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03)화 (305/319)

“모체에너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변의 충돌에 휩쓸리거나, 폭발해서 튕겨져 나가는 다른 에너지에 매달려야 했는데,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지. 그런데 검은 파편이 어느 날 헤엄치고 있는 우리에게 제안했어.”

홀로 외로이 놓여 있던 검은 파편의 주변으로 검은 안개들이 꾸물꾸물 헤엄치듯 맴돌았다. 

―나와 같이 여기서 나가자.

검은 파편이 말했다. 

그러자 검은 안개들이 왕왕 거렸다.

‘왜? 왜?’

‘왜 나가야 하는데?’

‘여기서도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걸?’

‘그런데 왜?’

―이대로 있다간 다른 에너지에게 흡수 되고 말 거야. 나는 거대한 폭발에도 휩쓸리지 않을 만큼 멋진 몸체를 가지고 싶어. 나를 데리고 가줘.

‘널 데리고 가면 뭐가 있는데?’

―폭발에 휩쓸리지도 않고, 다른 에너지에게 흡수하게 두지도 않고, 널 흡수하지도 않을게. 네가 내 몸체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다닐 수 있도록.

‘그래, 좋아!’

검은 안개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와 검은 파편을 감쌌다. 

때마침 들끓던 모체에너지가 폭발했다. 

검은 안개를 지닌 검은 파편은 폭발에서 가까스로 튕겨져 나와 무한한 우주 공간을 헤맸다. 

억천만겁이 지난 후, 태양 근처에 멈춰서 자리 잡은 검은 파편은 주변의 수많은 것들을 빨아들였다. 

거대한 폭발에도 휩쓸리지 않을, 커다란 몸체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이건…….”

검은 파편의 주변으로 거대한 구가 생성되었다. 

“검은 파편은 약속을 지켰어. 우린 검은 파편의 몸에서 마음껏 헤엄쳤어. 그건 너무 신나고 재밌는 일이야!”

어린 람이 흥분하여 손가락질했다. 거대한 구체 주변으로 검은색 덩어리들이 꾸물꾸물 움직이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 움직임을 따라 멈춰있던 구 또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넨…….”

이예주는 제 앞에 펼쳐져 있는 작은 우주를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제가 본 것이 뭔지. 검은 파편은, 또 그를 움직이는 검은 안개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넨 대체 누구야?”

“우린 검은 안개야.”

“아니. 그거 말고.”

이예주는 정신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너넨…… 너네의 존재를 뭐라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어. 람은…… 아니, 검은 파편이 왜, 지구가…… 그리고 너흰 어째서 지구 주변에…….”

어린 람이 더듬거리는 이예주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반질반질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녀는 그제야 제 앞의 아이가 람이 아니란 것을 받아들였다. 

자신을 보는 아이의 눈동자가 새까맸다. 

인간을 보면 시뻘겋게 변하는 람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음. 인간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

“우린 흐름이야. 검은 파편을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흐름?”

이예주가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아이가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파편은 우리로 인해 움직였고, 더 강하고 거대하게 변화했어. 이건 인간들의 언어로 뭐라 하지? 음, 음…….”

잠시 고민하던 검은 안개는 이내 손뼉을 치며 외쳤다.

“진화! 그래, 진화!”

“진화……?”

“검은 파편은 우리로 하여금 움직여서 진화했어! 그래서 그냥 파편에서 모체 에너지가 된 거야!”

아이의 손가락 아래 구체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태양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던 구체의 온도는 점점 내려가고, 군데군데 푸른색, 흰색, 군청색등 갖갖이 색깔들이 조금씩 나타났다. 

돌아가는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던 그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이, 이건…….”

그리고 드러난 구체의 모습에 이예주는 순간 눈앞이 아연해졌다. 

그녀 또한 익히 아는 행성의 모습이었다. 

검은 안개로 인해 움직이고, 진화한 검은 파편. 알 듯 모를 듯한 검은 안개의 말과 앞에 나타난 미니사이즈 지구.

이예주는 검은 안개가 말하는 ‘흐름’이 무엇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검은 안개가 물었다.

“이제 우리에 대해 알겠지?”

여전히 혼돈에 물든 표정이었지만, 이예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검은 안개가 그녀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럼 이제 그것을 뽑자!”

