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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284)화 (286/319)

눈족 족장은 평정을 찾기 위해 애써 주름진 입매를 들어 올렸다. 

놈의 농간에 속아나는 것이다. 

“제가. 모든 과거를 볼 수 있는 제가 모를 리,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데리고 다니는 분이 눈족이라면. 설사 오른쪽 눈이라면, 그것을 제가…….”

“시간의 환생이든, 오른쪽 눈이든 그런 건 더 이상 상관없다.”

“…….”

“어차피 그것은 내 것이야.”

들끓는 새빨간 동공에서 지독한 소유욕을 엿본 족장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그들이 그토록 연연하고 중요히 여겼던 것들이 사실상 검은 파편에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구역질이 나는 냄새군.”

문득 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움켜쥐었다. 

인간들을 향한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가 담겨있었다. 

“인간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건 이예주 하나 뿐이야. 그것은 앞으로도 죽을 일이 없을 테니까. 네놈들이 그토록 바라왔던 멸종을 막았으니 기쁘지 않나?” 

“…….”

“하지만 썩어 들어가는 것들은 내 몸체에서 필요 없지.”

족장을 제외한 인간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가 자신들을 당장이라도 공격할까봐 겁에 질린 것이다. 

그 꼴 같지 않은 모습에 그의 입가에 맺힌 서늘한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또다시 내 것에 손을 댄 것을 알았을 땐 다 쓸어버리려고 했는데…… 지금 네놈들의 꼴을 보아하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 생각이 바뀌었다.”

“…….”

“지금껏 그래왔듯 알아서 자멸하도록. 알았나?”

더 이상 남은 이야기는 없다는 듯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곧 어여쁜 것이 돌아오겠군.”

그때였다. 눈족 족장이 품에서 번쩍 빛이 나는 것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노인답지 않은 빠르기로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렸다.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푸욱- 살덩이를 가르고 쑤셔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족장이 음침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고 물러섰다. 

노인의 웃음만큼 비린 내 나는 시뻘건 물들이 그의 손바닥에서 뚝뚝 떨어졌다. 

깨끗했던 족장의 회색 로브가 금세 흉흉한 색으로 물들었다.

헉, 장로들의 입에서 저마다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족장이 드디어 미친 것이다. 

고개를 조아려도 모자랄 마당에 검은 파편을 찌른 것이다. 

다가올 검은 파편의 분노에 장로들의 낯빛이 새까맣게 죽었다.

“이제 제법, 성공이라 할 만하지 않습니까?”

족장의 지껄임에 람이 아래를 내려 보았다. 배 한가운데에 장포를 뚫고 검은색의 단도가 박혀 있었다. 

굳이 빈틈을 보이지 않아도 앉은 자리가 가까웠기에 족장이 칼을 쑤셔 넣는 것이 수월했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람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저 족장을 마주보며 귀신같이 씨익 웃었다. 

비열함이 그득했던 족장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족장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람은 손을 뻗어 제 배에 박힌 칼을 빼내었다. 

모든 이들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천천히, 느릿하게. 

“아, 아아…… 이것마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족장은 침음했다. 

람은 그 쭈글쭈글한 얼굴 앞에 배에서 뽑아낸 검은 칼을 들어 보였다. 

뜨끈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칼은 지난밤에 막 완성된 것이었다.

부스스스. 후드를 뒤집어 쓴 족장의 머리 위로 검은색의 가루가 모래처럼 쏟아져 내렸다. 

7장로를 갈아 넣은 칼은 검은 파편의 손아귀에 가루가 되어 허무하게 부스러졌다.

“이번에도 실패군, 쟈니아.”

마지막 평정심을 잃고 족장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절망한 인간의 얼굴.

“아니, 아직 숨이 붙어있던 아내를 뜯어먹고 살아남은 남족장이라 불러줘야 하나?”

그것이 바로 검은 파편의 유일한 재미거리이자 기쁨이었다. 

*       *       *

“거기 누구 있소?”

컴컴한 계단 속에서 튀어나온 인영은 족장이나 쟈니아는 아니었다. 

다행이라면 천만 다행이었지만 처음 보는 우락부락한 사내가 반가운 것은 전혀 아니었다.

“누구쇼?”

