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06)화 (308/319)

“인간님! 제발……!”

털이 달린 귀가 삐죽 솟은 젊은 남성이 그들 중 한 명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퍽- 군인이 그를 거칠게 걷어차며 소리쳤다.

“천한 짐승 새끼가 더러운 손으로 어딜! 신인류 더 이상 안 받는다고 했잖아! 다음!”

그러나 신인류는 개의치 않고 다시 엉금엉금 기어갔다.

“인간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아내가, 아내가 화상을 입어 많이 아픕니다! 저 일 잘합니다! 노예든 뭐든 될 테니, 제발 받아 주십시오!”

“제길, 꺼지란 말 안 들려?! 구원자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로 지금 사람도 간신히 받고 있는 와중인데, 동물주제에 어딜 기어 들어오려는 거야!”

“인간님! 부디 저희들에게도 아량을……!”

“이봐, 끌어내!”

다리족 인간이 고개 짓을 하자, 그 옆에 시립하고 있던 다른 군인들이 재빠르게 달려들어 남자를 거칠게 끌어냈다. 

“인간님! 인간님, 제발!”

아내와 함께 장벽 밖으로 끌려가는 신인류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아무도 그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만류하긴 커녕 모두들 차가운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며 비웃었다. 

천한 동물 주제에, 신인류 주제에, 하고.

“다음!”

“저요, 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손을 들고 아우성쳤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장벽 밖은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 있었다. 

모두들 장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안달 나 있는 것 같았다.

“이, 이게…….”

그러니까, 지금. 사람들이 하나같이 장벽 안 눈족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오려고 난리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다리족은 입구를 막아 선 채 그런 그들이 신인류인지 아닌지 검문 중이었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신인류들이 왜…….”

이예주는 제가 보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여긴 남쪽 대륙이었다. 그것도 눈족들의 주거지. 

다른 대륙에 있어야 할 신인류들이 대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내가 대체 어디로 온 거지?”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좀 더 밀도 있게 변했지만, 눈족들이 사는 마을이 틀림없었다. 

“이봐, 잠깐!”

그 순간 장벽 앞의 검문소에서는 또 다른 소란이 일었다. 

출입이 허용된 한 무리의 사람들 틈에 껴서 종종걸음을 치던 커다란 로브를 입은 이가 군인들에 의해 멈춰 세워졌다.

“너, 수상한데? 로브를 벗어봐.”

“저, 저 인간이에요. 인간 맞아요!”

“로브를 벗어보라니까? 뭐해, 벗겨!”

군인들이 그의 양 팔을 잡고 펄럭이는 옷자락을 훌렁 들쳤다. 

“아가, 뛰어!”

후드가 벗겨진 여자가 소리쳤다. 

확실히 다른 신인류에 비해 귀가 없어 인간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 호랑무늬 꼬리를 가진 아이가 헐레벌떡 튕겨져 나왔다.

“신인류다! 잡아! 죽여!”

놈들이 총을 겨눴지만 아이는 영리하게도 재빠르게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기어 들어갔다. 

군인들이 무서운 기세로 그 뒤를 쫓았다.

행렬 속에 뛰어든 아이가 아슬아슬하게 제가 서 있는 골목 앞을 지나치는 순간 이예주는 불쑥 손을 뻗어 아이를 끌어당겼다.

“흐……!”

“쉿.”

기겁하는 아이를 품에 끌어안은 채 이예주는 대로변으로부터 재빨리 등을 돌렸다. 

“빌어먹을! 이 쥐새끼 같은 게 어딜 간 거야!”

타다다닥- 간발의 차이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골목 앞을 지나쳤다. 

허억, 헉. 아이의 입에서 연신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이예주는 다리족 놈들이 완전히 지나쳐버린 듯하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처음 ‘문’을 넘어 온 골목 깊숙이 들어온 후에야 그녀는 비로소 품에 꽉 안고 있던 아이를 놓아주었다.

“괜찮아?”

로브자락에 드러난 아이는 빼짝 마르고 더러웠다. 

가무잡잡한 피부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두 동공이 두려움으로 가득 잠겨 있었다.

