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죽어야 하는데. 사람은 칼을 맞으면 피를 흘리며 쓰러져야 하는데……
아무리 단도를 쑤석거려도 피가 단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왜, 왜…….”
이예주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인자한 웃음을 지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정해요. 이런 것으로 죽었다면 벌써 당신이 내려친 망치로 죽었을 거예요. 아니, 천 년 전에 배가 터졌을 때 죽었겠지요.”
“흐, 흐으……!”
족장이 배를 잡고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단도를 놓치고 뒷걸음질 쳤다.
분노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누구라도 망치에 맞고, 칼에 찔렸음에도 멀쩡히 서 있는 괴물을 본다면 그녀처럼 시퍼렇게 질릴 것이다.
“괴물들이야…….”
비척비척 뒷걸음질 치며 이예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하군요. 그런 괴물들과 말이 통하는 나를 동일 시 하다니…… 나는, 아니 우리는 이 세계의 예언자이자 대 현자에요.”
고개를 내저으며 이예주는 여자의 말을 부정했다.
그들은 괴물을 만든 악귀였고, 전범이었다.
“나는 미래를 예언했고, 마침내 일족을 넘어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는 종말이 닥쳤어요.”
“개소리 하지 마, 그건 당신들이 초래한 미래야!”
“원론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멸종 위기의 인간을 구원할 사람이 필요 하지 않겠어요?”
“그게, 당신이라고?”
이예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놓고. 당신이, 구원을 한다고?”
“남편과 나는 한 몸이 되어 끈질기게 살아남았어요. 합쳐진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어요. 신인류는 탄생은 우리에게 축복이었어요.”
“그렇지. 축복이었어. 모든 에너지를 이 몸에 축적하면서 동시에 이것들에게 좀 먹히지 않도록 검은 파편의 힘을 탐할 수가 있다니!”
놈들은 이예주의 차가운 웃음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천년을 살아남았어요. 그 사이 인류는 종말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인류의 기원으로 돌아온 겁니다. 시간의 여신이 있던 그 혼돈의 시절로요.”
“하.”
“하지만 인간을 지켜주던 여신은 죽었죠. 남은 것은 우리를 죽이려고 드는 여신의 권속 중 하나였던 검은 파편 뿐.”
“…….”
“그런데 또 궁금해지는 것 있죠? 내겐 검은 파편에게서 뜯어 낸 검은 안개도, 그 누구보다 강대한 힘도, 천년이 넘게 살아남을 만큼 영생도 얻었는데…….”
여자가 문득 목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마치 혼자만 아는 비밀을 속삭이듯 은밀하게 중얼거렸다.
“시간처럼 인류를 구원할 신이 되지 못할 이유는 뭔가?”
그 순간, 이예주의 어깨가 벼락 맞은 것처럼 펄떡였다.
―저는 알아요. 그 병사가 신을 잡아먹기 위해 창으로 찌른 것을. 피와 살을 씹어 먹고 그 힘을 취하려 그랬던 것입니다. 그를 먹으면 신이 되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우린 인간들을 핍박하는 그조차 우리의 신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일전에 여신상을 앞에 두고 나누었던 쟈니아와의 대화들이 라디오를 튼 것처럼 귓가에 쉴 새 없이 되뇌어졌다.
머릿속이 멍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 끝에 이를 드러내고 귀신처럼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대재앙의 마지막 순간, 검은 파편의 곁에 있는 인간 여자.”
시간의 얼굴에 제 얼굴을 새겨 넣은 천 년 전의 여족장.
“검은 파편을 씹어 먹고 모든 인간들을 지옥 불에서 구원하고 신이라 불리리라.”
“다, 당신들……!”
“예언은 내가 한 것입니다. 퍼뜨릴 땐 조금 각색을 했지만요.”
무언가를 감지한 이예주의 몸이 다시 한 번 펄떡였다.
“람에게, 람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글쎄. 저 삼지창이 무얼 할까.”
이번엔 족장이 대꾸했다.
놈의 팔이 신전의 것과 똑같이 만들어진 제단 뒤의 여신상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여신이 들고 있는 삼지창을.
