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83)화 (28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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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 난리 속에도 신전의 식당은 비교적 멀쩡했다. 

식당이 아닌 안쪽에 있는 다른 예배당들도 멀쩡한 편이었지만 검은 파편을 여신에 대한 예배를 드리는 곳에서 접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때문에 눈족 족장과 다섯 장로는 식당으로 객을 안내했다. 

자리를 채 권하기도 전에 람은 원래 제 자리가 그곳인 양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며칠 전 이예주가 ‘구원자’ 라는 임시 신분으로 앉았던 자리였다.

“앉지.”

외양으로만 본다면 눈족 족장과 장로들은 남자보다 훨씬 늙었다. 

그런 그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오만한 말투에도 표정을 찌푸리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눈족 족장이 람의 옆자리에 먼저 앉자, 다섯 남은 장로들도 잇따라 우루루 제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그 틈에 족장의 하나 뿐인 후계자인 쟈니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회장은 개미새끼 지어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숙연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눈족의 주요 인간들 머리위로 이윽고 시뻘건 눈을 가진 사내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다리족 놈들이 재밌는 것들을 가져왔더군.”

“벌써 확인하셨군요.”

모두를 대표해 족장이 조용히 답했다. 

람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래. 그간의 쓰레기들에 비하면 이번에는 좀 쓸 만 한 것을 만들었던데.”

“…….”

“부상당하는 신인류들이 속출해서 분위기가 꽤 뒤숭숭해졌어.”

그의 말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장로들이 한 차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눈이 희열로 번뜩였다. 

다리족의 실험체로 붙잡힌 9장로를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힘이 장로들을 3명이나 희생하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것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검은 파편의 입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으니 어찌 희열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족장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했다. 

“아직 멀었지요.”

“그렇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원히’ 였지만 람은 정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등받이에 상체를 편이 젖히며 느른하게 웃었다.

“이미 승기가 어느 쪽으로 넘어 왔는지는 네놈들도 알고 있겠지. 복구된 땅에서 새로운 신인류들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다. 반면에 다리족들은 남아 있는 총탄들마저 모두 떨어졌지. 오죽하면 남쪽 대륙에 처박혀 아무것도 못하는 너희들에게까지 도움을 구걸할까.”

“…….”

“얼마 전에는 통제도 하지 못하는 히카톤들을 꺼내왔다. 예상대로 얼마 남지 않은 아군들을 몰살했더군. 멍청한 것들.”

“…….”

“곧 전쟁이 끝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태연함을 유지하던 눈족 족장의 주름 진 얼굴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동쪽 대륙은 지금 피와 살이 터지는 전쟁터였다. 

인간들과 신인류들이 공존하던 중간 지대. 

전쟁의 시초는 본디 해안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시간족이 아닌 일반인들과 신인류들의 알력다툼이었다. 

누가 동쪽 대륙을 차지하느냐. 그것은 전쟁보다는 지배의 우위를 선점하려는 종족간의 개싸움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와서 누가 지배 계층이 되느냐는 무의미해졌다. 

하루아침에 동쪽 대륙은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대륙이 붕괴되어 푹 꺼졌다. 

그 자리로 해일을 동반한 바닷물이 범람했다. 

마을에서 살던 수많은 인간들과 신인류들이 죽었다. 

하지만 붕괴된 대륙은 곧 다시 복구되기 시작했고, 검은 파편은 신인류들을 복구되기 시작한 땅으로 옮겨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다. 

반면에 인간들은 뜬금없는 천재지변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그 영향이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까지 미칠 세라 다리족이 서둘러 개입했다. 

그리고 종족간의 단순한 알력 다툼이 아닌, 체계적인 군대가 조직된 전쟁이 시작됐다. 

신인류들과 인간. 정확히는 검은 파편과 시간족의 전쟁이었다. 

“……끝날 때까지 끝이라고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

“당신도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던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한낱 미물에 불과하던 저희 일족이 어떻게 살아남게 됐는지…….”

얼마간의 침묵 끝에 눈족 족장이 희미한 웃음을 띠며 답했다. 

어느 때를 뜻하는지 모호했다. 

수 세기 전 검은 안개를 빼앗아 살아남았을 때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천 년 전 용암 대폭발에서 살아남았을 때를 말하는 것인지. 하지만 어느 때건 상관없었다. 

람이 상체를 일으켜 방탕하게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깍지를 낀 양 손을 식탁 위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눈족 족장에게 물었다. 

