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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311)화 (313/319)

황당한 말이었다.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예주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그럼 그게 당신 이름이지 뭐예요?”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네?”

“난 이름이 없어. 네가 지어주지 않았잖아.”

“그게 무슨 소리…… 으윽!”

그 순간 이예주의 다친 팔에서 흘러나온 핏물 때문에 아이를 잡고 있는 손이 미끄덩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이예주는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손에 힘을 줬다.

“람! 제발 꽉 잡아요!”

“차라리 이렇게 같이 소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때 아래쪽에서 아직 죽지 않은 인간이 입을 놀렸다. 

악착같이 사슬을 잡고 떨어지지 않은 쟈니아였다.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는 이예주의 몸이 아래로 끌려갈 듯 한차례 덜컥였다.

“검은 파편을 놔요. 그건 더 이상 당신이 아는 존재가 아닙니다. 진짜 검은 파편은 이미 죽어 없어졌지요.”  

“그건 뭔 또 개소리야! 사슬 놔!”

“당신이 붙들고 있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황금의자 아래에서 태어난 가짜입니다. 그러니 놓아요. 이렇게 두면 당신도 같이 추락할 거예요.”

“닥쳐! 놓을 거면 네가 놔, 이 거머리 같은 년아!”

“난 절대 검은 파편을 두고 안 죽어.”

여자가 붙잡은 사슬을 제 손에 단단히 휘어 감으며 지껄였다. 

그러더니 사슬을 타고 거꾸로 오르려는 듯 안간힘을 쓰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으윽!”

이예주의 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황급히 바라본 어린 람의 얇은 목이 부러질 듯 아래로 꺾여 있었다. 

목뿐 만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자신이 세게 부여잡고 있는 가느다란 팔도 빠질 것 같았다.

“놔!”

이예주는 자꾸만 사슬을 타고 오를 시도를 하는 괴물을 향해 윽박질렀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용암 불에 벌겋게 비친 여자의 표정이 악귀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지!”

“놓으라고!”

“지금껏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약해진 검은 파편을 삼킬 수 있는 기회를 코앞에 두고 내가 어떻게! 어떻게 죽어!”

기어이 어린 람을 타고 올라오려는 듯 살점이 한 움큼 떨어진 여자의 손이 아이의 발을 와득 움켜쥐었다.

“개 같은 년.”

하체마저 조금씩 끌려가던 이예주는 문득 무언가가 벼랑 끝에 걸려 덜그럭 거리는 것을 느꼈다. 

돌아본 제 허리춤에는 제 가슴을 꿰뚫은 삼지창이 꽂혀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예주는 여자의 팔이 아이의 허벅지까지 움켜쥐자 암벽을 짚고 있던 한 손을 놓았다. 

기다란 창을 뽑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골반 부분까지 아래로 덜컥 내려갔다. 

허벅지로 간신히 버텨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까지 치달았다. 

“난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쟈니아에게 속내를 내뱉으며 이예주는 기어이 창을 뽑아 들었다. 

마구 흔들리는 사슬 때문에 주루룩 내려갔던 괴물이 다시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여신의 얼굴과 똑같은 것도. 팔족 족장 저택에서 날 농락했던 것도.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굴던 그 역겨운 표정도!”

이예주가 창을 든 손을 아래로 뻗었다. 

머리를 스치는 창날에 쟈니아가 기겁을 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 잠깐!”

“인자한 얼굴로 람을 입에 올릴 때마다, 검은 파편을 지 편할 대로 이용해 처먹은 여신 년이 생각나서 기분이 아주, 엿 같았다고!”

“잠깐! 하, 하지 마! 하지…… 악!”

이예주는 사슬을 휘어 감고 있는 여자의 손을 겨냥한 후 작살을 내리꽂듯 창을 꽂았다. 여자의 몸이 퍼덕였다.

“죽어!”

이예주는 망설임 없이 여자의 위로 창을 마구 내리 꽂았다. 

