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92)화 (294/319)

“흐윽!”

이예주가 날카로운 숨을 집어 먹었다. 

검은색의 기다란 무기는 쉽게 갑옷을 부수고 늑대의 가슴 속에 쑤셔 박혔다. 

바닥으로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예주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비단 무서운 장면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삼지창이야.”

족장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록 얇고 제대로 모양이 잡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신상의 손에 들린 것과 같은 형태의 삼지창이었다.

“아…….”

이예주는 탄식했다. 

족장은 그들의 몸 안에 있는, 피를 타고 흐르는 칼을 만들고 있었다. 

검은 안개로, 칼을.

눈족들이 검은 안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그야말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눈족. 검은 안개. 삼지창. 검은 파편.

문득 그녀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불안함을 넘어 섬뜩한 예감이 전신을 덮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늑대의 갑옷과 가죽을 뚫는군! 꽤 쓸 만한걸? 확실히 이전의 것에 비하면 훨씬 완성에 근접했어. 아니 그런가?”

“그렇습니다, 족장님! 이게 다 족장님의 노고 덕분입니다.” 

기다란 창이 가슴 한가운데에 박힌 채 미동 없는 늑대의 주변을 빙빙 돌며 관찰하던 족장이 낄낄 웃었다. 

뱀파이어처럼 입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두 장로가 그런 족장의 비위를 맞췄다.

“내가 한 게 뭐 있나. 다 자네들과 죽은 장로들의 희생 덕이지. 약속대로 자네들에게 이 먹이를 주지.”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족장님!”

5장로의 눈알을 한쪽씩 나눠먹고 에너지가 들끓던 두 장로는 족장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득달같이 바닥에 누워있는 늑대 신인류에게로 달려들었다. 

놈들은 창날이 박혀 있는 피가 흐르는 신인류의 가슴 근처와 이미 흘러내린 바닥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족장처럼 직접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예주는 어쩐지 그것을 보기가 힘들었다. 

아귀가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헛구역질이 솟았다.

“허허, 이 사람들. 바늘과 관은 어디다 내팽개치고 온게야. 천천히들 들게.” 

족장은 기분 좋게 웃으며 늑대의 가슴에 박혀 있는 창대를 와락 잡았다. 

창을 뽑으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깊이 박혔는지 좀체 뽑히지 않았다. 

노인은 할 수 없이 두 손으로 창대를 잡아 뽑기 위해 힘껏 흔들었다. 

살 속을 쑤석거리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창날은 끝내 뽑히지 않았다. 

“뭐, 뭐…….”

족장이 잡고 있는 창대에서 쩌적- 소리가 나더니, 방금 전 단단한 경도를 칭찬하던 것이 무색하게 삼지창이 조각조각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런…….”

결국 노인의 힘을 이기지 못해 박혀 있는 창머리 부분이 뚝 부러졌다. 

족장은 들고 있던 창대의 일부분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런 제기랄!”

기껏 3장로와 10장로의 피를 빼내어 만든 삼지창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족장의 분기탱천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대체 뭐가 문제야! 빌어먹을!”

짐승보다 더한 짐승처럼 늑대의 피를 빨아먹던 장로들이 그제야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일어났다.

“쓸모없는 것들! 그러게 아무거나 주워 처먹고 다니니까 가지고 있는 검은 안개 하나 간수를 제대로 못하지!” 

“족장님, 고, 고정하십시오.”

“네 놈들도 나 몰래 아무거나 처먹고 다니는 것은 아니겠지? 응? 9장로 년처럼 내 허락도 없이 신인류라면 환장을 하고 아무것이나 씹어 먹은 게 아니냐 이 말이야!”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족장님!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그 많은 피를 내주고도 아직 괴물로 변하지 않을 리 없지 않습니까!”

길길이 날뛰는 족장의 앞에 하염없이 굽신 거리며 장로들이 부정했다. 

매번 기분나쁘게 미소 짓는 얼굴만 보았지 이예주는 저토록 대노하는 족장을 처음 보았기에 숨도 쉬지 못하고 놈들을 지켜보았다. 

“그래. 남은 것은 나와 자네들뿐이지…… 제기랄.”

한참을 씩씩대던 족장이 장로들의 이실직고에 조금 진정 했다. 

2장로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 어떡하죠, 족장님?” 

“어떡하긴! 검은 파편 깨어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완성해야지!”

족장이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한 쪽을 가리켰다.

“다시 재료를 가지고 오게.” 

“아, 네! 이, 이봐! 여기로…….”

“아니! 자네가 직접 가져와!”

자연스럽게 화로 근처의 대장장이를 부르려던 2장로는 족장의 불같은 눈초리에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는 아까 전 망치질을 하던 사내가 신인류를 데리고 왔던 지하 공간의 오른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그 ‘재료’ 라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지 족장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초조하게 제자리를 오갔다. 

이예주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미처 보지 못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짝 않고 2장로를 행로를 쫓았다. 

