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88)화 (290/319)

그러나 이예주는 다른 사람들처럼 뽑힌 심장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뻥 뚫린 람의 가슴에 못박혀 있었다. 

심장이 있던 자리가 훤히 보일만큼 커다란 구멍이 생긴 가슴 구멍에서 남자의 생명수가 질질 흘러 넘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뻥 뚫린 구멍을 손으로 틀어막더라도 새어나오는 피를 멈출 방법은 없었다.

아. 아아…… 이예주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 남자가 죽을 리 없잖아. 

눈앞이 온통 시뻘게지더니 뜨거운 물덩이들이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왜?”

그때 남자가 물었다. 

이예주는 뻥 뚫린 가슴에 고정했던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하나뿐인 연인은 사라지고 어린 아이만이 황금 의자에 남아 있었다. 

새빨간 눈동자, 앳된 얼굴이 낯익었다.

“왜?”

가슴에 구멍이 난 채 피를 질질 흘리며 어린 람이 물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이예주에게 왜 울고 있느냐며. 

“……어차피 넌 날 버릴 거잖아.”

그리고 아이는 그녀를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헉!”

이예주는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떴음에도 망막에 시뻘건 잔상이 남아 있었다. 

코 끝에 피비린내가 감돌자 그녀는 얕게 숨을 헐떡였다. 

“……무슨 꿈이었지?”

분명 람이 나왔던 것 같은데. 신전이었고, 누가 람을…… 

거기까지 생각한 이예주는 문득 느껴지는 스산한 한기에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내리자 침대 시트가 흘려내려 울긋불긋한 제 맨 몸이 드러났다. 

붉게 변한 것을 넘어 푸르딩딩하게 변해 땡땡 부어오른 가슴께를 바라본 이예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친…….”

간밤에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찾으며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으윽.”

곧바로 묵지근한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잠깐 오므릴 틈 없이 밤새 벌어져 있던 다리 사이는 물론이고, 팔다리, 허리, 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두 손으로 등허리와 아랫배를 감싸 안고 한참을 끙끙 대던 이예주는 통증이 좀 가라앉고 나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휙 옆을 노려보았다.

“이런 나쁜놈!”

전신 구타를 당한 것과 마찬가지의 통증을 선사한 나쁜놈이 그녀의 옆에 태평하게 누워있었다. 

게다가 이 추운 지방에서 그녀는 벌거벗긴 채로 자든 말든 내팽개쳐두고, 본인은 겉옷까지 차려 입은 채 잘만 쳐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천벌 받을 놈!”

그녀는 와락 달려들어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릿하게 당겨오는 아랫배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만하자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한번만 하겠다는 다짐은 당연히 묵살 되었다. 

그러나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코피 터질 만큼 섹시한 얼굴로 “조금만 더…….” 하고 비비적거리는 놈을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었다. 

결국 이예주는 밤새 시달리다 커튼 사이로 동이 트는 것을 보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이 변강쇠 같은 놈아! 어떻게! 어떻게 그 무식한 것으로 그렇게 밤새……!”

움켜쥔 멱살을 짤짤짤 흔들며 이예주는 울먹였다. 

도망을 치려다가 침대에 거꾸로 처박혀 꼼짝도 못하고 하염없이 혹사당했던 지난밤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훌쩍이며 남자에게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던 이예주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람?”

그녀가 이토록 거칠게 흔들어 깨우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람을 잠을 잘 자지 않았다. 

일어나도 한참 전에 일어났을 남자가 눈을 뜨지 못하자 이예주는 크게 당황했다.

“람, 일어나 봐요. 왜 이러는…….”

멱살을 놓고 다급히 남자의 몸을 흔들던 이예주는 순간 떠오른 사실에 몸을 굳혔다.

―나는 이제 잠에 들어야 해. 동쪽 대륙을 복원하느라 많은 힘을 소비했다.

그의 몸 위에 있었던 이예주의 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람은 깊은 잠에 들었다. 

브레든을 찾을 수 있는 유예기간 또한 이틀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샤워를 한 후 옷을 주워 입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람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잠에 들어 있었다. 

벽난로 앞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이예주는 멍하니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꾹 감고 있는 탓에 평소보다 람의 긴 속눈썹이 훨씬 더 도드라져 보였다. 

보통 여자보다 길어서 남자의 신체 중 유난히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 외에도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흉흉한 검붉은 눈동자도 감긴 채 곱게 잠들어 있는 남자는 꼭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 같았다.

“남자 주제에, 입술은 왜 이렇게 빨간 거야.”

손을 뻗어 모양 좋은 남자의 입술을 어루만지던 이예주의 입에서 야트막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남자는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남자가 깊은 잠에 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미동 없는 람을 보고 있자, 갑자기 왈칵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틀은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길다고 말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신을 끌고 온 이후 그대로 방치해뒀던 눈족들을 생각해보면 이틀 정도 두문불출해도 신경 쓰지 않을지 모른다. 

욕실로 들어가기 전에 방문은 단단히 잠가뒀다. 

하지만 놈들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막무가내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들면…….

“……눈족 인간들이 당신을 해치려고 들면 어떡하지?”

그럼 난 어떡해야하지?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남자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이예주는 한편으로 힘껏 제 입술을 깨물었다.

불안감이 가슴 속을 까맣게 태우는 것 같았다. 

그의 말처럼 쉽게 죽지 않는 남자라는 걸 아는데. 

그렇지만 그동안 그녀가 정을 주었던 것들은 모조리 죽거나 다치지 않았는가. 

람은 그 중에서도 엄마 다음으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겨왔던 이였다. 

꽁꽁 숨겨 놓고 혼자만 봐야 하는 보석 같은.