“뭘?”

손가락을 따라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아이가 가리킨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경악했다.

“아, 안 돼! 이걸 어떻게 뽑아!”

미치지 않고서야 제 손으로 가슴에 박힌 창을 뽑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검은 안개가 힘들면 제가 뽑아 주겠다는 듯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여긴 네 능력 속이라 괜찮지만, 그렇게 뒀다가 문 밖으로 나가면 위험한 걸?”

“으악! 하, 하지 마! 하지 마!”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피하려고 몸을 튼 순간 벼락같이 달려든 검은 안개가 이예주의 등에 꽂혀 있는 창대를 잡아 비틀었다.

“괜찮아. 아프지 않을 거야.”

“으허억!”

뼈를 부수고 가슴에 깊숙이 박혀 있던 창살이 수월하게 쑤욱 빠졌다. 

그 말처럼 고통은 없었다. 

창이 빠진 자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지도 않았다. 

그저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뽑혀나가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감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이예주는 제 가슴을 미친 듯이 더듬으며 진저리쳤다. 

“헉! 미친! 뭐하는 짓이야!”

“자.”

검은 안개가 뽑은 창을 건네주었다. 

이예주가 희게 질린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자, 아이는 국어사전을 읽듯 무감하게 말했다.

“우리가 늦췄던 죽음이 네 몸을 많이 잠식했어.”

“……뭐? 뭘 늦춰?”

“네 죽음.”

기어이 이예주의 손에 창대를 쥐어준 아이가 돌연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어, 어디가!”

그녀는 당황하여 주춤대다가 서둘러 그 뒤를 쫓아갔다. 

이제 그들이 있는 공간은 어둠이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에게 익숙하기만 했던 ‘문’ 속 암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여긴 천국이 아닐까? 

드문드문 묻어 있는 검은 칠을 제외하고 온통 희게 빛나는 주변을 살피며 이예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자신은 이미 창에 맞아 죽고, 하늘나라에 와 있는 것이라고.

“죽음을 늦췄다는 게 무슨 뜻이야?”

아이의 뒤를 따라 자박자박 걷던 그녀가 불쑥 물었다.

“우린 너에게 항상 고마웠어.”

“나에게? 뭘?”

생뚱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영문 모를 표정을 짓자, 검은 안개가 이어 말했다.

“검은 파편으로부터 떨어져 인간들에게 삼켜진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다시 분산됐어. 그래서 인간들이 죽으면 갈 곳이 없었어. 작게 뭉친 상태로는 예전처럼 검은 파편의 몸체 위를 자유롭게 헤엄치고 다닐 수 없거든.”

“그럼?”

“그런데 네 능력이 발현 될 때마다 열리는 차원에서 머물 수 있었던 거야! 네가 우리를 받아들여 줬어. 우린 정말 기뻤고, 그래서 네가 죽음에 잠식당하는 걸 늦췄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던 그때, 문득 앞서가던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왼쪽으로 돌아섰다. 

“저기.”

검은 안개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 이예주도 몸을 돌렸다. 

일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하얀 공간에 자신의 모습이 커다랗게 떠 있었다.

“저건…….”

일련의 영상이 무성 영화처럼 재생됐다. 

과거로 돌아간답시고 커터 칼로 손목을 긋던 자신이 ‘문’을 넘었다.

‘안녕! 안녕!’

‘여기야, 여기!’

‘우릴 봐줘!’

어둠 속에 갇힌 이예주에게 검은 안개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처럼 혼란에 빠져 있다가, 커터 칼을 빼내고 암경 속을 달렸다.

“네가…… 네가 암경이야?”

“널 만난 게 너무 반가워서 계속 말을 걸었지만 너는 우릴 알아보지 못했어.”

아이가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검은 파편의 에너지를 잔뜩 받아서, 이젠 우리를 알아보게 되었구나!”

신이 난 목소리가 뭐라 덧붙였지만 이예주의 귀에 와닿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 암경에 갇혔던 그때를 기억했다. 

그간 기껏해야 짤막한 일수만 뛰어넘던 ‘문’은 암경을 지날 때마다 장시간의 기간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저주받은 능력에 빌어먹을 옵션이 하나 추가 되었나 보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어떻게…….”

