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괜찮아?”
“왜, 왜 그래, 누나.”
“……이제 어떡하지?”
그녀는 어린 아이처럼 울먹였다.
람이 잠들고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다리족이 남쪽 대륙에 오고 신전에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괴물 놈들이 람에게 무슨 짓을 하려 들고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그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도…….
“이제 어떡해.”
이예주는 흐느꼈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주변에 서 있던 이들마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그때였다.
푸르륵- 문득 뒤쪽에서 짐승 소리가 들렸다.
철조망 앞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그쪽을 쏠렸다.
“……순록?”
사박, 사박. 눈을 밟는 소리와 함께 나무 사이로 새하얀 뿔들이 나타났다.
베니가 그것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사제님의 순록들이 왜…….”
푸르륵! 가장 큰 순록이 선두로 걸어 나왔다.
무리 중 가장 하얀색에 가까운 회갈 빛 털이 이예주도 잘 아는 어떤 동물을 연상케 했다.
그 순록은 불현 듯 투레질을 하며 바닥에 발을 굴렀다.
빨간 천을 향해 금방이라도 돌진하려는 투우 같은 형상이었다.
“어어! 다들 피해!”
심상치 않은 거대한 동물의 움직임에 릭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들 일행은 우루루 나무가 빽빽한 곳으로 움직였다.
눈 밭 위에 주저앉아 있던 이예주 또한 베니와 리즈의 이끔에 힘없이 딸려갔다.
공격하려 드는 것은 아닌지, 우두머리 순록은 인간들의 움직임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푸륵, 푸르르―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힘차게 발을 구르던 짐승은 얼마 안 가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쿵―! 요란한 소음과 함께 순록의 거대한 뿔이 철조망에 처박혔다.
철사 사이에 잔뜩 붙어 있던 얼음 조각들과 눈이 아래로 우루루 쏟아졌다.
“뭐하는…….”
뜬금없이 얼음벽에 뿔을 처박은 순록은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한가로이 옆으로 물러섰다.
이예주의 일행은 하나 같이 얼어붙어 그런 순록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우두머리 순록이 제 무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또 다른 순록이 투레질을 하더니 우두머리를 뒤이어 철조망에 뿔을 처박았다. 쿵―!
“저게…….”
“순록이 벽을 뚫고 있어요!”
베니가 다급히 외쳤다.
그 말이 정확했다. 순록들은 이유 없이 날뛰는 것이 아니었다.
한 곳을 목표로 하여 정확히 뿔을 들이 박고 있는 것이다.
“우, 우릴 도와주나봐!”
리즈가 손가락질 하며 기쁘게 소리쳤다.
쿵. 쿵.
여러 마리의 순록들이 번갈아 가며 들이받는 힘에 의해 철조망에 두껍게 쌓여있던 얼음들은 쉽게 쩍쩍 갈라졌다.
인간들은 짐승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개척하는 모습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구멍이 뚫리는 것을 넘어 펜스 한 면이 바깥쪽으로 쓰러졌다.
순록들이 그 위를 쉽게 겅중겅중 뛰어 넘어 빠져나갔다.
“우리도 얼른 가자꾸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릭 아저씨를 필두로 그들 일행은 우루루 뜬금없이 생긴 탈출로를 향해 다가갔다.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숲을 향해 힘껏 달려 사라질 줄 알았는데, 순록 한 마리가 넘어진 철조망 반대편에 유유히 서 있었다.
“너…… 순심이 가족이구나.”
반질반질한 까만 눈이 이예주와 마주쳤다.
그리운 동물의 흔적에 그녀는 우는 듯 웃었다.
“고마워.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푸르르― 그녀의 말에 한 차례 거세게 고개를 뒤흔든 순록은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제 무리를 따라 겅중겅중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서 넘어 오시오.”
그사이 일행은 모두 무너진 철조망을 넘어 반대편으로 건너간 상태였다.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아 주고 있던 릭 아저씨가 이예주에게도 손을 뻗었다.
그녀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나, 뭐해! 얼른 와! 누가 소리를 듣고 쫓아올지도 몰라.”
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이예주를 보며 베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예주는 그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베니, 브레든 잘 챙겨줘.”
“누나!”
“언니!”
모두들 기함하여 그녀를 불렀다.
베니가 릭의 옆으로 달려와 득달같이 소리쳤다.
“우리랑 같이 가, 누나!”
“안 돼. 나, 가야돼.”
“왜!”
