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의 앞뜰은 계단 아래와는 달리 한산했다.
다리족 놈들도 보이지 않았다.
포화 상태인 인간들을 통제 하는데 전력이 거의 투입되어 그런 것 같았다.
“2팀은 보고 후 해산!”
이예주가 뒤따른 무리는 선두에 섰던 대장장이의 지시 하에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한 무리의 인간들은 신전 입구 쪽으로, 또 다른 무리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예주는 흩어지는 인간들의 뒤편에서 우왕좌왕했다.
당장 신전 안으로 들어가 람이 아직도 그 황금 의자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까 전 쟈니아가 창을 내리꽂았던 어린 람을 똑똑히 보았지 않은가.
입구에 있는 기둥 사이로 보이는 신전 안은 무척 밝았다.
해가 저물어 시야가 어둑했기에 지금 이렇게 눈족들 사이에 껴 있는 것이 가능했지, 밝은 곳에 있다간 금방 정체를 들킬지 모른다.
짧은 사이 수 없이 갈등하던 이예주는 가까스로 늦지 않게 신전의 오른편으로 가는 일행 뒤에 붙어 섰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이 신전 뒤뜰로 가는 방향과 일치했다.
대장간이 있던 탑의 지하, 그쪽으로 가는 것일지 모른다.
다행히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녀가 뒤따른 무리는 신전의 외벽을 돌아 뒤뜰로 곧장 향했다.
‘문’을 넘어 오기 전에도 그러했지만 잊혀진 신전 터로 가는 쇠창살 앞을 다리족 몇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계단 밑에서부터 검문을 철저히 하여 그런지 깊게 눌러 쓴 후드가 걷히는 일 없이 수월하게 철문을 지나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 탑에 오가는 길을 철저하게 검문할 필요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인류는 이제 철저한 약자였다.
그들의 주인인 검은 파편은 어린 모습으로 변해 이미 놈들의 수중에 있는 상태고, 자신은 10년 전에 죽은 인간일 테니 말이다.
“서두르게들.”
선두에 선 인간이 뒤를 흘깃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이예주는 적당히 걸음을 늦추다가 이내 소리소문없이 옆으로 빠졌다.
아까보다 수가 줄어든 눈족 인간들이 그들 사이에 이물질이 끼어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지도 몰랐다.
이예주는 난 길에서 벗어나 나무와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걸었다.
해가 완전히 저문 숲은 온통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눈족 놈들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눈이…….”
지금의 숲은 그녀가 기억하는 숲과는 많이 달랐다.
나무를 많이 베어낸 건지 빽빽하던 정경은 한 눈에 보아도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복하게 쌓여 있던 눈이 없었다.
다 녹아내린 듯 진흙이 진 땅바닥만 있을 뿐.
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나온 신전과는 달리 잊혀진 신전 터는 분주했다.
이예주가 따라온 눈족 인간 무리는 도달하자마자 서둘러 탑 쪽으로 사라졌다.
이예주는 그들 틈에 다시 합류하지 못했다. 숲을 나오려던 찰나 무거운 수레를 끄는 신인류들이 느릿느릿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
별수 없이 좀 기다렸다 때를 봐서 몰래 진입해야했다.
이예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풀숲 뒤에 몸을 숨겼다.
그녀에겐 바로 어제 탈출했던 공간인데, 다시 온 무너진 신전 터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인간들이 노예로 부리는 신인류들이 끊임없이 짐들을 탑으로 옮기고 있었다.
다리족 인간들 몇이 그 사이를 익숙하다는 듯 걸어 다녔다.
부서진 채 오랫동안 방치 되어 있던 옛 건물의 잔해들은 거의 없어지고 알 수 없는 건물들이 몇 채 들어섰다.
다리족 놈들이 쓰는 초소 같아 보였다.
“……어?”
초조하게 밖을 살피던 이예주는 불현듯 눈에 띄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천 년 전, 검은 파편이 잠들어 있는 내핵으로 가기 위해 인간들이 뚫어놓은 구멍.
그녀가 갇혀 있었던 까마득한 구덩이, 그곳에서 야광봉을 든 다리족 인간들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병, 어땠나? 천 년 전 인류의 위대한 업적을 직접 보고 온 느낌이?”
“어, 엄청 깊었습니다! 과연, 병장님의 말씀처럼 깊고 대단했습니다!”
“하하! 새끼, 안 믿더니. 내가 십년 전에 비행선에서 영상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까 그러네!”
