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종장
이예주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녀는 까마득한 암경 속에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보고 건너왔던 ‘문’ 안의 암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이게…….”
까마득한 어둠의 공간이 반쯤 부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람을 등지고 ‘문’으로 도망쳤을 때, 문 안의 암경이 난데없이 요동치고 다시 원래의 장소로 끌려 돌아 왔던 순간처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문’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흙 부스러기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는 어둠.
그것은 지금껏 두려워했던 암경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생동감 있고 아름다웠다.
어둠이 부스러진 곳에선 흰 물감을 덧칠하듯 환한 빛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페인트칠이 덜 된 공사장처럼 공간은 전체적으로 지저분하고 정신 사나웠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문이 왜…….”
이예주는 ‘문’을 넘기 전 상황을 곰곰이 떠올려 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항상 살기위해 자의로 넘었었지, ‘문’이 먼저 제 쪽으로 이동하여 자신을 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 문이 움직이다니.”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암경을 건너면서 좀 더 먼 미래를 넘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능력에 새로운 옵션이 추가 되기라도 한 걸까?
“람은 잘 있을까?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이예주는 우울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지 말라고 자신을 끌어안던 남자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설마 화가 나서 다 때려 부수고 있진 않겠지?
금방 돌아간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넘어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문이 왜 열렸더라?
일순 환영이 스쳐지나갔다.
족장의 삼지창에 찔리기 일보직전인 람을 보고 미친년처럼 달려들었던 자신.
그리고 푸욱― 뼈가 부서지고 살이 파헤쳐지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으허억! 이, 이게 뭐야!”
몸이 되새기는 찢어질 듯한 통증에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다 본 이예주는 비명을 질렀다.
아래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제 가슴 한복판에 세 개의 창날이 튀어 나와 있었다. 게다가 등 뒤로는 기다란 창대가 박혀 있는 것이다.
“미친 거 아니야! 이, 이게 무슨…….”
고어 영화에서나 볼법한 잔인한 모습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암경 속에 있을 땐 고통이 느껴지지도, 피가 흐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뒤지기 전에 어떻게 문을 넘긴 넘었네…….”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 중얼거리던 이예주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것을 ‘문’을 넘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 있긴 했다.
“하…… 이거 어떡하냐.”
그녀는 끔찍한 것을 보듯 오만상을 찌푸린 채 제 가슴을 흘끗흘끗 내려다보았다.
과거에 손목에 박았던 칼까지는 어떻게 혼자 뽑아 볼만했지만 이건 도저히 못 뽑겠다.
아무리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창에 관통을 당했는데……!
‘어떡하긴? 뽑아야지!’
그때였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듯 작은 속삭임이 스쳐지나갔다.
“헉.”
이예주는 휙 고개를 돌렸다.
“뭐, 뭐지?”
하지만 어딜 봐도 파스스 부스러지는 검은 것들과 환히 빛나는 빛무리뿐이었다.
자신 외에 다른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져서도 안 되었고.
“환청인가?”
그녀는 놀란 가슴을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혼잣말했다.
왜 이렇게 암경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그 남자가 또 자신을 다치게 만드는 건 아니겠지? 그럼 안 되는데!
이예주는 제게서 가장 가까운 쪽, 어둠이 막 부스지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모래처럼 아래로 흩어지는 검은 칠들을 잡아보려 손을 뻗었을 때였다.
‘뽑지 않고 뭐해?’
“헉!”
그녀는 내밀었던 손을 흠칫 거둬들였다.
“뭐, 뭐야?”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방금 전 보다 훨씬 더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그녀가 손을 뻗었던 어둠이 부스러지는 쪽에서.
“누, 누가 여기…….”
‘안녕?’
그 순간이었다.
‘안녕?’
‘안녕!’
‘오랜만이야!’
‘반가워!’
‘또 왔구나!’
목소리가 들린다고 인식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인사가 쏟아졌다.
고요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예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기겁했다.
“누, 누, 누구세요?!”
‘몰라?’
‘우릴 몰라?’
