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이― 알았다.”
숨넘어갈 듯 헐떡이는 이예주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남자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쪽 대륙을 부수지 않을 테니 울지 마.”
“……흐, 흐으.”
“네가 내 곁에서 도망치려 들지만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당장이라도 남쪽 대륙을 때려 부술 것 같았던 남자의 흉흉한 기세가 누그러진 게 느껴졌다.
이예주는 그제야 숨넘어갈 듯 헐떡이던 몸을 조금씩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디로 도망가겠어요, 내가. 앞으로 인간들한테는 천하의 처 죽일 년이 될 텐데…….”
그녀는 람의 허리를 마주 안으며 힘없이 대꾸했다.
마음이 한없이 착잡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혼자서만 탈출한 선장, 전시 중 국민들에겐 소리 소문 없이 피란을 떠난 왕, 안위를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 역적……
별별 생각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람의 손 위 등 위를 쓸고 지날 때마다 애써 떠올린 것이 무색하게 그 생각들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그의 말처럼 이대로 그냥 모든 것을 잊고 이 남자의 품속에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거야.
흐릿한 피비린내가 나는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묻으며 이예주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슬며시 감을 즈음이었다.
“어차피 숲으로 되돌아가더라도, 놈들은 저들 필요할 때 또다시 네게 손을 뻗으려 들겠지.”
남자가 그녀의 앞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나는 이제 잠에 들어야 해.”
“자, 잠이요?”
“그래. 동쪽 대륙을 복원하느라 많은 힘을 소비했다.”
이예주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검은 파편은 많은 힘을 쓰고 꼭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화의 구절을 기억해낸 그녀는 새된 비명처럼 물었다.
“나 때문에요?”
함께 다니는 동안 지켜본 그는 잠을 잘 자지 않았다.
제 탓이었다. 멀쩡했던 동쪽 대륙이 부서진 것도, 람이 그로 인해 많은 힘을 소비하여 잠에 들어야 하는 것도 모두 제 탓 같았다.
그리고 남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예고 없이 대륙이 붕괴되어 애꿎은 신인류들마저 피해가 막심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들이라도 앞으로 건사할 수 있게 해줘야지.”
타당한 일이었다.
제가 몸체를 부숴버렸으니 죽은 것들은 되살릴 수 없더라도, 산 것들 마저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람은 주변에 있는 운석과 별들을 끌어 당겨 삼키고, 다지느라 아주 오랜만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이전의 터를 잡고 살던 동쪽 대륙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살아남은 신인류들에겐 인간이 없는 것만으로도 더 없는 낙원이었다.
“원래는 널 데리고 얼음 동굴로 돌아가 잠에 들 계획이었는데…….”
“이렇게, 빨리요?”
람과 재회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이예주의 얼굴이 다시 왈칵 흐려졌다.
그와 떨어져 있는 시간은 끊임없는 인내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번처럼 가지 말라고 투정조차 부릴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은 브레든을 찾기 전까지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런 이예주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남자가 콧잔등 위로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이틀?”
“이틀간 여기서 잠을 잘 테니, 죽은 눈족 계집의 혈육을 재주껏 찾아보도록 해. 어디로든 가지 않으마.”
“저, 정말요?”
이예주는 남자의 가슴에서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허락이었다. 여기에 남아 그가 증오하는 인간을 구하는 것에 대한.
그것은 더 이상 도망가지 않겠다는 그녀에게 보이는 남자의 신뢰이기도 했다.
이예주는 모처럼 자신을 믿어주는 남자가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감이 마구 치솟았다.
“그, 그런데 당신이 잠든 사이에 눈족들이 당신을 또 해치면 어떡해요?”
“그럼 네가 지켜줘야지.”
“내가 어떻게요…….”
이예주는 자신 없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혐오로 다시 눈물을 쏟자 남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진실을 토로했다.
“인간들이 만든 조잡한 걸로는 죽지 않는다고 했지 않아.”
“그래도…….”
