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힘을 가져 먼 과거를 볼 수 있었던 남편은 언제나 검은 파편의 보복에 대비하자 주장했고, 그것은 고리타분한 장로회에서 번번이 무시당했습니다.”
“…….”
“우리는 더 많은 힘을 가져야 했어요. 많은 힘, 장로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자가 힘을 나타내듯 주먹 쥔 한 손을 들어올렸다.
“오, 안타깝게도 힘을 가지기 위해선 시간족에서 강하게 규제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해야 했어요. 당신도 영화와 같은 대중매체를 보았으니 알고 있겠죠? 악당들은 원래 힘을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잖아요.”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이예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한 가지 의문점이 분명하게 남았다.
저 여자가, 천 년 전의 대중 매체를 어떻게 아느냐고.
하지만 여자는 이예주의 얼굴에 선명히 떠오른 경악을 해소해주지 않았다.
“좀 더 먼 과거를 보기 위해, 좀 더 먼 미래를 보기 위해…… 남편과 난 일족을 산채로 섭취했어요.”
“흐, 흐으!”
“그이도 나도, 처음에는 악몽에도 시달리고 환영이나 환청도 많이 들었는데…… 이젠 기억도 안 나네요. 처음 먹었던 일족이 누구였는지. 분명 가까운 지인이었던 것 같은데…….”
“미쳤어…….”
이예주의 낯빛에서 삽시간에 핏기가 빠졌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당신.”
그녀의 말에 여자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이예주는 눈앞이 아연해졌다. 문득 코끝에서 썩은 내가 느껴졌다.
“우욱.”
불쑥 구역질이 치솟았다.
이예주가 면전에 대고 헛구역질을 했지만, 괴물은 전혀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남편이 오랫동안 연구했던 과거 자료들은 훌륭했어요. 우린 점점 강해졌고, 더 먼 미래와 더 먼 과거를 볼 수 있게 되었지요. 미래와 과거를 모두 알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일이에요. 그러다 보니 장로들마저 찍어 누르고 족장의 자리에도 쉽게 오를 수 있었어요.”
“…….”
“비윤리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였지만…… 우리가 했던 일들은 모두 일족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갖다 붙인 변명들임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주춤주춤 돌아서 양 팔을 벌리는 여자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린 더 많은 힘이 필요 했어요. 하지만 곧, 더 이상 힘을 섭취 할 수 없게 되었지요. 어느 날 몸에…… 몸에 이런 게 생겨 버렸으니까.”
여자는 벌거벗었지만 수치를 느낄 수 없었다.
당연했다. 다닥다닥 맺힌 얼굴들이 가슴과 주요부위, 온 몸뚱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울룩불룩 도드라진 얼굴들은 모두 시체처럼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고 튀어나와 히카톤처럼 각기 괴성을 지를 것만 같았다.
이예주는 여자의 엄청난 모습에 그저 벌벌 몸을 떨기만 할 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먹어 치운 것들이 자꾸만 몸에 생겨서…….”
“…….”
“한번 생긴 이것들을 없앨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도려내도 새살이 차오르기 전에 또 생기고, 불로 지져도 끄떡없고…… 오히려 내 살이 아닌 것처럼 몸이 남아나질 않더군요.”
“…….”
“그나마 차선의 방법으로 남편이 찾아 낸 게 힘이 담겨있는 눈만 먹는 것이었는데, 힘을 탐하면 탐할수록 이것들이 몸을 좀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자는 징그럽지도 않은지 제 몸에 달린 얼굴들을 손으로 애틋하게 쓸었다.
“이성이 사라지면서 깜빡, 깜빡. 호흡과 심장이 멈출 때가 있었죠. 다시 눈을 뜨면 손에 시체들의 토막 난 부위가 잔뜩 쥐어져 있었어요. 좀비처럼요. 좀비가 뭔지, 기억하죠?”
당연했다. 이 세계의 괴물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었다.
2017년의 가상 괴물.
이예주는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거칠게 호흡했다.
“남편과 나는 당연히 겁에 질렸어요. 이건 눈족이 검은 안개를 뜯어먹었기 때문에 생긴 저주였으니까요.”
여자는 전혀 겁이 나지 않은 얼굴로 국어책을 읊듯 줄줄 말했다.
“그때는 신인류도 없었으니, 저주를 풀고 우리의 몸을 지킬 방법이 전무했지요. 시간족들이 여신을 조각조각 뜯어먹었다는 것은 이미 남편이 보고 온 실제 과거였고, 그나마 설화 속의 신과 같은 존재로 남은 검은 파편뿐이었습니다.”
“…….”
“그러니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고 매달 리는 것은 응당한 수순이 아니겠습니까?”
괴물이 한 차례 말을 멈추었다.
이예주는 문득 여준의 말이 떠올랐다.
