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301)화 (303/319)

꿀꺽,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마치 전혀 몰랐던 충격적인 사실이 세상에 내어진 듯 사람들이 기함을 했다. 

“그럴 수가!”

“세상에!”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소. 그리고 깨달았지. 오직 나만이 이 재앙을 해결할 수 있다고.”

“와아아! 눈족 족장! 눈족 족장!”

시위 현장에 온 것처럼 사람들이 ‘눈족 족장’이란 구호를 외쳤다. 

앞에서 선동하는 이들에서부터 시작된 흥분이 점점 군중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예주는 앞으로 전진 하는 데에 조금 더 속도를 내었다. 

빨리 앞으로 가야 돼. 

놈의 연설이 끝나간다는 예감에 미친 듯이 초조해졌다.

“그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바로 이 내가 검은 파편을 잠재우고 장벽을 열었소! 모두 이것을 보라!”

사람들의 머리통 사이로 제단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거의 다 왔어. 이제 다 왔어.

앞으로 갈수록 선동하는 인간들이 자리를 비키려 하지 않았다. 

이예주는 이미 녹초였다. 하지만 황금의자가 보였다.

“밀지 마! 야! 밀지 말라고!”

“이런 제길! 누가 세치기를 하는 거야!”

마침내 마지막 줄을 억지로 비집고 가장 앞 쪽에 튀어나온 이예주의 눈에 황금 의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늘어져 앉아,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남자.

“마침내 재앙을 찍어 누를 여신의 성창이 완성 되었느니!”

“와아아아―!”

눈에 핏발이 선 족장이 황금 의자 뒤에 서서 검은색 삼지창을 높이 쳐들었다. 

신전이 떠나가라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아.”

그녀는 작게 침음했다. 

그 순간, 참 이상하게도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예지몽이었구나. 

눈족들의 신전에 온 이후부터 지긋지긋하게 꿨던 악몽들은 모두 지금을 알리는 예지몽이었다. 

황금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는 람의 모습을 본 순간, 기억나지 않던 꿈의 잔재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래서 그토록 불안하고 절망스러웠던 것이다. 

무의식중에 항상 남자를 지키고 구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나는 검은 파편을 삼키고, 우매한 너희들을 재앙에서 구원할지고!”

“와아아아―! 족장! 족장! 여신이시여! 여신이시여!”

앞줄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제단 위 황금 의자에 앉아 있는 람과 족장을 가리키며 연거푸 절을 했다. 

이예주는 따라 엎드리지 않고 엉거주춤 선 채 멍하니 람을 올려다보았다.

광기에 휩싸인 군중들. 모두들 족장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갑작스럽게 제단을 뛰어 오른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발을 괴롭히던 통증조차 남자에게 못 박힌 시선을 방해하지 못했다.

제상을 뒤엎으며 제단을 뛰어오르는 자신. 악을 쓰듯 소리 지르는 인간들, 삼지창을 번쩍 쳐들고 있는 눈족 족장. 

그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그리하여, 너희들의 새로운 신이 될지어다.”

족장의 손이 아래로 힘껏 하강함과 동시에 이예주는 온 몸으로 남자를 껴안았다.

푸욱- 

검은 안개가 담긴 장로들의 피로 만든 날카로운 창날이 뼈를 부수고, 인간의 얄팍한 살점 깊이 쑤셔 박히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작은 속삭임이 깊게 잠들어 있던 검은 파편의 귓가를 간질였다. 

“……내가 구했어.”

그 순간, 꾹 감겨 있던 람이 눈을 떴다.

“내가 지켰…….”

이예주의 몸은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빠르게 무너졌다. 

잠에서 깬 검은 파편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제 위를 주루룩 덮치는 핏줄기였다.

“이, 이 계집년이 어떻게……!”

분명 구덩이 속에 가둬 놓았던 계집이 지상으로 기어 나온 것도 모자라 의식을 모두 망쳤다. 

당황한 족장이 창살을 마구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살 속을 쑤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린 핏방울이 람의 새하얀 얼굴까지 튀었다.

그 순간이었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제단 주변에서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아악!”

눈족 족장은 누군가 목을 틀어잡는 듯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제단 아래로 거세게 내던져졌다.

인간들이 우왕좌왕하며 제단 위를 오르려 했다. 

그러나 무언가에 가로 막힌 듯 그 주변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러자 다리족들이 무형의 벽을 향해 총을 쏴댔다. 두두두두- 그조차 성가신 검은 파편은 소리마저 차단했다.

제단 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예주야.”

람은 만지면 깨질까,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창에 가슴이 관통된 이예주를 제 품에 누였다.

인간 여자는 눈을 가물가물 깜빡였다. 곧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람…….”

인간 여자가 남자를 알아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 불현듯 작은 몸이 경련했다. 

