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힘을 다해 휘두른 망치에 이마를 후려 맞은 족장이 힘없이 쓰러졌다.
“나쁜 새끼.”
무감각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며 이예주가 읊조렸다.
이젠 알 수 없었다.
미친 인간들만 있는 세상으로 와서 저 또한 미쳐가고 있는 걸지도.
노인을 망치로 있는 힘껏 후려쳤음에도 아무런 가책이 느껴지지 못했다.
챙캉- 쓰러진 족장 옆에 들고 있던 망치를 집어 던진 이예주는 서둘러 몸을 틀었다.
“베니.”
베니의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한 쪽 눈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핏줄기를 본 이예주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내가 조금 더 빨리 방 밖으로 나섰더라면.
아니, 조금 더 빨리 이 어린 애들을 신경 써 주었더라면…….
“가자.”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다잡으며 힘없이 늘어진 베니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그 옆에 베니의 눈을 무참히 도려낸 피 묻은 단도가 놓여 있었다.
이예주는 그것 또한 조심스레 들어 안주머니에 잘 챙겼다.
이곳에서 처음 보는 일반 칼이었다.
물론 이것만 있는 것이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이라도 용광로에 던져 없애버리고 싶었다.
리즈처럼 가뿐히 안고 갈 수는 없어서 그녀는 베니를 힘겹게 등에 들쳐 맸다.
그리고 그녀는 리즈와 릭이 입구 쪽으로 다급히 뛰어갔다.
“오빠! 언니!”
릭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리즈가 이예주의 등에 업혀 온 베니를 보고 훌쩍였다.
“울지 마.”
이예주는 리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독였다.
그리고 등에 업혀 있는 베니를 릭에게 넘겼다.
“리즈와 베니를 부탁해요.”
“다, 당신…….”
물레방아가 쓰러진 후 그녀의 행보를 모두 지켜보던 릭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나가면 베니 눈 지혈 먼저 해주시고요. 그리고 깨어날 때까지 어디 숨어 있다가 베니 일어나면 탈출로가 어딘지 물어봐요. 그래서 같이 여기서 나가서 침엽수 숲속으로 가세요. 숲 깊이 들어가야 안전해요. 그럼.”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은 이예주가 다시 뒤를 돌았다.
릭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붙잡았다.
“같이 나가야지! 대체 더 뭘 하려고 그러오.”
“언니. 같이 리즈랑 나가자, 응? 언니…….”
리즈 또한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이예주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먼저가세요. 전 아직 찾아야 할 애가 남아 있어서요.”
“그게 무슨……!”
“브레든, 저기에 있죠?”
그녀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 쪽을 가리켰다.
늑대 신인류와 베니가 끌려나온 어두운 구석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보던 릭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당신의 힘으로는 절대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을 빠르게 끌어 올릴 수 없소. 게다가 불길이 곧 잦아 들 거요. 그러면 대피소에 있는 장로와 눈족들이 나올 텐데 그땐 어떡하려고!”
“저기에 있는 걸 이미 아는데, 그렇다고 두고 갈 순 없잖아요.”
“다음을 도모하면 되지, 왜 굳이 지금……!”
“그 사이 베니처럼 눈이 도려내지면요? 토마스처럼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요? 그럼…….”
답답하다는 듯 성토하던 릭은 속삭이듯 들려오는 새된 목소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누구한테 그때는 못 꺼내줘서 미안했다고 할 까요? 브레든은 하나 남았던 누나도 죽어서 없는데…….”
이예주는 조금 자조적으로 웃었다.
변명은 지금까지 충분했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을 회피하고 외면해 왔지 않은가.
브레든이 있는 곳을 드디어 알아냈는데도 이번마저 그렇다면, 이예주는 알리자린도 모자라 동생까지 죽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기로 했다.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전 괜찮아요. 알아서 잘 피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리즈와 베니 데리고 잘 숨어 계세요.”
옷자락을 잡고 있던 릭과 리즈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이예주는 이번에야말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릭 아저씨의 말처럼 쏟아진 쇳물이 어느새 거멓게 굳어가고 있었다.
오른쪽 구석까지 쉬지 않고 달려간 이예주는 마침내 그곳에 도달했다.
불이 닿지 않아 그녀 위로 어둠이 덮쳤다.
예상대로 울퉁불퉁한 벽면에 두터운 철문이 달려 있었다.