“걱정 마요.” 

이예주는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다 잡으며 람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잘 자요. 그동안 많이 고단했잖아. 

항상 강하게 마주 잡아주던 손아귀엔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이예주는 한 번 더 다짐했다.

“내가 지켜줄게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남자를 지키겠노라고.

이예주는 제 말을 지키듯 하루 종일 남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늙은이들에게 끌려간 베니 생각도 났고, 브레든을 찾아 다시 탑의 지하로 내려갈 계획도 세워야 하지만 도저히 람을 두고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루 종일 방에 처박힌 그녀를 아무도 찾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지만 이예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밥도 먹지 않고 하염없이 남자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해는 금방 저물었다. 

람의 옆에 누울 생각조차 못하고 상념에 잠겨 있던 이예주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깊은 밤이 무르익었을 때였다.

똑, 똑. 

온종일 고요하기만 했던 방문 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일부러 힘을 뺀 듯, 작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예주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흐읍.”

누구지? 

그녀는 숨을 들이키며 바짝 긴장했다. 

눈을 부릅뜨고 방문을 바라보고만 있자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이예주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에 있다는 것을 티내지 않고 방문으로 다가가 동태를 살필 요량이었다. 

그러나 지지리도 운이 따라주지 않은지, 몸에 밀린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끼이익-’ 음산한 소리를 내버렸다.

“망할.”

이예주는 나지막이 욕설을 뇌까렸다. 

노크소리가 끊겼다. 

안에 자신이 있다는 기척을 아낌없이 보여줬으니 끊길만도 했다. 

그녀는 처음 의도와는 달리 더 다가서지 않고 그저 방문을 예의주시 하기만 했다. 

상식적으로 수상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훤한 대낮 놔두고 이 오밤중에 귀신처럼 문을 두드리는 게……

동태고 뭐고 그냥 갈 때까지 아무 반응도 안하기로 결심하고 숨을 죽일 때쯤이었다.

“어, 언니. 언니…….”

문 밖에서 속삭이듯 작달만하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예주는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다급히 방문으로 다가갔다. 

잠금장치를 풀어낸 그녀는 벌컥 문을 열었다.

“리즈?”

오밤중에 귀신처럼 문을 두드린 것은 다름 아닌 리즈였다.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리즈의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언니, 언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리즈.”

이예주는 서둘러 리즈를 안아들고 방문을 닫았다. 

대체 언제부터 밖에 있던 건지 품에 닿는 아이의 몸이 얼음같이 차가웠다.

이예주를 보고 안도한건지 리즈가 엉엉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울지 마. 응? 왜 그래. 베니는 어디 갔어?”

“도와줘, 언니!”

와락 이예주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리즈가 숨넘어갈 듯 헐떡였다.

“오빠가, 오빠가 끌려갔어, 언니.”

“뭐?! 언제? 어디로!”

놀라 채근하듯 묻자 아이가 다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이예주는 리즈를 얼싸안고 다독였다. 

“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 해봐, 응? 오빠를 누가 데려갔는데?”

“오빠랑 아까 같이 밥 먹었는데, 족장님이 갑자기 장로님들이랑 와서 오빠를 온실 쪽으로 데려갔어.”

“온실?”

“응. 오빠가 끌려가면서 언니한테 가라고 했는데, 흑…… 나는 언니 방이 어딘지 몰라서 계속 언니 찾아다니느라…….”

“잘했어. 잘 찾아왔어. 울지 마. 우리 리즈 고생 많이 했어.”

경기하듯 놀란 아이를 달래면서도 이예주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족장의 방도 아니고, 온실 쪽으로 끌려 간 것이라면 탑으로 데리고 간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어린 리즈 홀로 자신을 찾아다니느라 지체된 것까지 감안하면 베니가 끌려 간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버린 것이다.

한 번이라도 밖에 나가서 베니와 리즈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이예주는 하루 종일 방 안에 처박혀 있던 것을 후회했다. 

그 사이 조금 진정이 된 리즈가 훌쩍이며 말했다.

“언니, 나랑 같이 우리 오빠 찾아주면 안 돼?”

“리즈…….”

“리즈가 이렇게 부탁할게, 언니. 우리 오빠 찾아줘. 응?”

쉽게 그러겠노라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예주는 대답 대신 반사적으로 람 쪽을 돌아보았다. 

이 소란에도 남자는 변함없이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남자의 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과거로 갈 수 없다는 것도, 도망치면 대륙을 부수겠다는 것도, 인간들이 만든 조잡한 무기로는 죽지 않는 것 또한……

그러니 자신이 없어도 남자는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답이 없는 그녀를 보며 리즈가 다시 애원했다. 

“언니, 언니 제발…….”

이런 급박한 순간에도 람과 어린 아이들 중 누가 더 제게 중요한지 무게를 달고 저울을 재는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이예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알았어.”

“흐윽, 우리 오빠 찾아 줄 거야?”

“그래, 가자.”

안아들고 있던 바닥에 리즈를 내려놓고 그녀는 서둘러 로브를 챙겨 입었다. 

리즈가 먼저 도다다 문 쪽으로 달려갔다.

로브 단추를 꼼꼼히 채운 이예주는 마지막으로 람을 내려다보았다. 

잠에 든 남자를 홀로 두고 가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브레든을 찾으려면 방 밖을 나서야 하는 일이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고개를 숙여 잠든 남자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언제나 그렇듯 계획 따윈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브레든과 베니를 구하고 나면, 람이 잠든 이틀도 눈 깜짝할 새 지나가 있으리라.

이예주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힘겹게 떼어 람을 남겨 둔 채 방문 밖으로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