느린 걸음으로 변모했다.
원래도 체력이 좋지 않았지만 몸이 부쩍 무거워지고 나서부터는 숨 쉬는 것조차 벅차게 느껴졌다.
“……날씨는 좋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부터 람과 함께 지내는 오두막을 얼기설기 감싼 가시넝쿨 때문에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시간 개념이 없어졌다.
바로 오늘, 까마귀 놈들이 자신을 부를 방법을 고안해 내기 전까지 이예주는 종일 누워서 잠만 잤다.
그녀는 아직도 드문드문 꾸는 악몽 때문에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잘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깨는 바람에 터질 듯 부푼 배와는 달리 얼굴과 팔다리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내렸다.
갈수록 메말라가는 이예주를 걱정한 람은 북쪽 대륙을 둘러보는 것조차 때려치우고 오늘 아침까지 곁에 있었다.
둥실둥실한 배를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며 당장 꺼내겠다고 달려드는 남자를 간신히 말려서 일하라고 보낸 참이었다.
“나온 김에 산책이나 할까?”
요즘 너무 심하게 누워 있기만 했지.
이예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오두막 주변에 가시덩굴을 친 후 람은 그녀를 침대 위에서 꿈쩍도 못하게 했다.
어두컴컴한 오두막 안에 계속 박혀 있는 것보다 햇빛을 좀 쐬면서 운동도 하는 게 아기한테 좋을 것이다.
“그치, 예람아?”
“까아악―”
그러나 아기를 향한 물음에 대신 답하듯 들려오는 까마귀 울음소리에, 애써 자신을 다독이던 이예주는 다시 기분이 저조해졌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중턱에서 북쪽 대륙 동물의 숲으로 온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었다.
람이 몇 개월간 부지런히 동쪽 대륙을 복구하는 사이 이예주의 태몽은 현실이 되었다.
오목했던 아랫배가 어느 순간부터 부풀어 오르더니 이제는 당장 아기를 낳아도 이상 없을 만큼 만삭에 이르렀다.
포니와 같은 신인류들이 무사한지 둘러볼 요량으로 돌아온 북쪽 대륙에서 가장 먼저 그녀에게 접근한 것은 빌어먹을 까마귀들이었다.
람과 함께 있기 때문인지 까마귀들은 예전처럼 공격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놈들은 번갈아 가며 람과 그녀가 머무는 오두막 앞에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들을 떨어뜨려 놓고 갔다.
그러고선 ‘까악’ 울며 잠을 깨우기 일쑤였다.
또다시 제 눈을 노리는 걸까 두려워하자 람이 말했다.
까마귀들이 그녀와 화해하고 동료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그녀가 떨어뜨린 보석을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자, 이번엔 죽은 쥐 새끼들을 물어와 문 앞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기겁을 하며 보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 오두막 한편에 다이아몬드, 진주, 사파이어 같은 번쩍번쩍한 보석들이 한가득 쌓였다.
보석들을 받아들이자 동료가 됐다고 인식한 건지 까마귀 놈들이 자꾸만 아침마다 울어 젖히며 몸이 무거운 그녀를 불렀다.
보석이나 돈벼락을 맞으면 행복해 죽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 맞아 보니까 생각보다 썩 좋진 않았다.
산책이라도 나서려 치면 뭔가가 머리를 툭 때리고 땅에 떨어졌다.
까마귀들이 물어와 던진 다이아몬드나 수정 따위의 알 굵은 보석들이었다.
그때마다 근처에서 까마귀 몇 마리가 깍깍거렸다.
시뻘건 눈으로 그녀를 주시하며 말이다.
처음 몇 번은 기쁨에 겨워 줍기도 했는데,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놈들의 깍깍거림이 자꾸만 비웃음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예주는 얼마 안 가 인간들이 살지 않는 곳에서 보석을 한가득 가지고 있어 봤자 굴러다니는 돌멩이들을 껴안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약초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황조롱이가 알면 통곡할 만큼 뒤늦은 깨우침이었다.
오두막을 나설 때마다 까마귀가 던진 보석에 정수리를 얻어맞는 경우가 계속 반복되자, 이예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람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저놈들을 당장 다 벼락에 튀겨 죽이라고 외쳤다.
그래서 그가 뤼미에르 몇 송이를 가져와 오두막 근처에 심은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오늘, 이예주는 놈들이 원하는 대로 숲길을 걷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놈들…….”
이예주는 제 위에서 낮은 비행을 하는 까마귀 몇 마리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 순간이었다.
“까아악! 인까아악―”
놈들 중 제일 퉁퉁한 한 마리가 불현듯 속도를 줄이더니 무언가를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뜨렸다.
“아, 또 왜!”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 안은 그녀의 손끝을 가벼운 무언가가 살랑 스치고 떨어졌다.
