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90)화 (292/319)

“리즈, 우리 이제 오빠가 어디 있는지 몰래 들으러 갈 거야.”

이예주는 등을 돌려 저처럼 문에 등을 바짝 붙이고 숨죽이던 리즈에게 속삭였다.

“여기 위험해. 언니 곁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돼.”

리즈의 커다란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잔뜩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아이는 물러서려는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어린애를 홀로 돌려보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예주는 섣불리 리즈를 데리고 온 것을 후회했다. 

너무 안일했다. 

무기를 만드는 어떤 장소가 있을 것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니나 토마스가 한 쪽에 고이 갇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넓고 거대한 공간 그 어디에도 갇혀 있을만한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와, 리즈.”

리즈의 손을 꽉 잡은 채 이예주는 재게 발을 놀렸다. 

다행히 철을 제련하는 시끄러운 소리 덕분에 아무도 그들이 눈족들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서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먼저 눈여겨보았던 물레방아의 옆까지 무사히 도달한 이예주는 먼저 리즈부터 자루 사이 깊숙이 숨겼다.

“언니. 가, 가지마.”

“쉿, 어디 안 가. 바로 앞에 있을 거야.”

족장 일행을 자세히 보려면 물레의 바퀴 가까이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불붙은 쇳물이 튀는 물레 바로 옆엔 당연하게도 자루들이 많이 쌓여있지 않았다. 

반대편 화로에 있는 남자들이나, 물레의 맞은편에서 망치를 뚜드리고 있는 남자들에게 들킬 위험이 무척 컸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흘러내리는 벌건 쇳물에 가려져 안 보이길 기도하는 수밖에.

“언니…….”

“금방 다시 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조용히 있어. 착하지?”

불안에 떠는 리즈를 다독인 이예주는 조심스럽게 물레방아로 다가가 몸을 있는 대로 쭈그려 앉았다. 

마치 현대에서 ‘문’을 넘기 전 용암 파도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후끈함이 얼굴 위를 덮쳤다.

물레방아는 오랜 기간을 사용하여 낙후된 건지 속도도 느리고 주변에 지탱하는 쇠 지지대들이 얼기설기 덧세워져 있었다. 

지지대에 머리나 피부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이예주는 바퀴사이를 엿보았다. 족장 놈의 얼굴과 목소리가 훨씬 더 선명했다.

“몸은 좀 어떤가.”

족장을 제외하고 로브를 뒤집어 쓴 인간은 총 다섯 명이었다. 

일직선으로 서 있던 다섯 명 중 키가 작고 퉁퉁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힘이 있는 재료를 준 것이 맞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설마 자네들을 속였을까.”

“하, 하지만 같은 것을 먹었던 7장로가 실패했지 않습니까! 게다가 7장로는 의식 도중 갑자기 괴물로 변하지를 않나……!”

3장로는 초조한 얼굴로 족장에게 따지듯 물었다. 

평소에도 신경질 적이던 그는 검은 파편을 대면한 직후 내내 그는 두려움에 질려 몇 배는 더 예민해져 있었다. 

족장은 더 없이 좋은 기회라고 떠들어댔지만, 그 기회가 하필 제 차례를 앞두고 터지냔 말이다.

하지만 괜한 걱정을 한다는 듯 족장은 태연한 얼굴로 뇌까렸다.

“그래서 내 이번에 특별히 RTBD를 나눠주지 않았나.” 

“RTBD로는 부족한걸 알지 않습니까. 신인류를 주십쇼!”

“세상이 말세야. 요즘 먹이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것을 알 만한 사람이 그래. 쯧.”

족장이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치를 보던 나머지 장로들이 쭈뼛쭈뼛 3장로를 막았다.

“족장님의 말이 맞소. 그만 하시오, 3장로. 이번에는 3장로의 차례이지 않소.” 

“자네들도 어제 7장로를 보지 않았소! 굳이 3장로나 되는 내가 먼저 희생 될 필요가…… 약한 놈들부터, 그래! 10장로 놈부터 차례대로 진행 하면 될 것을, 왜 오늘은 두 명씩이나 의식을 치러야 하는 겁니까!”

“시간이 많지 않다 했지 않은가. 오히려 10장로는 불만이 없는데 자네만 그렇게 예민을 떠는군. 10장로, 자네도 3장로와 같은 생각인가?”

족장이 3장로에게서 몸을 돌려 빼빼마른 10장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리 저었다.