‘왜 몰라?’
‘저번에도 봤잖아!’
“흐, 흐으! 뭐야! 뭐야!”
이예주는 겁에 질려 혼비백산했다.
분명 제 앞에서 마구 떠드는 것들이 있는데,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봐도 저 외에 다른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오른쪽에서 불쑥 목소리들이 끼어들었다.
‘인간은 우릴 지금 처음 본 거야!’
‘아냐! 처음 본 거 아니야!’
‘저번에도 봤는 걸?’
‘항상 함께해 왔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의 희게 질린 눈이 아득한 허공을 헤맸다.
그러자 이번에는 왼쪽에서 한 무리들이 떠들어댔다.
‘그렇지만 이 공간에선 처음이지.’
‘헉, 그러네?’
‘그러네? 그러네?’
‘이 공간에서 우릴 알아 본 건 처음이네?’
‘처음이야! 처음이야!’
목소리들이 하나 같이 시끄럽게 왕왕댔다.
하나가 떠들 땐 실낱같아 잘 들리지 않은 것들이 수십, 어쩌면 수백 개가 합쳐지니 시끌시끌했다.
언제나 제 발자국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던 적막한 암경이 한순간에 도떼기시장처럼 변했다.
그 모습에 이예주는 무척 당황했다.
‘우릴 봐줘!’
수런거리던 것들이 일순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다른 생각에 빠진 그녀를 기민하게 눈치 챈 듯했다.
“뭐가 있어야 보지!”
이예주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목소리들이 우왕좌왕했다.
‘헉,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아?’
‘어째서? 이미 보고 있잖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그리고 정신없으니까, 한 명만 말 해!”
갑자기 두런거리는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뚝 끊겼다.
그리고 그녀의 앞쪽에서 부스러지던 검은색 가루들이 불현듯 꾸물꾸물 뭉치기 시작했다.
“헐. 뭐, 뭐야?”
과학시간에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작은 입자의 철가루들이 커다란 자석 주변으로 모여 순식간에 덩어리가 된 것처럼.
부스스 부서지던 어둠들은 서로를 잡아당기고 또 잡아당겼다.
야구공 만했던 덩어리가 점점 커지고 커져 마침내 이예주의 허리까지 솟아올랐다.
“뭐야, 뭐야!”
커다란 검은색 덩어리는 누군가 조각을 하듯 빠르게 모양을 잡아갔다.
눈 한 번 깜빡이자 머리와 몸의 윤곽이 생겼고, 또 다시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머리카락과 얼굴, 손가락이 생겼다.
“어, 어…….”
이예주는 그저 멍청한 신음을 흘리며 그 기괴한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덩어리는 인간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변화가 끝나자, 그것의 정수리부터 시커먼 것들이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검댕들을 씻기기 위해 누가 위에서 깨끗한 물을 들이 붓듯.
까만색이 아래로 스르륵 빠지자 그 자리에 뽀얀 살결이 드러났다.
벌거벗은 어린 아이였다.
“……람?”
이예주는 제 눈을 의심했다.
어둠이 뭉쳐 커다란 검은색 덩어리가 됐고, 그 덩어리에서 검은색이 빠지니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람이 나타났다.
“이, 이게…….”
“이 모습이면 너도 알아볼 수 있겠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어린 람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이제야 우릴 볼 수 있게 됐구나!”
“람? 이게 무슨…….”
“람?”
이예주의 허리춤에나 간신히 머리가 닿는 작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녀가 본 어린 람의 모습은 비행선에서 본 멸망 직전의 영상뿐이었다.
그게 얼마나 강렬하게 남았는지 그 후 남쪽 대륙에 와서도 종종 어린 람이 나오는 악몽을 꿨다.
“어떻게…….”
그런데 어떻게 과거에나 실재하던 모습이…….
“검은 파편을 말 하는 거야?”
“뭐?”
검은 덩어리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말했다.
“우린 검은 파편이 아니야.”
“그럼?”
“우린 검은 안개야.”
이예주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검은 안개?