“고마워요,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들어줘서. 서쪽 대륙까지 부숴버릴 줄은 미처 몰랐는데,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훨씬 앞당겨 졌어요.”
“그, 그게…….”
“지금쯤 당신의 방에 죽은 듯이 잠들어 있겠죠?”
가야 돼. 놈들이 람이 잠든 것을 알고 있다.
본능이 경고했다.
당장 람에게 가야했다.
그래서 그를 지켜야 했다.
괴물은 검은 파편을 씹어 먹기 위해 천 년 동안 숨죽인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빙글거리는 놈들의 입에서 끔찍한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이예주는 겁도 없이 마구 움직였다.
아직 열려 있는 ‘문’을 넘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재빠르게 몸을 틀어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도약했을 때였다.
“윽!”
“어허, 도망가게 둘 수는 없지.”
눈치 빠른 족장이 재빨리 발을 걸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이예주는 속절없이 넘어졌다.
“꺼져! 이 새끼들아! 놔! 놓으라고!”
네 쌍의 팔과 다리가 그녀를 옥죄었다. 괴물이 몸을 깔아 뭉갰다.
벗어 날 수 없었다.
이예주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그때였다. 문득 목덜미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악! 뭐, 뭐……!”
괴물이 깔아뭉개던 몸을 일으켰다.
이예주는 단숨에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도 모자라 모든 발밑으로 힘이 쭈욱 빠지기 시작했다.
“쯧. 망아지처럼 날뛰는군.”
족장이 그녀의 얼굴 옆에 빈 주사기통을 던졌다.
“이, 이게…….”
순식간에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RTBD.’
아찔한 머리 사이로 약물의 이름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성가신 계집.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살살 다뤄요.”
둘 중 한 명이 우악스럽게 자신의 머리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머리카락이 몽땅 뜯겨 나가는 고통을 느꼈지만 힘없이 버르작 댈 뿐 그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마침내 어둠 속에 그녀를 끌고 온 놈들이 잠깐 그녀의 머리채를 놓고 철문을 열었다.
끼익- 음산한 소리가 들렸다.
철그럭, 철그럭. 안쪽에서 낭떠러지에 매달린 기다란 사슬을 끌어 올린 족장이 그 끝에 달린 족쇄를 가지고와 이예주의 오른쪽 발목에 채웠다.
“그런데 천 년 전에 있던 것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가 있지? 이 계집도 방주를 탔던가? 그럴 수는 없었을 텐데.”
“그건 좀 궁금하긴 하네요. 방주를 탔다 해도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는 없었겠죠. 칼에 묻어 있던 피에서 검은 안개가 없는 것을 확인했잖아요.”
놈들이 이예주를 내버려 둔 채 두런두런 대화했다.
서로를 마주 보지 않은 채 말을 나누는 모습이 소름끼치도록 기괴했다.
그러나 정신을 잃어가는 이예주의 귀에는 그저 띄엄띄엄 끊겨 들릴 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건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요. 당신이 기절한 동안 내가 잡았으니 눈은 내 것이에요.”
“기절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보고 온 것이래도! ……어쨌든 내 잘못이니 알았네.”
신경질적으로 답하던 족장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마지못해 수긍했다.
쟈니아가 쓰러진 이예주의 위로 불쑥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고 꿈틀거릴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이 가히 탐이 났다.
“당장 죽이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희미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어른어른 보였다.
얼굴 위로 여자의 금빛 머리가 쏟아졌다.
찬란하다고 생각했던 그것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베니의 눈으로 만든 창이 실패할 경우 당신은 최후의 재료로 남겨 둘 테니까요.”
“……어…… 너…….”
“아, 그토록 찾던 브레든에게 뜯어 먹히지 않게 조심하고요. 그럼.”
여자가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괴물들은 가차 없이 그녀의 몸을 낭떠러지로 밀어 처넣었다.
촤르라락―
쇠사슬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이예주는 시커먼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 * *
와악. 아으, 아아- 우아웁!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이 끙끙 앓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괴상한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면서 손끝에서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이예주는 까무룩한 수렁 속에서 조금씩 의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쩔컥-! 아우, 읍!
