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15)화 (317/319)

“다녀오세요…….”

이예주는 반쯤 감긴 눈으로 람을 배웅했다. 

모포가 스르륵 흘러내려 맨 어깨가 드러났다. 

흰 살결 위에 새겨진 벌건 잇자국들을 본 남자의 눈이 일순 음탕하게 번들거렸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아이처럼 칭얼댔다. 

“꼭 이렇게 깜깜한 새벽에 가야 돼요?”

“헛소리를 하는군. 벌써 정오가 넘었다.”

“아, 맞다. 여기 맨날 밤이지…….”

람의 가슴팍에 얼굴을 한껏 묻은 채 그녀가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 멍청한 모습에 남자는 타박 대신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토닥였다.

“안쪽에 먹을 것을 가져다 놨으니 굶지 말고 챙겨 먹도록.”

이예주는 그의 말에 짧게 웃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참나, 미끼로 쓸 땐 언제고요?”

“애석하게도 이제 미끼로 써서 잡을 것이 없군.”

“그럼 있으면! 있으면 또 미끼로 쓰게요?!”

잠이 확 깨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한 소리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씨익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화가 푸시시 식어 버렸다. 

잘생긴 놈이 웃기까지 하니 신수가 훤했다.

‘얼굴이 완전 사기야.’

이예주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불평했다. 

최근 들어 웃음이 부쩍 많아진 남자였다. 

그 때문에 화를 내려다가도 말문이 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그녀는 가끔 이놈이 일부러 이러나 하는 생각까지 다 들 정도였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군.”

문을 열어 둔 채 자꾸만 가는 것이 지체되자 람이 조심스럽게 이예주를 떼어 냈다.

“칫, 빨리 올 거죠?”

“그래.”

“남쪽 대륙에서처럼 막 며칠씩 걸리면 그냥 확 나가 버릴 거예요.”

불퉁거림에 남자가 검붉은 눈을 번뜩였다.

“가기 전에 지랄발광 꽃들과 맺은 계약 조건을 바꿔야겠군. 내 허락 없이 네가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가둬 두도록.”

가, 가둬 둔다니! 

이예주는 현실성 있는 남자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져서 재빨리 외쳤다.

“빠, 빨리 오란 소리예요! 이 융통성 없는 남자야!”

쪽, 그녀는 깡총 까치발을 들어 못된 입이 더 이상 소름 끼치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뽀뽀했다. 

그러고서 배시시 웃자 람이 두 손으로 그녀의 양 볼을 와락 움켜잡았다. 

“웁!”

붕어처럼 강제로 툭 튀어나온 입술 위에 다시 진하게 입을 맞춘 남자는 그제야 산장 밖으로 나섰다.

“얌전히 있어. 금방 다녀오지.”

예전처럼 며칠씩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예주는 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문 앞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람 또한 지지부진하게 걸으며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애틋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이예주는 람 없이 혼자서도 잘 놀았다. 

대부분 산장 안에서 뒹굴거릴 뿐이었지만, 남자가 오길 기다리는 것은 가만 누워만 있어도 왠지 간지럽고 설레는 일이었다.

붉은 개와 인간을 포함해 여타 다른 움직이는 생물이 살지 않는 산 중턱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하지만 텅 빈 것은 비단 산 중턱뿐만이 아니란 것을 잘 알기에 예전처럼 누가 있을까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이고, 허리야.”

한참을 더 침상 위에 퍼질러 있던 이예주는 등허리가 배기다 못해 아플 지경이 돼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산장 밖으로 나가 어둑어둑한 오솔길을 따라 걷자, 얼마 안 가 눈부시게 빛나는 들판이 나왔다. 

“별로 바뀐 건 없네…….”

뤼미에르 들판 앞에 선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다시 돌아온 첫날엔 남자의 손에 붙들려 정신없이 산장으로 끌려 들어가느라 미처 자세히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일부러 외면한 것도 사실이다. 

람에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딱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열린 가시넝쿨 사이를 지나치는 순간, 새삼 겁이 났다. 

