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12)화 (314/319)

“……저게 보여?”

그녀가 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손 틈새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무언가가 제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이예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무형의 힘이 제 몸에서 꾸물꾸물 빠져나가는 동시에 환히 빛나고 있던 ‘문’의 형체가 슬며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람이 제 문을 강제로 없앨 때처럼 마구 일렁거리며 없어지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과 같이 점차 빛을 잃어가면서…… 

끝내는 원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이예주의 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흐, 흐으…….”

눈시울이 후끈해졌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뜨거운 덩어리가 왈칵 목구멍으로 치솟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검은 안개는 ‘문’을 넘는 제 능력이 과거나 미래와 상관없이 그저 목숨을 살리는 것이라 말했다. 

그 능력 안에 예지몽은 포함되지 않았다.

제가 본능적으로 흡수했다고 느꼈던 엄마의 능력.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예주는 망설임 없이 제게서 빠져나오는 모든 것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토록 없어졌으면 했던 능력인데, 막상 없어지는 찰나를 마주치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회한인지 환희인지 그녀 또한 알 수 없었다. 

문득 작은 손이 뺨에 닿았다. 

아이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준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문’에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문이 보여?”

“응. 환히 빛나고 있어.”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예주는 울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절벽 바로 아래까지 팔열지옥 같은 용암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이젠 가야돼, 아가.”

“어디로?”

“문 너머로.”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뒤흔들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가기 싫어. 드디어 만났잖아.”

“하지만 가야 다시 만날 수 있는걸?”

“나랑 다시 만나 줄 거야?”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이예주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답했다. 

한때는 람이 죽으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예주는 죽지 않았다. 

검은 안개가 말한 기회가 지금을 의미한 것임을, 이제 그녀도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안 이상, 람이 없어도 그녀는 제 품 안의 아이를 두고 죽을 수 없었다.

“그만 가야돼.”

이예주는 제 품을 파고들어 칭얼거리는 아이의 몸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약속할거지?”

“그래.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그러자 아이가 이예주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엄청난 힘으로 달려들어 이예주를 절벽으로 밀어대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는 검붉은 용암 바다가 바로 뒤였다. 

“어, 어! 밀지 마! 이러면 안 돼……!”

그럼에도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벼랑 끝에 몰린 이예주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곧이어 아찔한 감각이 눈앞을 잠식했다.

“아가야!”

아래로 추락하는 순간 해맑게 웃는 아이가 그녀의 품 위로 와락 뛰어들었다.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작은 속삭임이 얼핏 들렸을 무렵, 용암 위로 속수무책 떨어지는 두 사람의 몸을 환한 빛무리가 덥석 받아 삼켰다.

아이의 눈에만 보이는 ‘문’이었다. 

*       *       *

“와아아악―! 도, 도망쳐!” 

시끄러운 소리에 이예주는 찬찬히 눈을 떴다. 

“비켜! 비켜!”

여러 명이 우뚝 서 있는 그녀의 몸을 자꾸만 거세게 밀치고 지나갔다. 

그네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경악과 공포가 가득 서려 있었다.

이예주는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긴…….”

자신은 어느새 신전 입구에 있었다. 

람이 돌아오며 쓰러뜨린 신전 앞의 기둥, 무너진 오래된 건물의 잔해들이 보였다. 

그 틈새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이예주는 고개를 내려 제 몸을 마구 훑었다. 

분명 아이와 함께 절벽 아래 용암 위로 추락하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꿈?”

꿈을 꾼 건가? 

하지만 그러기엔, 온 몸에 났던 상처들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쟈니아가 쏜 총에 맞은 어깨도, 삼지창 꿰뚫렸던 가슴도, 땡땡 부어올랐던 발목도.

“과거로…….”

아이가 치료 해준 그대로였다. 

이예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과거로 돌아왔어.”

쿠구구궁― 

그 순간 땅이 한차례 크게 요동쳤다.

“어, 어!

몸이 휘청일 만큼 강한 진동에 신전 외벽이 쩍, 쩍 갈라졌다.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신전에서 도망쳤다.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선 이예주는 고개를 들었다. 

눈족들의 신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홀로 남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람?”

이예주는 모두가 대피한 신전 안으로 주춤주춤 걸어 들어갔다. 

천장에서 기물들이 우루루 떨어졌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그녀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 위험천만한 곳에 혼자만 남은 이가 제가 아는 그 남자가 맞는지 확인을 해야 했기에. 

정말로 제가 과거로 돌아 온 건지 확인을 해야 해서. 

제단으로 가는 그녀의 걸음이 점점 경보하듯 빨라졌다.  

얼마 안 가 빠른 걸음은 내달림으로 바뀌었다.

“……람!”

황금 의자에 느른하게 앉아 있는 남자의 왼쪽 가슴이 뻥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시뻘건 핏물이 제단을 타고 줄줄 흘려내려 강을 이루고 있었다.

이예주는 직감했다. 

미래에서 보고 온 것처럼 남자가 소멸 중이라는 것을.

“람!”

그녀는 두 세 칸 씩 밟아 제단 위를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이예주는 아래로 숙여진 남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람. 람, 눈 좀 떠봐요.”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힘겹게 다시 만났으나, 처참하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에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이제 그만 해요. 나 다시 돌아왔어요.”

남자에게 대답이 없었다. 

이예주는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애원해도 불구하고 남자의 왼쪽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당신을 구하려고 내가 왔어요!”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자꾸만 피가 흘러나오는 그의 뻥 뚫린 가슴 구멍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 순간 쿠구구궁― 신전이 흔들렸다. 

