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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310)화 (312/319)

“쏴봐. 지금 죽어도 난 또 네 앞에 나타날 수 있어. 그게 내 능력이거든.”

“당신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건 이미 천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확인이 끝났습니다.” 

“글쎄, 그럴까?”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천 년 전에 용암에 타죽었을 내가, 십 년 전에 창에 찔려 죽었을 내가 어떻게 멀쩡하게 다시 나타났을 것 같은데?”

“그건…….”

“너네들이 나보고 구원자라며. 내가 진짜 구원자일지 네가 어떻게 알아?”

선뜻 답하지 못하던 쟈니아가 이예주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예언 속의 구원자는 네년이 아니라 바로 나야!”

여자가 목에 핏대가 설만큼 바락 소리 질렀다.

“대재앙의 마지막 순간, 검은 파편의 곁에 있는 인간 여자, 검은 파편을 씹어 먹고 신이라 불리리라!”

“하. 이제 그 역겨운 존댓말은 집어치우시기로 했나?”

“내가 본 미래 속의 구원자는, 바로 나였어!”

이예주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쟈니아 눈에 부득 핏줄이 일었다. 

미래를 보는 눈들을 셀 수 없이 씹어 삼켜서 누구보다 더 먼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용암 대폭발 후 천 년 후인 지금. 눈족 족장이 과거와 미래를 둘 다 보는 현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팔 할이 다 제 예언 덕분이었다.

“가장 마지막 순간에 검은 파편의 곁에 있던 인간 여자!”

육신까지 포기하며 얻은 강한 에너지와 능력. 

그리고 먼 미래의 종말 끝에서 쟈니아는 분명 최후의 순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건 바로 나!” 

“…….”

“네까짓 게 아니라 바로, 나였다고!”

“검은 파편이 뭔 줄이나 알고!”

어깨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을 감내하던 이예주가 불쑥 맞받아쳤다.

“너도, 네 남편도 검은 파편을 이미 삼키고 죽었는데 어떻게 신이 될 수 있어!”

“준비가 덜 돼서 그랬었지.”

“헛소리 하지 마. 인간이 어떻게 신이 돼? 네놈들이 원하는 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강한 에너지였어!”

이예주는 검은 안개였던 암경을 건너며 보았던 과거를 똑똑히 기억했다. 

놈들의 과한 욕심이 결국 람과 세상을 어떻게 망쳤는지.

“그걸 얻으려고 남의 멀쩡한 엄마를 죽이고, 천 년 전 인간들을 멸종까지 몰았으면서! 그래놓고 이제 와서 또 지구를 없애겠다고!”

“없애려는 것이 아니야. 다시 재건하려는 것이지.”

“하. 시발, 진짜 무모한 건지, 멍청한 건지…….”

도통 말이 통하지 않자 이예주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녀와는 달리 쟈니아는 소름끼칠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난 이제 신이 될 자질을 모두 갖췄다. 천 년 전에도 모자라 다시 도래한 대 재앙의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모르겠니?”

“검은 파편은 신이 아니야. 다시 삼키려 들어봤자 당신은 또 끔찍하게 죽을 거야.” 

“그거야 씹어 먹어 보면 알겠지.”

여자는 지긋지긋한 예의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예주의 발치에 총을 던졌다. 

탁, 타닥. 땅바닥과 맞닿은 쇳덩어리가 둔탁한 소음을 내었다. 빈총이었다.

“너는 매번 내 일을 방해했지. 십년 전에도, 지금도. 내 창을 훔쳐 달아나기까지 했어.”

한 손으로 제 품을 뒤적이며 쟈니아가 이예주의 허리춤을 턱짓했다. 

그곳에는 이예주의 가슴을 꿰뚫었던 삼지창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 검은 파편은 약해진 상태야. 그깟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 창이 아니어도 내 피로 만든 검으로 충분히 심장을 가를 수 있겠지.”

여자가 품속에서 불쑥 칼을 꺼내들었다. 

과거 이예주에게 한 번 건넨 적이 있는 검은색 단도였다.

“뭐, 뭘 하려는……!”

“검은 파편을 씹어 먹으면 네년의 눈깔도 네 어미처럼 산채로 뽑아 먹어 주마.”

소름 끼치는 엄포를 두며 히죽 웃던 여자가 불현듯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낭떠러지 쪽이었다.

