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누나.
또 다시 지옥 같은 악몽 속을 헤매던 이예주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누나.
환청 같은 소리였다.
아니, 환청이 맞았다.
자신을 좀먹는 악몽과 수렁이 아니라면 이 구덩이 속에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릴 리 없지 않은가.
그녀는 다시 힘없이 눈을 감았다.
환청에 희망을 가지고 반응하다 절망하고 우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그녀는 있는 대로 몸을 말고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들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누나―!
이전보다 조금 더 선명한 소리가 위에서부터 타고 내려왔다.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이번엔 환청치고 좀 생생했다.
구덩이 속으로 텅텅 울려 퍼지는 메아리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레든……?”
이예주는 힘겹게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한껏 쳐들고 어둠 속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브레든?”
“누나―! 아직 거기 있지?”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메아리에 이예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환청이 아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이예주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베니?”
신음 같은 대답이 터져 나왔다.
“흐, 흐으…… 베니! 나 여기 있어!”
그녀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달렸다.
시퍼렇게 부어오른 오른발 때문에 거기까지 도달하는 길이 천 길처럼 느껴졌다.
절뚝이는 몸이 곧 넘어질 듯 아슬아슬 했지만 이예주는 용케 넘어지지 않고 반대편 벽면에 도착했다.
“베니! 흐, 흐윽! 나 여기! 나 여기에 있어! 베니! 베니!”
이예주는 서러운 울음을 토해내며 마구 벽을 두드렸다.
이미 심각하게 다친 손이 어마어마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 꺼내줘! 나 꺼내줘, 베니!”
“누나―! 위험하니까……!”
“베니! 베니!”
“가장 자리에 붙어 있어! 알았지? 누나―!”
거리가 멀어서인지 안타깝게도 베니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메아리를 타고 들려오는 베니의 말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그녀는 벽을 짚고 몸을 돌려 벽면에 등을 붙였다.
굴 벽에 차가운 기운이 새어나왔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기꺼웠다.
얼마 안 가 위에서부터 희미한 사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순식간에 이예주의 머리 맡에 당도했다.
촤라라락― 구덩이 아래를 향해 사슬이 엄청난 속도로 풀어내려지더니 ‘쾅―!’ 하고 무언가 바닥에 떨어졌다.
뽀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위에 있는 대장간에서 보았던 쇳물을 나를 때 쓰이는 커다란 양동이였다.
“누나―! 아직 있는 거 맞지?”
“응! 나 여기 있어!”
“있으면 거기에 올라타, 누나!”
이예주는 그것이 저를 두고 금방이라도 다시 올라갈까 두려워 황급히 양동이 쪽으로 다가갔다.
“아!”
너무 서두른 나머지 절뚝이는 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철퍽 넘어져 버렸다.
알싸한 통증이 팔과 무릎을 타고 올랐지만 아픔을 느낄 새조차 없었다.
이예주는 넘어진 그 상태로 바닥을 기어갔다.
그렇게 버르적거리며 한참을 기어 커다란 양동이에 도달한 그녀는 있는 남은 체력을 모두 쥐어짜 그 안으로 고꾸라졌다.
“나갈 수 있어. 이제 나갈 수 있어. 람에게 갈 수 있어.”
양동이 속에 몸을 잔뜩 구겨 넣은 채 이예주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누군가 올라타기를 기다리듯 얼마간의 틈이 지났다.
끼릭, 끼리릭―
마침내 그녀를 태운 쇠 양동이에 연결된 사슬이 조금씩, 조금씩 위로 끌어올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끔찍한 구덩이 속에 빠져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예주는 두 팔 안에 숨긴 고개를 들지 않았다.
* * *
“누나!”
양동이를 타고 절벽 위에서 끌어 올려 진 이예주를 기다리는 것은 다행히 눈족이 아니었다.
“베니…….”
많이 걱정했었다.
비록 베니는 한쪽 눈에 흰 천을 휘감고 있었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양동이를 빠져나오는 그녀를 허겁지겁 부축했다.
“누나, 괜찮아?”
