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들은 모두 족장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늙은 사람들이었다.
처음 보는 노인 무리의 모습에 이예주는 베니를 제 뒤로 숨기며 주춤 물러섰다.
그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아는 얼굴이 튀어나왔다.
“어딜 갔다 이제 오시는 겁니까?”
눈족 족장이었다.
며칠 못 본 사이 족장의 꼴이 처참했다.
핏기가 사라져 창백한 안색과 시커먼 눈 밑이 임종을 앞둔 사람 같았다.
게다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로브 앞쪽에 알 수 없는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또 순록을 죽인 건가? 섬뜩한 족장의 모습에 이예주는 눈을 부릅떴다.
“……그냥 앞에 눈 구경 좀…….”
“끌고 가.”
“자, 잠깐! 뭐하는 거예요?”
심상치 않은 인간들의 분위기에 잔뜩 경계하며 어물어물 대답하는 사이 족장이 뒤에 서 있는 다른 노인네들에게 명령했다.
노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베니를 떼어냈다.
“누, 누나!”
“왜 이래요!”
겁에 질린 베니가 이예주의 옷자락을 덥석 부여잡았다.
이예주 또한 그를 마주 잡았지만 산삼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노인네들의 힘이 억척스럽기 그지없었다.
“누나! 누나!”
“베니!”
이예주의 곁에서 떼어낸 베니는 막을 새도 없이 노인들에게 우루루 둘러싸여 빠져나왔던 어두운 복도로 다시 끌려갔다.
이예주는 훽 고개를 돌려 눈족 족장을 노려보았다.
“저기요! 베니는 갑자기 왜 데리고 가요?”
“어서 방으로 올라가 보시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건데요! 리즈는요? 토마스는 어디 있어요? 브레든은!”
토마스가 사라진 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족장에게 티내선 안 되었다.
지금까지 베니와 몰래 신전을 뒤지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목 끝까지 불안함이 차올라 저도 모르게 아이들의 이름이 마구 튀어나왔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에 눈족 족장은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지독히도 피로한 얼굴로 미간을 문지르며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 아이들은 우리 눈족의 구성원으로,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있고 없고는 내가 알아서……!”
“입장 정리를 정확히 하는 건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지요. 당신은 검은 파편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
“이제라도 검은 파편을 버리고 눈족 아이들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브레든을 데려오도록 하지요.”
이예주는 할 말을 잃고 아연한 얼굴을 했다.
신전에 왔을 때, 그녀가 1순위로 경계하던 일은 바로 아무와도 감정적으로 엮이지 않는 것이었다.
알리자린 같은 죽음을 다시는 겪기 위해서였다.
눈족 족장의 맞았다.
이예주는 람에게 이용당하고, 속았음을 알았음에도 결국 그를 용서했다.
과거를 버렸다.
그를 품기 위해서는, 그만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인간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게 된다면, 그녀는 그동안 힘겹게 외면하고 있던 다리족 몰살의 주범이 될 테니까.
알리자린의 동생은 마지막 남은 양심이었다.
앞으로도 람의 손에 죽을지 모를, 죽어갈 인간들을 계속 외면하려면 자기 합리화를 할 것이 필요했다.
이예주는 정말이지 람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알리자린과 했던 약속과는 달리 이런 와중에 버려지고 이용당하는 눈족 아이들 까지 도저히. 도저히…….
“하지만 당신도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합니다. 우리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
이예주는 족장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비웃듯 족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놈을 노려보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만 올라가시지요.”
4층은 아래층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양호했다.
조각상들도 대부분 멀쩡했고, 등불도 훤했다.
난간을 잡고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종아리와 뒤꿈치가 미친 듯이 당겼다.
오늘은 하루 종일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기만 한 끔찍한 날이었다.
남쪽 대륙은 엄청나게 추워서 가만히 있어도 체력이 달리는데 그렇게 움직여 댔으니 온몸이 쑤시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쓰러질 듯 비척거리며 남은 복도를 간신히 지나 제 방이 있는 끄트머리까지 도달했다.
