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04)화 (306/319)

걸음을 옮기자 그다음부턴 동화 속 내용과 똑같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소녀의 모습을 한 채 하늘을 보며 외치는 시간, 그 말을 듣고 순순히 인간들에게 풍요로운 대지와 수많은 자원을 내주는 검은 파편.

“대체 왜?”

그것을 지켜보던 이예주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의문점을 입에 담았다.

“왜 검은 파편을 자신이 인간을 구제해주는 일에 이용해 먹었던 거지?”

팔족 땅에서 책을 통해 시간족의 신화를 알았을 때부터 항상 궁금했었던 일이었다. 

시간은 분명 특별한 존재였지만 검은 파편만큼 세상을 다룰 수 있는 힘은 없었다. 

그러면 제 한계 내에서 일을 벌여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대체 왜 달콤한 말로 검은 파편까지 끌어들여 제 신격화에 이용을 해먹는 걸까.

“간신히 모여 형체를 갖췄는데, 다시 티끌로 돌아가기는 싫었을 테니까.”

“그게…….”

“인간들의 염원으로 태어나 형체를 갖췄으니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았을 거야. 지속적으로 인간들의 환심을 사야 흩어지지 않고 형체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

빛 덩이는 소녀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여성, 늙은 노인까지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다. 

인간들은 시간을. 정확히는 시간의 뒤에 있는 검은 파편의 힘을 떠받들었다.

“시간이 죽고, 우리도 인간에게 뜯어 먹힌 이후 검은 파편은 분노에 갇혔어.”

신화 속의 일들이 빠르게 흘러 지나갔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검은 파편은 인간들을 피해 몸체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피신했다.

“인간들의 몸속으로 들어간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같이 움직이고 흐를 뿐이었어.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인간의 신체로 한정되어 버렸으니까.”

검은 안개가 걸음을 옮겼다. 

다시 무수한 영상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족들의 몸속에 들어간 검은 안개의 흐름이 담겨 있었다.

“인간들은 때론 다른 개체를 파괴하고, 때론 새로운 곳을 정복하고 싶어 했어.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탐하고 싶어 하는 인간,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싶은 인간, 강대한 국가를 형성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도 있었지.”

이예주는 방금 전 인류 문명을 보던 것과는 다르게 흥미가 가득 담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역사책에서 볼 법한 한 시대를 뒤흔든 성군, 폭군, 영웅, 과학자, 탐험가들이 스쳐지나갔다. 그 중엔 한국인들도 몇 있었다. 

그들은 날 때부터 검은 안개를 가지고 있는 눈족이거나, 일반인으로 태어났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마약처럼 검은 안개를 흡입한 인간들이었다.

그로 인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잠재력이 극대화 되었다. 

어렸을 적 누구나 꿈꾸는 작은 호기심은 떠올리기 무섭게 몸집을 부풀렸고, 미미했던 욕구는 끝 간 데를 모르고 치솟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원하던 바를 모두 성취하고 범인들과는 다른 비범한 인물이 되었다. 

시간이 종의 진화였다면 검은 안개는 개인의 압도적인 진보였다.

“이 사람들이 다 눈족이라니…….”

이예주는 혀를 내두르며 검은 안개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검은 안개로 진보된 인간들은 다른 개체보다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더 빠르게 불태운 탓에 대부분 단명했다.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불현듯 눈족 족장과 쟈니아가 나타났다. 

“이건…….”

자신들이 먹은 인간들이 몸 위로 우둘투둘 돋아난 것을 발견한 그들은 겁에 질려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엉엉 울었다. 

“괴물 새끼들.”

이예주는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된 신념으로 동족을 잡아먹고, 결국 하나가 되어 빼도 박도 못한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들이었다.

“이들은 누구보다 강한 에너지와 그것의 영원을 원했어. 인간은 다른 에너지를 파생시킬 수 있는 모체이지만 우리처럼 분산된 상태이기도 해. 그래서 각 개체마다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검은 파편처럼 큰 에너지가 하나에 집약 되어 있지 않다는 소리야. 검은 파편은 다른 에너지들을 빨아들이고도 그것을 제 힘으로 다져 흡수 할 수 있지만, 인간들은 그렇게 할 수 없어.”

“아…….”

알 듯 모를 듯 했지만 이예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괴물이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인간들은 다른 에너지를 삼키려 해도 검은 파편처럼 그것을 완전히 제 에너지로 흡수하지 못해. 그러면 에너지들은 그저 한데 묶인 덩어리가 된 채 각자의 자아를 주장하는 거야.”

