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돌려 보내줘. 저 때로! 아니, 과거! 그래, 과거로 돌려 보내줘! 람을 구하기 직전으로!”
그때로 돌아가면 람을 껴안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그를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예주는 그것을 외면했다.
그녀는 한달음에 검은 안개에게 다가가 양 어깨를 와락 부여잡았다.
그리고 애원했다.
“넌 보낼 수 있지? 날 과거로 보낼 수 있잖아. 넌 흐름이라며! 날 당장 과거로 보내줘. 응?!”
“안 돼.”
“왜? 엄마는 내가 과거로 갈 수 있다고 했어! 날 보내줘!”
“지금은 네 능력이 과거를 가리키고 있지 않아. 과거로 가면 너는 죽는 걸? 네 능력은 과거나 미래와 상관없이 네 목숨을 살리는 거야. 미래를 포기할 거야?”
“포기할게! 미래든, 목숨이든, 뭐든!”
이예주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외쳤다. 이미 그를 껴안은 순간부터 포기한 목숨이었다.
두 번은 잃을 수 없었다.
엄마의 죽음 후 겪었던 지옥 같은 삶.
차라리 죽어 버리지, 그런 걸 두 번이나 겪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절박하게 소리 질렀다.
“제발 보내줘!”
“넌 정말 특별해. 인간들은 검은 파편을 경외 할 뿐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는데…… 정말 인간들의 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검은 파편을 구원하기 위해 널 보낸 걸까?”
그러나 아이는 이예주의 애원에 대한 답 대신 조용히 중얼거리더니, 불현듯 뒤를 돌았다.
손 틈 새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아이는 허무할 만큼 쉽게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허깨비를 붙든 듯한 느낌이었다.
“저길 봐, 예주야.”
검은 안개가 이번에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폭발하는 동굴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문’과 조롱이가 떠 있었다.
“……조롱이?
동쪽 대륙에서 죽을 뻔했던 조롱이의 모습이었다.
이예주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네가 미래를 포기해서 과거로 돌려놓은 것이야. 사실 이거 말고도 몇 개 더 있는데…….”
그녀는 검은 안개의 말을 끊고 무작정 물었다.
“어떻게 하는 건데?”
“과거는 지나간 게 아니야.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이예주는 절망과 희망 그 어중간한 사이에 걸쳐진 얼굴로 연이어 검은 안개를 다그쳤다.
평범한 아이라면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겁을 먹을 만도 했지만,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아이는 그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검은 안개가 불쑥 고개를 숙였다.
“네가 여기에 있으면, 네가 과거로 보낸 것은 다른 방향과 다른 과정을 거쳐 다시 네가 있는 이곳까지 오는 거야.”
다시 그들 사이로 작은 세상이 떠올랐다.
조그만 축소판 인형처럼 네모난 틀 안에 검지만한 이예주와 조롱이가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 수많은 선이 이어져 있었다.
단순한 직선, 곡선, 물결 모양, 지그재그……
그것들이 살아있듯 생동감 있게 울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축소판 이예주와 조롱이가 갇혀 있는 네모난 틀이 점점 가까워지다 마침내 하나로 합쳐졌다.
하나가 된 네모난 창 안에는 이제 그녀와 조롱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너의 모체에너지가 죽음을 택하지 않고 널 낳아서 네 능력이 각성했을 때를 마주한 것처럼 말이야.”
설명을 더 한 검은 안개가 고개를 들고 이예주를 분명히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많은 미래를 포기해왔어, 예주야.”
“…….”
“우리는 네 능력으로 생긴 차원에 머무를 수 있어서 너에게 항상 고마웠어. 그래서 이번에도 네 죽음을 늦출 거야.”
아이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그 시선의 끝에 피범벅이 된 이예주의 가슴팍이 닿았다.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동공에 일순 안타까움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더는 할 수 없어. 이곳은 수명이 다해 사라지고 있어. 우린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돼. 그리고 너는 네 능력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미래로 가서 제때 치료 받아야 해. 그래야 기회가 생길 테니까.”
“그럼…… 그럼 람은?”
이예주는 그들의 뒤편에 있는 죽어가는 람을 흘긋 돌아보며 울먹였다.
“저 사람은 어떡해야 되는데?”