울컥- 입사이로 진득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예주야.”

검은 파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왜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었다. 인간 여자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창살이 튀어나와 있는 그녀의 가슴께로 다가간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람은 상처 틈새로 제 온 힘을 불어넣었다. 

그의 떨리는 손을 타고 꾸물꾸물 힘이 쏟아져 내렸다.

인간 여자를 되돌릴 수 있었다. 

자신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곧 창에 관통당한 환부는 지혈 되고 새살이 담뿍 차올라야 하는데…….

“왜지?”

마침내 람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왜 치료가 안 되는 거지?”

피는 조금씩 그치는 듯 했지만 더 이상 상처는 치료되지 않았다.

“어째서 죽음이 네 몸을 잠식하는 거지?”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 해일처럼 검은 파편을 덮쳤다. 

그리하여 종래에 그는, 마치 제 몸이 창에 찔린 것처럼 절규했다. 

“예주야, 왜?”

대체 왜 그런 것이냐고. 그는 그녀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창살을 와락 움켜잡고 말했다.

“이런 것은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어.”

“…….”

“그런데, 왜!”

그의 말이 맞았다. 

눈족 괴물들이 어떤 짓을 해도. 설사 그들이 검은 안개가 흐르는 피로 불길한 삼지창을 만들어서 그의 심장을 찔렀어도, 어쩌면 람은 괜찮았을지 모른다.

답하자면 수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렇지만 그 순간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다치는 것을 다시 볼 바엔 그냥 자신이. 제 몸이…….

“……울지 마요.”

이예주는 문득 제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따뜻한 물방울 때문에 갖은 힘을 써 손을 들었다. 

죽은 사람처럼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그녀의 손이 람의 뺨을 감쌌다. 

“……당신이 다치는 거 싫어.”

나는 지금 얼마나 기쁜데. 왜 울고 그래요. 뒷말은 마저 이을 수 없었다. 

문득 눈을 찌르듯 환한 빛이 새어들어 왔기 때문이다. 

람이 아닌, 그의 뒤편을 향한 이예주의 동공이 일순 아득해졌다.

‘문’이 열려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단 하나 뿐인 ‘문’이.

“가지마.”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더 이상 이예주 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는 것이 ‘문’이란 것을 눈치 챈 남자가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안 갈 거…….”

“내게 감정을 가르쳐 주기로 했지 않아.”

람이 말했다. 

애원에 가까웠다. 

이예주는 아무데도 가지 않겠다고 말하려 했다.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죽음을 회피해 온 자신이라도 창에 가슴이 뚫린 채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 어…….”

그러나 채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람의 뒤에 있던 ‘문’이 점점 제게로 다가왔다.

“안 돼!”

람이 그녀의 몸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점점 다가온 문이 끝내 이예주를 덮쳤다. 

“다시 돌……!”

이예주는 다급히 외쳤다. 

금방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그러나 채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환한 빛이 눈앞을 잠식했다.

*       *       *

잠시 후, 거짓말처럼 람의 품에 있던 인간 여자는 사라졌다. 

그는 텅 빈 제 두 손을 바라보았다. 결국 인간 여자는 또 제 능력을 통해 사라졌다.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남은 것은 그의 발밑에서 버르적거리는, 아직 의식조차 없는 작은 에너지 덩어리뿐이었다. 

인간 여자를 붙잡아 두기 위해 그토록 안간 힘을 쓰며 그녀의 몸에 심었건만, 그녀는 끝내 이것을 두고 가버렸다.

“쓸모없는 것.”

람은 차가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바깥은 아수라장이었다. 

그가 만든 무형의 벽을 뚫기 위해 날뛰는 인간들의 모습이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었다.

남자는 던져진 충격으로 제단 바로 밑에서 바닥을 기고 있는 눈족 족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손을 까딱였다. 

눈족 족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머리채가 잡혀 제단 위로 질질 끌려왔다.

“으, 으으!”

알 수 없는 것들이 들끓고 있는 검붉은 눈을 마주한 눈족 족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벌 떨었다.

저를, 그리고 제 연인을 창으로 쑤시려 들었던 인간이었다. 

람은 불현듯 오른손을 제 왼쪽가슴에 쑤셔 넣었다. 

푹―

“흐익!”

노인이 기겁을 했다. 

그러나 람은 무감각한 얼굴로 제 가슴 속을 헤집다가 불쑥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그의 오른손에 잡혀 딸려 나온 것은 으레 있어야 할 심장이 아닌, 주먹만 한 검은 파편이었다.

그는 그것을 엎드려 있는 눈족 족장의 앞에 내던졌다.

“먹어.”

“허, 허억. 거, 검은 파편!”

“네가 천 년 전부터 원하던 것이지 않느냐.”