“아, 아닙니다, 장로님! 그럴 리가요!”

10장로의 부정에 3장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족장이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3장로. 이게 얼마나 오래된 우리의 숙명이었는지 벌써 잊어버렸나. 몇 백 년 동안의 검은 파편의 핍박 속에서도 자네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고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응?”

“…….”

“그동안 조달했던 힘과 먹이들이 없었다면 자네가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내 자네 선친과의 인연을 생각하여 자네를 장로로 임명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굴면 곤란하네.”

“족장님, 하지만…….”

“자네들도 알지 않나. 지금 동쪽 대륙이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고 있어. 

3장로가 무어라 반박하려 들었지만 족장은 여지를 주지 않은 채 그에게서 차갑게 등을 돌렸다.

“다리족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네.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다가 검은 파편의 손에 다 같이 개죽음을 당하고 싶나? 어제의 7장로 꼴이 되고 싶으냔 말이야.”

장로들의 낯빛이 하나같이 어두워지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바로 어젯밤 의식 도중 괴물로 변해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7장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각자의 몸에 달려 있는 것들은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죽으면 몸에 달린 그것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이론상으로 알고 있던 것과 적나라한 실제를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족장이 그런 그들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진중하게 읊조렸다.

“지금은 둘도 없는 기회야. 중요한 시기지. 자네들의 희생으로 머지않아 우리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야.”

“…….”

“고지가 코앞 일세. 현명하게들 굴게.”

특히 3장로의 어깨를 힘주어 두 어 번 두드린 족장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예주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최대한 집중했다. 

족장의 손에 들린 것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이 났다. 

이예주의 눈이 곧 커다래졌다.

그것은 단도였다. 

하지만 남쪽 대륙에 와서 보았던 검은 칼이 아니었다. 으레 알고 있던 일반적인 쇠로 만든 칼날이 달려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검은 칼을 만드는 게 아닌 것인가? 

혹시 모를 또 다른 그녀가 혼란스러워 할 적이었다. 

칼을 꺼내든 족장이 다른 장로들에게 턱짓했다.

“뭣들 하는가. 잡아.”

세 명의 장로들이 우루루 3장로와 10장로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도망갈 수 없도록 둘러싼 그들은 두 장로를 데리고 제단 앞으로 갔다. 

제단 위에는 신전에 있는 것보다 폭이 깊은 황금색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족장은 거침없이 제단을 밟고 서 항아리 뒤편으로 갔다. 

“손을 내밀게. 3장로, 10장로.”

두 장로는 족장의 말을 따르길 꺼려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다른 장로들이 반 강제로 그들의 손을 들어 소매를 들추었다. 

퉁퉁한 3장로에겐 두 명이, 그보다 말라 힘이 없어 보이는 10장로에겐 장로들 중 덩치가 가장 큰 한 명이 붙어 있었다.

소매가 걷혀 맨 살이 드러난 3장로와 10장로의 팔이 항아리 위에 내밀어 졌다.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저들이 말하는 의식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호기심이 든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바로 그들의 의식이 어떤 행위인지 알 수 있었다.

족장이 들고 있던 평범한 단도로 거침없이 3장로와 10장로의 손목을 그었다.

“크윽!”

날카로운 칼로 베인 손목에서는 당연히 피가 쏟아졌다. 

두 가닥의 핏줄기가 황금색 항아리로 고스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예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왜 갑자기 장로들의 팔을 베어 피를 내는 것이지? 

게다가 그녀 또한 손목을 그어 본 전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저렇게 피가 줄줄 아래로 쏟아질 정도면 보통 깊게 벤 것이 아닐 터였다.

“흐읍…….”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숨죽인 채 눈족 들의 기행을 지켜보던 이예주는 방금 전보다 더욱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피가…… 항아리로 떨어지는 두 사람의 피는, 검붉은 색의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검은색 물이었다. 

아니, 물도 아니었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기처럼, 항아리 밖으로 새어나갈 듯 꿈틀거리는 시커먼 그것은. 

그것은…….

“큭, 족장님. 이,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손목에서 콸콸 흘러내리는 것이 항아리를 채우면, 채울수록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에 3장로가 몸을 뒤틀었다. 

족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엄살 부리지 말게. 아직 멀었어.”

“그, 그렇지만 다른 때보다…….”

