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왔을 때와는 달리 미끄러지듯 계단 밑으로 내려선 이예주는 다시 겅중겅중 뛰며 힘겹게 베니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위태롭게 쌓여 있는 돌덩이들을 돌아 몸을 있는 대로 수그려야 하는 공간이었다.
“왜?”
“여기 봐, 누나. 이 주변만 깨끗해.”
베니의 말이 맞았다.
성인 두 명 정도 서 있을만한 폭의 네모난 돌바닥 위로 유독 다른 잔해 없이 깨끗했다.
어두운 시야임에도 불구하고 용케 그것을 알아차린 베니의 눈썰미에 감탄하며 이예주는 쭈그려 앉았다.
자세히 훑어보았지만, 다른 바닥과 별 다를 게 없었다.
먼지와 흙이 잔뜩 껴 지저분하고, 오랜 세월에 마모 된 돌에는 금이 잔뜩…….
“응?”
문득 대수롭지 않게 스쳐지나간 것이 이예주의 눈길을 끌었다.
이예주는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못 박았다.
부서지고 오래되어 금이 간 건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보니 좀 이상했다.
돌바닥에 난 균열이 한 일자로 일정했다.
“균열이…….”
“왜? 뭐가 있어, 누나?”
그녀의 중얼거림에 베니가 덩달아 몸을 수그렸다.
이미 이예주가 차지하고 있는 협소한 공간에 낑겨들려 하자 아무리 체구가 작은 베니여도 벽에 몸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예주를 따라 빠르게 상체를 숙이던 베니는 문득 후드에 무언가 걸려 턱하고 목을 죄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왜, 왜 그래?”
“뭐, 뭐에 걸렸나봐. 움직이기가…….”
후드가 위로 팍 솟은 어정쩡한 자세로 베니가 몸을 뒤틀었다.
걸린 옷을 빼내기 위해서였지만 영 요지부동이었다.
위에서부터 부스스, 돌가루가 떨어졌다.
자칫하다간 그들 주위로 쌓여 있는 돌덩이들이 무너져 내려 그대로 깔려 죽을지 모른다.
“잠깐, 기다려봐. 도와줄게.”
이예주가 잔해들에 몸이 닿지 않게 조심조심 일어났다.
베니의 옆에 서자 벽에서 튀어나와 있는 날카로운 철심이 그의 후드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 움직이지 마. 위험하니까.”
이예주는 손을 뻗어 철심에서 옷자락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갈고리처럼 휘어져 있는 철심 끝에 단단히 걸렸는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철심을 꽉 쥐고 몇 번 힘을 줘 후드를 뜯어내려 들던 때였다.
불현듯 덜컥 소리와 철심이 위로 휘어졌다.
쿠구우우―
그와 동시에 이예주가 방금 전까지 밟고 서 있던 균열이 난 돌바닥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뻥 뚫린 네모난 구멍이 나타났다.
“뭐, 뭐야?”
어두운 통로 아래에 나선형 계단이 보였다. 이예주와 베니는 뜬금없이 나타난 비밀 통로에 입을 떡 벌린 채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잘 빠지지 않던 베니의 옷자락은 철심이 위로 들리면서 허무하리만치 쉽게 빠져버렸다.
철심이 아니라 상하 수동개폐 장치였던 것이다.
“허. 진짜 뭐가 있긴 있었네.”
이예주는 헛웃음을 지으며 혼잣말했다.
우연히 베니의 옷자락에 걸리지 않았다면 균열이 있음을 이상하게 여겼어도 끝내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잘했어.”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베니의 머리에 툭 손을 한 번 얹은 이예주는 먼저 어두운 통로 속 계단에 발을 내렸다. 경사가 가팔랐다.
경사가 가팔랐던 비밀통로는 여기 외에도 하나 더 있었다.
팔족 족장의 저택, 서재에 있는 통로였다.
그곳은 심지어 이상한 물들마저 뚝뚝 떨어져서 계단이 무척 미끄러웠다.
그나마 이곳은 미끄럽진 않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걸까.
“누나.”
베니가 그녀를 불렀다.
컴컴한 통로 속을 망설임 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이예주가 놀라웠던지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 댕그랗게 떠져 있었다.