“자, 자, 잡아먹을 거예요?”

“뭐? 누굴?”

“저, 저를…….”

“내가 널 왜 잡아먹어. 나는 생식하는 취미 없…….”

뜬금포처럼 들려오는 아이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답하던 이예주는 아이의 시선이 제 가슴팍에 닿은 것을 확인하고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건, 그러니까…….”

우물쭈물 변명을 떠올리던 이예주는 한숨과 함께 진실을 털어놓았다.

“이건 누굴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내가 크게 다쳐서 그런 거야.”

“그럼…… 사제님은 저를 왜 도와주셨어요?”

벌벌 떨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를 보며 이예주는 이마를 짚었다.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단, 나는 사제가 아니야.”

“하지만 회색은 눈족 인간들이 입는 옷인데…….”

아이가 작게 웅얼거렸다. 

눈족 인간이 아니라고 해봤자 쉽게  믿을 눈치가 아니었다. 

이예주는 심각한 얼굴로 고뇌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문’을 넘기 전 상황은 분명, 장벽이 열려 많은 사람들이 신전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 중 신인류는 포함되지 않았다. 

애당초 남쪽 대륙에는 신인류가 펭양 외에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되는 미래를 뛰어 넘은 걸까.

“내가 널 도와준 건…….”

딱히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잡히지 말았으면 해서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그래. 내가 널 도와준 건 묻고 싶은 게 있어서야.”

“무, 무엇을요?”

“신인류들이, 아니 넌 왜 여기 눈족 들이 사는 곳에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여긴 위험해. 눈족 인간들이 신인류를 잡아먹는 다는 거 몰라?”

“…….”

“동쪽 대륙이 아직도 전쟁 중인 거야? 그래서 여기까지 피난 온 거…….”

마구 질문을 퍼붓던 이예주는 천천히 말끝을 흐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이 이상했다. 꼭 괴이한 소리를 듣는 다는 듯이.

“……동쪽 대륙요?”

“응. 동쪽 대륙. 바다가 있는 곳 말이야.”

“동쪽 대륙은 제가 태어났을 때 사라졌어요.”

“……뭐?”

이예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동쪽 대륙은 이미 도망친 저로 인해 붕괴되었다가 람이 다시 복구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런 동쪽 대륙이 사라졌다고 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동쪽 대륙이 사라지다니. 네 주인이…… 네 주인이 분명 동쪽 대륙을 다시 복구 해뒀다고 했어.”

“주인이요?”

아이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말한 ‘주인’을 못 알아들은 듯 아이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 엄마가 말해줬어요. 제가 태어날 때쯤 동쪽 대륙에 용암이 덮쳐서 우리 가족은 사막을 건너 북쪽 대륙으로 향했대요. 하지만 북쪽 대륙도 이미 용암이 덮쳐 사라진 상태였어요. 북쪽에서 내려온 신인류들과 마주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이 사는 남쪽 대륙으로 온 거예요.”

“그게…….”

“이제 남아 있는 대륙은 여기 남쪽 대륙밖에 없어요. 근데 남쪽 대륙도 이제 용암이 덮쳐서 사라지고 있어요. 밖은 온통 불바다에요.”

아이가 얕게 헐떡였다.

“다른 곳은 다 불타 없어졌어요. 구원자님이 계신 눈족들이 사는 여기만 멀쩡해요.”

“……구원자?”

이예주는 일순 멍해졌다. 

구원자는 자신의 칭호였다. 시간족들이 저들 좋을 대로 마구 불러대던 것인데. 그런데 그게 왜.

“그게 누군데?”

“눈족들의 대사제님이요.”

“……대사제?”

“검은 파편을 소멸 시킨 구원자님이요!”

아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소리쳤다. 

이예주는 백치처럼 그저 아이의 말을 따라했다.

“소멸……?”

“구원자님께서 곧 남아 있는 검은 파편의 잔해까지 소멸시키겠다고 장벽 문을 열었어요. 용암이 코앞까지 들이 닥쳐서, 다들 그 소문만 믿고 온 건데. 인간들만 들여보내 준다고…….”