의식을 치렀던 다른 날보다 피를 내주는 시간이 훨씬 길지 않나 싶었으나, 3장로는 움직이지 못하게 몸을 단단히 붙잡은 두 장로를 뿌리칠 수 없었다. 

생명과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되면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3장로를 포함한 장로들은 이성이 사라지는 그 순간이 언제나 치 떨리게 싫었다.

“아, 아직 멀었습니까?”

얼마나 찼는지 알기 위해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내용물은 반투명한 검은색의 무형이라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젠 슬슬 위험한 시점인 것 같은데. 

3장로는 흘끗 눈을 돌려 10장로를 바라보았다. 

장로들 중 상대적으로 가장 힘이 약한 편인 그는 벌써 동공이 풀린 상태였다.

“이제 놓아주십시오.”

3장로의 얼굴이 다급함으로 물들었다. 

제물을 잡아먹고 RTBD로 임시방편만 해둔 상태였다. 

검은 파편의 강대한 힘이 깃들어 있는 신인류도 아니고, 다리족이 만든 그 조잡한 약물은 맞아봤자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점이 흔들리고 점점 더 머릿속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위험했다. 

“이제 그만! 머, 멈춰주시오! 자네들도 그만 놓게! 놓으란 소리 안 들리는가!”

“3장로.”

문득 족장이 희미하게 웃으며 3장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 몰래 장벽 밖으로 나가는 아이들을 빼돌려 잡아먹고 그랬나.”

“조, 족장님!”

3장로가 입을 떡 벌렸다. 

그의 눈에 부득 핏줄이 섰다.

“저는, 저는 힘을 더 키우려고 그런 겁니다! 더 강대해지면! 그러면 계속 실패하는 의식에 도움이라 될까 싶어……!”

“내 항상 말하지 않았는가. 힘을 키우려면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된다고.”

족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쯧. 능력이 쥐뿔도 없는 잡것들을 잡아먹는 바람에 자네의 검은 안개는 그다지 효용성이 없어. 그대로 있다간 괴물로 변했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나마 인류의 미래에 이바지 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족장님!”

“그동안 고생 많았네. 자네와 10장로의 고귀한 희생은 내 잊지 않도록 하지. 곧 끝날 테니 꽉 잡고 있게들.”

족장이 사형 선고를 내리듯 마지막을 통보했다. 

3장로는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장로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이거 놔! 멈춰! 멈추라고! 멈춰―!”

3장로가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껏 몸을 뒤틀었다. 

발악하는 그를 잡고 있기가 버거운 듯 두 명이 힘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항아리 위에 고정해둔 3장로의 팔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놔! 놔!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수고스러움도 잠시 뿐이었다. 

몸에서 피가, 생명이 빠져나갈수록 어떤 인간이건 기운이 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눈족이 일반인과 다른 점은 힘이 강할수록 명줄이 완전히 끊기기까지 더 끈질기고 오래 걸린다는 것뿐. 

얼마 후 10장로처럼 3장로의 동공 또한 스르륵 풀렸다. 

그의 몸을 붙잡고 있던 장로들은 갈라진 손목을 타고 피가 더 잘빠져나갈 수 있도록 3장로의 몸뚱이를 쓸고 주물렀다.

이제부터 아슬아슬한 시간 싸움이었다. 

죽어가는 몸뚱이에서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빼내느냐, 또 얼마나 알맞은 시간에 피를 멈추게 만드느냐가 관건이었다. 

장로들의 손길이 대장장이들만큼 분주해진 그 순간이었다.

“으아악―!”

망치질을 하던 대장장이들도 멈칫할 만큼 섬뜩한 비명소리가 회장 안에 텅텅 울려 퍼졌다. 

3장로보다 먼저 그 과정을 거치고 있던 10장로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5장로!”

끔찍한 장면에 장로들이 비명을 질렀다. 

항아리에 피를 쏟아내던 10장로가 그를 붙잡고 있던 5장로의 얼굴을 물어뜯어내고 있었다.

“아아악! 우우웁!”

인간이 벌릴 수 있는 한계, 그 이상으로 벌어진 10장로의 입이 악귀 같은 모습으로 5장로의 얼굴 가죽을 찌이익 뜯어냈다. 

공중으로 피가 튀었다. 

끼기긱, 끼기기긱― 

어디서 칠판을 긁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제때를 맞추지 못해 괴물로 변한 눈족 인간이 먹이를 찾아 이를 가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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