그녀는 팔족 땅에서 보았던 동화책을 떠올렸다.
검은 안개는 신화 속에서 검은 파편을 감싸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눈족들에게 뜯어 먹혀 천 년 후의 미친 세상에서 문제의 한 축이 되었다.
그런데 제 앞의 아이가 그 검은 안개라고?
“너, 너넨 무생물이잖아?”
“아니야! 우리도 살아 있어!”
그녀의 새된 목소리에 어린 람의 탈을 쓴 검은 안개가 주먹을 움켜쥐고 방방 외쳤다.
“네가 도통 우리를 알아보지 못해서 잠깐 이 모습으로 변화한거야!”
“대체…….”
아이의 말을 쉽게 납득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아직도 부스러지고 있는 암경을 바라보았다.
넝마처럼 벗겨지고 있는 어둠 때문에 어느덧 빛이 점유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아졌다.
“대체, 너넨 누구야?”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연달아 물었다. “여긴 어디고? 암경이 왜 부서지고 있는 거야? 그럼 미래는 어떻게 된 거야. 람은? 람에게 돌아 가야하는데, 얼른 가서…….”
“하나씩 물어봐. 아까 정신없다고 했던 게 이 뜻이었구나?”
심각한 이예주와는 달리 아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답했다.
“우린 검은 파편과 같은 모체에서 태어났어. 여길 봐.”
어린 람이 제 앞의 허공을 손가락질했다.
이예주는 그것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검은 허공에 갑자기 반짝 거리는 가루들이 떠올랐다.
“별……?”
이예주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신과 아이 사이에 떠오른 것은 작은 우주였다.
수많은 별들,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은하가 거세게 회오리치며 태동하고 있었다.
그것을 마냥 바라보고만 있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듯 우주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성단, 성운들이 눈가를 마구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깊숙이 다다른 은하 속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거대한 빛 덩어리들이 서로 부딪혀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쾅, 쿠우우웅-! 폭음들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무수한 것들이 휩쓸리고 불타올랐다.
그 안에서 또 다른 반짝이는 것들이 새로이 태어나고, 죽고, 먼 곳으로 튕겨져 나가고…….
그 생생한 장면들이 홀린 듯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이예주의 동공을 반짝반짝 수 놓았다.
“우리는 검은 파편에 비해 저차원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의 자아를 가졌지만 동시에 수 만 가지로 분산 되었어.”
다시 허공에 떠 있는 우주가 움직였다.
은하, 은하의 안에서 폭발하는 덩어리들. 그리고 그 사이를 헤쳐 더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자 어느 순간 눈앞이 암전되었다.
누군가 스피커 선을 잡아 뺀 듯 귀를 따갑게 하던 폭음도 우뚝 멈췄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적막한 무(無)의 공간.
그곳에 작은 티끌 하나가 둥둥 떠다녔다.
“홀로 동떨어져 있을 때는 티끌처럼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아. 움직일 수도 없고 불편해. 하지만 분산 된 것들이 모이면 에너지들끼리 공명하여 하나처럼 움직일 수 있어! 우린 본래 하나였으니까.”
티끌 주변 다른 티끌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하나, 둘 씩 달라붙던 것들이 곧 빠르게 다가와 뭉치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전 아이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 뭉쳤던 부서진 암경 가루들처럼.
점 같은 티끌들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검은색의 덩어리가 됐다.
구름처럼 뭉게뭉게 꿈틀거리는 그것은 바로, 검은 안개였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드넓은 공간을 헤엄쳐 다닐 수 있게 되는 거야. 약한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생명체들이 본디 그러하듯 말이야.”
눈앞에 떠 있던 검은 안개가 갑자기 수 천 마리의 물고기 떼로 바뀌었다.
그것들이 고물고물 움직여 먼 우주 공간을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물고기 떼에 빗대었다는 것을 이예주는 알아차렸다.
“우리와 달리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검은 파편은 홀로 움직이지 못했어.”
한 무리의 물고기들이 우루루 지나가고, 그 자리에 검은색의 파편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이예주는 그것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검은 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