족장과 쟈니아는 끊임없이 힘을 탐했다. 

그들의 몸에는 점점 무수한 얼굴들이 나타났고, 최후의 순간. 끝내 남편은 배가 터져 죽기 직전인 아내의 몸까지 씹어 삼켰다.

한 걸음을 더 내딛자 달라붙어 한 몸이 된 족장과 쟈니아의 괴기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모든 욕구를 추구한 인간이 최후에 진화한 모습이야.”

검은 안개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그 순간, 깨달음은 벼락처럼 찾아왔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검은 안개의 존재, 힘.

“너네가…….”

이예주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검은 안개를 마주보았다.

“너네가 진짜 시간이었구나.”

“시간?”

“너네가, 너네가 진짜 시간이었어.”

이예주는 손을 뻗어 와락 아이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확인했다.

“그치? 너네가 진짜 시간인거지?”

“아냐, 우린 시간이 아니야.”

그러나 검은 안개는 그녀의 말을 쉽게 부정했다.

“우린 그냥 흐름일 뿐이야.”

“하지만…… 하지만 맞잖아. 네가 내 죽음을 늦췄다고도 했고…… 네가 바로 암경이라 했잖아. 너네가 날 미래로 갈 수 있게 한 거 아니야?”

“이건 네 능력인 걸?”

“……내 능력?”

“그래, 네 능력. 너의 생존을 바라는 네 엄마와 살고 싶어 하는 너의 의지에서 태어났어. 인간들의 강한 염원으로 태어난 시간처럼.”

검은 안개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강변 다리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젊은 엄마가 있었다.

“……엄마.”

이예주의 얼굴이 빠르게 허물어졌다. 

아주 오래 전, 능력이 각성하기 전날 밤 꿨던 꿈이었다. 

자신을 가진 줄 모른 채 각박한 삶을 살아 나갈 자신이 없어 자살을 하려던 엄마.

“넌 특별해.”

검은 안개가 말했다.

“내가…… 특별하다고?”

특별하다니. 

흰 공간 위에 이예주의 과거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두운 낯빛으로 스쳐지나가는 자신을 응시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어.”

봉구가 죽었다. 

이후 천장에 매달려 하늘하늘 흔들리는 엄마가 보였다. 

문득 잊고 있었던 사실이 생각났다.

결국 엄마는 자신 때문에 죽게 된 것이 맞았다. 

‘문’을 넘나드느라 이곳저곳 나타난 자신을 찾아오던 엄마는 쟈니아의 표적이 되었고, 놈들에게 눈을 빼앗긴 후 살해당했다.

“이 능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죽고, 다치고…… 그리고 나는.”

그다음은 끔찍했던 수학여행의 사고였다.

“그리고 나는. 나는.”

‘문’이 생길 때마다 처절하게 망가져 가는 안쓰러운 제 인생이.

“나는 정말, 지옥 같은 삶을 살았어. 내일 눈을 뜨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학교에서,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고 할까!”

이예주는 거칠게 헐떡이며 속사포처럼 뇌까렸다. 

“내게 왜 이런 능력이 생긴 거지? 남들처럼 평범할 수는 없었나? 왜지? 이건 저주야. 하나도 특별하지 않아. 나는 오히려……!”

“생명체들은 누구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기 마련이야. 하지만 본디 가지고 있는 것을 믿고, 각성해서 끝내 제 것으로 지켜내는 인간들은 별로 없지.”

울음에 가득 찬 그녀의 절규를 검은 안개가 무미건조하게 끊었다.

“넌 시간족인 모체에서 태어나 남들과는 다른 성장 환경을 겪어 좀 더 수월하게 네 능력을 각성시키고 키워 나갈 수 있었던 거야.”

“성장 환경……?”

이예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벌어진 입새로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네 말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엄마는 내가 시간족이 아니라고 했는데?”

“맞아. 넌 시간족이 아니지. 하지만 네가 가진 능력은 시간족과 비슷하다고 빗댈 수 있어.”

시간족들의 능력과 비슷하다고 빗댈 수 있다고? 

시간족의 능력과 그녀의 능력은 차원이 달렸다. 그런데 어떻게…….

“시간족은 시간을 뜯어먹고 능력을 빼앗은 인간들이잖아.”

“시간은 뜯어 먹히거나 죽은 게 아니야. 그저 강한 염원으로 형체를 가졌다가 다시 티끌로 돌아간 것뿐이지.”

