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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286)화 (288/319)

이예주는 계속 웃음을 터뜨리는 남자의 모습에 갑자기 해일처럼 피로가 몰려왔다. 

어둠속에서도 형형히 타오르던 검붉은 눈이 곱게 접힌 눈꺼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 니가 좋다니 됐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예주는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시는 다치지 마요…… 피 묻혀서 오지도 말고.”

“네가 솜 주먹으로 난리를 피울 때 상처는 이미 재생이 끝났다.”

보여주려는 듯 몸을 일으키는 남자를 저지하며 이예주는 인상을 북 썼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한테 피가 묻어 있는 걸 보면 이제 그냥 머리가 하얘진단 말이에요!”

때리느라 남자의 배 위에 올라타 있던 이예주는 침울한 얼굴로 그 위에서 내려와 앉았다. 

두 사람의 몫을 받아내느라 낡은 신전 침대 스프링이 삐그덕, 음산한 소리를 냈다. 

람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그녀는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다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내가 나를, 죽여 버리고 싶어져.”

“예주야.”

남자가 손을 뻗어 다시 조심스레 이예주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토라진 아이처럼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쪽으로 돌아앉지 않았다. 

신전으로 온 후 지난 여러 밤 동안 반복적으로 악몽을 꿔서 그런가. 

언제나 눈을 뜨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악몽의 끝자락은 온통 시뻘건 잔상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방으로 올라오기 전 족장의 로브에 묻은 핏자국이 떠올랐다. 

그것을 보고 일순 가슴이 서늘해졌던 감각도.

“눈족 족장이 이런 거죠? 응? 족장이 이랬어요?”

이예주는 퍼뜩 고개를 들고 람에게 물었다. 

맞죠? 그쵸? 닦달하듯 연달아 물었지만 남자는 희미하게 웃기만 할 뿐 좀체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늙은이 새끼! 죽여 버릴 거야!”

확답을 들은 것도 아닌데 이예주는 눈을 희번덕 뒤집으며 족장놈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반드시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럽게 죽이리라. 

혼자서 부들부들 투지를 불태웠지만, 같이 공감해주지 않는 남자로 인해 불꽃은 금방 푸시시 식었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자신의 몸이 다친 것에 분노하지 않는 람이, 이예주는 아팠다.

그녀는 남자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울먹였다. 

“왜 피하지도 않았어요. 바보같이…….”

“그거 몇 번 찔려봤자 간지럽지도 않아.”

“또, 또, 또! 내가 그딴 소리 하지 말랬……!”

이예주가 다시 괴성을 지르며 발광 할 기미가 보이자 람은 얼른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말을 돌렸다.

“얼굴이 좀 수척해졌지만,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다. 그보다…….”

“…….”

“이제 그만 숲으로 돌아가지. 데리러왔다.”

람의 말에 이예주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이미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올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브레든을 찾아서, 그래서 그가 데리러 왔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음침한 신전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하지만……. 람에게 당장 당신과 함께 떠나겠다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또 병신처럼 그렇게 답하지 못했다.

“……알리자린의 동생이…….”

이예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알리자린의 동생이 눈족 족장에게 잡혀 있어요.”

“알리자린? 그게 누구지?”

“그 파란 나비 있잖아요. 온천에서 같이 봤던…….”

“음.”

남자가 기억났다는 듯 짧게 답했다. 

이예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죄를 고백하듯 말했다.

“당신이 올 때까지 찾아서. 아니, 당신이 오지 않더라도 찾아서 탈출하려 했는데…… 그동안 신전을 싹 다 뒤져봤는데 아직도 못 찾았어요.”

“그 인간이 너에게 중요한가?”

람이 물었다. 알리자린이, 그리고 알리자린의 동생이 자신보다 중요하냐고.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그보다 더 중요한건 없었다. 

과거까지 버리고 선택한 남자이지 않은가.

“……알리자린은 제 탈출을 돕다 죽었어요.”

하지만 미래로 온 지금마저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을 외면해버리면 ‘과거로 갈 수 없어서 그랬다.’ 는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돼버린다.

이예주는 떼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약속했어요. 동생을 구해주겠노라고…….”

실은 잡힌 눈족 아이들을 모두 도와주겠노라 호언장담했다. 

이제는 지키지 못할 허언들이었다. 이예주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애를 두고 갈 수 없어요.”

정확히는 그 애‘만’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검붉은 눈을 마주 보며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브레든 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피하고자, 엮이지 않고자 노력했지만 이예주의 가슴 끝엔 베니와 리즈라는 가시가 박혀 버렸다.

“후…….”

람이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지그시 눈을 감았다. 

화난 걸까? 이예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마주보았다.

“이 안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기척은 아까 너와 함께 있었던 어린 인간과 그 혈육뿐이다.”

“네? 그, 그런…… 그럼 다른 아이들은요?”

“다리족 놈들이 만든 이상한 약물을 주입하지 않았다면, 죽은 것이겠지.”

죽은 것과 진배없는 상태가 된 걸지도 모르지만 람은 굳이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괜한 희망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보단 사실 인간 여자가 그냥 모든 것들을 내버리고 자신의 곁에만 있어줬으면 하는 욕심이 컸다.

하지만 그의 말에 인간 여자의 얼굴은 너무 쉽게 울 것처럼 흐려졌다. 

람은 불현듯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냥, 다 쓸어버릴까?”

간신히 말려놓은 눈 꼬리가 다시 축축해지는 게 보이자 그는 손을 뻗어 그곳을 어루만졌다.

“널 괴롭히는 것들을 다 죽여 버리고 이곳 남쪽 대륙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면. 그러면, 네가 내 앞에서 더는 울지 않고 예쁘게 웃기만 할까?”

