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14)화 (316/319)

외전 1

람은 깨어나자마자 무척 바빠졌다.

이예주를 되찾기 위해 모든 대륙을 소멸시키는 무식한 짓은 다행히 당사자가 직접 돌아오면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남은 대륙 곳곳에 미처 다 사라지지 않은 멸망의 잔재가 도사렸다. 

아예 사라져 버린 서쪽 대륙은 그렇다 쳐도, 살아남은 인간과 신인류가 가장 많은 동쪽 대륙은 정말 심각한 상태였다. 

여러 번의 반복된 붕괴로 인해 지반이 대폭 축소된 동쪽 대륙은 틈만 나면 밀려오는 해일에 침수되었다. 

그도 모자라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서 흘러 내려온 용암이 아직 굳지 않은 채 들끓었다.

람은 대부분이 텅 비어 버린 몸체를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예 남은 것들마저 멸살하고자 했지만, 베니 남매와 브레든, 그 밖의 아는 인간들로 인해 사색이 된 이예주 때문에 별수 없이 그만뒀다.

살아남은 것들이 마저 죽어 나가지 않도록 그는 제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시 재회한 지 얼마 안 된 인간 여자가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고, 람 또한 더 이상 어린것을 혼자 두는 것이 편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함께 남쪽 대륙을 떠나게 되었다.

“예주양…… 펭양이 보러 자주 올 거지양?”

난리 통에 순심이와 함께 얼음 동굴에 처박혀 있던 펭양은 다행히도 무사했다. 

“그럼!”

이예주는 두 날개를 마주 잡고 훌쩍이는 펭양을 달래 주었다. 

펭귄 옆에 서 있던 커다란 흰 순록이 ‘푸르륵!’ 하고 덩달아 투레질을 했다. 

“왜 울고 그래. 자주 놀러 올 테니까 순심이랑 잘 있…… 악!”

“이제 당분간 올 일 없다.”

하지만 채 말을 끝맺기도 뒤에서 휙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속절없이 끌려갔다. 

휘청거리는 것도 잠시, 단단한 팔이 그녀를 옥죄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요!”

얼떨결에 펭양의 날개를 놓친 이예주가 흘긋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제 후드를 잡아당겨 끌어안은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잘도 지껄였다.

“여기서 완전히 작별 인사 하지, 펭귄.”

“히, 히잉…….”

단호한 주인의 말에 펭양의 까만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졌다. 

이예주는 멋대로 제 행보를 단정 짓는 남자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왜요?”

“인간들은 성혼 후에 여행을 가야 한다더군. 일이 정리되면 여행을 다니느라 한동안 남쪽 대륙으로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다.”

“히힝…… 그럼 어쩔 수 없지양……. 그럼 여행 끝나고 다시 올 거지양? 펭양이 기다릴 거양!”

“착하군.”

펭양은 놀랍게도 남자의 어이없는 말에 눈물을 그치고 쉽게 납득했다. 

“서, 성혼? 허.”

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주인과 그 부하의 모습에 이예주는 어벙한 얼굴로 버벅거리다가 물었다.

“우리가 어, 언제 성혼했는데요?”

람은 그녀의 물음에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안 했나?”

“그니까 언제요?”

“인간들은 남녀가 여러 번 교미를 나누면 으레 혼인을 하고 새끼를 가지던데. 게다가 넌 이미 배 속에 내 에너지를……”

“닥쳐!”

이예주는 기겁해서 번쩍 손을 들어 망발을 지껄이는 입을 틀어막았다. 

허겁지겁 펭양을 돌아보자 까만 눈동자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아냐! 그, 그런 거 아냐!”

이예주는 순식간에 터질 것처럼 벌게진 얼굴로 마구 도리질을 쳤다. 

그리고 미친놈이 더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마구 끌어당겼다.

“그만하고 어서 가요! 어서!”

남자는 순순히 그녀를 따라 얼음 동굴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내려왔다.

‘아직도 부끄럼을 타는군.’