달칵- 바로 침대로 뛰어들 생각을 하며 문고리를 돌렸을 때였다.
“이제 오는 건가?”
방 안에서 환청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문턱에서 우뚝 멈췄다.
“……람?”
테라스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환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남자의 환영이 뒤를 돌아 이예주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번뜩이는 검붉은 눈동자. 남자가 이예주에게 양손을 펼쳐보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람!”
이예주는 비명처럼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코뿔소처럼 돌진해 그의 품에 안겼다.
“윽!”
남자가 그녀를 받아내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지만 이예주는 너무 정신이 없어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그녀는, 팔로 와락 등허리를 끌어안고 남자의 품을 마구 파고드느라.
얼굴을 람의 가슴에 박은 이예주는 미친 듯이 호흡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내뿜을 수 없었던 숨이 이제야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 언제 왔어요? 장벽이 닫혀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왔으면 내가 있는 숲 쪽으로 오지.”
“그까짓 벽 따위, 부숴버리면 그만이지.”
“그게 뭐예요…….”
지극히 남자다운 대답에 이예주의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덕에 이것이 꿈이 아님을 인지했다.
코끝이 찡하게 아려와 그녀는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 온 걸 알았으면 숲에 안 갔을 텐데. 아! 아래 신전 이 다 부서진 게 혹시 당신 때문에 그런 거…….”
그 순간이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말아야 할 남자의 가슴에서, 비릿한 향이 코끝으로 훅 끼쳤다.
모르고 싶지만 모를 수 없는 향기였다. 지금껏 지긋지긋하게 맡아왔던.
“자, 잠깐…….”
이예주는 천천히 남자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람에게선 언제나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다.
초반에는 그게 참 불만이었는데, 그녀는 이제 그것으로 남자가 허깨빈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는데.
그런데 왜, 어째서 남자의 몸에서 피 냄새가…….
남자의 허리를 짚고 있던 손을 떼자, 제 손이 끈적하게 젖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두운 시야임에도 그것이 물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에요?”
이에주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때가 있었다.
동쪽 대륙에서도, 검은 장포에 가려서 피가 줄줄 새어나오고 있는 것을 바로 눈치 채지 못했던 때.
이예주의 얼굴에서 단숨에 핏기가 사라졌다.
“당신…… 다쳤어요?”
“그렇게 됐군.”
“그렇게 됐다니. 이, 이게…….”
피로 젖은 제 손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자 불현듯 눈시울이 후끈해지면서 순식간에 눈앞이 뿌예졌다.
멀쩡한 남자의 얼굴에 비해 이예주는 과할만큼 퍼들퍼들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이, 이리 와요. 여기 누워요. 여기…….”
“…….”
남자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그런 그의 얼굴에 배부른 사자와 같은 포만감이 일순 스쳐지나갔다.
남자가 다친 일들이 트라우마로 남아 제대로 된 사고를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그녀가 퍽 마음에 든 눈치였으나, 이예주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약을, 약을 가지고 와야 하는데, 약이…….”
“괜찮아.”
그를 눕혀두고 약을 찾는답시고 다시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람이 얼른 잡아챘다.
이예주의 몸이 그의 위로 허무하리만치 풀썩 쓰러졌다.
“보고 싶었다.”
람이 제 어여쁜 것을 품에 꽉 끌어안고 속삭였다.
“네가 다친 곳이 없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좀 놓이는군.”
“……누가 이랬어요?”
숨 막힐 듯 몸을 죄는 팔 안에서 벗어나려고 버르적거리던 이예주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말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 있었다.
“당신을 이렇게 다치게 만들 인간은 없잖아요. 다리족이에요? 누가 그랬어요? 대체 어떤 새끼가……!”
“울지 마.”
람이 불쑥 한 손을 들어 이예주의 뺨을 쓸었다. 소중한 것을 만지듯 그 손길이 조심스럽고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물방울들이 부드럽게 그의 손가락으로 흡수 되었다.