“그 누구도 나를 해치지 못해. 날카로운 것으로 심장을 난도질당하더라도 아무런 타격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 말 하지 말랬죠! 알았어요. 내가 꼭 지켜줄게요!”
그의 말에 한없이 쭈그러들던 이예주의 고개가 번쩍 치켜 올랐다.
마음을 바꿔 먹은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틀간 브레든도 반드시 찾아내서, 그래서 같이 숲으로 돌아가요. 펭양이 만들어준 빙어구이 먹고 싶어…….”
어리광을 부리듯 중얼거리며 다시 람의 품을 파고들었다.
허리를 감싸 안자 남자의 몸이 멈칫했다.
이예주는 그를 무시하고 팔에 힘을 꽉 쥐고 좀 더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할 수 있어, 이예주. 누구도 손끝 하나 건들지 못하게 지켜줄 수 있어.
“……좀 아프군.”
한참의 틈을 둔 후 남자가 조금 갈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아차! 이 남자, 다쳤지! 이예주는 당황해서 번쩍 허리를 감은 손을 풀었다.
“어, 어디가요? 상처가요? 어디 봐요. 소독 같은 거 안 해도…….”
“우리가 새로이 맺은 계약 내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데.”
상처 얘기하다가 갑자기 웬 계약 얘기야?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뭔 내용요?”
“네가 내 곁에서 도망치지 않은 조건으로, 그리고 넌 내가 다치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을 새로 맺었지 않아.”
“계약이요?”
“그래. 난 온천에서 네게 대가를 치루었으니 이젠 네 차례다.”
“대가…… 차례?”
남자의 뜬구름 잡는 소리에 그녀의 머리가 자동으로 온천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그러고 보니 온천에서 뭐 계약 어쩌구 말을 나눴던 것 같다. 그것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하다. 대가로 널 치료 해 줄 테니 넌 그저 가만히 있도록 해. 내가 다 알아서 하지.
문득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생생히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그의 위에 앉혀져서 밤새…… .
“헉!”
“이제 기억났나?”
순식간에 낯빛이 창백해진 그녀의 코앞에 남자가 얼굴을 훅 가까이 들이대며 음험하게 속삭였다.
이예주는 마구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요? 무, 무슨 차례를 말하는 건데요?”
“네가 날 치료 해 줄 차례.”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반전되었다.
아찔한 감각과 함께 이예주는 풀썩 침대에 눕혀졌다.
남자가 먹이를 사로잡은 포식자처럼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그의 손이 엄청난 빠르기로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
이예주가 서둘러 허겁지겁 남자를 막아섰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눈 깜짝할 새 단추가 모두 풀리고 장포가 벗겨졌다.
상의마저 남자의 손에 찢기듯이 벗겨지자 맨살이 드러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저기요! 저기, 이, 이게! 우리 방금까지 심각한 얘기 하고 있었잖아요!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건데!”
“환자를 격동하게 하면 쓰나. 얌전히 있도록.”
남자가 당황하여 버둥거리는 그녀의 두 손목을 가뿐히 잡아 위로 올려 잡았다.
이예주의 동공이 지진나듯 흔들렸다.
환자? 이렇게 무식하게 힘이 센데?
“아니, 아니! 당신이 무슨 환자야! 그리고 대가 그거 내가 정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신인류들은 그랬잖아요!”
“스읍- 어린 것이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나 또한 성심성의껏 몸으로 치료 해주었으니 너도 내게 그리 해줘야지.”
헛소리를 잘도 뇌까리던 람이 고개를 훅 숙였다.
희게 드러난 살을 남자가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경악으로 잔뜩 굳어진 이예주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헉! 이 미친……!”
“예주야.”
손을 멋대로 움직이던 남자가 불현듯 호소했다.
“아파.”
“어, 어디가요?”
“나 아파, 예주야.”
“이, 이게 무슨…… 대체 누가 그런 것을…….”