이예주는 주춤 물러서며 경계했다. 

낯선 사내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광 빛이 닿는 자리까지 걸어 온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동상 걸릴 것 같은 이곳에서 천조가리 같이 낡고 더러운 민소매와 반바지를 걸친 남자는 커다란 쇠망치를 어깨에 짊어 메고 있었다.

엄청난 그의 옷차림에 입을 떡 벌리고 있을 즈음, 이예주의 뒤편에 서 있던 베니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릭 아저씨!”

“아니, 너는 베니 아니냐!”

아는 사이인건지 남자가 망치를 쿵, 바닥에 내려놓고 튀어나온 베니를 반갑게 마주했다. 

하지만 베니가 살아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남자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이예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베니, 저분은 또 누구시냐?”

“이, 이 누나는요. 족장님께서 데려오신 그…….”

“아! 이분이 그 구원자……!”

족장이 데리고 왔다는 작은 단서에도 곧 바로 이예주를 알아 챈 남자가 입 밖으로 그것을 내뱉다가 허겁지겁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았다.

“누나, 이쪽은 릭 아저씨야. 우리 아버지랑 같이 대장장이신데 어렸을 때부터 우리 잘 돌봐주신 분이야.”

대장장이라고? 

이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뭔가 얻어 들얼 것이 있지 않으려나? 

반가움이 잔뜩 서린 베니의 얼굴을 보아 족장이나 쟈니아만큼 경계해야 할 인물은 아닌 듯싶었다. 

이예주는 쭈뼛쭈뼛 다가서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시오.”

이예주를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릭도 마주 인사했다. 

그리고 그는 베니에게 몸을 돌려 속사포처럼 물었다.

“그런데 베니, 네가 어떻게 아직도 신전에 남아 있는 거냐? 잠깐 쇠를 캐러 간 사이 네 아버지는 죽고 너희 남매는 신전으로 끌려갔다는 소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리즈랑 저한테 능력이 발현돼서 남게 되었어요.” 

“느, 능력이 발현됐다니! 그게 참말이냐?”

덩치와 맞지 않게 놀란 가슴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던, 남자는 베니의 대꾸에 단번에 사색이 되었다. 

이예주는 기민하게 눈을 빛냈다. 

확실히 대장장이라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듯 해보였다.

그런 이예주의 눈초리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릭은 베니의 양 어깨를 잡고 다그치듯 소리쳤다.

“족장님은! 족장님도 이미 알고 계시는 거냐?”

“어. 네, 네! 족장님께서 직접 남으라고 지시하신걸요?”

잔뜩 당황한 베니의 대꾸에 험악했던 릭의 얼굴이 한순간 침울해졌다. 

그는 커다란 주먹으로 제 이마를 쾅쾅 내리치며 괴로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안하다, 베니. 내가 너희를 책임지고 돌봤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아저씨! 아저씨도 돌봐야 하는 가족이 있잖아요.”

베니가 손사레까지 치며 부정했지만 그의 얼굴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자책하던 릭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제 정신을 차렸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여긴 절대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야. 특히 너와 리즈는 더더욱!”

“그게…… 저희 앞집에 살던 토마스 기억하시죠? 저희랑 같이 신전에 남게 되었는데, 간밤에 토마스가 사라졌어요. 토마스를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통로를 발견해서 내려왔는데 여기였던 거예요.”

“토마스는…….”

베니의 설명에 릭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예주는 그가 토마스의 행방을 알 것이라 확신했다.

“토마스는…… 베니. 토마스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해라.”

하지만 돌아오는 릭의 답은 이예주도 베니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껏 둘의 재회에 침묵하고 있던 이예주는 서둘러 개입했다.

“저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죽은 것도 아니고 죽었다고 생각하라니요.”

“그, 그게…….”

“토마스 어디 있는지 봤죠? 그렇죠, 아저씨?”

이예주가 마구 몰아붙이자 릭은 눈에 띄게 난감해했다. 

그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베니가 덥석 그의 두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아저씨. 토마스 어디 있어요? 알려주세요, 아저씨.”

“나, 나는…….”

“아저씨, 제발요! 여긴 어디에요? 대체 저 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몰라! 나는 몰라! 난 정말 모르는 일이야!”