제 안에 이렇게 다른 사람을 죽이려 들 정도로 무서운 살심이 숨겨져 있을 줄 몰랐다. 

그 순간은 그냥 빨리 람으로부터 거머리 같은 여자를 떼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만 좀 죽어!”

푹, 푹. 

창끝이 사정없이 살점을 내리찍었지만 쟈니아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창에 찍힌 구멍이 늘어날수록 썩어빠진 손목이 점점 찢어지기 시작했다. 

투둑, 투둑-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 이예주가 물어뜯어 낸 살점 주변으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돼엑―!”

여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게 우습다는 듯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창이 내리꽂혔고.

툭- 

마침내 손목이 끊어졌다.

“아아아악―!

쟈니아는 사슬을 부여잡은 손 하나만을 남겨둔 채 팔팔 끓어오르는 천불 속으로 ‘풍덩!’ 빠졌다. 

그녀의 몸은 비명을 지를 순간도 없이 그대로 온 몸이 불타올라 소멸됐다. 

악마나 다름없던 괴물 치고 허무한 말로였다.

이예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자가 떨어진 곳을 향해 창을 던졌다. 

저런 흉기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람, 괜찮아요?”

그녀는 드디어 홀로 남은 어린 람을 돌아보았다. 

쟈니아를 떨쳐내는 동안 손이 많이 미끄러졌다. 

그녀는 이제 아이의 가느다란 팔목이 아니라 작은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람이 힘을 줘 제 손에 매달렸으면 당장 끌어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붙잡고 있는 힘은 오로지 저 뿐이었다. 

다친 팔로는 그를 간신히 놓치지 않고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쟈니아를 죽이는 동안 그저 무표정하기만 했던 이예주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제발…… 제발 놓지 말아요.”

“왜?”

“내가 드디어 구했는걸요.”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려 아이의 얼굴을 적셨다. 

핏물이 눈가에 들어갔는지 아이가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너무 지쳤어.”

“……네? 그게…….”

“네가 더 이상 에너지를 공급해주지 않아서 난 약하게 태어날 수밖에 없었어. 그대로 소멸 될 뻔 했지만, 검은 파편이 바닥에 내던진 에너지 결정을 빨아들여 간신히 살아남은 거야.”

“검은 파편은 당신이잖아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알 수 없는 람의 말에 이예주가 결국 버럭 소리쳤다. 

지쳤다는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그녀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어깨가 찢어져 나갈 것 같았다. 

아이의 손을 붙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만 말하고, 제발 꽉 잡아요. 응? 나 이제 힘들어요.”

“검은 파편은 소멸했어. 남은 건 이제 나뿐이야.”

“무슨…….”

“인간들은 무서워.”

이예주는 들려오는 말에 일순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들이…… 무섭다고?”

람은 단 한 번도 인간들이 무섭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버러지 같은 것처럼 여기며 경멸하고 혐오했다.

이예주는 멍한 얼굴로 아이를 다시 마주보았다.

“눈이…….”

어린 람. 아니 어린 람의 모습과 똑 닮은 아이의 까만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소멸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어.”

아이가 작게 중얼거리며 아예 몸에 힘을 뺐다. 

금방이라도 놓칠 것만 같아서 이예주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놓지 말라고요, 이 자식아!”

“왜?”

격렬한 반응에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어차피 날 버릴 거잖아?”

“내가 널 왜버려!”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어. 내가 분명 네 뱃속에 있었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내팽겨 치고 그대고 가버렸어.”

“그게…….”

“오랫동안 네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어. 아주 오랫동안. 네가 다시 와서 날…….”

아이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그만 나를 놔줘. 난 너에게 짐만 돼.”

이예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혼란이 찾아왔다. 

제가 잡고 있는 이가 람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녀가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아 약하게 태어났다는 아이. 인간이 무섭다는 아이. 오랫동안 그녀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는 아이. 짐만 되니 놓아달라는 아이.