“아, 안 돼!”

그곳에 람이 숨겨져 있는 것을 괴물이 눈치 챘다. 

이예주는 쟈니아를 뒤쫓아 허겁지겁 달렸다. 

그러나 총이 스친 한 쪽 어깨가 여의치 않아 빠르게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여기 숨겨 놓으면 못 찾을 줄 알고?”

그 사이 절벽 앞까지 도착한 여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 곧 바로 절벽 아래를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멈춰!”

뒤늦게 이예주가 도착했을 때 여자는 벌써 암벽에 매달려 람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는 덩달아 몸을 내려 절벽을 탔다.

“그만 두라고!” 

이예주는 애타게 소리치며 발을 놀렸다. 

그간 수차례의 암벽 등반이 모두 헛짓거리는 아니었는지, 확실히 암벽을 타는 것은 쟈니아보다 더 능숙했다. 

한쪽 팔을 사용하는데 어마어마한 고통이 따랐지만, 이예주는 비교적 빠르게 여자를 따라잡았다. 

“어딜 가려고, 이 미친년아!”

가까스로 여자의 후드를 움켜쥔 이예주가 그것을 제 쪽으로 마구 잡았다. 

잠시 절벽 아래로 떨어질 듯 휘청거리던 이내 휙 뒤를 돌아 칼을 휘둘렀다.

“방해하지 마!”

“흐으!”

간발의 차로 몸을 물린 덕에 이예주는 그 칼부림에 베이지 않을 수 있었다. 

주춤하는 틈에 쟈니아는 부지런히 몸을 옆으로 옮겼다.

“람! 피해요! 반대쪽으로 올라가요!”

이예주는 다급히 그 뒤를 쫓아 바위틈을 디디며 소리쳤다. 

그러나 아이는 아까 앉혀 둔 그대로 인형처럼 앉아 있을 뿐, 제게로 다가오는 쟈니아를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람! 반대쪽으로 가요! 도망가라구요!”

이예주는 다시 한 번 목이 터져라 외쳤다. 여자가 부쩍 람과 가까워졌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빠, 빨리. 빨리……!”

턱. 

마침내 쟈니아의 한 손이 람이 있는 곳의 암벽을 턱 부여잡았다.

“하악! 됐어!”

한 쪽 발마저 고갯마루 위로 올린 여자가 낄낄거렸다.

“착하지? 얌전히 있으렴.”

“람!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말라고!”

쟈니아의 두 발이 고갯마루 위에 안착했다. 

이예주는 허겁지겁 고갯마루로 발을 뻗었다. 

하지만 고작 한 마디 차이로 닿지 않았다.

완전히 위에 올라 선 여자가 칼을 든 채 람에게 다가가려 들었다. 

더 이상 앞 뒤 가릴 새가 없었다. 

이예주는 절벽에 매달린 상태로 이를 악물고 도약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고갯마루 위로 펄쩍 뛰어오른 그녀는 그대로 쟈니아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뒤엉킨 채 비좁은 공간에 엎어졌다. 

한 바퀴를 뒹굴고 두 사람은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멈추었다.

“씹어 먹을 계집! 방해하지 말라고!”

쟈니아가 벌떡 일어나며 들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고작 몇 초 앞서 고개를 숙여 그것을 피한 이예주가 다치지 않은 손을 뻗어 여자의 뒷머리를 와락 움켜쥐었다.

“너야말로 우리 그만 괴롭히고 제발 좀 꺼져!”

“아악!”

쟈니아가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댔다.

“이런 미친 계집이……!”

“지는 또라이 괴물 같은 게!”

이예주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힘껏 흔들었다. 

쟈니아가 무아지경으로 칼을 휘둘렀다. 

몇 번을 베일 뻔한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예주는 빈틈을 노렸다.

여자가 또 한 번 제게 칼을 휘두르기 위해 손을 든 순간, 득달같이 달려들어 칼을 쥔 손목을 왁 물었다. 

“아악!”

챙캉-! 

쟈니아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칼을 놓쳤다. 

“꺼져! 꺼지라고!”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한 팔로 이예주의 머리를 마구 때리고 밀쳐냈다. 

그럼에도 이예주는 개처럼 여자의 살을 물어뜯은 입을 벌리지 않아싿.