“내가 왜 다른 시간족 놈들과는 달리 여태껏 너희들을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살려뒀는지 아나?”

족장에게 못 박힌 핏물 같은 눈이 형형히 빛났다. 장로들이 한차례 술렁였다. 

“우리를 죽이면 A급 개체의 끔찍한 히카톤들이 다량으로 나타날 겁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물론이고 신인류들까지 온전치 못할 겁니다……!”

장로들이 덜덜 떨며 자신들이 믿는 유일한 패를 드러냈다. 

그가 여태껏 눈족들을 살려두는 이유는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더럽혀진 검은 안개를 가지고 있는 눈족은 죽으면 히카톤이라는 끔찍한 괴물로 변했다. 

히카톤은 비단 인간뿐이 아니라 동식물, 살아 있는 것들이란 모조리 먹어치웠다. 

특히 많은 것을 먹어 치워 온 눈족 장로들은 거대 개체로 변하기 십상이었다. 

제 아무리 전지전능한 검은 파편이라도 가만있는 시한폭탄을 쉬이 건드릴 수는 없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남자의 말은, 남자의 시뻘건 눈은. 당장이라도 너희들을 쓸어버리고 싶지만 가까스로 참고 있다는 듯 폭력적인 빛을 띠고 있는가.

“신인류들을 잡아먹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다신 지상으로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네놈들이 파놓은 구덩이 속에 쓸어 넣으면 되지. 하지만 이미 죽은 것들을 두 번 죽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않나.”

“헉. 그, 그게…….”

“여기서 살아있는 것들이 몇이나 되는 것 같지?”

“무슨…….”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는 인간이 몇이나 되는지 아냐 이 말이야.”

남자의 붉은 눈이 장내의 모든 인간들을 쭉 훑었다. 

그의 눈과 마주한 몇몇 장로가 ‘히익’ 숨을 집어먹으며 허겁지겁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첫 시작이었던 족장에게로 눈을 고정하며 람이 통보했다.

“너흰 이미 오래전부터 죽은 몸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족장의 옆자리에 앉은 장로 한 명이 몸을 크게 들썩였다. 

며칠 전 겨드랑이 밑에 새로운 군식구가 생겨 족장에게 신인류의 피를 갈구하던 3장로였다.

족장이 한 손을 들어 눈에 띄게 동요하는 그를 저지했다. 

늙은 족장은 예의 그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이렇게 살아서 검은 파편님과 대화도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천 년 간, 네놈들이 썩어 들어가는 몸뚱이를 가지고도 살아남겠다고 버러지처럼 기어 다니는 꼴을 보는 것이 내 유일한 기쁨이었다.”

마침내 족장의 입이 다물렸다. 

모든 것을 꿰뚫듯 직시하는 붉은 눈앞에서 차마 썩어 들어가는 몸뚱이마저 부정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욕심이 눈을 가려 희망이라 믿었던 것들이 터무니없는 허상임을 깨닫지 못하겠지. 그것을 붙들고 버르작 대다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꼴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거든.”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람의 입 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피식자를 앞에 두고 한껏 여유를 부리는 포식자의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 아래 태연했던 족장의 얼굴은 딱딱히 굳었고 몇몇 장로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굳이 손을 댈 필요조차 없었다. 에너지를 보존한답시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까지 알아서 머릿수를 줄여나가니 조금만 기다리면 곧 자멸할 것이 아닌가.”

“…….”

“게다가 하나뿐인 구원자마저 내게 빼앗겼지 않아.”

남자의 마지막 말에 이번에는 모든 장로들이 동요했다. 

그들의 시선이 입을 다물고 있는 족장에게로 쏠렸다. 

구, 구원자라니! 

족장이 확언했다. 숲에서 납치해온 인간 여자는 그가 내린 예언 속의 구원자가 아님을. 

지금껏 구원자란 존재는 시간족들의 잇속에 따라 이용되어 왔다. 

언제 멸종이 될지 모를 숨 막히는 나날들을 살아남고 있었다. 

두려움에 들썩이는 인간들을 단합하게 만들려면 마땅한 영웅이 필요 했다.

다리족이 구원자 구출 계획으로 미쳐버린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막은 것처럼. 

