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07)화 (309/319)

“십 년 전, 족장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검은 파편을 소멸시켰습니다.”

십년. 

머리맡으로 내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예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까 전 신인류 아이에게 들은 말과 일치하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소멸이 아니었지요. 질기고 질긴 놈은 죽기 전 끝끝내 악의 씨앗을 인간 세상에 남겨 두었고,  천 년 전 세기말 용암 대폭발에 이어 또 다시 대재앙이 초래했습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분명 이예주도 잘 아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귓속에 파고드는 여자의 말은 좀체 납득하기 어려웠다. 

람이 소멸했다고? 그럴 리 없잖아. 람이 어떻게, 람이 어떻게…….

“그간 악의 씨앗은 알 수 없는 피막에 쌓여 외부의 공격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때가 왔어요.”

무미건조했던 여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얼마 전, 드디어 놈이 피막을 찢고 나타났습니다. 모두 고개를 들어 보십시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예주 또한 제 앞으로 켜켜이 있는 인간들이 먼저 몸을 일으키길 기다렸다가 상체를 들었다. 

“아, 아니! 저게……!”

사람들이 계단 위를 보며 경악했다. 

쩔그럭! 거친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계단으로 고개를 돌린 이예주의 눈에 비친 것은, 거칠게 사슬을 끌며 쟈니아 옆으로 다가온 다리족 군인이었다.

그리고 놈이 개 끌 듯이 잡아끄는 사슬 끝에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있었다.

얇은 목에 두꺼운 족쇄가 채워져 있는.

이예주는 멍하니 쟈니아의 옆까지 짐승처럼 질질 끌려온 아이를 바라보았다. 

“일어나, 이 새끼야!”

힘없이 널브러진 아이를 군인들이 마구 걷어찼다. 

그럼에도 좀체 반응이 없자 한 명이 기다란 장대로 뒤에서 찌르듯 작은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쟈니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형상이 되었다.

“……검은 안개?”

열 살 남짓의 앳된 얼굴, 검은 머리카락, 검은색 동공. 

방금 전 이예주가 ‘문’ 안에서 줄기차게 이야기 하고 온 이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러나 같은 검은색임에도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는 텅 빈 눈동자가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람?”

이예주는 다리족들의 비행선에서 보았던 천 년 전의 람을 떠올렸다. 

기괴한 살덩어리를 찢고 태어난 어린 람. 

쟈니아 옆의 아이와 그 기억을 겹쳐보니 확신이 들었다. 

저것은 검은 안개가 아닌.

“람.”

그때였다. 

“저 쳐 죽일 새끼!”

이예주보다 앞 쪽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아이 쪽을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했다. 

그것은 필두였다.

“저 새끼 때문에 우리가 이런 꼴을 당했어!”

“망할놈! 왜 아직도 살아 있어서는!”

“십 년 전에 죽지 않고, 왜 또!”

사람들이 너도나도 어린 아이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예주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를 올려다보는 눈들이 하나같이 살기에 가득 차 있었다. 

“어서 저 놈을 죽입시다!”

“죽입시다! 죽여요!”

“구원자님! 검은 파편을 죽이고, 우리를 구원하소서!”

“죽이자! 죽이자!”

한두 명의 외침은 곧 이어 군중의 구호로 바뀌었다. 

장내가 순식간에 흉흉한 기운으로 물들었다. 

이예주는 끔찍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이와 같은 일을 그녀는 바로 전에 겪고 왔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검은 파편이라는 잘못된 울분. 

광기에 가득 찬 인간들. 

그 끝에서 마침내 괴물이 꺼내든 창.

“와아아아―!”

쟈니아가 높이 쳐든 삼지창을 보고 사람들이 열광했다. 

이예주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안 돼.”

이예주는 입술을 달싹였다. 

제발, 제발 그만해. 그만 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마구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분한 사람들을 밀고 나가는 것은 이전 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그만!”

제발 좀 그만해! 그녀는 비명처럼 외쳤다. 

기껏 ‘문’을 넘었더니 또 다시 람의 죽음과 마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울음이 쏟아 질 것 같았다.