베니가 씩씩 거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예주는 처음 보는 베니의 모습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사람이 뭔데! 누나 갇혀 있는 동안 잠만 자고 아무것도 안하던 사람인데, 왜! 왜 우리 말고 그 사람을 챙기는데!”
“…….”
“인간들한텐 나쁜 사람이잖아! 우리 공격하고 다 죽이려는 사람이잖아! 그니까!”
“…….”
“그냥 우리랑 가! 우리랑 가, 누나! 그냥 우리랑…….”
“베니…….”
얼굴이 벌게진 채 악다구니를 쓰는 베니를 이예주는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
“나는 그 사람을 구하지 못할까봐 너무 무서워.”
그녀는 드디어 구덩이 속에서 끊임없이 번뇌했던 제 두려움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도, 혼자 남겨져 천천히 죽어갈지 모른다는 공포도 아니었다.
“네가 족장에게서 리즈를 구하려고 밥도 안 먹고 내 방에서 날 기다렸던 것처럼, 나도 누구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어. 도와달라고, 제발 잠든 그 사람을 좀 지켜달라고.”
“…….”
“하지만 나한텐. 아니, 그 사람한테는 없잖아? 네 말대로 인간들에겐 참 나쁜 남자라서, 잠에 들었을 때 지켜줄만한, 도움을 줄 만한 누군가가…….”
“…….”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베니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이예주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누나한테 웃으면서 인사해줘. 그리고 빌어줘.”
“…….”
“내가 그 사람 잘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씨이.”
새빨갛게 충혈된 베니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그동안 의젓하기만 했던 베니가 처음으로 아이답게 보여서 이예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거, 바꿔 입고 가시오.”
그때까지 침묵하던 릭 아저씨가 그녀에게 불쑥 뭔가를 건넸다.
“신전은 지금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것 같소. 그래도 회색 로브는 사제나 대장장이들만 입을 수 있는 것이나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그가 입고 있던 회색 로브였다.
안에 입고 있던 릭의 헐거운 차림이 차가운 칼바람에 노출되자, 이예주는 허겁지겁 열쇠를 빼낸 후 제 검은색 로브를 벗어주었다.
“이제 설원 너머 침엽수 숲으로 가세요. 아마 순록들 따라가면 될 거예요.”
묵묵히 제 로브를 받아 입은 아저씨에게 이예주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부탁드려요.”
“몸조심하시오. 젊은 아가씨가 너무 무작정 나서지 말고.”
릭이 무뚝뚝한 언사로 그런 그녀를 격려했다.
제 오빠의 손을 꼭 잡은 리즈가 울음이 가득한 얼굴로 베니 대신 인사했다.
“다시 볼 수 있지, 언니?”
이예주는 환히 웃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리즈, 베니, 그리고 브레든까지.
“당연하지.”
* * *
무너진 신전 터까지 나있는 원래 숲길에 올라서서 걸은 지 얼마 안가 신전의 뒤뜰이 있는 쇠창살에 도착했다.
베니의 말이 맞았다. 총을 든 군인 두 명이 쇠문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쇠창살 너머 뒤뜰에도 여러 명의 다리족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신원을 말하십시오.”
“탑에서 오는 길이오. 대장장이.”
이예주는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채 릭 아저씨를 흉내 내었다.
목소리 때문에 들킬까봐 긴장했지만, 다행이도 구덩이 속을 기어 다니며 온갖 비명을 지른 탓에 제가 듣기에도 걸걸한 말투가 나왔다.
철컥,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이예주는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첫 번째 관문을 통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바로 온실 문으로 갈 수 없었다.
“당분간 이쪽 문은 이용할 수 없습니다. 외벽을 돌아 정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뒤뜰을 채 가로지르기도 전에 다리족 군인 두 명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시발.’
이예주는 속으로 욕을 삭였다.
다리의 통증 때문에 속도가 느려 신전 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필요했다.
그러나 무장한 군인들을 밀치고 온실 문으로 들어 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별 수 없이 신전의 외벽을 따라 난 길로 걸음을 돌렸다.
통증을 꾹 눌러 참고 절뚝거리며 간신히 신전 정문 쪽에 도달했을 때였다.
이예주는 신전 앞뜰의 상황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람이 나타나며 부숴버린 기둥들 때문에 신전 입구는 온통 엉만 진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 것은 그 잔해들 사이로 개미 떼처럼 몰려 있는 많은 수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이 추운 남쪽 대륙에서 얇고 다 찢어진 차림새로 보아 유목민이나 버려진 인간들에 가까웠다.