아니, 온 세상이 뒤집히고 있었다. 

이예주의 입새로 울음이 새어나왔다.

“람! 내가! 내가 왔어요!”

문득 내려 본 그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던 검은색의 무형체가 꾸물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직 자아가 없는 그것이 본능적으로 모체를 찾는 것이다.

“내가 드디어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구요!”

이예주는 그것을, 람을, 검은 파편을. 그 모든 것을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그러니까 제발, 람!”

마침내, 소멸로 향하는 행성의 움직임이 멈췄다.

*       *       *

“으으……!”

지익, 스으윽― 지익, 스으윽― 

이예주는 안간힘을 쓰며 제 로브 후드자락을 잡아끌었다. 

로브 위에는 그녀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남자가 고이 눕혀져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람을 제 등에 업고 눈족 놈들의 주거지에서 나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 깔려 제단을 엉금엉금 기어 내려온 이후 그 생각은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허억, 허억.”

이예주의 입에서 숨넘어갈 듯 가쁜 호흡이 터져 나왔다. 

결국 그녀가 고안해 낸 것은 제 로브를 희생하여 람의 깔개로 만들고, 자신은 인간 수레가 되는 것이었다.

“미친…… 이게 대체 무슨 개고생이야.”

활짝 열린 장벽을 막 빠져나온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서늘한 바람이 내의만 입고 있는 그녀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눈이 소복이 쌓인 남쪽 대륙 치고 그다지 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장벽 밖의 공기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피가 멎은 남자와 관련 있는 것 같았다.

“아오 씨, 쉬지도 못하겠네.”

잠시간의 휴식도 금방 끝이 났다. 

많은 인간들의 시선이 꽂힌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이예주는 다시 남자를 담은 로브 자락을 움켜쥐었다. 

람을 끌고 눈족 놈들의 마을을 지나쳐 장벽을 빠져나가는 동안 수많은 인간들이 숨죽이고 이예주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끙끙 대는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그녀를 보는 눈초리에 다들 두려움이 한 가득씩 담겨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이예주는 그런 그들이 딱히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녀도 그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웬 여자가 나타나 인간을 박멸시키려던 무시무시한 악신을 끌고 가는 꼴을 보고 겁에 질렸을 것이다.

“으흐으!”

이예주는 모든 힘을 쥐어짜며 필사적으로 람을 끌고 설원을 지났다. 

한참을 끙끙대며 장벽에서 멀어지던 그 때였다.

“헤이, 인간! 내가 도와줄까?”

불현듯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이예주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누, 누구세요?”

“나야, 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동색 머리를 하고 있는 장신의 남자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누구나 호감이 갈만큼 잘생긴 미남이었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미남인 것을 떠나 처음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 알아요?”

“벌써 나를 잊었어?”

“난 당신 처음 보는데요?”

“내가 매번 주인에게 그쪽 잘 돌보라고 그 뭐냐. 그 인간들의 말로 그, 그…….”

남자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는 듯 이마를 감싸 쥐고 고뇌했다. 

그러더니 번뜩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래! 코치! 내가 매번 코치도 해줬구만. 이러면 섭섭해!”

“……미친놈.”

이예주는 다시 몸을 돌렸다. 

별 미친 인간을 다 보겠네. 갈 길이 바빴다. 어서 얼음 동굴이 있는 숲까지 람을 끌고 가야…….

“에헤이! 신인류 말은 다 듣고 가야지!”

그러나 남자가 후닥닥 달여와 무시하고 제 갈 길 가려는 그녀의 앞길을 막아섰다. 

이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 신인류야?”

“그러엄! 주인에게 쓸모를 인정받은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신인류지!”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쭉 내밀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앞에 제 머리를 숙였다. 

남자의 정수리 위에는 고동색 머리칼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가느다란 관 두 개가 달려 하늘하늘 움직이고 있었다. 

‘곤충인가?’

이예주는 잔뜩 곤두세웠던 경계를 조금 풀었다. 

람을 해치려는 불순한 인간이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남쪽 대륙에 신인류는 펭양 밖에 없다고 했는데…… 당신 무슨 신인륜데요?” 

“그렇게 날 무시하더니! 그러게 내 인간 모습을 후회 할 거라 했지?”

“아니, 내가 언제 무시했다고 그래요?”

이예주는 흰 눈을 떴다. 

오늘 처음 보는 신인류, 그것도 무슨 동물인지도 모르는 신인류를 언제 봤다고 무시한단 말인가.

“그래서 당신이 누군데요. 나 힘들어 죽겠으니까, 도와 줄 거면 도와주고 아니면 길 막지 말고 빨리 비켜요!”

“칫! 기다려 봐!”

남자가 뒷걸음질 쳐 그녀에게서 조금 멀찍이 떨어졌다. 

왜 떨어지는 거지? 이예주는 그저 멀뚱멀뚱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기억나겠지?” 

마침내 사정거리를 가늠하여 벌린 남자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펑!’하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자! 도와줄 테니 주인을 내 등 위에 올리라고, 인간!”

어마어마한 크기의 더듬이가 이예주의 눈앞에서 산들산들 흔들렸다. 

놈은 바로, 거대 대왕 바퀴…….

“아아아악―!”

이예주는 끌고 가던 람도 내팽겨 친 채 찢어지는 괴성을 지르며 도망갔다.

“어, 어디 가는 거야! 인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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