“대재앙의 마지막 순간, 검은 파편의 곁에 있는 인간 여자.”

퍽, 사람들의 어깨를 거칠게 쳐냈다. 

“이봐!” 

밀쳐진 인간들이 그녀를 보고 욕을 지껄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맨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 밖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여라! 죽여라!”

“검은 파편을 소멸하여…….”

성난 군중 사이로 쟈니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예주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부터 제일 앞줄까지 도달하는 길이 아직도 까마득했다. 

게다가 앞으로 간다하더라도, 다리족 놈들이 이중으로 서서 계단을 막아서고 있었다.

“제발, 제발!”

잇새로 울음이 새어나왔다. 

남자는 제 목숨이었다. 검은 안개는 제때 치료 받지 못하면 그녀가 죽을 것이라 했다. 

나보고 어쩌라고! 나보고 대체 어쩌라고!

“모든 인간들을 지옥 불에서 구원하고 신이라 불리리라.”

채 가까운 곳에 가지도 못했는데, 삼지창이 어린 람 위로 자비 없이 내리 꽂혔다. 

푸욱―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이예주의 발걸음도 멈췄다.

“와아아아! 구원자님! 아아, 구원자님!”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대로변이 떠나가라 터져 나왔다. 

그 사이로 이예주 혼자만이 가만히 서서 계단 위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족들이 다시 만든 검은색 삼지창이 아이의 가슴팍 한가운데를 정확히 관통해 있었다. 

“아…….”

절망하는 것은 오로지 이예주 하나뿐이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보며 인간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이예주는 어린 람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아이는 창에 찔린 처참한 모습으로 힘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창에 찔렸을 때처럼 가슴팍과 입 주변으로 피가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누구나 날카로운 것에 가슴이 관통당하면 피를 내리 흘리며 죽는다. 

그러나 처음 무릎 꿇린 자세 그대로 꼿꼿이 있는 아이는 피를 흘리지도 쓰러져 마지막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뭐, 뭐지?”

흥분으로 점철되었던 군중들이 서서히 이상을 감지했다. 

“뭐, 뭐야. 왜 안 죽는 거야.”

앞에서부터 시작된 술렁임이 순식간에 뒤쪽까지 전파되었다. 

죽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쟈니아는 무척 당황했다. 

숙덕거림이 더욱 커졌다. 

그때였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아이가 반짝 눈을 떴다.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 하나. 그것조차 후드를 깊숙이 눌러 쓴 채 앞쪽도 아닌 중간 측에 어중간히 껴 있는 상황인데. 

“어…….”

이예주는 그 순간, 아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 해산! 그만 해산!”

갑작스레 다리족 놈들이 나서서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술렁이는 군중을 빠르게 해산시켰다. 

놈들의 틈새로 쟈니아 년이 아이를 끌고 도망치듯 신전 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꺼멓게 죽었던 그녀의 눈에 다시 이채가 돌았다. 

검은 안개의 말처럼, 기회가 생겼다. 

람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도 구할 수 있는 기회.

사람들은 해산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장벽 안 눈족들의 주거지는 이미 포화상태였다. 

북한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똑같이 지어져 있었던 하얀색의 사각 집들 사이로 판자를 대충 덧대 세운 오두막 안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도 모자라 오늘 어린 람을 죽이려는 쇼를 보여주기 위해 장벽을 열고 수용한 인간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대로변은 여전히 돛대기 시장처럼 북적였다.

신전으로 가는 계단은 군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서서 오를 수 없었다. 

이예주는 계단 근처 골목에 서서 때를 기다렸다. 

하루는 족히 이 앞에 죽치고 있어야 하나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 ‘때’ 는 금방 찾아왔다.

“비키시오! 길을 비키시오!”

장벽이 있는 먼 곳에서부터 소란이 일었다.

“비키시오! 비키란 말 안 들려? 깔려 죽기 싫으면 어서 일어나라고!”

사람들이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예주또한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커다란 수레를 끌고 계단이 있는 곳까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예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쟈니아를 제외하고 온통 다리족들만 점령하고 있는 줄 알았던 눈족 땅에서 처음 보는 회색 로브 차림새들이었다.