위에 있던 군인 한 명인 올라온 두 명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며 말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까지 용암이 덮치지만 않았어도, 네놈들도 core1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군.”
“저도 안타깝습니다!”
상병은 흡족하다는 듯 웃다가 불쑥 물었다.
“그래. 일은 잘 마치고 왔나? 단단히 고정해두고 왔겠지?”
“네, 물론입니다! 놈이 전혀 반항하지 않아서 수, 수월했습니다!”
“그래도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놈이 천 년 전에 어떻게 인간을 멸종시키려 들었는지 내가 수차례 말했지? 우리의 손에 인류의 사명이 달렸다. 둘 다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키도록! 알겠나?”
“네!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두 병사가 기합이 바짝 든 채 답했다.
그런 둘을 뒤로하고 상병이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무너진 신전 터의 외곽에 지어진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두 명은 서로 멀어져 각각 자리를 잡고 거대한 터널 주변을 지켰다.
“저기에…….”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었다. 저곳에 아까 보았던 어린 람이 갇혀 있는 것을.
브레든과 함께 갇혀 있었을 때는 구덩이의 중간 측 깊이에 탑의 지하 공간과 이어진 문이 있었다.
그래서 사슬에 매달아 던지는 무식한 방법으로 인질을 가둬두었었는데, 지금은 까마득한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는 수단을 만든 것 같았다.
“하. 그래도 다행이야.”
분명 얼마 전 피막을 뚫고 태어났다 그랬다.
이예주는 여려 보이던 어린 람의 발목이 저와 같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바보처럼 웃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은 어둠에 가려져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다시 구해줄게요.”
다리족 인간 두 명이 지키고 선 구덩이 입구를 예의주시하며 이예주가 속삭였다.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으면 그걸로 됐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구하면 되니까.
기다려요, 람.
차갑게 식은 손끝을 애써 굽혀 다잡으며 이예주는 다짐했다.
그녀는 숲 속에 숨죽인 채 몇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밤이 깊어졌다.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인간과 신인류들의 그림자도 점점 자취를 감췄다.
이제 잊혀진 신전 터에 들리는 인기척이라고는 보초를 서는 다리족 군인들과 드물게 탑에서 나와 신전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는 회색 로브 한두 명 뿐이었다.
이예주는 상병이 사라진 후 보초를 서는 다리족의 자세가 시시각각 느슨해지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였다.
“하-암”
때마침 대충 짝다리를 짚고 섰던 다리족 한 명이 찢어지게 하품을 했다.
“야, 나 못 참겠다. 1시간만 눈 좀 붙이고 올테니까 보초 똑바로 서고 있어라.”
“예! 다녀오십쇼!”
놈은 선임인건지 같이 지키고 선 다른 한 명을 툭 치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꽤 떨어진 숲 근처의 초소 쪽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다리족 군인을 바라보고 있던 이예주의 눈에에 빛이 돌았다.
비록 총을 들고 있지만, 저 놈만 어떻게 처리하면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놈은 선임이 하고 간 말 탓인지 느슨해졌던 자세를 바로잡고 처음처럼 경계했다.
이예주는 다시 숨죽였다. 놈이 다시 경계를 늦추고, 흐트러졌을 때. 그때를 노려야 한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눈을 붙이러 간 놈이 말한 1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하나 남은 놈이 선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빛나는 달 주변으로 어스름한 구름이 지나갔다.
자정이 넘은 것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탑에서 기어 나오는 눈족 인간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수풀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이 없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눈 밟는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에 치이는 건물 잔해조차 없어서 이예주는 빠르게 구덩이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도달했다.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그녀는 허겁지겁 계단을 올랐다.
“으음…….”
계단 끄트머리에 올라서자, 하나 남은 다리족 인간은 반쯤 무너진 기둥에 기댄 채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상체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다른 놈이 오기 전에 빨리.’
이예주는 곧바로 아까 전 놈들이 빠져나온 지점으로 이동했다.
졸고 있는 다리족 놈의 앞을 지날 때는 너무 떨려서 오금이 다 저릴 정도였다.
숨까지 참으며 걸음을 옮긴 결과 다행히 놈을 깨우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마주한 구덩이 속이 까마득했다.
훤한 대낮에 보았을 때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는데, 밤에 보니 꼭 괴물의 식도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숨을 삼키며 그녀는 내려가는 방법을 확보했다.
그녀의 발치 앞 벽에 사다리가 붙어 있었다.
다리족의 비행선을 탈출할 때 환풍구에 달려 있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쇠사다리였다.
“음냐, 음…….”