하릴없이 동공을 흔들던 릭은 끝내 베니의 손을 뿌리쳤다. 

답할 수 없는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그는 되레 베니와 이예주를 끌어당겨 계단 쪽으로 마구 밀기 시작했다.

“아!”

“그만 저분을 데리고 돌아가라, 베니!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아, 저기요! 자, 잠깐만요. 밀지 마요!”

“어서 베니를 데리고 돌아가시오! 여긴 정말 위험한 곳이오! 만약 족장이 당신과 베니가 여기에 온 것을 알았다간……!”

갑자기 돌변한 남자의 무지막지한 힘에 이예주와 베니는 속절없이 통로 입구까지 떠밀렸다. 

아, 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이렇게까지 사색을 하며 내쫓는 건데!

“아 알았어요! 갈게요! 잠시만! 잠시만!”

이예주는 입구 벽을 잡고 간신히 버티며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브레든도 보았어요? 브레든 아시죠? 누나 이름은 알리자린인데, 머리 막 빡빡 밀고! 왜 얼마 전에 눈족 족장이 데리고 왔다던……!”

릭이 크게 흠칫했다. 

알고 있는 거 맞네! 

이예주는 확신했다. 닫혀있는 문 너머에 토마스도, 브레든도 있는 것이다.

“아저씨! 브레든 본거 맞죠? 걔네 여기 있죠? 그렇죠? 갈 테니까 그것만 말해줘요!”

“나, 난 잘 모르오!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이예주가 릭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이 베니가 쪼르르 그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 들었다. 

하지만 그가 덩치에 맞지 않게 재빠른 몸놀림으로 다리를 옮겨 막았다. 

그리고 버럭 소리쳤다.

“베니, 너도 어서 가지 못해!”

“리, 릭 아저씨! 잠깐만요. 토마스가……!”

“가! 할 수 있다면 리즈 데리고 여길 떠나라. 장벽 밖으로라도 나가야 돼!”

“아 밀지 마요, 잠깐만요!”

“다신 여기 오지 마시오! 특히 베니나 리즈를 데리고는 절대!”

집어던지듯 두 사람을 계단 위로 올려놓은 남자가 지옥의 수문장처럼 계단 통로를 커다란 몸으로 떡 막았다. 

저래서야 어디 틈을 뚫고 들어갈 엄두조차 못 낼 것이다. 

“그만 가자, 베니.”

이예주는 헥헥,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베니에게 말했다. 

미련이 남는 듯 못내 릭이 버티고 서있는 뒤를 돌아보며 베니는 시무룩한 얼굴로 이예주를 따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온실 뒤뜰로 되돌아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상태였다. 

이예주와 베니는 나올 때 풀어뒀던 쇠창살이 자물쇠를 채운 후 서둘러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온실을 지나 문을 열었을 때 복도는, 아니 신전 내부는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헐. 이, 이게…….”

군데군데 설치되어 액자와 조각상 같은 것들이 바닥으로 온통 다 떨어져있는 것은 물론이고 석고로 이루어진 벽과 문 또한 부서져 있었다. 

파죽지세처럼 금이 가 있는 바닥에는 파손된 기물들과 석고가루가 뒤엉켜 지저분했다.

“아까 그거 지, 지진 난건가?”

“리즈!”

신전 안에 두고 온 어린 동생 생각에 베니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멀쩡한 온실 안에 리즈가 없었다.

“얼른 가보자!”

등불이 대부분 떨어져 깨졌기에 신전 내부는 바깥 못지않게 어두웠다. 

그나마 복도 끝, 홀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주변을 구분할 수 있었다. 

뛰다시피 걸어 폐허 같은 복도를 벗어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무리의 눈족 인간들과 방금 지나온 복도보다 더 심각하게 부서져있는 제단이었다.

기둥과 기물들이 마구 부서져 있는 홀은 한 눈에봐도 무너지기 직전 같았다.

“허, 이게 대체 어떻게…….”

이예주는 기함했다. 

이렇게 커다란 지진이 신전을 덮치는 동안 자신이 있던 숲은 그저 땅이 진동하는 것 외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부서진 제단 앞에 처참한 얼굴로 서 있던 한 무리의 인간들이 그녀와 베니의 인기척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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