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89)화 (291/319)

*       *       *

어둠이 내려앉은 신전 내부는 소름끼칠만큼 고요했다. 

전에도 공허했던 곳이긴 했지만, 지금은 신전 안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곤 이예주와 리즈 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냥 추측만은 아닌 듯 복도에는 기름을 갈지 않아 꺼진 등불이 대다수였다. 

엉망진창인 복도는 부서진 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한기 때문에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넌 네 방으로 돌아가 있어.”

온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이예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쪼그마한게 도리질을 치며 고집을 부렸다.

“싫어. 나도 갈래.”

“안 돼. 위험해.”

“싫어. 나도 갈 거야.”

“리즈.”

“아빠가…… 아빠가, 오빠 죽으면 나도 같이 죽으랬어.”

“……뭐, 뭐?”

이예주는 순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고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듯 리즈가 어둠 속에서 파란 눈을 빛내며 또박또박 대꾸했다.

“아빠나 오빠 없으면 나 혼자서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눈알이 뽑히고 잡아먹힐 바에 그냥 가족이 다 같이 죽자고 했어.”

“그, 그게 무슨…….”

“토마스 오빠도 끌려가서 못 돌아왔으니까 우리 오빠도 죽겠지?”

리즈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채 이어 말했다.

“나는 우리 오빠 죽었는지 찾으러 가는 거야, 언니.”

“하…… 세상에.”

리즈의 말을 다 들은 이예주는 말문이 막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고작 9살 난 어린애였다. 

그런 어린애의 입에서 대체 이 무슨 끔찍한 소리가…….

그러나 이예주는 차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녀가 보아왔던 천 년 후의 인간들은 정말로 그런 미친놈들뿐이었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면 이미 일족 내부에서 그런 일이 팽배해 왔다는 소리였다.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이예주의 눈치를 보며, 리즈가 눈물이 가득 들어찬 눈으로 물었다. 

“같이 찾아 줄 거지?”

“……그래.”

이예주는 결국 체념하고 한숨처럼 답했다.

“같이 가. 근데 이건 알아둬.”

“뭐를?”

“토마스가 죽든 네 오빠가 죽든 넌 상관없이 계속 살아가야 돼.”

“그, 그건…….”

“토마스랑 네 오빠, 그리고 아빠 몫까지 아득바득 살아. 진짜 죽고 싶어도 살아가야 돼. 네 어깨 위에 이제 너희 아빠랑 오빠가 살고 있는 거니까.”

이예주는 저보다 한참 작은 리즈 앞에 쭈그려 앉아 그녀의 양 어깨를 아득 움켜쥐었다.

“네가 죽으면 너희 아빠랑 오빠, 또 죽는 거야.”

그녀의 말에 리즈의 두 동공이 흔들렸다.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 가혹하고 힘든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예주는 수십, 수백 번 씩 죽고 싶어질 때마다 정말로 그 생각으로 아득바득 살아남았다. 

내가 죽으면 봉구, 엄마, 수학여행에서 죽은 친구들도 다시 죽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런 소리 다신 하지 마. 그게 내가 네 오빠 같이 찾아주는 조건이야. 알았어?”

“으, 응. 알았어. 다신 안 할게, 언니.”

리즈가 코를 크게 들이마시며 확답했다. 

이예주는 쭈그렸던 몸을 다시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손 꼭 잡아. 한참 걸어야 하니까 추워도 좀 참아야 해.”

그들은 온실을 가로질러 신전의 뒤뜰로 빠져나왔다.

밤이 되니 낮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한파를 동반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으읏.”

성인인 이예주 조차 멈칫 망설임이 들만큼 얼굴이 뜯어져나갈 듯한 칼바람이었다. 

그러나 어린 리즈는 의외로 담담하게 눈보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숲 속으로 향하는 길목을 가로 막고 있던 쇠창살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분주한 발자국들이 눈 위에 선명히 찍힌 것이 보였다.

“하.”

사슬로 꽁꽁 묶인 채로 잠겨있던 어제와는 또 다른 모습에 이예주는 기가 막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긴 있는 모양이구나. 

그것도 람이 온 직후에.

“언니, 무서워. 여기 귀신 나온다고 했는데…….” 

어두운 숲 너머를 바라보던 리즈가 흠칫하더니 이예주의 옷자락에 얼굴을 묻으며 칭얼거렸다. 

“괜찮아. 귀신이 어디 있어. 그리고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거야.”