“벽 잡고 조심히 따라와. 어두워서 발 잘못 놀리면 위험해.”
나지막이 말하던 이예주는 왠지 자신이 무슨 비밀통로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울적해졌다.
* * *
나선형의 계단은 정말이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한지 얼마 가지도 않아 통로의 입구에서 새어나오던 희미한 빛이 끊겼다.
컴컴한 어둠 속을 헤매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다행이도 계단의 폭이 무척 좁아 울퉁불퉁한 벽을 짚고 충분히 내려 갈 수 있었다.
“누나.”
지금껏 나이에 비해 의젓하게 행동해왔지만, 역시나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 그것도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무섭긴 했는지 베니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유 없이 이예주를 불렀다.
“응.”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어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였지만, 이예주는 귀찮은 내색 없이 부르는 족족 답을 해주었다.
그녀 또한 제 뒤를 따라 내려오는 베니의 존재에 무척 안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혼자서 이 어둠을 헤치려 했다면 분명 얼마 못가 패닉 상태에 빠져 오도 가도 못 했을 것이다.
이예주에게 암경과 같은 어둠은 모두 숨을 조이는 트라우마 였기에.
다행히 어둠에 차차 눈이 익었다. 하지만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악조건 속에서도 재게 몸을 움직였지만 아무리 내려가도 계단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땅을 판 거야…….”
동쪽 대륙의 지하 탄광굴보다 훨씬 깊게 느껴졌다.
이러다가 천 년 전 인간들처럼 땅을 끝없이 파고들어 내핵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스운 생각이 들 때쯤, 아래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다 온 것 같아.”
이예주는 서둘러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비좁고 답답한 나선형 통로를 허겁지겁 뛰쳐나오자 보상이라도 하듯 널따란 공간이 존재했다.
끝에 도달한 것이 확실한지 더 이상의 길이나 계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만 다행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이예주를 따라 허겁지겁 어둠 속에서 뛰어 내려온 베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 또한 전혀 처음 오는 공간인 듯싶었다.
왜 이렇게 베니의 얼굴이 잘 보이는 거지, 하던 이예주는 벽에 온통 빛이 나는 봉들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야광봉?”
마치 동쪽 대륙의 지하 굴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어두운 동굴을 밝히기 위해선 등불이 필요했지만, 불과 맞닿으면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검은 안개 때문에 뤼미에르 꽃으로 광원을 대체 했던 것처럼 눈족들의 비밀 장소에는 빛나는 꽃 대신 현대 문명으로 대체 되어 있었다.
벽 사방에 형광 빛으로 발하는 야광봉 덕분에 시야는 낯선 공간을 둘러보기 충분했다.
탑의 지하는 생김새 또한 동쪽 대륙의 지하와 별 다를 바 없었다.
투박한 굴 같은 모양새였다. 이예주는 작지 않은 크기의 굴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한쪽 구석에 무언가 거무튀튀한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혹시…… 거, 검은 안개?
또 다시 악몽이 되풀이 되는 아찔한 감각을 무릅쓰고 그녀는 주춤주춤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건…….”
빛이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구석이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관찰해야 했다.
구석에 제 허리만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들을 예의주시하던 그녀는 곧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칼 조각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리족 인간들이 잊혀진 신전으로 가는 숲길에서 가지고 나왔던 자루.
그 안에 있다가 튕겨져 나오며 산산 조각난 검은색 칼.
쌓여져 있는 검은색 쇳조각들은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쟈니아의 말을 빌리자면 모두 ‘실패물’들 이리라.
‘제대로 찾아 왔구나.’
산처럼 쌓여 있는 그것들을 본 순간 이예주는 직감했다.
이곳이 바로 눈족들이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이자, 모든 비밀이 묻혀 있는 곳이란 걸.
“예주 누나.”
그때 그녀처럼 동굴 안을 둘러보던 베니가 그녀를 불렀다.
이예주는 쌓여 있는 무기 조각들에서 시선을 돌렸다.
베니가 굴의 한가운데에 서서 앞쪽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그녀또한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빠져 나온 계단의 정 반대편 동굴 벽면이 거대한 돌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이야.”