다행히도 아까 전 신인류와 베니를 끌어올릴 때 풀어뒀던 쇠사슬이 그대로였다.
이예주는 더 볼 것 없이 철문을 밀어젖혔다.
“헉.”
안으로 무작정 뛰어들려던 그녀는 돌연 문턱을 붙잡고 급정거 할 수밖에 없었다.
바스락, 그녀의 발에 부스러진 돌멩이가 탁, 타닥 하고 끝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바로 앞은 감옥이 아니라 천 길 낭떠러지였다.
“이, 이게…….”
깊은 지하에서 느껴질 리 없는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리가 후들 거렸다. 뭣도 모르고 한 걸음만 더 내디뎠다면 그대로 끝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낭떠러지와의 경계에서 나오니, 그제야 철문 옆 벽면에 붙어 있는 여러 개의 손잡이가 보였다.
비행선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타륜 모양이었다.
“그럼, 아까…….”
이예주가 벌벌 떨리는 눈으로 문 너머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낭떠러지 끝에 쇠사슬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전 장로 중 한 명이 베니를 꺼낼 때 벽에 붙어 무언가를 돌리고 있던 것이 다…….
“이 아래…….”
감옥은 바로 낭떠러지 아래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린 아이들을 사슬에 묶어 이 아래에. 그리고 꺼내는 것조차 도르래를 돌려 꺼내었던 것이다.
릭 아저씨가 왜 자신 홀로 빠르게 끌어올릴 수 없다는 소리를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미친 새끼들.”
벽에 붙어있는 손잡이의 개수는 총 6개였다.
일일이 돌려보며 사람이 매달려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예주는 이를 악물고 첫 번째 손잡이를 와득 붙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엉망진창이네요.”
등 뒤에서 익숙한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예주가 퍼뜩 뒤를 돌았다.
“헐.”
그녀는 경악했다.
족장이 제상을 부여잡고 비칠비칠 일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분명 망치로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못해도 맞은 자리가 함몰 되었을 만큼의 중상 일 텐데 어떻게…….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는 탓에 족장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 한 것 하나는 놈의 로브에 핏자국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게 당신 좀 잘 지키라고 했는데. 그 사이를 못 버티고 아주 난장판이 되도록 만들어 왔군요.”
“……쟈니아?
이예주의 얼굴이 마치 기괴한 것 들은 것처럼 변했다.
제단에 쓰러진 것은 족장뿐이었는데. 자신이 후려친 것도,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것도 족장이 맞는데 들려오는 소리는 쟈니아의 것이었다.
“이런. 얼굴은 마주보며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말입니다.”
예의 그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족장의 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마주보고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도 이예주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뒷모습을 내보인 채 반대편을 향해 선 족장이 천천히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족장이든 쟈니아든, 신전에 와서 본 눈족 인간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깊게 눌러 쓴 후드를 벗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이 순간, 드디어 족장이 답답한 후드 차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노인의 뒷머리 대신, 살랑거리는 찬란한 금발이 서서히 드러났다.
이예주의 입이 슬며시 벌어졌다.
“저게…… 저게 뭐야?”
“미안합니다. 옷 좀 벗고 있을게요. 움직이는 것이 좀 답답해서.”
족장의 뒤통수에 쟈니아의 얼굴, 입이 움직였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예주는 제가 보는 것이 정말로 실제임을 확신 할 수 없었다.
비행선의 실험실에서 봤던 뒤통수에 얼굴이 달려있는 남자 아이가 떠올랐다.
자신을 먹이로 인식하고 달려들어 유리벽에 미친 듯이 얼굴을 처박았던.
그런데 제 앞에. 족장의 뒤통수에 쟈니아가…….
하지만 이예주는 고작 족장의 뒤통수에 족장의 딸로 알고 있던 여자가 달려 있는 것에 충격 먹을 새가 없었다.
제가 했던 말처럼 꿈틀거리며 단추를 풀어내던 여자가 마침내 탈의를 했기 때문이다.
족장의 몸을 가리고 있던 두터운 로브가 털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드러난 족장, 아니 쟈니아의 몸뚱이에 사람 얼굴들이. 수두룩 빽빽한 사람 얼굴들이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히카톤처럼.
“흐, 흐아악!”
그 끔찍한 광경에 이예주가 미친 듯이 비명 질렀다.
“조금 보기 힘들지요?”
“아아아악!”