하지만 이예주가 미처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에 아이는 작별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널 볼 수 있어서 기뻤어.”

“잠깐! 람, 람! 아니, 뭐든! 이러지마!”

아이는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떨어지기 위해 힘을 썼다. 

이예주가 안간 힘을 쓰며 다잡았지만 순식간에 손가락까지 주루룩 미끄러졌다. 

그녀는 경기를 일으키듯 소리쳤다.

“람 제발 놓지 마요! 람! 아니, 아니……!”

람이 아니라 했어. 자신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그 순간, 통렬한 깨달음이 그녀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부지불식간 능력의 각성 전날 꿨던 꿈이 떠올랐다. 

죽으려던 엄마, 그녀를 되돌려 보낸 자신.

“예, 예람아!”

자신은 십 년이 지난 미래로 왔다. 

그리고 이 아이는. 

이 아이는, 바로…….

“……예람?”

터져 나온 그녀의 부름에 아이가 멈칫 내렸던 고개를 들었다. 

이예주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넌 예람이야!”

“그게 내 이름이야?”

“그래! 내가 지금 지었어! 네 이름은 예람이야!”

“…….”

“그러니까 손잡아! 이제 네게도 이름이 있으니까, 죽으면 안 돼!”

그 순간이었다. 

내내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아이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울음을 터뜨릴 뜻 왈칵 일그러졌다. 

정말로 그 나이대의 어린 아이같이.

“……날 버리지 않을 거야?”

“버리긴 왜 버려! 내가 널 구하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정말이지?”

“꽉 잡아! 절대 놓지 마!”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예주의 손을 힘 있게 붙잡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힘에, 그녀는 남은 힘을 모조리 팔에 쏟아 부었다. 

다른 이가 보았을 때는 거의 초인적인 힘이나 마찬가지였다.

“으흐으!”

입술 사이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쏟아졌다. 

진저리를 치며 갖은 용을 쓰자 조금씩, 조금씩 아이가 위로 끌어올려졌다.

마침내 작은 몸이 추락의 위험에서 벗어나 완전히 벼랑 위로 올려졌다.

“이 놈의 자식!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제멋대로야!”

이예주는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아이의 몸을 와락 끌어 올리며 엉엉 울었다.

“버리긴 누가 버려! 절대 안 버려! 절대로!”

아이가 그녀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피가 줄줄 내리흐르는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다 불쑥 손을 뻗어 짚었다.

아이의 손아귀에서 꾸물꾸물 검은 빛이 새어나왔다. 

람의 것과 닮은 그것은 어깨를 한참 맴돌다가 다시 꾸물꾸물 움직여 이예주의 가슴팍까지 옮겨졌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거 밖에 없어.”

아이가 말했다. 

순식간에 어깨에 난 총상이 사라지고, 가슴팍에 자리 잡은 세 개의 뻥 뚫린 구멍에서 새살이 차올랐다. 

가슴의 상처가 흔적도 없이 치료되자 검은 빛들은 이번엔 이예주의 오른발로 내려갔다.

“이것 뿐 인데도?”

아이가 절박한 표정을 하고 재차 물었다.

“이런데도 안 버릴 거야?”

“……이 바보야.”

이예주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불현듯 능력이 각성한 그녀를 보며 탄식하듯 중얼거리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어떻게 몰라 볼 수 있었을까, 하던.

“너는 내 미래야.”

그녀는 아이의 까맣고 예쁜 눈동자가 담긴 눈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바보는 바로 자신이었다. 

그동안 수차례 꿈에 나와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이토록이나 예쁜 아이를. 어떻게 몰라 볼 수 있었을까. 

“너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몇 번이고 다시 미래로 올 거야.”

이예주가 울음이 가득 찬 목소리로 다짐하듯 여러 번 읊었다. 

아이가 그런 그녀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꼬물꼬물 손을 뻗어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이예주는 아이가 가리키는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부실 만큼 환한 ‘문’이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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