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주는 무시했다.
또 알 수 없는 소리들을 떠들어대는 것의 일환이거니 했다.
“나가?”
그러나 한 번 더 명료한 질문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브레든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나보고 한 소리야?”
“나가?”
“너…… 내 말 알아듣겠어?”
이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레든이 처음으로 자신의 말에 반응한 것이다.
쩔그럭, 사슬 끄는 소리와 함께 그가 어슬렁어슬렁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위에?”
그리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조금의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이예주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위에!”
“위에. 누나. 먹이.”
하지만 희망은 채 싹트기도 전에 꺾였다.
대화가 통하는 듯 했으나 결국 브레든이 어물어물 내뱉는 몇 개 단어들의 연장선이었다.
누나, 먹이.
“넌 먹이란 말 밖에 모르냐…….”
“위에 누나?”
“하…….”
이예주는 다시 아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위에 먹이?”
그러나 브레든 놈은 뭐에 발동이 걸린 건지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네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
“위에 누나?”
“위에 누나가 뭔데.”
“위에 먹이?”
반복되는 똑같은 말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그만해. 나도 몰라.”
“위에. 나가.”
“먹이고 뭐고! 위에 가면 뭐라도 먹을 게 있겠지! 그렇지만 뭐가 있든 못나가니까 제발 그만해!”
“아니야. 나. 나가.”
“……뭐?”
패턴이 바뀌었다.
새로운 단어가 들리자 이예주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브레든이 또 한 번 같은 말을 하면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나. 나가.”
“뭐가?”
“나. 브레든.”
“너?”
그녀가 되묻자 브레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위에.”
“너 위에……?”
“묶였다.”
“그게 대체 뭔 소리야.”
토막토막 떨어지는 단어들을 좀체 이해 할 수 없었다.
이예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브레든의 말을 종합했다.
“너 위에 있는데 묶였다고? 누가?”
“나, 나가. 위에. 묶였다.”
“그러니까, 네가 나갔어, 위에. 그런데 묶였다고? 그게…… 아!”
그녀는 불현듯 눈을 부릅떴다.
초성퀴즈처럼 알쏭달쏭하던 것들이 모아보니 명쾌해졌다.
이예주는 벌떡 몸을 일으켜 한달음에 브레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 너 위에 갈 수 있어?”
“나. 나가.”
“위에 갈 수 있다는 거지? 응? 그렇지?”
“위에?”
“그래, 위에! 지상에!”
“응, 위에. 브레든 위에.”
아이가 처음으로 그녀의 물음에 확실하게 답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모습에 꺼졌던 희망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예주는 조금 반신반의 했지만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브레든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럼, 그럼 내가 네 사슬 풀어줄 테니까…… 아까처럼 나 덮치거나 먹으려 들면 안 돼. 알았지?”
“먹어?”
“아니, 아니! 먹으면 안 되고. 이거 풀어줄 테니까.”
그녀는 아이의 깡마른 양 발을 옥죄고 있는 무거운 족쇄를 한 번 흔들어보였다.
“이 족쇄 풀어줄 테니까 위로 올라가야 돼. 알았지?”
“이거, 무거워. 못가.”
“그래, 맞아. 이거 달고는 절대 위로 못 올라가지. 그니까 누나가 풀어줄게.”
맞장구를 쳐주며 이예주는 제 품을 뒤적였다.
아까 제 족쇄를 풀고 나서 넣어뒀던 열쇠는 어디 사라지지 않고 안주머니에 고이 있었다.
“누나?”
브레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가 말한 누나를 되뇌었다.
열쇠를 꺼낸 후 부산스럽게 족쇄의 열쇠구멍을 찾은 이예주는 한 번 더 신신당부했다.
“이제 이거 풀어줄 거야. 누나 물려고 들면 안 돼. 알았지?”
“누나?”
“그래, 나. 내가 이제 네 누나야.”
족쇄에 열쇠를 가져다 대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솔직히 아직도 무서웠다.
아까처럼 자신을 먹이로 인식하고 또 물어뜯으려고 달려 들까봐.
이예주는 이제 오른쪽 다리도 완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도저히 몸싸움을 할 기력도 남지 않았다.
그나마 사슬에 묶여 있으면 동선에 한계가 있어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지만, 족쇄가 풀리면 말이 달라진다.
정신을 잃기 전 쟈니아년이 속삭였던 것처럼, 꼼짝없이 배고픈 브레든에게 잡아먹힐 지도 모른다.
