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81)화 (283/319)

신전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 되었다는 것은 늙은 족장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검은 파편이 직접 당도한 것이고, 이건 다신 오지 못할 기회 일수도 있었다.

그 계집, 별 볼일 없어 보이더니 진짜로 쓸모가 있었잖아. 

족장은 몸을 굽실거리며 입가에 맺히는 비린 웃음을 감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검은 파편이 꿈쩍도 하지 않자 서둘러 표정을 지우고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구원자님께선 신전 안에 계시지 않아 당장 재회하실 수는 없을 듯합니다.” 

“우습군.”

마침내 람이 입을 열었다. 

“버러지 같은 너희들을 다 죽이고 내 것만 데리고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의 힘이 미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손을 쓰는 것이 빠를 수도 있지요. 아직까지 그분은 저희의 근거지 안에 있지 않습니까?”

재미있는 일이야. 람은 저보다 한참 작은 노인을 전혀 재미있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같잖은 협박이었다. 

하지만 신전 뒤편에서 꼬물꼬물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끼자니 마음이 놓였다. 

또 저를 두고 어딜 갔냐며 잔뜩 토라져 있거나, 이곳으로 끌려와 기가 잔뜩 죽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씩씩하게 잘 있던 것 같았다. 

“그래. 놀고 있는 것을 억지로 데리고 올 수야 없지.”

이예주의 개고생을 가볍게 폄하하며 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보다 작은 족장의 정수리에 시선을 못 박았다. 

언제나 그랬듯 족장의 머리 위에는 로브의 후드가 깊게 쓰여 있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는지, 한 번 들어나 볼까.”

족장의 머리, 어쩌면 그 너머를 꿰뚫어보는 검붉은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      *       *

이예주는 베니를 따라 숲길에서 한참 떨어진 곳을 헤맸다. 

인위적으로 나 있는 원래의 길은 잊혀진 신전까지 직진으로 나 있었는데 그들은 중간지점까지만 길을 따라 걷고, 어떤 커다란 나무를 돌아 사선으로 벗어났다. 

길이 나있지 않은 숲은 펭양이 있는 숲처럼 끝도 없는 눈과 빽빽한 나무들뿐이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숲은 의외로 빨리 끝이 났다. 

점점 나무의 밀도가 줄어들더니 더 나아갈 수 없도록 뜬금없이 벽이 나타났다.

“철조망…… 이잖아?”

이예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중얼거렸다.

왜 베니가 쉽게 탈출구에 접근 할 수 없었는지 알만했다. 

이예주의 키의 두 배가 넘는 철조망은 큼지막한 풀과 나무들로 교묘히 숨겨져 있었다. 

눈 때문에 멀리서 보면 그냥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절벽 같았다.

그들이 철조망이 있음을 알아차린 이유는 유독 한 부부분의 얼어붙은 풀들이 시들어 날카로운 철사들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베니가 담담이 제가 아는 정보를 전했다.

“숲 전체를 감싸고 있다고 했어.”

“하.”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기찬 숨을 내뱉었다. 

이것은 누굴 가두기 위한 철조망 일까. 

순록? 아니면 베니처럼 탈출하려는 눈족 아이들?

그녀는 살벌한 철조망에 눈살을 찌푸린 채 베니에게 물었다. 

“탈출구는?”

“여길 따라 걸어가면 곧 나온댔어.”

이예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채 베니를 따라 다시 걸었다. 

한참을 걸었음에도 베니가 말한 탈출구는 쉬이 나오지 않았다. 

다리가 묵지근하게 아파왔다.  

“우리 맞게 가고 있는 거지?”

점점 길에서 멀어져 알 수 없는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기분에 이예주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맞아. 아버지가 중간 지점에 가장 커다란 나무를 따라 사선으로 계속 걷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어.”

“언제까지?”

“한 30분 정도…….”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커다란 굉음과 함께 갑작스레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 어?”

처음엔 그저 몸이 진동하는 폰처럼 덜덜덜 떨리는 정도였던 진도는 점차 휘청거릴 만큼 커졌다. 