“너는 검은 파편을 사랑해?”
검은 안개가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람을 사랑 하냐고?
이예주는 그간 한 번도 사랑과 같은 감정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었다.
그럴 틈이 없었기도 했고, 그저 좋아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제 모든 감정을 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어가는 람의 영상을 바라보자니, 언뜻 후회가 들었다.
한 번쯤은 이야기 해줄걸.
감정을 몰라서 제게 재차 묻던 사람인데. 한 번쯤 용기 내서, 우리가 하는 게 사랑이라고 이야기 해줄 걸.
“……그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저 또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제 감정을 인지했다.
“난 저 남자를 사랑해.”
“검은 파편이 저것이 아니게 되더라도?”
곧 바로 묻는 것에는 바로 답 할 수 없었다.
검은 파편이 람이 아니게 되더라도? 그게 무슨 말이야.
이예주는 알쏭달쏭한 검은 안개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되 질문했다.
“대체 검은 파편이 뭔데?”
그러자 어린 람의 탈을 쓴 검은 안개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잖아.”
“그게 무슨…….”
“이제 그만 문을 넘어야 돼.”
검은 안개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어…….”
또 다른 영상을 가리킬까 따라 고개를 돌리던 이예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의 시선 끝에 ‘문’이 있었다.
너머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은, 단 하나 뿐인 문이.
“가.”
검은 안개가 그녀의 등을 밀었다.
그 손길에 엉거주춤 떠밀리자 이예주가 다급히 물었다.
“잠깐! 람에게는 어떻게 가는데! 그건 알려줘!”
아직 물을 게 많았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점들도 한 가득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미는 힘은 도저히 어린 아이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무지막지했다.
비단 검은 안개만이 자신을 미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람을 껴안고 대신 창에 찔렸던 순간처럼 ‘문’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둠이 거의 다 사라진 공간이 온통 자신을 몰아내려 드는 것 같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아직 물어볼게 남았어!”
“우리도 이만 서둘러야 돼. 새로운 공간의 주인을 만나러 가야 하거든!”
문이 코앞까지 당도했다.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황급히 등을 돌리던 것이 무색하게, 검은 안개가 있는 힘껏 그녀를 떠밀었다.
“안녕!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행운을 빌게. 너에게도, 너의 검은 파편에게도!”
아이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했다.
시릴 만큼 환한 빛이 눈앞을 점유했다.
이예주는 채 마주 인사할 새도 없이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헉.”
이예주는 꾹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더 이상 어둠이 부서져 내리는 ‘문’ 안의 공간 안에 있지 않았다.
기어이 검은 안개에 떠밀려 미래로 건너온 것이다.
“이게…….”
이예주는 더듬더듬 제 몸부터 살폈다.
입고 있던 회색로브는 여전히 피투성이였다.
“으으.”
한 손으로 옷을 들춰 제 가슴팍을 한 번 내려다본 이예주는 몸서리를 쳤다.
피로 물든 구멍 세 개가 선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완전 아프겠다.”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문’ 밖으로 나왔음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왜 피가 더 안 나지?”
아직 굳지 않은 피가 흥건할 뿐, 더 이상 구멍 안에서 피가 흐르지 않았다.
옷깃을 놓고 상체를 한 번 움직여 봤지만, 여전했다.
고통이 느껴지지도, 피가 흐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슴에서 무언가가 걸리적거리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치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늦췄나봐.”
이예주는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의 죽음을 늦추겠다던 검은 안개들.
그 말은 어서 죽기 전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하늘은 해가 막 저물었는지 어스름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한 골목이었다.
하얗고 네모난 건물 사이로 지저분한 판자 집들이 빼곡하게 지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녀는 나갈 길을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문득 손아귀에서 걸리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심코 아래를 본 그녀의 눈이 커졌다.
“삼지창?”
한 손에 제 가슴을 감통했던 삼지창이 들려 있었다.
암경 속에서 검은 안개가 뽑아 제게 건네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창이 좀 이상했다.
“……검은색이 빠졌어.”
온통 시커멓던 칼은 검은색이 사라져있었다.
마치 민낯을 드러내듯 원래의 쇳덩어리로 돌아간 창은 전과 달리 투박하기까지 해보였다.