그녀는 도저히 아이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구원자가 어째서 눈족의 대사제가 된 건지. 대사제라면 쟈니아 그 아줌마가 아닌가. 

“검은 파편이 소멸했다고?”

꼭 백일몽을 꾼 것 같았다. 

이예주의 얼굴이 삽시간에 희게 질렸다. 

검은 파편이 소멸했다면…… 

그럼 람이 죽었다는 건데.

“그럴 리 없는데.”

람이 죽을 리 없잖아. 

그녀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자 아이가 흠칫거렸다. 

그 순간, 문득 아이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제가 태어났을 때쯤 동쪽 대륙이 사라졌다고.

이예주는 벼락처럼 달려들어 아이의 양 어깨를 잡았다.

“너, 너 몇 살이야?”

“네, 네?”

“너 몇 살이냐고!”

갑작스레 눈빛이 희번덕 변한 여자의 모습에 아이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다그쳤다.

“여, 열 살이에요.”

“말도 안 돼.”

태어날 때쯤 동쪽 대륙이 사라졌다. 

아이가 말한 검은 파편의 소멸이 그때부터 시작된 거라면. 

“그럼 나는…… 나는 10년을 뛰어 넘은 거잖아?”

10년. 

이예주는 새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 람이 소멸되었을 리도, 그를 두고 ‘문’에 삼켜진 제가 10년이나 넘었을 리도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듯 아이에게 물었다.

“검은 파편의 잔해는 뭐야? 그건 어디 있어?”

“저도 잘…… 아, 아마 구원자님이 계신 시, 신전에 있지 않을까요?”

“신전.”

음산하게 뇌까리며 이예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잡아먹을게 아니라면 저 이제 갈래요. 먼저 장벽 안으로 들어갔던 아버지를 찾아야 해서…….”

아이가 그런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잡힌 어깨를 빼내기 위해 버둥거렸다. 

때마침 손에 힘이 빠진 찰나이기에 이예주는 잡고 있던 아이를 금방 놓쳐버렸다.

아이는 슬금슬금 그녀에게서 멀어지다 이내 등을 돌려 후다닥 골목을 빠져나갔다. 

“조심해.”

그 뒤에 대고 안녕을 빌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예주는 아이를 잡느라 숙였던 허리를 폈다. 

“신전에 가야해.”

그녀는 아득한 눈으로 아이가 빠져나간 골목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골목 밖은 여전히 사람으로 가득 차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안 가 그녀 또한 그 틈바구니 사이에 끼어들었다. 

후드를 푹 눌러 쓴 그녀의 모습은 쉽게 행렬에 묻혀 사라졌다.

이예주는 포화 상태의 사람들에 치여 신전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느릿느릿 행진하고 멈추기를 반복하던 행렬은 얼마 후 완전히 멈췄다. 

까치발을 들고 앞을 바라보자, 신전으로 올라가는 높다란 계단에 다리족 놈들이 진을 치고 서서 더 이상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저길 어떻게 뚫고 올라가지. 그런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구원자님이다!”

불현듯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구원자님! 아아, 구원자님!”

그 소리에 사람들이 갑작스레 바닥에 엎드리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반사적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계단 끝에 회색 로브를 입은, 찬란한 금발이 나타났다. 

“……아직도 안 죽었다니.”

악을 쓰듯 구원자를 성토하는 목소리들 틈에 이예주의 속삭임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분명 그때 죽었을 줄 알았다. 

눈을 뜬 람이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쟈니아는 죽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토록 눌러 쓰고 있던 후드마저 벗은 채 당당하게 뒤통수를 내보인 상태였다.

여자를 올려다보는 이예주의 동공이 점차 확대됐다. 

……족장은? 

“아이고, 구원자님! 구원자님, 여기! 여기를 봐주십쇼!”

하나, 둘 절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시야 확보가 수월해졌다. 

하지만 이예주는 되레 당황했다. 

주변 인간들이 모두 엎드린 탓에 이대로 가다간 저만 홀로 우뚝 선 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적당이 상체를 수그렸다.

“여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여자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수런거리던 거리가 시간을 두고 차근히 잦아들었다.

주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자 쟈니아가 다시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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