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09)화 (311/319)

한 칸, 한 칸 사다리를 거꾸로 오를 때마다 눈앞이 하얘졌다, 노래졌다. 

당연했지만 내려올 때 보다 올라가는 길은 훨씬 더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가쁜 숨이 차올랐다.

“허억, 헉. 허억.”

발판을 잡은 손에 땀이 차서 미끄러웠다. 

어깨가 빠질 것 같아 아이를 놓칠 뻔 하기도 하고, 발을 잘못 디뎌 그대로 추락할 뻔하기도 했다. 

구덩이를 기어오르는 동안 고비가 몇 번이나 이예주의 목을 졸랐다.

람이 정신을 차리고 제 힘으로 그녀에게 매달려 있었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지 모른다. 

얼마나 높이 올랐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컴컴한 구덩이 한 가운데에 매달려 자꾸만 흘러내려가는 아이의 몸을 추켜올릴 때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줄줄 쏟아졌다.

“흐, 흐으으, 흐흑…….”

눈앞이 아찔해질 때마다 그녀는 짐승처럼 흐느껴 울었다.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같이 구덩이 밑바닥으로 떨어져 죽을지 언정 이예주는 끝끝내 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덩이의 끝까지 거꾸로 올랐을 때, 그녀는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허, 허윽. 헉!”

입구 턱에 상체만 놓은 채 이예주는 거칠게 헐떡였다. 

죽을 것 같았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동안 숨을 껄떡 껄떡이고 있자니 바깥바람에 잔뜩 열이 올라 있던 몸이 식었다. 

가무룩 잠겨 있던 시야도 조금씩 회복 되는 것 같았다.

“으……!”

이예주는 몸을 일으켜 나머지 하체도 위로 끌어올렸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구덩이를 지키고 선 보초가 있었단 사실을.

“헉!” 

그녀는 날카롭게 숨을 집어먹으며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드르릉! 커어…… 드르렁!” 

아까 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보초 한 명이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

긴장이 풀려 이예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다리족 놈들의 경계가 예전보다 엄청나게 풀어져 있었다. 

족장이 죽어서인지 아니면 십년 간 그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구덩이 속을 내려갈 생각을 안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람을 죽이려는 인간들에게는 참으로 애석하게도, 이예주에겐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제 등 위에 늘어져 있는 람을 추켜올려 제대로 업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를 데리고 빨리 이 빌어먹을 신전에서 벗어날 차례였다.

“드르렁…… 커, 컥!”

완전히 곯아떨어진 보초의 앞을 지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예주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는 무너진 신전 터는 아까의 부산스러움이 거짓말처럼 적막했다. 간간히 불이 켜져 있던 초소마저 모두 불 꺼진 상태였다.

이예주는 조금 안심하고 터를 가로질러 허겁지겁 숲길 쪽으로 달렸다. 그녀가 탑을 지나쳐 신전으로 가는 길목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거기, 누구야!”

그 순간, 뒤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예주의 몸이 우뚝 멈췄다. 소스라치게 놀라 얼어붙어 있던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어둠 속에서 굽이치는 밝은 금발이 보였다.

이예주를 발견한 인간의 눈이 부릅 홉떠졌다. 

“네가 어떻게!”

탑에서 튀어나온 쟈니아를 보고 경악에 가득 차는 것은 이예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이예주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쟈니아의 얼굴이 돌연 험상궂게 찡그려졌다.

“그거…….”

여자의 시선이 제 등 뒤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예주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시발.”

하필 걸려도 저 년한테. 

여자가 불현듯 제 품을 뒤적였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예주는 그대로 몸을 돌려 숲 속으로 마구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감히 어딜! 거기서!”

여자가 득달같이 외쳤다. 

탕―! 

그와 동시에 고요했던 숲속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막 지나친 나무에서 파편이 팍 튀었다.

“저, 저 미친년!”

이예주는 희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쟈니아가 권총을 든 채 악마같이 일그러진 얼굴로 쫓아오고 있었다. 

이예주는 평평한 길은 포기하고 나무가 빽빽이 자라있는 거친 숲을 달렸다. 

미친 괴물이 총을 쏘는 이상 별 수 없었다. 

등에 업힌 람을 앞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틈조차 없었다.

탕, 타앙―! 

연달아 총알이 날아와 근처에 박혔기 때문이다.