눈족 또한 모든 힘이 신전에 집중되어 있는 기이한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그에 의문을 품는 이가 없도록 하기 위해 구원자란 존재를 요긴하게 써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도구로써의 상징이었지 정말로 예언 속의 구원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재앙의 마지막 순간, 검은 파편의 곁에 있는 인간 여자. 검은 파편을 소멸하여 모든 인간들을 지옥 불에서 구원하고 신이라 불리리라.”

정말로 예언 속의 구원자가 제가 데리고 다니던 계집이라고 믿었던 것인가. 

족장은 아둔한 검은 파편의 모습에 다시 얼굴 만연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서도 감쪽같이 그 속내를 감추고 공손히 대꾸했다.

“제가 본 미래의 구원자는 최후의 순간에 당신 곁에 있는 이를 칭하는 것입니다. 아직 대 재앙의 마지막 순간이 오지 않았으니 당신이 데리고 다니는 인간이 구원자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필요할 때는 내게서 잘도 훔쳐가서 써먹더니, 쓸모가 다하니 이젠 그냥 인간인가?”

“잘못 풀이된 예언이 퍼져버린 것은 저 또한 무척 유감이었습니다.”

“주둥이만 살아있군.”

람이 눈을 번뜩였다. 

살이 떨릴 만큼 살벌한 기운이 족장에게 쏟아 졌으나 늙은이의 낯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두 인물의 대화를 지켜보며 숨을 죽이는 것은 나머지 장로들뿐이었다.

한차례 치열한 공방이 지나가고, 람은 내뿜었던 살기를 거둬들이며 조소했다. 

“그럼 묻지. 너는 누가 나를 소멸할 구원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당연히 여신의 환생체가 아니겠습니까?”

“너희들의 신은 죽었다.”

인간들이 반박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람은 단언했다. 

인간들의 시간은 죽었노라고.

“다시 태어날 수조차 없도록, 네놈들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서 뜯어 먹지 않았느냐.”

소름 끼치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장 내에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족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서서히 희뿌옇게 변하는 족장의 동공을 보며 람은 비릿하게 웃었다. 

부정해오던 과거를 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를 그나마 구원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있는 존재가 이예주 뿐이지 않은가? 혹시 모르지. 내가 그 어린 것을 끔찍이 여겨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

“그런 것을 내게서 훔쳐 가지고 왔으니 그동안 극진히 대접 했겠지.”

람이 일순 날카로운 눈으로 인간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자신에게 닿을 때마다 장로들이 마른 침을 꼴깍 꼴깍 넘겨 삼켰다. 

족장이 어느 날 숲에서 데리고 온 여자를 장로들은 제대로 마주한 적도 없었다. 

심상치 않은 전류 때문에 장로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여자의 처우는 대사제가 맡겠다고 나섰다. 

구원자도 뭣도 아닌,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는 여자라 하더니 왜 검은 파편의 모든 이야기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가.

장로들이 눈치를 보며 족장을 곁눈질 했다. 

하지만 여자를 데리고 온 당사자는 검은 파편의 물음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득한 허공을 바라보는 족장의 모습에 다섯 남은 장로들은 탄식했다. 

“그, 그분은……!” 

이지가 사라진 듯한 족장을 대신하여 그의 맞은편에 앉은 2장로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우, 우리는 아직 그분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또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시, 시간족이 아닌 일반인이기도 하고요.”

3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헐레벌떡 첨언했다. 

맞습니다. 그녀는 시간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다른 장로들 또한 너도나도 입을 열어 이예주와 시간족의 관계를 부정했다.

람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

“…….”

“시간의 힘이 담긴 오른쪽 눈은 먹지 못했잖아. 그것이 이예주일 수도 있지.”

“그럴 리가!”

그 순간, 마침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을 마친 족장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렇다면 미래를 보는 눈족이 태어 날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글쎄. 내가 마지막으로 본 오른쪽 눈은 네놈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으로 굴러갔던 거 같은데.”

족장의 눈에 부득 핏발이 섰다. 

람은 깍지를 풀고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놀리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의 신이 죽지 않았다고 치더라도. 오른쪽 눈이 없는데 어떻게 완전한 환생체가 태어날 수 있지?”

“그럴 리 없어!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내가 본 과거는! 내가 얻은 과거에서는……!”

장로들이 다시 술렁이자 족장이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검은 안개를 뜯어먹느라 정신이 팔린 족장 대신, 그의 탐욕스러운 아내가 굴러가는 오른쪽 눈을 부득불 따라가 주워 먹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그것이 눈족과 관련 없는 한낱 계집 따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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