“그게…… 그게 무슨 소리에요.”

“동쪽 대륙을 복구하느라 에너지를 꽤 많이 소비했지만, 좀 더 무리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네 말 한마디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듯 남자의 검붉은 눈이 알 수 없는 격정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이예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당황해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지 마요! 그럼 안 돼요!”

“왜?”

“아, 아무것도 모르고 쫓겨난 어린 애들도 많은 걸요?”

“내게 어린 것은 너로도 충분해.”

람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지금 동쪽 대륙 상황이 어떤지 아나?”

“동쪽 대륙요? 동쪽 대륙은…….”

이예주가 남쪽 대륙으로 와서 전해 들은 동쪽 대륙의 소식은 모두 쟈니아에게서 들은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부서져, 많은 인간들이 죽었다. 

그것이 모두 이예주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던 쟈니아를 떠올리니 입이 자연스럽게 닫혔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람을 바라보았다.

“동쪽 대륙은 지금 전쟁 중이다. 어린 것 늙은 것 할 것 없이 인간들이 매일 수백씩 죽어나가고 있지.”

“저, 전쟁이요? 신인류와 마을 사람들의?”

“아니. 신인류와 시간족이지.”

이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을 인간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신인류들이 하루아침에 들고 일어났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뜬금없는 시간족과의 전쟁이지? 

람이 곧바로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동쪽 대륙이 붕괴되면서 마을에 살고 있던 인간들은 대부분 죽었다.”

“뭐, 뭐라고요?”

이예주의 눈이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처럼 더 없이 확장되었다.

“나, 나 때문이죠?”

심장이 덜컹거렸다. 

굳이 쟈니아의 말이 아니어도 이예주는 그동안 수차례 람의 경고를 들어왔다. 

도망가면, 대륙을 모두 때려 부수겠다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충분히 실행으로 옮길 남자라는 것을 내심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결국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서 또다시 도망쳤다.

자신의 안일함이 또 죽음을 불러온 것이다.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때, 내가 동쪽 대륙으로 열린 문을 넘었는데 당신이…… 당신 팔이…….”

“그게 아니라도 인간들은 곧 멸종 할 거다.”

이미 정해진 미래를 읊는 것처럼 람이 여상한 얼굴로 읊조렸다.

“팔족들은 새로 태어나는 것들이 없어 도태됐고 그마저도 얼마 전 터전의 절반 가량이 사라졌다. 기억하겠지? 얼음 동굴에서 네가 스스로 손목을 그었을 때.”

이예주는 흡, 하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동굴에서 열렸던 ‘문’이 떠올랐다. 

그 안엔 분명 팔족들이 사는 시간이 멈춘 도시가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람에게 손목을 그어 능력을 발현시킨 것을 느꼈고. 그 후에 람의 오른쪽 어깨에서 핏줄기가…….

“다리족은 족장을 잃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군대에 투입하고 있지. 그나마 사정이 나은 눈족 놈들은 족장과 장로들을 주변으로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들을 족족 내다버리고 있다.”

“…….”

“그에 반해 신인류들은 새로 복구된 동쪽 대륙에서 엄청난 속도로 번식 중이지.”

남자는 이예주의 충격이 가실 틈을 주지 않고 이어 몰아 붙였다.

“신인류야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다르지.”

“…….”

“인간들의 멸종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다면, 네가 할 일은 허튼 생각 말고 얌전히 내 곁에 붙어 있는 것뿐이야. 그러니 앞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짓은 관두 거라.”

람이 불쑥 손을 뻗어 이예주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너만 잡을 수 있다면, 그깟 대륙 따위 몇 번이고 부술 거니까.”

짓씹듯이 내뱉어진 남자의 말에 이예주는 이제 숨도 못 쉬고 얼어붙었다. 

결국 쟈니아의 말이 맞았다. 

그녀 때문에. 그녀가 람에게서 도망갔기 때문에 그에 의해 동쪽 대륙이 붕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나, 나는.”

“…….”

“나는 당신을, 선택했어요.”

이예주는 곧 기절할 사람처럼 바들바들 떨며 선택했다.

결국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을 외면하는 것을.

“그래서, 그래서 앞으로 인간들이 멸종한다더라도…….”

사실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 세상에, 이 지구에 자신을 제외한 사람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은 상황은. 

하지만 이예주는 스스로를 세뇌하듯 재차 다짐했다.

“그래도 당신을 원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거예요.”

“어여쁜 것.”

남자가 기특하다는 듯 손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말이 듣기 좋았는지 그의 붉은 입 꼬리가 한껏 위로 휘어져 있었다.

람이 웃는다. 

기뻐야 하는데, 하지만 이예주의 얼어붙은 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치만…… 안 그래도 불쌍하게 버려지는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데에 가담하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까지 나 때문에 죽어나간 사람들을 생각만 해도…….”

웃고 있는 남자와 달리 이예주의 눈에서 뜨거운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제가 울고 있는지도 모르던 그녀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한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아…….”

그녀는 제 구역질나는 이중성에 작게 신음했다.

이전에는 자신 때문에 죽은 이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겼다. 

과거로 돌아가면 모두 되살릴 이들이었으니까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하지만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뿐이었다. 

붕괴된 동쪽 대륙과 부서진 팔족 도시. 그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다보면 이예주는 단순히 죄책감에 짓눌리는 것을 넘어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이게, 이게, 싸구려 같은 동정이고 오지랖이라고 해도…… 당신이 답답해하고 화를 내더라도…….”

“예주야.”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 하며 덜덜 떠는 이예주를 람이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모두 제 뜻이었다. 

자신이 무수한 고뇌 끝에 선택한 남자다. 

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다시 선택하고 묻어둬야 하는 게 많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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