“제발 지금처럼 정신 잃지 말아줘, 제발…….”
이예주는 덜덜 떨면서 열쇠를 든 손을 족쇄에 가져다 대었다.
브레든은 눈도 깜짝 하지 않고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철컥.
만능열쇠는 오랫동안 아이의 가는 발목을 억압하던 족쇄를 너무나도 쉽게 풀어주었다.
“왁. 왁.”
두 발이 자유로워지자 브레든은 어색한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누나. 누나.”
그러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침으로 범벅된 제 누나의 안대를 건넸다.
“이걸 왜……?”
“누나. 누나.”
뒤로 주춤 물러섰지만 계속 다가오며 그것을 들이밀었다.
이예주는 어쩔 수 없이 찡그린 이마 살을 내색 않고 손 끝으로 안대 끈을 잡아 받아 들었다.
그 후 잠시간 이리저리 걸으면서 가벼운 발에 적응하는 듯하던 브레든은 돌연 로켓처럼 앞으로 팍 튀어 나갔다.
“왁! 왁! 위에! 위에!”
“어, 어딜……!”
그런 아이를 쫓느라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난 이예주는 순간 입을 떡 벌렸다.
“헐.”
파바바박.
브레든의 인간이라고 도저히 믿기 힘든 속도로 울퉁불퉁한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돌 틈새로 마구 손가락을 쑤셔 넣어 오르는 모습이 곧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저, 저게……!”
하지만 이예주는 두 번째로 기함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녀는 보지 못했던 브레든의 등판, 거적 대기 같은 얇은 옷에서 기다란 팔 한 짝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몸이 떨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손을 뻗어 다시 벽을 움켜쥐었다.
“대체…….”
세 개의 팔로 거미처럼 순식간에 벽을 기어오른 아이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예주의 풀린 족쇄를 향해 훌쩍 뛰었다.
줄타기 곡예처럼 아이가 매달린 사슬이 양 옆으로 마구 흔들렸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조, 조심해!”
그러나 이예주의 외침에도 아이는 ‘위에. 위에.’ 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세손으로 잘도 사슬을 타올랐다.
눈 깜짝 할 새 브레든의 형상이 어둠 위로 사라졌다.
“저러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이예주는 고개를 바짝 쳐든 채 작은 몸을 쫓았다.
어둠에 가려진 아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만 쩔그럭, 쩔그럭 사슬 흔들리는 간헐적인 소리만이 브레든이 여전히 사슬을 타고 위로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럼에도 한참동안이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쳐들고 있는 탓에 뒷목이 뻐근해질 때쯤엔 사슬이 절그럭 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소름이 끼칠 만큼 엄청난 속도로 벽을 기어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벌써 꽤 높은 곳까지 올랐을 것이다.
대장간이 있는 위가 어느 정도 높이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로 브레든이 성공할 것 같다는 희망이 조금씩 솟아올랐다.
“……이래서 쟤만 바닥에 고정시켜둔 건가.”
어쩌면 아이는 자주 벽을 기어올랐을지 모른다.
이예주는 도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착잡한 얼굴로 풀어진 브레든의 족쇄를 바라보았다.
힘겹게 다시 만난 알리자린의 동생은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을지 언정 정상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히카톤에 가까웠다.
벽을 타고 기어오르던 괴물 같은 모습.
하지만 까마득한 구덩이에 처박힌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런 브레든을 믿고, 희소식을 기다리는 수밖에.
구덩이가 얼마나 깊은지, 브레든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같이 있을 때는 미처 몰랐지만, 막상 말을 걸 수 있는 존재가 사라지자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예주는 그런 자신을 애써 다독이며 브레든을 기다렸다.
다행히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위에서부터 다시 쩔그럭, 쩔그럭 거리는 사슬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브레든!”
이예주는 다시 돌아오는 아이가 반가워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를 불렀다.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브레든은 순식간에 사슬을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거꾸로 기어오를 때와 같은 방법으로 사슬에서 뛰어내려 벽을 타고 내려왔다.
“괜찮아? 잘 갔다 왔어?”
이예주가 절뚝거리며 브레든에게 다가가 다급히 물었다.
“어때? 위에 나갈 수 있겠어?”
그 높은 절벽을 기어올랐다 내려 온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이는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숨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무표정한 얼굴로 이예주를 빤히 바라보던 브레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철컥. 철컥.”
“응?”
“철컥. 철컥.”
“그게 무슨 소리야.”