벽에 새겨진 문양이 야광봉의 빛을 받아 형광 색깔로 오묘하게 빛났다.
부분, 부분 빛이 닿지 않는 곳도 존재했기에 곧 바로 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벽에 새겨진 것은 신전 1층에 있는 것과 똑같은 거대한 크기의 시간의 여신이었다.
한 손에 검은 파편을 쥐고, 이번에는 착각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한 각도의 삼지창으로 손에 쥔 검은 파편을 겨누고 있는 여신.
문양을 정 대칭으로 가르며 희미한 균열이 보였다.
이예주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 너머에 무언가 존재할 것이란 건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균열만 없으면 벽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평평했다.
여신의 치맛자락이 새겨진 쪽을 슬쩍 손으로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최종 관문이라 이건가…….”
하기야 놈들이 그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뒀더라면 애초부터 이렇게 은밀하고 깊숙한 곳에 이런 공간을 숨겨 둘 리 없었다.
무려 다 무너진 탑 아래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를 뒤따라온 베니가 문양 주변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들어가지?”
“이것도 뭔가 숨겨진 장치가 있지 않을까?”
“장치?”
“응. 위에서도 그랬잖아.”
그냥 튀어나온 철심으로 감쪽같이 둔갑한 수동 장치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던가.
하여간 눈족 놈들. 아니, 시간족 놈들은 하나같이 음침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물론 베니랑 리즈 빼고.
“팔을 크게 벌려서 손으로 벽 한 번 쓸어보자. 넌 왼쪽으로 가. 난 오른 쪽으로 갈게.”
이예주가 모처럼 답이란 것을 내보았다.
베니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곧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이예주도 서둘러 벽을 샅샅이 짚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처럼의 아이디어를 낸 것이 무색하게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짚이지 않았다.
결국 끝과 끝에 달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쪽에 뭐 있어?”
“아니. 누나는?”
이예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 하는 건가.
사실 이곳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훤한 대낮에 길을 나섰지만 빛 하나 들지 않은 컴컴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베니 남매의 저녁 시간도 있으니 해가 저물도록 계속해 머물 수는 없었다.
“오늘은 그만 가고 내일 다시 오자.”
이예주는 문에서 등을 돌리고 다시 올라갈 채비를 했다.
내려 올 때도 그토록 숨막히고 길었던 나선형 계단을 이제 다시 거꾸로 오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완 달리 베니는 고지를 눈앞에 두고 돌아서기가 영 힘든지 선뜻 가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번만 다시 훑어보면 안 될까, 누나?”
“이러다가 누군가 눈치라도 채면 어떡해. 너무 오래 지체했어.”
“그래도 여기에 바로 토마스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예주는 시무룩한 그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를 필사적으로 찾아보려는 베니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이해가 가는, 참으로 모순적인 기분이 들었다.
“내일은 좀 등불이라도 들고 오던지 해서 찾자. 어두워서 못 찾은 걸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애써 베니를 달랬다. 그 말에 아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문에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빠져나왔던 계단으로 가는 공간 앞으로 다가섰다.
혹시라도 지상 위에 누군가 있을지도 모를 사태를 대비해 이예주가 잠시, 제가 먼저 앞설지 베니를 앞세울지 고민했다.
그 순간이었다.
뚜벅, 뚜벅.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저변에서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헉.”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딱딱하게 얼어붙어 서로를 돌아보았다.
문을 여는 장치를 찾는데 너무 집중을 해서 그런 걸까. 누군가 내려오고 있다는 인기척을 전혀 듣지 못했다.
이렇게 들릴 정도면 꽤 가까이 내려 왔다는 소리였다.
“이, 일단 숨을 곳을…….”
이예주는 핏기가 가신 낯으로 더듬더듬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뻥 뚫린 굴 안에는 숨을 수 있는 자그마한 틈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어, 어떡하지, 누나?”
베니가 새된 비명처럼 속삭였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그 안에 비친 이예주도 피차일반이었다.
그 순간에도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는 정말 지척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소리였다.
이예주는 숨을 죽이고 어둠에 잠긴 통로를 바라보았다.
뚜벅, 뚜벅.
마침내 그들 앞에 발걸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