보석들처럼 무게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예주는 민망해져서 바로 손을 내렸다.
“이게 뭐야?”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껏 까마귀들은 보석 아니면 쥐 새끼만 떨어뜨려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다른 것이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깃털?”
“까아악!”
이예주는 힘겹게 허리를 굽혀 까마귀가 떨어뜨린 것을 땅에서 주워들었다.
그것은 엄지손가락만 한 길이의 갈색 깃털이었다.
“까마귀 깃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깃 끝을 잡고 팔랑팔랑 돌리며 자세히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까마귀 깃털은 아니었다.
색부터 전혀 달랐고, 까마귀 깃털에 비해 크기도 훨씬 작고 감촉도 부드러웠다.
“지나가던 참새 깃털인가?”
가만히 고민하던 이예주는 이내 무슨 종류의 깃털인지 알아내는 것을 관두고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람에게 물어보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녀는 다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숲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가시넝쿨 주위만 대충 돌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까아악!”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 또다시 까마귀 한 마리가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허공을 날 듯 나붓나붓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마주했다.
“뭐야?”
방금 전 주머니에 넣은 것과 같은 색의 깃털이었다.
모양도 크기도 똑같았다.
“……너네 뭐, 새 잡아먹고 그러는 거 아니지?”
다시 깃털을 주워 든 이예주는 노파심 어린 마음에 물었다.
람에게서 까마귀들이 다른 새를 잡아먹는다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은데.
“까아악!”
당연하게도 놈들은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않고 그저 의미심장하게 울 뿐이었다.
이예주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까마귀에게서 세 번째 같은 깃털을 받았을 때 알아차렸다.
놈들이 깃털로 자신을 유인하고 있다는 것을.
“진짜 뭐야…….”
그녀는 까마귀를 믿지 않았다.
놈들이 보석을 아무리 줘도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진절머리가 나던 와중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밖에 나온 탓일까, 아니면 잠자고 있던 호기심이 발동하기라도 한 걸까.
문득 까마귀들을 쫓아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혼자 있는 게 심심하고 좀이 쑤셔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자신을 유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예주는 홀린 듯이 까마귀들을 따라갔다.
“헉, 헉…….”
잔뜩 부푼 배 때문에 숨이 차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까마귀들이 팔랑팔랑 갈색 깃털을 떨어뜨렸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 조각 같았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주우며 뒤를 쫓던 그녀는 어느덧 숲 깊숙이 들어서게 됐다.
평평한 길이 사라지고 점점 무성한 풀숲과 귀신같이 늘어진 나무들이 나타났다.
빽빽한 나뭇가지에 막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숲속은 음침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까마귀들을 따라가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멈출 만하면 팔랑팔랑 떨어지는 갈색 깃털 때문이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나무와 풀숲이 사라지고 마침내 그녀는 거대한 공터에 이르렀다.
“까악, 까아악!”
“까아악!”
“깍깍, 까악!”
그곳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까마귀 둥지였다.
사방이 시커먼 까마귀 털로 뒤덮여 있고, 눈이 닿는 나뭇가지마다 수십 마리의 까마귀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머리를 풀어헤친 마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에 이예주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울창한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북쪽 대륙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였다.
“까아악! 인까아악!”
제일 처음 갈색 깃털을 떨어트린 퉁퉁한 까마귀가 주변을 한 바퀴 돌아 주의를 끌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놈이 어느 한쪽으로 휙 날아갔다. 이예주는 얼떨결에 그것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이끈 까마귀는 둥지 안에서도 가장 깊은 구석으로 유유히 날아갔다.
이윽고 놈은 검은색의 까마귀 깃털이 한 움큼씩 달라붙어 있는 커튼과도 같은 덩굴이 축 늘어져 있는 곳 앞에 멈춰 섰다.
“까악!”
까마귀가 들어가라는 듯 날개를 퍼덕였다.
이예주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덩굴을 들췄다.
환한 빛이 그 틈새로 새어 나왔다.
어두컴컴한 까마귀 둥지와는 달리, 덩굴 안쪽은 위가 뻥 뚫려 있어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감은 그녀가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뭇가지를 엮은 둥지 위에 누군가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까마귀는 아니었다.
흐, 이예주는 숨을 멈췄다.
그녀의 기척을 느낀 듯 둥지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인영이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칼, 황금색 눈동자가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막 부활한 천사처럼.
이예주를 마주한 갈색 머리 소년은 그녀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새파랗게 얼어붙은 채로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만 있던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술을 달싹였다.
“예주 누나.”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에 이예주의 얼굴이 울 것처럼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것은 갈색 머리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느릿하기 그지없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조롱아!”
“누, 누나! 배, 배 조심해여!”
이예주는 아직 놓지 못했던 제 미래를 향해 달려갔다.
간밤까지 그녀를 좀먹었던 악몽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