“허억, 헉!”

구덩이 속을 기어 나온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이예주의 숨이 다시 거칠어졌다.

“거기서!”

“망할년, 너 같으면 서겠냐!”

여자의 외침에 대답하던 그녀는 재빠르게 앞에 있는 나무 뒤로 꺾었다. 

탕-! 

곧바로 나무에 총알이 와 박혔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 때 숲 저편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바로 다리족들의 비행선에서 들었던 비상 사이렌 소리였다. 

“람!” 

이예주는 어깨를 들썩여 미동 없는 아이를 깨웠다. 

쟈니아 년도 모자라 다리족까지 쫓아오기 시작하면 잡히는 것은 십상이었다. 

“람, 일어나 봐요! 그만 일어나요!”

체력은 이미 고갈 된지 오래였다. 

그녀는 지금 악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 하나로.

탕! 탕―! 

총성이 연달아 울려 퍼지고, 간발의 차이로 그것을 피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흐으! 람!”

순간적으로 휘청이던 몸이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자 걸음이 지체됐다.

“검은 파편을 내놔!”

지척까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식은 땀을 흘리며 다시 방향을 틀어 달렸다. 

이제 한계였다. 이대로는 안됐다.

“어디 있지? 분명 이쯤이었는데.”

분명 이쪽 어딘가에 베니가 찾아냈던 탈출구가 있을 텐데. 

그녀는 정신없이 뛰면서도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숲 속으로 도망을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베니와 아이들이 빠져나간 개구멍으로 몰래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지형이 많이 바뀌어서인지 방향이 영 헷갈렸다. 

쟈니아에게 들키지 않도록 상체를 바싹 숙인 채 이리저리 움직이던 이예주는 불쑥 나무 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발견했다.

“저, 저기!”

그녀는 그쪽을 향해 달렸다. 

얼마 안 가 시야가 확 트였다. 

숲이 끝났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지 않았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새도 없이 그녀는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아!”

그리고 마침내 탈출의 길목에 들어선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안면 위로 문득 뜨거운 바람이 훅 불어 닥쳤다.

이예주는 걸음을 급격히 멈췄다. 

타다닥, 발치에 있던 작은 돌멩이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 이게…….”

그녀가 거칠게 호흡을 들이켰다. 

숲 끝은 더 이상 설원이 아닌 천길 낭떠러지였다. 

그리고 그 밑으론 넘실대는 용암 바다가.

“어, 어떻게…….”

들끓는 용암이 모든 것을 불사르고 있었다. 

눈족 마을에서 보았던 신인류 아이의 말이 맞았다. 

용암이 모든 세상을 집어 덮친 것이다.

“어디 있어! 어디로 간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그때 그녀를 놓친 쟈니아의 괴성이 숲 속에 고래고래 울려 퍼졌다. 

타앙―!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예주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당장 몸을 숨겨야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낭떠러지 아래 움푹 들어간 협곡과 아래의 암벽 사이에 위치한 평평한 고갯마루가 보였다. 

그녀는 더 따질 새도 없이 절벽 밑으로 몸을 내렸다. 

한 손으로 벽 틈새를 꽉 움켜쥐고 또 다른 한쪽으론 필사적으로 람을 부여잡은 채, 그녀는 아슬아슬한 암벽타기를 했다. 

“하으, 하.”

검붉은 용암이 멀지 않은 절벽 아래까지 튀어 올랐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유황 냄새와 살이 벗겨질 만큼 뜨거운 기운 때문에 땀방울이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이예주는 부들부들 떠는 발을 있는 힘껏 뻗어 간신히 봐둔 장소에 올라섰다. 

그리고 서둘러 등어 업고 있던 람을 내려놓았다. 

다급한 손길로 사슬을 풀고 로브를 들추자 반짝 뜬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람!”

어느 사이 깬 건지, 아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이예주는 깨어난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살쳤다. 

샅샅이 훑었지만 총에 맞거나 피가 흐르는 상흔은 없었다.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야. 이예주는 울먹였다. 

뛰는 동안 제 등 뒤에 있는 람이 혹시라도 총을 맞을까봐 얼마나 간담이 서늘했는지 모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검은색 눈동자가 무미건조하게 주시했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녀는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나 워낙 급박한 상황인지라 뭐가 이상한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람, 정신 차리고 있어요. 나 잠깐 저 망할 년 좀 유인하고 올게요.”