그 와중에도 검은 파편을 발견한 족장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것을 먹고 그토록 원하던 신이 한 번 되 보도록 해.”

하이에나처럼 비열하게 눈을 굴리며 람의 눈치를 보던 족장이 떨어진 허락에 허겁지겁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끝이 송곳처럼 뾰족함에도 불구하고 족장은 파편을 억지로 목구멍에 밀어 처넣었다. 

“컥, 컥! 하아…….”

이윽고 주먹만 한 파편을 모두 삼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

“이제 네놈을 꺾고, 내가 신이야! 내가 바로 검은 파편이라고!”

괴물이 되기 직전의 인간이 낄낄 웃으며 환호했다. 

람은 그 모든 것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오오! 이게 바로 신의 힘이란 말인가! 에너지가 차오르는 기분이군!”

“…….”

“어떻지? 내게 굴복하게 된 기분이! 천 년 간 인간 위에서 군림했지만, 결국 네놈도 인간들의 손에……!”

삿대질을 하며 몸속을 타고 흐르는 에너지를 느끼던 족장이 그 순간 부릅 눈을 홉떴다.

“이, 이게…….”

삼킨 검은 파편에서부터 시커먼 기운이 끝도 없이 밀려 나왔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컥, 이, 이것이…….”

머리 위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무게가 몸을 마구 짓누르는 것 같았다. 

뿌드득- 

문득 살이 터지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 뼈 할 것 없이 사방에서 압력이 시시각각 몸을 조여 왔다. 

족장은 부릅 눈을 홉떴다. 

그 눈 조자 금방이라도 또르르 굴러 떨어질 것처럼 튀어 나왔고.

“컥, 컥!”

퍽- 

마침내 개구리처럼 튀어나왔던 눈이 끈적한 액체를 흩뿌리며 터졌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뿌득, 빠즈즉, 퍽- 

족장의 몸에서 계속해서 섬뜩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버티기 힘든가?”

람이 그런 놈에게 물었다. 

족장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껄떡거렸다. 

“검은 파편을 먹었으니, 신이 되어야지.”

“크…… 사, 살려……!”

“될 수 있으면 한 번 돼봐. 네 놈의 썩어빠진 몸뚱이로 어떤 신이 탄생할지 궁금하군 그래.”

그러나 족장은 끝내 답 할 수 없었다. 

빠즉, 뿌드득- 

그 순간 무언가 부숴 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쥐포처럼 납작해졌다. 

하나 남은 눈마저 터졌다. 

눈과 코, 입, 귓구멍에서 검은색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어서 족장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뿌드득, 뿌드득. 그럼에도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뼈와 살이 짓눌려 터지고 납작해지다 못해, 가루처럼 부서져 사라지고 있었다. 

람이 비릿하게 웃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네 까짓 게 어떻게 그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썩어 빠진 인간의 몸뚱이로는. 아니, 그 누구도 제 몸체의 무게를 지탱 할 수 없었다. 

천 년 전에 한 번 겪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버러지 같은 것은 조금도 학습 하지 못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에게 딱 어울리는 말로였다.

그는 놈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입고 있던 주체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볼록 솟은 옷더미는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딴 것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이제 하나 뿐인 제 연인을 되찾을 때였다.

왼쪽 가슴이 뻥 뚫린 남자가 황금 의자에 다시 앉았다. 

놈의 몸이 부서지며 튕겨져 나온 검은 파편이 더러운 바닥을 뒹굴었지만 다시 줍지 않았다.

잔뜩 흐트러진 태도로 의자 위에 앉은 그는 오만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버러지들이 날뛰고 있었다.

“……아무데도 못가.”

인간 여자가 어디로 갔을지 고민하던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다행히, 그는 제 연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잡기 위해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그리고 그것은 이미 몇 번 성공한 방법이었다.

비록 이번에는 그 빌어먹을 문에 아무것도 떠있지 않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네가 도착 할 모든 대륙을 소멸시키면, 다시 내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겠지.” 

그는 이예주가 들었다면 기겁 했을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읊조렸다. 

갈 곳이 사라진 그녀는 이전에도 그랬듯 제게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과거에 그는 끝내 제 권능 아래 있지 않은 시간을 잡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인간 여자는 권능 밖의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가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다.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고통은 찰나였다. 

온 대륙을 소멸시키는 걸로 그녀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다시 제 품 안에 거머쥘 수만 있다면. 

그깟 몸체 따위 얼마든지 스스로 때려 부수고 파멸 시킬 수 있었다. 

“그런 건, 내게 너무 쉬워.”

검은 파편은 흐릿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뻥 뚫린 왼쪽 가슴에서 흘러나온 시뻘건 핏줄기가 그의 발밑을 적시고, 제단을 따라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 대륙에 피와 같은 검붉은 용암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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