이미 앞서 사슬을 풀어 놓았기 때문일까. 

깊은 구석으로 들어가 형체만 간신히 보이는 놈은 지체 없이 벽에 붙어 무언가를 열심히 돌렸다. 

이예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뭐 문을 연다든지, 아니면 벽에 또 다른 비밀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든지 할 줄 알았던 2장로가 구석에 그대로 서 있다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무언가를 돌리던 2장로는 돌연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쪽에 또 다른 곳과 이어진 문이 있던 것이다.

‘뭐지? 수동개폐 장치처럼 돌려야 열리는 문인가?’

이예주가 의문에 잠겨 있을 즈음, 2장로가 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안았다. 

곧 놈은 문을 닫고 이예주의 시야가 닿는 곳까지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이 부릅 홉떠졌다. 

2장로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은, 바로 베니였다. 

잠든 것인지 아니면 무슨 짓을 한 건지, 베니는 신인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족장이 있는 곳까지 걸어 온 2장로가 제단 위 항아리 옆에 베니를 눕혔다. 

‘뭐 하려는 거야?’ 

족장과 8장로가 베니에게 다가갔다. 

8장로가 아까 전 족장이 내려두었던 일반 단도를 집어 들었다. 

그들에게 가려 베니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예주에게 보이는 것은 베니의 발치뿐이었다.

“이번에는 나도 가세해야겠어.”

족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불안이 한 순간에 턱 밑까지 잠식했다.

“족장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아이는 미래를 보는 아이야.”

“오. 이 아이가 바로…….”

“쟈니아가 깨어나면 난리를 치겠지만, 별 수 없지.”

아니야. 아니야, 베니는……! 

족장이 볼 리 없는데도 이예주는 미친 듯이 도리질을 쳤다. 

그녀는 이제야 통렬한 깨달음을 얻었다. 

족장과 쟈니아의 대화에서 들었던 ‘재료’와 먼저 남겼던 리즈 대신 왜 베니가 끌려 온 건지.

눈족 족장은 베니가 미래를 보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를 ‘재료’로 쓰기 위해 끌고 온 것이었다. 

어째서 과거의 자신은, 불길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아무 대처조차 할 생각이 없었던가. 

리즈를 섣불리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더 피눈물 나는 후회가 그녀를 덮쳤다. 

베니에게, 어린 애에게 그런 거짓말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그때 베니라도 밖으로 내보냈다면……. 

“8장로. 자네가 눈을 뽑게.”

“제, 제가요?”

“그럼 내 손을 더럽힐 순 없지 않은가?”

족장의 말에 8장로가 단도를 고쳐 쥐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예주 아랫입술을 깨물며 번뇌했다. 

짧은 사이 수십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갈까? 이대로 나가서 베니를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칠까? 람이 곧 깨어나서 네 놈들을 다 쓸어 버릴 거라고 협박할까?

 하지만 그러면 리즈는. 

아직 리즈가 제 뒤에 숨어있는데……

1분 1초가 급박한 상황. 

당장 해야 할 일을 찾는 이예주의 눈이 분주히 지하 공간을 오갔다. 

베니를 구하려면 제가 해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정신없이 생각을 쥐어짜내던 그 순간.

이예주는 누군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녹은 쇳물이 담긴 양동이를 끌고 물레방아 쪽으로 걸어오던 눈족 인간이었다. 

물레방아 옆쪽에 쥐새끼처럼 몰래 숨어 있는 이예주를 본 릭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한차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양동이를 마저 끌어왔다. 

물레방아 근처에 그것을 놓은 그는 이예주가 있는 쪽으로 허겁지겁 다가왔다.

“여, 여기서 대체 뭐하는 것이오!”

릭이 기겁을 한 얼굴로 거칠게 속삭였다. 

바로 다른 눈족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고발할 기세가 아닌 듯 해보이자 이예주는 곧바로 진실을 털어놓았다.

“베니를 구하러 왔어요.”

“베, 베니?”

“도와주세요. 베니가 위험해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요. 그리고 베니는 어디에 있다고…….”

“베니가 족장한테…….”

“오빠!”

그때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이예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분명 자루 사이에 잘 숨겨둔 리즈가 어느새 물레방아 바깥으로 튀어나와 우뚝 서서 제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릭이 단숨에 사색이 되었다.

“리, 리즈……!”

시끄럽던 망치질 소리가 뚝 끊겼다. 

대장장이들은 물론이고 제단 위에 몰려 있던 인간들의 모든 이목이 어린 아이에게 쏠렸다. 

말간 두 동공에 잔뜩 서린 경악. 

멍하니 리즈를 바라보던 이예주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서 족장이 칼을 쥐어 준 8장로의 손 위에 시뻘건 덩어리가 들려 있었다. 

그 사이 도려내진 베니의 한쪽 눈알이었다.