“으…….”
멀미라도 나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두드려 맞은 것처럼 온 몸이 아팠다.
아우! 우웁! 쩔그럭! 악!
그 와중에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이예주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
그리고 저를 향해 뛰어오르는 괴물의 커다란 아가리와 곧바로 마주 할 수 있었다.
“헉!”
“아우! 먹이! 와악!”
어두컴컴한 아래쪽에서 늘어진 그녀의 손끝을 뜯어 먹기 위해 누군가 사력을 다해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쩔컥!’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랗게 벌어진 아가리는
간발의 차로 그녀를 물어뜯지 못하고 텁 다물렸다.
“흐, 으아아악!
이예주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괴물이 있는 바닥으로 떨어질 듯 아래로 훅 쏠렸다.
중심을 못잡고 공중에서 마구 팔을 휘저어대자 시계추처럼 몸이 양 옆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흐, 흐으! 이, 이게……!”
이예주는 당황하여 한참을 더 몸을 뒤틀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의 몸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양 옆으로 휙휙 흔들리는 몸과 더불어 ‘쩔그럭, 쩔그럭’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사슬 소리였다.
“어…….”
문득 아래쪽 괴물에게서 말소리가 들렸다.
공중에 매달린 채 하릴 없이 흔들리던 이예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먹이. 움직였다.”
이예주가 매달린 허공은 온통 시커맸지만, 아래쪽 바닥에는 무언가 광원이 있는지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간신히 시야를 구분한 그녀는 제 눈을 의심했다.
“너는…….”
족쇄가 채워진 채 사슬에 묶여 있는 아이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이예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나와 똑 닮은, 일전에 비행선에서 본 적 있었던 박박 깎은 머리통.
이곳에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깡마른 벌거벗은 몸이 온통 거무튀튀하고 꼬질꼬질했다.
“브…… 브레든?”
“움직였다.”
한 번 더 같은 소리를 반복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이는 이내 질질 사슬을 끌고 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구석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하…… 대체.”
이예주는 자유로운 손으로 잔뜩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목을 쳐든 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구덩이 속에 거꾸로 매달린 상태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귀신같이 웃고 있던 쟈니아의 새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당장 죽이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신을 잃기 전, 놈들이 주사를 주입하고 자신을 철문 너머의 낭떠러지로 밀어 던졌었다.
“시발 새끼들.”
이곳이 어딘지, 제가 어떤 상황에 처 한건지 대충 알게 되자 그녀의 입에서 자동으로 쌍욕이 흘러나왔다.
“하…….”
일단 상황이 어떻게 흘렀든,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 빌어 처먹을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예주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불렀다.
“브레든. 저기, 이쪽으로 와볼래?”
“…….”
“뛸 수 있지? 아까 뛰어 올랐잖아.”
깨어나기 직전의 그녀를 물어뜯기 위해 있는 힘껏 뛰어올라 아귀처럼 입을 쩍 벌렸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토록 찾던 알리자린의 동생이었지만, 솔직히 반갑기보단 무서웠다.
과연 제 말이 통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일단 시도해 볼 수밖에.
“이리로 와서 한 번 뛰어볼 수 있어?”
“…….”
“내가 후드 최대한 내릴 테니까 잡아줄 수…….”
조금만 움직여도 양 옆으로 흔들리는 몸을 잡아달라는 목적으로 도움을 구했지만 이예주는 곧 입을 다물었다.
어두컴컴한 구석에 몸을 말고 있는 브레든은 그녀의 부름에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꿈쩍도 안하는 모습이 비행선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
이예주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힘없이 늘어져 있던 그녀는 최대한 양옆으로 흔들리지 않도록 행동을 제한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허리와 고개를 한껏 위로 쳐들고 바라보니 오른쪽 발로부터 까마득한 위까지 이어진 두꺼운 사슬이 보였다.
족쇄가 채워진 발목은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구덩이의 깊이가 얼마나 높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래로 떨어져 갑자기 멈췄을 때의 충격을 생각해보면 결코 온전치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