그의 머릿속에 직접 들었다면 환장할 생각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전혀 몰랐다.

언덕 아래에서 그들을 동쪽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바퀴벌레 옆에 선 이예주가 그제야 람의 손을 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펭귄은 여전히 얼음 동굴 앞에 서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펭양이 짧고 귀여운 한쪽 날개를 들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이예주는 불현듯 코끝이 시큰해졌다. 

남쪽 대륙에 온 이후 자주 보았던 모습이었다. 

숲을 떠나면서 따라오지 말라고 매몰차게 떼 놓던 자신, 동굴 앞에 우두커니 서서 그런 자신을 배웅하던 작은 펭귄. 

생각해 보면, 단 한 번도 걱정하는 펭양의 불안감을 덜어 준 적이 없었다.

“펭양아! 순심아!”

이예주는 버럭 외쳤다. 

가장 힘든 시기에 곁을 지켜 준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금방 다시 돌아올게!”

만세 하듯 두 팔을 위로 번쩍 쳐들고 크게 흔들었다. 

그 모습에 울먹울먹하던 펭귄의 노란 부리가 활짝 벌어졌다. 

커다란 순록도 투레질을 반복했다.

이예주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더 손을 흔들며 펭귄과 인사했다. 

요즘은 그런 나날들이었다. 

미래를 바꾸고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보지 못했을 인연들, 풍경들이라 모든 것에 미련이 남았다.

“그만하고 가자고 했지 않아.”

꼭 다시 못 볼 것처럼 열렬히 인사하는 펭귄과 인간 여자의 애틋한 꼴을 보다 못한 람이 이예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제야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떼어 본체로 변한 바군 위에 올라탈 수 있었다.

*       *       * 

그들은 용이 유희를 위해 세상을 한 바퀴 도는 것처럼 천천히 중앙 대륙을 가로질렀다. 

물론 타고 가는 것은 용이 아니라 시커먼 대왕 바퀴벌레였지만, 어쨌든 하늘을 나는 모습은 비슷했다.

사막은 여전했다. 

깊은 지하에서 용암이 막 솟아오르려 한 것처럼 군데군데 치즈의 구멍 같은 구덩이들이 푹푹 파여 있긴 했지만, 다른 대륙에 비하면 멀쩡한 편이었다.

가도 가도 텁텁한 모래 능선만 나오는 아래를 구경하는 것도 금방 물렸다. 

따가운 뙤약볕을 피해 람의 품에 안겨 방탕하게 늘어져 있던 이예주는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괴물은 어떻게 됐어요?”

사막에는 히카톤이 살았다. 검은 안개는 괴물이 아니라 눈족 인간들이 원하던 최종 진화체라 했지만, 이예주는 아직도 그 끔찍한 외형을 떠올리면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망할 것들. 쟈니아도 죽었는데, 설마 아직도 살아 있는 건 아니겠죠?”

불길한 생각에 창백해지는 그녀를 람이 흘긋 내려다보았다. 

“알고 싶나?”

그가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이예주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부분이 소멸했다. 그러면서 뭉쳐 있던 에너지들도 다시 순환되기 시작했지.”

“……잘된 일이죠?”

람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제멋대로 잘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눈족 인간이 변화한 괴물은 눈족 인간뿐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조리 잡아먹었다. 

특히 잡아먹힌 인간들은 괴물의 위장에서 소화되는 것이 아니라 괴물의 일부로 재탄생되었다. 

에너지가 뭉쳐 있었다는 것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다시 순환되기 시작했다니 이예주는 대강 알아먹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어서 남자가 궁금증을 마저 풀어 주었다. 

“중앙 대륙의 모래 속에 숨어 있던 것들도 용암 구덩이에 빠져서 계속 녹아 들어가고 있지. 최초의 눈족 놈이 소멸할 때까지.”

“으으!”

이예주는 왠지 그 모습이 상상이 가서 또 한번 몸서리쳤다. 

