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얼음 동굴로 돌아 온 이예주는 하루의 시작부터 끝을 온종일 동굴의 뒤편에 있는 온천에서 보냈다.
얼마 전 눈족 놈들의 신전에서 데리고 나온 남자를 그 안에 담가 두었기 때문이다.
“람, 좋은 점심이에요!”
온천에 도달한 이예주가 활기차게 외쳤다.
그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옷을 훌렁훌렁 벗고 첨벙 온천 안에 입수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물살을 가르며 남자가 바위에 기대어 있는 곳에 도달했다.
“좀 늦었죠? 오늘 아침에는 대왕 바퀴벌레…… 아니, 아니!”
이예주는 급히 말을 멈추며 진저리를 쳤다.
신전에서 나와 람을 끌고 가던 것을 도와준 이후 그녀는 제법 대왕 바퀴벌레와 친해졌다.
비록 그녀의 몸통만한 더듬이 사이에 타는 것은 여전히 소름 돋았지만, 그래도 그의 말처럼 바퀴벌레의 인간형은 무척 호남이었다.
“바군이 같이 갈 곳이 있다고 해서요…… 강제로 끌려갔다 왔지 뭐예요.”
뿌연 수증기 사이로 드러난 남자는 여전히 눈을 꾹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거 봐요! 꽃이에요. 숲 속에 꽃밭이 생긴 거 있죠?”
이예주는 물에 젖지 않도록 열심히 들쳐들고 온 분홍색 들꽃을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날이 점점 포근해지고 있어요. 남쪽 대륙이 녹고 있나 봐요…….”
한숨처럼 중얼거린 그녀는 꽃을 조심스레 남자의 귀 옆에 꽂아주었다.
이예주는 그 모습을 보고 설풋 웃었다. 꽃을 꽂은 채 곱게 잠든 그의 모습이 꼭 동화 속의 잠자는 공주님 같았다.
아니, 잠자는 왕자님인가?
“얼마 전에 제드가 찾아왔었다고 내가 얘기해줬나요? 당신이 복구한 동쪽 대륙에 사는 신인류들이 받아줬대요.”
“…….”
“제드 키가 엄청 자랐어요. 예전에는 저랑 비슷했는데 지금은 그래도 좀 남자다워진 것 같아요. 들어보니까 호랑이 신인류한테 싸움 기술을 배우고 있대요. 호되게 배우고 있는지 눈 탱이가 밤 탱이가 돼서 왔는데…….”
대답 없는 남자에게 도란도란 말을 걸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녀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그 날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남쪽 대륙이 녹기 시작했고, 눈족들의 장벽은 완전히 개방됐다.
전쟁터였던 동쪽 대륙의 신인류와 인간들은 싸움을 멈추고 적당히 타협해서 같이 살아가기 시작했다.
“……있잖아요.”
그럼에도 남자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이예주의 얼굴이 천천히 흐려졌다.
“이거 당신 질투하라고 말하는 거예요.”
잠든 람을 온천에 담가놓은 것은 이예주의 아이디어였다.
상처를 치유하고 원기를 돋우는데 효능이 탁월해 그 또한 종종 이용한다는 말을 기억해 낸 것이다.
확실히 온천의 효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남자의 괴물 같은 치유력이 발동한건지, 피만 멎은 상태로 뻥 뚫려 있던 남자의 왼쪽 가슴이 차차 아물었다.
지금은 붉은 흉 자국만 남고 완전히 재생된 상태였다.
그런데 왤까. 왜 람은 눈을 뜨지 않는 걸까.
“나 이제 문으로도 못 도망치게 돼서, 그냥 이 곳에 적응하고 살려고 작정했어요.”
이예주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다리 위에서 뛰어내린 엄마를 과거로 보낸 것처럼. 미래에서 본 아이가 자신을 과거로 보낸 것을 이제는 잘 알았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로도, 미래로도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눈 안 떠서, 내가 다른 남자한테 홀랑 가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내가 살던 곳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알아요?”