이예주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의 말은 도통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다시 한 번 잘 얘기해보라고 채근하자, 브레든이 불쑥 두 손을 들었다.
“철컥. 철컥.”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무언가를 잡고 흔들 듯 허공에서 두 어번 팔을 흔들었다.
“그니까…… 문이 잠겨 있더란 소리야?”
“…….”
“응?”
“철컥. 철컥.”
“하…….”
또 한 번 반복하는 행위에, 이예주는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래도 간신히 알아듣긴 했다. 브레든의 모습이 꼭 잠긴 문을 잡아당기는 형상 같았다.
“문이 잠겨 있더란 말이지…….”
브레든이 정말 문까지 올라갔는지 확인 할 방도는 없었다.
그냥 믿는 수밖에. 정말 문이 잠겨있다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브레든에게 열쇠라도 쥐어줘야 하는 걸까? 그래서 잠긴 문을 따라고?
이예주는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깊은 고심에 빠졌다.
“누나.”
그 사이 아이가 제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응?”
“누나.”
브레든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대충 들려 있는 안대에 못 박혀 있는 것을 알아 챈 이예주는 순순히 그것을 다시 넘겨주었다.
아이는 마치 자신에 보상이라도 하듯 그것을 다시 쭉쭉 빨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 누나는 끔찍하게 여기네…….”
이예주는 복잡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번뜩 드는 생각에 절뚝이며 움직였다.
“이거 봐, 브레든.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게.”
그녀는 아까 풀어 둔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 뜨려놨던 브레든의 족쇄를 질질 끌고 왔다.
“우아?”
안대를 가득 입에 문 브레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예주는 그 앞에 앉은 채 땅바닥을 치며 앉기를 종용했다.
“이리 앉아봐.”
“…….”
“하. 그럼 서서 봐.”
하지만 말을 알아먹을 아이가 아니었다.
금방 체념한 그녀는 품에서 만능열쇠를 꺼냈다.
“이거 봐. 아까 누나가 이걸로 족쇄를 풀었지?”
“위에?”
“그래. 이걸로 네 발목을 풀어서 네가 위로 박박 기어오를 수 있던 거야.”
“우나. 우나.”
안대를 물고 누나를 발음하는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과연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예주는 그냥 제멋대로 아이의 대답을 해석하고 찬찬히 설명했다.
그나마 브레든이 말똥말똥 이쪽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다행이었다.
“자, 잘 봐. 이건 닫힌 거야.”
이예주는 두 손으로 빈 족쇄의 경첩을 잠갔다.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는 족쇄는,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쉽게 열린 입을 다물었다.
“철컥.”
브레든이 족쇄가 잠기는 소리를 따라 되뇌었다.
“맞아, 철컥! 철컥 소리 나면서 안 열이지? 이건 잠긴 거야.”
이예주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잠긴 족쇄를 풀려는 듯 잡아 당겨 보였다.
하지만 족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브레든이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철컥. 철컥.”
“그래. 네가 올라가서 본 문도 이렇게 잠겨 있는 거야.”
“철컥. 철컥.”
“그리고 봐. 이게 있지?”
이예주는 그때까지 손에 꾹 쥐고 있던 검은색 열쇠를 브레든의 눈 앞까지 들이 대었다.
“이건 열쇠야. 철컥 잠겨 있는 모든 것을 다 딸 수 있어. 잘 봐봐. 이 열쇠 구멍에 넣는 거야. 구멍만 찾아서 넣으면 돼.”
만능열쇠로 잠긴 것을 푸는 것은 정말로 어렵지 않았다.
열쇠 구멍에 밀어 넣기만 해도 돌리는 과정조차 없이 거짓말처럼 모든 이음새가 풀렸으니까.
이예주는 족쇄의 열쇠 구멍에 천천히 열쇠를 밀어넣었다.
“자. 이러면 끝.”
철컥, 소리와 함께 단단히 맞물려 있던 족쇄가 힘없이 입을 벌렸다.
“우아.”
처음으로 브레든에게서 아이다운 반응이 나왔다.
비록 로봇이 기계음을 내뱉는 듯한 음성이었지만 이예주는 그조차 기꺼웠다.
“이걸 넣으니까 철컥 열렸어. 신기하지?”
“철컥. 우아.”
“너도 한 번 해볼래?”
이예주는 들고 있던 열쇠를 건넸다.
못 알아들은 거면 어쩌나 우려스러웠지만, 다행히 브레든은 선뜻 열쇠를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