대체 누구한테 그런 교태를 배워온 것이냐 묻고 싶었지만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제 남자의 아프다는 말이 거짓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며 허락을 구하는 그 눈동자에, 이예주는 끝내 또 한 번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 한 번만 해야 돼요.”
“알았다.”
“정말이에요! 치료에 필요한 한 번 만요! 그때처럼 밤새서 했다가는 죽는…… 으읍!”
거침없는 손으로 아래를 헤집으며 남자가 입술로 이예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계획한 바는 아니었으나 원래의 목적을 이룬 람은 지독히도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검붉은 눈에서 정욕이 뚝뚝 떨어졌다.
방 안은 얼마 안가 인간 여자의 끙끙대는 신음 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녀의 안에 새로운 에너지가 왈칵 피어올랐다.
* * *
소란스러운 소리에 이예주는 감았던 눈을 떴다.
자신은 기둥이 다 쓰러져 무너지기 직전인 신전의 입구 앞에 서있었다.
왜 여기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예주는 자신을 툭툭 치며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가만히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주변을 들어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무너진 신전 입구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에 떠밀려 이예주도 어쩔 수 없이 신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살벌하게도 부서진 기둥의 잔해들을 피해 사람들이 향하는 곳으로 걷고 또 걷다보니 어느새 여신상이 있는 홀 깊은 곳까지 들어온 후였다.
신전이 곧 무너질 것처럼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거대한 여신상은 금하나 가지 않고 멀쩡했다.
여신상을 올려다보던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신이 양 손에 들고 있는 검은 파편과 삼지창의 조각이 좀 이상했다.
그저 조각상의 일부에 불과했던 검은 파편이, 여신의 손에서 검붉게 달아올라 살아 있는 것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게다가 멀리서 볼 때완 달리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미묘하게 빗겨나가 있던 삼지창의 각도가 정확히 검은 파편을 향해 있었다.
만일 조각상이 살아있다면 금방이라도 고동치는 검은 파편에 쑤셔 박을 것처럼.
문득 제단 앞까지 잔뜩 몰려든 사람들이 몸을 숙여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예주 혼자만이 어리둥절한 채 따라 엎드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을 때였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제단 위를 가리키며 연거푸 절을 했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제단의 가장 끝에 있는 황금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눈을 꾹 감은 채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람?”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자 황금 의자 뒤편에서 누군가 스르륵 나타났다.
회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눈족 사제였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벗어냈다.
그러자 시간의 여신과 똑 닮은 금빛 머리칼이 굽이치며 드러났다.
“……쟈니아?”
여전히 람이 앉아 있는 황금의자 뒤에 선 채 여자가 엎드려 절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어라 소리쳤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예주에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목에 핏줄까지 선 채 연설하듯 뭐라 뇌까리던 쟈니아는 돌연 황금의자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른 한손을 위로 번쩍 쳐들었다.
그 손에는 여신상이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괴상한 모양새의 삼지창이 들려 있었다.
마치 거대한 여신상과 자그마한 피규어를 보는 듯했다.
여신과 같은 얼굴, 같은 손에 든 삼지창.
여신상과 쟈니아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이예주는 홀린 듯이 제단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신전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마치 이예주를 보지 못하는 듯 아무도 그녀를 막아서지 않았다.
그 때까지 피가 터져라 소리를 지르던 쟈니아가 불현듯 양손으로 창대를 부여잡고 위로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예주가 람이 앉아 있는 제단의 꼭대기까지 올라선 순간.
여자는 망설임 없이 삼지창을 람의 가슴에 콱 내리 박았다.
푸욱―
날카로운 창살이 뼈를 부수고 심장에 쑤셔 박히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여자가 람의 가슴에 쑤셔 박았던 창을 힘껏 뽑아냈다.
창끝에 박혀 있던 심장이 뽑혀 딸려 나왔다.
주먹만한 그것은 시뻘건 피를 흩뿌리며 살아있는 것처럼 펄떡펄떡 고동쳤다.
그것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무섭게 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