“당신, 괜찮소? 몰골이 엉망이구먼…… 쯧.”
미처 보지 못한 릭 아저씨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문 옆쪽에서 그녀를 끌어올리기 위한 수동 장치를 돌리고 있던 모양이다.
“두 사람 다, 어떻게…….”
이예주는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베니가 다급히 말을 막았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서 얘기해, 누나.”
“맞소. 탑 주변을 지키는 놈들이 점심을 먹으러 간 틈을 타 몰래 들어 온 것이라 서둘러 나가야 하오.”
릭 또한 초조한 얼굴로 동감했다.
이예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래요. 그럼 빨리 나가…… 으읏!”
“누나!”
그러나 한걸음 떼기 무섭게 오른 다리가 꺾였다.
베니와 릭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붙들어 주었다.
“왜, 왜 그래, 누나?”
“그게, 다리를 좀…….”
“발목이 크게 부었소. 인대가 뜯어졌거나 금이라도 간 것 같은데…… 이 상태로 계단을 수 있겠소?”
그녀의 발목을 살펴 본 릭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예주는 대장간 밖, 지상과 연결 된 엄청난 높이의 계단을 떠올렸다.
그것을 오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 앞이 아득해졌다.
그때, 릭이 불현듯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업히시오.”
“아, 아니에요. 걸을 수 있…….”
“고집 부리지 말고 얼른! 시간이 없소.”
“맞아, 누나. 우리 어서 나가야 돼. 밖에 리즈 혼자 브레든을 데리고 있단 말이야.”
베니가 가세하여 이예주를 설득했다.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녀는 이내 염치를 내려두고 릭의 등에 업혔다.
“그럼, 실례 좀 할게요.”
이예주를 업은 릭과 베니는 뛰다시피 지하 공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가는 좁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등은 오랜 노동으로 굳어 딱딱했지만 무척 널따랬다.
계단은 구덩이만큼 어두웠지만, 탈출을 하는 길목이어서 그런가.
이예주는 업혀 올라가는 중간 중간,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까무룩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누나, 괜찮아?”
한참 후 누군가 그녀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이예주는 부스스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분명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 있던 것 같은데, 하얀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 쬐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드러난 얼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전히 릭의 등에 업힌 채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내려 주세요.”
“그냥 좀 더 있으시오. 길이 험하오.”
릭이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그의 말처럼 계단을 오를 때보다 업혀 있는 몸이 훨씬 들썩거렸다.
이예주는 머쓱한 채로 가만히 그 말을 따랐다.
솔직히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아직도 지하에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다 구덩이 속에 처박혀 꾸고 있는 악몽일까 두려웠다.
그들은 훤환 대낮의 숲 어딘가를 헤치며 계속해 걸어 나갔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빽빽하던 나무의 밀도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 숲의 끝을 나타나듯 높은 벽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 벽 근처에 서성이고 있던 몇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언니!”
누군가 해맑게 그녀를 불렀다.
“리즈.”
어디 다친 데 없이 멀쩡한 아이의 모습에 이예주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몸을 아래로 숙이는 릭 아저씨의 등에서 주섬주섬 내려왔다.
한달음에 달려온 리즈의 뒤로 사람들이 더 있었다.
“누나. 누나.”
한 명은 이예주도 익히 알고 있는 아이였고, 강보에 쌓인 갓난아기와 아기를 안고 있는 야윈 여성이었다.
릭의 가족이었다. 이예주는 그들과 짧막한 인사를 나누었다.
브레든이 그런 그녀에게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었다.
“누나. 누나.”
“하. 브레든 너, 대체…….”
이예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런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얘가 어떻게 여기에…….”
밝은 데서 본 브레든은 구덩이 속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더 꼬질꼬질하고 더러웠다.
그녀는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그녀를 내버려 둔 채 홀로 구덩이를 기어올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브레든이 어떻게 베니와 함께 있는가.
그 의문은 당사자가 쉽게 해결해주었다.
“브레든이 나를 찾아왔어.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어.”
“누나. 누나.”