족장 놈은 왜 굳게 걸어 잠궜던 장벽을 열어 마을에서 내쫓은 사람들을 다시 신전으로 불러 모은 걸까.
이예주는 잔뜩 굳은 얼굴로 군중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했지만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 있는 쪽으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신전의 입구에도 다리족들이 넓게 포진하여 무질서한 군중들을 통제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기둥마다 서 있던 다리족 한 명이 기단을 따라 걸어온 이예주를 발견하고 불쑥 물었다.
“사제인가?”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그가 막고 있던 길을 터줬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오.”
이예주는 군인들을 지나쳐 쉽게 신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아무래도 거적 떼기를 걸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차림새 때문이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녀와 같이 회색 로브를 입고 있는 인간들이 극히 드물었다.
이예주는 릭 아저씨에게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감사했다.
제단까지 우글우글 몰려 있는 사람 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신전 내부는 무슨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이예주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사람들 사이를 마구 헤쳐 앞쪽으로 향했다.
“곧 의식이 시작 될 테니 대열을 이탈하지 마시오!”
“질서를 지키시오!”
“서로 밀치지 마시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다리족 놈들이 확성기를 통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들었다.
이예주는 그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람들을 밀치고 끼어들기도 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봐! 밀지 말라고!”
그러나 조금의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 찬 사람들을 뚫고 앞쪽으로 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태산같이 서서 비겨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예주가 오도가도 못 할 때쯤이었다.
“주목―! 의식을 시작하겠소!”
노인의 찢어지는 음성이었다.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예주의 몸이 흠칫 굳었다. 족장의 목소리였다.
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세기말 용암 대폭발 이후 인간들은 오랜 시간 힘겨운 싸움을 해왔소. 과거, 그 어떤 재앙들을 합쳐도 지난 세월에 비할 수 없었지. 초월적인 존재가 깨어나 하루아침에 우리를 사지로 내몰았고, 그 결과!”
족장의 외침이 시작 되자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먹이 사슬의 가장 최상위였던 인간에게 멸종의 위기가 도래했소.”
이예주는 다시 사람들을 밀치고 힘겹게 전진했다.
험악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는 인간들이 있었지만, 고요한 주변 분위기 탓인지 크게 대거리 하진 못했다.
“눈족들은 오랫동안 답을 찾아 헤매왔소. 이 재앙은 어디서 기원되었나. 인간 문명을 한 순간에 재로 만든 초월적인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 힘의 근원은!”
제단 위를 왔다갔다 거리는 족장의 대가리가 비쳤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잘못 생각해왔소! 답은 우리 내부에 있었는데, 괜한 외부로부터 존재하지 않은 답을 찾아 헤맸던 거요!”
족장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여신은 언제나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셨지. 하지만 그동안 인간들은 어땠소! 특히 시간족들은! 여신께서 주신 능력을 남발하고, 그도 모자라 삿된 이익을 위해 축복을 더럽혔지!”
‘미친 새끼…….’
이예주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놈의 연설에 욕설을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기 전에 지 후드부터 한 번 벗어보시지.
신전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저 괴물만큼 능력을 삿되게 써 몸을 더럽히지 않았을 것이다.
“용암 폭발 전의 인간들은 타락했소. 그러나 재앙의 기원을 찾아 과거를 탐사하던 눈족들만이 알 수 있었지! 타락한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여신이 제 현신인 검은 파편을 지옥에서 올려 보냈다는 것을!”
“…….”
“그러나 검은 파편의 욕심이 끝을 모르고 들끓고 있소. 놈의 핍박으로 인해 피폐해진 인간들은 여신의 존재를 잊었소. 신념의 부재로 여신의 힘이 희미해진 틈을 타 검은 파편은 인간들을, 더 나아가 대륙을, 이 지구 전체를 집어 삼키려 들고 있지!”
족장이 피를 토하듯 소리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바탕의 헛소리 잔치가 끝이 나자 신전 안은 소름 끼칠 만큼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얼마 후, 족장과 가까이 서 있든 제단 앞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동의했다.
“옳소! 옳소!”
“우리는 더 이상 검은 파편의 존재를 두려워해선 아니 되오! 두려움은 놈의 먹이이자 에너지이지! 우리의 슬픔과 절망, 좌절을 먹고 자란 놈이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있소! 그러니 망각해선 안 되오! 검은 파편은 그저!”
족장이 말을 멈추고 한차례 뜸을 들였다.
“……새로운 신의 탄생을 위해 내려진 여신의 현신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