“완전히 멈추는 건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네 죽음을 늦추거나 미룰 수 있어. 하지만 저때의 우린 일부에 불과해서 바로 해결하긴 힘들었어.”

그래서 장기간 걸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었다. 

미친년처럼 웃어대며 마구 뛰어 대는 자신을 다시 보자니 그저 기가 막혔다. 

헛웃음을 짓던 이예주는 미간을 좁히고 제 옆의 아이를 돌아보았다.

“이해가 안 돼.”

“뭐가?”

“널 먹은 눈족들은 죽으면 괴물이 된다고 했어.”

그녀는 아직도 기억했다. 

사막에서 처음 본 거대한 괴물, 끔찍한 족장과 쟈니아의 몸뚱이.

“또 보통 인간이라도 검은 안개를 먹으면 마약 같은 효과를 본다고 했는데…….”

제드가 뭐랬더라. 의욕과 성취감이 급증 한댔나? 

하지만 마약과는 달리, 그게 실제 효과로 이어진다고 그랬다.

아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끊임없이 암경 속을 달리는 자신의 영상을 뒤로 한 채 이예주는 다시 그 뒤를 따랐다.

얼마 걷지 않아 검은 안개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 사막에서 본 히카톤의 모습이 떠 있었다. 

괴물이 먹이를 쫓아 수천 개의 머리, 팔, 다리를 마구 허우적댔다. 

다시 봐도 끔찍스러운 그 모습에 이예주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괴물이 아니야.”

문득 아이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저게? 괴물이 아니라고? 그럼 뭔데?”

“눈족 인간들이 소망하던 최종 진화체야.”

“뭐……?”

들려오는 말을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사이 아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너희 인간들은 무척 신기해. 다른 생명체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무지렁이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개체 하나하나가 모체 에너지가 되었어.”

끝이 없는 공간을 걷고 있는 그들의 주변으로 수많은 영상들이 스쳐지나갔다. 

동물과 다를 바 없는 태초의 인간, 무리를 짓고 마을에서 부족, 국가로 성장하는 인류 문명이 보였다. 

그리고 빠르게 진화하는 인간들 틈 사이로 희미한 금빛 무리가 정신없이 오고갔다.

“저건…….”

이예주는 그것이 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쟈니아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인간들의 강력한 염원으로 태어났어.”

그녀와 같은 것을 보고 있던 검은 안개가 속삭였다.

“강력한 염원? 그게 뭔데?”

“인간들은 슬픔을 싫어하고 희망을 사랑해.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에 충실하며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는 거야. 모든 인간들이 그것을 강력하게 원했으니까 자연히 생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과거, 현재, 미래…….”

이예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검은 파편이 덧붙였다.

“분류 된 적 없었던 그것을 가장 처음 분류함으로써 인간들은 다른 그 어떤 생명체보다 먼저 시간을 거머쥘 수 있었던 거야.”

“그럼…… 시간이 정말 인간들의 신인 거야?”

“신?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검은 안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저것이 인간들을 티끌에서 모체에너지로 변화하게 만들었어. 검은 파편을 둘러싼 나와 같은 역할을 한 것 같아.”

검은 안개가 말하는 모체에너지가 정확히 뭘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영상들은 인간들이 여타 천적들을 제치고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 

시간이 머무른 인간 군락은 그 어떤 생물보다 빠르게 번식하고, 진화하고, 성장했다. 

그리고 이예주처럼 그것을 제 3자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인간들을 관찰하던 검은 파편은 오랫동안 그들의 감정을 알고 싶어 했어.”

시커먼 비구름과 같은 검은 안개에 몸을 숨긴 검은 파편이었다.

“우린 그가 이미 그것을 깨우친 상태라고 생각했어. 검은 파편은 매우 강한 에너지의 집약체였거든.”

이예주는 순간 인간들을 지켜보는 검은 파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들이 시간을 갖고 진화한 것처럼 검은 파편도 우리에게 몸을 맡기고 그저 흐르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검은 파편은 인간들에게 사로잡혀서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어. 시간이 태어난 후로 검은 파편은 인격과 감정을 만드는데 더욱 집착했어.”

아무리 외쳐도 인간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고독감과 공허함이 휘몰아쳤다.

“그러면 제가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이 사라질 거라 믿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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