“왜 울고 그래. 이런 조잡한 것으론 죽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지 않아.”
“흐으…….”
남자의 다독임에 그제야 억눌렸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쪽 대륙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예주는 그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람이 다치고, 피가 줄줄 내리흐르는데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당장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너무 끔찍했다.
그것은 람이 어떤 일이 있어도 쉽게 죽지 않을 인외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감정이었다.
아직도 간헐적으로 떨리는 그녀의 몸을 좀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울어.”
“다치지, 다치지 말라고 했잖아요.”
“예주야.”
“당신이랑 떨어져 있으면 내가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운데. 대체 왜 이렇게 몸을 함부로 해요, 왜! 약속했잖아요, 다시는 다쳐 오지 말라고. 근데 왜, 누가…….”
한참을 흐느껴 우는 이예주를 달래며 람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계획했던 일이 완전히 틀어졌다.
그녀에게 다친 것을 보여주기 위해 뚫린 겉가죽을 일부러 재생하지 않고 피가 계속 흐르도록 놔두었다.
인간 놈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그녀의 동정심을 이끌어내어 또 한 번 제 곁에 남기를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것은 신체도, 정신도 나약하기 그지없으니까.
제가 다친 것을 보면 마음 여린 인간 여자는 분명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못하겠지.
그러면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안을 파고들어 제 에너지를 흩뿌리는 것이다. 다시는 도망갈 수 없도록.
하지만 어린 것이 이토록 경기를 일으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입새를 비집고 또다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 보자마자 뼈째 씹어 먹으려 했는데 하나도 자라지 않았군.”
“뭐, 뭐요?”
“여전히 울보잖아.”
“악! 뭐, 뭐하는 거예요?”
잡아먹을 기회를 놓친 사내는 심술부리듯 제 연인의 귀여운 코를 꽉 쥐고 잡아당겼다.
미간이란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진 못난 얼굴에도, 어쩐지 람은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나?”
“이, 이거나 놔요! 놓으라고요!”
고통과 수치스러움 때문에 이예주의 눈 두 덩이에서는 금세 눈물이 말랐다.
그녀는 한참을 버둥거리고 나서야코를 꽉 움켜쥔 손에서 벗어났다.
아예 남자의 품에서 벌떡 일어난 이예주는 서슬 퍼렇게 그를 노려보며 씩씩 거렸다.
“잘 지내? 잘 지냈냐고? 지금 그런 태평한 말이 나와요?!”
퍽, 하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아까 달려들어 안길 때는 분명 아픈 티를 냈던 것 같은데, 어째 그녀의 일격에도 남자의 얼굴은 끄떡없었다.
‘이 자식, 혹시 일부러……?’
스산한 생각에 이예주는 다시 한 번 주먹으로 남자를 때렸다.
방금 전 내리친 곳보다 환부에 가까운 아래쪽을 쳤지만 역시나 놈은 미동조차 안했다.
이예주의 얼굴이 단숨에 흉악해졌다.
“이, 이 나쁜 놈아! 다치지 않겠다고 나랑 막무가내로 계약하더니 이렇게, 이런 꼴로 오면 어떡해!”
그녀는 본격적으로 미친놈의 가슴을 마구 내리쳤다.
아기가 품에서 꼼지락 거리듯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었지만 람은 슬며시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엄살을 부렸다.
“아파.”
“아프긴 뭐가 아파요! 진짜 칠 게 없어서 그런 장난을 쳐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정말!”
이예주는 분이 풀릴 때까지 람의 어깨와 등을 두드리다가 제 풀에 지쳐 헥헥 거렸다.
아기자기한 그 모습에 남자가 나직이 웃었다.
“웃어……?”
그녀가 금방 흰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았다.
그러나 람은 자꾸만 몸 한 구석이. 아니, 배꼽 밑이.
아니, 가슴속이 간지러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