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이예주는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람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숨이 막힌 사람처럼 속삭였다.
“우리…….”
“…….”
“우리 예람이가 드디어 찾아왔나 봐요.”
그건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개꿈 같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기도 한데, 한편으론 설레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이예주의 얼굴은 우는 듯 웃는 듯 요상하게 일그러졌다.
“예람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속삭이는 그녀를 따라 람도 목소리를 죽였다.
갸웃거리는 남자의 모습에 그녀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네, 예람이! 왜, 그때 얘기해 줬잖아요!”
“내가 심어 놓은 에너지 덩어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네가 내게 다시 돌아온 순간, 네 아랫배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그때부터 계속 존재했던 건데.”
람의 말에 이예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을 때부터 계속 같이 있었다고?
“왜 그런 얘기 안 했어요?”
“하도 예람이, 예람이 노래를 부르기에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람이 깨어난 이후, 그가 잠들었던 사이의 일들을 말할 때 이예주의 서두는 무조건 ‘예람이’였다.
제 배를 흘끗 내려다보며 그녀는 심각하게 고뇌했다.
“그럼 우리 예람이가 드디어 세포에서 벗어나서 태아가 된 건가? 그래서 나한테 텔레파시를 보낸 거예요. 그렇지, 아가야?”
벌써부터 아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예주는 다정하게 물었다.
태몽인지 개꿈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아기도 무사히 돌아왔다는 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람은 아기가 이예주를 과거로 보냈다는 것을 좀체 믿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능력을 완전히 소실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과 상통하는 것 같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는 아직도 그녀가 능력을 이용해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릴 것을 계속 염두에 두는 것 같았다.
세상을 복구하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강박적으로 돌아와 그녀를 살폈다.
마치 쟈니아와 눈족 족장이 합쳐진 괴물이 잠든 람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악몽을 꾸고 일어나, 그가 살아 있는지 매번 확인하는 이예주처럼.
“어떡해. 내가 벌써 임산부가 된다니…….”
이예주는 좀처럼 실감하지 못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실 진짜 임신을 했다고 해도 믿기지 않을 것 같았다.
2017년엔 평생 연애도 못 해 보고 죽을 팔자라 생각했었는데, 임신이라니.
좋은 것 같으면서도 마음이 심란했다.
“……현대였으면 진짜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내가 임산부라니…….”
연신 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사색에 잠긴 그녀에게 남자가 초를 쳤다.
“그건 일반적인 인간들의 새끼와는 다른 존재다.”
“…….”
“내게서 파생된 에너지를 네 몸에 일부 옮겨 심었고, 그것이 자아를 가진 후 네 신체를 빌려…….”
“입, 입, 입!”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
이예주는 공포의 주둥아리 때문에 귀를 틀어막으며 버럭 소리쳤다.
“그딴 소리 할 거면 나한테 손도 까딱 마요! 도둑놈 주제에!”
“뭐? 도둑놈? 허.”
“그럼 도둑놈이죠! 당신이랑 나랑 나이 차가 얼만데!”
생각해 보니 이거 완전 나쁜 놈이었다.
무슨 선녀와 나무꾼도 아니고 애를 심어서 도망 못 가게 할 생각이었다니.
물론 매번 휩쓸려 피임할 생각도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가만, 일반적인 피임이 통하긴 했으려나?
빌어먹을, 이예주야…….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미친놈에게 코 꿰였단 생각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와…… 그러고 보니 정말 얼마 차이야. 까마득하잖아? 나보고 맨날 ‘어린것’이라고 말할 때부터 알아봤어.”
“…….”
“이렇게 어린 나를 홀랑 잡아먹었으면서! 당신이 말하는 일반적인 인간들이랑 같았으면 당신은 진짜 천벌받을 놈이라고요!”
“…….”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본인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사납게 그를 노려보다가 홱 돌아누웠다.
꾸물꾸물 모포 속으로 파고들자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할 말을 잃은 남자의 시선이었다.
람은 한참이 지난 후 이예주의 곁에 덩달아 누웠다.
‘뭐야? 참나, 왜 따라 누워?’
내심 그가 산장 밖으로 휙 나가 버리지 않을까 생각하던 이예주는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였다. 허리께에 뱀처럼 기다란 것이 스르륵 파고들었다.
이내 아랫배를 감싼 그것이 이예주가 벗어날 수 없도록 꽉 힘을 줬다.
“그래서.”
“…….”
“내 새끼까지 밴 채로 날 떠날 건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남자가 그녀의 머릿결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의외로 애처롭게 느껴지는 음성에 이예주는 되레 우왕좌왕했다.
“다, 당신 하는 거 봐서요! 나도 나보다 어린 남자랑 사귀고 싶은 로망이 있다고요.”
당황해서 마구 내뱉고 그녀는 곧바로 아차 싶었다.
화난 포인트는 이게 아닌데!
어린 저를 홀랑 잡아먹고 애까지 덜컥 가지게 해 놓은 이 파렴치한이 미친 소리를 작작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나 정정하기도 전에 남자에게서 어마어마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그놈은 벼락을 맞고 죽겠군.”
“예, 예? 뭐, 뭐라고요?”
“아니, 그건 너무 간단한가? 죽지 못하게 대가리만 남겨 둔 후 그 밑은 오체분시를 할 거야. 그래서 제 사지가 하나하나 조각나는 것을 제 눈으로 보게…….”
“아악!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요! 아기가 듣는다고요!”
람은 진저리를 치는 인간 여자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넝쿨처럼 옥죄는 두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가 버둥거렸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 순간, 인간 여자의 아랫배 속에서 작은 고동이 울려 퍼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두근두근 박동하던 그것은 이내 힘차게 생명의 기척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젠 아무 데도 못 가.
만족스럽다는 듯 남자의 붉은 입꼬리가 위로 길게 찢어져 올라갔다.
검은 파편은 영원히 이예주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