눈족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검은 파편의 파멸이 아닌 소유를 원했었다고…….
“다행히, 검은 파편을 찾아내는 것은 순조로웠어요. 내핵에서 그를 삼켰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믿었죠.”
“…….”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 이상으로 검은 파편의 힘은 강대했어요. 내 안에 느껴졌던 그 엄청난 힘, 에너지! 지구를 한 손아귀에 쥘 수 있을 만큼 강대하고 아름답던…… 하아!”
여자가 황홀경에 가득 찬 얼굴로 환희와 같은 야트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다 문득 눈살을 찌푸리고 나지막이 뇌까렸다.
“아. 물론 배가 터진 고통은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지만요.”
이예주의 귀가 번뜩 틔었다.
고개를 퍼뜩 들고 쟈니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한 번 더 상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했죠. 그건 다시 겪고 싶지 않군요.”
“다, 당신 무슨 소리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왜 자신이 다리족에서 보고 온 과거 이야기를 하는 건지.
그리고 왜 그 영상에서 배가 터져 죽은 천 년 전의 눈족 여족장을 본인과 동일 시 하는 건지.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어서 이예주는 더듬더듬 되 질문했다.
“당신 대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도 이 인간이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저를 뜯어먹어 주어서 이렇게 눈을 뜨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역겨운 방법이었지만…….”
“그게…….”
“살아있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니겠어요?”
여자가 미소 지었다.
이제는 예의 그 답답해 보이던 희미한 웃음이 아니었다.
활짝 웃는 여자의 얼굴은 이예주가 분명 비행선에서 보고 온, 과거 영상 속의 여족장과 한 치의 오차 없이 똑같았다.
“이, 이게…….”
등 뒤가 벽이었다.
더 이상 뒷걸음질 칠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구 뒤로 몸을 물렸다.
“대체…….”
머리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고 하는데, 몸은 그 누구보다 빨리 괴물의 말을 이해하고 간헐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쟈니아는. 그저 얼굴이 닮아 수상쩍게 여겨졌던 여자는, 바로 천 년 전의 눈족 여족장이었다.
“괜찮아요? 난 어쩌면 당신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놀란 듯하군요.”
허옇게 굳은 이예주를 놀리는 듯한 웃음을 띈 채 쟈니아의 형상을 한 괴물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때였다. 불현듯 괴물의 뒤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문!’
이예주의 동공이 찢어질 듯 확장됐다.
쟈니아의 뒤에 ‘문’이 열렸다.
위험의 신호였다.
죽을지도 모른다. 괴물에게 잡아 먹혀서…….
위험했다. 당장 벗어나야 했다.
까딱하면 그대로 잡아 먹혀서 족장과 쟈니아의 몸뚱이에 달린 수 십 개의 대가리 중 하나가 될 수도…….
“흐읍!”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하고도 지체 없이 몸을 움직였다.
옆으로 우회하여 재빠르게 달려가 문 속으로 몸을 날리기 위함이었다.
휘익- 그러나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이예주의 앞을 막아섰다.
“이런,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은 걸요.”
“흐악!”
이예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뛰어가려던 몸을 멈췄다.
여자의 등 뒤에서 불쑥 창백한 두 팔이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모처럼 과거를 아는 사람과의 대화인데 난 이것을 좀 더 즐기고 싶어요. 이해해줘요, 예주양.”
“흐, 흐으. 꺼져! 꺼지라고!”
경기하듯 비명을 지르면서 이예주는 휙휙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무기가 있음에도 쉬이 가로막은 괴물 근처로 다가갈 수 없었다.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쟈니아의 모습만 보고 있느라 그 뒤에 달려 있는 족장의 몸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 역겨운 몸뚱이에 뭐가 달렸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동쪽 대륙에서 보았던 눈족 장로처럼 엄청난 길이의 팔 한 쌍이 새로 달려 있을지 모른다.
“이 꼴이라도 남편의 몸을 다루는 것은 조금 어렵습니다. 이 인간도 저 못지않게 꽤 끈질긴 인간이라 서요.”
‘문’을 바라보며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는 이예주를 향해 쟈니아가 여유롭게 지껄였다.
그 순간, 그들 사이로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쟈, 쟈니아?”
“아, 마침 깨어났네요. 인사해요, 여보.”
여자가 몸을 조금 틀었다.
그러자 그 뒤에 달려 있는 한 몸이자 또 다른 인간이 이예주를 보고 노성을 내질렀다.
“저, 저년이! 저년이!”
한쪽 이마가 푹 함몰된 족장이 삿대질을 하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이예주는 기겁했다. 망치가 내리 쳐져 두개골이 저렇게 주먹크기로 함몰되었는데.
대체 어떻게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가…….
놈들은 마치 녹아서 눌러 붙은 서로 다른 종류의 치즈처럼 상체가 붙어 있었다.