무덤덤하게 읊조리며 그녀는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숲길로 주춤주춤 나아갔다. 

원래도 그리 가까운 길은 아니었지만 깊은 밤중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더 길게만 느껴졌다. 

가는 도중 누군가와 마주칠까 싶어 온 감각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무너진 신전 터까지 도달하는 동안 그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베니가 끌려간 것으로 추정되는 탑에 도착하자, 숲길에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철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불길함으로 마음이 수런거렸지만, 겁을 먹은 리즈 앞에서 내색 할 순 없었다.

“언니한테 안겨.”

“응? 왜? 리즈도 걸어 갈 수 있어.”

“어제 낮에 왔을 때 바닥에 날카로운 것들도 많이 있었어. 깜깜한데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나.”

이예주는 가벼운 리즈를 훌쩍 안아들고 활짝 열린 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서진 탑 안은 달빛에만 의존해 걷기에 무척 위험했다. 

그러나 바로 어제 왔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어서 큰 무리 없이 지하로 가는 구석까지 도달 할 수 있었다.

벽돌이 위태롭게 무너져 벽과 맞닿은 틈을 조심조심 비집고 들어간 이예주는 지하로 연결 된 바닥의 비밀통로조차 이미 열려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혼자 갈 수 있어, 언니.”

리즈가 내려달라며 속삭였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대로 아이를 꼭 안은 채 통로로 가는 것을 망설였다. 

이 아래에 동굴 같은 커다란 공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어제 한 번 둘러본 것뿐이다.

막상 내려갔는데 아직도 그 벽 문이 굳게 닫혀 있으면 어떡하지?

아니 문이 열려 있어도 문제다. 

밑에 뭐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려갔다가 바로 올라오지 못하게 되면, 홀로 잠들어 있는 람은…….

“언니.”

영 내려갈 생각을 안 하는 이예주가 이상했던지 리즈의 갈색 눈동자가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빠를 같이 찾아주기로 했지 않냐는 듯.

이예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안고 있던 리즈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여기서부턴 정말 소리 내면 안 돼, 리즈. 언니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아무것도 안 보여서 무서워도 벽 짚고 잘 따라와야 돼.”

“응. 나 안 무서워. 나 잘 따라갈 수 있어, 언니.”

리즈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예주는 시범을 보이듯 먼저 계단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 양 손으로 벽을 짚은 채 한 발, 한 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의 경사가 가팔라 이예주의 모습은 꼭 허공에 떠서 하체부터 차근차근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내려와.”

이윽고 바닥에서 머리가 안 보일만큼 계단을 내려선 이예주가 말했다. 

리즈는 그녀가 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통로에 발을 내렸다.

두 사람은 곧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타박, 타박. 불빛하나 들지 않는 컴컴한 통로에는 오로지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이예주는 어린 리즈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중간 중간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아 통로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기 힘들었고, 혹시라도 누군가 그들이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위쪽 입구든 아래쪽 출구든.

하지만 기특하게도 리즈는 늦는 기색도 없이 이예주를 잘 따라 내려왔다.

대체 언제쯤 도달할까. 

끝도 없이 땅 속을 파고들고 또 파고들어가고 있다는 기분을 수 십분 째 느끼고 있을 때쯤이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흠칫 몸을 굳히며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거의 진동에 가까운 기척이라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뒤쪽이 아닌 아래쪽에서 난다는 것.

누군가 올라오거나 내려오는 것이라면 몰래 잠입하느라 온 몸의 촉각을 이용하여 어둠을 헤쳐 나가는 자신들과는 달리 등불 하나라도 들고 오리라. 

등불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리즈를 뒤로 물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예주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희미한 기척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선명해졌다. 

마침내 알아차린 소리는 누군가 올라오는 인기척보다는 공사장에서 나는 소음에 가까웠다. 

깡, 깡, 깡……. 

쇠를 내려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한참을 더 내려가도 등불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예주가 먼저 통로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계단 끝에 존재하는 지하 공간이 밝았더라면 그녀는 쉽게 통로를 나설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벽에 바짝 붙어 조심스레 살핀 통로 밖의 동태는 어제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어두웠고 군데군데 벽에 붙어 있는 야광봉이 그나마 주변을 구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리즈, 손잡아.”

이예주가 작게 속삭이며 리즈를 통로 밖으로 끌어냈다. 

어둠을 헤치며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내려오느라 아이의 얼굴이 그 사이 핼쑥해져 있었다. 