붙잡을 만한 것을 찾았으나 하필 빽빽한 침엽수 지대에서 막 벗어난 허허벌판이었다. 

“으아아악!”

이예주와 베니는 비명을 지르며 속절없이 흔들렸다. 

얼마나 강한지 눈이 두텁게 쌓여있는 땅이 들썩거리는 것이 눈으로 보일만큼 큰 진도의 지진이었다. 

다행이 진동은 얼마 안가 금방 멈췄다. 

“뭐, 뭐야! 뭐야!”

어느새 얼싸안은 두 사람은 진동이 멈추자 서로를 마주 보며 외쳤다. 

지진은 원래 여진이 뒤따른다고 하지 않나. 

이예주는 베니를 꼭 껴안고 또 다시 덮쳐올 진동에 대비했지만 더 이상 땅이 뒤흔들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나, 이제 끝났나봐. 놔, 놔도 돼.”

그녀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베니가 얼싸안은 자세가 민망한 듯 웅얼거렸다. 

이예주는 여전히 혼비백산한 얼굴로 터뜨릴 듯 껴안고 있던 베니를 놓아주었다.

“뭐지? 웬 지진이…… 어디 폭발 한 거 아니야?”

“폭발? 신전에는 그럴만한 곳 없는데.”

베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저 걷던 길을 나섰다. 

이예주는 홀로 제자리에 남은 채 심각하게 방금 전의 진동을 생각했다.

비행선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여준이 말하길 뭐 화학물질이 터져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던가.

“리즈 혼자 있을 텐데…… 다시 가봐야 하는 거 아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이예주는 불현듯 깨달았다. 

비행선에서의 폭발이, 결국 탈출한 히카톤의 짓이었다는 걸.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리족에게 속고 있었던 것이다.

“망할 새끼들…….”

주먹을 움켜쥔 채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 다리족 족장을 향해 이를 뿌드득 갈던 때였다. 

베니가 뿔쑥 그녀를 불렀다. 

“누나! 찾았어!”

베니는 철조망 한 쪽의 얼음이 잔뜩 서린 기다란 풀숲을 들추고 있었다. 

이예주는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오랜 시간동안 눈에 부식된 건지 눈에 파묻혀 있는 철조망 하단의 철사가 끊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작은 작은 틈이 보였다.

베니는 맨손으로 흙을 파내듯 눈을 파헤쳤다. 

눈에 파묻힌 아래쪽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작은 틈에 불과했던 탈출로는 점점 범위가 넓어져 마침내 아이들이 기어나갈 수 있는 개구멍이 되었다.

“다행이다.”

이예주는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구멍이 좀 작았다. 

체구가 작은 리즈는 쉽게 기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베니나 토마스라면 좀 아슬아슬했다. 

그래도 힘껏 몸을 구겨 넣으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구멍을 발견한 두 사람의 얼굴이 상반되었다. 

아버지의 당부만으로 찾은 탈출구를 바라보는 베니는 기쁨보단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다행이야?”

“응? 아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너랑 네 동생이랑 무사히 빠져나갈 개구멍은 있잖아.”

“누나는……!”

베니는 울컥한 얼굴로 몸을 휙 돌려 이예주를 돌아보았다. 

“누난 같이 못가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베니는 남자 아이라고 해도 못 먹어서 왜소한 편이었다. 

반면에 이예주는 성인이었고, 여러 개고생을 하고 다니긴 했지만 람과 만난이레 오래간 굶은 적은 없었다. 

몸을 아무리 구겨도 그녀는 개구멍을 기어 빠져 나갈 수 없었다. 

물론 그들과 함께 탈출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 

정 여의치 않으면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기야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알리자린의 동생을 찾아 낸 후의 이야기였다.

“자식.”

이예주는 비식 웃으며 베니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렸다. 

자신들이 떠나고 신전에 혼자 남을 그녀의 걱정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아이를 보니 코끝이 찡했다. 

그래도 며칠간 붙어 있었다고 정이라도 들어버린 걸까. 

자신은 브레든만 찾아 챙기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은연중에 보여 왔는데도, 이 아이들은 탈출이 아닌 제 신변을 걱정해준다. 