제 앞을 지나치는 수레에 비켜서던 그녀의 얼굴이 문득 딱딱하게 굳었다. 

수레를 끄는 이들은 모두 인간이 아닌 귀와 꼬리가 달린 신인류들이었기 때문이다. 

“신원.”

“철을 구하러 장벽 밖에 나갔다 온 대장장이 1분대요.”

가장 선두에 서 있던 회색 로브가 신원을 확인하자 다리족 군인이 무전기를 꺼내 무전을 쳤다. 

그러자 얼마 후 위에서 자루를 든 한 무리가 달려 나왔다. 

계단위로 수레를 끌고 올라 갈 수 없으니, 구해 온 철을 자루에 담아 옮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모두 신인류였다. 그를 지켜보던 이예주의 표정이 흐려졌다.

다른 곳들에 비해 한산하던 계단 앞이 철을 내리고 옮겨 담는 과정으로 순식간에 번잡스러워졌다. 

회색 로브를 입고 있는 인간들이 내려오는 신인류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한 쪽으로 비켜섰다. 

공교롭게도 이예주가 숨죽이고 있는 방향이었다.

그들은 주워온 철을 옮겨 담기 바쁜 신인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듯하더니 이내 계단을 오를 채비를 했다. 

이예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용히 무리의 뒤 측에 바짝 붙어 섰다.

과연 대장장이들이란 확인이 끝나서인지, 다리족들이 쉽게 길을 터주었다. 

회색 로브 일행은 일렬로 서서 간단한 확인을 했다. 

제 차례가 다가오자 이예주는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같은 로브 차림임에도 들킬까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다리족들의 사이를 막 통과하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군인 중 한명이 이예주의 앞을 막아섰다. 

흐읍. 로브 속에 감춰져 있는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당신.”

남자가 총구로 이예주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예주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뿔싸. 눈족들이 입는 것과 회색 로브라는 것만 신경쓰느라 미처 생각 못했다. 

제 가슴팍이 온통 피범벅이란 사실을.

어떡하지? 이예주는 질끈 눈을 감았다. 

수만 가지 생각이 감긴 눈앞을 스쳐지나가던 그 순간.

“일하는 중 먹이를 먹고 온 건가?”

군인 놈이 낄낄 웃으며 지껄였다. 

눈을 뜨자 놈들이 모두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벽 밖에 신인류들이 득실거리고 있을 텐데 사람, 참…… 맛은 좋았소?”

놈이 음흉하게 물었다. 

이예주는 무슨 말인지 몰라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다음엔 나도 한 번 쫓아가야겠어! 놈들 앞에서 산 채로 뜯어먹는 맛이 어떤지 궁금하구먼!”

놈이 껄껄 웃으며 총구를 치웠다. 

주변에도 왁자지껄한 웃음이 전염됐다. 

이예주는 얼떨떨한 상태로 다리족들의 바리케이드를 지났다.

다른 대장장이들의 뒤를 따라 신전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새하얗게 변했던 머릿속이 차차 맑아졌다. 

너무 긴장한 탓에 군인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이제야 놈들이 제 가슴팍을 보며 웃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장벽 밖에 득실거린다는 신인류. 

놈들은 그녀의 로브가 피투성이인 것이 신인류를 뜯어먹었기 때문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눈족들은 괴물로 변하지 않기 위해 ‘먹이’를 주기적으로 먹어야 하니까…….

“우욱.”

헛구역질이 일어나 이예주는 황급히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얼마 후, 계단을 모두 오르자 거대한 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아…….”

이예주는 신전 입구를 보고 작게 침음했다. 

분명 ‘문’을 넘기 전에는 다 부셔지고 쓰러져 엉망진창이던 기둥과 기단들이 감쪽같이 복원되어 있었다. 

람이 파괴한 신전은 하루 이틀로는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범위였다. 

그녀는 그제야 제가 꽤 긴 시간을 넘어 미래로 왔다는 것을 체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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