뤼미에르 꽃밭이 온통 시뻘건 피 칠갑일까 봐.

붉은 개에게 잡혀 물어뜯기던 다리족들, 자신을 잡기 위해 팔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어 대던 남자의 모습…….

잊으려고 애썼지만,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것을 보니 그때의 일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았다.

“……그래도 다시 보니 괜찮네.”

다행히 재회한 뤼미에르 꽃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은은한 태양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예전 일이 많이 상기되지는 않았다.

이예주는 꽃밭이 시작되는 경계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가까운 곳의 꽃봉오리들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이 근방은 거대한 가시넝쿨로 온통 뒤덮여 있어 바람 한 점 불 리 없었기 때문이다.

“안녕.”

이예주는 작게 웃으며 꽃들에게 마주 인사해 주었다. 

그러자 ‘쏴아아―’ 하고 꽃봉오리의 흔들림이 물결치듯 퍼져 나갔다.

그녀는 그 장관을 물끄러미 구경하며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꽃들의 파도타기가 까마득하게 멀어져서 거의 보이지 않을 때쯤이 됐을 때, 그녀는 아예 두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하…….”

불현듯 깊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전에는 느끼지 못한 감각들이었다. 

실은 남쪽 대륙에 있는 동안 람이 곁에 있음에도 단 한 번도 긴장을 놓은 적이 없었다.

깊게 잠들었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옆에 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쟈니아와 눈족 족장이 합쳐진 끔찍한 괴물이 나타나는 악몽 때문에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우는 것도 일쑤였다.

미래에서 다시 과거로 돌아오고 람이 눈을 뜬 후 몇 주가 지났지만 놈들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열심히 돌봐 준 펭양에게 미안하게도, 그녀는 남쪽 대륙을 온전히 벗어난 지금에야 온전한 평온을 맞이할 수 있었다.

*       *       *

이예주는 문득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눈을 떴다. 

눈앞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하…… 또야?”

지긋지긋하게 보아 왔던 암경이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왼쪽 소매를 걷어 손목을 들어 보였다. 

“꿈이네.”

흉터가 없는 것을 확인한 이예주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더 이상 꾸고 싶지 않았던, 아주 오랜만에 꾸는 자각몽이었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꿈에서 깰 때까지 무한정 걸어야 했다.

“걷기 싫은데…….”

체력이 소모되는 건 아니었다. 

그냥 기분 문제였다.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인 길을 계속 나아가는 것은 정말 머리꼭지가 돌만큼 끔찍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 같지는 않은, 알 수 없는 거대한 아우라였다. 

이예주는 원래 ‘문’을 넘을 때나 꿈을 꿀 때 뒤를 돌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끌림에 의해 이번에는 망설이다 뒤로 돌았다.

“헉!”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기함했다. 

“이, 이게…….”

이예주는 엄청난 크기의 구체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팔레트에 섞인 물감처럼 파란색, 갈색, 흰색이 뒤섞여 있는 거대한 크기의 행성.

“미친……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무슨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요.”

그녀는 너무 기가 막혀서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바로 람의 본모습이었다. 

“저, 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단 말이에요. 벌써 이렇게 정체가 뭔지 다 보여 주는 건 좀…….”

인간의 형상과 천지 차이인 람의 본체에 이예주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거대한 행성에 비해 그녀는 먼지라 할 수 있을 만큼 작았다.

“저기, 람! 제 말 들리긴 해요?”

조심스레 물었지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하긴, 행성이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지.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지은 그녀는 거대한 구체를 향해 애원했다.

“이제 그만 인간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요, 네?”

그 순간이었다. 

마치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행성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니, 굉음이 아닌 진동 같기도 했다. 

마치 행성이 아니라 자신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행성의 대기권으로 빨려 들어가듯 흰색 구름 뭉치들이 훅 다가왔다. 

“자, 잠깐! 왜 안 변하고 다가오는 거예요?”

눈앞이 아찔했다. 