이예주를 한 손으로 떼어 내는 게 여의치 않자 쟈니아가 발을 들어 그녀의 명치를 세게 걷어찼다. 

퍽.

“헉!”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꽉 다물려있었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예주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르며 좁은 가장자리로 나가떨어졌다.

“하아, 하! 하찮은 년! 나는 신이 될 자질을 모두 갖췄다고 했지!”

쟈니아는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이예주를 보며 그녀가 물었던 팔을 들여 보았다. 

어찌나 세게 물어 뜯은 건지 팔목의 살점이 한 움큼이나 패여 떨어질듯 덜렁거렸다. 

그러나 이미 썩어 문드러진 피부는 통증이 느껴지지도, 피가 흐르지도 않았다.

“이런 것쯤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어. 너같이 미천한 인간의 신체를 가진 것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겠지.”

여자가 덜렁거리는 살점을 제 손으로 잡고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이예주의 머리 앞에 던지며 하얀 얼굴로 미소지었다.

“자. 이제 진짜 신이 될 순간이야.”

몸싸움으로 인해 떨어졌던 칼을 주워든 쟈니아가 다시 아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으, 으으…….”

이예주는 배를 부여잡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나기가 무섭게 다리가 풀썩 꺾였다. 

“안 돼…….”

여자가 멱살을 잡듯 족쇄에 연결된 사슬을 부여잡고 아이를 우악스럽게 들어올렸다. 

로브가 흘러내려 헐벗은 작은 몸이 드러났다.

“하…… 천 년 전에 내핵으로 내가 먼저 내려갈 것이 아니라 남편을 보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막 태어나 힘이 각성하지 못한 약한 널 먹는 것은 내 차지가 되었을 텐데.”

여자가 칼로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그어 내리며 지껄였다. 

여린 살은 힘을 주지도 않아도 쉽게 갈라져 붉은 물을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이예주는 눈이 휘까닥 뒤집히는 것 같았다.

“하지 마.”

이예주는 다시 절벽을 긁어내리듯 잡아 힘겹게 일어섰다. 

“너도 그간 에너지를 소비하여 용암을 일으키느라 힘들었겠지. 그것도 이제 끝이야. 너는 어차피 여신의 권능 중 하나였으니.”

여자가 칼을 든 손을 높이 쳐들었다. 날카로운 칼 끝이 정확히 아이의 왼쪽 가슴을 향했다.

“이제 다시 여신에게로 흡수 될 때지.”

나지막이 마지막 말을 중얼 거린 쟈니아가 그대로 아이의 가슴에 칼을 내리 꽂으려던 그 순간.

“이야아악!”

이예주는 온 몸을 내던져 여자의 몸통을 들이박았다. 

퍼억―

“어억!”

이예주와의 거센 충돌이 여자를 벼랑 끝으로 밀쳐냈다. 

균형을 잃은 몸은 절벽 아래 시뻘건 용암 위로 속절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들이박았던 이예주의 몸 또한 떨어질 듯 휘청거렸다. 

차르락― 

충격으로 놓친 사슬이 아스라하게 쟈니아의 손끝을 스쳤다. 

그 순간 추락하는 인간은 생명줄을 붙잡듯 그것을 아득 붙잡았다. 

눈 깜짝할 새 아이의 몸이 아래로 같이 딸려 들어갔다. 

“안 돼!”

이예주는 상황을 인식 할 새 없이 아이에게 다친 손을 뻗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새 일어났다.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두 사람은 순식간에 절벽 밖으로 밀려났다.

“으흑!”

이예주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끔찍한 고통이 뇌리를 강타했다. 

순간 하얗게 점멸했던 눈앞은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시각을 되찾았다.

“자, 잡았어.”

그녀는 절벽 끄트머리에 거꾸러질 듯 상체를 걸친 채 다친 팔로 아이의 손목을 붙잡은 상태였다. 

나머지 팔로 하체마저 끌려 내려가지 않도록 가까스로 벼랑 턱을 잡았다. 

아래를 내려 보니 제게 손목이 잡힌 아이가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예주는 웃었다. 

그와 동시에 어깨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으흐으, 절대 놓치지 마요, 람.”

그녀는 신음을 참으며 악착같이 아이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내가, 내가 곧 구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절대 내 손 꼭 잡고 있어요, 람. 응?”

“……람?”

아이가 마주한 이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내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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