“이런 혐오스럽고 역겨운 모습은 당신에게 보이기 싫었습니다. 진심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 다 쓰러져 가는 낡고 더러운 신전에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예주는 진저리를 치며 벽에 달라붙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니,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족장이. 쟈니아가. 뒤통수가. 괴물이…….
그런 상대의 반응에도 얼굴만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자가 유려하게 웃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습니다. 물론 당신을 이해합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흐, 흐으! 다, 당신! 당신 대체…….”
“아. 당신도 다리족에서 보지 않았어요? 과거, 검은 파편, 시간족…… 그리고 멍청하지만 가엾은 내 예전 모습을요.”
“그게 무슨…….”
이예주는 여자의 말이 하나도 귀에 와 닿지 않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맞닥뜨렸던 괴물들은 이지가 없었다.
오로지 먹이를 잡아먹겠다는 본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뭐가 뭔지, 말이 통하는 괴물을 마주쳤을 때 어떡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이예주는 그저 벌벌 떨었다.
“음,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끔찍한 몸뚱이를 가진 벌거벗은 여자가 제단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그 순간 아까 전 챙겼던 단도를 생각해내고 엄청난 속도로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발작처럼 소리 질렀다.
“다, 다가오지 마!”
“그래, 당신은 궁금해 했었죠.”
위협하듯 칼을 휙휙 휘둘렀지만 여자는 그것을 무시한 채 기어이 계단을 모두 내려왔다.
그러고도 몇 발자국 다가온 탓에 오히려 무기를 쥐고 있는 이예주가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녀는 벽에 더욱 바싹 붙어 칼을 쥔 양손만 쭉 내민 채 과호흡처럼 헐떡거렸다.
“왜 우리 눈족들이 검은 파편을 공격하지 않고 소유하길 원하는지, 우리들이 어째서 아이들을 밖으로 내쫓는 지 따위.”
“흐으, 흐…….”
“호기심은 좋은 것이에요.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오지요. 눈족은 호기심이 많은 일족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일족이 과거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 않을까요.”
이예주가 거의 숨넘어갈 즈음이 돼서야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
고작 대여섯 걸음만을 상태였다.
“우리는 비록 다른 일족들에 비해 신체적인 힘은 부족했지만, 그 어떤 일족보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가족, 친구, 이웃들은 언제나 궁금해 했습니다.”
“…….”
“여신의 존재는 언제부터였는지. 인간은 태초는, 눈족의 시조와 능력, 피를 타고 흐르는 검은 안개는 어디서부터 기원 된 것인지. 그리고 본능적으로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기를 원했지요. 당신도 궁금하지 않나요? 검은 파편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탄생했는지 말이에요.”
여자가 물었다.
그간 궁금해 했던 것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지만 이예주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흉측한 몸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눈족은 과거를 통해 인류의 찬란한 문명과 진화를 보았고 그것을 피에 새겨왔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위험을 유연하게 넘기고 닥친 운명에서도 현명하게 살아남았지요. 이미 일어난 일들을 알고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것. 그리고 문제가 발생한 현재를 개선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한 일이 아닙니까?”
“…….”
“어렸을 때부터 여신에 관한 설화와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던 나는, 더 나아가 알고 싶었어요. 짤막한 미래를 보는 나만이 할 수 있던 단순한 호기심이었죠.”
여자가 한숨처럼 숨을 내뱉으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힘과 기원이 모두 과거 시간의 여신에게서 내려진 축복, 능력으로 인한 것이라면, 과거로도 개선할 수 없는 미처 알지 못 할 미래에 일어 날 일족에게 닥칠 위험과 운명은 그 누가 구원할 수 있는가?”
이예주의 앞을 천천히 오고가던 쟈니아가 문득 말을 멈췄다.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듯 그 눈이 아득한 허공을 부유했다.
“……그리고 그 미래에 설화인줄로만 알았던 악신이, 정말로 다시 깨어나 우리를 파멸시키려 든다면?”
“악신은 당신들이 모시던 신이야.”
흉측한 괴물의 모습에 벌벌 떨면서도 이예주는 악착같이 대꾸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검은 파편을 제 신격화에 이용해 먹는 게 악신이지, 대체 뭐가 악신이야!”
“보는 이에 따라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제 말을 버럭 부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쟈니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다행히 고고학자였던 남편과는 그런 의미에서 뜻이 잘 맞았지요.”
오히려 희미한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