“…….”
“다들 나한테 밥 한 번만 같이 먹자고 안달 냈어요. 영화 한 번 같이 보고, 놀이공원도 가자고 막 그러고. 데이트 신청이 엄청 들어왔다고요.”
“…….”“봐요, 제드도 날 못 잊어서 여기까지 찾아 온 거. 원래 이렇게 인기 많은 여친을 두면 불안해야 하는 건데…….”
이예주는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아니, 사실 거짓말이에요.”
“…….”
“이거 다 당신이 깨어나면 같이 하고 싶은 것들이야. 그니까 나랑 데이트 하고 싶으면 빨리 눈 떠요.”
“…….”
“아직 멀었어요?”
이예주는 남자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곱상한 얼굴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씨, 잘생겨서 봐줬다.”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흘기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줄게요.”
* * *
“레, 레이디. 뭐, 뭘 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예주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키가 꽤 커진 남자가 꽃밭 바깥에서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너 또 왔냐?”
이예주가 제드의 모습을 보고 부득 인상을 썼다.
하여간, 펭양이가 잠깐 자리를 비우면 바퀴벌레부터 온갖 것들이 꼬인다.
“너 요즘 싸움 배운다며, 안 바빠?”
“바, 바군이 동쪽 대륙으로 꼬, 꽃을 옮겨 심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해서요. 겨, 겸사겸사…….”
“이 바퀴 벌레 새끼!”
전쟁 중에도 죽지 않고 질기게 목숨을 보전한 제드는 바퀴벌레와 절친이 됐다.
바퀴벌레 자식은 귀찮은 일을 제드에게 떠맡기는 대신 종종 그를 남쪽 대륙에 떨궈 주었다.
절친한 친구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눈물겹다는 이유에서였다.
“뭐, 뭘 만드시는 건데요?”
이예주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제드가 슬금슬금 꽃을 헤치며 다가왔다.
그녀는 황급히 제가 만든 쓰레기를 감추려다 이내 그에게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당히 보여줬다.
“화관 만들고 있었어.”
“화, 화관이요? 이, 이, 이 뭉치가요?”
“죽고 싶어?”
“아, 아뇨! 아, 아주 잘 만드셨어요!”
제드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놈에게 눈을 부라리던 이예주는 이내 시무룩해졌다.
제가 만들었지만 좋게 봐줘도 화관이라 할 수 없었다.
꽃은 다 뭉그러졌고, 억지로 매듭을 묶은 줄기들은 너덜너덜해져 시큼한 풀 즙이 배어나왔다.
“제, 제가 조, 좀 도와드릴까요?”
“네가?”
“네, 네. 요, 요즘 동쪽 대륙에서 제, 제가 식물을 가꾸잖아요.”“그래?”
제드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예주의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알려줘!”
“이, 일단 이, 이렇게 중간 부분을 잡아서 매, 매듭을 지으면 안 돼요. 그, 그럼 꽃이 쉬, 쉽게 망가질 수 있으니까, 이, 이 끝을 잡고 이렇게 살살…….”
“오오! 잘하는데?”
이예주의 칭찬에 제드의 볼이 순간 발그레해졌다.
그는 조금 더 의욕적으로 화관을 만들며 은근슬쩍 물었다.
“라, 람님에게 드, 드리려는 거예요?”
“응. 원래 반지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너무 작아서 도저히 못 만들겠어. 그래서 화관으로 바꾼 거야.”
이예주는 그를 따라 다시 매듭을 지어보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제드가 그 말에 기절초풍했다.
“바, 바, 반지요?!”
“그렇다니까.”
“바, 반지는 사, 사랑하는 여, 연인들 끼리나 주고받는…… 으허억!”
그 순간이었다. 마구 더듬거리며 말을 쏟아내던 제드의 뒷덜미가 위로 불쑥 솟았다.
“이건 내 거라고 했을 텐데.”