브레든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녀와 베니의 사이를 끼어들더니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떼가 타 시커먼 손바닥 위에 그보다 더 시커먼 색의 쇳덩이가 놓여 있었다.
이예주의 열쇠였다.
“너 정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그녀의 얼굴이 왈칵 흐려졌다.
알아서 베니를 찾아낸 아이를 기특하게 여겨야 하는 건지, 한마디 없이 구덩이 속에 그녀만 내버려두고 가버린 것을 원망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누나. 누나.”
이예주가 열쇠를 도로 회수해 간 이후에도 아이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구덩이 속에서 잊지 않고 챙겨 온 알리자린의 안대를 꺼냈다.
“누나. 누나.”
낚아채듯 그것을 받아낸 브레든이 제 입속에 그것을 욱여 넣고 쭉쭉 빨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애들을 데리고 떠나지 않았어요?”
심각한 상황에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히 굳었다.
“베니가 깨어나면 길을 물어서 곧 바로 탈출하라고 했잖아요.”
“그게…….”
“탈출구가 여기야, 누나.”
따져 묻는 그녀 때문에 난감해 하던 릭을 대신하여 베니가 나섰다.
“……뭐?”
“우리가 같이 찾은 탈출구, 여기야.”
베니의 말에 이예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보았던 눈과 얼음이 잔뜩 서린 높은 철조망은 맞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찾아내었던 개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그땐 분명 뚫려있었잖아?”
샅샅이 벽을 훑은 이예주가 다급히 베니를 돌아보았다.
베니의 낯빛이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여기가 아닐지 몰라. 네가 잘못 찾은 것일 수도…….”
“여기 맞아. 내가 그때 돌아오면서 근처에 돌을 쌓아 표시 해뒀거든.”
“그럼 대체…….”
“누군가 일부러 막아 둔거요.”
릭이 씁쓸한 얼굴로 사실을 토로했다.
“족장이 눈치 챘을지 모르오. 이곳에 빠져나갈 구멍이 났다는 것을. 이쪽 철조망이 교체되어 새로 엮여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러 물을 뿌려둔 것 같더군. 꽝꽝 얼려 쉽게 잘라내지 못하도록 말이오.”
“그게…….”
“망치로 내리쳐봤지만 뚫을 수 없었소.”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개구멍이 교묘히 숨겨져 있던 풀숲을 들췄다.
그의 말처럼 다른 곳보다 유독 반질반질한 철조망에 두꺼운 얼음이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그 한가운데 릭이 망치로 내리친 자리만 움푹 파여 있었다.
“하…….”
이예주는 암담한 현실에 순간 휘청거렸다.
“누나!”
베니가 재빨리 그런 그녀를 잡아 부축했다.
이예주는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베니 뿐 아니라 제가 필사적으로 구해내려 했던 모두를 돌아보았다.
“다른, 다른 곳은. 다른 탈출로를 찾아야 돼. 다른 곳으로…….”
“장벽이 열렸어, 누나.”
“……뭐?”
“장벽 밖에 있는 사람들…… 눈족이든 누구든 모든 사람들이 신전 안으로 들어오고 있어.”
“그게…….”
“그리고 신전 근처에 총을 든 다리족 군인들이 깔려 있어. 신전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아.”
베니가 무거운 목소리로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신전 상황을 알렸다.
예전처럼 신전을 마구 돌아다닐 수 없다는 뜻이었지만, 이예주는 과할만큼 날카롭게 숨을 집어먹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며칠이야?”
“응? 며칠이라니?”
“아니…… 내가 구덩이 속에 얼마나 갇혀 있었어?”
“그게…….”
“말해줘! 내가 얼마나 갇혀 있었어? 지금 며칠이나 지난 거야?”
베니는 다급히 묻는 이예주를 걱정스레 바라보면서 순순히 묻는 말에 대답해 주었다.
“누나, 하루 꼬박 갇혀 있었어.”
“하, 하루?”
“응. 하루. 그러니까 누나가 리즈 데리고 탑 밑으로 내려 온 밤부터 하루 갇혀 있었고, 지금은 그다음 날 아침…….”
“아아…….”
이예주는 기어이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