깡! 따앙― 깡! 

통로에서부터 들려왔던 소리가 이제는 눈살이 찌푸려 질만큼 커다랗게 확대되어 쉼 없이 귀를 찔렀다.

“언니 뒤에 바짝 붙어.”

리즈를 숨기듯 제 뒤에 바싹 붙인 채 조심스럽게 움직이려던 이예주는 곧 바로 멈칫했다. 

어제는 분명 통로 맞은편 전체가 거대한 여신상이 새겨진 동굴 벽으로 막혀 있었다. 

정확히는, 정 가운데를 가르는 가느다란 실선을 보지 못했더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문이 굳게 닫혀 있던 것이다. 

베니와 함께 돌문 근처를 샅샅이 훑었지만 끝내 잠금 장치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토록 잠금장치를 찾아 헤매던 것이 허무할 만큼 돌문이 활짝 열린 채 그 너머의 공간을 내보이고 있었다.

깡! 깡!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사방으로 튀기는 불똥들이었다. 

이예주의 가슴이 한차례 요동쳤다. 

검은 칼, 무기, 대장장이 등등 여러 단어들이 짧은 시간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리즈를 데리고 그녀는 최대한 벽 쪽으로 붙어 조심스레 활짝 열린 돌문으로 다가갔다. 

돌문 안쪽은 이런 공간을 어떻게 지하 속에 숨겨 두었는지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광활했다. 

신전의 1층 홀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신전에 있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거대한 여신상과 제단이 존재했다.

문에 등을 붙인 이예주는 조심스럽게 고개만 빼 내어 안의 동태를 살폈다. 

안쪽에는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캉, 깡! 

땀을 뻘뻘 흘리며 노동을 하고 있는 우락부락한 사내들과 여신상이 서 있는 제단 근처에 몰려 있는 로브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 

그리고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큼지막한 화로 몇 개와 철제 물레방아, 각종 장비. 

베니와 예측했던 눈족들의 비밀 공간이었다.

사내들이 쉴 새 없이 삽으로 철광석을 퍼서 기염을 토해내는 용광로 안으로 집어넣었다. 

옆 화로에서 또 다른 사내들이 녹은 쇳물을 담은 그릇을 꺼내어 반대편에 있는 커다란 물레방아 위에 부었다. 

물레방아에 매달려 있는 바구니들 돌아가면서 시뻘건 쇳물들을 아래로 콸콸 쏟아냈다. 

깡, 깡, 깡! 

보기만 해도 후끈한 그 방아의 바퀴 사이로 또 다른 무리의 사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망치를 쾅쾅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 대장간에서나 볼 법한 살풍경한 장면이었다. 

“준비는 모두 마쳤겠지.”

완벽하게 갖춰진 대장간의 모습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던 이예주는 문득 들려오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제단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쪽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였다. 

그 중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인간 하나가 제단 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족 족장이라는 것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예상보다 거사 시기가 부쩍…… 하지만 다행히……에 든 것은 예측과 다름없는 것을 확인했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자세히 듣고 싶은데, 쇠를 내리치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족장의 말이 드문드문 끊겨 들렸다.

어떡하지. 이예주는 샅샅이 안을 살펴보며 고민에 빠졌다. 

광활한 공간이었지만 그만큼 딱히 숨을 곳이 없었다. 

신전처럼 기둥이나 조각상 같은 구조물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찾고 또 찾자면 물레방아 옆쪽에 커다란 자루들이 잔뜩 쌓여 있어 몸을 숨길만 했다. 

그러나 용광로에 있는 사내들이 규칙적으로 녹인 쇳물을 부으러 갔기에 들킬 위험이 있었다.

“재료는 잘 가둬놨겠지?”

“예, 족장님. 재워서 구덩이 속에…… 지금 가져 올까요?”

“끝이 나면. 모양을 잡는데 시간이 꽤 많이 할애되는군.”

하지만 이예주가 갈팡질팡하는 그 순간 정신이 확 깰만한 소리가 들렸다.

재료. 

토마스를 찾느라 굴뚝을 기어올라 족장의 방을 몰래 염탐했을 때, 족장은 제 딸과 분명 ‘재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예주는 그때 어렴풋이 예감했다. 

놈들이 말하는 ‘재료’가 물건이 아니고, 어쩌면 토마스와 관련 되어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것은 어제 일이었고, 오늘 끌려간 것은 베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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