“이런…… 귀여운 꼬마 손님이 오셨군. 기특하게도, 이 족장님이 데리러 가기도 전에 먼저 혼자서 잘도 찾아왔구나.”

리즈를 발견한 족장이 지껄였다. 

“이리로 오렴. 네 오빠의 나머지 눈알은 네가 꺼내 볼 테냐?

“오, 오빠…… 오빠…….”

리즈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릭 아저씨가 움직이기 위해 몸을 움칫거렸을 때였다.

“우리 이거 부셔요.”

이예주가 낙후된 물레방아를 지탱하기 위해 주변에 얼기설기 덧댄 철근들을 가리키며 빠르게 속삭였다. 

아직 발각되지 않은 상태라 다행이었다. 

“……뭐, 뭐요?”

“이거, 부시면 물레방아도 쓰러질 거 아니에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릭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우린 다들 하나의 폭탄이나 다름없소. 리즈 아비도 그렇게 죽었소. 검은 안개를 가지고 있어서 불에 닿으면 큰일 나! 다 터진단 말이오!”

“이것저것 따질 시간 없어요, 빨리!”

이예주는 벌떡 일어나서 막무가내로 지지대를 발로 찼다. 

치이익- 오랜 시간 열에 달궈진 철근에 닿은 신발 밑창은 치즈 녹듯 쉽게 녹아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음새들이 덜컥덜컥 흔들렸다. 

그녀가 하는 꼴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던 릭이 마지못해 일어나 돕기 시작했다. 

불똥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팔다리에 철판을 덧댄 후 옷을 입었기 때문에 이예주의 발길질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되었다.

릭이 온 힘을 다해 내리 칠 때마다 철근의 이음새들이 쉽게 부러졌다. 

쿠우우웅, 끼이이익― 

마침내 균형을 잃은 물레방아 쇳물들을 흩뿌리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뭐, 뭐야. 뭐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넘어 올 세라 릭 아저씨가 재빨리 쇳물이 닿지 않은 부분을 발로 힘껏 걷어찼다. 

한쪽 지지대들을 잃은 엄청난 크기의 물레방아는 생각보다 쉽게 반대쪽으로 넘어갔다.

“물레방아가 쓰러진다! 으아아악! 피해! 피해!”

물레방아가 옆으로 넘어졌다. 

콰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물레방아가 옆으로 넘어졌다. 

그 안에 담겨 있던 용암 같은 시뻘건 쇳물들이 둑이 터진 것처럼 쏟아졌다. 

그것을 타고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불길은 차라리 적은 피해에 속했다. 

쾅! 쾅-!

그 불길이 닿은 곳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다! 으아아악! 도망쳐!”

눈족 인간들이 한순간에 우왕좌왕 난리가 났다. 

대장장이들은 들고 있는 장비를 내팽개치고 서둘러 제단의 왼쪽 구석으로 뛰어갔다. 

잦은 폭발로 인해 마련된 대피 공간이었다.

“리즈, 이리와!”

이예주는 물레방아가 쓰러지자마자 가장 먼저 뛰어가 리즈를 안았다. 

놀라 얼어붙은 아이가 허겁지겁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다시 헐레벌떡 뛰어가 아이를 릭에게 넘겼다. 

“리즈 데리고 안전한 곳에 있어요!”

“다, 당신은 어디……!”

“베니 데리고 올게요!”

“언니!”

붙잡는 리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예주는 정신없이 뒤를 돌아 뛰었다. 

벌써 지하 공간의 왼쪽 바닥에 온통 쇳물이 범람하여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나마 오른쪽은 아직 양호한 편이었다. 

흘끗 제단을 보자 베니가 아직도 제단 위 항아리 옆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이예주는 넘실넘실 거리는 불길을 피해 우회하여 제단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반도 가지 못하고 콰앙-! 지하 공간 전체에 울려 퍼지는 엄청난 폭발음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뜨거운 화마가 훅 몰아닥쳤다. 이예주는 몸을 웅크렸다.

“빌어먹을, 멍청한 놈!”

족장이 거칠게 욕설을 뇌까렸다. 

불에 닿은 8장로의 폭발이었다. 물레방아가 쏟아지자마자 눈치가 빠른 2장로는 귀신같이 대피 공간으로 내빼버렸다. 

이런 사고를 직접 마주한 것이 처음인 8장로 놈이 뒤늦게 그것을 보고 저도 가겠다고 따라나섰다가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어 터져버렸다. 

“제기랄, 어디 있는 거야! 눈! 미래를 보는 눈!”

족장이 엎드린 채 바닥을 거칠게 더듬었다. 

물레방아가 쏟아지는 꼴을 보고 놀란 8장로가 들고 있던 것을 다 내팽개치는 바람에 미래를 보는 눈이 어디로 굴러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기요.”

그때 무언가가 족장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족장의 눈이 부릅 홉떠졌다. 

휘익- 

엄청난 빠르기로 다가오는 쇠망치 때문이었다.

“너, 너는……!”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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