“으, 으허어!”
장신의 남자가 들고 있는 것을 옆으로 휙 내던졌다.
제드는 종잇장처럼 쉽게 꽃밭 밖으로 나가 나가떨어졌다.
“꺼져.”
오만한 명령이 떨어졌다.
약한 수컷은 얼마 안가 ‘으에엥!’ 우는 소리와 함께 숲 저편으로 사라졌다.
“어…….”
이예주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쏴아아- 한 차례 그들 사이로 꽃향기를 담은 바람이 불어쳤다.
검은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한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뇌까렸다.
“그새를 못 참고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다니.”
“…….”
“이래서야 마음 놓고 잠에 들 수가…….”
“……람!”
이예주 새된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에게 코뿔소처럼 돌진했다.
와락 허리를 껴안자, 남자가 나지막이 신음했다.
“어, 언제 일어났어요? 여기로 오기 전에 분명 온천을 들렸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네가 다른 남자에게 가버리겠다고 속닥거릴 때였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하던 남자가 문득 말을 멈추고 멈칫했다.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마구 어리광을 피우던 어린 것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주야.”
람이 두 손으로 이예주의 얼굴을 잡고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드러난 얼굴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내가 당신 안 일어날까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요?”
“…….”
“나는 죽을 둥 살 둥 개 고생하는 동안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가슴에 이따만한 구멍이 나서 피를 막 한가득 흘리고! 그런데도 다시는 눈 안 뜰까봐 내가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냐고. 이예주는 이제야 그간 꾹꾹 눌러 참았던 서러움을 토해냈다.
엉엉 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가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그 모습이 마치 같이 울고 싶은데 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 같았다.
그는 애틋한 것을 쓰다듬듯 하염없이 어린 것의 얼굴을 쓰다듬다 이내 제 품에 강하게 끌어안았다.
“울지 마.”
“…….”
“울면 못생긴 홍당무 같다고 했지 않아.”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요?!”
이예주는 주먹으로 퍽퍽 남자의 등을 내리치다, 다시 엉엉 울다, 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남자의 등을 내리치길 반복했다.
남자는 그럼에도 끌어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람의 품에서 온갖 감정을 토해내던 이예주는 한참 후 진정 했다.
“……있잖아요.”
그녀는 결국 두 손을 들어 남자를 마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우리 첫 계약조건을 한번 생각해 봤어요.”
람은 답 없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계속 하라는 것 같았다.
“왜 날 살리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는지, 당신의 감정을 알려 달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좀 알아냈나?”
이예주는 꿈지럭 꿈지럭 거리며 남자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더 이상 시뻘겋게 번뜩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예주는 확신했다.
“그건 당신이, 당신이 사랑에 빠져서.”
“…….”
“당신이 내게 반해서. 그래서 이렇게…….”
“…….”
“이렇게 눈동자 색이 바뀔 만큼 날 사랑하게 되어서…….”
그녀가 불쑥 한 손을 들어 남자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어느 순간부터 검붉은 색으로 변해 활활 타오르던 남자의 동공.
이제 그 안엔 살기와 혐오 대신 다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한때는 그런 상상을 했을 때가 있었다.
감정을 모르는 남자이니 미친 척하고 이런 말을 해 볼까.
그러면 남자는 ‘헛소리를 하는군. 계약 위반이다.’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그녀에게 벼락을 내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그렇군.”
이예주가 더 이상 그것을 헛소리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남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간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럼 넌 내가 최초로 사랑한 인간이 되는 건가.”
언젠가 제가 고백했을 때 그의 대답이 떠올라 이예주는 작게 실소했다.
“예주야.”
남자가 그런 그녀의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말에 이예주는 람의 목을 와락 껴안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저 또한 작게 속삭이며 답했다.
시뻘겋고 미친. 아, 아니, 시뻘겋고 멋진……
“저도요.”
사랑하는 나의 레드 앤 매드.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