알고 보니 검은 안개 속이었던 암경을 넘어서 창에 담겨 있던 검은 안개가 사라진 건가?
“하…….”
그녀는 난감한 얼굴로 창을 내려다보다 주섬주섬 로브를 들췄다.
이어서 허리춤에 상의와 하의를 덧댄 후 그 위에 창을 꽂았다.
생각보다 천이 억세 힘이 많이 들었지만, 창대의 중간까지 어찌어찌 끼우니 뻑뻑하게 고정이 되었다.
일을 마치자 마치 장칼을 찬 형상이 되었다.
그녀는 그 위를 로브로 덮었다.
다행히 눈족놈들이 입는 회색 로브는 창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펑퍼짐했다.
그것이 괴물로 변해가는 역겨운 몸뚱이를 가리기 위함이란 걸, 이제는 잘 알았다.
“피는 어쩌지.”
하지만 창은 어찌어찌 가려도 가슴팍에 묻은 피범벅은 가릴 방도가 없었다.
“아 몰라. 일단 여기서 나가자.”
이예주는 그냥 포기했다.
누가 왜 그러냐 물으면 각혈이라도 했다고 하지 뭐.
얼마만큼의 미래를 건넜든 이제 그녀의 목표는 좋으나 싫으나 하나뿐이었다.
스스로를 파괴해 나가고 있는 미친놈을 다시 구하고 죽기 전에 어서 그 놈에게 치료 받는 것.
“아오, 내 팔자야…….”
그녀는는 제 박복한 신세를 한탄했다.
이내 길을 살피며 후드부터 푹 뒤집어썼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문’을 넘기 전에 다쳤던 오른발이 찌르르 통증을 호소했다.
“진짜 죽음만 멈췄네…….”
여전히 부어올라 있는 발목을 내려 보며 그녀는 혼잣말 했다.
다행히 그때만큼 거동에 이상이 있을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 아파 통증에 익숙해진 걸지도.
골목길은 뻥 뚫려 있었다.
지저분해 보였지만 해안 마을처럼 폭 좁은 골목들이 마구잡이로 나있지는 않았다.
길치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얼마 안 가 이예주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변 앞에 도달했다.
“아, 거 빨리 빨리 좀 갑시다!”
“미, 밀지 마시오! 밀지 말라고!”
대로변은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남자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던 제 앞 사람의 등을 거세게 밀었다.
밀린 남자가 행렬에서 튕겨져 그녀가 있는 골목 쪽으로 휘청거렸다.
이예주는 본능적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벽 쪽으로 물러서 숨었다.
“에잇, 제기랄!”
다행이도 남자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빠르게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잠시 드러난 남자의 모습이 비렁뱅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더러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로변을 걷는 이들 모두가 거적때기 하나로 간신히 몸을 가린 이들뿐이었다.
꽉 들어찬 행렬은 앞을 향해 느릿느릿 전진했다.
때가 잔뜩 껴서 더러운 사람들의 얼굴은 지독한 피로와 알 수 없는 희망이 뒤섞여 괴이하게 번들거렸다.
“이게 무슨…….”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걸까.
그때였다.
“꺼져, 이 새끼야!”
문득 들려오는 소란에 그녀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리고 곧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읍……!”
멀지 않은 곳에 활짝 열린 성벽이 보였다.
정확히는 성벽이 아니라 장벽이었다.
외부로부터 눈족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웠다던 장벽.
장벽이 열렸을 때를 이예주는 딱 두 번 보았다.
눈족 족장에 의해 신전으로 끌려 올 때와, 신전에서 쓸모없는 아이들을 배출하듯 내쫓을 때.
그 외엔 굳게 닫혀 있던 장벽이 활짝 열린 채 수많은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그럼 이곳은…….”
이곳은 눈족 마을이란 말인가?
그녀는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곳이었다는 걸 바로 알아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남쪽 대륙 어딜 가도 발목이 움푹 들어 갈만큼 잔뜩 쌓여 있던 눈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눈이 왜 하나도…….”
“자, 다음!”
그때, 장벽 쪽에서 다시금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활짝 열린 문의 양 옆쪽으로 총을 든 한 무리의 인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 누군지, 차림새로만으로도 알아 볼 수 있었다.
다리족 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