이예주는 입을 쩝쩝대는 군인의 눈치를 보며 살며시 아래로 발을 내렸다.
죽을 둥 살 둥 빠져 나온 곳을 다시 제 발로 기어들어가야 한다니, 정말이지 끔찍했다.
게다가 자신은 구덩이 밑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지 않은가.
고소공포증으로 눈앞이 아득해지고 종아리에 경련이 일었다.
하지만 서둘러야했다. 어린 람을 다시 데리고 올 때까지 보초가 혼자 졸고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이예주는 이를 악물고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구덩이 위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다리족 한 명만이 남겨졌다.
* * *
“허억, 허억.”
이예주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몸을 내렸다.
차라리 빛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지. 안전장치 하나 없이 얼마나 무모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제 눈으로 확인 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아, 이제 곧이야, 곧.”
사다리를 타고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며 이예주는 계속해서 자신을 세뇌했다.
확실히 시야가 컴컴하니 없던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얼마나 깊은 곳까지 내려왔을까.
흘깃 내려다 본 아래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빛!”
한 번 구덩이 밑바닥에 처박힌 적 있는 이예주는 그것이 뭔지 잘 알았다.
더러운 쓰레기들 사이에 섞여 있던 야광 물질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드디어 구덩이의 바닥에 거의 다 도달한 것이다.
이예주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희미하기만 하던 빛은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점점 밝아졌다.
이윽고, 그녀는 사다리의 마지막 발판을 밟고 폴짝 아래로 뛰어내렸다.
“람!”
애써 찾을 것도 없었다.
버려진 더러운 것들, 그중 가장 깊숙한 곳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작은 몸이 보였다.
이예주는 미친 듯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람! 람, 괜찮아요?”
혼절한 듯 눈을 감고 있는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벌거벗은 몸은 무척 가냘프고 지저분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까 쟈니아 년에게 창으로 꿰뚫렸던 상처가 자국 하나 남지 않은 채 사라져 있다는 것 뿐.
“흐…….”
얼마나. 얼마나 에너지를 많이 소비했으면 다시 천 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간 걸까.
연약한 어린 아이의 외형으로 변한 남자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 좀 실감이 났다.
‘문’을 넘기 전, 자신은 결국 람을 구해내지 못한 것이다.
“내가 왔어요, 람.”
이예주는 정신없이 입고 있는 로브를 벗어 아이의 몸을 감쌌다.
“흐, 흐윽. 눈 좀 떠봐요, 응?”
버려진 구성물 중 하나처럼 늘어져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람을 조심스럽게 들어 안았다.
쩔꺽. 지겹게도 들은 사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얇은 목에 채워진 무거운 족쇄로부터 굵직한 사슬이 이어져 있었다.
사슬의 끝은 커다란 말뚝에 둘둘 메어진 채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내가, 내가 구해줄게요.”
이예주는 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이의 고개를 들어 족쇄를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족쇄에는 열쇠 구멍이 없었다.
“……망할 새끼들.”
뿌득 이를 간 이예주는 아이에게 덮어준 로브 안주머니를 뒤적여 검은색 열쇠를 꺼냈다.
창과 함께 그녀가 과거에서 가져온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녀는 별 수 없이 람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물쇠가 달린 말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을 망설임 없이 자물쇠의 구멍 속에 쑤셔 넣었다.
철컥-
“됐다.”
천만다행이도 남자가 만들어준 만능열쇠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 역할을 다했다.
이예주는 재빨리 족쇄에 매달린 두터운 사슬을 풀었다.
쩔그럭, 쩔그럭.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사슬 끝을 잡고 다시 아이가 널브러진 곳으로 돌아온 이예주는 낭패어린 표정을 지었다.
람을 데려가려면 이 길고 두터운 사슬까지 가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제 로브로 아이를 둘둘 싸맸다.
안주머니에 다시 열쇠를 집어넣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아이를 싸맨 로브 위로 사슬을 헐겁게 둘둘 말았다.
그 방법밖엔 다른 수가 없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후 강보에 싸인 것 같은 어린 람을 제 등위에 업었다.
“으으!”
그녀는 벽을 부여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여전히 미동 없었다.
“이제 가요, 우리.”
이예주는 사다리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아무래도 멀쩡하지 않은 몸에 무게가 더해져 그런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온 힘을 쥐어 짜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한 손을 뻗어 사다리를 움켜 쥔 그녀가 주문처럼 외웠다.
“더 컸던 토끼도 업어서 탈출 했잖아, 이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