행성에 비하면 먼지만 한 그녀가 양손을 들어 다가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역시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건지 행성이 그대로 그녀에게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우우우우웅― 

다시 주변의 기류가 정신없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거대한 행성과 숫제 충돌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자, 잠깐!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지 마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니까요!” 

두 손을 마구 휘저어 대며 소리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제가 운석이 라도 된 양 땅과 충돌하는 건지, 아니면 낙하산을 잃고 떨어지는 건지 모를 기묘한 감각이 연속됐다. 

바다의 시릴 듯한 푸른색이 코앞에 당도했다. 

그 순간, 거대한 구체가 돌연 이예주의 배 속으로 쑤욱 밀려 들어왔다. 

아랫배가 부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엄청난 압박감이 뇌리를 강타했다.

“으아아아악―!”

이예주는 제 배를 감싸 안고 괴성을 지르다 번쩍 눈을 떴다.

“미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몸을 미친 듯이 더듬었다.

“배 속으로 들어왔어! 헉, 그 큰 게! 미친!”

내 배 터진 거 아냐? 그 커다란 게 들어왔는데 온전할 리 없지! 내 배 터졌으면 어떡해!

아직도 그 감각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예주는 헐떡이며 제 몸을 연신 확인했다. 

그때였다.

“예주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검붉은 동공 두 쌍이 오롯이 제게 박혀 있었다.

“……람?”

이예주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신이 여기 왜…….”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불현듯 남자의 얼굴에서 방금 전 목도한 거대한 행성의 모습이 겹쳐져 소름이 돋았다. 

말로만 듣는 것과 실체를 직접 마주 본 것은 천지 차이였다. 

역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던 거야.

“풀밭에 자빠져 누워 있기에 데려왔다.”

람은 이예주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답을 했다. 

그제야 그녀의 눈에도 주변의 모습이 들어왔다. 

망할 놈의 암경 속이 아니라 산장 안에 있는 침상 위였다.

“……꿈?”

“악몽을 꿨나?”

남자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 제게 고정시켰다. 

검붉은 눈에 이제 그녀도 곧잘 읽어 낼 수 있는 감정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상한…… 이상한 꿈을 꿨어요.”

“놈들이 또 뒤를 쫓아왔나? 곧 내가 나타나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 줄 것이라고 했지 않아.”

“그게 아니라요.”

이예주는 설핏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매번 제가 죽여 주겠다는 말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악몽의 내용을 정확히 모르기에 하는 말이었지만, 이예주는 그 말에 항상 마음이 놓였다.

“그게 아니라 당신이 꿈에서 글쎄, 이따만 한 행성이 돼 가지고 저한테 막 다가오는데…….”

아직도 생생했다. 그 거대함, 위압감. 

이예주는 그 크기를 설명하려고 두 손을 최대한 번쩍 쳐들었다. 

“이따만! 이따만해 가지고! 내가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 됐다고 했는데! 당신이 막무가내로 막!”

남자는 손을 펼쳐 들고 꼬물거리는 어여쁜 것의 모습에 나지막이 웃었다. 

“막무가내로 막, 그다음엔 어떻게 했는데? 네 안을 파고 들어가 에너지를 주입했나?”

“미쳤어요?!”

이예주는 행성의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 쳐들었던 두 손을 와락 뻗어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으로 작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이 망할 놈이 제 놀림으로 인해 시뻘게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웃는 것이다.

그 얄미운 꼴 덕분에 잠깐 잊고 있던 꿈 내용이 도로 떠올랐다. 

남자가 놀리듯이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놈이 환장할 모습으로 마구 다가와 제 배 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순식간에 배가 부풀었던 그 섬뜩한 느낌!

“당신이! 당신이 그 모습으로 진짜 내 배 속으로 들어왔단 말이…….”

버럭 분통을 터뜨리던 이예주는 순간 말을 멈췄다. 

제 입으로 꿈을 되새기다 보니, 이상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거 꼭…… 태몽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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