검은 안개는 이예주의 과거가 재생되고 있는 공간에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팔을 들어 반대편을 가리켰다. 

인간들로 인해 사지가 뜯긴 금빛 덩어리가 우주의 폭발처럼 온 세상 곳곳으로 튕겨져 나가는 장면이었다.

“시간족의 능력은 일족의 기원이 된 인간이 염원하던 것을, 우연한 계기를 통해 각성해서 일족 전체가 그것을 믿고 지켜온 것이야.”

영상이 더 오래전의 과거로 바뀌었다. 

최초의 팔족은 해안가 근처에 살았다. 

바다 근처는 풍부한 수산자원이 있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덮치는 파도와 해일 때문에 무척 위험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인간들은 마을의 가장 안쪽 집에 모여 서로를 끌어안고 벌벌 떨었다. 

그리고 빌었다. 

제발 끔찍한 재난이 부족을 덮치기 전에 그대로 멈추기를.

최초의 다리족은 유목민이었다. 

태어난 인간들은 드넓은 초원 위를 자유로이 뛰어다녔다. 

그러나 기름진 대지는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초원에는 무시무시한 동물들이 가득했다.

더 아늑한 정착지를 찾아 이동하다 맞닥뜨린 천적을 피해 허겁지겁 도망을 치던 인간들은 간절히 빌었다. 

부디 적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초원의 그 어떤 것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기를. 

최초의 눈족은 그 어떤 부족보다 자연을 숭배했다. 

그들은 뛰어난 관찰자였다.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로부터 전수받은 지혜를 기록하고 실천했다. 

하늘을 관측하여 내일의 날씨를 알고, 개미의 움직임으로 다가올 재난을 예측했다. 

천재지변이 닥칠 때마다 그들은 사냥감의 머리를 바치고 제를 지냈다. 

그리고 빌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볼 수 있기를.

“특별한 건 네 능력이 아니라 너야.”

검은 안개가 이예주를 향해 돌아섰다.

“분노에 갇혀 멈춰 있던 검은 파편을 움직이도록 만들었잖아?”

“그게 무슨…….”

“이리 와봐!”

그 순간, 아이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마구 잡아끌었다.

“어, 어!”

이예주는 아이에게 잡혀 저도 모르게 뛰었다. 

이전에도 그랬듯 전속력을 다해 달려도 숨이 차거나 힘이 붙이진 않았다. 

가슴에 관통상이 있음에도 그랬다.

그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흰 공간을 뛰었다. 

한참 후 검은 안개가 뜀박질을 멈췄다.

“봐! 검은 파편이 너를 되찾기 위해 몸체를 모두 파괴하고 있어. 인간들을 멸종시키려 들 때도 파괴하지 않았던 건데!”

새로운 영상을 가리키며 아이가 신이 난 듯 소리쳤다. 

이예주는 고개를 들었다.

“……람?”

영상 안에 ‘문’을 넘기 전의 람이 있었다. 

여전히 신전의 황금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는 왼쪽 가슴이 뻥 뚫려 있었다. 

그 휑한 구멍에서 핏줄기가 줄줄 흘러내려 제단을 적셨다.

“왜…….”

이예주의 얼굴이 단숨에 희게 질렸다. 

분명 저 사람을 위해 온 몸을 날려 눈족 족장의 창에 찔렸는데. 

대체 왜…….

“스스로를 소멸하는 중이여서 그래. 네가 검은 파편을 구원했어!”

“그게 뭔 개소리야…….”

이예주는 우두커니 선 채 망연자실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내가 분명 구했는데.”

죽을힘을 다해 구덩이 속에서 탈출하여 남자를 지켜냈는데. 왜, 어째서……. 

대지가 요동쳤다. 

신전 주변으로 시뻘건 용암이 사납게 날뛰었다. 

뻥 뚫린 가슴에서 쏟아 내리는 진득한 핏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남자의 얼굴이 온통 새하얬다. 

“람!”

이예주는 당장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갈 듯 내달렸다. 

그러나 람을 담은 영상은 그녀가 움직이는 만큼 멀어졌다. 

잡히지 않는 남자의 모습을 쫓아 한참을 내달렸지만, 끝내 닿을 수 없었다.

“저러다 죽겠어!”

이예주는 거칠게 뒤 돌았다. 

그토록 뛰었음에도 아이와 제 거리는 변함없었다. 

그녀가 비명처럼 외쳤다.

“나 가야돼!”

“어째서?”

“저 사람을 구해야 하니까!”

다급하게 쏟아냈지만 검은 안개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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