다만 족장이 키가 좀 더 커서 깨어난 후 바닥에 있던 쟈니아의 다리가 가뿐히 들렸다.
저렇게 징그럽게 붙어 있으면서도 왜 걷는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는지 알만 했다.
족장의 벗은 몸뚱이 또한 쟈니아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쟈니아 보다 더 심했다.
온전한 피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온 몸을 점령한 우둘투둘한 사람 얼굴들은 더 없이 혐오스러워 보였다.
“저 계집 때문에 일이 모두 틀어졌어. 저 계집년이……!”
“그러게 내가 잘 돌보라고 몇 번을 당부했잖아요.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오히려 망치로 후려 맞고 기절하다니 유감이네요.”
“기절하다니! 과거를 보고 온 것이야!”
족장이 버럭 소리를 부정했다.
“기억났어! 저 것은 저것은. 천 년 전에……!”
“당신은 그만 입 닥쳐요. 나도 기억이 났으니까.”
쟈니아가 단호하게 몸을 틀며 족장의 말을 막아섰다.
족장이 무어라 더 신경질 적으로 지껄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쟈니아의 미묘한 얼굴에 더 신경이 쏠렸기 때문이다.
“예쁜 숙녀로 자라났군요.”
이예주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놈들이 천 년 전에도 있었던 괴물들이란 것을 이젠 어찌어찌 인정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를 보며 전에 없이 반가운 표정을…….
“그때가 2010년도였나, 11년도였나?”
“11년도였네.”
가물가물 기억을 되짚는 쟈니아의 모습에 족장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예주의 몸이 흠칫 굳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쟈니아가 기억났다는 듯 짝, 하고 박수를 한 번 치며 말했다.
“아. 산채로 모조리 잡아먹는 것보단 눈알만 빼먹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막 알았을 때였죠. 시험 삼아 섭취해볼 것이 필요했는데, 남아 있던 미래를 보는 일족은 능력이 소실되어 아주 오래 전에 일족에서 나가 살던 아이 뿐이었어요.”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들?”
손끝이 차가워졌다.
문득 눈앞이 새하얘지면서 귓가에 이명이 울려 퍼졌다.
이예주의 몸이 이제는 한눈에 보일 만큼 바들바들 진동했다.
확실한 건, 그것이 더 이상 말이 통하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쥐죽은 듯 살기에 정말로 어렸을 때 이후 능력이 소실된 줄로만 알았는데, 몇 년을 지켜보니 알겠더군요. 능력이 아직 남아있음을.”
“네 어미는 네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귀신같이 달려가더군. 신통방통했어. 그런 주제에 어떻게 몇 년을 들키지 않고 쥐죽은 듯 살았는지…… 쯧.”
모습이 보이지 않는 족장이 쟈니아의 말을 받으며 혀를 찼다.
이예주는 버럭 소리 질렀다.
“당신들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눈알을 빼먹을 땐 저항이 심해서 꽤 고생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일족으로써 할 도리를 다 해줬어요. 넋이 나간 당신 대신 장례도 잘 치러주었고, 유언대로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예쁜 숙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잖아요.”
“오히려 이쪽에서 손해를 봤지. 몇 년을 지켜보다 미래를 보는 것을 확신하고 잡아먹었는데 말이야.”
족장 낄낄 웃었다.
“아무 효과도 나타나지 않아서 쟈니아가 얼마나 길길이 날뛰었는지 아나? 아무런 힘도 없는 남은 딸년까지 잡아먹는다는 것을 말리느라 꽤 고생…….”
“그만 닥치라 했어요.”
“너, 너희들이었어?”
이예주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게 제 탓이라고 여겨왔다.
아침까지 아침밥을 챙겨주던 엄마가, 반나절 만에 죽을 리 없는데.
자살일 리 없는데.
하지만 다들 저보고 엄마가 생활고 비탄으로 자살한 것이라 하니까, 이예주가 선택할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서 그녀를 되살리는 것뿐이었다.
“네놈들이…… 네놈들이 우리 엄마를……! 우리 엄마를!”
죽인 거냐고.
눈앞이 시뻘게졌다.
그간 수없이 느껴왔던 엄마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자괴감, 자기혐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아득까득 지샜던 수많은 악몽의 밤들이.
그게 다 이 미친놈들의 병신 같은 짓거리들 때문에……!
“아아아악!”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칼을 휘두르며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아까 느꼈던 무서움과 두려움이 거짓말 같았다.
분노와 혐오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시뻘겋게 들끓었다.
푸욱-
그런 그녀의 손끝으로 살 속을 파고드는 섬뜩한 감각이 느껴졌다.
“죽어! 죽으라고!”
이예주는 괴성을 지르며 쟈니아의 뱃속으로 단도를 마구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