마치 목숨 아까운줄 모르고 힘껏 이예주의 탈출을 도왔던 알리자린처럼.

“바보야.”

이예주는 고개를 저었다. 

“나 생각 할 때야? 아버지 말이랑 리즈만 생각해.”

“누난 왜 자꾸 그 말만 해?"

확실히 이예주는 여러 번 그에게 강조했었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고. 

베니는 그말이 억울한 듯 항의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브레든 찾아 줄 테니까, 같이 나가자, 누나.”

이예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토마스가 리즈한테 했다는 제물 소리도 그렇고. 내가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족장이랑 그 딸년 대화가 좀 이상해.”

“족장님이랑 대사제님이 뭐라고 했는데?”

“끔찍한 말을 했어.”

분명 무슨 어린 것의 눈알이면 사족을 못 쓴다는 소리를 했다. 

이예주는 베니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며 덜컥이는 속을 감췄지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은 토마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토악질이 치미는 무서운 일이었다. 

“당장 오늘 밤에라도 너희 빨리 나가야 할지도 몰라.”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읊조렸다. 

베니는 차마 더 묻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잊혀 졌는지 무너졌는지 하는 거기, 확인 하러 가자.”

이예주는 베니의 머리 위에 놓았던 손을 내려 어깨를 힘 있게 잡았다. 

어렴풋이 알 것 같음에도 기어이 그곳을 확인하러 가는 건,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을 놓을 수 없어서였다.

*      *       *

그들은 다시 원래의 궤도에 올랐다. 

이미 중반까지 온 상태에서 길을 벗어 난 것이라 목적지까지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찾은 무너진 옛 신전의 터는 처음 왔을 때와 같이 순록 몇 마리가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경계하듯 푸르르 투레질을 하는 동물에게 최대한 신경을 끈 채 그들은 길을 꺾었다. 

건물 잔해들과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곳을 힘겹게 지나자 첫날 대충 보고 지나친 무너진 탑이 드러났다.

그 주변에 부러져 죽은 나무들이 마구 늘어져 있어 안 그래도 어두운 분위기의 숲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살벌 하네…….”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 나올 것 같은 탑의 외양에 이예주와 베니는 침을 꿀꺽 삼켰다.

탑의 입구인 듯 불그죽죽하게 녹슨 철문은 다행히 살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문 틈새로 보이는 안이 컴컴해서 선뜻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가, 가보자, 누나.”베니가 먼저 용기를 냈다. 이예주는 망설였다.

“꼬, 꼭 가야 할까?” 

“토마스는 찾아야지.”

“하…….”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굳센 베니의 모습에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자신 못지않은 똥고집이었다.

“그래, 들어가 보자.”

어차피 이예주 또한 브레든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눈족들의 비밀스러운 대장간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 알아둬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그들은 각자의 각오를 안고 주춤주춤 탑의 입구 앞으로 다가갔다. 

끼이이익- 

녹슨 철문이 귀곡성을 내며 힘겹게 열렸다. 

이예주와 베니는 주춤주춤 탑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좁고 어두컴컴했다. 

박살난 탑의 잔해들이 이곳저곳 쌓여 있어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나마 부서진 틈 새로 새어들어 오는 빛이 아니었다면 잘못 밟고 넘어져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이예주는 뾰족하고 위험한 돌덩이들을 피해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편에 계단 형태를 띄는 다 쓰러져가는 층간이 보였다. 

그녀는 그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다가갔다. 

올라서도 우루루 쓰러지는 돌 더미 때문에 얼마 안 되는 높이를 계속 오르던 이예주는 간신히 위층으로 계단 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고작 다섯 칸이 끝이었다. 커다란 바위덩이들이 살벌하게도 무너져 있어 그 위로 더 오를 수 없었다. 

더 오를 수 있는 층이 남아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누나, 여기!”

그때였다. 

이예주와는 달리 작은 체구로 잘도 좁은 내부 구석구석을 기어 다니던 베니가 계단과 정 반대편 쪽에 서서 서둘러 그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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