이예주가 빠르게 속삭였다. 

아직도 위에서 쟈니아가 그들을 찾으며 꽥꽥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대론 언제 들킬지 모른다.

“여기 벽에 딱 붙어서 꼼짝 말고 있어요. 알았죠? 응?”

이예주는 흘러내린 제 로브를 다시 벗은 어깨 위에 꼼꼼히 여며주었다. 

아이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몸을 일으켰다. 

쟈니아가 찾을 수 없게 람을 꽁꽁 숨겨 놨으니 그걸로 안심이었다.

그녀는 다시 절벽을 기어올랐다.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었다. 

유인을 하든, 죽이든, 여기까지 쫓아온 방해물을 제거해야 했다.

홀몸이라 이예주는 보다 가볍고 빠르게 지상 위에 올랐다. 

멀지 않은 숲 속에서 쟈니아가 자신을 찾으며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예주는 최대한 람을 숨긴 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오른편으로 빙 돌아 다시 숲속으로 달렸다.

“야!”

커다란 목소리로 여자를 부르자 여자가 귀신처럼 휙 몸을 돌렸다. 

“이리 와서 한 판 붙던가!”

흘긋 뒤를 보자 여자가 부리나케 제 뒤를 쫓아왔다. 

이예주는 쟈니아를 유인하기 위해 숲 속 깊숙이 내달렸다. 

탕―! 

“윽!” 

그러나 얼마 더 걷지 못하고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깨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자 뜨뜻한 핏줄기가 팔을 타고 바닥으로 뚝, 뚝 흘러 내렸다.  

“하아, 하아…… 미친, 내가 총을 다 맞네…….”

터벅, 터벅 걸음을 멈춰선 이예주는 욕설을 읊조렸다. 

정말로 욕이 튀어나올 만큼 아팠다. 

관통된 건지 스친 건지 알 수 없었다. 팔을 돌아 볼 엄두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나 정말 죽는 거 아닐까? 아직 가슴에 난 구멍 세 개도 메워지지도 않았는데…….

타박- 그녀의 등 뒤로 또 하나의 발걸음 소리가 멈춰 섰다. 

이예주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지긋지긋한 면상이 당도해있었다.

“하…… 또 당신이네.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예주는 숲 쪽이고 여자의 등 뒤는 절벽이었다. 

위치가 반전되었다. 

아직 람을 숨긴 절벽 쪽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초조한 낯을 숨기며 도발했다.

“뭐해, 가까이 안 오고?”

“…….”

“죽인다며?”

“검은 파편은 어디 있죠?”

여자는 더 가까워지지 않고 대뜸 람에 대해 물었다. 이예주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없어.”

“…….”

“내가 방금 삼켰어.”

“…….”

“이제 내가 신이야.”

어린 아이를 놀리 듯 해맑게 조롱하자 여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이 퍽 유쾌했다.

“……당신.”

“…….”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죠? 그때 분명 창에 찔려 죽었을 텐데.”

쟈니아가 물었다. 

그 사이에도 팔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아 이예주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건,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당신이야 말로 어떻게 살아 있어? 그리고 당신 뒤에 달려 있던 족장은?”

“준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검은 파편을 삼킨 탓에 눈족 족장은 죽었어요. 그 덕에 나는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족장이 죽은 후로 괴물처럼 합체 되어 있던 족장의 몸도 사라졌다는 뜻 같았다.

족장이라도 뒈졌으니 그나마 인류에게 손톱만큼의 희망이 생겼네. 

우스운 생각이 들어 이예주가 픽 실소를 터뜨렸다. 

“그때 당신을 그냥 놔두는 게 아니었는데.”

여자가 웃는 그녀의 모습에 ‘철컥’ 권총을 겨눴다. 

“마지막 보루로 남겨 둘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잡아먹었어야 했어.”

그들의 대화에서 언제나 웃는 것은 이예주가 아닌, 쟈니아였다. 

이예주는 이제야 쟈니아가 왜 그렇게 자신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저 벌레가 버르작 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쟈니아를 마주 보고 있는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쏴.”

이예주는 순순히 양 팔을 벌렸다. 

람도 구해서 숨겼고, 이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자포자기가 아니었다. 

사실 쟈니아가 자신을 못 죽일 것이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문’이 열리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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