한참 후, 그녀는 람의 품에서 고개를 빼쭉 빼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본 사막은 그야말로 텅 비어 있었다. 

예전에도 죽은 땅과 진배없다고 생각했지만, 괴물마저 사라진 사막은 정말이지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황량했다.

문득 일전에 잠깐 상상했던, 람에 의한 인간 멸종 이후가 떠올랐다. 

모두가 죽고 남은 사람이 자신 혼자뿐일 때, 그때 보는 세상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결과적으로 지금 인간의 멸종이 부쩍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바꾸고 돌아온 자신으로 인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기분이…….”

무의식중에 애써 잊고 있었던 현실을 직시하게 되자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기분이 좀, 이상해요.”

이예주가 얕게 할딱이며 중얼거렸다. 

“너무 텅 비어서…… 사, 살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게 나 때문인가 싶고…….”

“이제 그 지긋지긋한 것들도 없으니 사막을 다시 채워도 되겠지.”

고개를 빼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예주의 얼굴이 불현듯 돌아갔다. 

람이 억지로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곧바로 눈치챈 듯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올리고 제 품에 더욱 깊숙이 숨겼다. 

“죄 없는 인간들이 죽어 나가는 데 가담하고 싶지 않다고 했었나.”

“…….”

람의 숨결이 앞머리를 간질였다. 

조금 답답했지만 이예주는 그 품에 얌전히 안겨 남자가 속삭이듯 내뱉는 말이 무얼 뜻하는지 생각했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 그런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눈족의 신전에서였다. 

인간들의 멸종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다면 허튼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람의 말에 제가 답한 말이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며 독을 토해 내듯 당신을 선택했노라고 고백했던 제게 람이 뭐라 경고했던가.

―네가 내 곁에서 도망치려 들지만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랬던 남자가.

“인간들의 생존을 저지하던 제약을 풀었다.”

“…….”

“지금까지 끈질기게 살아 남아온 종족이니 금방 다시 번식해서 대륙을 차지하겠지.” 

이예주는 남자의 품에 처박았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검붉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을 보면 시뻘겋게 변하면서 온갖 살기와 혐오를 내뿜던 눈동자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더없이 기쁜 변화였다. 

하지만 이예주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간 남자가 인간들에게 당했던 모든 일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 참혹하고 비참한 과거를 보았는데 그에게서 인간에 대한 증오가 사라진 것을, 대체 어떻게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멍하니 람을 올려다보던 이예주의 얼굴이 조금씩 흐려졌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겠어요?”

“…….”

“다시, 다시 생존하고, 다시 많아져서, 그래서 당신을 해치려고 들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그러면…….”

“괜찮아.” 

람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창백해진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제 내게는 네가 있으니까.”

그가 느리게 고개를 내렸다. 

차갑게 질린 이예주의 입술에 따뜻한 온기가 맞닿았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       *       *

바퀴벌레는 그들을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중턱에 내려 준 후 거하게 똥을 지리고 곧바로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예주는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 같이 산장에 머무르자 했지만, 어쩐 일인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내젓더니 도망치듯 사라졌다.

“크흠! 주, 주인님의 신혼을 방해할 수는 없지!”

부우우웅― 

불길한 소음을 내며 날아가는 놈이 외친 말 때문에 이예주는 시뻘게진 얼굴에 연신 손 부채질을 해야 했다.

그녀와 함께 다시 뤼미에르 꽃의 경계 안에 돌아온 람은 분주해졌다. 

화산이 터진 산꼭대기를 수습하고 다시 용암을 가둬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는 다리족이 없었다. 

놈들의 비행선 또한 완전히 부서져 잔해들만 남았다는 것을 전해 들었지만, 이예주는 그 치 떨리는 곳에 다시 가기 싫어서 그냥 산 중턱에 남아 있기로 했다.

다행히 숨어 살던 붉은 개들 또한 산 아래로 이주했기에 텅 빈 산장은 예전과 달라진 점이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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